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말고 동무 I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나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 맞지?’


    지난 글에서 필자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어 쉼을 누리지 못하여 세계의 흐름에 반대되는 고정되고 틀에 박힌, 그래서 안정적인 나와 세계를 찾고자 ‘친구’라는 허위로 도망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밝혀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안심, 안정, 안돈’이라는 감정의 돌을 꼭 껴안은 채 침몰해 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다시 의문을 품자면, 왜 사람들은 안심, 안정, 안돈에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두며 살아갈까? 2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 ‘바깥’과 창구역할을 하는 휴대폰을 바꾸고, 2년이 지나면 삶의 터전인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이 배운 지식이 4년 후 졸업할 즈음에는 ‘헌 지식’이 되어 있고, 공학기술자가 지닌 지식의 수명은 5년이 되지 않아 폐기/신설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데도 평균수명은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에 육박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정초해야 할 기초가 사라지며, 뿌리내려야 할 지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마음 둘 곳이 없어지니 그야말로 고립무원이다. 고로 이 초고속시대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동색(同色)이었던 친구를 갈구하고,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자동적으로 가리키는 혈통으로 회귀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찌할 도리 없고, 피할 수 없는 세상 풍파를 어떻게든 면해 보고자 친구와 가족으로 퇴각하는 개개인들의 회귀를 침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불러야만 하는가? 김영민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온갖 연줄로 얽혀든 사회 속의 우리는 ‘남’이 되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고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르’게(198) 된다고 말이다. 즉,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눈빛으로 두려움을 읽고 눈빛으로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어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 ‘군중(또는 대중)’의 무리에서 자칫 떨어져 도태될까봐 두려워하는 공포를 말이다. 한 번도 ‘남’이 되어보지 못한 존재들이란 바로 그런 존재들이다. 이는 일종의 유아들이 겪는 분리불안 증세와도 그 종류가 비슷한 것일텐데 부모로부터 몸은 떨어졌으나 경제적, 사회적으로 자기 두 발로 서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폐적인 퇴각’(204)이나 ‘모든 종류의 실천과 연대를 방해하고 금가게 하는 냉소’(200)만으로 언제까지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가상의 현실 안에서 자기를 확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김영민이 제안하는 동무는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


동무, 듣는 관계


    친구라는 동색(同色)으로 향하는 자폐적인 퇴각을 막고 서늘하고 버텨 서서 같은 것(同)이 없음(無)을 통해 세세한 버릇의 양태를 서로 고치고 서로 성장시키는 동무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듣기’가 필요하다.

    여기서의 듣기란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잘 듣는 수동적 듣기’(210)를 말하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친구, 연인들간의 듣기는 매우 수동적인 듣기 방식이란 것을 우리는 알아채야 한다. 친구와 연인끼리는 별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저 하던 말을 하면 되고, 서로간에 조율된 ‘선’ – 여기의 선이란 ‘경계(Line, 또는 Borderline)’라는 의미와 선(Good, 또는 Virtue)’ 양 의미를 포함한다 – 에 의지하여 말하면 된다. 굳이 내 의지를 다해 미간을 좁히며 자세히 듣지 않더라도 맘놓고 떠들고 들어도 되는 듣기다. 김영민은 특별히 이런 말하기와 듣기의 풍경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자리로 ‘술자리’를 많이 언급하는 편인데 대체로 아래의 사진의 분위기와 거기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상상해보면 된다. 아래와 같은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김영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술자리가 얹힌 ‘기운(Stimmung)’, 혹은 어떤 ‘두께’ 속에서 해반주그레하게 피어오르는 낭만주의,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 올라오는 대화적 휴머니즘은, 결국은 바로 그 기운 탓에 실없이 부풀어 오른 개인의 자잘한 자기도취에 기대고 있다. (380)


    이러한 ‘자잘한 자기도취’가 왜 문제인가? 바로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버릇, 혹은 그 버릇의 지향과 지형이 되먹여져 재생산될 기존 세계의 언어 수행, 생활의 양식 때문이다. 고로, 김영민이 제안하는 동무 간의 듣기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210)인 듣기이다. 시공간의 동질성에 근거한 추억과 의리의 과거적 관계는 ‘듣지 않고’(211)도 말할 수 있지만 동무 간의 듣기는 섬세하고도 서늘한 듣기, 즉 ‘버텨듣기’를 말한다. ‘사사화된 정리의 늪 속으로, 그 한 패거리의 움직임 속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저락하는 ‘친구’를 불러 세우고 일견 메마르고 서늘한 행위(211) 속에서 동무 간의 듣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동무는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다.


