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아카데믹하지 않아서 더욱 아카데믹한 단상

셋. <내 모든 구멍을 채워줘>




 김정원*



         아주 오랜만에 만난 영국 친구 W와의 수다가 한참이었다. 히피 부모 아래서 자란 덕분인지 W는 내가 만난 영국 사람들- 보수적이고, 지루하고, 미들 클라스에 속해있으며 sorry를 연발하는- 과는 달랐기에, 그와의 대화는 늘 즐거웠다. 우리 수다의 주제는 ‘관계’ 였는데, 그는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 하였다. 바로 ‘관계 아나키를 위한 선언’, 원어로는 ‘The short instructional manifesto for relationship anarchy’ 였다.


Love is abundant, and every relationship is unique 

Love and respect instead of entitlement 

Find your core set of relationship values 

Heterosexism is rampant and out there, but don’t let fear lead you 

Build for the lovely unexpected 

Fake it til’ you make it 

Trust is better 

Change through communication 

Customize your commitments[각주:1]


         나는 찬찬히 읽어 내려갔고, 이 후 그와의 대화는 그 어떤 영국친구들과의 대화보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른바 ‘진보적인’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면, 결혼 제도와 일부일처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새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LGBT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소리만큼이나 아주 지극히 ‘옳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다른 이야기들이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특히 사랑, 혹은 관계에 관해서는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사실은 진짜 사랑을 찾고 싶다’ 라던지, ‘한 사람에게 미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라던지. 이런 상투적인 이야기들이 보다 새롭게 들리는 이유는 ‘왜 꼭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 걸까?’ ‘반드시 사랑이 동반되어야만 섹스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혹은 ‘관계 속에 있는 위계 질서를 나는 거부해’ 와 같은 이야기들을 나를 비롯 나와 직간접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이들에게서 – 친구, 교수, 작가, 활동가, 예술가, 책 등등- 너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거나 다행스럽거나 인데, 여하튼 목사님들은 이 진보영역에 속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날 W 역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것이 원나잇스탠드에 대한 것도 아니었고, 자유연애를 향한 열망은 더욱 아니었다. 그가 말한 ‘관계 아나키’는 파트너의 동의 하에 다자간의 사랑과 로맨스를 추구하는 폴리아모리(polyamory)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특히, 로맨틱한 섹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위계와 (the Romantic Sex-Based Relationship Hierarchy )와 감정적 위계 (emotional hierarchies of relationships)에 대한 거부를 강조했다. 관계에 관한 기존의 규칙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섹스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인지라, 동성애는 물론 무성애, 종교적 이유로 섹스를 참아내는? 이들까지 거의 전 범위의 관계적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었다. 관계 아나키스트들은 규범적 관계 제도에 저항하며 관계적 자유와 평등을 매우 강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로맨스와 로맨스가 빚어낸 많은 관계들을 부정하고 있었기에, 되레 여러 명의 파트너를 사랑하며 사는 것을 꿈꾸는 폴리아모리가 속 편하게 들렸다.

         관계에 대해 꽤 오랫동안 읽고 들으며 고민해왔던 나로서도 ‘알다가도 모르겠는’ 아이디어이지만, 여하튼 쿨하기가 그지 없다. 그런데, 이토록 ‘쿨내’나는 대화가 몹시도 지루했다. 지독하게 반사회적 이야기에 지루함을 느끼는 내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도 지루했다. 일종의 ‘관계 혁명’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부분에 동의를 하고 있기도 했고, ‘진정한 사랑’을 겁내는 이들의 비겁한 변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님포매니악’의 주인공 ‘조’는 제목 그대로 ‘여자 색정광’이다. 그녀의 오르가즘을 향한 변태적 집착과 사도마조히즘 등은 그녀를 사회 ‘밖에’ 머무르게 한다. 그러니까, 남편의 바깥에서, 자식새끼의 바깥에서, 일터의 바깥에서 그리고 사회화된 사랑의 바깥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녀를 섹스 중독자라 칭하며, 그녀에게 치료를 요구하지만, 그녀는 ‘내 추잡한 욕정마저도 사랑한다’고 외치며 치료를 중단한다. 수백의 사람과의 섹스를 하며 그녀가 배제했던 것은 ‘사랑’ 혹은 ‘로맨스’ 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남편에게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의 유명하고도 센슈얼한 대사인 Fill all my holes, 번역하면 내 모든 구멍을 채워줘, 되겠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우울증을 달고 사는 감독과, 또 님포매니악이 우울증 3부작 중 마지막 편이라 일컬어진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녀가 메우고자 했던 것은 텅 비어있던 ‘사랑 구멍’이지 않을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각주:2]라는 한병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뭐 이렇게 단순하고 지독히 친사회적인 비평이 있겠냐 싶겠지만, ‘조’가 찾아 헤맸던 것이 사랑 (혹은 사랑 가득한 섹스거나)이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지금의 내 상태겠다. 그리고 W의 반사회적인 이야기가 지루했던 이유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조’의 섹스에 대한 집착을 육체적 쾌락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로 과장하거나 축소시킬 생각일랑은 아예 없다. 그녀의 섹스 경험담은 계속해서 사회적 제도와 개념들을 곱씹게 만들지만, 그녀가 색 자체를 열망한 것이 아닌, 어떤 영적이고 초월적, 추상적인 사랑을 추구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관계 아나키’와 같은 개념들이 그녀와 같은 성소수자들 혹은 반사회적 인물(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주창하며 생긴 이념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녀는 지독히도 사회 바깥에서 서성거렸고, 수백의 사람과의 섹스를 하며 자아(오르가즘)를 찾고자 했지만, 그녀가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던 남편을 맞닥뜨린 후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질투’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은 후에도 그녀는 ‘내 모든 구멍을 채워줘’라고 말하고 만다. 결국, 질투를 느끼고 더 ‘많은 양의 관계’를 요구하는 ‘조’는 관계 아나키스트가 될 자격을 얻지 못한다. ‘조’같은 성소수자도 함께하고자 만든 혁명적인 개념일 테지만, 실은 ‘조’는 관계아나키스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W의 이야기를 그저 비아냥거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은연중에 로맨스나 사랑에 집착하는 것은 ‘진보적’이지 않은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싫었다. 내심 진득한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들과 또는 탄탄한 사랑을 기반으로 섹스를 즐기는 사람들을 변론하고 싶었나 보다. 그가 그런 사람들을 비판했던 것이 아닌 것은 물론, 내가 그러한 관계를 족히 동의하는 바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조’같은 여자도 결국엔 질투를 느끼고, 상대로 인해 심연의 빈 구석이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으며, 평행하고도 평등한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부족한 영어는 그저 경청을 불러왔을 뿐이다.)

