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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바울신학가이드7] 바울과 탈식민주의II - 바울과 제국 (한수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4. 4. 30.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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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7]

바울신학과 탈식민주의II

- 바울과 제국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왜 주류신학에서 탈식민주의를 말하지 않는가?
    
    이전의 웹진의 글에서 원래는 식민주의 시대 이후의 정치적 텍스트 읽기의 한 방법인 탈식민주의가 어떻게 성서 해석의 장으로 들어왔고, 성서가 쓰여졌을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가를 논했다. 더 나아가 탈식민주의 이론의 발달로 인해 영미의 인문학과 신학이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고 새로운 텍스트 읽기를 인정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번 웹진은 그러한 탈식민주의적 성서읽기가 어떻게 신약성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짧게나마 다루어 보고자 한다. 하지만 먼저 그 전에 이른바 진보적 성서읽기가 왜 신학교의 상아탑이나 학문적 차원에서만, 그것도 소수의 학자들에게서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보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탈식민주의만 논할 것이 아니라 이른바 탈근대의 시대에 태동되었던 성서해석의 흐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근대와 탈근대의 장구한 성서해석의 흐름을 짧게 요약하는 것이기에 많은 한계가 있을 것이나 적어도 현대 성서해석학의 위치를 조감해볼 기회는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근대의 시대가 계몽주의와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에 현실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카톨릭으로부터 개신교회가 독립하기도 하였지만 성서학에서 가장 큰 변화는 성서 이해에 대해 로마의 기독교화 이후부터 있었던 해석의 기준인 교황권이 약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즉, 무엇인가 새로운 해석의 방법이나 관점을 발견하더라도 근대 이전에는 교황권의 인정을 받아야만 유통될 수 있는 담론이 바로 성서에 대한 해석이었다. 한마디로 신학과 성서학은 카톨릭의 권위 아래에서 검열되었고 유통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개혁을 꿈꾸며 혁명적 신학을 개진했던 인물들이 있었지만(둔스 스코투스 또는 보나벤투라 등) 거시적 지평에서는 정통과 이단의 기준은 교황권에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인해 그 권위가 일거에 사라졌다.[각주:1] 게다가 이미 ‘이성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세계를 덮고 있었다. 권위가 사라진 시대에서 라틴어로만 번역되어 존재하던 성서가 여러 언어들로(특히 독일어와 영어) 출판되고, 이성을 기반으로한 과학적 사고가 전통이라는 시대적 가치를 부수고 나오게 되자, 시대는 전통적인 것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뒤덮혔고 이제 학문은 전통을 인정하되 과학적 사고로 전통을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쉽게 바꿔 말하면, 근대 이전의 시대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농작물을 키우는 일에 대해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그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농업에 대한 지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바로 전통이 그의 직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시대가 되면서 자연과학이 최고의 가치로 등장하게 되자, 제일 먼저 농부가 해야 할 일은 (그가 성공하고 싶다면) 과학적 방법으로 발달된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야흐로 몇백년, 아니 몇천년동안 내려오던 전통적 방법에 물음표가 붙으면서 과학적, 이성적 방식을 받아들여 변화의 시대에 발맞추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농업을 예로 들었지만, 이러한 변화에 가장 민감했던 것이 바로 예술과 인문학이었을 것이다. 신적 권위를 드러내고 그 권위를 이해하는 것에 바쁘던 학문들이 자신들의 전통에 괄호를 치고 이성에 빗대어 질문을 던지면서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더할 것은 더하면서 좀 더 새롭고 이성적인 담론을 산출하기에 온 정력을 쏟게 되었다. 신학과 성서학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계몽주의적 성서학의 태동이 신화의 시대에 갇혀있던 인간을 계몽시키고 역사 속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질문없이 권위에 복종하며 참복음의 묵상에는 어쩌면 게을렀던, 그래서 너무도 쉽게 정치와 권위의 신하이기를 자처했던 성서학이 그 틀을 깨고 나와서 여러 다양한 비평의 시대를 연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 성서학의 태동을 뒤집어서 보면,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성서의 생존을 위해서, 성서가 미신과 신화로 뒤범벅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성의 시대에 성서를 구원해 낼 것이냐를 고민했던 결과가 바로 근대성서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에 근대 성서학의 빛과 그림자가 있다. 신학교 신학생 시절 선배들과의 대화 속에서 중고등학교때까지 충실하게 믿었던 성서의 여러 기적이야기들이 한낱 신화적인 그리고 문학적인 문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임을 들었을 때 물론 성서를 새롭게 보는 지평 또한 열렸겠지만 이전의 신앙적 양태를 폄하하는 교만의 시각도 함께 열렸다고 한다면 심한 억측일까? 새로움을 추구하는 근대적 학문은 중세의 그늘을 여는 눈부신 햇살이 되어 잠들어 있는 인간됨이라는 아름다움을 깨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오로지 진보와 새로움의 추구는 자칫 잘못하면 다양성에 대한 지적유희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한 예로 근대의 성서학은 일세를 풍미했던 불트만이나 케제만과 같은 독일 성서학 시대와 사회학적 해석과 간문화적 연구를 필두로한 미국의 진보성서학의 시대를 넘게 되면, 구조주의적 비평과 신비평, 그리고 문학비평 등의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하나의 텍스트에 하나의 의미란 없으며 텍스트는 오로지 열린 것으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의 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추구가 현실의 콘텍스트를 잃어버리고 학문의 상아탑 안에 갇히게 되면 성서는 믿음의 텍스트로서의 힘을 잃어버리고 학자들의 지적유희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이는 현대 대학의 인문학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지만, 특히나 성서학과 교회의 괴리, 성서학과 현시대 상황과의 괴리는 참으로 진보성서학에게는 아픈 부분이다. 교회는 보수화되었기에 자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고들 하였다. 축자영감이나 주장하는 보수적 교회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서학이, 바로 이스라엘의 해방, 예수 운동, 그리고 바울의 혁명적 교회론을 읽는 성서학이 현실에 귀기울이지 않고, 헬라어의 단어 하나, 몇개의 구절이 예수의 역사적 서술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 골로새서가 바울의 저작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수백 편의 논문이 나오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 아닐까?
