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은 광인[각주:1]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귀신 들린 사람 곧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 「마가복음」 5장 15절 中 

 

오늘의 본문(막5:1~20)은 ‘거라사 광인’ 일화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서들에 소개된 예수의 이적기사 중 단일한 사건이 이 본문처럼 길게 서술된 다른 예는 없습니다. 그런데 서술 분량이 많다고 해서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 설명이 충분히 돼 있는 본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량이 많은 만큼 의문도 많아지고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 의문들 중에서 저는 성서기자가 15절에서 전하는 광인의 최종상태, 즉 “제정신이 든” 상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집중해 오늘의 이야기를 펼쳐볼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 일화를 군대 귀신이 들려 광인이 됐던 한 남성이 예수의 축귀를 통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됐다는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그 과정에서 군대 귀신이 옮아 붙은 2천 마리의 돼지 떼가 갈릴리 호수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놀라운 이야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과 관련된 설교들을 찾아보면, 주로 ‘끔찍한 상태에 있던 광인이 예수를 만나 삶이 바뀌었다’, ‘마을사람들은 돼지라는 재산을 잃은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예수(영생)를 거절했다’, ‘거라사 광인인 단순히 정신병자가 아니라 귀신 들린 것이다. 악마는 실재한다’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일반적 이해방식들은,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광인의 변화, 즉 “아무도 휘어잡을 수 없는” 광인의 상태(4절)에서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든” 상태(15절)로 변화한 것에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으며, 때문에 이 일화가 우리 삶의 현장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해석될 가능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 해석은 성서기자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기자는 이 일화 속에서 주요 인물들의 대립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주제의식이라는 것은, 예수가 악마까지 다스리는 권능자라는 것과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대립은 예수와 광인, 다음 단계에서는 예수와 마을사람들의 대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3~5절을 통해 예수와 광인의 대립 전에 광인과 마을사람들의 대립이 먼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서기자가 광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이 부분에서 마을사람들의 시점만을 대변하는 편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서기자는 광인을 가리켜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휘어잡다는 표현에 대응하는 헬라어는 ‘다마조(δαμάζω)’인데 의미는 ‘통제하다, 길들이다’에 가깝습니다. 바꿔 말하면, 마을사람들은,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가축을 결박하듯이 그를 묶어두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광인’이나 ‘귀신들린 사람’과 같은 호칭은 모두 스스로 자신에게 붙인 이름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가 그 세계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대상을 언어화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세계는 그를 광인이라 불렀고 그를 가축처럼 결박해 길들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그를 부르는 이름 속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이미 그에 대한 평가절하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일반적인 해석들에서도 이러한 평가절하는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부순 그의 행동은, 세계가 자신에게 행하는 길들이기 시도와 평가절하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물론 이때 저항이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치적 대의를 따르는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저항자의 ‘자의식’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억측이기만 하지 않은 것은, 고대인들이 생각한 ‘귀신들린 사람’은 현대인들이라면 서로 다른 범주라고 생각할 것들을 모두 지칭하는 대상이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아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정신병과 (그 사회의 통념과 상식을 거스른다는 의미에서의) 반사회적 행동을 구분하는 세밀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귀신들린 사람의 행동 범주 안에는 정신병 증상과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행동이 구분되지 않고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본문을 다시 보면, 거라사 광인은 단순히 귀신의 조종을 받는 ‘사탄의 인형’인 것이 아니라, 그를 휘어잡아 길들이고자 하는 주변 세계에 대항해 사투를 벌이며 탈주를 꿈꿨던 인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거라사 광인은 자신의 이상행동들, 세계화 불화하는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가 예수를 만난 후 “제 정신이 들었다”(15절)고 기술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갖는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일축해버립니다. 그저 이전의 행동은 미친 짓들에 불과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인을 바라보고 통제하고자 하는 이들의 시각이지 광인 자신의 시각은 아닙니다. 이처럼 성서가 그를 묘사할 때 사용한 ‘편파적’ 언어 때문에 우리는 광인의 행동이나 말을 충분히 공감하거나 이해하기보다는 우선 대상화하고 표면적으로만 바라볼 위험이 큽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표현의 의미는 마을사람들이 시도했던 ‘길들이기’와 무엇이 다른지(혹은 같은지) 묻지 않고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인을 길들이려는 마을사람들의 태도나 그 태도에 동조하는 성서기자의 편파적 시각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광인의 눈으로 본 세계는 어땠을지 묻는 것이 그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겪은 광인은 어떤 자기이해를 가지게 됐을지 물어야 성서가 말하는 “제정신이 든” 상태란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마가복음의 ‘거라사의 광인’ 에피소드(5:1~20)와 루쉰의 「광인일기」라는 소설의 교차읽기를 통해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중국의 작가 루쉰은 1918년 5월 「광인일기」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합니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이 쓴 동명의 소설에서 제목, 주인공의 수기라는 형식, 그리고 그 수기를 쓴 주인공이 ‘광인’이었다는 설정 등 여러 문학적 장치를 빌려온 루쉰은 이 소설을 통해 중국 신문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 뭔가 껄끄러운 느낌을 줍니다. 자신의 일기장 표지에 ‘미친놈의 일기’라고 제목을 적는 사람을 보는 게 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내밀한 자기고백을 담는 기록형식인 일기 앞에 ‘광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설의 서장에서 광인일기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은 서술자(광인의 중학교 시절 친구)는 “책명은 본인이 완쾌된 후에 붙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기를 쓴 사람과 일기의 제목을 붙인 사람은 동일인물입니다. 그러나 일기를 쓴 것과 일기의 제목을 붙인 것 사이에는 단순히 시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존재합니다. 즉, 일기의 제목을 붙일 당시의 주인공이 스스로 과거의 자신을 광인이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쾌된” 현재의 주인공은 자신을 미치광이 취급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수용해 과거의 자신을 바라봅니다.
