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윤리적 화두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미국의 작은 사립 대학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학과 여성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종종 학생들과 힘들게 씨름하는 주제가 ‘전쟁’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폭력과 전쟁으로 시작되어서, 지금까지도 그 폭력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서 신학적 머리로 접근하기 힘든 화두가 ‘전쟁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인가, 아니면 죄에 빠진 인간들의 권력 투쟁인가, 만약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이 있다면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왕국들의 흥망 성쇠가 이어졌던 유럽에서는 교회가 거룩한 전쟁을 결정하는 주체가 되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비열한 권력욕의 실체로 판단될 수 있는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 제3세계의 식민지 전쟁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의 모든 전쟁들은 교회의 적극적인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전세계의 수많은 기독교 윤리학자들이 전쟁 윤리에 매달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전쟁이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가장 파괴적인 수단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폭력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공포의 실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쟁을 겪을 때마다 인간은 상상을 초월한 잔혹성을 경험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들은 다시 부메랑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떠한 존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느님은 이 전쟁의 불길 속에서 어디에 계셨던 것인가’ 등등의 실존적 질문들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전쟁이야말로 인간 정체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역사적, 물리적 힘이 아닐까요?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와스 (Stanley Hauerwas)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미국인이라는 시민 정체성이 전쟁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지구상에 생겨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전쟁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에서 희생당한 참전 용사들을 기억하며 애국심을 다지고, 이들의 피로 지켜낸 미국을 영원히 지키자는 다짐을 해왔습니다. 기독교인들 또한 군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쟁 영웅들의 희생과 초대 기독교 순교자들의 피를 동일시하면서, 끊임없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미군들과 전장에서 죽은 거룩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선’을 수호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군사들로 자신들을 이해해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우어와스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전쟁은 인류 사회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뿌리 깊은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성서적 바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전쟁’이론이 기독교 전쟁 윤리의 지배적인 담론이 되는 이유는,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사회의 실체라는 생각을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을 거부하는 담론이 아니라, 전쟁을 실체화하는 담론인 것입니다. 전쟁이 인간 사회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생각이 팽배한 세계는 비폭력 평화주의자들을 희생을 거부하는 이기주의자들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Stanley Hauerwas, War and American Difference [Baker Academy, 2011])
            하우어와스의 주장은 신선하게 들립니다. 지금까지 주류 기독교 윤리 담론이 소위 말하는 ‘정치 현실론 (Real Politik)’ 또는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에 기초하여, 전쟁의 필연성을 가정한 데서 출발하였다면, 하우어와스는 전쟁의 필연성 자체, 즉 ‘전쟁은 계속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란 생각이 ‘과연 증명이 필요없는 합리적인 가정인가’라고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전쟁이 기독교 정체성에 부합하는 것인가’ 하고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존 요더 (John Yoder)의 비폭력 평화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 하우어와스에게 있어서, 전쟁은 기독교 정체성에 반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전쟁이 굳이 피할 수 없는 인류 사회의 현실이 될 합리적 이유도 없습니다.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류터 또한 하우어와스와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비록 힘의 대결로 일어난 전쟁과 폭력이 인간 역사를 지배해 오기는 했지만, 인류는 사랑과 정의, 화합에 바탕을 둔 신뢰와 공존의 관계를 유지해 오기도 했습니다. 예수가 그러했고,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원 운동, 간디의 비폭력 평화 운동,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이들이 보여 준 사랑과 정의, 화합에 기반한 공존의 관계는 역사적 현실이 아닌 걸까요? 류터는 폭력의 역사 만큼이나 사랑의 역사 또한 현실이라고 주장합니다. (Rosemary Ruether, Christianity and Social Systems [Rowman and Littlefield, 2008])  
           하우어와스와 류터의 신학적 질문들은 한국 사회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한국 전쟁을 통해 만들어져 왔습니다.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기억하고, 분단의 현실에 마음 아파하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흘린 이들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뼈아픈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들도 공산주의와 싸우면서, 대한 민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물질적 영적 힘을 보태었습니다. 이제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은 전쟁과 분단, 반공주의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생각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예수의 평화를 묵상해 봅시다.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만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는 길일까요? 한국의 교회는 전쟁에 대해 어떤 신학적 생각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성공회 신부입니다. 매주 미사에 성찬식을 시작하며 신자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우리가 이야기하는 “주님의 평화”는 무엇일까요? 이 평화는 현실에선 얻을 수 없는 희망일까요? ‘한국 기독교인들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현실과, 얻을 수 없는 주님의 평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 잃은 어린 양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라는 화두를 던지며 이 글을 마칩니다. 길을 찾기 위해선 앞으로 전쟁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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