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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남의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1(심범섭)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1. 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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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1



심범섭*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에 잠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한 나이 든 독신 여성이 있다. 쟝 발쟝이 운영하는 공장의 여성 작업장을 감독하는 이 여인에 대해 소설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확고하고 공정하고 강직하며, 무엇을 주는 사랑으로 가득하지만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랑은 그만큼 지니지 못했다.” 위고는 주기, 이해, 용서를 사랑의 종류, 또는 사랑이 구현되는 방식으로 보았다. 그리고 위고의 이 말에는 이 사람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는 판단이 들어있다. 독자들도 이 사람을 답답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얼른 판단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이 세 가지 덕목에 모두 부요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실 남에게 무얼 잘 주는 덕목도 실천하기 어려우며, 남을 잘 이해하고 너그러이 용서하는 덕목은 더더욱 구현하기 어렵다.  

   사실 남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것을 넘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시험이라고 아예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다.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면 그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가 더 쉬워지며, 만일 그와 인간관계가 있을 때 그 관계를 더 낫게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는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려 할 때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할 지도 모른다. 인간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더 익숙한 존재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해다”라는 어두운 선언이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밝은 선언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몇 해 전 티브이에서 어느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사람의 뇌에서 불안과 공포 등을 담당하는 부분이 더 안쪽에 있어 이런 부정적인 정서가 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일부러 ‘불안해야지’ 안 해도 불안이 저절로 찾아오지요”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또 몇 해 전 어떤 계기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목록을 한번 인터넷에서 찾아본 적이 있다. 한 사이트에서 동양의 ‘희노애락애오욕’ 일곱 가지 범주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감정을 나열해 놓은 목록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전부 197가지 감정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긍정적인 것이 71 가지, 중립적인 것이 12 가지, 부정적인 것이 114 가지이다.[각주:1] 이런 분포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분 좋을 때보다는 안 좋을 때가 더 많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히브리 성경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할 때 받게 될 복과 순종하지 않을 때 받게 될 저주가 열거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저주가 복보다 월등히 더 많다는 것이다. 1-14절에서 복을 이야기하고, 15-68절에서 저주를 이야기하는데, (비록 엄밀하게 그 가짓수를 세는 것은 힘들지만) 대략 따져보면 저주의 종류가 복의 종류보다 세 배 정도 많은 것 같다. 이 차이를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이 인생에서 마주치는 일 가운데 나쁜 일이 좋은 일보다 확실히 더 많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 삶에는 기쁘고 즐거운 경험보다 괴롭고 힘든 경험이 분명히 더 많지 않은가?

   이렇게 익숙한 고통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느낌과 생각이 많이 태어나는 연원이 아닌가? 또 우리의 가장 큰 비밀이 잉태되는 이면이 아닌가? 또 우리의 성장과 성숙에 절실하게 도움을 주지 않는가? 또 우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게 병들이지 않는가? 또 아름답고 유익한 창조의 결실을 가져오지 않는가? 그래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단언해도 억지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인문학이 인간을 이해하려는 공부라면 ‘인문학은 고통학이어야 한다’고 말하고도 싶어진다.

   그렇다면 개인도 사회도 덜 고통을 겪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면, 그 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정말 많겠지만, 나는 이 글의 남은 부분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서투르게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번 글에서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경우들을 몇 가지 체계없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통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이해’라는 말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나는 “체험적 이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겪는 것과 같거나 비슷한 고통을 나 자신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해이다. 여기에는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이나 정서가 (많은 경우 강하게) 동반한다.[각주:2] 우리 속담에 “과부 설움은 과부가 안다”라는 것이 있다. 배우자를 잃고 혼자 사는 여성의 어려움을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잘 이해하는 경우를 말한다.

   고통에 대한 또 다른 이해는 “상상적 이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 어떤 것일까 상상할 때 얻게 되는 이해이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직접 경험 가운데 주어진 고통과 가장 비슷한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럴 때 어떤 구체적인 느낌이나 정서가 따라온다. 예를 들어, 나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알지 못 한다. 그래서 이런 슬픔을 감히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경험했던 슬픔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부모를 잃은 고통도 이러한데 자식을 잃은 고통은 얼마나 클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의 상상적 이해를 “고통 체험 번역”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번역은 대부분의 경우 어설픈 오역이지만 아예 번역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며 또 우리로 행동하게 하는 힘도 있다 할 수 있다.

   고통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은 “설명적 이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으로 고통의 성격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다. 달리 말해, 고통의 원인, 양상, 해결 방안, 예방법 등을 지식으로 머리로 아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많은 경우 구체적인 사례들을 관찰하고 분석한 것에 바탕하고, 따라서 일반론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에는 주어진 고통을 자신에게 이입할 때 따라오는 구체적인 느낌이나 정서가 없어도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생로병사> 같은 방송에서 중이염의 원인과 증상과 치료법 등에 대해 들으면서 이를 그냥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때 나는 중이염에 대해 설명적 이해를 얻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통을 나에게 이입해 어떤 느낌이나 정서를 체험한다면 이는 동시에 상상적 이해가 될 것이다.)[각주:3]

   이 세 가지 이해가 관련하는 방식과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 가운데 중요한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이야기하기 위해 ‘예비 아빠를 위한 임신체험’이라는 예를 살펴보고자 한다. 용인시 처인구 보건소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글에서 한 문단을 옮겨 본다.


