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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죽음의 굿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2. 12. 17.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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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굿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의인이 망해도 그것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도 그 뜻을 깨닫는 자가 없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 「이사야서」 57,1

 

제국의 경제가, 그 시스템이 온 이스라엘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황제가 재가한 국제적 거상(巨商)들이 이 지역에도 들어왔고, 대지주들은 그와 거래하기 위해 생산물의 가격 낮추기 경쟁에 매진했습니다. 일단 그와 거래관계가 트이게 되면 국제무역의 지역 독점권을 얻게 되었지요. 또한 세금대납업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지위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그러다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지주들이 몰락하는 경우도 빈번했고, 무엇보다도 소농들의 몰락이 속출했습니다. 몰락한 소농들은 대지주의 소작으로 전락하거나 도시로 몰려들어 생존을 위해 뭐든 해야 하는 하급노동자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또 일부는, 그 땅에서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었기에, 막막한 심정으로 해외 이민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여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된 것입니다.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에서 말입니다.

한편 이 시기, 국제경제의 활성화로 인한 다른 변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래장부, 거래계약서, 물품관리장부 등, 기록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 상거래가 활발해지는 만큼 분쟁도 많아져 소송의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이것 역시 기록의 중요성을 강화시키는 이유가 되었지요. 이에 이집트산 파피루스가 대량 수입되어, 기록을 위한 비용은 크게 감소하게 됩니다. 또 당국은 세수(稅收)가 늘면서, 통치를 위한 기록의 필요도 높아졌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당국이 주도하는 종교의문서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이른바 ‘성서’ 문서들이 편찬되거나 저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작된 성서 문서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책들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오늘 읽은 성서본문이 포함된 한 문서입니다. 현대의 학자들이 ‘제3이사야서’라고 부르는 문서입니다. 「이사야서」의 세 번째 파트(56~66장)에 수록되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시기의 문서 작업이 전례 없이 활기를 띠게 되었지만, 그래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글을 쓸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한데 놀랍게도 ‘제3이사야서’라는 저자미상의 이 문서는 하층민의 관점을 담고 있는 책인데다, 그 기조 또한 민중적이기에 우리는 이 책에 대해 주목하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오늘 읽은 본문이 포함된 텍스트인 57장 1~13절은 당시의 민중 현실과 저항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합니다.

‘의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데 그 죽음을 사람들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1절). 도대체 ‘의인들’이란 누구일까요? 또 왜 그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그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5~9절에서 우리는 의인의 죽음을 모른 체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람을 피우는 자이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자입니다. 여기서 바람을 피우는 것은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인신제사를 말합니다. 원래 아하스 왕이 시리아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이끄는 연합군이 침공하여 국가가 존폐 위기에 놓였을 때, 자기 아들을 야훼께 바치는 제사를 말하는데(「열왕기하」 16,3. 기원전 734~732년), 한 세기 쯤 후인 요시아 왕이 개혁 드라이브를 본격화하던 때(기원전 622년경)에 이 인신제사는 요단강 건너 지역 암몬족의 신인 몰렉에 대한 제사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하스로 표상되는 불의한 통치자가 바로 의인의 죽음을 모른 체 한 자로 지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데 기원전 3세기, 제3이사야서의 시기에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한데 그 시절 이스라엘 사회를 다스리던 유력한 가문이 있었는데 토비야 집안입니다. 한데 이 사람은 암몬족 토호였고, 제국 왕제로부터 이 지역의 총독으로 위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필경 토비야 집안이 죽음의 방관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죽어가는 의인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9~12절에서 우리는 바로 그 정보를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의 방조자들은 “섬길 신들을 찾아 먼 나라에 사신을 보”냈다(9절)고 합니다. 아하스 왕은 르신-베가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멀리 아시리아 황제에게 원병을 요청했었지요. 한데 이 애기를 전하고 있는 제3이사야서의 시대에 아시리아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 시기에 아시리아 황제에 대응하는 이는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황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스의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 오는 아시라아 황제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오스 황제의 대리인, 곧 황제가 재가한 거상의 거대한 행렬과 비견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거상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들, 대지주들의 후견인, 곧 그들의 구원자입니다. 한데 바로 이런 네트워크가 대변하는 제국의 경제 시스템은 소농의 몰락을 초래했고, 소작농의 심화된 혹독한 노동 현상을 야기했습니다. 요컨대 제국의 거상이 대변하는 질서는 이스라엘의 통치자에게는 구원을 의미했지만, 민중에게는 고통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1절의 본문을 주목해 봅시다. “의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실상은 재앙을 피하여 가는 것이다.” 민중의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지, 그들이 죽는 것은 도리어 재앙 피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요컨대 이 텍스트에는 제국의 경제 질서가 민중의 죽음을 부르고 있다는 예언자의 고발이 담겨 있습니다. 한데 그 제국적 체제를 불러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토비아 가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입니다. 그들이 제국의 경제 질서를 불러들임으로써 자기들의 권력과 돈을 쌓아가고 있을 때 민중은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만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선 정국이 이제 막바지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맘 땐 네거티브 전략이 불꽃을 일으킵니다. 그러는 중에 박근혜 씨가 연루된 스캔들이 여러 개 폭로되었는데, ‘억대 굿판’ 스캔들도 그 하나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1월 14일, 사단법인 박정희 생가보존회가 구미의 박정희 생가에서 탄신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 행사에는 경북도지사, 구미시장, 지역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들 주요 인사들이 한마디씩 소원과 축하의 발언을 했습니다. 굿판이니 그 말들 속에 박정희 신격화 발언이 포함되었음은 충분히 예측할 만 합니다. 또 대선이 임박했으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를 소망하는 말이 들어있으리라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겠지요. 물론 모두 의전용 발언입니다.

한데 굿을 했다느니 신격화 발언이 있었다느니 하는 건, 근본주의 성향의 유통성 없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민감한 사안일 것입니다. 해서 새누리당은 극도의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최초 유포자를 고발하고, 네거티브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때 박근혜의 표정이 얼마나 살기등등한지 그이가 대통령이 되면 무슨 사단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지요.

이 스캔들을 둘러싼 공방이야 두 정당과 열혈 지지자들이 할 일일 테고, 나는 이에 대해 좀 다른 점에서 유감을 표하고자 합니다. 나의 관심은 이 굿에 참여한 대중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년 박정희를 기리면서 제단 앞에 세워진 사진을 향해 절을 하고 소원을 빕니다. 그들은 필경 세상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면서 얼굴에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상받을 만한 역량이 그들에겐 없습니다. 해서 종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나 성당, 사찰 등에서도 그들의 상처는 좀처럼 보듬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종교들이 지배층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들은 굿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상처는 상하로 권력이 나뉜 사회의 아랫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일반적인 상처이겠지요. 특히 한국 근대의 폭력성이 주된 원인이 된 상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혹독한 현실이 가장 깊은 상처의 흔적을 새겨놓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굿판을 찾아왔습니다. 한데 그 굿에서 신격화된 이의 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국제조약인 한․미 FTA를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굿은 자신들에게는 구원을 선사하는 굿일 테지만, 민중에게는 죽음의 굿, 그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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