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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다시, 어리석은 삶 (김윤동)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6. 4. 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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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리석은 삶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우리는 모든 일이 다 벌어지고 난 이후의 일을 알기에 그렇게까지 마음을 졸일 이유는 없지만, 성서에는 어리석기도 이렇게 어리석을까 싶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삭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 중 하나다. 지금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 중 두 가지만 조금 해 보려 한다.


장면 1. 모리아 산


    여기 야훼 하나님에게 번제를 드리러 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 아브라함은 일찍이 예전부터 그리 똑똑하고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 아니었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온 가족과 재산을 싸짊어지고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떠나서 생고생을 자처하였고, 다 큰 조카가 다른 부족에 납치를 당하는 곤경에 빠지자 목숨을 걸고 가신들을 거느리고 멀리까지 가서 전쟁을 벌여 기어코 찾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그는 수도 없이 어리석고 무모한 짓을 일삼던 자였다. 이 날의 번제도 사실 야훼 하나님의 무모한 명령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누군가 이 사실을 먼저 알았었다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욕하며 뜯어말렸을 그런 일 중에 하나다.

    아브라함의 어리석은 전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못지않게 우습고 어리석은 이가 있었으니, 그의 아들 이삭이다. 그 정도 똥오줌 가릴 나이에 번제도 몇 번 드려본 아이라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처음부터 아비에게 물어봤어야 할 질문이 있었다. 대체 “제물이 어디 있는지” 말이다. 그 당연한 질문을 제단이 있는 바로 아래에 와서야 질문하는 그 어리석음이란! 제물이 준비되어 있다는 아비의 말만 믿고 산을 올라 갔는데, 결국 닥친 일은 자기에게 오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이없고 황당한 순간에 두 어리석은 이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그 ‘어리석은’ 아들은 아비가 제단 위에 오르라고 하자 정말 올랐다는 것만 기록해 놓았다. 큰 저항이 없이 말이다. 이야기는 결국 극적인 하늘의 음성으로 자식 살해의 끔찍한 현장은 면하게 되었고, 그 집안의 씨가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창대한 계약이 맺어졌지만, 생과 사의 아주 얇은 경계에 날카롭게 베일뻔한 두 어리석은 이들 부자 사이에는 얼마간의 미묘하고도 민망한 침묵이 흘렀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장면 2. 우물


    이 어리석은 아들은 결국 어른이 되어서도 어리석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의 어리석음은 그가 우물을 파는 창세기 26장의 이야기에서 또 한번 드러난다. 정착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자 물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게 지혜로운 일이었건만, 아비의 어리석음을 닮아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못하고 그는 또 야훼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유랑하여 가게 된다. 우물을 파는 일은 물을 얻는 일이기에 농사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물론, 이삭은 블레셋 그랄 땅에서 농사가 잘 되어 거부(巨富)가 되었지만 결국 ‘굴러온 돌’이었던 그는 그 땅의 토박이들에게 시기를 받고 모든 우물이 메워지는 봉변을 겪는다. 우물만 메워진 게 아니다. 그 땅의 왕으로부터 쫓겨난다. 자신은 성실히 일했을 뿐이고, 또한 풍요의 복을 받은 것 뿐인데, 어리석은 이삭은 두말없이 순순히 쫓겨남을 당한다. 하루 아침에 거처를 잃은 그와 그 가족은 골짜기로 숨어든다. 겨우 안정적이었던 정착민과 거부(巨富)의 삶에서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지긋지긋한 난민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쫓겨난 삶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봉변 당했던 그 우물을 찾아가서 다시 팠다. 과거 힘이 있던 시절에는 별 볼일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본래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우물에마저 시비를 건다. 기껏 다시 파 놓은 우물인데, 큰 ‘싸움(에섹)’이 나고 또다시 귀중한 우물을 내준다. 뜨거운 뙤약볕에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우물을 판다. 새 우물을 파자 이윽고 다투었던 그 불한당 같은 놈들이 또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대적(싯나)’하자 또다시 생명과도 같은 우물을 내주고 만다. 한 번 파기도 힘들다는 우물을 세 번씩이나 하고서야 이삭은 물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대체 이 어리석고 무모한 일들을 일삼은 이야기들을 성서는 왜 기록해 놓았을까? 아니, 그저 기록한 것이 아니라 칭송하기까지 할까? 소위 이렇게 사리에 밝지 않고, 세상 물정 모르는 짓을 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왜 ’믿음의 조상’이라고까지 일컬어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의 뿌리로 삼았을까? 사실, 따지고보면 이삭 외에도 성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 행동한 이야기가 여과없이 기록되어 있다. 노아가 만든 배, 갈렙과 여호수아의 무모한 정탐보고, 룻이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타지에 남은 일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이 행한 어리석은 일은 믿음의 본보기로 기록되어 있다. 크게는 역사서에 나오는 왕과 국가가 시행한 정책들에 대한 평가기준, 지혜서에 나오는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에 관한 판단 준칙들, 선지자들이 외친 수많은 예언과 상징행위들, 교회의 성립과정에서 벌어진 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들의 이야기까지 성경은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 곧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사렛 출신 촌뜨기 목수 청년, 권력의 변두리만 돌다가 십자가에 고꾸라진 그 정치범을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행태는 또 무어란 말인가?  



