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보다 우려되는 그들의 “도덕과 상식”


조민아

(세인트캐서린 대학 조교수)

 

극우단체들의 오프라인 활동이 갈수록 가관이다. 지난 달부터 시작된 일간베스트회원들의 폭식투쟁에 이어, 9월 28일에는 서북청년단 재건을 표방한 20여명이 서울광장에 나타나 노란 리본을 훼손하려다 경찰에 저지당했다.

조국 교수는 29일 자신의 SNS를 통해, “다른 극우단체와 달리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결성은 형법 제114조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제 4조 ‘범죄단체조직죄’에 해당한다”며 검경의 수사를 촉구했다. 서북청년단이 어떤 조직인가. 대구 노동자 파업, 보도연맹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제주 4.3항쟁에 개입하여 20~40만명의 양민을 학살한 극우 민병대다. 특히 4.3발발 전후 이들이 제주 민중들에게 가한 물리적, 정신적 폭력의 잔혹성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들다(김관후, “역사로 보는 서북청년단, 대체 어땠길래?” <프레시안> 9월 29일). 테러조직의 재건을 지켜보면서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운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범죄에 가담하는 행위이다. 수사를 진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베, 엄마부대, 서북청년단재건위원회와 같은 극우 전위부대가 저지르고 있는 엽기, 아니 광기에 가까운 행각들을 단지 수사와 처벌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들이 갖고 있는 파급력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토록 후안무치의 행동을 일삼고 있는데도 이들의 활동이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고 있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자신의 정치성향을 밝히기 꺼려하는 익명의 대중들에게 무언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신호다. 누구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 이면, 이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념에는 대중의 공감대를 건드리는 어떤 것이 숨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패륜적 “광기”와 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이념”은 따로 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9월 29일자 <시사IN>에서 천관율 기자는 일베연구자 김학준씨와 함께 쓴 기사를 통해 일베 사고체계의 핵심적 키워드를 “무임승차 혐오” 코드로 지목했다. 일베를 비롯한 극우 보수자들이 주요 타켓으로 설정하고 있는,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무임승차”를 시도하고 있는 집단들은 여성, 진보, 호남이며, 최근에는 세월호 가족까지 포함되었다. 일베의 사고체계에서 이들은 “하는 일은 없으면서 떼를 써서 과도한 보상과 특혜를 받으려 하는 암적 존재”이다. 즉,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성실하게 국가의 요구를 수행하는 “애국 시민” 들과는 달리, 이들 소수자들은 자신의 의무는 방기한 채 특혜만을 주장한다. 따라서 일베가 말하는 “정의 구현”은 “소수자가 국가로부터 받는 보호”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이들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애국시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를 되 찾는”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다(천관율,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2014년 9월 29일 <시사 IN>”).  적어도 본인들은, 이러한 “상식”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구국의 희생을 감행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들에게 그냥 좀 “살살해”라고 말하고 싶을 뿐, 굳이 말리고 싶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일베의 이 “무임승차” 코드는 기사에서 지적한대로 그들의 엽기행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차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기여한 만큼, 투자한 만큼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윤리의 잣대로 작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임승차”는 “인간 본연의 도덕 감정과 정의감에 기반한 분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 잣대에 따라 살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일베의 행각 자체는 비상식적일지 모르지만 일베의 이념은 지극히 “상식적”이고,나름 “정의”롭고, “공평”하다.
 
광기와 “상식”은 사실 낯설지 않은 조합이다. 반면교사라고, 남의 나라 역사를 통해 이 불안한 만남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살펴보자. 지금까지도 가끔씩 되살아나는 미국의 악몽, 쿠 클럭스 클랜(The Ku Klux Klan), 그중에서도 연방법에 의해 몰락한 후 사그러 들었다가 20세기 초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미국 전역에 걸쳐 400만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렸던 제2기 KKK단이다. 제2기 KKK단은 1915년, 의사이자 목사였던 윌리엄 J. 시몬스(William J. Simmons)에 의해 조지아 주 애틀란타 근교에서 조직되었다. 제2기 KKK단이 정서적 공감대를 얻게된 배경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공포와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침범해 오는 이방인들에 대한 증오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증가된 이민인구는 1924년 악명높은 반이민법을 통해 제한되기 직전 그 절정에 이른다. 대규모로 유입되어 오는 외국인들에 의해 미국사회의 인종적 성격이 바뀔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미국의 주류, 백인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신들이 목숨걸고 수호해야 할 미국의 가치, 즉 “헌법, 성서, 인종분리”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집단들에게 린치를 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흑인을 비롯, 가톨릭신자들, 유태인들, 아시아인들, 독립적인 여성, 동성애자, 조합을 결성하는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포함된다.

