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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4) (황용연)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6. 12. 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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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4)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3) 남한 사회의 사회적 균열의 시작 – ‘민중’의 출현

     (4) 남한 사회의 내부합의의 동요와 붕괴

     (5) 남한 민족주의의 분화와 분열


    3. 남한 사회에서의 ‘무능력자’와 ‘무자격자’ 형성의 구조

     (1) 민주화 시대 ‘시민’의 출현

     (2) 남한 경제구조의 신자유주의적 변화

     (3) ‘시민’ 내부의 사회적 배제와, ‘무능력자’와 ‘무자격자’의 낙인이 찍힌 ‘비시민’의 출현


   이승만/박정희 정부 때의 야당은 반공주의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고, 박정희 정부 때부터 등장한 민중운동은 반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포용했던 반면에,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와 거래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인 자유주의적 ‘시민’은, 위에서 언급한 기존의 야당과 민중운동 양자 모두에 대해 거리감을 두었다. 이러한 ‘시민’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사회의 규칙으로 수용하고,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과도한 반공주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기존의 사회운동, 특히 민중운동에도, 자신들에게 과도한 도덕적 부담을 강요한다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각주:1] 그리하여, 이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에 걸맞는 ‘상식’을 아는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표준의 담지자임을 자처했다.[각주:2] 이 ‘시민’들은, 정부가 자신들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저항을 불순한 것으로 비난했을 때, 즉 자신들의 ‘상식’이 정부에게 거부당했을 때, 촛불 시위나 인터넷 청원 등의 사회적 의례를 개발하고 실행함으로써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해 냈는데, 김진호는 이런 의례들을 ‘한국적 시민 종교’[각주:3]라고 칭했다. ‘시민’들의 인터넷 활용 능력은 이러한 ‘한국적 시민 종교’를 개발해 내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했다. 자유주의적 입장의 ‘시민’들에 의해 이러한 ‘시민 종교’가 개발된 이후, 보수주의적 입장의 시민들도 저런 ‘시민 종교’를 모방하여, 친미 시위를 개최하거나 카톡을 통해 루머를 퍼뜨리는 등의 의례를 개발해 내기도 했다.  


   1) '무자격자' 창출 현상


   그런데 이러한 ‘시민 종교’ 의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을 ‘무자격자’로 치부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광범위한 대중을 포괄하는 인터넷에서의 의례가 반복되는 중에, 이명박이나 박근혜 등의 보수주의적 대통령들을 일본식 이름으로 칭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이 자유주의적 시민들이 그 보수주의적 대통령들을 “외부인”, 즉 남한 사회 바깥의 인간으로서 남한 사회에 정당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인간으로 간주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보수주의적 정당과 언론에 대한 자신들의 과거 조사를 통해 그들의 과거 식민권력에 대한 협력 사실을 찾아 내고 이에 근거해 그 정당과 언론들을 “친일파”로 칭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주의적 ‘시민’과 정당들은 상대편을 “친북주의자”로 칭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심지어는 성소수자 운동에 대해서까지 이러한 호칭을 쓰는 경우도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을 ‘적’으로 간주해 증오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종북주의자’라고 욕하는 자유주의적 ‘시민’들 역시, 북한을 ‘이상한 타자’(식민주의적 뉘앙스까지 담긴)로 간주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시민’들 양쪽 모두 상대편을 ‘친일’/’친북’으로 딱지붙임으로써, 상대편을 ‘외부인’, 즉 한국에 살 자격이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윤형은 남한의 사회구조가 “북한인과 일본인의 민주주의”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각주:4] 이는 남한의 ‘시민’들이 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 모두,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상대편을 ‘북한인’과 ‘일본인’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된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을 민주주의의 대변자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이런 ‘외부인’ 창출 현상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에서도 나타난다. 보수주의적 시민들이 이전부터 그런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자유주의적 시민들에게도 그러한 적대감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런 적대감의 주된 명분은 그들이 ‘불법체류’를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국민’들만 받아야 하는 복지혜택을 일정하게 받는다(혹은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대감은 경우에 따라서 결혼 이주자들에게까지 확대되는데, 이자스민의 경우가 한 예이다.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자로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이자스민은 그의 당적과 전 국적으로 인해 비난받았다. 그가 이주노동자들의 ‘불법’체류 여부에 상관없이 그 자녀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거주권과 복지를 보장하고자 하는 법안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시민’들은 이 법안이 ‘불법’ 이주노동자들이 합법 신분을 얻는 데 악용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물론 보수주의적 시민들도, 그의 당적에 대한 비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비난을 그에게 퍼부은 것은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시민’들은, 그들의 상대편이나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 등을 남한 사회의 ‘합법적’ 주체로서의 ‘국민’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가져서는 안 되는 ‘무자격자’로 간주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의 연장선상에서, 남한 사회의 내셔널리즘은 ‘무자격자’를 창출해 내는 기제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자격자’ 창출 현상은 젠더편향적이기도 한데, 이를 드러내는 현상으로는, 여성들이 특히 병역 문제로 인해 남성들(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양쪽 모두)에게 동등한 시민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현상이 있다. 


