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반복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자연도감 속의 짐승들을 확인하러 가는 동물원은 원본과 복제의 전복을 상영함과 함께 사실 그런 동물과의 만남이 불가능함을 숨기는 거대한 무대이다.  

    세상 가운데 실재하는 유토피아로서의 동물원은 그 불가능함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생명의 가능성을 카피하고 가능성의 환경을 카피한다. 

    세계의 디즈니화는 경계의 무너짐을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일상 감각이다. 위계 판단은 철지난 것이다. 

    제는 먼지 한 톨 묻지 않는 매끄러운 이미지의 세계에 먼지 묻고 짐승 똥 내나는 동물원은 차라리 초기 복제 기술의 구수한 노스텔지어 풍 고색창연한 장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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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시뮬라크르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동물


    동물권 (animal rights)을 지지하고 녹색당을 지지하며 동물원의 폐지를 주장하고 반려견의 엄마이자 육식을 서슴없이 일삼는 내가 카메라를 챙겨 동물원으로 향했던 그 날 하늘은 말하기도 힘들 만큼 파랬다.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기 있다.”라는 보드리야르의 문장이 내 동물원 행의 최종결론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표현하기조차 힘든 파란 하늘이 버스타고 가는 내내 불길했었다.  

    사회에 존재하는 일종의 이형 공간을 찍고 싶어 일주일 먼저 다녀온 과천 동물원에 비해 어린이 대공원은 규모가 작은 만큼 팬시 제품을 모아 놓은 상점처럼 예쁘장하기만 해서 원하는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물은... 동물원 동물을 어찌 쉽게 찍을 수 있을까. 육식하는 동물 애호가가 동물원에 사진 찍으러 갔으니 죄책감과 연민과 분노가 뒤섞여 허우적대기에 바빴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녀가 어렸을 적하는 관례인 ‘행복한 가족 나들이’의 짐을 벗고 혼자 하는 동물원 관람이기에 ‘가족’이라는 행복해야 만하는 코드도 떼고 ‘행복’이라는 가족의 이상도 뗀, 그 순간 불행해도 그만이고 이상을 상실해도 그만인 내 맘대로의 동물원 관람이었으니 말이다.  

    평일 이른 시간인데도 제법 유모차 부대들이 많았다. 꽃피는 계절 사람 없는 동물원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예의 행복한 유모차 부대들 틈에서 나는 마치 시커먼 저승사자가 된 느낌이었다.  

    데려갈 날짜를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지전능하고 시크한 검은 저승사자처럼 아주 최소의 움직임과 시선으로 인간계와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저 덩치가 동물도감에서 보았던 그 코끼리라고, 저 큰 고양이가 TV에서 보았던 표범이라고 소리 지른다.  

    우리 벽 쪽 끝에서 하염없이 잠만 자는 오리지날 동물들은 ‘동물도감’처럼 실감나지 않는다. 우리 안에서 움직이더라도 일정 거리를 병리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동물들은 ‘TV 동물의 세계’에서처럼 용맹스럽지 않다.  

    당황한 부모들은 ‘보이니?’ ‘기억나니?’ ‘그게 저기 있네!’ 하면서 자꾸만, 집에서 손가락 꼭꼭 집어 가르쳐 주던 미디어 속의 동물 이미지를 상기 시키려 애를 쓴다.  

    동물원 학습은 아이들이 ‘안 보여!’ 하면 실패고 ‘어, 보여!’하면 성공이고 ‘야! 표범이다!’ 하면 대 성공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미디어’이다.   


벚꽃


    과천 대공원에서와는 달리 일주일 차이로 어린이 대공원엔 벚꽃이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뮬라크르 세상인 동물원에 새하얀 벚꽃과 연녹색 나뭇잎들이 더해지니 그냥 완벽한 무대 장치였다.  

    너무 예뻐서, 너무 고와서 쳐다보기 민망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나를 불길하게 했던 그 파란 하늘이 동물원 풍경을 아예 그림으로 만들어 놓았다.  

    색종이처럼 파란 하늘에 팝콘처럼 하얀 벚꽃, 이런 비유가 저렴하다면 그냥 파란 하늘에 하얀 벚꽃이 너무나 예쁜데 왜 민망해야 했을까. 왜 즐기질 못했을까.  

    파란 하늘에 벚꽃이 겹쳐지는 혼이 빠지도록 예쁜 모습에 왜 나는 다시 저승사자가 되어 인간계와 더불어 천상계와도 거리를 두고 말았던 걸까.  

    나 역시 그 기준은 ‘미디어’다.  

    카메라로 찍어 사진이란 결과물로 보면 누구나 예뻐하는 모습은 진부한 이미지로 남는다. 그러니 한 번 더 꼬인 개념을 첨가 하던지 최소한 진부함을 상쇄할 무언가로 대중적 안목 이상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파란 하늘에 하얀 벚꽃은 내공 없는 찍사에겐 민망한 것이 된다. 



무대



    맨 눈으로 보면 황홀한 것이 카메라를 통하면 진부한 것이 되는 반전에 겁을 내어 일 년에 단 며칠 보여주는 벚꽃의 요기로움을 외면했나보다.  

    며칠 사이 꽃이 졌다. 미세먼지로 하늘도 뿌옇다. 

    하지만 내겐 민망함을 무릅쓰고 겨우 찍었던 벚꽃 사진이 두 장 남아있다. 

    다행인건가.   


    그런데 그렇게나 크고 아름다운 동물원 동물들은 어디에 있던 애들일까. 

    아이들이 본 대로 동물도감에 있던 애들일까. 

    그럼 동물도감이 오리지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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