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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공개토론을 기대하며 (백승덕)

시평

by 제3시대 2015. 12. 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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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공개토론을 기대하며



 

백승덕*


 

          지난 9일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400명 가까운 지식인들의 명의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검찰이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를 기소한 것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공개토론을 통해 풀자고 제안했다. ‘학문의 자유’의 상징이 돼버린 이 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학계의 자율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고민들이 모여 만들어낸 자리였다. 국가권력이 법이라는 앙상한 잣대를 들고 학계에 개입하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느껴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들의 공개토론 제안은 학계가 법정을 대신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충분히 대변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어쩌면 학계가 이 사태와 관련하여 내놓을 수 있을 가장 적절한 대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위안부’ 생존자 유희남씨는 그러한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 “지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도 되냐?”  

          그의 질문은 ‘위안부’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학자란 무엇이며, 대체 무엇이기에 그처럼 자유롭게 이야기할 권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여태껏 이어졌던 질문의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세웠다. 즉, 지금까지 학자들이 ‘위안부’가 무엇인지 물어왔다면, 유희남씨는 ‘위안부’ 생존자로서 ‘위안부’에 대해 말하는 학계가 무엇인지 되물은 것이다.  


학문의 경계


         학계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사건들은 비단 <제국의 위안부> 사태뿐만 아니라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2015년 한 해 동안 역사학계에는 전문성에 대한 공격이 집중됐다. 그간은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첨예하게 벌어져도 ‘역사는 전문가들에게 맡기자’라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발표라는 초대형 스캔들이 터진 뒤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변했다.

         2015년 10월 박근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검인정 체제 대신 국정화하겠다고 결정했는데, 학계는 이 사태에서 애초부터 전문성을 부정당했다. 정부와 여당에서 “국사학자 90%가 좌파”라는 색깔론을 공개적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국사학자들이 교과서 시장에서 밥그릇을 지키려고 한다는 공격도 더해졌다. 색깔론에 밥그릇론까지, 국가가 나서서 학자들을 좌파·이익집단으로 몰아세웠으니 이야기가 더 진행되기 어려워졌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란은 결국 학계 전체가 국가에 찍혀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게 된 사태까지 치닫게 됐다.

         역사학계는 정부의 국정화 방침에 ‘역사의 다양성’을 내세워 맞섰다. 국정교과서가 역사를 획일화하여 죽인 역사만을 가르치는 독재적 발상이라는 것이었다. 학계는 정부의 국정화 방침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가가 역사해석에 개입한다면 역사가 획일화되어 학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해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실제로 자국의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가르치는 국가는 북한, 몽골, 스리랑카 같은 극소수 독재국가 밖에 없다는 사실도 학계의 비판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역사학계가 ‘역사의 다양성’을 한없이 세게 이야기하기는 곤란했다. 역사는 정말 다양한가? 학계는 앞서 검인정 체제에서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교과서에 대한 인정을 반대했던 적이 있다. 이 교과서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료들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연도표기를 잘못하는 등 수준미달의 모습도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학계가 교학사교과서에 반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 교과서가 ‘바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교학사 교과서는 ‘친일 독재 미화’라는 비판에 부딪히며 전국 2천300여개 고등학교 중 3개 학교에서만 채택되고 말았다. 보수 정권이 집권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음에도 사실상 채택율이 0%를 기록했으니 참패였다. 이처럼 학계 역시 ‘역사의 다양성’을 무작정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다양성의 기준이다. 어디까지를 학문의 자유로 인정할 것이며, 누가 역사와 역사 아닌 것의 범위를 판단할 것인가? 역사는 다양한 것이므로 공공연히 친일을 미화하는 역사교과서도 얼마든 가능한 것일까? 반대로, 북한 정권이 발행한 교과서를 다양성을 내세워 남한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까?

         학계에서는 친일이나 북한 정권을 무작정 찬양하는 교과서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배나 남북대치가 지금도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교과서를 인정하면 학계의 객관성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를 다뤘다고 어떤 이야기든 역사로 받아들인다면, 박사논문 한편을 쓰기 위해 한 청춘을 연구실에서 보내며 어렵게 훈련 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학계에서 위서(僞書) 취급을 받는 『환단고기』 식의 역사관을 교과서에 싣는 일도 문제 삼을 방법이 사라진다.

          그러니 학계는 역사와 역사가 아닌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자 애쓴다. 문제는 학계가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을 때에만 이러한 구분 역시 실질적인 효력을 얻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학계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면 어떤 주장이든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그만큼 커진다. 이러한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권위가 더더욱 약해지기 때문에 역사와 역사가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이 더욱 모호해지기 십상이다. 이런 공간에서는 소수자들의 역사처럼 그간 억눌렸던 기억들이 새로 조명을 받기도 하지만 홀로코스트와 같은 학살의 역사를 부정하는 반동이 힘을 받을 위험도 크다. 한국의 넷우익들 역시 역사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광주항쟁이 북한의 사주로 일어났다는 주장을 하며 ‘팩트’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의 세기가 저물고 있다


         그런데 조금 넓게 보면 학계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생산/인정해온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역사학이 전문 분과로 등장했으니 이제 200년 정도 지속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우에 따라 조선 후기의 실학사서까지 소급해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청구학회(1930년), 진단학회(1934년) 등이 결성되고서야 비로소 학회 중심의 학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근대 역사학계는 자연과학이 과학적 사실을 생산해내는 방식을 모방하여 학회를 중심으로 태동했다. 16~17세기 무렵부터 과학자들은 동료들을 초대하여 실험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을 공증 받았다. 진실은 과학자 사회의 인정으로만 효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학회(society)는 진실을 공증하는 공신력 있는 과학자 사회로서 자리매김했다. 19세기에 들어 역사학계 또한 자연과학의 체계를 뒤따라 학회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공증하기 시작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체계를 통해 생산되었다. 이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단독으로 역사적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역사적 사실은 오직 동료 역사학자들의 공증을 통해서만 학문적 진실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학회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학계가 그러한 공증을 담당했다. 학회지에 논문이 투고되면 보통 2~3인 정도의 심사자들이 이를 검토하여 통과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현재까지 가장 보편화된 절차다.