제2기 KKK단의 활동과 번성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세가지 있다. 첫째, 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았던 이민자들과 소수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삶의 환경이 나아지지 않는 까닭을 이민자들이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그러기에 KKK 단이 자신들을 억울함을 대변하는 희망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째, 회원 중 목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은 물론이며, 이들의 폭력과 테러를 모른척 하거나 심지어 공공연히 지지 의사를 표하는 정치인들과 유력인사들 또한 수없이 많았다. 정치인들은 KKK의 모토를 자신의 정책에 반영하고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어 의회를 장악했다. 1924년 반이민법이 통과된 배경에는 이들이 있다. 셋째, 이들을 묶어 낸 것은 강력한 형제애였다. 극심한 가치관 혼란 속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함께 행동할 때 얻어지는 자긍심은 폭발적이었다. 여기에 “애국심”이라는 미국사회 불가침의 정서와 옛 남부에 대한 낭만적 향수가 보태져 “멋”과 “스타일”을 만들었다. 

굳이 병렬하여 비교하지 않더라도 KKK단과 일베를 위시로 한 극우보수집단들의 공통점은 가늠하기 쉽다. KKK단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 극우집단 또한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라 늘어나는 타자들을 수용하기 힘들어 하는 집단들이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비로소 시작 된 가치관의 다양화가 싫고 불편하다. 근면하고 성실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아버지 시대의 신화가 그립다. 비슷한 것은 정서 뿐이 아니다. KKK단과 종교인들의 야합은 극우집단과 보수 종교인들의 어딘가 모르게 닮은 행각을 줄창 보아온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KKK단을 등에 업고 출세한 정치인들 처럼, 공식, 비공식적으로 극우보수집단을 지지하는 보수 정치인들이 늘어나는 것 또한 비슷하다. 옛것에 묻혀 살고 싶어하는 취향까지 닮았으니, 유신시대와 심지어 서북청년단까지 불러 들이고 싶은 망령된 생각이 외롭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 모든 유사성 중심에 도저하게 흐르는 것, 이 두 집단이 갖는 가장 유사한 점이며 동시에 이들의 출현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부분은 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도덕성”과 “상식”이다. 즉, 내가 기여한 만큼 되돌려 받아야 하며, 그것이 가장 올바르고 정당하다는 이념이다.

미국 사회에서 KKK단은 이제 그 흔적이 미미하지만 이들이 기반하고 있었던 이 이념은 면면히 살아남아 미국 정치의 강력한 축을 이루고 있다, 사회복지 정책을 감소하고, 탈규제, 민영화, 감세 정책을 통한 민간기업 경제력 회복 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세력들의 모토에는 어김없이 이 “도덕과 상식”이 자리잡고 있다. 일베를 위시로한 극우집단들의 행동은 비판을 받을지라도, 그들의 “무임승차혐오코드”가 반응을 얻고 있는 것, 그들이 지향하고 지지하는 가치와 정책이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는 맥락을 본다면 우리사회에도 이 가치관이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에게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는 구조적 억압 따위는 소설에 불과하다. 소수자들과 약자들이 사회로 진출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노력을 안하기 때문이다. 복지와 특혜가 오히려 그들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있다. 억울하면 군대에 가면 될 것이고, 안되면 더 노력하면 될것이다. 그들의 생각에, 강해지면 누구나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사회는 지극히 “평등하다.”

