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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그런 나라는 없다, 그러나 있다 (김진호)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09. 6. 2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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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1(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

그런 나라는 없다, 그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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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솔로몬 왕이 강제 노역꾼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주님의 성전과 자기의 궁전과 밀로 궁과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의 성을 재건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9장 15절


팔레스티나에 철기문명을 선도했고 국가적 체제를 앞서 이룩했던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팔레스티나 거의 전 영역을 병합했으며, 요르단 강 건너의 모압과 암몬 족속을 예속화했고, 남쪽과 북쪽의 상당부분의 영토를 장악했던 나라, 하여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소제국. 성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가 이러했다고 말한다. 이만한 영토의 나라는 이 지역에서 이전이나 이후 누구도 이룩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종주권을 주장해 왔던 제국 이집트는 혼인관계를 통해 선린을 도모해야 했고, 지중해 문명의 최고봉을 장식했던 페니키아와도 대등한 국제무역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는 웅장한 도성이 건설되었고, 헤롯의 성전에 비견되는 화려한 성전이 건조되었다. 또한 지방 곳곳에 수많은 도시들이 세워졌고, 특히 몇몇 요새도시는 훗날 아시리아 제국을 막아낸 아합의 군사력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예시하고 있다.

그뿐인가. 솔로몬이 지었다는 시들은 대대로 성전 예배의 노래로 찬송되었으며, 나무와 풀과 동물의 분류학이 발전하기까지 한다. 예술이면 예술, 지식이면 지식, 지혜면 지혜, 군사력이면 군사력, 어느 하나도 모자랄 것 없는, 그야말로 팔레스티나의 황금시대가 기원전 11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부를 장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의 묘사에 걸맞은 다윗-솔로몬의 나라는 역사상 실재한 적이 없다. 솔로몬의 시편들이 그의 것이 아니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그의 당대로 보이는 기원전 10세기 말경에 예루살렘에는 문자사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 동식물의 분류학이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화려한 성전이나 웅대한 궁전터도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방에 세워졌다는 요새들은 적어도 한 세기 이후, 그것도 (유다 왕국이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것임이 밝혀졌다. 조잡한 도성의 흔적, 문자사용을 통한 체계적 통치술의 부재 등, 알 수 있는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어느 모로 보든 팔레스티나와 그 인근의 영토들을 병합한 전대미문의 제국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해서 1980년대 후반 이후 다윗-솔로몬 제국 가설은 성서 역사학계에서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하고 말았다. 또한 다윗-솔로몬의 나라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분열하여 두 나라로 나뉘게 되었다는, 이른바 통일왕국 가설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었다.

그런 나라는 없었다. 다윗-솔로몬의 시대, 팔레스티나 남쪽의 지형이나 유적 등을 통해 추정해보면, 이 지역에 등장했을 법한 나라는 기껏해야 아직 국가 단계라고 할 수 없거나 잘 보아야 국가로 막 진입한 나라, 그것도 북쪽의 나라들보다 보잘 것 없는 빈약한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잠시를 제외하면 이 나라는 팔레스티나의 약소국 가운데 하나로, 변변한 국가제도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후진적 나라였으니, 그 시조인 다윗-솔로몬 시대가 팔레스티나의 황금시대였다는 상상은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역사비평학적 성서주석들은 아직도 낡은 가설을 전제로 하여 집필되고 있고, 신학교 학생들은 낡은 가설에 기초한 성서 해석을 역사적 해석처럼 배우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들은 낡은 역사적 정보들과 긴밀히 결합된 신앙제도에 기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새로운 역사적 성과들은 이제까지의 성서학, 성서교육, 신학교육, 신앙제도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단 다윗-솔로몬 시대만이 아니라, 제1성서(구약성서) 시대 전체, 그리고 제2성서(신약성서) 시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서 역사학의 최근 조류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대안을 내놓으라고 반문한다. 사실 1990년대 이후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다수가 공감하는 안정된 가설은 확립되지 않았다. 다수의 성서 역사가들이 그러한 대안 가설을 향해 매진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는 그건 불가능하다.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일은 자료가 축적될수록, 역사해석학적 인식이 발전할수록 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 역사학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백합화처럼 아름답지는 못합니다.’(「마태」 6,29) 이 말 속에는 솔로몬의 시대가 황금시대였다는, 천년이 지난 예수시대의 대중과 예수 자신이 공유하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여 사람들은 그 시대에 대한 상상을 통해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를 그리고 있다. 곧 예수와 대중은 솔로몬 시대에 대한 판타지를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한 기대를 의사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시대 역사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가 시사되어 있다. 곧 역사학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학문적 논의여야 한다는 얘기다. 마치 안병무 선생이 「마가복음」이 그리는 예수전은 예수의 독백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오클로스 대중이 나누고 있는 꿈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주-객 이분법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에 항거하고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는 과거의 유일무이한 존재로 있다가 사라져간 예수라는 개체적 존재가 아니라, 오클로스를 매개로 하는 예수와 마가공동체의 시간대화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선생은 ‘제2의 마가복음’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전태일 사건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오클로스를 매개로 하는 시간대화에 관한 예수전이다. 그것이 바로 민중신학이다. ‘증언의 신학’이라고 이름 붙은 그 신학운동은 바로 민중(오클로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며, 바로 이것, 한국의 민중-예수 이야기가 바로 ‘제2의 마가복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 시간대화에 관한 현대 역사학적 문제설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성서해석은 바로 민중신학이다. 그것을 비록 학문적 언어로 세공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반면 오늘날 서구학자들의 대부분의 역사비평적 주석학이나 실증주의적 성서역사학은 학문적 세공은 있으나 역사적 문제설정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성서 역사학의 최근 동향이나 과제가 아니라, 그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적 의제와 만나고 있다는 데 있다. 성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우리와 대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유의미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성서 그 자체로는, 최근의 성서 역사학이 밝혀낸 것처럼 허황된 역사 이야기들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성서 얘기를 더 해보자. 흔히 간과하는 사실은, ‘성서’라는 책이 신앙의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근대’ 이후라는 점이다. 활판 인쇄기술이 발달하여 제작비용이 저렴해짐으로서 책은 비로소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또 바로 국가 단위의 공교육이 제도화됨으로써 잠재적 독자로서의 문자대중이 등장하였다. 이른바 ‘책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서양 근대를 대변하는 종교로 그리스도교는 재구성될 수 있었다.