    그렇다면 탈식민주의란 것은 이러한 서구의 엘리트주의나 지적유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전 웹진에서도 설명했듯이 탈식민주의의 중요한 이론가들의 기반이 된 것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맑스주의, 라깡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푸코의 담론이론 등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인문학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나 몇몇의 전문가 집단을 제외하고 쉽게 이해되기 힘든 담론들이며 성서학에서도 부분적으로 다루어지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이론의 역사와 달리 탈식민주의는 서구의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한 전세계적 저항의 역사를 담지하고 있는 민중들의 담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넓고도 복잡한 탈식민주의적 이론과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어떤 성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오늘 웹진에서는 성서의 가장 문제적인 주제인 ‘제국’을 가지고 탈식민주의가 어떻게 상아탑에 갇힌 성서를 탈경계화하고 성서해석의 역사만이 아니라 성서텍스트 자체에 대한 반성을 생산할 수 있는지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탈식민주의의 두 갈림길 – 제국과 성서, 그리고 탈식민주의 관점으로 본 제국

    제국(Empire) 과 제국주의(Imperialism)만큼 본 웹진에서 자주 언급된 주제도 드물 것이다. 이 주제는 이 웹진만이 아니라 전체 인문학과 성서학에 흔히 다뤄지는 주제인데, 때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미국의 패권주의 등등의 다른 말들로 치환되기도 한다. 그만큼 제국이라는 말이 현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좋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국주의는 하나의 통치이념이다. 여기에서 Imperialism은 Imperator(임페라토르)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인데 이는 독재관(또는 황제)이라는 로마의 직책에서 유래한다.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로마는 전쟁으로 인한 위기 상황을 타개해 나갈 방법으로 독재관이라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전까지의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지휘관의 개념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군사적 전권을 가지는 계급으로 로마가 황제정으로 가는 시발점이 된 직책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시이저를 들 수 있는데, 당시의 로마의 군인들은 원로원이나 로마의 공적 기관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휘관으로부터 봉급을 받았으므로 독재관이라는 것은 명실공히 금권과 군사력을 동시에 가지는 독재가 가능한 직책이었다. 이후 이른바 종신독재관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지면서 황제정의 길이 열리게 된다. 이러한 황제정과 식민정책을 기본정책으로 삼는 것이 로마의 제국주의였고 이를 계승하려 한 것이 근대국가 이전의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들이 결국에는 제국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자본의 팽창을 위해 끊임없이 식민지를 만들고 타국을 침략하여 군사인 힘과 경제적인 힘으로 정복하면서 다른 제국들과 경쟁하는 시대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후, 네그리는 그의 저서 ‘제국’에서 전지구적인 하나의 제국을 상정한다. 국가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등장하는 자본과 그들을 움직이는 힘들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자본의 힘으로 세계를 관리 감독하는 체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형태의 제국의 기본적인 체계가 바로 로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로마가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넘어가던 시대에 신약성서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국가경영에 대한 정치이념에는 몇가지가 있을까? 깊게 생각해 보더라도 시민의 참여를 통해 국가의 경영을 결정하는 민주정치이념과 소수의 엘리트집단이나 개인에 의한 일당독재나 일인독재, 또는 황제정치(제국정치)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듯하다.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민주정치는 근대 이전에는 불가능했었는데, 민주정치에 대해 무지했다기보다는 이를 가능하게 할 인프라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2013년의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를 예로 들더라도 초고속 인터넷과 엄청난 정보고속도로가 있음에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인력과 자금이 들어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개표에 대한 의문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물며 근대 이전에서 모든 국민들의 생각을 모은다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민주정치를 꽃피운 (비록 소수 남성 자유시민들의 정치였지만) 아테네 또한 조그만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어느 정도 크기 이상으로 팽창하게 되면 일인독재체제가 가장 효과적인 통치체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제국주의가 기본 통치이념이 된 이후에 그리스 헬라 철학은 개인의 윤리와 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에피큐로스, 스토아학파) 정치에 대한 철학적 상상력은 그 종언을 고하게 된다.
