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



심범섭*



   스물 두 해 전 군대 시절 어느날 한 동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죽음을 탐구하는 철학자가 되겠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 무렵 자신에게 “검은 옷을 입은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젊고도 젊은 그 시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 결심을 금방 잊어먹고 오랫동안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이 나에게 사색과 배움의 가장 큰 주제가 되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가까운 분이 작고하신 일이지만 아마 그 동안 살아오면서 죽음을 더 많이 보고 들으면서, 또 내 몸의 노화를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관심이 점차 자라왔으리라고도 생각한다.

   몇 달 전 강릉시 포남동에 있는 대지서점에 갔을 때 사장님한테 죽음에 대한 책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장님은 그렇다고 하시면서 몇 년 전부터 죽음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말에 이어 “100세 시대니까!”라고 덧붙이셨다. 사장님의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의학발전으로 수명이 연장되는 것이 죽음의 경험을 이전과는 다르게 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새로운 관심으로, 더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장님이 말한 이유가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고령화 사회이므로’라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더 생각하게 된다면, 한 사회도 평균 연령이 높아질수록 죽음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오늘의 시대가 이전보다 감정과 종교 및 전인적이고 인문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죽음은 강렬한 슬픔과 두려움과 연관되고 종교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태양과 죽음은 오래 바라볼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죽음은 생각을 시작하기에도 생각을 지속하기에도 쉬운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기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거의 언제나 제기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이다. 이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방법은 ‘죽는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라고, 조금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럴 때 잘 죽는 것은 당연히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하지만 더 일상적인 용법에서 ‘죽는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경우에 따라 며칠 또는 몇 달 또는 몇 년이 되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사는 것을 뜻한다. 이 기간을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만약 당신이 한달 후에 죽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드러내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나에게 잘 죽는 것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기간에만 아니라 언제라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또 늘 이렇게 산다면 죽음에 임박해 삶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가 없을 것이다. 또한 죽음이란 언제든지 우리에게 닥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다시금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잘 살면 잘 죽는 것이라는 견해는 설득력이 크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 물음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이며, 수 많은 짧고 긴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만난 한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한 좋은 대답으로 내 마음에 감명을 주었다. 이 표현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를 소박하게 생각해 보았다.


1. 사랑과 생명


    우선 사랑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하겠지만 그래도 사랑에 서로 다른 개체들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있음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책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에서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을 인간이 혼자있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이루는 연합”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큰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도 “사랑은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이다”라고 말한다.

    두 학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사랑과 생명을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은 실재하는 존재이고 사랑은 생명을 움직이는 힘이다.” 프롬은 사랑의 구성요소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달리 말해 사랑은 생명을 더 증진시키는 활동으로 이해되며, 이는 사실 프롬이나 틸리히 같은 대학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직관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부재를 뜻하는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과 조화하기 위해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반응인 듯 하다.  

    윤동주 시인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할 때에도 사랑을 죽음과 대비되는 생명의 힘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는 사랑이 죽음에 저항하거나 죽음을 극복하거나 죽음과 조화하는 “가장 강력하고 심오한” 힘이라는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우리는 이 싯구에 숨어 있는 최상급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랑


    앞에서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했는데, 윤동주 시에서 “죽어가는”의 의미는 이 가운데 어느 것일까? 태어나는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그것이 “서시”라는 시에 담긴 고양된 도덕적 정서 및 완벽주의와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 바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시인에게서 인지되는 완벽주의와 이상주의에 이런 넓은 의미가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살아가는 과정, 곧 죽어가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 과정에 고통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인생은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를 맞아야하므로 서글프지만 그 과정에서 이러저런 괴로움이 많아서 또 슬픈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신경쓰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필연보다는 당장 닥쳐온 구체적인 고민거리이다. 흔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태어났다고 하지만 세상을 둘러보면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구체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 가운데에서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큰 비중을 차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울 때 우리의 생명은 위축되며, 그러므로 고통은 죽음에 더 다가선 상태이다. 우리는 생명을 더 많이 누리길 바라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럴 때 누군가 고통을 이해해 주면 우리는 하나되는 느낌을 받고 위로를 받는다. 달리 말해 위로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확장을 느끼는 것, 내 안에서 생명력이 더 증가하는 사건이다. 이렇게 생명력이 부족할 때 새로이 공급받는 것이 이미 생명력이 넉넉할 때 더 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경험인 듯 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는 이미 아쉬울 것 없는데 더 풍요로워지는 것보다 결여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답은 이것인 것 같다. 곧, 부족한 생명력을 더해주는 것은 그 대상이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생명을 아예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이 넉넉할 때 누가 나한테 밥 한 그릇을 주는 것보다 당장 굶어죽을 지경에 밥 한 그릇을 주는 것이 훨씬 더 고맙고 또 의미있을 것이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경계에 가까이 간 존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덜어주거나 없애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영어 속담도 생겨난 것 같다. 히브리 성서 <시편> 1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개인과 공동체가 좋은 삶을 추구할 때, 결여와 고통이 없는 것이 풍족하고 즐거움이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함을 암시한다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히브리 성서 <이사야>서에 이런 말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50:4). 이 말을 하는 이사야도 위로하는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위로의 말을 어떻게 할 지를 하나님이 알려준다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축하의 말을 해야할 지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는 사실도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에는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들도 있다. 말보다는 적절한 행동적 조처나 물질제공이 더 시급한 경우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 등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그러나 최선의 방안이 말이든 다른 것이든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사야의 말에 암시된, 말로 위로하기의 어려움은 사실 모든 위로하기의 어려움을 대변할지도 모른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얻었다고 하는데, 위로를 잘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동시에 “위로학”을 하는 노력을 경주해야할지도 모른다.