KKK단과 일베, 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도덕, 상식”과 이들의 광기어린 “패륜” 사이의 간격은 사실 그다지 넓지 않다. 힘에 대한 욕망과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 약자에 대한 공포와 멸시, 성공하고 인정 받고 싶은 욕구, 소속감과 친밀감에 대한 강한 갈구가 덧붙여 진다면 이들의 “도덕과 상식”은 언제든 광기로 돌변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전체주의의 광기는 지극히 상식적인 대중의 정서를 기반으로 발생했고 성장했다.  이들이 단지 폭력의 파편에 머물지 않고 전체주의라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대중의 열망을 잘 이해하고 조직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극우집단들의 확산과 오프라인 활동을 보며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광기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도덕과 상식”이 확산되고, “무임승차혐오코드”가 먹혀들고 있는 광기의 저변이다. 그 저변이 단단하게 구축된다면, 설사 일베와 엄마부대와 서북청년단이 처벌을 받고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사회 소수자와 타자들을 폭력적으로 응징할 집단들이 다른 얼굴과 이름을 갖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KKK의 활동이 시시해진 미국사회에 네오나치, 반이슬람조직, 반동성애조직, 또 각종 종교집단의 형태를 띠고 극우 보수 집단의 출몰이 끊이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광기는 돌출되니 찾아내기 쉽다. 그러나 그 저변은 수사와 처벌로 찾아낼 수 없다. 면밀한 관찰과 일상에서의 인내심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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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루시다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이 세상에 존재를 알린 지 이백년도 안 된 사진은 그것의 선배 격이자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에게 ‘예술’이란 이미지를 선명하게 남겨준 숱한 천재들을 배출한 ‘회화’에게 향하는 음울한 콤플렉스에서 이미 벗어났는가.
사진의 역사적 흐름을 보자면, 대상의 절대적 재현이라는 사진만의 기능으로 말미암은 사실적 증거자료로, 또는 회화주의 사진과 같은 사진의 자기 탐색이 결여된 시기를 거쳐, 세계대전 등의 보도 사진이 보여주는 실재와 조작, 계몽과 선동,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안락, 정치와 미학 등의 혼재된 경험을 치르며 지금의 디지털 증강 사진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본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그 당사자로서의 독특한 지위를 사진은 향유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수전 손택의 말대로 모더니스트들이 ‘모든 예술이 음악이 되기를 갈망’ 했듯 이제 ‘모든 예술은 사진이 되기를 갈망’ 하는 시대에 사진의 위치가 있다.
우리 모두의 손 안에 폰카를 들고 다니며 모든 개인의 생활이 낱낱이 찍히며 원하는 모습대로 뽀샵되어 물리적 감각 없이 무제한 타인에게 전송되는 전대미문이 시대에 어찌 보면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란 책은 너무 고루하고 정적인, 그리하여 이 시대 사진 미학을 설명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에 출판된 이 책에서 바르트 역시 그러한 것을 예감하고 있다.

“사진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이며 거부의 침해의 시대, 파열의 시대, 간단히 말해서 초조함의 시대, 모든 성숙을 거부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이 존재했다’는 놀라움도 역시 사라 질 것이다. 그 것은 이미 사라졌다.... 나는 그 것을 목격한 최후의 증인( 반 시대성의 증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이 책은 그 것에 관한 고풍스런 흔적이다”  (P94)

바르트는 자신을 반시대성의 증인이라 말한다. 이미 도래한 새로운 감각을 거스르는 자로써 자신을 정의한다. 또한 그가 늘 사진에서 얻는 놀라움의 원인이었던 ‘그것이 존재했다’라는 존재론적인 감각도 사라질 것이라고 고백했으며 그것은 실재성 없이 컴퓨터 기술로도 대상 자체를 만들 수 있는 디지털 사진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왜 이 ‘고풍스런’ 책은 여전히 사진 미학을 논할 때 빠짐 없이 인용되고 거론되는 걸까?
그것은 바르트의 글이 사회성과 역사성을 배제한, 오로지 사진과 사진의 ‘대상’ 안으로 침잠하는 작은 구멍과 같이 그 범위는 협소하나 그 구멍을 통과하고 나면 샘처럼 순수하고 근원적인 ‘인식론’의 새 국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부분의 이론서는 사진이 갖는 사회, 역사적 의미와 이미지가 인간에게 주는 실재적 영향에 대한 글들이라면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대상물’과 ‘갈망하는 사물’,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 대한 파토스 넘치는 극히 개인적인 에세이인 것이다.