         진보적인 것이 꼭 결혼 제도를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게다. 진보적인 것이 집착도 없고, 억압도 없는 관계만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명과의 연애에 흔쾌히 동의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도리어 ‘꼭 그래야만 해’와 같은 당위가 없는 것이 진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연인에게 집착하고, 울고 매달리고, 사랑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진보적인 관계가 될 수 있고, 평생 한 사람하고만 죽자고 살려고 하는 것도, 결혼을 한 후에만 섹스를 한다는 의견도 다 진보적인 ‘관계맺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해 몇 시간을 울어가며 자기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나, 이제는 그러한 이들의 술주정이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인 ‘관계 아나키’와 같은 이야기 보다는 새롭고 재미있다. ‘관계 아나키 선언’에 꽤나 많은 부분을 동의하고 있지만, 질투도 해보고, 가슴 아리게 사랑 좀 해봤던 나로서는, 술주정에 손을 들어주는 바이다.. 

         글을 쓰다 보니, 토끼 같은 눈으로 ‘나는 오직 로맨스를 기다려~!’를 외치던 그 언니가 보고 싶어진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내 진보적인 친구들보다 곱절은 솔직해 보였다. 오랫동안 ‘관계’ 혹은 ‘진정한 사랑’에 냉소적이던 내 마음을 ‘호~’하고 녹여주던 외침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로맨스, 사랑, 에로스’와 같은 이야기들은 내게는 유토피아적인 것이다. 다른 이가 완전히 나를 점거해버리는 사건,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각주:3]같은 축복이 과연 나 같은 여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지는 의아하기만 하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내 모든 구멍을 채워져’라는 대사가 사랑에 대한 찢어지는듯한 갈증으로 느껴진다는 점과, 나아가 그녀가 어서 빨리 눈이 번쩍 뜨이는 오르가즘과 사랑하는 이를 동시에 찾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유시진 대위’가 절대로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말이다. 바꿔 말하면, 쓰리섬이나 혼외정사 같은 이야기보다는 진부하기 그지 없는 사랑 혹은 관계집착적인 이야기에 다시 흥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새 관점과 관심은 어떤 식으로든 진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지 않나 싶다. 그것이 관계 아나키스트든, 현모양처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다. 부디 진보한 그곳이 오직 현모양처로만 귀결되는 곳은 아니길 바랄 뿐. 못다한 이야기를 다음 호로 미뤄두며 이상, ‘진짜 진보적인 관계’에 대한 단상을 마친다.



* 필자소개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theanarchistlibrary.org/library/andie-nordgren-the-short-instructional-manifesto-for-relationship-anarchy#toc4 [본문으로]
  2.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p22. [본문으로]
  3. 위의 책 p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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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Sex & Sexuality – "결혼은 미친 짓이다."

송민원

(시카고 대학 고대근동학과 Ph.D. Candidate)


 

  4. 메소포타미아의 Sex & Sexuality – "결혼은 미친 짓이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라는 말은 “두 강 사이”라는 뜻으로, 지역적으로는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가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와 그 주변지역을 가리킵니다. 두 강이 주는 풍성함으로 이 지역은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 문명 중 가장 오래된 문명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5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되는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기원전 2000년대에서 시작하는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문명이 바로 그들입니다. 남아있는 문헌과 유적의 풍성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물고기 뼈다귀처럼 생긴 쐐기문자(설형문자)로 된 그들의 문헌은 한 명의 학자가 평생 읽어도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현재 국제정치적인 이유로 이 지역의 발굴과 탐사가 어려워졌지만, 아마도 땅을 파는 족족 엄청난 것들이 계속 출토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Ancient Mesopotamia>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우리와 아주 멀게 느껴지는 문명입니다만, 사람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닥 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시카고대학에서 바빌로니아 문헌을 배우고 있을 때 교수님은 각 학생들에게 손바닥만한 진흙판 하나씩을 나눠 주었습니다, 조심해서 만지라는 경고와 함께. 그 안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글자들을 여덟 시간 안에 해독해내는 것이 기말시험이었죠. 햇볕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글자 하나하나를 종이에 손으로 옮긴 끝에 그 내용을 파악하고는 그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문헌은 초기 바빌로니아어(Old Babylonian)로 되어 있는데, 시기는 대략 기원전 2000년에서 1600년 경으로, 달의 신을 섬기는 신전의 여사제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편지는 이런 저런 신들에게 가족들의 안녕을 비는 극히 전형적인 안부인사로 상당히 점잖게 시작하는데, 본론에 가서 그 톤이 확 바뀝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왜 먹을 것을 보내주지 않냐며, 배가 고파 굶어죽을 지경이라고, 너희들 잘 먹고 잘 살려면 내가 여기서 계속 기도를 해야 하니 빨리 먹을 것을 보내달라고.

