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죄책감
- 한 여성의 물질을 드리는 기도

 

위희진
(한백교회 교인)

 

저희 부부는 작년 529일에 혼례를 올렸는데 올 해 529일 첫 결혼기념일엔 아기가 태어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직 관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통제와 감시를 있는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생각도 있었고, 우리가 결혼했다는 것을 왜 국가에 신고해야 하냐 하는 반사회적 심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집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저희 부부는 지금 결혼 전 신랑이 신청해서 마련한 스무 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임대아파트에 입주해서 살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있는데, 저희가 혼인신고를 해버리면 가구당 소득이 임대아파트 입주 기준을 초과해버립니다. 박봉이라는 출판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맞벌이를 하다 보니 부부소득으로는 임대아파트 입주 조건을 초과해버리는데, 1인당 가구 소득 기준이나 3인 가구 소득기준이나 같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해서 아기가 태어나서 세 식구가 된다고 하더라도 임대아파트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임대아파트에서 나가 살만한 집을 구할 형편도 안 되고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아기를 낳으려니 임대파트 문제뿐 아니라 이래저래 걸리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아기 출생신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신랑한테 올려야 할지, 저한테 올려야 할지도 어렵습니다. 세상이 조금은 변해서 혼인 신고할 때 앞으로 태어날 아기가 엄마 성을 따를지 아빠 성을 따를지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당연히 남자 성을 따르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어느 가족의 구성원이 되도록 강요하는 ''이라는 것을 부여하는 것이 싫긴 하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이름 앞에 성은 있어야 하고, 또 남편의 성을 받아야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전 제가 아기를 낳았다는 어떤 증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아휴직도, 국가에서 받을 수 있는 육아휴직수당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여자라는 것이 살면서 억울하고 불리할 때가 한두 번 있는 것이 아니지만, 아기를 가진, 가진 것 없는 여자는 이 사회에서 참 살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런데, 얼마 전 우리가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로 이사 오는 중년 부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1톤 트럭도 텅텅 비어 있을 만큼 별 것 없는 세간, 그나마 그 세간이라는 것도 남들이 보면 버려도 그만일 것 같은 낡디 낡은 것들이었습니다. 부부 얼굴에 행복같은 사치스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삶에 찌든 얼굴이었습니다. 그 중년 부부를 보면 제 마음 한구석에선 죄책감이 듭니다. 우리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가 과연 여기서 계속 사는 것이 맞을까? 쪼들리고 힘들더라도 단칸방 월세라도 얻어서 나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한편으론 화가 납니다. 이 사회는 왜 우리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이런 죄책감까지 가지고 살게 만드는 것일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 힘없는 여인과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셨다지요.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하게 힘없는 여인과 어린 아이들은 계속 힘없이 살아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드리는 것들이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 힘없는 여인과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길 바라지만, 그것이 이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글 가운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함께 가난해지고 함께 힘없는 자가 되는 것밖에 없다 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곧 혁명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임대아파트에서 계속 살기 위해 이런 저런 궁리를 하는 정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1.03.24 14:5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결혼을 앞둔 저에게는 참으로 공감되는 글이네요.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근근히 생활할 손바닥 만한 공간을 구하기가 왜이리 골치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소득이 적은 다른 이들은 이 나라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걸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요. ㅈㅈ 거창한 인류애도 좋지만 저같은 별볼일 없는 사람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궁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건가보죠. ㅎㅎㅎ 한바탕 웃고 힘냅시다!

새내기 목사의 좌충우돌 실수투성 목회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문덕
(향린교회 부목사)

첫 번째 이야기 - 풋내기 목사의 꿈

“하느님께 무엇인가 바치겠다고 너무 성급한 생각을 하지 말고, 조급하게 입을 열지도 말라.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말이 적어야 한다.” (공동번역성서, 전도서 5장 1절)

저는 목사안수를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풋내기 목사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목회에 관한 이러저러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에 덜컥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을 해 놓고는, ‘또 실수 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이 약해서 글 쓰는 것을 취소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무슨 말이든 쓰기로 했습니다.

