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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조용한 밀월성과 시끄러운 민주주의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2. 6. 2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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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밀월성과 시끄러운 민주주의
- 종교인 과세에 관한 공공성 신학의 두 가지 패러다임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부족동맹체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사울은 최초의 원시국가 형태의 정치권력을 행사한 이로 등장한다. 성서의 스토리에 따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전사한 뒤, 다윗이 새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이 나라는 그의 아들 솔로몬을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 때에 북쪽 부족들의 대대적인 이탈로 인해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이때 분열을 주도한 이가 여로보암이고, 그에 의해 이스라엘국이 창건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다윗의 나라는 정체가 모호하다. 성서 스토리에 나오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소제국 유다가 존재했음을 뒷받침할만한 문헌자료나 고고학자료가 없다. 오히려 소제국으로 부상한 것은 유다가 아니라, 북쪽의 이스라엘국, 특히 오므리 왕조 때이다. 더구나 다윗보다는 한 세기 이상 후대다. 그가 건립한 나라가 있었다 하더라도, 너무 미미해서 성서가 말하듯 팔레스티나의 소제국이 아니라 예루살렘 인근 지역의 작은 도시국가 정도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사울 이후 팔레스티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추측컨대 이스라엘은 사울 이후 꽤 발전한 국가에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외세의 지배 이후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로보암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국이 건국되었다.

그는 여러모로 모세와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다. 압제자의 관리였다가(모세: 파라오의 아들, 여로보암: 부역책임자)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이가 되고, 그 일로 인해 이집트로 망명자가 되었다가 되돌아와서 결국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이가 되었다.

아마도 건국의 시조인 여로보암의 영웅설화가 만들어지면서 전설상의 지도자인 모세 설화를 덧입은 결과겠다. 그럼에도 외세의 압제로 의해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이 결속하여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여로보암의 지도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성서가 그에 대해 악평을 퍼붓는 것은, 그 역사적 스토리를 만들어낸 이들이 유다국의 사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내막은 이러하다. 기원전 586년 이스라엘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히스기야 왕 치하의 유다국에 편입되었다. 왕은 왕국 내에 널려 있는 황무지에 그들을 정착시키고 왕실 사유지로 편입시킴으로써, 그곳에서 산출되는 생산물로 왕실의 부를 크게 늘렸다. 이로 인해 처음으로 유다국은 중앙집권적 국가로서 부상할 수 있었고, 히스기야와 그의 손자 요시아의 왕권 강화에 목적을 둔 정치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때 유다국의 사관들이 왕실의 역사를 만들어냈는데, 여기에서 이스라엘국은 원래 동족으로 다윗-솔로몬의 유다국에 일원이던 북쪽의 부족들이 왕에 반기를 들어 떨어져 나간 나라로 서술된다. 이런 북쪽 부족들의 반란을 선동한 자가 여로보암이다. 그러니 여로보암은 모든 이스라엘국 왕들이 저지른 죄들의 기원이 되는 자이다.

이러한 유다국의 역사 날조는 성서 속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반면 초기부터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최강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였던 이스라엘국은 유다국보다 훨씬 전에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 같고, 왕조 이데올로기를 일찍부터 발전시킨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사관들이 만들어낸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건축물 등의 유적들이 적지 아니 발굴되었고, 이 지역을 침공했던 아시리아제국의 황제가 세운 비문 속에 반영된 역사적 정보들은 이스라엘국이 가히 이 지역 최강국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나라의 건국 시조인 여로보암은 얼마 후 구축된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이자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정복국가로서 소제국이 된 나라의 면모와는 상당히 다른 나라를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는 자신이 2의 모세임을 자임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사관들은 그의 영웅설화를 모세영웅설화와 엇비슷하게 만들어냈다. 그 설화의 뼈대가 성서 속에 반영되었는데, 유다국의 사관들이 이스라엘국의 시조설화를 변형시켜 수용한 결과다. 이 설화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모세처럼 압제당하는 이들을 규합해서 나라를 만들어냈는데, 그 나라는 왕이 함부로 농민을 압제하고 수탈하지 못하는 나라였다는 점이다. 2의 모세라는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사실 모세설화는 이스라엘 부족동맹사회의 얼을 지탱하는 핵심설화다. 많은 제1성서(구약성서) 역사가들은 이 사회가 왕 없는 사회를 추구한 역사적 구성체였음을 주장한다. 물론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운동들과 인물들이 등장했고, 또한 왕 없는 사회를 지켜내기에는 위험스러울 정도의 불평등화와 권력집중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 이상만큼이나 잘 구축되지는 않았지만, 2세기 정도 지속된 비왕권제 사회가 이스라엘 부족동맹체다. 바로 이런 사회의 정신을 담고 있는 설화의 핵심에 모세설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은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시켰으며, 기나긴 유랑을 통해 초과권력에 대한 욕망이 제거된 부족사회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설화에서 모세 자신도 그 새 사회의 시조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일체의 낡은 관습과 기억이 제거된 새로운 사회, 그것이 이스라엘 부족동맹사회의 정신이었다.