    우리가 이 수수께끼를 풀어가기 위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과연 ‘어리석음’, 그 정체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 문제를 짧은 글을 통해 그 질문에 모두 대답하기는 벅찬 일이다. 대신 얼마 전 한글로 번역된 체코 출신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아비탈 로넬(Avital Ronell)의 저작 『어리석음』(아비탈 로넬 지음, 강우성 옮김, 2015, 문학동네)은 ‘어리석음’을 다시 보게끔 만드는 통찰을 제공해 준다.  


    그는 ‘어리석음(Stupidity)’을 퇴치하려 애쓰고, 또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시도들이 곧 ‘유혹’이자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대할 때 보이는 불쾌하고 짜증섞인 반응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어리석음은 그런 물질성을 초과하고 훼손하며,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몇 차례 승리를 거둔 뒤 퇴각하고는, 완강하게 거부하며 집으로 실려온다. 그러고는 복귀한다. 또한 어리석음은 본질적으로 소진 불가능한 것들과 연계되어 있기에, 지식을 피로하게 만들고 역사를 지치게 하는 그 무엇이다.[각주:1]

  

    로넬은 이런 ‘어리석음’에 대한 경멸어린 반응들은 계몽주의가 주창한 ‘앎의 주체’,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사유를 단련하여 어리석음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다는 기대는 계몽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각주:2] 데카르트 이후 질주해 온 ‘주체중심주의’, ‘계몽의 빛을 통해 안다고 가정된 주체’는 두 차례의 큰 전쟁과 국가사회주의의 대량학살이라는 광기를 겪으며 이런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 당했고, 계몽주의는 힘을 잃는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세가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교화의 진리는 잠시 가려지고 어두워지며 본질적으로 바로 잡을 수 있는 하나의 일탈을 보였을 뿐이라는 듯이 계몽주의의 원리들은 재생되고 있는 것”[각주:3]이다. 로넬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국가사회주의의 흥기에 맞선 (…) 자유, 국제주의, 그리고 “인간적인 것의 도덕성”에 관한 지속적 관심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장 아메리의 『죄와 속죄의 저편』같은 결정적 증언에도 반영되어 있다.”[각주:4]고 말하며,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 계몽주의의 거대한 폭력을 목도했음에도, ‘달리 의탁할 데가 없었을 수도 있고, 폭력이 행사된 이후의 유일한 마지막 희망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각주:5]이라 평한다.  


    그렇지만, 로넬은 계몽주의가 어리석음의 영원한 반란을 봉쇄하거나 거부하거나 진정시킬 만큼 그렇게 강력한지[각주:6]를 질문하고 있다. 그의 대답은 역시 ‘아니오’이다. ‘어리석음’이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물질’ 같은 형체를 지닌 형상도 아니며, 사회와 성격의 사실에 불과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사유의 구조 그 자체[각주:7]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리석음은 아주 뿌리 깊게 우리 안에 퍼져 있어 실제로 주체의 형성에 선행하고 그 형성이 결코 완성되지 못할 것을 늘 고지한다. 오히려 어리석음은 라깡이 말한 ‘그것, das Ding(The Thing)’과도 흡사하다. 어리석음, ‘그것’은 존재를 북돋아주기보다 세절분쇄의 공포와 환상에 대면시키기까지 한다.[각주:8] 로넬이 ‘그것 das Ding’과도 같이 작동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묘사를 들어보자.  