   2) '무능력자' 창출 현상


   남한 사회의 직업 안정성이 약화되고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노동시장의 경쟁이 극심해졌다. 그에 따라 남한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직업을 가질 만한 자격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심대한 노력을 해야만 하게 되었고, 특히 생계 전선에 막 뛰어든 청년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중해졌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청년들은 안정된 직업을 얻기가 상당히 힘들지만, 그들은 안정된 직업을 얻기가 힘든 것은 자신들의 능력부족 때문이며 그러므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능력을 푸대접하는 사회에 저항하기보다는 더 많은 능력을 갖추는 데 집착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리하여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직난을 자신들의 능력부족으로 돌리게 되면서,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특히 자신들이 불의를 당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즉, 어떤 이들이 공정하고 평등한 고용이나 노동 조건 등을 요구할 때, 많은 남한 사람들은 그런 요구를 할 능력이나 자격도 안 되는 주제에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 개선이나 정규직화 등을 요구할 때, 많은 청년들은 그들은 정규직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며, 만약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면, 정규직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공정한 처사가 될 것이라고 반응한다.[각주:5]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장애인, 노숙자, 실업자, 노동빈곤자 등의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그들의 ‘능력 부족’을 명분삼아 정당화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능력 부족자’로 간주되는 이들과 소수자들의 사회적 상태는 점점 더 많이 중첩된다. 필자는 이러한 중첩을 “무능력자”의 창출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안정된 고용의 감소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변화에 기인한 경제적 양극화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더 많은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안정된 직업을 얻기는 상당히 어려우므로, 그들이 “무능력자”라는 딱지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무능력자”들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효율성을 성취할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로 간주되므로, 자본주의 사회에 쓸모없는 “잉여인간” 취급을 받게 된다.[각주:6] 그러므로, 이러한 “무능력자”와 “잉여인간”의 딱지는, 흔한 생각대로 장애인이나 실업자 같은 소수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경제에 깊게 연루된 한국 사회의 누구에게라도 붙을 수 있는 딱지임을 알 수 있다. 


   3) "비시민"들의 공통점


   “무자격자”와 “무능력자”의 공통점은 둘 다 “시민”들에 의해 배제당하는 존재라는 점이며, 이 때 그 배제가 “외부인”이나 “능력 부족” 등의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두 범주를 “시민”에 의해 배제되는 “비시민”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합치고자 한다. 이 때, 앞에서 “무능력자”를 다루면서 언급했듯, “비시민” 현상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사회 전반적인 현상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무자격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북한인과 일본인의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은, 누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는 “무자격자”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어떤 이가 “비시민”으로 간주될 때, 그가 어떤 일을 겪는지를 살펴 보는 데에는 소수자들의 고통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참조가 될 수 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각주:7] 


  • 소수자의 고통은 사회적 문제로 인정된다. 

  • 그러나 그런 인정이 존재한다고 해서, 소수자들에 대한 불법적이고, 위험하며, 무능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한 배제의 정당성이 의문에 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 심지어 민주화를 지지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 일부 시민들에게 그러한 배제의 정당화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그러므로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시민” 역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것을 확고하게 정당하고 있다. 

 


   4) 남한 사회와 민중신학에 대한 탈식민적 고찰의 실마리인 "비시민"


   한국 민중신학의 독특한 언명 중 하나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서남동에 따르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이유는,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 등의 진면목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의 고통 앞에서 폭로되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구원받을 지 못 받을 지가 바로 그 고통 앞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각주:8] 서남동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구원이란 오직 고난받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걸림돌이 되어, 그 걸림돌에 걸린 사람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에서 구원의 길을 탐색하는 핵심 통로는 고난받는 이들, ‘민중’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각주:9] 

   앞에서 논의했던 ‘비시민’은 민중신학이 증언하고자 하는 ‘강도 만난 사람’, 곧 ‘민중’의 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시민’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이들이 ‘비시민’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광범위하게 공유한다는 점과,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는 ‘비시민’으로 규정당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비시민’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은 배제를 폭로하고 그 배제의 명분이 틀렸다고 선언하는 일이 되고, 거기에서부터 배제의 시스템이 깨지기 시작한다. 즉, 증언은 ‘비시민’을 배제하는 바탕 위에 서 있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의 시작인 것이다. 엄기호의 표현을 빌리면, ‘시민’의 입장에서의 슬로건이 “사회를 보호하고 사람을 폭로하라”라면, ‘비시민’의 입장에서의 슬로건은 “사람을 보호하고 사회를 폭로하라”이다.[각주:10] 

