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비의 ‘악령’들린 노예소녀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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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

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1999)에는 한 소년이 혼령과 대화를 한다. 소년이 공포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결국 두려움 없이 혼령과 소통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공포영화다운 어법에서 벗어나 ‘성장담’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나아가 그 소통을 통해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혼령의 언어가 개입되게 한다는 점에서, 하여 폭력적 현실을 정화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그 아이가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메시아적 구원담’의 성격도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확장된 지평을 본다. 언어는 삶과 죽음이라는 고전적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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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식스센스>에서 8살박이 소년 콜 시어는 혼령과 대화를 한다

정찬의 소설 「별들의 냄새」에는 또 다른 차원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강문규라는 이는 은행원이었는데,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외상은 다 치료된다. 한데 사고 이후 그의 후각이 갑자기 예민해졌다. 다른 사람이 감지할 수 없는 냄새를 느끼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외양 속에 감추어진 냄새가 그의 예민한 후각을 통해서 인지되었다. 아내만의 고유한 내음을 맡을 수 있었고, 또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냄새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꽃 나무 하늘 밤낮 계절 등 삼라만상의 향기가 그를 사로잡았다. 또한 인간 가공물의 악취, 문명의 역겨운 냄새가 자연의 향기로움을 얼마나 착취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한갓 인간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세상 만물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해서 그는 ‘환각’에 빠진다. 문명이라는 환각에 빠진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환각이다. 닫힌 문명의 세계를 향한 초문명의 샤먼(자연/우주와 인간을 중개하는)이 된다. 별의 내음을 이야기하는 샤먼이다. 구원을 갈구하면서 말이다. 하여 이 소설은 언어의 지평을 자연, 우주로 확장시킨다. 소통의 당사자는 인간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강문규는 직장을 잃고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아내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다. 단지 닫힌 세계의 충실한 일원인 ‘나’라는 화자를 향한 구원담화를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한 존재여야 했다. 오늘의 지배적 세계 담론이 은폐한, 감추어진 세계를 발설한 탓일까? 적어도 오늘의 시대엔 그것은 천기에 해당했던 것일까?

「사도행전」 16장 11~40절에는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바울이 ‘악령’들린 한 소녀를 치유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소녀는 점쟁이다. 남의 운명을 감지하는 존재다. 그는 무언가 남들이 갖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남들이 모르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비록 이 일화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도 않고, 심지어 단지 바울 영웅담을 위한 대상화된 몰주체적 존재로만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는 당시의 사회와 「사도행전」 저자가 꿈꾸는 소통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암시가 들어 있다. 거기에는 폭력이, 착취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은폐된 소통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탐구하려 한다.

2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 8~10절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한 뒤에 바나바와 불화하여 갈라진 후, 소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선교하던 중 꿈에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본 것을 계기로 그곳을 새로운 선교 개척지로 삼기로 한다. 하여 본문이 묘사하는 대로, 소아시아의 트로아스를 출발하여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네아폴리스에 당도한 후 빌립보(Philippi)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그리스 이북 지역인 마케도니아의 항구도시로, 주전 356년,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함으로써 도시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소아시아와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군사적 상업적) 중요한 곳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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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바울의 2차 전도여행과 빌립보

주전 168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이곳을 네 지역으로 분할하여 원로원의 속주로 삼았는데, 빌립보는 동부마케도니아의 속주 수도가 되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옥타비아누스, BCE. 63~AD 14)가 악티움 해전 이후 투항한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을 이 도시에 이주시켜 정착하게 함으로써, 많은 유력한 로마인들이 거주하게 되어 도시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격상하였다. 즉 이 도시는 고대 지중해 문명의 핵심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로마적 도시의 전형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모임을 찾았는데, 성밖 외딴 곳에 유대인의 기도처(프로슠헤, προσευχη)가 있었다. 이는 유대인 결사체가 상대적으로 약한 상태임을 말해준다. 이곳에서 바울은 여러 신실한 여인들을 만났는데, 그중 루디아는 초기 바울 선교에서 매우 유력한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비유대인 출신의 부유한 상인(고급의류)이었는데,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 곧 유대교 개종자의 한 사람(「사도」 16,14)으로 공동체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이가 바울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자기 집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15절).

