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가이드14]
지젝과 바울(I)
- 사람들, 지젝에게 갈 길을 묻다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 웹진에서 무어를 통해 이야기했듯이 다시금 인문학에서 성서 읽기가 시작되고 있다. 성서가 이천년의 시간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보다 서구 기독교의 정치적 경제적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패도의 정치 폭력에 신음하던 자들의 텍스트 또한 성서였다. 미국 자동차 여행중에 머문 값싼 허름한 인터넷도 되지 않는 방에서 심심한 마음에 서랍장을 열었을때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 책이 성서이듯, 성서의 생명력만큼은 쉽게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생명력만으로 작금의 인문학의 성서읽기의 이유를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성서 읽기를 독려하는 진보지식인들은 여전한 기독교의 힘 때문이라도 진보적 성서 해석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 말도 옳은 말이지만 지금의 현상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왜 현대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이 성서와 기독교를 다시 말하는지는 그들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방식에서 이해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웹진에서 지적했듯이 과연 그러한 읽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대답해 보아야 한다.
이번 웹진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흥미있는 이론을 전개하는 학자중에 가장 대중에게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의 기인, 슬로야보르 지젝(Slavoj Žižek)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저서인 [죽은 신을 위하여] (Puppet and the Dwarf)에 대해서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 것이고 여기에서는 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밝히지만 나는 철학을 전공한 학생도 아니고 지젝에 대해서는 과문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웹진의 내용이 지젝에 대한 처음과 끝이 아니다. 또한 여기에서 말해지는 라깡, 칸트, 헤겔, 알튀세르등의 인물들은 오직 지젝이 말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더욱이 그러한 지젝의 말을 필자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본 글은 지젝을 미국에서 스타로 발돋움하게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기본으로 다루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 다룰 지젝의 기독교 담론을 이해할 만한 수준까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지젝이 유명해진 대표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고집하는 학자가 아니라 이전의 대가들의(칸트, 맑스, 헤겔, 라깡) 충실하고도 삐딱한(?) 해설자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시대에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이들을 현실의 담론 속에서 되살려서 다시금 재해석하고 그들의 논리를 이용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나 후기구조주의에 맞서는 기백은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그럼 이러한 감탄사의 이유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서론에서 밝히듯이,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가지이다. 첫째,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둘째, 라깡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을 새롭게 이해한다. 셋째, 앞의 두개의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립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본다. (Zizek 2009, xxx)
1.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후기구조주의의 특징을 간단하게 말하면, 리얼리티,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실재를 건져올리기 위해 언어를 이용하여 닻을 내리면 그 닻은 실재의 대상과 닿는 순간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리 저리 잡히는 것은 계속되는 언어의 연쇄일뿐 실재는 그 안에 없다. 그러므로 진리란 없다. 모든 개념은 ‘차이와 반복’을 통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니 반복한다고 언제나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는다. 즉, 차이와 반복을 통해 계속 생성하는 운동을 지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로 규정된 세상이다. 구조주의가 실재하는 세계가 하나의 언어적 구조를 통하여 나타나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봄으로써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물과 이별할 수 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비록 당신 앞에 사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과라는 언어로 규정된 먹어보면 어떤 감각으로 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은 것이 진정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식상한 비판이지만 지젝의 후기 구조주의와 데리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지나치게 이론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것에 있다. 헤겔식으로 보면 후기구조주의의 코멘터리는 같은 이론적 토대에서 무한적인 반복의 해석을 제공할뿐,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지는 못한다. (ZizekSlavoj 2009, 174) 이에 대해 맑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후기 구조주의의 이러한 형식을 맑스주의적으로 풀어내어 후기-자본주의의 비평적 토대를 만들었는데,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한 해체주의적 독법자체가 후기-자본주의의 징후라고 비판한다. 지젝은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한다.