때문에 광인일기라는 제목은 주인공이 주변 세계와의 갈등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 운명임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연하면, 마을사람들과 자신의 가족들, 나아가 중화 문명 속에서 4천년 이상 이어져온 야만(식인)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주인공은 더 이상 주변 세계와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근거로 사람들을 계몽하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식인풍습’을 혁파하려는 그의 목소리는 주변사람들에게는 광인의 헛소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계를 뒤집어엎을 힘이 없던 주인공은 방에 감금당한 채 자신도 사람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않은 아이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다짐으로 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자신의 소신과 다짐대로 산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순응해 자신의 과거를 ‘광인’의 상태로 규정하고 관직 후보가 돼 마을을 떠났습니다. 주인공과 주변 세계의 갈등상황에서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주변 세계가 붙인 꼬리표인 광인이라는 호칭을 주인공이 스스로 수용한다는 것은 자아와 세계의 갈등에서 자아의 패배, 세계질서의 일방적 수용을 의미합니다. 또한 관직 후보가 됐다는 것은 자신이 식인의 체제라고 규정하던 기존 질서에 편입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완쾌됐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광인’에서 ‘식인’으로 바뀐 것을 뜻할 뿐입니다.
다시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오늘의 본문 역시 광인일기의 내용과 유사하게 읽힐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자신을 식인의 문명과 맞서 싸우는 계몽가로 생각할 때 그는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피해망상증을 앓는 광인에 불과합니다. 거라사 광인도 (그것이 망상에 근거한 것일지언정) 자신을 “군대”라고 정의하는 명확한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한 군대란, ‘레기온(λεγιών)’ 즉 로마의 군단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6000명의 거대한 군단을 이끄는 장군으로 여기고 세상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을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 못하는 과대망상증 환자였지만, 광인은 (사실은 자해의 흔적이었지만) 자신의 몸에 난 상처들이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이라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 제정신이 든 광인을 묘사하기 위해 성서기자가 사용한 표현은 그가 “옷을 입었고 ... 앉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묘사들을 보면 그는 꼭 문명의 질서에 길들여진 것 같습니다. 마치 제정신이 된 모습은 세계와의 갈등이 없는 상태, 그 갈등을 없애기 위해 사회적 통념에 투항한 듯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거라사 광인 이야기는 ‘저항(주인공)-억압(세계)’의 서사가 ‘굴복(주인공)-훈육(세계)’의 서사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광인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체제에 먹혀버렸던 것처럼, 거라사의 광인도 사회적 통념에 부합하는 예의를 갖춤으로써 스스로 그 사회에 길들여지고 평가절하 받는 길을 택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서 읽기 방식은 성서 안에서 윤리적 정당화 방식, 본받을 대상, 동일시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에서는 그런 대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라사 광인 이야기에서 어떤 윤리적 함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 과연 윤리적 함의라는 것이 그 이야기 안에 있기는 한 것일까요? 저는 거라사 광인 이야기와 광인일기의 의미가 이야기 ‘내부’에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미덕은 이야기 내부에 우리가 쉽게 ‘동일시’하고픈 주인공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두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반면교사’(윤리적 주인공의 뒤집힌 거울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이 두 서사는 등장인물 중 어느 한쪽에도 쉽사리 동조할 수 없는 심리적 상태를 초래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앞에 놓인 두 이야기가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만드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윤리적 동일시의 대상을 쉽게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통념화된 윤리관의 정지, 이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던 윤리적 사고의 토대에 대해 회의를 갖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고, 그 계기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사고가 시작될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윤리적 성찰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손쉬운 동일시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지 묻는 태도인 것은 아닐까, 묻게 됩니다. 옷을 입은 광인은 우리에게 자기와 쉽게 화해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그렇게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윤리적 성찰의 지점 또는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2013.11.10. 한백교회 하늘뜻 나누기(1562차 예배) 본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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