어느 날 기도처로 가는 길에, ‘점 치는 귀신’(프뉴마 퓌토나, πνευμα πυθωνα) 붙은 소녀를 만난다. 그리스어로 퓌톤(πυθων)은 ‘점쟁이 영’을 뜻하고, 퓌토네스(πυθωνες)는 ‘복화술사’를 뜻한다. 아마도 점 치는 귀신 붙은 소녀는 복화술사처럼 거의 입을 움직이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감추어진 것들을 이야기하는 부류의 점쟁이였던 것 같다. 이것은 고대인들에게 그녀가 말하는 것이 아닌 그녀 속의 영이 말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므로 이런 행태는 신뢰받는 점쟁이의 전형적 모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의해 고용되어 있다. 주인이 복수로 나온 것은, 해석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아마도 점쟁이의 상행위에 이러저러하게 얽힌 복잡한 이권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고대인에게 있서 ‘점’은 원래 신탁의 개인적 차원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점술사는 치부를 목적으로 점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점술의 대가로 일정양의 보답을 받을 수는 있다. 한데 도시화의 진척, 그리고 도시화와 (그 부수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전쟁 등으로 인한 급속한 인구 이동은 많은 사람들의 비교적 안정된 기초생활을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가치의 붕괴를 초래했다. 일상생활에 관여되는 신뢰 메커니즘의 붕괴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정한 생활 여건을 보상받기 위해 크게 두 유형의 방편을 구축한다. 하나는 실리적 판단의 영역으로, 비교적 강력한 자치 결사체에 소속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혈연적이건 종교적이건) 귀속성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유리한 결사체에 소속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해서 자연스레 사람들은 신비주의적 종교나 점술사 등을 통해서 위안을 구했다. 신앙적 판단의 영역이다.

한편 소비사회인 도시에서 잉여가치의 창출은 비생산적 가치창출을 통해 일어난다. ‘위안’이라는 가치를 창출하는 점술사들은 그렇기 때문에 도시사회의 잉여창출 메커니즘의 도구로서 활용되게 된다. 이런 일은 신성 중심적인 전통적 가치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영역인데, 점술사들은 신접 체험을 통해 신성적 가치에 묶여 있기 때문에 대체로 이윤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해서 브로커가 존재하게 되며 점차 그들에 의해 예속되어 일하게 된다. 

점술업은 구역별로 활동영역이 나뉘고, 그러한 인위적인 구분을 통해서 조합이 결성되었다. 물론 이런 조직화의 주체는 대개 점술가가 아니었다. 구역별 점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후견인들이 생기고, 이들 후견인들은 한편으로는 주먹패들과 결연되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위와 상위의) 행정 당국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이해의 고리를 형성하며 점술의 상업화가 이루어졌다.

본문에 의하면 점술사 소녀는 바울 일행을 보자 그들의 신원(identity)과 지향 목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떠벌렸다. 여러 날을 그렇게 하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악령을 내쫓았다고 한다. 이것은 점술을 둘러싼 이권행위를 방해한 것이고, 도시의 상업 질서를 교란시킨 셈이 된다. 결국 바울과 실라(실루아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하느님이 그를 구원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예시하는 데 초점이 있다. 또한 부수적으로 다른 신이 아닌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점술의 주역임을 증언하고 있다. 즉, 여기서 악령들인 소녀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도리어 ‘악령’이라는 가치판단을 따라, 소녀도 은연 중 비하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녀에게서 악령을 추방한 것으로 텍스트는 충분한 선행을 베푼 듯이 묘사한다. 그러나 추정컨대, 이 이야기가 사실적 묘사라면 그녀는 생계 수단을 상실한 셈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저자의 편견을 본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동시에 대중의 불안감을 깊이 유념하지 않은 채 사회의 구축과 변화를 기도한 주류 사회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즉, 점술을 한갓 사술로 보는 편견이다. 점술가들은, 마치 태풍이 몰아친다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자연의 변화를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의 감지 능력과 같은 예지력을 갖춘 존재다. 동물들에게서 그런 것처럼 그것은 예민한 감각의 대가이며, 그런 감각은 소통불가의 타자적 대상과의 소통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즉 점술은 인간의 언어 행위 속에 감추어진 감각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소통수단이다. 그것이 다른 것의 상위에 있음으로써 다른 의미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의미, 하나의 소통의 결과다. 문제는 그것이 다른 것의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 혹은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이 양극단의 태도에 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울이 이 소녀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신들이 하느님의 사도며,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자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에 화났다고 한다. 그들이 숨기고 조심스레 해야 할 것을 폭로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 그러나, 실재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기술한 「사도행전」에는 복음 전파를 굳이 숨기고 다녀야 한다는 ‘은폐의 동기’가 별로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에서 바울의 격분은 그 동기가 정당하지 않다. 텍스트는 사도의 격분이라는 권위에 찬 이미지를 구마 과정에 개입시키고 있는 것 같다. 즉 사도는 이미 권위 있는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대상들에게 자혜로운 이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다.