지젝이 리얼이라고 말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실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데리다는 메타랭귀지라고 부른다. 후기구조주의와 데리다는 이 메타랭귀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라깡 또한 이 리얼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노래의 가사 처럼 ‘못 가지는 너’ 가 아니라 ‘가질 수 없는 너’이다. 즉, 가질 수는 없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은 꼭 남기는 것이다. 지젝은 데리다가 결국 ‘가질 수 없는 너’를 포기하기 위해 메타랭귀지를 포기하고, 그 결과로 모든 언어를 메타랭귀지로 만들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물질 뒤에 존재한 신은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라고 말해버리면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이 신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범신론) 라깡은 이와 달리 ‘결핍’ 즉, 가질 수 없다라는 것을 그의 관점의 핵심으로 놓았다. (Zizek 2009, 176) 바로 내가 너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언어는 대상을 가리킨다. 소쉬르는 사인의 구조를 통하여 대상-언어의 관계에서 이른바 언어만 따로 떼어내어 사인(언어)=기표(signifier)+기의(signified)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즉, 언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 없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것과 목소리와 같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사인이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고 근대 언어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만약에 여기서 사인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세계를 언어의 세계, 또는 상징의 세계라고 한다면 문제는 이 언어들과 실재들을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 규정하고 대상과 언어의 관계를 해체시켰다. 지젝의 라깡은 이 언어의 세계, 상징의 세계에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잊는 거미줄과 같은 세계의 자리를 잡는 하나의 중요한 시그니파이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결핍이다. ‘가질 수 없는 너’의 결핍은 비록 가질 수는 없지만 ‘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굳게 서서 다른 거미줄들을 안정시킨다. 그것은 ‘결핍’이므로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Object a이다. 기의 (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이다. (Zizek 2009, 177)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와 같이 충만으로 가득차서 모든 세상의 운동의 원인이 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텅비어서 결핍된 아무런 의미가 그 안에 없는 어떤 기표이다. 이 기표가 표시하는 것은 실재 대상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결핍이다. 이 결핍이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없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없다’라는 것이 명확하게 존재하므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그저 없다는 후기구조주의의 언술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 된다. (Zizek 2009, 180) 즉, 라깡을 오해한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여기에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 기억해 놓아야 하는데, 바로 Kernel이란 단어이다. 이 단어의 정의는 ‘핵심’을 뜻한다. 지젝은 핵심이란 표현을 쓸때, kernel과 core를 쓰는데 커널이란 표현은 바로 결핍된 상태 자체가 핵심이 되는 것을 뜻한다. (Zizek 2009, 181) 이 표현은 다음에 기독교에 대해 ‘perverse core and subversive kernel’을 할때 다시 설명하겠다. 이 기의가 없는 기표인 ‘대상 A’(object a), ‘리얼’(실재), 또는 결핍된 기의(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와는 다른 ‘더 리얼’(the Real)이 있다.
the Real, 바로 '너'
바로 ‘너’이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리얼’이다. 원래 ‘더 리얼’은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것을 상징계 (Symbolic order: 인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이해일 것이다.)로 가져오기 위해 상징화할때 그 충만함은 상징을 거치면서 결핍이 된다. ‘너를 가지기 위해 너라고 불러서 데리고 오는 순간 가질 수 없는 너가 된것이다.’ 이 결핍은 구멍으로 나타나있고 이 구멍을 중심으로 상징계는 구조화되어있다. (ZizekSlavoj 2009, 192) 여기서 잠깐, 지금까지의 내용이 정치사회적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보자.
그래프 I
그래프 II(Zizek Slavoj 2009, 114)