 

    사실 20세기 말미에 이를 때까지 서구인들이 바라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는 온갖 “비정상”적인 것들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제임스 프레이저 경(Sir James Frazer)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특징을 “풍요 숭배(fertility cult)”와 “성전 매춘(temple prostitution)”으로 규정한 이래로 후대 학자들의 상상력이 계속 덧붙여졌습니다. 사랑과 전쟁의 여신 이난나/이쉬타르(Inanna/Ishtar)는 그 상상력을 자극한 핵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왕이 이난나로 분장한 여사제와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여신과의 합일을 통해 신성을 얻게 된다는 “성혼식(Sacred Marriage rite)”이나, 성적 결합을 통해 신도들을 구원, 혹은 정결에 이르게 하는 성전의 남녀 사제들, 남녀의 성기를 동시에 지니고 있거나 혹은 그 둘의 성적 상징을 모두 갖고 있는 “양성구유”적 사제, 그리고 황홀경 속에서 스스로를 거세하는 의식 등, 그동안 서구학자들은 그들에게 낯선 “동양의 문명”을 더욱 낯설게 만들었습니다.   


<Babylonian Marriage Market (Edwin Long, 1875)>


    이런 “동양에 대한 서구적 시각”은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년 한 번씩 각 마을의 결혼적령기의 여성들을 한 곳에 집합시킨다. 남자들은 둥글게 그들 주위를 둘러싼다. 여자들은 한명씩 이름이 불려지며 경매가 시작되는데, 가장 예쁜 여자부터 시작한다. 그녀가 아주 비싼 값에 팔리고 나면 그 다음으로 예쁜 여자가 경매 대상이 된다. 이렇게 모든 여자들이 아내로 팔린다. 바빌로니아의 부유층 남성들은 미모가 빼어난 여성들을 두고 경쟁을 하는 반면,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서민들은 못생긴 여자들을 금전적 보상(결혼지참금)과 함께 얻게 된다. (경매에는) 원하는 사람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 아주 먼 시골에서까지 와서 경매를 통해 아내를 맞이한다.” (히스토리아이 I: 196) 


    하지만 실상은, 그 수많은 메소포타미아 문헌들 속에 이런 상상력들을 확증할 만한 자료는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기에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만약 남편이 있는 여자가 바람을 핀 것으로 보이는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면 여자는 “강의 신에게 데려가져야” 합니다. 즉, 물에 빠뜨려서 살면 여자의 무죄가 입증되는 것이고, 죽으면 신의 정당한 형벌을 받은 것이 되는 셈이죠.[각주:1] 하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헌들을 얕게나마 읽은 저의 시각에서는, 배고픔을 호소하던 신전 여사제처럼, 그들의 삶이 4000년 뒤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입니다. 출토된 유적들도, 문화관광부가 19금 판정을 내릴 만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와는 다르게, 대부분 기껏해야 15금 정도입니다. 



<Erotic Plaque 1, 2>


    물론 수위를 좀 벗어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아래는 성행위와 음주를 동시에 즐기는 남녀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조차도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고 상당히 덤덤히 묘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Old Babylonian Clay Plaque (Israel Museum)>


    심지어 신들마저 우리 시대에도 흔히 벌어질 만한 사랑을 합니다. 


그녀(여신 이난나)는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처럼 그녀의 집을 몰래 빠져나와 애인을 만난다. 그녀 자신처럼 빛나는 별들 아래서 그녀는 그의 애무에 몸이 서서히 녹아든다. 시간이 한참 지나(직역: “밤이 전진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집에서 몰래 빠져나온 것을 대체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를 보내줘요. 집에 가야 해요. 나를 보내줘요, 두무지(Dumuzi).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한답니다. 대체 어머니에게 어떤 거짓말을 해야할까요? 어떤 거짓말을 어머니 닌갈(Ningal)에게 해야할까요?” 그러자 두무지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어머니에게 가서, 여자친구들이 춤추러 가자고 꼬셔서 할 수 없이 갔다고 하라고.[각주:2] 


<Inanna and Dumuzi>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의 Sex & Sexuality의 독특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결혼제도”의 중요성과, 그 결혼제도에서 벗어난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를 들 수 있겠습니다. 