여기서 바울은 소녀의 점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로마제국 시대 도시 대중사회의 역경과 그 속에서 잉태한 신앙 유형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도행전」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텍스트의 주된 관심은 신의 말이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을 향한 신의 말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상한 말이라고 해도, 때로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 때문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있다. 많은 종교들이 그렇듯이 그리스도교의 제국주의적 선교 행태의 맹아가 여기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 텍스트에는 루디아와 악령 들린 소녀가 연이어 나옴으로써 자연스레 그들이 비교되고 있다. 하나는 부유하고 점잖은 부류로서(바울 텍스트에 나오는 활동적인 암시가 여기에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사도를 부양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반면 신들린 여인이 있다. 바울의 텍스트에서 여러 차례 시사되고 있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이런 여인은 거의 언제나 악령 들린 사람으로 묘사할 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여성상은 특히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교회에서 발화권을 가질 수 있는 주된 통로는 바로 이런 비일상적 소통수단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은 비일상적 감지능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이 텍스트는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언어매체를 제한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그 제한된 영역 외부의 언어에 대해서 배제적인 제도화를 구축하고 있다.

3

예수는 막힌 사회를 돌파하는 대중의 언어로 등장했다. 그것은 비록 비현실적이긴 해도, 현실의 닫힌 구조를 비판하는 신랄한 저항담론이자 희망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요소들과 마주치면서 변형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라는 요소는 아마도 예수담론의 비일상성, 그 혁명성을 시대와 어느 정도 타협시키게 하는 결정적인 변수였겠다. 그밖의 여러 요소들 또한 그런 역할을 했다.

이 점에서 「사도행전」은, 특히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 텍스트 그리스도교 역사의 뚜렷한 체제내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을 긴 시간 존속할 수 있게끔 하였지만, 동시에 많은 시대적 한계를 공유하는 존재로서 그리스도교를 재탄생시켰다. 그 중의 한 양태를 「사도행전」 16장의 이른바 ‘점치는 귀신 붙은 소녀’ 텍스트는 보여준다. 인류 문명이 인간 언어를 제한시켰다면, 교회의 문명화 또한 신앙의 언어 양상을 제한시켰다.

‘영’은 자유로움에 그 본질이 있다. 무엇에 구속되지 아니함이다. 어떤 것으로 형태화함에 대한 저항이다. 무한한 일탈인 것이다. 한편, 자유로움의 반대에는 ‘육’이 있다. 그것은 종종 제도화의 신앙적 언어로 쓰인다. 바울이 교회를 주의 몸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그렇다(「고전」 12,27). 바울 후대에 그를 추종하는 한 공동체 또한 이러한 수사어를 제도화의 언어로써 해석하여 계승했다(「에베」 5,30). 교회는 분명 신앙의 제도화의 하나로서 발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발전에서 영은 제도화의 장애물 내지는 견제 장치였다. 육과 영, 이 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발전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모두가 예수의 삶과 신앙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경험의 중요한 요소다. 특히 그 길항성, 서로 모순되면서도 서로 얽힌 관계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앙의 요소였다.

