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지키기에 대한 단상 

: 삶의 의미 부여 아니면 힘의 기제?





 

김혜란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생명을 가진 모든 삶에는 주기가 있다. 태어나고, 자라고, 시들고, 죽고, 또 태어나고 자라고, 시들고, 죽고.. 돌고 도는 그 시간의 주기엔 의미가 있다. 아니, 우리 인간은 그 반복되는 주기,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기에 반복되지만, 그 반복이 식상하지 않다. 

    종교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 주기는 더욱 의미가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주기를 우리는 절기라 부른다. 유대교인들에겐 유월절이 그 절기의 정점이고, 이슬람교인들에겐 라마단과 이드가 그 절기의 절정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태어남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그 시작이자, 성탄절, 주현절 이어, 사순절, 부활절로 그 절정을 맞이하고, 교회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령강림절 기간으로 절기를 마친다. 매해 반복되는 절기지만, 그 기다림, 탄생, 고난, 죽음, 부활을 상기하는 그 의미는 다르고, 같지만 다르기에 더 의미가 있다.  

    이런 기독교 절기를 교회력(church calendar)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달력을 두 개 걸고 사는 셈이다. 아니, 음력과 양력을 동시에 지키는 한국인 기독교인들에겐 교회력까지 포함하면 세개의 달력을 보면서 다사다난한 절기를 지키면서 살아간다. 반복되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절기가 우리 인간, 종교적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특정 날을 지정해서 예를 올리고, 의식을 행하고, 그 날을 축하하고 그 일정기간을 기념하는 일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지루하고 무의미할 것이다. 절기는 더 나아가 무의식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상사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분별있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절기, 반복되는 생명의 순환을 경험하면서 우주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우리 몸과 영의 소리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이 무조건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즉, 절기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절기가 지닌 정치적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절기가 인간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절기는 힘을 갖고 있다.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한, 절기는 권력의 한 기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즉, 누구에 의해서 절기가 만들어졌는가에 따라 절기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들에겐 절기가 부정적인 또는 불편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시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려 한다. 내게 절기에 대한 이런 비판적 가르침은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 (WCC) 짐바브웨 하라레 총회 때 시작되었다. 총회는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행해졌다. 대림절 기간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림절의 상징은 어두움속에서 빛으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그 절기동안 대림절 화환(Advent Wreath)을 둥그렇게 만들어 그 틀 안에 초 4개를 넣고 매 주 켠다. 한 주 한 주 1달동안 초를 켤 때마다 소망, 평화, 기쁨, 그리고 사랑으로 의미부여를 하면서 예수님탄생을 맞을 준비를 한다. 내가 살았던 한국이나 지금 살고 있는 카나다 두지역이 지구 북반구에 속해있기에, 대림절은 한 해 중에 가장 어두운 겨울절기이다. 그래서 추운 겨울 어두움을 뚫고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깜깜한 추위를 가르고 은은하게 비치는 대림절 기간 촛불은 우리의 감성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짐바브웨에서 대림절의 경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녁시간인데도 해가 지지 않아 여전히 밝았다. 춥기는 커녕 날씨는 따뜻했고 온갖 종류의 꽃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생명이 잠을 자는 겨울이 아니라, 만물이 생동하고 수확을 하는 가을로 접어드는 여름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추운 겨울 어두움을 뚫고 오는 예수님의 탄생을 고백하고 찬양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 그곳의 날씨와 맞지 않는 이질적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식민주의 선교를 통해 유럽에 속한 북반구 기독교인들에 의해 소개된 절기가 일방적으로 주입되어 아프리카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작동한 것이다. 마치 스리랑카 기독교인들에게 성찬예식으로 사용되는 밀가루 빵과 포도주가 낯설고 구하기 어렵지만 서구 선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규범이 되어졌기에 불편해도 어울리지 않아도 지켜야 하는 하나의 정통예식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예배학자 러셀이는 이 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를 한다. 만약 예수님이 스리랑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신다면, 보라색 인공색소를 넣은 소다를 원하실까 아니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신선하게 생산된 그 지역차를 나누실까?[각주:1]  

    1998년 경험 이후 난 지구 북반구 서구 유럽 기독교의 절기가 온 세계 규범이 되어 일방적으로 (심지어 억압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동시에 규범화된 절기는 곧 힘의 기제, 즉 헤게모니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규범을 만든 그룹이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힘을 지니지 못한 약자, 소외그룹, 그리고 피식민주의자들에겐 이 절기가 이질적이어도 불편해도 지켜야하는 정통 규범 (orthodox norm)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주 출신 가톨릭 예배학자 클래어 존슨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지구 남반부에 있는 자들에겐 대림절은 어둠과 추위가 아니라, 여름의 절정이며, 부활절은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봄이 아니라, 반대로 동면을 취해야하는 겨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반부 교회에서 제정된 교회력, 교회력이 담고있는 신학과 가르침이 지구 남반부에 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이질적이지만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력은 지키기 힘든 달력을 넘어서서 그들의 정체성 형성에 혼돈을 주는 이질감의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교회력은 단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공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각주:2]   