    두 남녀가 한 집에 살면서 시작되는 고대 이집트의 “간략한” 혼례와는 다르게,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 결혼은 여러 금전관계가 얽혀 있는 상당히 복잡한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약혼 시에 신부는 친정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지참금을 가지고 옵니다. 이 지참금은 남편의 소유로 귀속되지 않습니다. 혼인관계가 종료된 경우 (사별이나 이혼 등) 이 결혼지참금은 여자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종잣돈이 됩니다. 여자가 죽고 나면 이 지참금은 남편이 아닌 그녀의 아이들의 재산이 됩니다. 예비신랑은 약혼 시 일종의 “보험금”와 신부 측 부모에게 줄 “혼인비용(보통 “bride-price”라고 합니다)”을 지불해야 합니다. 만약 예비신랑이 마음이 바뀌어 혼인을 취소하고 싶어지면, 보험과 혼인비용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만약 신부 측 아버지가 약혼을 취소하고자 하면, 신랑이 가져온 혼인비용의 두 배를 벌금으로 내야합니다. 만약 다른 집안 사람들이 신부 측 아버지를 찾아와, 그 남자 말고 우리 아들하고 결혼시키자고 설득해서 약혼이 취소된다면, 신부 측 아버지는 응당 혼인비용의 두 배를 물어줘야 하는 것뿐 아니라, 파혼의 원인을 제공한 집안과의 혼사도 성사될 수 없습니다. 만약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성전에 속한 여사제가 되기로 한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지참금만큼의 재산을 그녀에게 주어야 합니다. 사회적 계층에 따라서도 아주 세밀한 차이들을 보이는데, 결혼지참금이나 혼인비용 등을 낼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인 경우, 또 그에 따른 아주 복잡한 계산법이 존재합니다.


    이렇듯,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결혼은 양가 집안뿐 아니라 차후에 생길 후세에까지 이르는,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이 제도의 바깥에 존재하게 되는 사회구성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섬세한 보호망을 구축하게 됩니다. “최초의 성문법”이라 (잘못) 불리는 기원전 18세기의 함무라비 법전은 “정상적인 가족제도”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경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각주:3] 몇가지 예를 들자면, 


128. 한 남자(“아윌룸”)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나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아내가 아니다. 

130.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약혼녀를 범했을 경우, 그 남자는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여자는 죄가 없다. 

134. 한 남자가 전쟁포로로 잡혀간 후 그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아내가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갔다면, 그 여자는 죄가 없다. 

136. 만약 한 남자가 가출해서 도망가버려 아내가 다른 집으로 시집갔는데, 후에 그 남자가 돌아와 아내를 되찾고자 한다면, 그가 자신의 집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아내는 (전)남편에게 돌아갈 의무가 없다. 

137. 만약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기를 원하는데 그들 사이에 아이들이 있다면, 여자가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도록 그녀의 (결혼 시에 가져온) 지참금에 더하여 남자 자신의 동산 및 부동산의 일부를 떼어주어야 한다. 그녀가 아이들을 다 양육했다면, 아들 한 명에게 줄 유산에 해당하는 만큼의 재산을 여자에게 상속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직역: “그녀의 마음의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 

142. 만약 여자가 그녀의 남편에 대해 “당신은 나에게 결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고발한 경우, 그녀는 자신의 말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옳다고 입증되면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지참금을 가지고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Code of Hammurabi 1&2>


    물론 함무라비 법전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체제를 유지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 특히 여성의 권리는 체제유지를 위해 희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혼관계나 혼인관계 파탄의 귀책사유가 여자에게 있지 않는 경우, 고대 바빌로니아 사회는 여성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법적이고 경제적인 보호장치들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런 사회보장제도는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이나, 의지할 아들이 없는 여성들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결혼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독신의 성전 여사제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Code of Hammurabi 3>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결혼제도” 밖에 존재하는 동성 간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보테로는 사회적인 낙인이나 법적 제재를 전혀 받지 않고 아주 자유로이 동성과의 관계가 존재했을 거라 주장합니다.[각주:4] 이렇게 그가 주장하는 근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법이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성관계에 대한 제재가 없으니 아마 자유로웠을 것이라는 셈인데, 사실 보테로가 찾지 못했을 뿐, 꽤나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마리’라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시국가의 왕 짐리-린(Zimri-lin)의 아내가 쓴 편지에는, 남편 짐리-린과 함무라비 왕 둘 다 남자 애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주문 연감(Almanac of Incantations)”이란 문헌에는 각종 다양한 사랑에 대한 기도문이 열거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남자의 여자에 대한 사랑, 여자의 남자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남자의 남자에 대한 사랑도 같은 정도의 중요성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각주:5] 흥미롭게도 여성 간의 동성관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슘마 알루(Šumma ālu)”라 불리는 문헌은 사람의 성적 행위가 그의 미래에 미치게 될 영향을 예측하는 일종의 지침서인데, 여기에는 다섯 가지 경우의 동성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각주:6]


1. 만약 한 남자가 자신의 “친구(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와 성적 관계를 갖는다면 (직역: “뒤에서 성교를 한다면”), 그는 그의 동료들 중에서 으뜸이 될 것이다. 

2. 만약 감옥에 갇힌 남자가 성적 욕구가 넘쳐 남성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진다면, 그에게는 불운이 닥칠 것이다. 

3. 만약 남자가 남성 사제와 관계를 가지면, 근심에서 벗어날 것이다(?). 

4. 만약 남자가 궁정관리와 관계를 가지면, 일년동안 근심에 쌓일 것이나, 그 후엔 괜찮아질 것이다. 