한데 육의 체계, 곧 교회는 이러한 영의 자유로움을 교회를 통한 신앙의 언어에서 제거시켜버렸다. 그것이 교회의 비극이다. 교회는 제도화에 ‘순응하는 영’만을 허용했고, 자유로움을 신앙 외부를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인간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주된 통로를 상실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대화의 가능성을 잃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회가 대화할 수 있는 세계가 패권주의적인 문명화의 주체,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로서의 인간인 이상, 교회는 인간에 의해 비인간화된, 비주체화된 대상세계를 착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며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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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9)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작성된 원고입니다.



사상-사건-사회상(社會相)/사회상(社會像)/사회사(社會史)-사회사적/사회학적(=사회과학적) 성서 해석/연구
이 아들은 여전히 ‘거지 왕자’의 신세인가?

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 신약학)

1. 어느 청개구리 집안 이야기 한 마당


청개구리 엄마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들랑 냇가에 묻어다오.”

청개구리 자식들은 평소에 엄마가 시키는 일이면 꼭 반대로 해서 엄마의 속을 썩이었다. 못된 자식들이지만 엄마의 마지막 유언만은 그대로 시행해서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이라도 엄마에게 효도를 하기로 결의하고 엄마의 시신을 냇가에 묻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생겼다. 비가 내릴 때마다 엄마의 무덤이 냇물에 씻겨 내려 갈 위험 때문이다. 그래서 청개구리 자식들은 여름철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려고 할 때면 엄마의 무덤이 걱정되어 “꽥꽥” 하며 울어대야 하는 것이란다.

물음 1: “청개구리 자식들은 마지막으로 효도를 한 것인가?”
답    : “엄마의 뜻이 유언에 똑 바로 표현되었다면 그렇다.”

물음 2: “청개구리 엄마는 실제로 냇가에 묻히기를 원했는가?”
답    : “속 썩이는 딸이 엄마로부터 ‘이년아, 차라리 죽어버려!’라는 극한적 꾸중을 듣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그것은 엄마의 말의 액면상의 내용에는 부합될지라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뜻과는 정반대이다. 이 딸은 엄마의 마지막 말 한 마디에서 엄마의 진정한 뜻을 찾을 것이 아니라 엄마와 자기 사이의 평소의 삶의 총체적 관계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다. 청개구리 집안 이야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지적(全知的)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청개구리 엄마는 양지바른 산비탈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것, 자식들이 평생 동안 자기 말을 꼭 반대로 했기 때문에 자기가 유언을 이렇게 하면 자식들은 저렇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산비탈에 묻히기를 원하면서도 정반대로 냇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시각은 신에게만 속한 것이지 이야기 속의 어느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다. 청개구리 자식들이 진정으로 마지막 효도를 하려고 했다면 엄마의 살아생전의 삶에 비추어서 엄마의 뜻을 조명해야 했을 것이다.”

물음 1과 2는 글 또는 저자의 뜻을 규명하는 해석학의 문제이다.

물음 3: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답    : “이 이야기에 담긴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전통적 성서해석은 바로 이러한 작업이었다. 즉 성서 본문 속에 담긴 신학적 사상, 도덕적 교훈, 윤리적 지 시 사항 등을 끌어내는 것이 성서해석의 해석의 과제였다.”