듣기의 본적(本籍), 침묵


    우리가 서로 만나 성장하는 사이가 되려면 실로 보낸 시간과 경험과 추억의 가짓수를 늘려서 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작업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돌보고 수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그 방법을 한 번에 깨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삶의 양식과 ‘버릇’의 문제로 귀결된다. 곧, 다시 지적한 바대로 ‘일상의 만남/사귐의 구태를 번연히 고수한 채 새 이름의 기치 아래 재집결해서 서푼어치 인식의 확장을 꾀하거나 각오를 다진다고 대체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인가?’(205)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우리가 입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동무 간의 듣기를 하기 위해서는 ‘긴절한 침묵(209)’이 절실히 요청된다. 꺼지지 않는 카톡 대화방 알림 속에서 잡담과 수다와 고백을 일삼으며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회집(209)하는 게 ‘사귐과 교제’가 될 수 없다. 타자의 말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그의 말이 성성하게 살아 있는 그대로 응대하고 말의 표준화, 정식화, 그리고 축약화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210), 그저 듣기라는 행위가 하나의 ‘풍경’이나 ‘배경장치’가 아니라 관계맺음의 전면적이고 절대적인 행위임을 아는 것, 거기서 바로 동무 간의 듣기는 탄생한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친구 말고 동무 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친구 / 친구사이


    옛부터 어른들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누차 말씀하셨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갈 수도 있고, 친구 따라 감옥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아이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아이의 환경은 어떠한지 늘 노심초사 감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럴까, 심지어 요즘은 천진난만하게 아무에게나 ‘너 나랑 친구할래?’라고 말을 걸며 코묻은 간식을 건네던 어린이들의 풍경은 온데간데 없고, 아이들이 먼저 친구를 어른들의 기준에 따라 ‘가려서’ 사귄다는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이들이 사는 동네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한다거나, 임대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친구를 왕따시키는 등의 행동은 돈에 찌들어버린 어른들과 이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물론 어느 누가 친구를 잘 사귀고 싶지 않을까? 그 누구도 좋은 친구를 만나서 ‘강남’ 가고 싶어 하지 어두컴컴한 감옥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친구 하나 잘 사귀어서 삶의 도약을 이룬 사례와 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인생을 망친 사례는 늘 존재하는 것이니 미리 그 사실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그 덕으로 ‘강남’ 한 번 가보겠다는 심산을 누가 모르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좋은 친구를 가려서 만나는 방법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애초에 그런 방법이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렇게 친구를 ‘가려가며’ 만남으로써 우리가 반드시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꼭 맞는 맞춤의상처럼 잘 만들어진 ‘완제품’으로서의 친구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즉, 애초에 좋은 친구란 없다. 오로지 존재하는 게 있다면 나와 친구의 ‘사이’만 있을 뿐이다. 나와 만나기 전에 좋은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리란 보장이 없다. ‘좋은 친구’를 만남으로써 내 삶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며 친구와 나는 많은 기억과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고 그 와중에 상호적으로 에너지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모진 비바람을 헤쳐 나가 어느덧 옥석같이 빛나는 ‘친구사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란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친구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 그 친구’사이’를 일컫는 말이었던 게다.


   한데, 이 생각에 기초하여 오히려 이 참에 한 발 더 나아가서 ‘친구’라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의심을 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좋은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이제는 과연 친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관계를 지향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김영민 그리고 '동무론'


    이에 나는 김영민이라는 한 철학자를 소개하려 한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습을 고민하고 디자인해 온 이다. 특히 친구라는 관계의 그 ‘끈끈함’과 ‘축축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런 친구라는 관계의 특성이 끌어들이는 여러 부작용들에 대해 고민했다. 하여 그는 친구의 대안으로 ‘동무’라는 새로운 관계 양식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 왔고 단행본으로 세 권에 걸쳐 – ⌜동무론⌟ (한겨레출판 2008), ⌜동무와 연인⌟ (한겨레출판사, 2008),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한겨레출판사, 2011) – 왜 우리는 친구라는 관계 말고 ‘동무’여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논의를 펼쳤다. 나는 여기서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할 수는 없지만, 몇 회에 걸쳐 짤막하게 김영민의 동무론을 소개함으로 우리가 이제까지 맺어온 친구 또는 친구 사이를 성찰해보고 새로운 관계의 방식,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려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김영민이 말하는 동무란 ‘동무(同無)’다. 다시 말해, 동무란 즉 ‘같음이 없는 사이’인 것이다. 본래 동무란 순우리말로서 친구를 의미하지만, 김영민은 기존의 친구에 관한 통념을 뒤엎고 자신만의 특별한 동무론을 펼치기 위해 일부러 ‘동무’를 한자로 언어놀이하듯 만들어 ‘친구’라는 관계와 차별화하였다. 그에 의하면 친구와 동지, 그리고 동무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과 인간이 새롭게 맺어야 할 교우관계는 그 셋 중 ‘동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복잡하고 헷갈리니 길지만, 직접 그가 말하는 ‘동지’와 ‘친구’, 그리고 ‘동무’의 비교를 들어보도록 하자.


