철 지난 미국 대선을 통해 본 2012년 한국 대선 읽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미국에 와서 필자는 두 번의 대선을 경험하였다. 미국에 오자마자(2004년 가을) 재선을 목표로 하던 공화당의 부시와 민주당의 캐리간의 대결과, 2008년 민주당의 오바마와 공화당의 매캐인 간의 대결이 그것이었다. 미국인들은 우리나라 국민과는 다르게 서로 다른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들에 대해 목에 핏대 올리며 고함치지 않는다. 영리한 것인지 예의바른 것인지, 아니면 누가 되든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경험적 진실에 익숙해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와는 안 맞는 선거문화다. 한가지 비슷한 것을 굳이 고르라면 전통적 민주당 텃밭은 뉴욕, 시카고, 샌프란 등 주로 도시주변이고, 공화당은 남부 바이블벨트로 상징되는 시골들이라는 점이 한국과 그나마 비슷하다고 할까.

이번 달 웹진과 다음 달 웹진에 철 지난 미국 대선을 통해 본 2012년 한국 대선 읽기라는 제목으로 2회에 걸쳐 2012년 대선에 대한 단상을 게재한다. 물론, 본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체감하는 현실인식과는 다를 수도 있고, 그래서 온도차가 있으리라는 예상도 하지만, 외부자(물리적으로)의 시선에서 대상을 향한 다른 안목을 제공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글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지난 연말에 하늘나라로 돌아간 김근태 전 의원의 마지막 메시지, “2012년을 점령하라!”는 유언에 힘입은 바 크다. 십 년도 훨씬 전에 그의 정치적 비젼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모임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지?’ 라는 생각에서부터 저런 정치가가 대한민국에 10명만 있어도 대한민국은 바뀌겠다!’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고인이었지만, 내가 그 모임에서 김근태 의원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의원님, 정치하지 마세요!”였다. 대한민국 국회와 인간 김근태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듣고 허허웃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참 선하고 강직하고 논리적이었던 정치가 김근태가 그의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한 마리 학 같았던 그가 숨을 거두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2004년 미국 대선, 그 집단적 타락의 공유

 

필자가 겪었던 미국에서의 두 번의 대선은 선거 기간뿐 아니라, 선거가 끝난 후에도 많은 이슈들을 생산해냈었다. 2004년 민주당 캐리의 패배는 단순히 민주당과 전통적 민주당 지지세력의 패배라고 하기에는 할 말이 많았다. (표면상으로)지도자의 대의명분, 도덕성, 청렴성, 순혈주의(?)를 미덕으로 삼았던 미국 정치문화가 시장 개싸움으로 전락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제거라는 명분을 걸고 시작된 부시의 대이라크 전쟁은 결국 미국의 경제적 손익계산에 따른 선택이었고, 그 거짓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있었던 2004년 대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민은 (국가적)정의와 (국가적)이익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하였다. 모두가 그 전쟁의 공범으로 연루된 것이다. 백안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세계평화와 민주주의 수호, 인권증진을 위해 미국은 언제나 노력하고 그것을 위해 숭고한 피를 흘리고 있다…….…(블라블라)……...” 다 뻥이었다 !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백악관 대변인이 말했던, 오로지 미국은 세계평화만을 생각하고 수호한다는 지구방위대식 홍보물과 같은 발언에 전적으로 신뢰는 안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징계의 기표로써 미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니, ‘미국=세계평화라는 상징계의 기표는 미국 보다는 오히려 한국 같은 나라들에서 더 심하고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지구상에서 미국에게 영혼까지 팔아먹은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남한이라 말해야 되지 않을까? 이번에 타결된 굴욕적인 한미FTA체결은 말할것도 없고, 재향군인회 혹은 한기총에서 주관하는 무슨 집회나 구국기도회에서 어김없이 휘날리는 성조기를 볼 때마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정점에서 성령, 혹은 미국의 이름으로 불태워지는 김일성, 김정일의 인형을 볼 때마다 무슨 원시부족에서 벌이는 토템향연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런데 명심하시라. 상징계속 미국과 실재의 미국은 다른 미국이고,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한 위대한 예술가가 조각한 성모 마리아의 순결한 동상이 바티칸에서 공수되어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여는 첫날,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조각의 감상을 위해 몰려 들었다. 작품은 지금 커튼 뒤에 가려져 있고, 유명한 텔렌트 출신의 문화부장관, 부자동네 그 지역 국회의원, 무슨 미술관장, 구청장 등등의 VIP들이 속속 근엄하지만 세련되게 등장하여 손에 쥐고 있던 가위로 동상을 가리고 있던 커튼과 연결된 줄을 자르는 순간, 우리 앞에 드러난 그 마리아는 우리가 예상했던 순결하고 수줍어하는 마리아가 아니었다. 옆 집 정부를 유혹해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있는 마리아였던 것이다. 바로 그 마리아가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순결한 마리아의 진짜 모습이라면?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고, 설마 설마 했던 그 실재(The Real)가 확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2004년 대선이 그런 성격을 띠었다. 자신들의 치부와 위선과 진심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그것을 모두 봐 버렸으며, 최종적으로 그들은 그것을 승인하였다. 아마도 2004년 대선은 미국사회에서 있었던 선거에 의한 최초의 전체적, 집단적 타락체험이 아닐까 싶다. ‘, 무엇 때문에 미국민들은 그것을 용인했을까?’ 에 대한 분석이 선거 후에 난무했는데, 지금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경제논리와 국가권력에 대한 권위를 보호해야 한다는 애국심(?) 뭐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선거 후 전통적 민주당 텃밭인 이곳 시카고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가운데 빠져 들어 한참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MB, 부디 변치 마시라!