물음 4: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는가?”
답  : “이것은 역사적-비평적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 또는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에 관련된 물음이다. 성서에 대한 이 접근방법은 성서 본문의 이야기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 really?) 또는 ‘그 사건은 정말로 일어났는가?’(Did the event really happen?)를 탐구한다. 이 방법은 더욱 간단하게 역사적 방법(historical method 또는 historical approach)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또한 성서의 각 문서를 역사적 산물로 전제하고 저자와 독자와 누구이며 저작 장소와 연대, 저작의 계기와 목적, 저작에 사용된 자료, 다른 문서와의 문학적 관계 등등을 탐구한다. 역사 연구의 주된 관찰 대상은 과거의 사건이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연쇄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시간이라는 일직선을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관찰하는 것을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방법이라 한다. 이 관찰 방법은 시간이라는 선로(線路) 위에서 사건이 진행하거나 일이 전개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며칠 전에 이라크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대통령 부시의 기자 회견장에서 일어난 사건 말이다. 한 아랍 기자가 그의 신발을 벗어 부시에게 내던졌다고 한다. 이것은 사건이다. 사건은 시간 선을 따라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그 현장에 자동 무비 카메라가 비치되었더라면 그 사건의 진행 과정이 연속으로 촬영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신발 투척 사건이라 하자. 여기서 우선 기자석으로부터 구두 한 짝이 날아와 부시 앞에 떨어진 일만을 떼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일의 맨 처음 장면은 한 기자가 그의 신발을 벗는 동작, 그 다음 장면은 한 손으로 신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 그 다음 장면은 신발이 날아가는 운동, 맨 마지막 장면은 그 신발이 부시 앞에 떨어지는 모습이다. 신발을 벗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부시 앞에 떨어지는 장면까지 진행된 일을 죽 열거하는 것을 사건의 서술(description)이라 한다. 사건은 단순히 서술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다 전달되지 않는다. 우선 그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원인(原因, cause)이라는 것은 물리적 운동을 촉발시킨 작동력을 가리킨다. 신발이 날아간 사건을 순전히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관찰하는 경우에는 한 기자가 신발을 던지는 행위가 이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다. 화재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에 눈앞에 진행된 화재의 과정과 결과만을 진술하지 않고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 즉 방화인지, 실화(失火)인지, 전기 누전과 같은 사고로 일어난 것인지를 밝혀주어야만 화재의 내용을 좀 더 실제에 가깝게 제시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사건을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틀에 넣어서 관찰하거나 이 사건을 둘러싼 전후의 더 큰 맥락에 넣어서 관찰하는 것을 사건의 설명/해설(explanation)이라 한다. 그런데 구두 투척과 같은 사건은 사람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났는데 우리는 이제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를 하게 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행위를 촉발시킨 것이 무엇인지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원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아니하고 동기(動機, motive), 의도(意圖, intention) 또는 목적(目的, purpose) 등등의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을 규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우선 심리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면, 그 사람의 소영웅 심리, 열등감, 원한, 복수심, 피해의식, 당일 부부 싸움으로 인한 의기소침 등등 갖가지 개인의 심리 상태를 그 행위의 동인(動因, drive)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운동에서 원인과 결과는 순전히 기계적으로 잇달아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개입하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는, 동인에서 기계적으로 행위가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 동인과 행위 사이에는 그 행위자의 판단, 의지, 결단과 같은 의식작용이 반드시 개입한다. 이러한 의식작용은 행위를 추동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가 일정한 목표점에 이르도록 진행 방향을 미리 정한다.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에는 행위가 작동하기 전에 예기하는 미래의 결과가 이미 장치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행위의 의도 또는 목적이라 한다.