모세는 이런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다. 한데 여로보암이 그런 모세를 자임했다. 물론 그는 왕이다. 왕이 될 수 없었고, 왕 없는 사회의 위대한 통치자도 될 수 없는 모세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그는 왕이 되었음에도 모세의 정신을 따라 강제부역을 부과하는 압제자가 아님을 자신의 지지셔력인 농민들에게 천명하였다. 그것이 제2의 모세라는 주장의 골격이다. 그런 주장을 여기서는 그가 실시한 종교개혁에서 살펴보자.

먼저는 그는 왕궁과 국가성소를 분리하였다. 가령 유다국의 예루살렘처럼 왕궁 내에 국가성소를 설치하고, 이스라엘국의 오므리 왕조처럼 왕실요새 속에도 국가성소를 두는 것이 왕정사회의 상례인데 반해, 여로보암은 왕궁 밖에 성소들을 세웠다. 그것도 자기가 성소를 새로 세우고 사제들을 임명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주요 성소들을 존치시키고 그곳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그곳에서 사역을 하도록 허용했다. 특히 베델이나 단 같은 일부 오래된 성소를 특화시켰다(열왕기상12,29). 그런 전통 있는 성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들은 걸핏하면 왕에 반대하고 그런 반대 주장 속으로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다. 그런 성소를 왕은 존치시키며 존중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그리고 사울과 사무엘이 서로 견제하며 공존하듯, 예언자와 사제의 독립을 존중했던 이스라엘 전통이 반영된 국가관이 여로보암에 의해 재천명되었음을 뜻한다.

둘째로, 예루살렘에 야훼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다면, 그는 황소상으로 야훼를 상징하고자 했다(열왕기상12,28). 법궤는 실로 성소 전통의 야훼의 상징이었는데, 이것은 주로 전쟁 때에 이스라엘을 돌봐주는 야훼를 표상하고 있었다. 반면 황소(후에 유다국의 역사가가 황소를 송아지로 묘사하여 이스라엘국의 상징을 폄하했다)는 무한한 힘을 시사하고, 또한 풍요를 나타내기도 하는 상징이다. 이것은 군인보다는 농민이 더 중요한 국가의 근간임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예루살렘의 법궤는 성소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대중과 분리되어 있다면, 황소상은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호세아서에 묘사된 것처럼 대중은 성소에서 황소상에 입을 맞추곤 했다(13,2). 이것을 여로보암의 종교가 대중이 볼 수 있고, 다가가서 입맞춤 할 수 있을 만큼 개방된 종교, 참여의 종교였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여로보암이 개축한 국가성소들에서는 시끄러운 축제가 열렸다. 출애굽기326절에는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판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이 송아지 상을 만들고 흥청대며 뛰놀았다고 묘사되어 있다.(“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이것은 유다국의 사관이 이스라엘국에서 행해졌던 예배를 겨냥해서 비난하는 형식으로 텍스트화되어 성서의 문맥 속에 포함되었다. 십계명판은 법궤 속에 안치된 상징물이다. 즉 그것은 유다국의 야훼를 상징한다. 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송아지상은 이스라엘국의 야훼의 상징물인 황소를 유다국 사관들이 비하해서 묘사한 것이다. 즉 이 구절에는 유다국 사관들이 보는 이스라엘국 제의에 대한 시선이 들어 있다. 이스라엘국의 야훼제의는 황소상을 둘러싸고 대중들이 흥청대며 제사를 드린다. 반면 유다국에서 벱궤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안치되었고, 대사제만이 들어가 의례를 행한다.