두번째 그래프는 좀 더 복잡한데, 지젝은 ‘소급의 효과’ (the effect of retrovers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먼저 빗금친 $가 원쪽으로 와서 운동을 시작한다. 첫번째 그래프에서 어떻게 주체가 되기위해 호명되고 상징계를 통과해 빗금친 $가 되는지를 말했지만, 사실 이미 주체는 빗금쳐저, 상징계에서 호명되어 있다. 일단 기표(Signifier)의 운동은 $를 두번 만나고 목소리 (Voice)가 된다. 여기서 목소리는 운동 이후에 남은 나머지를 뜻한다. 이 그래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타자 (O:the big Other)인데 처음에 예를 든 것이 기독교였으니 기독교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바로 상징의 코드(Symbolic code)를 대변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대타자, 기독교 사회에서는 기독교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모든 기표들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s(O)는 기표들이 대타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빗금친 $는 대타자를 뚫고 대타자에 의해 이미 결정된 기표를 뚫고 다시 귀환한다. 여기서 귀환한 주체는 대타자에 의해 동일시된 I(O)[ego-ideal:상징적 동일시]가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호명된 주체, 빗금쳐진 주체$는 대타자를 만나고 다시금 대타자에 의해 설정된 기표들을 만나 귀환하면서 대타자와 동일시(identify)된다. (Zizek 2009, 115) 즉, 대타자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데, 쉽게 설명하면 이제 주체는 자신이 바라는 어떤 것이 되지 않고 대타자가 바라는 어떤 것이 되고자 한다. (원래 주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알 수도 없다. 주체 자체가 기표와 대타자의 만남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지면서 나는 어떤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 이때 주체는 마치 자신이 원해서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대타자(O)에 눈에 비친 자신을 상상하면서 대타자의 눈에 좋은 신앙인을 훌륭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라깡의 말인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들어맞으며, 이것이 바로 상징적 동일시(I-ideal)의 의미이다. (Zizek 2009, 117)
중간 부분 왼쪽의 e란 상상적인 자아 ‘imaginary ego’이고 i(o)는 상상적 동일시를 뜻한다. (Zizek 2009, 119) 대타자를 통해 동일시[I(O)]하는 것과는 달리 상상적 동일시 (ideal-ego)는 타인의 무엇을 부러워 하여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빗금친 주체 $와 대타자(O)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상상적 동일시[i(o)], 또는 타인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아(e)를 형성할 수 있지만 주체는 끊임없이 대타자를 통해 상징계로 나아간다. 그것이 사회에서 ‘나’라는 주체로 살아갈 이름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맨위 왼편의 S(O)에서 시작해보자. 처음에 리얼과 더 리얼에 대해 이야기한것을 상기하자. 더 리얼(the Real)은 절대 가질 수 없고 그것이 상징계로 들어오면 리얼(real)이 되는데 이 리얼은 충만함을 모두 잃어 버리고 결핍된 기표 (Signifier)로써 상징계를 지탱하는 누빔점(nodal point)가 된다고 하였다. 이 텅비어 있는 기표(Signifier)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남근이며 아버지의 법이다. 상징계를 지탱하고 있는 아버지의 법은 금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언제나 충만하지 못한 결핍의 상태이므로 그 금지를 어기려는 의도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라깡은 향유(Jouissance)라고 부른다. 애초에 충만했던 더 리얼(the Real)이 리얼(real)이 되면서 그 충만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향유(쥬이상스)는 그 충만성을 찾는 인간의 또 따른 욕망 운동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비어있는 대상 a(object a)를 찾아 계속운동하여 다시금 $<>D에 다다른다. 여기서 D는 상징적 요구(Symbolic demand)를 말한다. (ZizekSlavoj 2009, 138) 주체에게 요구된 상징적 요구를 뚫고 주체의 욕망의 그래프에 귀속되지 않은채 거세된 결과를 낳는 향유의 운동은 주체에게 더 리얼(the Real)에 대해 끊임없이 속삭이고 상징계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주체에게 끊임없이 알려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판타지이다. 주체를 다시 불안하지만 텅비어있는 S(O)에 귀속시켜 주는 것이 바로 라깡의 판타지 공식인 $<>o이다. 바로 주체와 상상적 타자가 결합되는 곳이다. 바로 이 판타지가 대타자(O)의 결핍을 매워주고 리얼(real)의 결핍을 매워주고 향유에 의해 나타나는 충격을 감싸준다. 중요한 것은 이 판타지야 말로 이 그래프의 중심이며 불안한 주체를 안심시켜 다시금 상징계에 머물게하고 상징계의 기표 [s(O)] 에 안전하게 안착하게 한다. 바로 이 판타지적 효과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이론을 뽑아내는데 이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것이다. 판타지에 대하여 지젝은 ‘불안의 종교’인 유대교에 반해,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바로 이 환상 효과를 사용하여 주체의 불안을 없애고 안정화 시켰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아버지 신의 사랑을 확증함으로써 주체의 불안을 사랑으로 채운다. 즉, 대타자가 자신을 내어줌으로 주체의 비어있는 불안과 욕망을 채워주는데 그 순간에 대타자의 빈 공간또한 이미 주체 안으로 들어왔기에 해결되는 것이다. (ZizekSlavoj 2009, 130) 이를 지젝은 정확하게 하나의 판타지라고 보았고 그 판타지가 작동함으로써 비어있는 대타자(O)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상 짧게 살펴본 지젝의 욕망의 도식을 필자는 ‘만능 도식’이라고 부르는데, 지젝의 저서에서 애매한 부분을 만날때는 이 도식을 상기하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도식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이해하고 어떻게 맑스와 헤겔을 통해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살펴보자.
<참고문헌>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9.
Zizek Slavoj.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New York : Verso, 2009.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