“행위의 동인, 동기, 의도, 목적 등등은 행위자의 내면, 즉 그의 심리나 정신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 행위의 원인—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적절한 표현이 없으므로 편의상 그렇게 사용하기기로 하자—을 그 행위자의 외부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 첫째로 역사적 접근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이 행위에 선행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관계에서 해명하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큰 사건이 앞서 일어났다. 그 행위자의 판단으로 이 전쟁은 이라크 민중을 불행에 빠뜨린 침략전쟁이며 부시가 바로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다. 이러한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거나 이러한 전쟁의 원흉을 응징하는 뜻으로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이라크 전쟁은 이 행위가 일어난 상황이며 폭로나 응징은 이 행위의 목적 또는 의도이다. 둘째로 종교적 접근 방법이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종교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한다. 이러한 종교전쟁의 원흉인 부시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은 알라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행동을 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 또 이 행위의 의미를 평가하는 데도 이라크 민중의 분노를 대변한 애국적 행위에서부터 국빈에게 외교적 결례를 행한 파렴치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음 5: “청개구리 가족의 삶의 환경은 어떠했는가? 그들의 살림살이 형편은 어떠했는가? 가족 사이의 관계는? 이웃 개구리들과의 교우 관계는?”
답    : “자녀의 배필을 결정하는 경우에 ‘착한 사위/며느리 노릇을 하겠습니다’라는 후보 자의 말 한 마디에만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부모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됨됨이는 어떤 말 한 마디에 죄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총체적인 삶에 비추어 볼 때에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청개구리 가족은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살다가 없어졌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남겨 놓은 것은 부모 세대로부터 손자 세대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기간에 그들이 쓴 몇 편의 글들을 남겨 놓고 떠나갔다고 하자. 우리가 이 청개구리 가족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는 그들의 글들이다.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그들에 관해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게 되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눈감고 지나쳐버린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너무나 많이 알지마는 그들의 먹이가 어느 정도로 결핍했는지 또는 이웃 마을의 황소개구리의 횡포 때문에 날마다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 이러한 사정은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남겨 놓은 신약성서의 문서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문서들 중에서도 특히 복음서들과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이단 사상으로 배격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서에서 신학적 내용과 교훈적 사상을 끌어내는 작업을 신학적 해석이라 부르기도 하고 관념론적 해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개구리 가족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총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일상의 삶을 영위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그 자리에 본토박이로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주자로서 나그네 신세로 살았는지, 그들이 사는 지역은 도시 빈민촌인지 농촌 지역인지, 지역 터줏대감과 황소개구리에게 얼마나 많은 양의 공세를 바쳐야 했는지, 종교적인 문제로 이웃집과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청개구리 엄마는 과부인지, 미혼모인지, 무직자인지, 피고용자인지, 자영업자인지, 청개구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청개구리 자녀들 중에서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받은 자가 있는지, 전체적으로 그 청개구리 가족은 개구리 사회 전체에서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그들은 빚 없이 또는 과중한 빚을 떠안고 살아가야 했는지 등등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청개구리 가족의 삶과 관련된 이러한 모든 측면을 총체적으로 일컬어서 사회적 정황이라 한다. 개개인은 고립된 존재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제도, 기구, 윤리, 가치관 등등의 관계망 속에 얽혀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사회의 이러한 관계망은 역사적 사건과는 달리 그 성격이 정태적(靜態的, static)이다. ‘정태적’이라 함은 불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틀거지인 제도, 기관, 계급, 생산양식, 가치관 등등은 장구하게 동일한 양식으로 동일한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 얽혀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이나 이 관계망 속에 얽혀 살아가는 존재의 사회적 정황을 관찰하는 방법은 사건을 관찰하는 방법과 다를 수밖에 없다. 사건은 시간의 선 위에서 진행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의 전체 과정을 포착하는 데는 무비 카메라가 사용된다. 이러한 관찰 방법을 통시적 방법이라 했다. 그러나 사회의 제도나 기구 따위는 정태적인 것이고 사회 구성원이 이러한 제도를 매개로 해서 맺은 사회적 관계는 정적(靜的)인 상태이다. 정적인 상태라 함은 운동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상태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정적인 상태를 포착하는 데는 무비 카메라가 필요 없고 정지 사진을 찍는 카메라로 충분하다. 이러한 관찰 방법을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방법이라 한다. 공시적 방법은 정지된 동일한 시점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얽혀 있는 모든 관계의 실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사회의 현상이나 인간 삶의 사회적 여러 차원을 서술하는 데 적절하다.”