   ‘비시민’의 배제에 동참하는 ‘시민’들은, 그 배제를 정당화하는 근거, 특히 내셔널리즘이나 자본주의 등등의 이데올로기를 광범위하게 공유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내면화하고 있는, 미국/일본이나 북한을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은, ‘무자격자’를 창출하고 그들을 배제하는 주된 근거의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하위파트너로 세계화된 경제에 참여하려는 ‘제국의 눈’을 갖고 있는 ‘자유주의적’ 시민들이 내면화한 자본주의는 ‘무능력자’의 창출과 배제에 주된 근거가 된다. 따라서, 남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배제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배제 안에 뿌리박혀 있는 남한 사람들의 내셔널리즘과 제국주의적 욕망 양쪽을 모두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탈식민 사상과 운동은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을 모두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각주:11] 천 꽝싱의 주장은 남한 사회의 현실을 분석, 비판하는 데 좋은 참조점이 된다. 특히, 천 꽝싱이 제안하는 ‘비판적 혼합’과 ‘타자 되기’의 방법론, 즉 식민화를 겪은 주체들끼리의 상호 동일시를 통해 연대를 구축하는 방법론은 민중신학에도 좋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각주:12]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비시민’은 남한 사회 내의 ‘강도 만난 사람’들, 즉 민중이며, 따라서 구원의 시금석이 된다. 따라서 남한 상황에서의 민중신학의 주 임무는 ‘비시민’의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남한 사회의 타자인 ‘비시민’의 배제의 현실을 증언함으로써 그 배제를 거부하고 그 타자와 연대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비판적 혼합’의 방법론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게 될 것이다.  


   4. 결론


   노암 촘스키의 한 강연에서 어느 MIT 학생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바람직한 발전의 모델을 이룬 나라가 현실 세계 중 어디라고 보십니까?” 촘스키의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한국(South Korea)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딛고 일어나서, 다른 나라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동시에 독재 정권에 항거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해 냈습니다.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와 인터넷 보급률을 자랑할 정도로 첨단 기술이 온 국민들에게 골고루 퍼졌고, 2002년에는 네티즌의 힘으로 개혁적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정도로 풀뿌리민주주의가 발전했습니다.”[각주:13] 

   이 에피소드에 촘스키의 반응이라고 소개된 내용에서는, 남한 사회의 자유주의적 ‘시민’의 관점인, 탈식민국가로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 소망하는 나라로 남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소망은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적 비전 중 하나로 공식화되어 있기도 하다. 민주화 역사 속의 많은 사건들이 현재 공식적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민소득 4만 달러로의 성장을 위한 경제적 기반 구축”이 공식적인 경제적 비전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마리 토끼 쫓기는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비시민’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비시민’의 출현은, ‘비시민’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도 ‘두 마리 토끼 쫓기’가 가능한 것인가라는 비판적 의문의 실마리가 된다. ‘비시민’의 존재가, 그들의 배제에 근거하여 남한 사회의 식민 이후의 경제적/사회적 구조가 유지되는 주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한, ‘비시민’은 남한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실존의 가장 심층을 건드리는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비시민’에 대한 배제를 거부하는 것은 사회적 실존의 급진적 변화가 동반되어야 가능하며, 이런 의미에서 ‘비시민’은 신학적 주제가 된다. 민중신학이 타자로서의 ‘비시민’의 이슈에 신학적으로 응답한다면, 남한의 타자로서의 북한이라는 이슈와, ‘시민’에게 내면화된 제국주의적 욕망이라는 이슈와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민중신학의 ‘비시민’ 증언 작업은 필연적으로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의 동시 추구라는 탈식민의 관점과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한윤형. 안티조선운동사(서울: 텍스트, 2010), 249~250 [본문으로]
  2. 위의 책, 247 [본문으로]
  3.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서울: 현암사, 2012), 68 [본문으로]
  4. 한윤형 “종북과 극단적 민족주의의 차이는?”, 프레시안 2015년 3월 12일 게재,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610 [본문으로]
  5.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고양: 개마고원, 2013). 19 [본문으로]
  6. 최태섭. 잉여사회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3), 82~84 [본문으로]
  7. 졸고,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이다”-민중신학적 관점의 주체성 탐구”, 김진호/김영석 편저, 21세기 민중신학-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서울: 삼인, 2013). 387 [본문으로]
  8.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107 [본문으로]
  9. Kim, Jin-Ho. "The Hermeneutics of Ahn Byung-Mu." In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s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s, ed. Yung Suk Kim and Jin-Ho Kim.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13, 22 [본문으로]
  10. 엄기호,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1). 192~193 [본문으로]
  11. 천꽝싱, "세계화와 탈제국,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이정훈, 박상수 편, 동아시아, 인식지평과 실천공간(서울: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2010), 89 [본문으로]
  12. ______, 제국의 눈(창비: 2003), 153 [본문으로]
  13. 이원재, 주식회사 대한민국 희망보고서(서울: 원앤원북스, 2005), 177~17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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