이렇게 여로보암의 야훼제의는 사람들이 흥청대며 즐기는 축제였다. 물론 그것은 즐거움만 깃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 여기서는 왕에 반대하는 사제나 예언자들이 대중 앞에서 왕을 비난하며, 반체제의 구호를 외치는 의례가 행해지고 신탁이 설파되는 제의이기도 했다. 여로보암의 개혁이 허용한 것에는 이것도 포함된다. 대중과 사제, 예언자는 왕에 반대할 권리도 있다고.

요약하면 여로보암의 종교개혁은 종교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왕실이 독점할 수 없는 종교, 둘째는 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종교라는 것. 하여 여로보암의 종교는 왕실과 종교엘리트의 밀월성의 종교가 아니라, 대중적 공공성의 종교였다. 왕은 그것은 존중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자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모세의 야훼주의를 계승하고자 했다. 물론 그러한 종교제도는 점차 사라지고, 이스라엘에도 왕실이 종교엘리트에게 종교자원의 독점을 허용해주고, 종교엘리트가 왕실에 대중의 지지를 보장해주는 밀월성의 종교제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아합 왕이 이세벨을 통해 페니키아의 바알주의를 도입하려 했던 것도 여로보암 식의 야훼주의가 아니라, 통치자에게 초과권력을 보장해주는 페니키아식 바알주의, 그런 바알의 내용을 한 야훼주의로의 개혁을 위함이었다. 해서 그는 지방 농민이었던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로보암의 꿈은 그 나라의 왕위를 계승했던 후계자들에게서 전도되어 버렸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실험은 밀월성의 종교를 비판하고 대중의 참여를 주장하는 대중예언자의 운동으로 역사 속에서 환생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날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논하는 현대신학에서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최근 우리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필요한 하나의 사건에 직면했다. 과거 군부독재 시대에는 정부에 의한 시민권과 인권의 유린이 국가와 종교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부추겼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종교기관과 종교인 과세 문제가 신학적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주요한 사건적 배후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이 문제가 처음 붉어진 것은 1990년대 초, 토지공개념의 입법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입법 등과 관련이 있다. 법률적 근거에 기초하지 않고 비과세 특혜를 누리고 있던 종교인과 종교기관에 대한 과세 문제가 제기되었고, 조세 정의 차원에서 종교계가 누리고 있는 특혜들의 철회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거세진 것이다. 이에 종교계, 특히 개신교와 불교계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조세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개혁 입법들이 철회되면서 이 논쟁은 일단락되었고, 종교인과 종교기관에 대한 과세 문제는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이 조세 분쟁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기독교계 내에서 일부 시민단체들의 주도로 투명성운동이 일어났다. 주로 자발적 납세와 재정공개 형식으로 진행된 이 운동은 민주 개혁적 입법들이 철회되고 사회적 압박이 거의 사라진 1990년대 말의 담론지형에서도 문제제기를 계속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돋보인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무관심으로 그 영향력은 거의 없었고, 신학자들의 무관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의 또한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사회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다양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지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화 이전 시대에는 국가에 의한 인권과 시민권 유린이 너무나 폭압적이었기에 이에 대한 일부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저항의 기록들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주요한 소재로서 충분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민주화운동 전력만으로 교회의 공공성이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충분한 의의를 논하기에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불법, 비법적 조세 혜택은 조세 정의에 위배되는 현상, 곧 반민주적 현상임이 명백했기에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이 새로운 논점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의심받는 사회적 공공성을 회복하고, 국가와의 관계에서 교회와 기독교인의 의미를 재논의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제였다. 그럼에도 기독교 내의 투명성운동가들의 활동은 메아리 없는 고독한 외침 같았다.