    이 위로학은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마태복음 10:16)과 폭넓은 공부와 면밀한 분석 등을 요구할 것이다. 이 위로학에서 놓칠 수 없는 진실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경우 위로자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하듯 “인생의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엄연한 진실로부터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싯구에 그 영혼이 공명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위로학의 길을 가고 훌륭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3. 보편적 사랑


    이어서 주어진 구절에서 우리의 생각이 머물러야 할 표현은 “모든”이 아닐까 한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한 비범한 의식, 일상적 의식에서 벗어난 확장되고 고양된 의식을 본다. 일상적 의식에서 사랑은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에 국한되기 쉽다. 마태복음 5:46-47에서 예수가 하는 말도 바로 이러한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가 강조하는 포괄적인 사랑을 결심하는 비범한 의식은 “서시”에서는 생명있는 존재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시인의 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간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 또한 죽는다!’라는 인식일 것이다. 생명있는 존재는 ‘나를 비롯하여’ 모두 죽는다라는 필연을 직시하는 데에서 나를 비롯하여 모든 생명있는 존재를 사랑해야겠다는 의지가 태어났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런 인식과 다짐에는 깊은 공감과 유대의식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대의식을 힘있게 잘 표현한 문장으로서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사제였던 존 돈(John Donne 1572 ~ 1631)이 쓴 구절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나 알아보려 절대로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 조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이러한 유대의식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정의에 온전히 맞아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이미 하나임을 상기할 때 우러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틸리히가 (앞에서 소개했듯이) 사랑을 “분리된 것을 연합시키려는 추동”으로 정의한 다음, 이 연합이 “본질적으로 함께 속하는 것[이] 분리”된 다음 “재연합(reunion)”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도움이 되는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이 통찰은 존 돈과 윤동주 두 시인이 말하는 넓은 사랑을 더 충실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넓은 사랑을 “모든”이라는 양적으로 포괄적인 표현과 어울리는 “보편적”이라는 또 다른 양적인 개념을 사용해 “보편적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양적인 표현은 이런 사랑의 요건이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질적인 특성을 간과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 질적인 특성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동기에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진정한 보편적 사랑은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해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흠 없는 통로일까? 누구도 완벽한 통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완벽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하여, 닿을 수 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걸어가듯 계속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보편적인 듯한 사랑의 동기에 이기적인 추구가 우려할 만큼 도사리고 있을 때 이런 사랑은 가짜 보편적 사랑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6:1-4에서 예수가 하는 말은 이런 가짜 사랑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편적 사랑을 이야기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한데 힘을 합쳐 이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능력과 자원은 심하게 제한되어 있어 아무리 그 의지의 지향에서 “모든” 생명있는 존재(또는 모든 사람)를 사랑하고자 하더라도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한계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 돌보다가 이튿날 길을 떠나기 전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 . .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10:35)라고 말한다. 이때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함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자고 초대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주막 주인에게 이 초대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점도 있다. 왜냐하면 환자를 돌보는 비용이 두 데나리온 넘게 들어 자기 돈을 썼는데 사마리아인이 약속을 어기고 다시는 안 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때 많은 경우 현실적인 손해를 각오하거나 감수해야 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실천이 한계에 부딪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초대를 우리는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용기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맺는 말


    영국이 낳은 천재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1872 ~ 1970)은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어느날 밤 내연녀와 함께 호텔방에 있는데 갑자기 바깥 세상이 지옥이 된 듯 했다. 당시는 2차대전 중이었는데 그날 밤 독일군이 런던을 공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 러셀은 겁에 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온전한 두려움은 사랑을 내쫓는다.” 이 말은 요한1서 4:18절에 나오는 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를 뒤집은 것이다. 비록 러셀이 이 말을 한 상황은 격조가 없지만 이 말 자체는 요한1서의 진술처럼 사랑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다.

    사랑과 두려움이 인간의 모든 동기의 두 가지 근원이라는 이해와 더불어 사랑과 두려움이 양립할 수 없다는 요한1서와 러셀의 이해는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의미있는 통찰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의지는 두려움과 죽음의 어둠을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쫓아내려는 의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서시”는 조용한 독백처럼 씌여졌지만 이 시를 읽는 사람에게 이 빛을 확장하는 길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일깨울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고 말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함으로써 더 많은 사랑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죽음의 영역을 더 축소시키기를 소망한다.

    이 글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죽는 길로서 잘 사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주어진 싯구를 다루는 방식에는 적어도 한 가지 눈에 띄게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문장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를 논의에서 제외함으로써 내 해석 방식에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느낌이 더해지게 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음 번 글에서 이 수식어구, 그리고 (해당 문장과 함께 “서시”에서 시인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를 다루겠다고 계획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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