    이 점은 단지 기독교만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옆집에 사는 이웃은 방글라데시출신 카나다인이고 독실한 이슬람교인들인데, 라마단 (금식)절기를 카나다에서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호소한 적이 있다. 올해 라마단은 6월 6일부터 7월 5일까지이다. 이는 하지기간이다. 북반구에 속한 카나다에서 이 기간동안 해가 새벽5시에 뜨고, 저녁 9시에 진다. 그만큼 더 오래 금식을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 무슬림 이웃에게 절기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공간의 문제는 존슨의 주장이 타당하다.  

    이런 존슨의 주장은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주장하는 인식론과 상통한다. 우리가 어떤 사건 어떤 지식을 획득할 때, 그걸 어떻게 아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인식론이다. 그 인식론은 결국 지식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 지식을 획득하는 자의 정체성, 힘의 문제이다. 탈식민주의이론에서 인식론은 어떻게 역사를 이해하고 규정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래서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 역사에 관심하는데 역사는 직선적 시간 (linear time)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공간적 다원성 (spatial plurality)에 의해 규정된다고 본다.[각주:3] 이미 내가 쓴 책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식민주의의 대표적 예를 노예제도라고 본다면, 탈식민주의에서는 “xx가, 아니 xx의 조상이 xx 세기에 노예였다”라는 “시간” 중심의 식민주의적 역사인식론을 반박한다. 대신 “xx가, 아니 노예였던 xx의 조상이 이 공간에서 다양한 다른 그룹 (원주민, 이민자)들과 함께 살았고, 특히 지배자였던 백인과 공존, 충돌, 저항하면서 살았다” 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공존하는 그 “장소”에 관심을 한다.[각주:4] 그 장소에 관심을 두는 순간, 그렇게 역사를 보는 순간, 그 곳에서 복잡다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특히, 소외받고 억압받는 이들의 모습을 드러난다.   

    이렇게 역사관을 바꾸면 마치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시간이, 그 시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절기가 실제로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고 부자연스럽다는 걸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절기의 문제는 헤게모니의 문제라는 것도 드러난다. 즉, 누가 왜 그 절기를 만들었는지, 이 절기를 통해 누가 소외되고, 누가 다수로, 규범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전 4월 16일 세월호 2주기를 기념했다. 5월 5일 어린이날도, 5월 8일 어버이날도 축하했다. 곧 5.18 광주항쟁과 6.10 민주항쟁을 기념할 것이다. 6월 6일 현충일도 있고, 6.25 한국전쟁도 기념할 것이다. 그 기간 단오절도 들어있다. 교회력으로는 부활절을 마쳤고, 성령강림절 기간으로 절기가 바뀌었다.  

    이 많은 절기 어떻게, 무슨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어떻게 축하하고, 기념하고, 실천할 것인가?   

    이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 또 독자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에 달려있다. 다만, 나의 소견은 이렇다. 의미를 부여하자. 축하하자, 기억하고 애도하자. 그네도 뛰고 풍년을 기원하자.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새단장도 하자. 이 모든 걸 하면서, 이런 절기가 우리 이웃들에게, 타자들에게 억압이 되는지, 이질감을 줄 수 있는지도 곰곰이 살피자.  



ⓒ 웹진 <제3시대>

  1. Russell Yee, Worship on the Way: Exploring Asian North American Christian Experience (Valley Forge: Judson Press, 2012), 135. [본문으로]
  2. Clare V. Johnson, “Relating Liturgical Time to ‘Place-Time:’ The Spatiotemporal Dislocation of the Liturgical Year in Australia,” in Christian Worship in Australia: Inculturating Liturgical Tradition, Stephen Burns and Anita Monro, eds. (Strathfield, N.S.W. : St Pauls Publications, 2009), 33-45. [본문으로]
  3. Bill Ashcroft, Gareth Griffiths, and Helen Tiffin, The Empire Writes Back: Theory and Practice in Post-colonial Literatures (London/New York: Routledge, 1989), 36-37. [본문으로]
  4. HyeRan Kim-Cragg, Story and Song: A Postcolonial Interplay between Christian Education and Worship (New York: Peter Lang, 2012), 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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