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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사람에게로 가자: 무감 무통의 인간들과 아이리스 머덕(Iris Murdoch)의 도덕적 자아 (조민아)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4. 8. 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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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로 가자

: 무감 무통의 인간들과 아이리스 머덕(Iris Murdoch)의 도덕적 자아

조민아

(세인트캐서린 대학 조교수)

 

왜 아파할 줄 모르는가

경악스러웠던 것은 사실 평범해 보이는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4월 16일 그 날 이후 정지된 시간 속에 그저 나날이 반복 되고 있는 이 참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주범들이야, 서로 서로 추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지들도 살려고 저렇게 금수만도 못한 짓들을 하고 있다고 치자. 그러나 저 아무럴 것 없어 보이는, 집 앞에서 마주쳤으면 인사라도 나눴을 이웃들의 입에서 (혹은 손가락에서) 304명의 자식들을 잃은 가련한 부모들을 향해 상상하기도 힘든 폭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뿐이랴, 그들의 얼굴은 밀양 송전탑 반대 농성 움막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던 할매들의 주름진 몸을 난폭하게 끌어 낸 후 승리의 브이를 올리며 단체 사진을 찍었던 경찰들과도 겹친다. 멀리는 수천의 무고한 생명들에게 내리치는 폭격을 스포츠 관람하듯 도시락을 싸들고 구경 하고 있는 가자지구 이스라엘인들의 얼굴과도 닮았다.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왜 그들은, 자신의 손가락에 박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에 아픔을 느낄 줄은 알면서 자신들의 생명과 똑같은 가치를 가진 생명들의 몸에 미사일 파편이 박혀 죽어 나가는데는 아무 느낌이 없는가.

그들의 냉정함과 무례함은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모두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일까? 아니다. 그들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애틋하고 정성이 지극한 부모이며 자식이고 친구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기에 궁금하다. 왜 그들은 자신들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저리도 무감한가? 왜 누군가에게는 타인의 고통이 조롱거리이거나 경멸의 대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그냥 지나칠 수 없는 통증이며 상처인가? 왜 누군가는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흔들림 없이 뻔뻔하고, 누군가는 뻔뻔한 그의 수치심까지도 떠맡아 괴로워하며 인간의 양면성에 치를 떠는가? 


아이리스 머덕(Iris Murdoch, 1919-1999)의 도덕적 자아

아일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아이리스 머덕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그들과 우리는 단순히 다른 정보와 견해를 선택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과 우리는 세상 자체를 달리 보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Murdoch, “Vision and Choice in Morality,” 82).  즉,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또는 선함(the Good)의 기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머덕의 주장을 좀더 풀어 보자. 타인의 고통에 대해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즈음의 현실이 잘 보여주듯,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서, 또 선하고 바른 것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보편적인” 기준에 동의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도덕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복잡하고도 모호한 상황의 차이를 반영할 수 없기에, 삶과 분리되어 존재한다면 공허한 껍데기로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근대 철학에서 흔히 강조하는 “도덕적 원칙에 대한 선험적인 체득”과, 그 “원칙을 선택하는 도덕적 주체의 의지” 프레임으로 인간의 다양한 도덕적 인식과 행위를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머덕에 의하면,  도덕적 원칙과 개인의 의지라기보다는 도덕적 비전 (moral vision)이다. 선한 목적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 봐야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행위는 “공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선하게 하는 원칙과 규범들을 천명하고 기술하는 데서 벗어나,  또 나와 이해 관계를 주고 받는 삶의 반경을 넘어, 다른 이들의 삶을 보고 느낄 때 비로소 내가 알고 있는 “선함”에 관한 원칙과 규범들은 얼굴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으로 알게 된 그 구체적인 얼굴들에 기반하여 각자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나름의 지식을 쌓아간다. 이 지식은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들을 도덕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물론 자료는 확장하고 변화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인간을 선하게 하는 본질적 요소라면, 공감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혼자 만의 세상에 사로 잡혀있는 자아이다. 고립된 자아는 끝없이 불안하다.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것들을 지키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꾸만 자꾸만 안으로 숨어 들어 견고한 성을 쌓는다. 이러한 이기적인 자아를 가진 인간에겐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 그 자아가 타인들로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왜곡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dent)가 저 유명한  나치 전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며 남겼던 글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아렌트는 평범한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아이히만을 에워 싼 불통의 벽은 그를 다른 이들의 말과 생각과 현존으로 부터 분리시켰다. 결국 그는 수많은 학살을 자행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머덕 또한, 타인과의 공감과 소통을 거부하고 자아에 갇혀 있을 때 인간은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끝내는 사랑할 능력을 잃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 할 때, 타인의 삶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만 비로소 선한 지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머덕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한 첫번 째 조건은 자기 삶의 반경 너머를 보기, 그리고 아집에 사로잡힌 자아를 탈출하기이다. 머덕은 이를  “자아 벗기 (unselfing)” 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아를 벗는 것은 부단한 훈련을 요구한다. 반복적인 행위와 습관으로 자신을 잊는 연습을 해야 한다. 머덕은 주시(attention)를 훈련의 필수 항목으로 제시한다. 인내심을 갖고 겸손하게 사물과 사람을 응시할 때, 혹은 예술 작품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길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다른 숨결들을 비로소 발견하고 잔뜩 부풀어 있는 자아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나 외에 다른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생명이 살아 있는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찾기 시작한다 (Murdoch, “The Sovereignty of Good Over Other Concepts,” 375).  그러므로, 머덕에게 있어서 도덕적 인식과 미학적 지각 (aesthetic perception)은 서로 통한다. 영화 <타인의삶 (Das Leben der Anderen)>에서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선한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를 들으며 전율하던 비즐러를 기억하는가. 냉혈한이었던 그, 자기 세상의 원칙과 규범에 갇혀 살던 비즐러의 단단한 자아를 벗기고 세상으로 끌어 당긴 그 위대한 예술의 힘 말이다. 아름다움에 반응할 줄 아는 인간과 선한 인간은 흔들릴 줄 아는 인간들이다. 흔들리다 흔들리다 결국 자기를 내려 놓을 줄 아는 인간들이다.  