 

이 글을 읽는 한국에 있는 독자들은 MB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에 대해 뭐라 하고 싶은 말도 없고, 아무런 궁금증도 없으며,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나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을 것 같다. 팃낙한 스님이 그랬던가? ‘어떤 대상에 에너지를 주지 않고 바라만보고 있으면 그것은 점점 스스로 죽어서 사라진다고 말이다. 그래도 팃낙한 스님은 중생에 대한 자비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시선을 주는 것 까지는 포기하지 않으셨나 보다. 하지만 나는 MB를 향한 시선조차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 눈길조차 아깝다. 이것이 성숙한 스님과 아직 설익은 목사와의 차이라고 비난한다면 할말 없지만

 

2007년 겨울,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웬만한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 이 정권의 말로가 지금처럼 될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상대로 이명박은 4년 내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지 않았고, 자신의 철학을 거역하지 않았다. 이점은 전직 노무현 대통령보다 낫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이 걸어갔던 정치, 문화적 행보와 경제, 외교분야의 행보는 사실 엇박자였다. 이러한 자기 분열이 그를 항상 괴롭혔고, 인간 노무현은 그것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보통의 정치인들은 그러한 자기분열(혹은 배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정치인으로서 마땅한 통과해야 할 의례로 여기는데 반해, 인간 노무현은 다른 정치꾼들처럼 그다지 뻔뻔하지도 파렴치하지도 못했다. 그런 점에서 바보 노무현!’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다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미일관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놓친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보다 낫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소통을 하라고 타일렀지만 MB DNA 속에는 소통이란 굴복이고 굴욕이어서 더 강한 어조로 자신의 진정성을 설파했야 했으며, 더 강력하게 모든 사안을 밀어부쳐야만 했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같은 신화시대에 등장했던 봉건영주들만큼 근성있는 지도자의 면모를 드러내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재임기간 계속되는 악재와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된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냉소적인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심지를 굽히지 않고 꿋꿋하고 씩씩하게  강행했다는 점에서 그의 고집 하나만은 인정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의 권력의지와 통치철학은 정치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부정적 의미에서 타산지석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점이다. 혹시, 이명박 장로에게 성령이 임해서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전향했던 것처럼 눈에 붙어있었던 무엇인가가 떨어져 개과천선하면 어떡하나? 이 대목에서 그가 회심을 하면 정말 코메디인데… MB의 시대정신은 이대로 쭉 가서 자신의 진정성을 부여잡고 장렬히 전사해야 한다. 그래야 이 대하드라마는 멋있고 숭고하게 끝난다. 그러니 MB, 부디 계속 버티며 변치 마시라!

하지만, 이 글의 관심사는 MB에 대한 성토도, MB 정권의 말로에 대한 레퀴엠도 아니다. 4년 전 우리는 무엇에 홀려 이명박을 뽑았고, 이제 우리는 다시 누구를 찍어야 할 것인가? 누구를 선택할 지를 논하는 것은 대선 출마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좀 오바인가? 하지만, 4년 전으로 돌아가서 이명박에게 몰표를 선사한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 대해서는 한번쯤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한국사회의 자화상

 

1980년 이후 한국 현대사를 나누는 굵직했던 사건을 꼽자면 80년 광주, 87 6월 항쟁, 그리고 97 IMF가 아닐까 싶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를 상당부분 해소시켰고, 대중들로 하여금 20세기 한국땅에서 벌어졌던 (군사독재로 인한) 야만과 자기혐오의 원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제 잔치는 끝났고, 우리를 짓눌렀던 액운은 10년 동안 계속된 푸닥거리로 어느 정도 풀렸다. 이 말은 앞으로는 옛날 80년대식 운동 경력 내지 무협지 같은 무용담을 이야기 하면서 대중들을 혹하게 했던 약발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고, 투쟁의 경력은 더 이상의 자랑거리도, 더 이상의 감동의 요소도 아니라는 말이다. 한번은 통했는지 모르지만 두 번은 다시 안 통한다. 2007년 대선 당시 분명 대중은 가열찬 의지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자칭 투사들의 몰이배식 말투와 억양에 피곤해 있었다. 이것은 그 무렵 휘몰아친 다양한 위기 담론의 발생과도 무관치 않다. 인문학의 위기, 문학의 위기, 그리고 신학의 위기……. 모든 위기담론의 근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상실된 시대의 고민과 혁명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더 이상 무엇을 잉태하지도 못하는 불임의 시대에 대한 아픔이 깊게 베어있다. 이 모든 현상의 원인과 전제가 되었던 사건이 바로 IMF이다. 왜냐하면, IMF이후 우리 삶의 지평이 그동안 우리를 지탱했던 윤리의 문제에서 앞으로 우리를 위협할 생존의 문제로 그 관심사가 180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윤리, 민주주의, 자유, 정의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의 우선 순위가 아니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대화석상에서 이런 주제를 꺼내면 우리들은 지루해 하거나, 혹은 무슨 중세적, 시대착오적 발상이냐며 마음속으로 무시하며 그 질문들을 폐기한다.

