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비평의 눈 :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10] '아버지학교'의 '귀족 아빠' 되기 (김진호)

[연재]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김진호)

by 제3시대 2017. 2. 15. 09:46

본문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열번째[각주:1]


'아버지학교'의 '귀족 아빠' 되기

자기계발의 시대 아버지의 귀환 프로젝트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지난 글에서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의 시대에 개신교 대형교회의 대안교육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공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는 기독교적 공부법을 찾아 여러 묘수들이 등장했다. 다니엘학습법은 그런 묘수의 하나로 매우 성공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교사 주도적인 공부법이 아닌 대안적 방식은 없는가, 그런 노골적인 성공지상주의 아닌 품위 있는 방식은 없는가, ......, 이런 고민들을 담아 등장한 것이 일부 대형교회들에서 대두한 ‘귀족교육형 대안학교운동’이다.

    이곳에선 학습자의 자기 주도적 공부가 강조되고, 대학입학에 모든 것이 집중된 입시형 공부만이 아닌 인간화 교육, 아니 성도화(聖徒化) 교육이 수행된다. 그 정신은 몽매한 대중을 복음화하고, 국가를 하느님의 뜻에 걸맞는 나라로 만들기 위한 엘리트로서의 ‘성도’를 키우는 데 있다.

   이번 주제는 또 하나의 기독교적 자기계발 프로젝트로서 가족회복운동이다. 특히 아버지 변신 프로그램으로서 ‘아버지학교’를 이야기하려 한다.


아버지의 부재


   허문영은 1990년대 한국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을 ‘소년성’이라 불렀다. 위기의 사회를 구원하는 영웅적 존재에 열광하는 대신, 부조리한 사회에 홀로 던져진 소년의 이야기에 관객들이 깊게 공감을 표했다는 것이다. 그 소년들을 지켜줄 아버지는 없었다.

   이런 풍경은 2천 년대에 와도 다르지 않다. 아니, 민주주의 시대 그리고 소비자본주의 시대라는 세기적 변화의 길목에서 기성세대의 가치와 불화하면서 절망했던 1990년대의 퇴행적 소년성보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와 더불어 전개된 2천 년대는 훨씬 더 절박했다. 한 번 겪기에도 벅찬 무시무시한 신자유주의적 재앙이 두 번이나 거세게 휩쓸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사회 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지켜줄 아버지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하소연하는 소리가 분출했다. 위기에 처한 아들을 위해 목숨 걸고 악당과 용감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상상속의 아버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윤동욱 기자는 2006년의 기획에서 현실의 아버지에 관한 다섯 가지 기억을 이렇게 요약했다. “말없는 아버지, 힘없는 아버지, 때리는 아버지, 이혼한 아버지, 죽은 아버지.”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최악의 이야기는 숨겨져 있다. “어쩌면 그 소년들이 맞서고 있는 사회, 그 나쁜 체제 자체가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소년’이라고 했다. 소녀가 아니다. 여기서 소년들은 ‘퇴행적 남자들’을 말한다.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들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질서와 불화하면서도 아버지의 권력을 동경한다. 저항하기보다는 숨어버리고, 조절되지 못한 힘을, 폭력을 더 약한 이에게 남용한다. 남자들은 그런 소년으로 남겨졌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을 동경한다. 한국사회의 이런 왜곡된 섹슈얼리티 양상을 해석하기 위해 여성신학자 김나미는 과잉남성성(hypermasculinity)이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차용했다. 미성숙한 소년성이 신자유주의와 만나면서 퇴행적 소년들의 사회는 마초적 폭력에 휩쓸렸다. 


'아버지학교'


   몸은 어른인데 퇴행적 소년성의 증상을 보이는 ‘올드보이’들이 남편이 되었고 아버지가 되었다. 가족의 위기 혹은 해체에 직면한 ‘올드보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이 ‘아버지학교’다. “아버지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선다.” 한국기독교 아버지학교의 효시이고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아버지 프로젝트인 ‘두란노아버지학교’의 슬로건이다. 가족의 위기에 대한 대안은 ‘아버지의 변신’에 있다는 얘기다. 그 변신을 위한 프로젝트가 ‘아버지학교’다. 

   두란노아버지학교는 1995년에 온누리교회의 출판기업인 두란노서원의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고, 2001년에는 독립조직으로 확대 개편한 ‘두란노 아버지학교 운동본부’로 발족했으며, 2007년에는 사단법인이 됨으로써, 아버지 프로그램은 명실공히 아버지 프로젝트로 발돋음했다. 현재 국내 지부가 80개이고, 해외 61개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지금까지 아버지학교 수료자가 30여만 명이나 된다.  

    게다가 온누리교회 교인으로 아버지학교를 수료한 이들이 종교를 불문하고 도처에서 두란노아버지학교 프로그램을 차용한 ‘아버지학교’를 개설하고 있고, 여러 공기업과 사기업에서도 두란노아버지학교를 모범으로 하는 아버지학교들이 만들어졌다. 또 수많은 교회들에서도 아버지학교 붐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아버지학교 프로젝트만이 아니라, 선교 프로젝트로서 부각되기도 했다. 올해 7월에 열린 세계선교전략회에서 아버지학교는 한국형 선교모델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이제 아버지학교는 아버지 변신 프로그램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아버지학교 프로젝트


    그렇다면 두란노아버지학교가 꿈꾸는 아버지 변신 프로젝트는 무엇일까? 위의 슬로건에서 보았듯이 가족의 복원이다. 가족이 위기에 처한 것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것이니 아버지를 소환하여 가족을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그냥 전통적 아버지가 귀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실은 아버지가 된 이들 자신이 전통적 아버지로 인해 삶이 굴절되었다. 위에서 말한 용어로 하면 ‘굴절된 존재’는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성이라는 악령에 들린 퇴행적 남자다. 