타인의 삶에 공명함, 그리고 그를 향해 나의 자아를 던짐. 머덕에게는 이것이 덕(virtue)이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나를 나누고 그들로 인해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곧 도덕적인 비전을 갖게 되는 길이며 선해지는 길이다.  그러나 도덕적 자아는 금욕적인 자아가 아니다. 거북함과 불쾌함을 무릅쓰고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정 자체가 부드럽고 여리게, 남들과 공명하는 성정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물론 하루 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한 눈과 의식으로 세상과 타인을 주시하고자 반복적으로 노력할 때, 자기 중심성을 작동하게 하는 메카니즘은 깨지고 자신을 향하던 에너지는 방향을 바꾼다. 마침내 시선은 밖으로 향하고, 사랑도 밖으로 흐른다. 그러기에 타인이 고통으로 몸부림 칠 때 내 살이 베어져 나가듯 아픈 것이다. 그러기에 타인이 기쁘고 행복할 때 내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지는 것이다.


사람에게로 가자

세월호 가족들 앞의 무례한 그들. 밀양과 가자지구의 후안무치들. 그들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르다.  어쩌면  그들은 피를 나눈 가족과 이해를 나누는  주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자신의 작은 세상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타인들과 눈을 맞추고, 소통하고, 절절한 가슴을 맞대어 본 경험이 없었을지 모른다. 단 한번 다른 이들의 부름에 흔들려 본적 없을, 단 한번 더불어 사는 삶의 뜨거움에 설레어 본적이 없을 그들은 어쩌면 미워해야 할 존재라기 보다 연민을 느껴야 할 존재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욱한 나는 아직 훈련이 덜 되어 그들에게까지 나누어 줄 연민이 없다.  언젠간 그들에게도 비즐러가 경험한 것과 같은 은총의 순간이 다가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자식이 죽어봐야 알지,” 라는 말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내자식이 죽어야만 남의 자식이 죽은 심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 죽은 아이들이 내 아이처럼 느껴지는 세상, 자식 잃은 부모들이 내 식구처럼 느껴지는 세상에 희망을 건다.  

그리고 그 희망을 지켜 나가기 위해 나와 내 공동체를 점검한다. 비통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국회 앞에서, 광화문에서, 용산에서, 밀양에서, 청도에서, 강정에서, 4대강에서. 우리는 많이 울었고, 지금도 울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울었는가? 지금 이 순간도 홀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가슴을 친다.  초단위로 정보가 업데이트 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마치 고통의 소우주같다. 수천의 사람들이 거기서 분노하고 옷을 찢고 후회하지만 정작 오프라인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적다.  SNS를 통해 소리만 요란하게 퍼다 날라지는 정보들은 감정을 극대화할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인 행동이 될 가능성은 적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사람에게로 가자. 나 하나 무슨 도움이 되랴 컴퓨터 앞에 주저 앉아 혼자 울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행동을 하자. 일인 시위 피켓을 들던, 광화문에서 가족들을 지키던, 기다림의 버스를 타던, 봉사를 하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말이다. 점점 추상적이 되어 가고 있는 이 고통에 사람의 얼굴과 사람의 체온을 더하자. 사람이 없다면, 고통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사람을 통해 확인하지 않는다면 공감 또한 값싼 로맨스에 불과하다. 사람을 잃어 버린다면, 우리도 냉정하고 무례한 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저들과 다른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 문헌: Iris Murdock, “Vision and Choice in Morality” and “The Sovereignty of Good Over Other Concepts” in Existentialists and Mystics: Writing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edited by Peter Conradi (NY: Penguin Books, 1998).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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