    헬레니즘과는 다른 지역에서 발달하여, 헬레니즘의 거대한 물결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헤브라이즘이라 후대에 불리우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성막중심 공동체로부터 시작하여 솔로몬 왕에 이르러 성전 중심의 종교국가로 발전한다. 그러나 성막공동체가 야웨 하나님과 억눌린 자의 해방을 통한 정의의 공동체를 목표로 했음에 반하여 성전중심의 국가가 된 이후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시대를 정점으로 남과 북왕국으로의 분열과 성전종교의 타락 등으로 쇠락의 시대를 걷다가 결국 나라를 잃고 식민통치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식민통치 시대에서 공동시대 70년쯤에 예루살렘성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 남유다 멸망후 약 600년간 유대인들은 끊임없는 저항의 시대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에 그들의 중심이 된 사상이 바로 유대주의(Judaism)이다. 정치적 독립이 요원한 상태에서는 종교적인 담론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고, 로마의 감독을 받는 이집트와 시리아 제국이 잠깐 한눈을 팔기만 하면 정치적 독립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 바로 유대의 역사였다. 자연스럽게 그리스 문화와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생각도 생겨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있었다.(한 예로 쿰란 공동체를 들 수 있다.) 결국 제국과 성서에 대한 질문은 제국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쓰여진 성서가 인간의 공동체와 국가를 경영하는 최종 모델인 제국이라는 이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라는 것으로 모아지게 된다.
    성서가 인간의 제국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이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과물로 예수를 성전중심의 브로커 체제(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적 역할로서의 종교)를 혁파하는 종교혁명가로 소개하였을 때, 닐 엘리엇이 ‘Liberating Paul’에서 바울을 로마 황제 숭배에 반해 그리스도를 주(Lord, kupios)로 고백함에 대한 정치성을 말할때, 당시의 학자들의 마음속에는 제국의 패도정치에 반하는 사랑과 정의의 화신으로써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복음서의 예수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주의를 해체시키고 아래로부터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후 전미성서학회(SBL: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에 ‘예수와 제국’(Jesus and Empire)라는 분과가 따로 생겨날 정도로 신약성서의 배경을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로 보고, 성서를 제국에 대한 저항문학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식민공간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담론들을 좀 더 깊이 살펴보기 위해, 잠시 눈길을 돌려 한국의 식민의 역사를 살펴보자. 대한 제국이 당시 일본제국과 한일합방의 치욕을 겪고 난 이후, 당시의 지식인들로부터 이후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물결이 해방을 얻기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조선시대 이후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치적 변화의 일환이었으나 본격적인 근대화에 첫 발을 딛기도 전에 식민의 시대의 질고를 지게 되었다. 일본제국의 식민하에서 조선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이 바로 첫째는 민족주의이고 다음은 맑스주의 또는 사회주의였다. 평등과 자유를 기본으로 하였던 맑스주의는 불평등과 자본주의를 중심으로한 식민통치에 저항담론이 되었고, ‘민족’이라는 단어는 저항의 구심점으로 조선민중들이 하나의 가치로 모여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 ‘민족’이라는 단어는 위정자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였다. 아직도 필자는 아침마다 왼 가슴에다 손을 얹고 외우곤 했던 문장들이 기억난다. “난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모든 국민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해야 할 민족이란 무엇일까? 바로 국민들이 아닌가? 자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것을까? 오히려 충성을 요구하는 어떤 집단이 자신들을 위해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인 것 아닐까?