 

실제로IMF 이후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재편되었다. 비교적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라고 믿었던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정부는 공교롭게도 IMF가 터진 97년 겨울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권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들의 예상보다 훨씬 충실하고, 착실하게, 그리고 단호히 신자유주의 원리를 이 땅에 이식하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이나 조..동에서 말하듯 좌파정권도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도 아니다. 이 표현은 너무나 과장되고 부풀려져 있는 말이다. 물론 이전 정권들과는 다르게 확실히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진전이 있었고, 문화와 사회전반을 향한 열린자세와 남북관계에 대한 전향적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는 그 공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신자유주의를 대하는 자세와 정책에 있어서는 김대중-노무현의 10년은 이명박 정권의 그것과 강도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틀 자체는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시스템을 대하는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의 무력감과 한계는 인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윤리가, 이념이, 그리고 정의가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구나!”를 각인시켜주었던 10년이었고,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그러한 의심과 회의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어준 사건이었다.

이 말은 이명박 정권은 어느 날 뚝딱 만들어진 정권이 아니라는 말이다. MB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졌던 민주정부, 그러나 너무나도 신자유주의에 무력했던 10년 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난 숙주와 같다. 이런 이유에서 일까? MB는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난 미숙아 이기에 앞시대의 지도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 현대 정치사라는 지형에서 볼 때 일종의 변종 바이러스 같은 성격을 지닌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적어도 그 전까지의 정권은 김대중, 노무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김영삼 조차, 그들은 적어도 일정기간 상징적인 자기희생을 통과한 지도자들이었다. 70,8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대중 정치인 김대중과 김영삼,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온몸을 던졌던 노무현! 이렇듯 그 전까지 대중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을 통과의례처럼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명박은 어떤가? 정치적 자산과 자기 희생의 전력이 전무한 MB, 그것도 선거 직전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다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표차로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IMF이후 우리를 압박했던 생존의 문제 10년이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닥치고 탐욕이란 물화(物化)된 시대정신으로 화려하게 만개하는 순간이었다.

 

글의 전반부에서 2004년 미국 대선이 미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비양심과 몰염치를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라고 설명한바 있는데, 2007년 한국 대선도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이제 대통령이 누가 되든 상관없다. “강바닥을 파헤쳐 온 국토가 망가져도, 뉴타운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옥상에서 불타 떨어져도, 내 집값과 내 땅값만 올라가기만 한다면 그가 누가 되든 상관없다. 난 그를 위해 표를 던진다!” 그것이 우리들의 2007년 표심이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죄의식을 다같이 내려놔 버렸고,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 누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세상을 살게 되었다. 이런 야만스런 상황속에서 우리는 이제 총선을, 그리고 대선을 앞두고 있다. , 이제 누구를 찍어야 할까? (다음 호에 계속)  

 

에필로그: 매번 선거때만 되면 우리는 누구를 찍어야 될지?’를 놓고 고민한다. 87 6월 항쟁 후에 있었던 대선 때부터 (양 김이 분열되고 노태우가 당선되었던) 등장한 비판적 지지어쩌구하는 고뇌에(?) 찬 구호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대선까지 소위 양심적 시민들의 표심을 대변하는 슬로건이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어차피 최선이 아니라면 최악을 피하는 선택이 합리적이고 역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현명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라는 발언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표현처럼(그는 맑스의 유령에서 햄릿의 대사를 인용하며 “The time is out of joint”라 말했다), 아니 성경에 적혀있는 구절처럼 그 날과 그때는 점진적 발전과정이 아니라 도적처럼 임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매번 대선 때 마다 살짝 권영길를 찍을까 김대중을 찍을까? 노무현을 찍을까 권영길을 찍을까?를 놓고 고민했지만, 항상 나의 선택은 민노당 후보였다 (정동영이 나왔던 지난 대선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대선 때는 미국에 있었다). 하지만, ‘최선에 대한 믿음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최악은 피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강박이 얼마 전부터 내게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에 너무 오래 있었나? 나이가 들었나? 아니면 이명박에게 너무 질렸거나 or 난 원래 최선에 대한 믿음이 없었거나 혹은 내가 변했거나어쨌든 선거는 사람의 마음을 참 묘하고 드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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