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말고 동무 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친구 / 친구사이


    옛부터 어른들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누차 말씀하셨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갈 수도 있고, 친구 따라 감옥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아이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아이의 환경은 어떠한지 늘 노심초사 감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럴까, 심지어 요즘은 천진난만하게 아무에게나 ‘너 나랑 친구할래?’라고 말을 걸며 코묻은 간식을 건네던 어린이들의 풍경은 온데간데 없고, 아이들이 먼저 친구를 어른들의 기준에 따라 ‘가려서’ 사귄다는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이들이 사는 동네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한다거나, 임대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친구를 왕따시키는 등의 행동은 돈에 찌들어버린 어른들과 이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물론 어느 누가 친구를 잘 사귀고 싶지 않을까? 그 누구도 좋은 친구를 만나서 ‘강남’ 가고 싶어 하지 어두컴컴한 감옥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친구 하나 잘 사귀어서 삶의 도약을 이룬 사례와 친구 하나 잘못 만나서 인생을 망친 사례는 늘 존재하는 것이니 미리 그 사실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그 덕으로 ‘강남’ 한 번 가보겠다는 심산을 누가 모르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좋은 친구를 가려서 만나는 방법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애초에 그런 방법이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렇게 친구를 ‘가려가며’ 만남으로써 우리가 반드시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꼭 맞는 맞춤의상처럼 잘 만들어진 ‘완제품’으로서의 친구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즉, 애초에 좋은 친구란 없다. 오로지 존재하는 게 있다면 나와 친구의 ‘사이’만 있을 뿐이다. 나와 만나기 전에 좋은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리란 보장이 없다. ‘좋은 친구’를 만남으로써 내 삶이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며 친구와 나는 많은 기억과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고 그 와중에 상호적으로 에너지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모진 비바람을 헤쳐 나가 어느덧 옥석같이 빛나는 ‘친구사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란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친구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 그 친구’사이’를 일컫는 말이었던 게다.


   한데, 이 생각에 기초하여 오히려 이 참에 한 발 더 나아가서 ‘친구’라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의심을 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좋은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챘다면 이제는 과연 친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관계를 지향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김영민 그리고 '동무론'


    이에 나는 김영민이라는 한 철학자를 소개하려 한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습을 고민하고 디자인해 온 이다. 특히 친구라는 관계의 그 ‘끈끈함’과 ‘축축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런 친구라는 관계의 특성이 끌어들이는 여러 부작용들에 대해 고민했다. 하여 그는 친구의 대안으로 ‘동무’라는 새로운 관계 양식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 왔고 단행본으로 세 권에 걸쳐 – ⌜동무론⌟ (한겨레출판 2008), ⌜동무와 연인⌟ (한겨레출판사, 2008),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한겨레출판사, 2011) – 왜 우리는 친구라는 관계 말고 ‘동무’여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논의를 펼쳤다. 나는 여기서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할 수는 없지만, 몇 회에 걸쳐 짤막하게 김영민의 동무론을 소개함으로 우리가 이제까지 맺어온 친구 또는 친구 사이를 성찰해보고 새로운 관계의 방식,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려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김영민이 말하는 동무란 ‘동무(同無)’다. 다시 말해, 동무란 즉 ‘같음이 없는 사이’인 것이다. 본래 동무란 순우리말로서 친구를 의미하지만, 김영민은 기존의 친구에 관한 통념을 뒤엎고 자신만의 특별한 동무론을 펼치기 위해 일부러 ‘동무’를 한자로 언어놀이하듯 만들어 ‘친구’라는 관계와 차별화하였다. 그에 의하면 친구와 동지, 그리고 동무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과 인간이 새롭게 맺어야 할 교우관계는 그 셋 중 ‘동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복잡하고 헷갈리니 길지만, 직접 그가 말하는 ‘동지’와 ‘친구’, 그리고 ‘동무’의 비교를 들어보도록 하자.