         근대에 들어 역사학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한국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다른 지역의 역사와 구분하여 ‘국사(國史)’라고 부르며 특별히 다뤄왔다. 국사는 과학의 이름으로 국가와 민족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힘이 있었다. 국가의 관점에서 한국사는 더 이상 세계사의 하위 범주가 아니었다. 세계사는 다만 한국사가 다루지 않는 여분의 세계에 관한 것일 뿐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국적 있는 교육’을 내세워 국사교육을 강화했다. 중등교육에서 국사교과가 독립되고, 모든 대학에서 국사가 필수교양이 됐다. 국가권력과 학계가 국사를 매개로 밀월관계를 맺었던 시기가 반세기 조금 못 미치게 이어졌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새에 사정이 바뀌었다. 국가가 역사학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던 시대가 급격히 저문 것이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나자 어느 보수적인 지식인의 선언처럼 역사가 끝난 듯이 보였다.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영원히 머물 것만 같이 보였다. 역사가 끝났으니 역사학에 지원을 해야 할 이유도 급격히 줄었다. 북한이 세계의 섬처럼 고립된 상황이라 한국 정부가 이전처럼 국사에 지원할 필요도 사라졌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소수의 학자들만 있으면 충분할 뿐이다. 국가의 취향만 변한 것이 아니다. 역사학을 포함해서 대학 인문학 역시 소수 엘리트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면 그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학계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다. 학술지 논문은 저자와 심사자 정도만 읽을 정도로 끼리끼리만 돌려보고 말 뿐이다 보니 국가지원이 없다면 연구를 지속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연구비를 받기 위해 국가의 입맛에 맞춰 연구계획을 짜는 일이 관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국가에 대한 의존도도 너무 높아졌다. 자립도가 상당히 취약해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국가가 학계를 공공연히 ‘왕따’시키겠다고 나선 이상 국가재정에 기대던 학계의 기존 습속은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렵다.

          학계가 직면한 위기는 돈 문제만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학계가 자기점검을 해볼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계가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려면 독립적인 재정도 확보해야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이 역사학의 인식론이나 방법론과 같은 ‘게임의 룰’을 공유하고 있어야 학계라는 공론장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양으로 평가되는 개인의 학술 업적 기준을 채우기 위해 논문을 생산해온 학자들에겐 학계를 돌아볼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역사는 학계에 맡기자’라고 주장하기도 참 머쓱해졌다. 학자 개개인이 개인사업자처럼 생존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첨예한 역사 관련 논란들을 깊이 있게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에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해방직후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학계에 대한 지원은 늘 부족했고, 그 뒤엔 오랜 군사독재 치하에 놓였다. 이런 역사 속에서 학문의 자유는 항상 위험에 노출됐다. 학자들은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공안 당국에 끌려가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기의 독립운동을 연구해도 사회주의 계열을 ‘잘못’ 다루면 공안사범이 될 판이었다.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이나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민주화 이후에 잠시 숨통이 트인다 했더니 곧이어 잔인한 생존경쟁이 학계를 위협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교수든 학생이든 누구나 1인 기업처럼 자기 스스로를 경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학계가 언제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냐고 반문할 법하다.


'학문의 자유'는 최소한의 보호장치


         그러나 역사학계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보다 근본적이다. 학계가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를 의심받으며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학계는 <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같은 갈등을 다룰만한 사회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까? 학계가 이러한 논란을 다룰 수 있을 건강한 공론장인가? 회의적이다. 앞서 말했듯 학술지 논문은 저자와 심사자들 정도나 읽고, 대중서는 논란이 되면 산발적으로 발표회를 열고 마는 현실이다. 익명의 심사자들은 심사평으로 “역겹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발표회에서는 나이 어린 학자의 비판을 “예의가 없다”고 정리해버리기 일쑤다. 이처럼 학문의 공론장이란 게 과연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희남씨의 질문은 뼈아프다. “지식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말해도 되냐?”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은 아마도 ‘그러한 자유는 없다’가 될 것이다. 기존 학계에 머물면서 학계 바깥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고자 내세우는 ‘학문의 자유’는 환영에 불과하다. 가뜩이나 학문의 공론장이란 것의 실체도 의심스러운데, 단순히 교수가 낸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호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학문의 자유’는 학자라는 신분에 따라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새로운 공론장을 함께 열어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보호장비에 불과하다.

         그간 법정과 학계라는 이분법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정작 학문적 공론장은 썩은 도끼자루가 돼버렸다. 이러한 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깊게 공감한다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박유하 교수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공개토론을 제안한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대학 안팎에 걸쳐서 활동을 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열어갈 공론장은 기존 학계로 수렴되지 않는 새로운 무언가일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공론장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 개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면서도 그러한 존엄성을 위협했던 권력과 폭력의 구조를 드러낼 수 있을 말들이 조율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필자소개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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