5. 만약 남자가 노예와 관계를 가지면, 아주 험난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각주:7]


    사실 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엄청난 양의 메소포타미아 문헌들 중 동성관계를 언급한 부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동성관계가 일반적이었다는 식의 보테로 같은 해석은, 몇 안 되는 문헌들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슘마 알루를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1번의 경우만 분명히 긍정적이고 나머지는 부정적입니다. 3번의 경우는 해독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실 중기 앗시리아 시대(기원전 15세기 경)의 법률은 ‘아윌룸’이 동등한 사회적 신분의 다른 ‘아윌룸’과 동성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경우, 즉 아윌룸이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동성이든 이성이든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언급이 없다는 것이 곧 그런 사회적 관계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슘마 알루에 나타난 동성관계에 대한 표현들이 대부분 부정적이긴 하지만 법적 처벌의 대상으로까지 취급되지는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슘마 알루가 법률문서가 아니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태도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관심은 사회를 유지시키는 근간인 결혼관계에 거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혼은 두 개인 사이의 관계를 한참 벗어나, 양가의 모든 구성원들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세들까지 고려해야 하는, 게다가 혼인관계가 중단되거나 파탄나는 각종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아주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의 “노예”들을 생산하기 위해 무조건 아이만 열심히 낳으라는 어느 나라의 미혼 대통령과는 다르게, 이 고대인들은 결혼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복지까지 걱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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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함무라비 법전 132. [본문으로]
  2. Jean Bottéro, Everyday Life in Ancient Mesopotam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2), 109. 여기서는 보테로의 번역을 의역했음을 알립니다. [본문으로]
  3. 함무라비 법전의 연대를 BC 1726년 정도로 잡는다면, 우룩아기나(Urukagina)의 법전은 그보다 600년 가량 앞선 BC 2375년, 우르남무(Urnammu)는 2100년, 에쉬눈나(Eshnunna)는 1750년 경의 것으로, 함무라비의 법전은 어떤 독창적인 성과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성문법과 관습법을 정리한 것입니다. 만약 발굴이 더 진행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증거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본문으로]
  4. Bottéro (1992), 100. [본문으로]
  5. David Greenberg, The Construction of Homosexualit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126. [본문으로]
  6. 슘마 알루는 120 여개나 되는 판에, 천 개가 넘는 주문들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7. Martti Nissinen, Homoeroticism in the Biblical World: A Historical Perspective (Augsburg Fortress, 1988), 2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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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야 할 동성애 혐오증

 

 

이종원
(본 연구소 회원)



  동성애를 바라보는 눈

  “너 때문에 집안이 완전 개꼴이다. 더러운 자식!”

  지난해 방영된 SBS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의 대사다. 조카 태섭의 동성애를 알게 된 삼촌은 태섭에게 막말을 퍼붓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이 대사는 한국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지금은 동성애를 다룬 주제가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고 스크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각 또한 과거에 비해 많이 개방되었다. 21세기에 성적 다양성이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되며 유교 사상이 뿌리박혀있던 한국 사회에도 성적 다양성이라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교회문화는 아직도 동성애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혐오스럽고 그런 단어를 언급하는 자체까지도 경기를 일으키고, 수치심을 유발케 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병적이며 죄라고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 교회문화의 지배적 현실이다. 이러한 동성애적 혐오의 강한 보수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 배타성은 어느 종교보다도 강하다. 동성애 혐오를 넘어 그 자체에 강한 죄의식을 심어 우리를 동성애 혐오자로 만들고 있다. 이런 보수적 기독교를 향해 "예수가 게이였다?"라고 외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너무 뻔한 질문일 것이다. 어찌 감히 신성한 예수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신성모독이다. 경박하다, 불경하다, 마녀사냥 하듯 그 발언을 한 사람을 향해 이단 시비가 휘몰아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이 불경스런 질문을 던지는 책이 있다. 난 이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런 책을 기독교인이라면 필독서로 읽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보수 기독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방영될 때 시청거부운동 및 광고안내기 운동까지 펼쳤던 개신교 보수단체들로선 ‘펄쩍 뛸’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The Man Jesus Loved)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준 <예수가 사랑한 남자> 이 책은 미국에서는 2003년 출간된 책으로 올해 동연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는 테드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 교수. 시카고신학교 교수이자 퀴어 신학(Queer Theology·동성애 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한다.

  제닝스 교수는 이 책의 기획의 의도는 동성애혐오와 게이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성서 구절들을 우선 다루는 방어적 전략에서 벗어나서 성서에 대한 전통적인(오) 독해가 받을 만한 개연성보다 사실상의 ‘증거 우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즉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들을 감싸 안고 긍정하는 많은 증거에 대한 검토에 집중할 것이라는 의도를 밝히면서 복음서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전승들에 대한 탐구로,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의 논점들을 다루고 있다.

제1부 : 예수가 사랑한 남자

  ‘예수는 게이였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예수가 게이였다’는 것을 설득하지 않는다. 여섯 구절밖에 안 되는 동성애 혐오적 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수 전승인 성서 속에서 동성애에 호의적으로 볼만한 풍부한 텍스트가 있다고 제시한다. 예로 요한복음서에서 '제자'는 예수의 무릎과 품에 기대어 있었고(요 13:23, 21:20), 십자가 증인 중 유일한 남자였으며, 죽기 전 자신의 생모 마리아와 가족으로 연결된(요 19:25~26) 내용의 해석을 기존의 주류 해석학이 애써 숨겨 왔던 혹은 외면해 왔던 ‘예수가 사랑한 남자’에 관한 서사로 해석적 개입을 시도한다.

  제닝스 교수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워 있던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신약성서 내·외적 자료들에 대한 자세한 검토결과 성서는 동성애 혐오적이 아닌 옹호적 서사임을 증명하고, 여기에 고대 사회의 동성애적 관습 등을 참조하여 연구하면 신약성서가 재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동성애자로서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한다.