대의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동지’가 모인다. 그들은 거사에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사랑조차 종종 걸림돌일 뿐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부차적이다. 더불어 벤야민의 비평론이 가르치듯이 객관성마저도 당파적 실천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관념의 일관성만으로 묶어둘 끈도 없다. 전두환들이나 김영삼들이, 최민수들이나 강호동들이 웃는 표정만으로도 족하다.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사적 우연성, 그것이 친구다. 공유된 이념이 없으니, 원칙상 배신도 존재할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관계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은 대의와 이념의 부재가 남긴 정서의 진공 속에서 생긴다. 대의라는 공간적 관념의 정합성이 없는 대신,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중략)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굳이 조어로 그 취지의 한 극단을 잡아내자면, 동무는 동무(同無)다! 오히려 서로 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면서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 눈을 팔면 머-얼-리 몸을 끄-을-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중략) 우선적으로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 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동무와 연인, 31~32쪽)


    김영민이 말한 동지라는 관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지’적 관계가 맞다. 이들은 어떠한 신념에 의하여 결합되어, 특정하고 뚜렷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인 사이다. 그들 관계 안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다. ‘큰 뜻(대의)’ 곧 이데올로기가 움직이는 대로 사람은 거기에 맞춰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를 저버리니 ‘배신’이다. 푯대를 향해서 가는 데에 거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만두어야 하고,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이라면 그것 역시 뭉개야 한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신념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곧 존재 이유다. 그런 신념이 맞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하루 아침에 결별과 재결합도 가능하다.


    반면에 친구는 동지의 대의와는 아주 상반된 관계다. 친구는 동지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큰 뜻(대의)’ 자체가 온데간데 없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비어 두기로 작정한 관계다.안재욱의 노래 ‘친구’에서 나오는 것처럼 ‘괜스레 힘든 날 무턱대고 전화하여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는’ 관계다. 즉, 수많은 자기 자신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입었던 옷들을 다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이더라도 전혀 괘념치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관계가 친구다. 이런 말을 들으며 우리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김영민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그것은 ‘환상’이라고 말이다.


당신은 ‘친구’를 붙잡는다. 끈끈해서, 혹은 공유된 기억이 축축해서, 어렵지 않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무론, 197쪽)


    친구는 끈끈하고 축축하다. 아니 그런데 ‘대의’, 이데올로기와 같이 사람을 물건 대하듯 폭력이 사라진 관계, 사회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써야만 하는 가면 즉 페르조나라는 나를 가두고 억압하는 잔인한 것들이 사라진 관계, 그런 칭찬받아야 마땅한 친구사이가 왜 그런 부정적인 호칭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촉촉하고 포근하다면 모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김영민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내 실천의 진정성을 담보해주던 그 완고한 사물의 질서는 꺼져내리고, 다만 기표들의 편차와 그 점증, 혹은 점감하는 시선들만이 나를 표시해주는 시대, 신화와 상징마저 전자화되는, 전자적 기호들의 유희가 절정에 달한 시대, 그 속에서 흔들리며 미끌어지는 낡은 주체는 그 낡은 ‘친구’ 관계를 통해서, 그들이 나누고 있는 공통의 기억, 그 습도, 혹 열기를 통해서 제자리, 혹은 그 죽을 자리를 잡는다. (중략) 친구의 미소, 그 주름살, 그 걸음걸이와 뱃살, 그 술잔과 그 담배 연기, 그 변치 않는 말버릇과 허장, 그 과도한 기대와 그 과소한 실천의 패턴 속에서 제자리, 혹은 죽을 자리 찾으며, 당신은 안심하고 안정하며 안돈하는 것이다. (동무론, 198~199쪽)


    쉽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느낌은 온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와 과연 ‘나’란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 즉 존재의 붕괴, 고정된 나로서 존재할 수 없고 늘 하염없이 흔들리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가 그나마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말하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손에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친구인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말대로 늘 ‘액체 상태’인 세계, 즉 사물의 소비와 유통이 너무 빨라서 그 유동이 물과 같이 되어버린 상태인 세계에 멀미하는 와중에 ‘친구야, 우리가 남이가!’라며 내 손에 다 낡은 진리 한움큼 쥐어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친구란 말이다.


    그래서 김영민은 묻는다. 과연 그 ‘안심, 안정, 안돈’이 이 세계와 나를 성장시키는가 하고 말이다. 기독교의 친숙한 언어로 말하자면, 그런 안심, 안정, 안돈의 관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다. 결국 친구에 관한 우리의 과도한 긍정은 그 긍정의 크기만큼 우리가 얼마나 현실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고 쉼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는 그런 세계의 흐름에 반대되는 고정되고 틀에 박힌, 그래서 안정적인 ‘나’와 ‘세계’를 찾고자 ‘친구’라는 허위로 도망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끝없는 ‘다름’들이 쏟아져 구역질이 날 정도의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도피하는 곳, 거기가 ‘친구’다. 그 친구에게 가서 우리는 묻고 또 묻는다.


    “나 원래 괜찮은 사람인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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