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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포도주에 담긴 생명의 기운 (박여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5. 11. 2.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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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에 담긴 생명의 기운

 



박여라




    어려서 교회에서 배운 노래 중에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를 참 좋아했다. 히브리민요 곡조에 오소운 작사로 알려진 이 노래는 흔한 서구의 찬송과는 음색이 달라 묘한 매력이 있었다. 되돌이표도 없는데 노래가 무한히 반복될 것같은 느낌이었다. 이십여 년 뒤 미국에서 나의 라틴어 선생 도미니칸 수사에게서 배워 족히 수백 번은 외웠을 주기도문(Pater Noster)처럼 주술같은 기운이 있었다. 곡조도 곡조이지만, 이사야 35장 말씀으로 그린 ‘그 나라'의 모습이 참 좋았다.

    찬송가 중에선 ‘빈 들에 마른 풀같이'를 특별히 좋아했다. 에스겔 34장 26절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말씀으로 만든 찬송이다. 어린 시절 무슨 갈급한 마음이 있어 성령의 단비가 내게 쏟아지기를 기도했던 것 같지는 않고, 지금 돌아보니 메마른 땅에 비가 내려 사방이 촉촉하게 젖고 생기가 도는 메타포가 마음에 와닿았을 것이다. 지금도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흙냄새가 피어오르면 좋아서 하던 일을 멈춘다. 무언가 이루어진 것 같은 편안함이랄까.

    어른이 되어 꽤 긴 세월을 캘리포니아 북부 (교포들 말로는 ‘북가주')에 살았다. 거기서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었다. 실제로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하늘과 태양, 바람과 땅도 그 곳이다. 그 곳은 사계절이 아니라, 일 년이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와인지역에 갈 때면 어느 계절이든 모습이 달라 다 장점이 있다. 포도를 거둬들이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는 때엔 그 냄새가 온통 진동하니 해가 뜨거워도 좋고, 좀 더 지나 가을이 되면 포도나무가 종류별로 화려하게 단풍이 져서 이쁘다.

    난 우기의 끝 즈음이 좋다. 날이 아직 추워 포도나무에 순이 나오기 전이다. 잎이 무성한 여름과는 달리 벌거벗은 나무가 드러나 있다. 하지만 비는 거의 그쳐서 다니기도 크게 불편하지 않고, 줄줄이 늘어선 포도나무들 사이사이로 머스터드 노란 꽃이 가득하다. 비단 와인지역 뿐 아니라 북가주를 관광하기엔 산과 들에 머스터드, 주황빛 양귀비, 싱싱한 들풀까지 더해져 그 때가 가장 아름답다. 건기가 다시 시작되어 6월쯤 되면 풀이 다 말라 구릉의 골에서 자라는 나무들만 푸른 빛이고 온통 건초다. 다시 비가 내리는 늦가을이 되기 전까지는.

    어느 해엔가부터 매일 사하라 사막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사막에서 정처없이 걸어가는 내 모습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잠이 깨면 다시 주어진 하루를 세어가며 언제고 사막에 가리라 새로 다짐했다. 아침저녁으로 주기도문 챈팅을 몇번씩 읊었다. 무엇이 그렇게 간절했을까.

    나에게 당장 ‘비교적' 가까운 곳은 데스벨리(Death Valley)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여행지는 좋으면 질릴 때까지 계속 가곤 하는데, 그런 여행지들은 대개 아무리 반복해서 가도 질리지 않는다. 데스벨리가 그렇다. 죽음의 골짜기라니, 이름 참 무섭다. 19세기 중반, 더 나은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향하는 무리 중에서 이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떼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살아서 이 계곡을 빠져나간 이들이 뒤를 돌아보며 “안녕, 죽음의 골짜기!” 했다나. 

    이 이야기로만은, 그리고 그 곳엘 가기 전까지는, 왜 거기가 미국의 59개 국립공원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었다.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다. 여름 휴가철에 캘리포니아를 찾은 이들이 그곳이 유명하니 가겠다고 하면 늘 뜯어말렸다. “덥고 황량해. 가지 마!”

    사하라사막은 아니지만, 내가 꿈에도 그리던 사막을 데스벨리에서 드디어 처음 만났을 때에야 사람들이 왜 그곳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사막엔 어떤 두려움이 있었다. 나를, 사람을 뛰어넘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도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죽어있는 땅이 결코 아니었다. 악조건을 버텨내는 생명으로 가득했고, 끝을 알 수 없는 길고 긴 시간을 적막함이 품고 있었다. 이내 그 간절함에 매료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러가지 상황에서 여러가지 모습일텐데, 이 곳에선 비가 하나님의 축복이다. 소낙비처럼 내려주마 약속하신 에스겔 34장 말씀처럼 말이다. 데스벨리의 연평균 강수량 60밀리미터다. 우리나라에서 봄 가을 건조할 때 한 달 강수량이다. 그것도 대부분 우기, 그러니까 11월에서 3월에 내린다. 비가 좀 넉넉히(?) 내린 우기가 지나고 나면, 그 죽음의 사막이 거짓말처럼 들꽃으로 화려해진다. 그 메마른 땅에서 비 몇방울에 간절하게 피어나는 온갖 꽃들은 나에게 자유, ‘스스로 말미암음’을 가르쳐주었다.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나무를 좀 괴롭힌다. 물을 너무 잘 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고, 나무가 열매맺는 일에는 딴전이다. 너무 비옥한 땅도 좋지 않다. 뿌리가 물과 영양분을 찾아 더 깊게 내리게 하여, 이상적으로는 땅이 지닌 고유함을 포도알에 담아내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못 살게 하면 나무가 죽어버릴 테니 ‘약간의 스트레스'라는 발란스가 중요하겠다. 포도나무 뿌리는 대개 땅속 1미터 정도인데, 6미터 이상 뻗어나가기도 한다. 마치 우리 눈에 보이는 빙산은 1할 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9할이듯, 와인을 만드는 포도송이 하나하나는 포도나무 뿌리가 흙과 자갈 속 깊이 더듬더듬 생명을 찾아 뻗어나간 간절함의 정수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이스라엘에 복된 소낙비를 내리시리라는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 뒤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나온다.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대로 마른 뼈들이 살을 입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살아있는 기운(생기)이 바람처럼 불어와 죽은, 완전히 죽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 생명을 준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알려진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엘니뇨 덕에 비가 넉넉히 내려, 지금 온통 장미빛 꽃으로 물들었다지.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쓰고 있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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