2천 년대 들어서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혐오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민주화 시대의 개혁 기조를 몸에 체화하지 못하고, 과거의 불법, 비법적 특혜 관행을 수호하는 데 급급했던 기독교 엘리트 집단의 경제범죄, 변칙 세습을 통한 종교재산의 독점화, 일부 특권적 목사들의 사치생활이 세간에 회자되면서, 기독교권 외부의 시민사회단체들과 언론들, 그리고 비판적 담론을 개진하였던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들의 폭로와 비판이 점점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이제 개신교는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평가는커녕 공공의 적으로 표상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개신교 목회자들의 자발적 과세 현상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또한 이 문제를 계속 펼쳐왔던 복음주의계열의 투명성 운동기구들 외에도, 그동안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기독교 단체들 또한 이 문제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의 회복에 주목하면서 종교인 과세 문제를 공론화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이에 과세에 관한 공청회를 열고, 각 교단들의 협력을 요청하며, 특정 교단에 편중되지 않고 교단별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종교인 과세에 호의적인 목회자들을 규합하여 목회자 과세 운동을 벌이고자 시도 중에 있다. 이와 같이 좀 뒤늦었지만 기독교권 내부의 개혁의 움직임이 활기를 띠면서 성직자의 소득세 납부 논의가 재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이것은 교회와 국가에 대한 신학적 논점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던 중 4.11총선을 20여일 앞둔 2012319, 박재환 기획재정부 장관이 성직자의 소득세 부과 방침을 밝혔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반발이 예상되는 가운데 문민정부나 참여정부에서 종교인 과세 문제를 제도화하려는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그런데 이제까지 이에 관한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아니 실은 대형교회를 주요 지지세력으로 하고 있는 MB정부가 집권 말기에 갑자기 과세 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뜻밖의 상황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변화의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MB 정부에 대한 국민적 비판기조가 널리 확산되고 있던 상황에서 치룬, 쉽지 않은 선거 국면에서 이제까지 정부의 든든한 후견세력이던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정부를 비판하면서 독자정당을 추진하자, 정부는 교회를 압박하고 표의 이탈을 막으려 했던 것이겠다. 이러한 압박 카드가 이번 선거에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것은 정부가 종교인 과세 문제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안팎의 시민단체나 신학자들이 조세 정의의 관점이나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을 진작시키기 위해 이 문제를 제기했다면, MB 정부는 전혀 다른 관심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간략히 정리하면 이것은 종교에 대한 국가의 관리 전략인 것이다.

사실 소득세는 종교인 과세 논의에서 가장 쉽고 미미한 문제다. 세수 총액도 그다지 많지 않고, 성직자들도 실질소득에서 신고소득이 차지하는 비율 또한 그리 많지 않기에 부담이 덜하다. 개신교의 경우 미자립교회의 비율은 전체 교회의 40~50%에 달한다. 그런데 가장 크고 부유한 개신교 교파인 예장통합의 경우 미자립교회는 국가가 정하고 있는 최저생계비 기준보다 20%나 낮은 수준의 경상수입 이하의 교회를 말한다. 경상수입이 지출되는 주요 항목에는 인건비만이 아니라 장소 임대비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비자립교회의 경우 목회자의 수입은 국가가 정한 최저생계비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인 것이다. 개신교 다른 교파의 사정이 그보다 더 나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들은 당연히 비과세대상이다. 필경 개신교 성직자의 비과세대상자 비율은 50~60% 이상일 것이다.

그리고 과세대상인 목회자의 경우, 도서비 등, 일련의 목회비의 비중이 명목상의 소득금액보다 훨씬 많은 경향이 있고, 그 외에 심방비 같은 일종의 촌지나, 결혼식과 장례식 등으로 인한 비공식적 목회수입이 상당수준에 이른다. 그리고 교회가 클수록, 교인들이 부유할수록 이런 소득의 비중은 높아진다. 물론 이런 사정은 천주교의 신부나 불교의 승려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고소득 성직자의 경우 신고소득과 실질소득 간의 차이가 매우 클 것이므로, 신고소득에 대한 소득세 부과가 조세저항을 야기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닌 것이다.

요컨대 종교인 과세 문제에 가장 날선 반응을 해왔던 개신교의 경우 그다지 반발요인이 강하지 않다. 다분히 그것은 관행으로 인한 습관의 선호 문제이며, 또 자존심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종교인 소득세 부과는 큰 물의를 일으킬 사안이 못된다.

하지만 과거 문민정부처럼 잠시나마 국가가 재산세를 향한 날을 세울 때는 종교권력과 국가권력 사이에는 전면전에 가까운 사생결단의 쟁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개신교의 경우, 과세 없이 처리되어 온 부동산 운용은 예산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지난 총선에서 기독교자유민주당이 교회의 은행대출 금리를 2.0%로 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 걸은 것은 교회들이 심각한 부채로 시달리고 있다는 반증이며, 그 주된 요인은 부동산 운용으로 인한 것이다. 요컨대 부동산 운용으로 인한 조세 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작은 교회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공간을 확장하고, 예배공간뿐 아니라 다양한 목적의 시설들을 갖추면서 성장한 교회의 경우, 종교시설과 비종교시설의 구분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부동산에 대한 과세가 시행될 경우 그 모호함으로 인한 과세에 대한 저항 명분은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다. 따라서 부동산에 대한 과세는 심각한 조세저항이 일어날 우려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최근 종교기관과 종교인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확대되고 있고 비과세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가 매우 널리 확산되고 있는 추세는 교회에게 있어 심각한 부담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종교인 과세 방침을 표명하였으니, 교회로서는 딱히 이견을 제시할 사정에 있지 못하다. 하여 이슬람 채권법인 스쿠크법 등 사소한 데까지 교회가 국가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했던 것과는 달리, 종교인 과세에 관한 정부 발표에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할 것이다.