    어리석음은 우리가 가장 취약한 순간을 노리고 어슬렁대며 또다른 기습을 준비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바로 그 때 어리석음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우리를 위압하고, 실제로 일말의 동정심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리석음은 자서전을 쓰는 우리의 노력을 장악하여 우리의 ‘나’를 대신하며, 그로 인해 소심해진 ‘나’는 수치심에 사로잡힌다.[각주:9]  


    그리스도교 신앙은 온통 이 ‘das Ding(The Thing)’들의 부조화스러운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점인 십자가는 어리석음이고, 늘 삶의 조화를 깨뜨리는 ‘그것’으로 작동한다. 고린도전서 1:23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표준새번역)” 바울 자신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 질서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Scandal(걸려 넘어지는 것, 장애물, 부정행위, 추문)”이며, 당시 이성적 수준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이방 및 헬라 세계에는 “Foolishness(어리석은 일)”이다. 당시 깨나 책을 읽었다는 이방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진리에 정통해 있다고 생각했고, 유대인들은 수천년간 이어온 종교적 법칙을 통해 세상을 통달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 모든 것에 균열을 내었다. 십자가 사건은 모두가 쓸모 없다고 여긴 모퉁이 돌을 이용하여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집을 지은 사건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사회와 인간 세계의 통념 그 이상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확장하고 계속적으로 창조하시는 분으로서 창조주이시다. 어줍짢게 둘로 가르는 열매(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에 대항하는 섭리자의 방식은 ‘제 3의 지대’를 열어젖히는 방식이다. 늘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자기를 ‘선’의 영토에 구겨 넣어 안주하기 좋아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제 3의 영역을 ‘굳이’ 만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파문을 일으키신다. 그래서 성서에서 ‘믿음’이라 부르는 행위의 방식은 질서와 기존의 흐름을 깨고 방해하며 등장한다. 마치 예수의 강론 중에 어린 아이가 모든 흐름을 뚫고 들어와 예수의 품에 그저 안겨 해맑게 웃는 방식으로, 네 명의 용기 있는 친구들 덕에 지붕으로부터 줄에 달아 내려오는 그 병자처럼, 예수가 말한 그 ‘하나님 나라’는 불시에 도래한다.  


    우리는 다시 계몽주의 이후-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 SNS의 발전을 등에 업고 다시 ‘지식’의 이름으로, ‘앎’의 이름으로 재현될 것만 같은 ‘빛의 폭주’는 과거 계몽주의가 남긴 상흔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인간의 그러한 계몽의 기획은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되어 왔고, 계몽의 빛이 빛나면 빛날수록 인간의 폭주에 대한 경보음일 때가 많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어리석음’은 인간과 세계가 살고 있는 ‘삶’ 그 자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어리석음, 그것(das Ding)이 거기에 있음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를 제안한다. 직면하고 직시할 때, 우리는 타자와의 어렴풋한 교감과 세계와의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에 언급한 이삭의 어리석음을 떠올려 본다. 모리아 땅으로 가는 내내 제물이 없음을 알고도 묵묵히 뚜벅뚜벅 걸어갔고, 결국 자기의 자리가 제단 위 한 가운데였음을 안 그 순간에도 순순히 그 시간을 견뎌 죽음 너머의 하나님 뜻을 완성하고자 했던 이삭, 우물을 파고 파고 또 파도 빼앗기고 빼앗기고 또 빼앗겨도 다시 묵묵히 삶의 우물을 판 이삭.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어리석은 자’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1. 아비탈 로넬, 강우석 옮김, 『어리석음』 (서울 : 문학동네, 2015). 19쪽. [본문으로]
  2.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50쪽. [본문으로]
  5. 위의 책, 51쪽. [본문으로]
  6. 위의 책, 52쪽. [본문으로]
  7. 위의 책, 47쪽. [본문으로]
  8. 위의 책, 37쪽. [본문으로]
  9. 위의 책, 3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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