2. 대상과 방법론 문제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연구 대상은 1세기의 원시그리스도교의 사회이다. 연구의 어려움은 그리스도교 사회라는 것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 세계에 이전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70년 유대 독립전쟁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70년 이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사회적 성격이 확실하게 다르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탐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사회의 사회적 차원의 삶의 현실을 구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삶의 현실이라는 것은 공시적 관찰 방법으로 특정한 시점에서 파악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회를 지역별로 분류하여 취급한다 하더라도 이 현실이 그 사회의 100년에 걸친 전 기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연구의 목표를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 서술(social description)이다. 이것은 사회적 현실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사회상(社會相)이다. 그런데 사회학이 사회 현상을 서술하는 경우에는 전형적인 것, 일반적인 것, 동일성이 있는 것을 채택하지 특수한 현상은 배제한다. 빈약한 자료를 이용해서 이렇게 구성한 사회상이 어느 곳, 어느 시점의 특수한 사회 현상인지 전형적인 현상인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둘째는 그 사회에 대하여 총체적인 성격 규정을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갱신운동 단체, 사회통합 세력이니 대안사회니 하는 식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사회상(社會像)을 구축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셋째는 사회사(社會史)를 기술하는 것이다. 사회사(Sozialgeschichte, social history)는 학문분과로서는 역사학적 사회과학(Historische Sozialwissenschaft)이다. 그것은 일반적 역사과학의 한 특수한 관찰 방법이다. 여기서 ‘사회’(Sozial)라는 구성어는 관찰 방법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관찰 대상을 가리킨다. 즉 여러 집단과 계층과 계급에 따른 사회 구조의 발전을 서술하고 이러한 각 집단의 크기, 처지, 의미를 다루며 나아가서 각 구성 요소들 사이에 상호작용과 사회적 과정의 역사를 구명한다. 그러니까 ‘역사’(-geschichte)라는 구성어는 관찰 방법을 가리키는 동시에 관찰 대상을 한정한다. 즉 그것은 과거의 사회가 연구 대상임을 뜻하는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역사학적 관찰 방법이 사용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가 연구 대상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적 개념이나 분석 방법을 당연히 사용한다. 사회사라는 말은 이 학문의 연구 결과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상의 세 가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론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사회적’(social)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방법이다. 이것은 ‘사회적 서술’(social description)이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 있다. 사회적 서술은 사회의 여러 문제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이용하여 그 사회의 모습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립한 결과물은 사회상(社會相)이다. 여기에는 엄격한 사회과학적인 판단 기준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구성된 사회상이 특수한 현상인지 전형적인 현상인지 판별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둘째는 ‘사회학적’(sociological) 또는 ‘사회과학적’(social-scientific) 방법이다. 여기서 ‘사회학적’이라는 표현은 사회학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을 대표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사회학을 위시해서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인구학 등등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모든 사회과학적 학문분야를 함께 뭉뚱그려 지칭하는 정확한 표현은 ‘사회과학적’이라는 표현이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사회학적 또는 사회과학적 방법은 사회의 모습을 구명하는 데 무엇보다도 사회학의 이론과 분류 체계를 이용한다. 사회학에는 여러 유형의 사회학이 있다. 기능주의 사회학이 있는가 하면 갈등론적 사회학이 있다. 기능주의 사회학 이론을 채택하느냐 갈등론적 사회학 이론을 채택하느냐에 따라서 연구 결과는 정반대로 갈라진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구축되는 전체적인 사회의 모습은 사회상(社會像)이다.

셋째는 ‘사회사적’ 방법이다. 이 방법의 특이성은 역사학적 관찰 방법을 포용한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이 방법은 사회적 사실을 서술하는 점에서는 첫째 방법론을 수용하며 사회학적 분류 도식을 응용한다는 점에서는 둘째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을 통해서 형성한 결과물은 일정 기간에 걸친 그리스도교 사회의 역사 즉 사회사이다.


3. ‘거지 왕자’의 신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거룩한 책으로 받아들인다. 사회학을 위시한 사회과학들은 순전히 세속적인 인간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거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연구에 사회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원수와 결혼한다”는 어느 아프리카 추장의 말이 뜻하듯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전혀 불필요한 일로 여긴다. 하나님의 계시는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세속적 학문을 이용하여 계시를 밝히려는 노력은 배격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전체 그리스도교계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는 개인의 신앙과 개인 영혼 구원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사회 문제는 전적으로 외면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에서 사회복음 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반짝 강조하다가 곧 신정통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의 위세에 짓눌려 사라져버렸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 남미의 해방신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만 해방신학은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부터이다. 이 이후로 특히 미국 신학계에서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물이 다양하게 산출되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새로운 연구의 물결을 처음으로 일으킨 한 사람만을 언급하겠다. 그는 독일 신학자 타이센(G. Theissen)이다. 그는 1974년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이 저서가 연구사적으로 볼 때에 성서의 사회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공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저서는 공로 못지않게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한 가지 단점만 지적한다면 기능주의 사회학 이론이 여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론 때문에 연구 결과 전체가 정반대로 왜곡되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 연구에 종사하면서 많은 귀중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지마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연구는 여전히 서자의 신세에 머물러 있다고 할 것이다.