제2부 : 예수 전승

  ‘백부장과 젊은 애인’ 일화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미 제국의 질서 안에 일부 편입되어 있었던 초대 교회가 동성애적 성향을 ‘위험한 기억’으로 간주하고 이를 예수 전승으로부터 삭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흔적들을 주목한다.

 “그는(백부장)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을 원했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욕망으로 그는 행동한다. 그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소년애에 대한 관념을 전적비난하며, 그가 경험하는 종류의 사랑에 대해 어떠한 이해도 동정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리로 나서 한 유대인 치유사를 찾고, 거절과 조롱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사랑하는 소년 애인을 위해 도움을 청한다.”(p.257)

  또한, 제9장의 당혹스러운 젠더에서 거세된 남자들에 대한 일화중 에티오피아인 환관의 경우 “그는 경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고 ···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읽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환관이 읽고 있던 이사야서는 특별히 신의 통치 안으로 환관(거세된자)을 포함한 바로 그 예언자의 책이다. 또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이야기”,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던 발을 씻기시던 예수’의 이야기기는 전통적 젠더 역할의 전복을 권고하고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예수 전승에 대한 고찰로부터 젠더 역할들의 신성함이 예수 전승들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은폐하지 않고서는 동-성 간의 성애적 행위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주장될 수 없다고 제닝스 교수는 결론을 내린다.

제3부 :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나 자식,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그 누구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27)

  성서는 그 이름(예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라는 새로운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가족해체의 전복적 가르침은 동성애자들의 상호적 성애가 배제되지 아니하는 확대된 가족 공동체를 소개한다.

  사두개 인들의 질문, 즉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관계 후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여야 하냐는 질문에 예수는 결혼 및 가족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를 폐지해 버린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녀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의해 소유권이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들이 부활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인간적인 제도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지배 또는 소유가 폐지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에서 선교적인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교체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라”(새번역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선포하고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가족 제도에 대한 반대 그리고 이를 재생산하는 구조인 결혼에 대한 의혹은 동-성애적 관계들의 수용에 부합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급진적인 미래상을 증거하고 있다는 시각이 놀랍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의 특징이 되는 성애 혐오에 귀속될 수 없다고 제닝스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거듭나야 할 동성애적 시각

  역사적으로 성서는 노예제, 여성차별, 소수자에 대한 끝없는 학대를 정당화하고 지키는 근거로 성서를 인용해 왔다. 동성애 혐오를 지지하는 증거의 빈약함이 노예제 등 인종차별을 주장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훨씬 더 많지만, 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인종차별이 성서적이지 않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제닝스 교수가 동성애 혐오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인 교회의 입장이 성서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듯이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 전환자 등을 괴물로 만든 동성애 혐오증은 교회가 만든 신화일 뿐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자들의 평등을 부인하는 등 차별의 도구로 사용된 성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 주장으로 거듭난 것처럼, 동성애의 보편적 혐오적 시각에서 인종차별과 노예제의 철폐를 주장했던 운동이 동성애의 보편적 금지의 시각에서 눈을 돌려 성서 속의 진정한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끝임 없이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맹목적 신앙의 장애물을 재거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인습적으로 교회에서 순종하라는 지배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교회에서는 “믿음이란 그저 믿는 것일 뿐”이라는 너무 파렴치한 순종의 신앙을 강요해 왔다. 믿음의 증거로 자발적 맹목의 신앙에서 벋어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왜? 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금지를 탈피하고 생각의 외연을 넗혀 나가면 보다 큰 믿음의 세계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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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13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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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축사

동성애자들과 민중
 


서광선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멀리 미국 쉬카고에서 방한하신 쉬카고 신학대학원의 제닝스 교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방한을 계기로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와 출판사 동연이 공동으로 하는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제닝스 교수님의 역작인 2003년도 판, [The Man Jesus Loved]를 [예수가 사랑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참 좋은 일 하셨다고 치하하고 싶습니다.

저는 1950년, 61년 전에 터진 한국전쟁 당시, 해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미국 해군 종합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 만난, 미국 해군 친구의 도움으로 1956년 미국 서부에 있는 작은 기독교 인문대학에 유학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저는 철학공부를 시작해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신학공부를 뉴욕에 있는 유니언에서 했습니다. 북한에서 목사 아들로 성장하면서 철저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교육 받은 사람으로, 유니언에서 180도 다른 신학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구약성서 개론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창조설화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라는 것도 비로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성서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내 믿음이 허물어졌습니다.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하면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인간 억압과 노예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강요하는 일에 회의와 함께 분노를 느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튼 연설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의 신학적 꿈을 키웠습니다. 저의 목사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만주에 망명한 항일 목사였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공산당 치하에서 반공분자로 낙인 찍혀, 625 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되어 평양에서 총살 당했습니다. 이념적 탄압,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독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겪은 사람으로서, 마틴 루터 킹의 꿈은 미국 흑인들의 꿈 만이 아니라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남과 북의 독재 정권에서 시달리고 있는 한국 민중이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주화 된 나라를 만드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우리 신학의 선배들,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박형규, 문익환, 문동환 등과 후배인 김용복 등과 함께 민중의 해방과 인간화를 위해서 일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민중 연대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신학화한 것이 민중신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민중과 함께 민주화를 위하여 행동하면서, 우리는 성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서 속에서 민중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민중의 편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민중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는 신약성서의 오클로스의 친구이며, 동시에 민중입니다.