저는 목회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해서 목회란 것을 하겠지만 그렇게 몇 십 년 목회를 한다고 해도 ‘목회란 이런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목사가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공간을 통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특히 개신교에 대한 비종교인과 사회의 엄청난 불신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목사가 되어버린 한 인간의 나약한 삶을 그저 쓰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저는 목사가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교인들조차도 목사 앞에서는 웃으며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도 속으로는 “으이구, 저런 게 목사라니~” 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삶에 있어서 교회와 목사는 이렇게까지 욕만 먹어야 할 곳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여섯 살 때부터 자그만 시골교회를 다녔는데 그 교회는 저를 품어준 보금자리였고, 그 교회 목사님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작은 시골교회에서 동네 사람들과 동고동락하셨고, 제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나이 지긋하신 인자한 할아버지셨지요. 그 목사님은 원래 음악교사셨는데, 아버님이 한국전쟁 중에 순교를 당하자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목사가 되셨고, 평생을 그 작은 시골교회에서 어렵고 힘든 삶을 감당하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신나게 놀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사람들과 함께 모여 얘기하고 웃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의 유년과 청소년, 청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그 교회에 가면 엄마의 품에서 쌔근쌔근 잠든 갓난아이처럼 포근하고 아늑함을 느낍니다. 제가 어쩌다가 목사가 되었는지 저도 사실은 잘 모르지만 20년 동안 저의 삶의 한 부분이었던 그 작은 교회의 아름다운 경험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는 지금도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제가 신학을 하고 목사까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땅에 뿌려진 씨가 저절로 자라듯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었습니다(마가복음 4:26-29). 세상엔 온갖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많지만 저는 한명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신비를 믿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 인간은 땅에 있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문제 가득한 이 세상도 눈 크게 뜨고 보면, 잠잠히 입 닫고 고요히 있다 보면, 여기저기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하나님의 신비로 가슴 한켠에서 잔잔히 밀려오는 감동에 눈물 적시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생존의 욕구와 더불어 자아실현의 욕망으로 가득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저도 욕망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지요. ‘돈’이 ‘하느님’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돈 벼락이라도 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내밉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욕망이 있다면 제가 그 어린 시절 작은 교회에서 느꼈던 그 행복하고 뿌듯하고 신났던 그 경험을 누군가의 삶 속에 일어나도록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가 이런 저의 욕망에 대해 꾸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 웃긴 놈아! 그러니까 목사 쓰레기라고 불리는 거야. 알았어!” 그래요.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사람은 원래 사람들하고 함께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사는 맛도 느끼는 것이니까, 교회라는 곳이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 곳이 그런 곳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풋내기 목사로서 하느님께 뭔가 바치겠다는 성급한 생각을 할까봐 전도서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사실 제 주변에 가까운 분들은 제가 목회를 하는 것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그렇고 제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라는 거창고등학교에 써 있다는 직업선택의 십계명의 뜻을 생각하면서 아마도 전 계속 목사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엔 수많은 목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 개인에게는 단 한번 지내는 일생이겠지요. 목사로서의 제 삶을 반추하고 성찰하기 위해 몇 분들의 생각을 소개하고 첫 번째 글을 마칠까 합니다.

첫 글은 권정생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한 20여년 전, 친구한테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내용은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명에서 백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마루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00교회라는 간판도 안 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 집'이라든가 '심청이네 집'이라든가 '망이네 집' 같은 걸로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오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어때요? 좋지요. 저도 이런 교회를 갖고 싶답니다. 프랑스 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가 하는 공동체가 있는데 거기에 누군가 찾아 오면 세 가지를 물어본다고 합니다. 

“주무시겠습니까? 드시겠습니까? 씻으시겠습니까?”

이 공동체에서는 이렇게 누구나 환영하고 함께 사는 이들은 자신이 먹을 것보다 조금 더 많이 일을 한다고 합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더 일하는 교회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사셨던 신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이시여!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교 제도 내에서 목사를 하면서 정말 신을 사랑할 때 꼭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을 사랑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을 사랑할 때 우리는 무슨 행동을 할까요? 신을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목회를 해야 할까요?”

두 손 모아 잠깐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성공회 주교였던 존 엘브리스 하인스가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했던 기도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가 당신께 아무런 뜻도 없는 일들을 습관처럼 행할 때, 우리를 용서하소서.”

ⓒ 웹진 <제3시대>

* 향린교회 http://www.hyanglin.org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779)
특집 (8)
시평 (91)
목회 마당 (57)
신학 정보 (126)
사진에세이 (36)
비평의 눈 (62)
페미&퀴어 (19)
시선의 힘 (126)
소식 (150)
영화 읽기 (28)
신앙과 과학 (13)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15,066
Today : 144 Yesterday :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