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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 바울신학가이드 22] 조르지오 아감벤 V - 호모 사케르에 대한 본론(2) (한수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7. 10. 1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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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22]



조르지오 아감벤 IV-호모 사케르에 대한 본론(2)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감벤이 보기에 여기서 성스러운 것이 가지는 성격(호모 사케 르)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에게 바쳐질 수 없으면서, 동시에 죽여도 법에 의해 심판받지 않는다는 두 가지 특성이 결합되어 있으며 이 성스러운 삶(호모 사케르)가 나타난 것은 법과 주권이 생겨날때, 즉 정치와 종교가 함께 배재의 영역을 만들어 낼때 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말을 듣다보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성서에서 찾아낼 수 있다. 바로 바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 [새번역])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논쟁을 행하면서, 율법을 통해서 들어온 저주, 곧 사망의 저주에서 풀려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명기 21-23절, 즉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다는 근거를 가지고(이는 바울의 해석학적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신명기의 콘텍스트는 예수의 십자가와 매우 다르다.) 예수가 바로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는, 거룩함에 들 수 없는, 정결하지 않는 생명이란 말이 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바울에게 나타나는 율법폐기론적 관점은 역으로 구약의 신에게는 드려질 수 없는, 신에게 바쳐질 수 없는 예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8 [새번역])


    한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극명하게 대조하면서 세상의 통치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다고 일갈한다.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가 그들이 지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서 세상의 통치자들이 불리우는 세력들 속에 로마 제국를 넣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바로 로마의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를 연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로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바쳐지지 못하는 생명이며 (율법 때문에), 세상의 법으로 죽임을 당하여도 그 책임이 발생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이다.

    아감벤은 2015년에 출판된 [Pilate and Jesus (빌라도와 예수)] (Adam Kostkotrans., Stanford University Press)에서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을 읽으며 예수의 재판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관찰을 보여준다. 아감벤은 요한복음은 절대로 크리시스 (심판하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베마(심판하는 왕좌)라는 단어가 나타난다.(2015, 13-14) 빌라도가 예수에게 왕이냐고 물어볼때, 예수는 자신의 나 라는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요한의 내러티브에서 군중들은 예수를 죽이기 원하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불경함과 제국에 대한 반란이다. 이 재판이 로마의 합법적인 재판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자. 문제는 빌라도가 예수에게 죽음을 언도했는지, 유죄를 판결했는지가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요한복음 19-13)


    빌라도는 예수를 데리고 분명, 자신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명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 재판석에 앉았다. (아감벤은 이에 대한 해석으로 “예수를 데리고 나와 재판석에 예수를 앉혔다.”로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한다. [헬라어 번역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번역은 마태와 누가에서 예수를 왕처럼 옷 입히고 ‘유대인의 왕ʼ이라 칭하는 장면과 도 연결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 27-26절과 누가복음 23-25절과 같이 빌라도는 요한복음 19장 16절에서 예수를 심판하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그를 “넘겨”(파레도켄)준다. 즉, 재판은 있었으나 심판은 없었다(2015, 51). 이러한 ‘미스테리ʼ한 예수의 재판의 귀결은 십자가이다.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가 로마의 법 안에서 이루어진 정당한 판결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바로 죽음에 넘겨진 것이다. 정당한 법적 판결이 아니라면 이를 정치적 또는 제사적 희생아라 볼 수도 없다. 즉, 예수야말로, 아감벤의 담론에서는, 호모 사케르, 죽일 수 있으나 신을 위해 희생되지도 못하고, 그를 죽인자가 벌을 받지 않는, 호모 사케르, 헐벗은 생명이다.


- 다음회에서는 이러한 성서적 읽기가 아감벤에게 어떤 결론을 주는지, 그리고 바울신학에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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