“가장 강한 또 다른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사회적인 주석을 부정하라고 부추겼다. 어떤 사진들을 볼 때면 나는 스스로가 야만적이고 무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P15)

즉, 프리미티브 화가처럼 전통적 예술 문법을 따르지 않는 개인 특유의 경험과 강렬함으로 바르트 자신을 매개자로 하여 ‘보편적이 아닌 대상의 성격 그 자체에 의한 새로운 이론’을 밝히고자 한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자신에게 어떤 식의 공명을 일으키는 사진 앞에서 그 전까지의 사진이론으론 그 공명의 특질들을 설명할 수 없었음이 <카메라 루시다>가 탄생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학적이고 구조적인 해석에 대립하여 무규정적인 사진의 특질들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그의 용어는 ‘푼크툼’이다.

문화적이고 체계적인 사진 이해 용어인 ‘스투디움’에 맞서 비문화적이고 비체계적인 이해를 지시하는 푼크툼은 벤야민의 ‘아우라’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벤야민의 아우라가 어떤 때는 대상만의 유일하고도 마적인 현상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술의 제의적 요소로, 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부정적 요소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푼크툼은 대상에 밀착되어 무게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훨씬 더 날카롭고 가볍고 가변적이며 전혀 전통적이지 않고 제의적이지 않다.
푼크툼은 대상으로부터 마치 화살처럼 주체를 꿰뚫기 위해 날아오지만 그것은 대상이 소유했다기 보다는 주체와 대상사이의 지극히 은밀하고 사적인 소통가운데 있다.
바르트의 푼크툼은 철저하게 수용자 미학이다. ‘촬영자-대상-구경꾼’이라는 사진 내 역학관계에서 촬영자의 의도를 뺀, 대상의 사진적 특질과 그 것을 감상하는 구경꾼의 비의도적 재구성이 이 책을 이끄는 요소인데 이는 그의 또 다른 글 <저자의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촬영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맥락을 통한 결과물이 아닌, 독립적이고 장외적인 존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라틴어 ‘점’, ‘찌름’ 등을 뜻하는 푼크툼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카메라 루시다>를 쓰기 전부터 보여 왔던 사진에 관한 그의 관심을 종합하기 위해서였을까? 그 정도의 이론적 유희에서였다면 이 책은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의 이론만을 위한 거였다면 푼크툼은 기억되었을지 모르지만 진혼곡의 회색 빛 울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진의 증거, 사진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도 볼 수 있는, 그리고 그가 보기에 그 것은 모든 다른 영상과 구별 시켜 주는 이 사물을 찾아 내기 위해서 내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가야 만 했다. 나는 나의 개영시 (먼저 썼던 시를 취소하는 시)를 써야만 했다.” (P63)

즉 그는 자신 속 더 깊은 곳의 ‘어머니’란 상처를 이끌어내어 그 이전 기호적 체계로 이루어진 자신의 학문적 논리를 취소해야만 했던 것이다.

바르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그것도 어머니의 다섯 살 무렵에 찍힌 아주 오래된 ‘온실사진’에서 존재의 푼크툼, 시간의 푼크툼에 찔린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머니다’라는 외마디 비명과 같은,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 장치에 지나지 않다.
“어머니다!”, “참으로 어머니다!”라는 이 지칭적 외침은 그 어떤 시각 예술과도 구분되는 사진만의 황홀한 특질이며 바르트 내면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환원되지 않는 외상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우선 그에게 사진은 ‘그것이-존재-했음’ 혹은 존재의 ‘완강함’이며 그것이 사진의 기반을 이루는 노에마이다.
‘그것이-존재-했음’에는 찍힌 대상물의 존재론적 자국과 과거에로의 시간적 역류가 동시에 포함된다. 사진에 의한 대상의 재현은 단순한 모사의 정도를 떠나 실재 존재와 ‘탯줄로 연결되듯’한 완강함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는 같은 이차원의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회화를 볼 때와는 달리 사진의 대상은 실재의 그것으로 확신하며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사진의 대상을 향한 관람자의 ‘상상적 의식 작용’에 의한 ‘아날로공’, 즉 ‘절대 유사’의 경험인데 이 아날로공은 바르트가 싸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서 차용해와 이 책의 기반을 이루게 하고 있다.