"민중"이 누구냐? "민중"을 정의하라는 학문적인 압력을 안과 밖에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민중"을 관념적인 어떤 범주에 넣기를 거부했습니다. 민중의 사회전기, 민중의 삶을 보고, 연대함으로써 알게 되는 실체입니다. 그러나 구지 서술하자면, 민중이라고 불릴 만 한 사람들은, 게급과 계층,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사람들,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윤곽 만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 가난하고 병든자들, 여자들,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오클로스, 구약성서의 하피루라고 했습니다.

저희 민중신학자들은 한국의 여성해방신학자들의 도전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여성은 민중 중의 민중이다. 정치적으로 억압 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무시당하고, 남성들의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의 연대는 아직 요원한 상태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닝스 교수님의 책을 통해서 또다른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방한하셔서 바로 이자리에서 강연하신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읽게 되면서, 동성애자들 역시 민중 중의 민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 개인적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사회에 발 붙일 수 없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 밖에 할 수 없는 극한상항에 처해 있어서,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타자 (Others)"거나, 싸구려 관용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민중이 아니라,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예수시대의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찌하여 요한복음의 분명한 구절들을 읽지 못했을까? 어려서 부터 수십번 읽은 성경, 신학교에서 시험까지 보고 합격한 성경말씀들, 대학에서 교회에서 수십번 설교하면서도-- 눈 먼 사람처럼, 예수 역시 성적 주변인으로서의 민중이라는 것을 왜 보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예수는 민중신학자들이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발견한 정치적, 문화적 반항아 이상의 혁명가,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관용과 기쁨을 설파한 선지자라는 것을, 이책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소경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겨우 눈을 뜨게 된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은 유교의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세뇌를 받아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국에 들어 온 서양 선교사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를 유교 문화와 접목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부장적이고 엄하고 강하고 폭력적인, 그러나 다분히 도덕군자 연하는 유교적 아버지로 알고, 교회의 목사들을 하나님처럼 모시라고 강요하고 절대 복종을 명령해 왔습니다. 가부장적이며 재국주의적인 선교사의 기독교와 유교가 힘을 합친 종교권력은 어느 나라 기독교 보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인간 해방의 복음을 우리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로 왜곡해 왔습니다.

"예수는 게이였는가?" 이 질문 만이 아니라, 차마 질문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 철통 같은 가부장제와 가족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지진의 굉음이 들리는 책입니다. 제닝스 교수님의 신학, 성서 읽기는 신학적 상상력을 넘어서, 신학적 용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학적 용기는 이단의 눈으로, 종교적 순교자, 지적 순교자,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는, "queer" 즉 이상한 사람, 색 다른 사람, 괴상한 사람, 수상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읽은 그대로 말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를 따르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신 제닝스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난생 처음으로 번역하시노라고 수고하신 박성훈 선생님에게 경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혁명적이며 체제 해체적인 무서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연구소 김진호 실장님과 도서 출판 동연  김영호 사장님의 신학적 상상력과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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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

▷ 원서 : The Man Jesus Loved - homoerotic narratives from the new testament
▷ 지은이 : 테오도르 W. 제닝스 지음 / 옮긴이 : 박성훈
▷ 장르 및 쪽수 : 신학 / 456쪽
▷ 판형 및 제본 : 신국판 / 무선제본
▷ 가격 : 16,000원
▷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세계적인 퀴어 신학자가 파헤친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

1990년대 초 퀴어신학은 미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등장하였고 테오도르 제닝스는 그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저술한 이 책은 퀴어신학에 관한 그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하나로, 동성애혐오적/이성애중심적 성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들에 수록된 예수 전승 속에서 예수를 동성애자로서 해석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동성애자였다

이 책은 요한복음에 중심을 두고 논의를 편다. 고대 사회의 동성애적 관습을 참조한다면 요한복음이 재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동성애적 행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퀴어신학의 관점에서 그 텍스트와 성서 안팎의 관련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예수가 사랑한 남자에 관한 텍스트들이 그렇다.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이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워 있던 장면을 검토하고, 예수 제자 집단 내에서 가진 그의 지위/역할/정체를 살피며, 예수 전승 내에서 그가 갖는 의미를 주목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신약성서 내/외부의 자료들을 해석에 동원하면 예수의 동성애적 행위가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분명 여러 예수 전승을 살펴볼 때 예수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가 “동성애자였다” “동성애자가 아니었다”라는 단순한 대답을 이 책에서는 기피한다. 이 책은 기존의 성서 해석 방식을 뒤집는 학문적 접근을 통해 우리 사고의 큰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 과정을 좇다 보면 “예수가 동성애자였다, 아니었다”는 물음은 자연스레 그 의문이 풀린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교회는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양성애자를 희생양 삼아 성(性)을 죄악시해왔다. 그것은 교회가 창안해낸 한 편의 신화다. 이 신화를 통해 교회는 가족의 다양한 가치들에 대해 질문할 여지를 차단해왔다. 다시 말해 게이, 레즈비언들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 취급을 받았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성적 취향 그대로 가족의 일원으로 삼는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하여 괴로움 속에서 그들은 정체성에 혼동을 일으키며 급기야 자살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성서를 다시 읽고, 그 속에 새겨져 있는 교회의 성적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해석할 여지를 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동성애혐오의 또 다른 희생자는 성서 그 자체다. 교회는 오랫동안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자들의 완전한 성적 평등을 부인하기 위해 성서를 이용했다. 다시 말해 인류가 현재 일구어 온 보편타당한 상식의 진리 속에는 교회의 성서 오독과 악용이 덧칠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이 책은 그러한 잘못을 바로잡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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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을 기다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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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임방주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