만약 서투른 반발로 문제가 확대되어, 소득세가 아닌 재산세 문제로 국가와 충돌하게 된다면, 교회나 국가 양자는 서로 심각한 부담을 져야할 것이다. 그러니 정부의 소득세 부과 방침은 최근 현 정부에 대해 다소 삐딱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정부가 꺼내든 작은 채찍이고, 또한 전면전으로까지 확전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일 것이다. 또 교회 지도자들은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승복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추론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조용한 밀월성이다.

한데 시민사회와 종교계 내부의 자기개혁운동 집단은 좀더 시끄럽게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고, 정치권력과 종교권력 사이의 밀월성을 공개적으로 경계하고자 함이겠다. 또한 시끄럽게 논의하는 중에 문제는 복잡해지고, 생각은 급진적인 데까지 다양하게 펼쳐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시끄럽게 논의하는 중에 대중은 종교인 과세를 둘러싼 국가와 종교 엘리트간의 담합을 견제하는 참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늘 시끄럽게 얻어지게 된다.

정리해보자. 종교인과 종교기관에 대한 과세 문제는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조세 정의에 관한 요청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시대의 교회와 기독교인의 사회적 공공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민주화 이전 시대에는 국가가 불의를 상징적으로 대표했다면, 교회는 정의의 상징적 표상이었다. 하지만 이때 인권과 시민권을 유린하는 국가에 대한 저항을 실행에 옮겼던 교회나 기독교인은 극소수였다. 그런 소수파의 저항이 기독교를 과대표함으로써 교회는 정의의 주체처럼 인식되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왜곡할 수 있다. 즉 이러한 공공성에 관한 신학적 논의는 국가에 대한 공공성 담론이 교회의 공공성 논의를 압도한다. 하여 교회의 자기 성찰에 대한 신학담론은 과소화되고, 사회 변혁에 관한 신학담론이 과대화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한데 민주화 이후에 오면, 교회와 기독교인은 정의의 반대편에 있다. 조세 정의의 관점에서 사회적 공공성의 요청은 국가가 교회에게 제기하고 있다. 정의와 불의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주체가 역전되었다. 이러한 상징적 과대표의 역전 현상 역시 공공성에 대한 신학적 논점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즉 국가에 대한 공공성 논의가 신학적으로 후퇴하고, 교회의 공공성에 관한 논의가 무성하게 되는 현상이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교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의 가능성을 수반한다.

그런데 최근 MB 정부의 박재환 기획재정부 장관이 종교인 과세 논의를 제기하면서 이 문제의 논점이 복잡해졌다. 이 발표를 보면서 국가가 조세정의를 과대표하면서 교회에게 공공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믿는 이는 별로 없다. 오히려 국가는 조세정의를 명분삼아 교회를 관리하고자 하며, 교회는 국가와 무언의 밀실협의에 들어서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가와 종교 간의 조용한 밀월성의 관계가 조세 정의의 외피를 입고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두 국가에서 모색되었던 두 개의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논점을 제기하고자 했다. 유다국의 다윗의 길과 이스라엘국의 여보로암의 길이 그것이다. 전자는 밀실의 종교다. 여기서는 국가와 종교가 담론의 주체이고, 대중은 그러한 관계에 승복해야 하는 수동적 주체다. 반면 후자는 시끄러운 종교다. 왕실과 성소가 분리되었고, 성소에서는 시끄러운 제의가 공개적으로 진행되면서 국가에 열렬히 환호하거나 혹은 국가를 저주하는 대중의 여론이 소통된다. 국가는 더 이상 밀실에서 종교를 대할 수 없고, 성소에서 벌어지는 시끄러운 대중의 여론을 경청하고 대중과 협상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행한다.

박재환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 이후, 한국신학계는 성직자의 조세문제에 대해 조용한 밀월성의 정교관계의 위험성에 직면했다. 그리고 시끄러운 긴장과 갈등, 타협의 정교관계를 광장에서 모색하는 것의 중요성에 직면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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