사진에서의 대상의 재현은 대상을 해석하거나 번역하는 인공적 규명 이전에 생성된 탈코드적인 것이며 발자국이 하얀 눈 위에 찍히듯 존재의 직접적인 ‘자국’이 된다.
즉, 빛에 의해 ‘그때’ ‘거기’ ‘그 대상’으로부터 발산하는 지표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자국으로서의 사진 현상은 후에 필립 뒤바 등에 의해 ‘사진-인덱스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진이 침묵 속에 보여주는 존재의 자국 혹은 물리적 지표들은 수용자에게 전해지며 마치 묵독이 내면화된 세계를 형성하듯 각자의 경험과 함께 또 다른 환유적 세계의 재구성을 사진을 통해 형성하게 된다.

바르트가 보았던 어머니의 ‘온실사진’은 그때 거기 어머니로부터 사출된 빛이 그에게 이른 것이며 단순히 어머니임을 알아 본 것이 아닌, 분위기라는 작은 영혼을 알아보며 “참으로 어머니!” “마침내 어머니!”를 깨닫게 된다.
그 때 “사진은 자신을 넘어선 하나의 영매가 되어 자신을 무화시키고 기호가 아닌 사물 그 자체”가 된다. 바르트가 사진을 통해 찾은 것은 ‘어머니’다. 일반적인 어머니라는 존재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은 ‘나의 어머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가 잃어버린 것은 “어머니라는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하나의 특질, 하나의 영혼으로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무엇”인 것이다.
그는 사진에서 죽음을 본다. 셔터를 눌러 삶이 정지하는 그 찰라의 순간에 삶의 장외를, 자신이 타자화되는 불편한 경험을 느끼며 어머니의 온실사진에서 출구 없이 꼼짝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변형시킬 수 없는 슬픔, 해독되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학문의 이론적 지성이 해결할 수 없는 충일한 이미지 앞에서 비환원적인 죽음의 무력감을 느낀다.
내가 느끼기에 바르트가 이 책에서 절규하는 것은 사진이론 자체가 아닌 “모든 환원적인 체계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사회적 의미의 죽음이나 인간 개체를 넘어선 종의 죽음이라는 진화론적인 냉혹한 설명으론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의 상실이었을 것이고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의 상실은 비환원적 세계로의 깨달음을 불러오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모성 숭배의 밀교적 제의로서 바르트는 ‘아픈 어머니를 통해 스스로가 어머니를 자식으로 낳고 어머니가 죽자 자신은 비변증법적인 죽음을 기다리며 진화론으로 환원되는 생명체의 행진에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그가 교통사고 이후에 치료를 거부하고 거의 자살하다시피 한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스스로의 죽음의 예감과 또한 자신만의 참 어머니를 되찾게 해준 사진적 특질들은 그로하여금 언어적인 학문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체계적이고 환원적 설명을 요구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해 전복적 사고로 저항하게 하는 푼크툼의 깊은 상처가 되게 하지 않았을까?
푼크툼의 그 전복적 저항은 바로 사랑이고 연민이며, 죽음이고 비언어이며, 무규정자이며, 역류하는 시간이며, 예술에 속하지 않으며, 사회와 문화에 순치되지 않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푼크툼은 광기다.
그것은 바르트의 광기이기도 하고 사진의 광기이기도 하다.

* 참고로  이 글은 절판된 ‘열화당’의 <카메라 루시다>에 관련한 것입니다.
   바르트의 책은 지금은 ‘동문선’의 <밝은 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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