어디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만날지는 ‘하느님’도 모르는 것 같다. 만약 아신다면 안가르쳐 주시는 걸 꺼다. 모르시든 안가르쳐주시든 ‘나는 알수없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불교에서는 인연을 짓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 의미는 상황이 끝난 후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 하느님과 부처님을 오가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만남의 의미는 꽤나 지나서나 아나부다~’라는 상식을 깨우쳐준 소중한 만남에 관한 것이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하 KSCF)의 회원자격으로 태국의 버마이슈라는 곳에서 인턴이 되어 버마 민주화와 난민, 종족 갈등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있던 것이 2003년 여름의 일이다. 숙소에서 버마이슈 사무실까지 걸어서 3분, 아주 짧은 거리지만 그 사이에 식당이 2개, 이발소가 1개, 구멍가게가 1개 있을 정도로 빽빽한 주택가였다. 아침에 출근길에 아침인사와 목례를 하면 ‘Good Morning’이라고 답을 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정말 외국인으로 보이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동네에서 눈에 띄는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달 가까이 지내다 보니 머리가 많이 자라 지나면서 늘 인사하던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를 손질(?)하게 되었다. 이발사 청년과 자연스럽게 짧은 영어로 가계조사와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다. 워낙 친절한 사람이라 나중에는 머리 깎지 않아도 서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태국의 찜통 더위와 소나기를 경험한지 두달이 지날 무렵, 그 친절한 친구가 시간되면 저녁을 먹자고 했다. 가까운데 좋은 곳이 있으니 가자고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요리사’인데 곧 요리를 배우러 유럽에 가게 될지 모르니 가기 전에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오히려 현지인과 ‘민주와 인권, 투쟁’이 아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흔쾌히 ‘OK’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기쁜 표정으로. 그런데 사무실에 일하는 친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내가 모르는 정보와 느낌을 나누는 듯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저녁식사를 하러 그 친구와 ‘룸비니 공원의 나이트 바자’를 갔다. 시끄럽게 공연과 흥정이 오가는 시장에서 조금 조용한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그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별로 할 말이 없어 주로 듣고 있었는데 식사 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 그 친구가 나에게 “당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했고 나는 “와~ 기대가 됩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런데 그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가 ‘커플이 되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확 스치면서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인지 물어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돌아온 답은 “당신이 맘에 들어요, 좋아요~”. ‘앗! 이거였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뭐라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 긴장된 상황이 되어버렸다.

‘앗, 어떻하지? 거절해야 하는데, 뭐라고 하지, 어~ 이거 뭐라고 하지???’라며 머릿속을 굴리고 있는데 그 요리사가 꿈인 친구가 폼나게 거절할 미끼를 던져주었다. “내가 같이 살고 있는 친구가 있지만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예요”라고. ‘이거다. 이때다!!’ 나는 2.7초도 지나지 않는 순간에 “그러면 안되죠,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안되요, 당신의 친구가 불쌍하잖아요~~”라고  ‘웃으며’ 정당하고, 윤리적으로 거절하였다. 이후 이야기는 순풍에 돗단배처럼 술술 풀려갔다. 그 이발사가 비윤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설득하고, 나중에 더 좋은 기회가 올거라고 달래며 택시를 태워보냈다. 그리고 생맥주 한잔......‘지금 뭔일이 있었는데, 아~~ 정리하고 싶지 않다.. 휴~~’ 한숨을 돌렸다.

한국에서 KSCF회원으로 민주와 통일, 인권, 소수자의 권리 운동에 음으로 양으로 관계를 맺어오면서 논리와 당위는 머릿속에 또라이1)를 틀고 있었지만, 그 권리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생각은 없었던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 인연’이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자각하기까지 6년이란 시간동안 그 기억은 내 머리 한편에 독방에서 구금 당해 있었다.

기독교내의 동성애자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도 어려운 상황임을 절실하게 알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이하 차세기연)의 활동이 6년전의 기억을 눈 앞으로 불러세웠다. 여전히 동성애인권을 말하는 내 입은 6년전 눈 앞에 있던 ‘요리사가 되고 싶은 이발사 친구’를 내가 동성애인권을 알게 해준 ‘은인’으로 조작하면서 차세기연에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내 위치를 돋보이게 하는 ‘지지자’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이 인연을 생각하게 되었다.

6년전 너무나 당당하게, 윤리적으로 설득했던 내 모습과 그 인연을 활용하여 동성애인권과 신앙과 신학을 말하는 내 모습 어디에도 ‘그 인연 속의 그 친구’는 없었다. [사람이 없었다]

6년을 기다린 그 기억의 친구를 다시 만난다면,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안해~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느님도 부처님도 말해주지 않는 그 인연의 깊은 뜻은 뭘까?라고 다시 질문하는 내 머릿속에 또 [사람]이 없어지고 있다.
‘에이씨~ 이런 된장~~’

ⓒ 웹진 <제3시대>


1) 오타가 아닌 필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30대 개그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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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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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옹달쌤
    2009.05.07 20:1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2.7초가 의미하는게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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