대의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동지’가 모인다. 그들은 거사에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사랑조차 종종 걸림돌일 뿐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부차적이다. 더불어 벤야민의 비평론이 가르치듯이 객관성마저도 당파적 실천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관념의 일관성만으로 묶어둘 끈도 없다. 전두환들이나 김영삼들이, 최민수들이나 강호동들이 웃는 표정만으로도 족하다.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사적 우연성, 그것이 친구다. 공유된 이념이 없으니, 원칙상 배신도 존재할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관계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은 대의와 이념의 부재가 남긴 정서의 진공 속에서 생긴다. 대의라는 공간적 관념의 정합성이 없는 대신,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중략)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굳이 조어로 그 취지의 한 극단을 잡아내자면, 동무는 동무(同無)다! 오히려 서로 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면서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 눈을 팔면 머-얼-리 몸을 끄-을-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중략) 우선적으로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 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동무와 연인, 31~32쪽)


    김영민이 말한 동지라는 관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지’적 관계가 맞다. 이들은 어떠한 신념에 의하여 결합되어, 특정하고 뚜렷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인 사이다. 그들 관계 안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다. ‘큰 뜻(대의)’ 곧 이데올로기가 움직이는 대로 사람은 거기에 맞춰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를 저버리니 ‘배신’이다. 푯대를 향해서 가는 데에 거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만두어야 하고,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이라면 그것 역시 뭉개야 한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신념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곧 존재 이유다. 그런 신념이 맞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하루 아침에 결별과 재결합도 가능하다.


    반면에 친구는 동지의 대의와는 아주 상반된 관계다. 친구는 동지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큰 뜻(대의)’ 자체가 온데간데 없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비어 두기로 작정한 관계다.안재욱의 노래 ‘친구’에서 나오는 것처럼 ‘괜스레 힘든 날 무턱대고 전화하여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는’ 관계다. 즉, 수많은 자기 자신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입었던 옷들을 다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이더라도 전혀 괘념치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관계가 친구다. 이런 말을 들으며 우리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김영민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그것은 ‘환상’이라고 말이다.


당신은 ‘친구’를 붙잡는다. 끈끈해서, 혹은 공유된 기억이 축축해서, 어렵지 않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무론, 197쪽)


    친구는 끈끈하고 축축하다. 아니 그런데 ‘대의’, 이데올로기와 같이 사람을 물건 대하듯 폭력이 사라진 관계, 사회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써야만 하는 가면 즉 페르조나라는 나를 가두고 억압하는 잔인한 것들이 사라진 관계, 그런 칭찬받아야 마땅한 친구사이가 왜 그런 부정적인 호칭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촉촉하고 포근하다면 모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김영민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내 실천의 진정성을 담보해주던 그 완고한 사물의 질서는 꺼져내리고, 다만 기표들의 편차와 그 점증, 혹은 점감하는 시선들만이 나를 표시해주는 시대, 신화와 상징마저 전자화되는, 전자적 기호들의 유희가 절정에 달한 시대, 그 속에서 흔들리며 미끌어지는 낡은 주체는 그 낡은 ‘친구’ 관계를 통해서, 그들이 나누고 있는 공통의 기억, 그 습도, 혹 열기를 통해서 제자리, 혹은 그 죽을 자리를 잡는다. (중략) 친구의 미소, 그 주름살, 그 걸음걸이와 뱃살, 그 술잔과 그 담배 연기, 그 변치 않는 말버릇과 허장, 그 과도한 기대와 그 과소한 실천의 패턴 속에서 제자리, 혹은 죽을 자리 찾으며, 당신은 안심하고 안정하며 안돈하는 것이다. (동무론, 198~199쪽)


    쉽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느낌은 온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와 과연 ‘나’란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 즉 존재의 붕괴, 고정된 나로서 존재할 수 없고 늘 하염없이 흔들리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가 그나마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말하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손에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친구인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말대로 늘 ‘액체 상태’인 세계, 즉 사물의 소비와 유통이 너무 빨라서 그 유동이 물과 같이 되어버린 상태인 세계에 멀미하는 와중에 ‘친구야, 우리가 남이가!’라며 내 손에 다 낡은 진리 한움큼 쥐어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친구란 말이다.


    그래서 김영민은 묻는다. 과연 그 ‘안심, 안정, 안돈’이 이 세계와 나를 성장시키는가 하고 말이다. 기독교의 친숙한 언어로 말하자면, 그런 안심, 안정, 안돈의 관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다. 결국 친구에 관한 우리의 과도한 긍정은 그 긍정의 크기만큼 우리가 얼마나 현실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고 쉼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는 그런 세계의 흐름에 반대되는 고정되고 틀에 박힌, 그래서 안정적인 ‘나’와 ‘세계’를 찾고자 ‘친구’라는 허위로 도망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끝없는 ‘다름’들이 쏟아져 구역질이 날 정도의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도피하는 곳, 거기가 ‘친구’다. 그 친구에게 가서 우리는 묻고 또 묻는다.


    “나 원래 괜찮은 사람인 거 맞지?”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1)
특집 (8)
시평 (94)
목회 마당 (60)
신학 정보 (136)
사진에세이 (39)
비평의 눈 (72)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5)
소식 (153)
영화 읽기 (32)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53,442
Today : 49 Yesterday :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