    다시 신약성서로 눈을 돌려보면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 또한 민족이라는 개념이었다. 물론 근대 민족국가에서의 민족과 유대주의로 대변되는 유대민족주의는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구약성서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에는 유대주의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져가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의식은 제국의 지배와 함께 생성되어온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의 민족주의 또한 민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애매함과 폐쇄성 때문에 여러 새로운 민족에 대한 해석을 낳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로마인들은 제국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그러한 혜택을 얻을 수 없는가? 이미 요나서에서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하나님께 참회하는 꿈같은 장면이 그려지고 소아시아의 여러 지방에 건설된 회당이 이방인들에게 이미 개방되어 있었다. 예수 운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그것은 예수라는 인물을 따르는 자들로 인해 시작되었고 성전멸망 이후에 유대교 회당에서 배태된 집단이었고, 예수라는 인물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였다.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저항담론을 만들었다. 그것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파괴력과 넓이를 보여주었고, 이방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새로운 이름의 제국(바실레이아)에 대한 열망이었고, 그 또한 여타의 제국이 가지고 있는 빛과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다.
   

    예수와 제국, 그리고 바울

    기독교제국(Christendom)을 비판할 때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확정하면서 주변에 머물렀던 기독교가 제국의 힘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위정자의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을 기독교 타락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신학과 교리는 기득권층의 이권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변하여 제국의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그들의 우월성을 대변하고 식민치하의 민중들을 유혹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탈식민주의적 관점이 이러한 기독교의 과거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은 과연 기독교 제국의 타락과 악행이 기독교제국의 위정자들에게서 나온 독극물이고 원래의 기독교 공동체는 그와는 다른 순전한 사랑의 공동체였을까? 또는 신약성서는 그러한 권위주의와 기독교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종래의 리처드 호슬리나 존 도미닉 크로산 등의 예수와 제국간의 갈등과 저항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복음서의 공동체가 예수를 당시의 황제의 명칭이었던 주님(Kupios, the Lord)로 부른다거나 황제의 방문을 나타내는 용어인 파루시아가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예수의 공동체는 제국에 대한 저항 공동체임을 천명하였다. 로마제국이 황제종교의 성격을 오리엔트 지방에서 강화하면서 예수를 부활한 메시아로 받아들이던 공동체는 극렬히 저항했을 것이고, 종교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것은 정치적 저항으로 읽혔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예수가 복음서를 통해서 말했던, 바울을 통해서 알려졌던 세상의 평화가 아닌 평화의 의미는 바로 제국의 선전물에서 흔히들 나오던 평화의 메세지에 대한 선전포고이며 새로운 사회와 정치를 향한 염원이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바울의 서신들 또한 중요하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를 예수를 믿는 공동체로 바꾸어버린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바울이야말로 제국에 대한 저항과 대안으로 예수를 붙잡은 사람이었는가?
    예수와 제국을 말하는 일군의 학자들과는 달리 탈식민주의 신약성서학자들은 유대의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면서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는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호미 바바의 미미크리(mimicry)이론에 착안하여 식민지하의 상황에서 식민인들은 제국의 담론을 증오하면서도 제국의 코드들을 창조적으로 전유한다. 로마황제의 제국 대신에 예수의 제국(바실레이아, basileia)를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로마의 제국 이후에 도래할 예수의 제국을 말함으로 로마제국의 지배구조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정신적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배계급으로 올라섰을 때 그러한 제국의 담론은 기독교 제국이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고, 혁명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만들어가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탈식민주의 성서학자들은 성서 내의 제국의 담론에 의문을 제시한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표현이 예수를 따르는 삶의 필요성을 말하기보다는 예수를 중심으로한 제국의 재편을 말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군림하는 하나의 진리가 되어버리면 그안에는 어떤 삶의 가치보다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라는 차이만 존재하고 그 차이는 계급의 차이 또는 우열의 차이가 되어버린다. 특히나 기독교 중심의 세계에서는. 한손에는 코란, 한손에는 검을 든 이슬람 제국의 그림처럼(물론 이러한 담론은 후대의 기독교 역사가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이다.) 기독교 제국의 그림은 한손에는 성서,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자본주의라는 떡을 들고 타인종이나 타종교, 타국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전투적 선교주의가 된다. 그리고 그 그림이 이미 성서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탈식민주의 학자들의 논거라 하겠다. 제국에 대한 압제속의 저항의 몸짓이었던 성서가 지배계급의 도구가 되고만 가슴 아픈 현실을 비로서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탈식민주의적 관점이 줄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교황권의 몰락은 단순히 인류의 정신사적 지평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의 지형과 경제적 변화가 가장 큰 이유가 되겠으나 여기에서는 단순화시켜 학문의 변화라는 관점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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