이미 종교개혁기에 성서가 자국어로 번역됨으로써 근대어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후 신앙제도만이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제도의 형성에 ‘성서라는 책’ 혹은 ‘책으로서의 성서’를 매개로 하여 발전하게 된다. 나아가 근대의 지식과 성서의 이해는 상호 연관되어 발전하며, 지식 엘리트는 동시에 성서학자이기도 했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전망은 성서를 매개 삼아 대중과 교호하였다. 하여 서구의 사회는 기독교를 낡은 시대의 유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의 종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서’는, 기독교를 근대종교로 재탄생할 수 있게 한 매개이지만, 동시에 근대적 종교이기에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던 위기의 핵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것은 바로 ‘독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책의 독서는 읽는 이의 체험이 개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해서 사람마다 책에 대한 취향이 생긴다. 어떤 이는 러브스토리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대하 서사물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무협지를, 어떤 이는 판타지물을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이더라도 책을 읽는 때마다 취향이나 기대가 다르게 나타나곤 한다. 한데 독서가 독서하는 이의 삶, 취향 등과 얽힌다는 것은, 책이 그 자체로 의미가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그때마다의 사정과 얽힘으로써 완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데 성서의 독서에는 개개인의 체험이 끼어들 수 없다. 성서는 이미 완결된 책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전(Canon)이라는 성서의 외장(外裝)은 그러한 ‘선험적 완결성’의 다른 이름이다. 개인이 자기 삶을 가지고 끼어들어 해석하기 이전에 성서는 이미 답을 갖고 있으니, 개인이 할 일은 그 답에 준해서 자기를 돌아보면 될 일이다. 다르게 읽는다든가 항변한다든가 재해석한다든가 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다. 그러니 성서는 결국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인 셈이다. 아니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성서가 해석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석을 독점하는 존재가 있으며, 그이들은 그것이 마치 신탁을 수행하는 자처럼 자임함으로써 자신의 해석 행위가 해석이 아님을 주장할 뿐이다.

결국 성서는, 성서를 둘러싼 책의 제도는 독서를 가로막는다. 이미 완결된 책이라는 전통적 믿음이 성서의 의미 속에 엉켜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의미를 완결짓는 용도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이전의 형식과 관련이 있다. 고대의 책은 국가가 임의적인 법을 확정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임의적인 계약을 확정짓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즉 고대의 책은 구술의 해석적 기능을 제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책은 읽는 이마다 저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 즉 책은 근대에 와서 해석적 텍스트로 자리잡은 것이다.

전근대적 책으로서의 성서, 그 전통이 근대적 책으로서의 성서를 포박하려 했던 것이다. 하여 신앙제도는 교리라는 이름의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성서를 읽도록 제한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경험을 개입시킬 수 없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독서일 수 없다. 해석이 불가능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원칙이 강고하게 작동할 때 사람들은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성서읽기라는 행위를 수행한다. 가령, 몇 번 읽었다는 것이 독서를 대체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근대 이전에는 구술이 해석을 수행하는 매체였기에 신앙은 삶과 만날 수 있었다. 한데 책의 종교가 된 근대 그리스도교에서 성서라는 책이 해석을 불허하게 된다면 신앙은 끊임없이 삶과 어긋나게 된다.

책의 종교에서 책(성서)을 해석하지 않으면 신앙은 삶을 표현할 수 없다. 전통에,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저마다 자기의 삶을 담아낼 수 있을 때 책을 매개로 하는 신앙은 가능하며 그것이 성찰에 이르게 한다. 매순간, 독서할 때마다 해석대상이 되어야 한다. 매순간 다르게 읽어야만 살아 있는 책이 된다.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어야만 성서는 하느님의 소리로서의 성서일 수 있다. 하여 그래야만 성서는 책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우리의 일상에 개입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 하여 성서는 매순간 다시 쓰여야 하며, 매순간 새롭게 자기를 드러내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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