예비 아빠는 주말 동안 6가지의 생활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데요. 임신 7개월에 해당하는 7.5k의 임신 체험복을 입은 채 집 안을 청소하거나 계단을 오르는 등 임산부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미션을 완료하고 미션 카드에 스티커를 붙여 표시합니다. 예비 아빠가 해야 하는 미션들은 사실 임산부가 매일매일 하는 일과들인데요. 임신 체험복을 입은 채로 미션을 수행하고 나면 아내의 마음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겠죠?[각주:4]


   우선 예비 아빠는 “임산부의 고충”을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고, 상상적으로 또는 설명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각주:5] 그의 임신체험은 임신부의 어려움을 무엇보다도 상상적으로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이 체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설명적 이해를 얻을 수도 있다.) 남성의 일상에서는 얻기 힘든, 임신부의 경험과 되도록 가깝게 설정된 직접 경험을 의도적으로 찾아나서는 것으로서, 되도록 체험적 이해에 가까운 상상적 이해를 얻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적극적인 고통 체험 번역을 위한 이러한 유사체험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참가하는 “24시간 기아체험”도 이런 예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사체험을 긍정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왕이면 체험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제는 사실 아주 상식적인 믿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믿음이다. 달리 말해,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하는 생각이 거의 모든 이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직접 경험이 없이 지식으로만 존재하는 이해, 곧 설명적 이해는 공허한 것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경우가 많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속담, “귤이 어떤 맛이라고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한번 직접 먹어보는 것이 낫다” 같은 말이 이런 태도를 반영한다. 사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공감을 통해 위로하거나 치유하는 데에는 체험적 이해가 가장 중요한 듯 하다.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소중한 개념이 된다.

   하지만 설명적 이해에는 그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우선 임신체험 같은 적극적 고통 체험 번역에도 설명적 이해가 중요하게 관여한다. 왜냐하면 예비 아빠가 구체적으로 어떤 고충을 경험해야 하는가는, 많은 임신부의 경험에서 추출한 일반론적인 지식, 곧 설명적 이해에 바탕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실증에 바탕한 설명적 이해는 예비 아빠에게 임신부의 고통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상황에서, 특히 고통을 예방, 경감, 제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아주 중요하며 이런 결과를 위해 복잡하고 정교한 지식이 필요한 경우, 사람들은 설명적 이해를 체험적 이해보다 더 신뢰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임신 여성들에게 건강한 임신 관리와 안전한 출산을 위해 ‘아이를 열 명을 낳아보았지만 의학교육은 받은 적이 없는 여인’과 ‘권위 있는 남자 산부인과 의사’ 가운데 누구를 찾아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남자 의사를 선택하리라고 짐작한다. 때로 “백견이 불여일문이다”라는 말이 더 맞는 경우도 있다.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목적을 향해 행동을 취할 때 이 세 가지 고통 이해는 각각 그 역할과 자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생각할 때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하는 요소로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맹자가 ‘측은지심’을 이야기하면서 드는 예가 한 예가 된다고 본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걸 볼 때 사람은 저절로 놀라움과 불쌍함을 느낀다고 맹자는 말한다. 이런 반사적인 반응 덕분에 우리는 이 아이를 구하려고 달려가게 되며, 따라서 이 측은지심은 고통이 더 적은 세상을 만드려는 노력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측은지심의 반응은 고통에 대한 한 이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답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이 즉각적이고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 설명적 이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나에게 같은 경험이 없어도 일어나는 반응이므로 체험적 이해와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측은지심은 내가 제시한 세 가지 이해 가운데 상상적 이해와 가장 가까운 것 같다. 이 반응은 상상적 이해의 한 종류 또는 측면인가?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할 때 우리 머릿속에서는 순식간에 이 아이가 우물에 빠졌을 때 당할 고통에 대한 상상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때 내가 인식하는 아이의 고통은 ‘어떤 심한 고통의 존재 자체’이지 ‘그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상상적 이해를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을 내 나름대로 느끼는 (번역하는) 것으로 정의하므로, 나는 지금으로서는 측은지심이 고통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상정하고 싶다. 고통의 세 가지 이해와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고통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직관’으로 규정하고 싶다. (이를 혹시, 거창한 용어를 빌려와 “고통의 전이해”라고도 이름할 수 있지도 않을까?)

   이 글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서투르고 체계없는 생각을 나누어 보았다.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이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 어떤 근본적인 직관으로서 이 이해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 삶에서 흔히 일어나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경우를 살펴보면서 고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고방식과 감수성을 계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출처: 주미의 미술치료 여행 http://ajmpt.blog.me/140208221758. [본문으로]
  2. 이 글에서 나는 ‘느낌’과 ‘정서’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느낌’은 “오싹한 느낌,” “어색한 느낌”처럼 우리가 보통 ‘감정’이라는 범주에 넣지 않는 내적 경험을 가리키고, ‘정서’는 “기쁨,” “우울함”처럼 어느 정도 폭(그것에 “빠져있다”는 느낌을 가능하게 하는)과 시간적 지속이 있으며 우리가 보통 ‘감정’으로 간주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물론 이 세 가지 이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을 모두 포괄하지는 못 한다.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예로서 무속인이 이른 바 “신기”를 통해 이해하는 것, 보통 사람이라도 때로 꿈이나 텔레파시 등을 통해 이해를 얻는 경우 등이 떠오른다. 이런 비전형적인 이해는 아직 내가 이야기할 준비가 되지 못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 것으로 한다. [본문으로]
  4. 출처: http://sotongsamsung.com/1491. [본문으로]
  5. 인용문에 쓰인 “임산부”라는 표현은 임신한 여성과 산모를 포괄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임신 여성만을 가리키는 표현은 ‘임신부’라고 하므로 이 글에서는 임신 여성을 뜻할 때 ‘임신부’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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