    하여 두란노아버지학교의 첫 번째 미션은 아버지가 되어야 했던 소년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화해하게 하는 것이다. 권력을 홀로 장악하여 가족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던 아버지, 그이로 인해 꺾였던 그때의 열정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뒤틀린 흔적으로 몸에 잔류하여 성숙한 어른으로의 성장을 방해한다. 미성숙한 소년성의 어른, 이 ‘올드보이’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권력이 없으면서도 종종 아버지의 권력을 모방한다. 조절되지 않은 미숙한 권력은 아내와 자녀로 하여금 마음을 닫게 하고 관계를 닫도록 만든다. 가족의 위기는 이렇게 왔다고 아버지학교는 이해한다. “아버지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선다.”는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하여 아버지와의 기억을 소환하여 그이를 폭군이 아닌 아버지로 회상함으로써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화해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변신은 텔레비젼의 가족회복 프로그램처럼 신파적이다. 수많은 마음의 상처들로 너덜너덜해진 관계를, 그것의 문제를 깨닫고 함께 데이트하고 눈물로 화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아버지학교는 초점이 아버지에 있다. 아버지가 변신하는 것, 그 선행적 행위가 가족회복의 실마리라는 것이다. 왜 아버지가 초점인가?

    단순히 ‘아버지’학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른바 기독교적 가족개념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같은 바울 위서들 속에 나오는 이른바 ‘가훈교리’들이 그 근거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남편/아비가 아내와 자식의 머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골로새서〉 3,21 “자녀들을 들볶지 마시오”나 〈에베소서〉의 병행구절인 6,4 “자녀를 성나게 하지 말고” 같은 구절들은 가정의 머리로서 자신의 뜻에 따라 힘과 완력으로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녀를 돌봐주고 차분하게 이끄는 대화적 부성을 강조한다. 아마도 2세기 초, 바울의 위서들(친서가 아니라 바울의 이름을 차용한 저작들)은 폭력적인 아비의 훈육 풍조를 비판하며 자녀에게 이성적으로 이끄는 아버지상을 강조한다. 이것을 저명한 제2성서(신약성서) 학자이자 교육학자인 게르트 타이쎈(Gerd Theißen)은 ‘사랑의 가부장주의’(liebe-Patriarchalismus)라고 불렀다. 권력의 가부장주의가 아니라 사랑의 가부장주의에 기반을 둔 아버지의 변신 프로젝트가 아버지학교라는 것이다.


'귀족 아빠' 되기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많은 아버지들은 깊은 공감을 표했고 변신을 모색했다. 무수한 간증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무수한 성공 스토리는, 어쩌면 위기의 가족이 아닌, 이미 변신한 아버지, 이미 잘 형성된 가족관계를 신학적이고 사회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간증들은 자신과 가족의 신앙적 올바름에 대한 무의식적인 홍보행위에 다름 아닌지도 모른다. 이 프로그램의 수료자 중 하나인 고문전문가 이근안의 간증이라고 소개된 동영상은 목사가 된 그가 자신의 과거를 뼈아프게 청산하고 변신하고자 한다기보다는 도구화된 변신의 알리바이로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이런 극단적 사례만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그럼에도 5주 5회의 교육만으로, 그것도 감정을 과잉동원하는 신파적 프로그램만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새 삶의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기는 뭔가 과장된 듯하다.

    아무튼 두란노아버지학교는 참가자들에게 이 기획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는 자긍심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일터(관공서, 교도소, 회사 등)에서 아버지학교를 개설했다. 물론 그들은 일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책임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적 엘리트로서, 자신의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 아버지학교를 통한 ‘사회적 계도’의 소명을 수행하고자 했다.

    물론 최고위층의 엘리트만 아버지학교의 수강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5주 동안 토요일 3시부터 9시까지 이 프로그램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아내와 데이트하기, 자녀와 데이트하기 등의 숙제를 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벤트 비용이 추가된다. 또 생계노동에서 한발 물러서서 가족을 위해 살겠다고 가족에게 공표하도록 요구받는데, 기독교적 가훈교리에 기초한 가장은 여전히 가족의 생계를 돌봐주는 존재다. 그런 이가 가족에게 공표하는 가족을 위한 삶의 리스트에는 안락한 소비생활을 위한 지출 가능이라는 숨은 항목이 담겨 있다. 그러니, 수강료(10만 원)는 비교적 저렴함에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한 실비용은 그리 저렴하지 않다.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도 대체로 중상위층의 사회적 위상이 요구된다.

    그런 이들이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아버지의 자격을 얻는다. 아버지학교는 그런 정당성을 그이들에게 부여한다. 가족은 수료식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부여된 신앙적 인준을 공유하게 된다. 즉 아버지학교는 그 스스로에게, 그리고 가족과 사회에게 그를 ‘웰빙 귀족 아빠’로 공인하는 사회적 장치다. 그는 웰빙 귀족으로서, 그런 아빠의 가치를 사회에 널리 전파하는 자로서 소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