4. 성서 연구냐 성서 해석이냐?


성서 연구와 성서 해석은 같은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성서 해석은 성서의 말씀, 즉 성서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성서 연구는 성서와 관련된 사항들, 예를 들어 성서의 생성, 성서의 세계, 성서 시대의 역사, 선교의 역사, 사도들의 활동 등등의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 연구는 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계시의 내용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해석을 위한 예비 작업이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학적 방법이나 사회사적 방법으로 올바로 재구성한 성서에 나타나 있는 여러 형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그 공동체의 삶과 관련해서 전해진 성서 본문의 의미가 더욱 생동감 있는 말씀으로 들려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서 연구 자체가 성서 본래의 궁극적 목표, 즉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듣는 것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 본래적 목표는 올바른 성서 해석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학적 성서 해석이나 사회사적 성서 해석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적 방법이나 사회사적 방법이라는 것은 성서의 본래적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동원된 유용한 보조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성서를 읽을 때에 전통적으로 촛불을 사용해서 읽던 것을 훨씬 더 밝은 전등이라는 조명등을 사용하여 읽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성서 읽기의 방법을 비교한다면 다른 점은 조명등이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조명도가 높아지면 읽기가 더 편리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성서 본문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대상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조명이 밝아졌다 하더라도 독자가 찾으려고 목표하는 것 이외의 것이 그의 눈에 띌 수 없다. 전통적인 성서(聖書觀)은 성서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데 이 계시의 내용은 신학적 담론, 즉 신학 사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은 이 신학 사상을 알기 쉬운 말로 풀이하는 작업이다. 이 경우에 성서 해석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 사상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 되는 셈인데 성서 해석의 과제는 한 신학 사상을 다른 하나의 신학 사상으로 풀이해 내는 작업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한 성서 해석을 신학적 성서 해석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신학적 성서 해석은 오로지 사상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관념적 성서 해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석의 최종 목표인 계시의 내용이 신학 사상이라고 하는 전통적 신학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밝은 조명등으로 바꾸더라도 해석의 결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분하고 인간의 삶을 영적인 삶의 영역과 물질적인 삶의 영역으로 이분하거나 현세와 내세로 이분하여 어느 한 쪽을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 처분하거나 전적으로 무시하는 사고방식은 그리스의 이원론 철학 사상에서 유입된 그릇된 사상이다. 성서가 인간의 구원, 해방, 자유를 말하는 경우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떠나서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 반쪽 떼어낸 영혼이나 마음이라는 가상 존재가 누리는 어떤 것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계시 사건이다. 그러므로 계시 사건은 육신과 관련해서 해석해야지 육신과 분리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계시 사건의 근본 원리에 위배된다. 계시의 내용을 순전히 신학적 사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육신이 된 말씀을 도루 말씀으로 뒤바꾸어 놓는 반역 행위가 아니겠는가?

1970년 대 말에 당시의 서독과 동독, 프랑스, 네덜란드 출신의 몇몇 성서학자들이 사회사적 성서 해석에 종사하다가 전통적 성서 해석을 배격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성서 해석을 제창하려는 취지로 “비관념적 성서 해석” 또는 “물질적 성서 해석”(materialistische Bibelauslegung)이라는 이름을 붙여 해석 모임을 결성했다. 우리나라에는 “실사적(實事的) 성서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 성서해석 방법은 아직까지는 ‘거지 왕자’의 신세이지마는 성서해석의 본래적 왕자, 참된 적자(嫡子)로 판명될 날이 곧 도래하기를 고대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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