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묵시록 12 : 맥도날드 블루스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나의 미국은 동네 맥도날드에서 시작한다. 아침에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맥도날드에 들리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 내가 나타나는 모습이 보이면 주문을 하지 않아도 남미출신 직원은 커피를 따르기 시작한다. 분명한 단골이지만, 장사에 도움이 되는 고객은 아니다. 작은 사이즈 커피에 크림 두 개가 전부다. 직원은 전부 남미 출신 아니면 흑인이다.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다. 아침의 맥도날드는 동네 백인 노인들의 다방이다. 10명 내외의 노인들이 예외 없이 앉아 대화를 나눈다. 주로 전날 스포츠 경기에 대한 얘기나 자동차 문제, 젊은 시절 군대나 최근 정치 얘기가 주된 대화거리다. 대화에서 개개인이 맡는 역할은 언제나 비슷하다. 늘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 늘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맥도날드를 처음 드나들 때부터 내 시선을 끈 한 사람이 있다. 언제나 검은 운동모자를 쓰고 다니는 백인 노인이었다. 군부대 마크와 더불어 한국전쟁 참전용사란 글씨가 박혀 있는 모자였는데, 한 번도 그 모자를 안 쓴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미국에 징병제가 있던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라 거의 모두가 한국전쟁 아니면 베트남전쟁의 참전용사들이었다. 어깨 너머로 그 노인이 한국 어느 지역의 전투에서 싸우던 얘기를 하는 걸 몇 번 들은 적도 있다. 그 경험이 특별하지 않았다면 그런 모자도 쓰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눈인사만 나눴지 한 번도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노인이 작년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멤버들도 교체된다.


    맥도날드는 한때 미국의 상징이었다. 맥도날드의 브랜드 로고인 골든 아치(Golden Arch)는 미국의 효율주의와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미국적인 상징이었다.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끝없는 확장과 불패의 상징이었다. 효율주의를 자본주의의 조각난 시간개념에 맞는 ‘패스트푸드’란 음식문화로 완성시켰고, 여기서 근대의 합리성은 패스트푸드의 효율성으로 대체되었다. 맥도날드는 어느 순간 저렴한 햄버거를 효율적이고 표준화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기업이 아니라 미국의 가치와 문화를 대변하는 이념으로 부각되어, 반미 데모의 현장에선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강해 어떤 훼손에도 소송으로 대응하는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징과 경험의 괴리는 언제나 넓고도 깊다. 그 내부를 직원으로 또는 고객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맥도날드의 상징을 얘기하는 경우는 없다. 그들의 경험은 맥도날드가 상징하는 이미지나 매장 내부 공간을 디자인한 사람들이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그곳에서 일하고 음식을 사먹는 고객들의 몫이다. 최근 맥도날드의 직원들이 미국의 생활임금 논쟁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유는 맥도날드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효율주의는 개념에 불과하지만, 그 대가는 최저임금을 약간 웃도는 시급이다. 내가 아는 맥도날드는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노인들이 경로할인 받은 커피 한 잔으로 친구들과 하루를 시작하는 곳이고, 남미의 이민자들이 미국이라는 땅에서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투쟁하는 일터다. 승리의 교향곡보다는 서글픈 현실의 블루스가 더 어울리는 곳이다.


    테일러주의(Taylorism)라는 효율성을 강조한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체제는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익숙해졌다. 프레더릭 테일러의 이론은 단순했지만 20세기 미국의 자본주의에 그 어떤 이론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실험은 노동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동작을 줄인 최소한의 동작을 시간으로 환산해 하루의 목표치를 노동자에게 지정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의 효율성 연구는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했지만, 효율성과 경쟁을 20세기의 종교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가 스톱워치를 사용해 철강회사 베들레헴 스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측정해 노트에 기록하는 모습은 20세기 자본주의의 노동자가 만들어지는 장면이었다. 노동의 시간을 분 단위까지로 나누고 그 쪼개진 시간 내에서의 효율성을 측정하여 노동자의 가치를 평가했다. 테일러주의의 의도는 실수나 불확실성을 배제하고 계산과 예측을 할 수 있는 경영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그 본질은 ‘인간적’인 차원을 생산과정에서 배제하여 ‘기계적’인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햄버거를 생산하는 목적은 고객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기계화된 생산 시스템을 관리하는 게 된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소외된 인간을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내가 목격한 만큼의 인간관계가 이뤄진다는 것은 사람들의 창의성과 저항정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라는 ‘빠른 음식’은 흥미로운 시간의 이해를 담고 있다. 음식이 빨리 제공되어야 하는 이유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노동시간도 짧아진 20세기 중반에 시간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왜 패스트푸드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가난한 자들의 음식문화로 정착하게 되었을까? 맥도날드를 필두로 패스트푸드 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한 1950년대 미국은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던 시기였다. 시간이 갑자기 소중해진 것일까 아니면 차원이 다른 개념의 시간을 살게 된 것일까? 그 시대 미국은 핵전쟁으로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포 속에 살고 있었다. 불안과 공포의 시간은 자본주의에 유용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시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제국주의가 공간의 개념이라면 자본주의는 시간의 개념이다. 자본주의 문화가 보편화 되면서 시간에 대한 이해도 바뀌게 된다. 시간은 쪼개지고 나뉘고 분리되어 사라지게 된다. 출근표에 시간을 찍고 출근하고 휴식시간이나 일을 마치고 퇴근할 때 또다시 시간을 찍고 나와야 하는 일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일이 아니라 시간에 사로잡히고 내몰린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시간은 여유가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대상이 되었고 결국은 시간으로부터의 소외라는 현상을 만들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의 의식 속에 자본주의의 시간은 사라진 시간 그리고 남의 시간을 사는 경험으로 남아있다. 패스트푸드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실제적인 시간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몇 분의 시간도 기다리기 힘든 시간이 된다. 시간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자본주의는 햄버거를 만드는 과장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에게도 그 공간은 자본주의의 시간을 확인하고 강요받고 실천하는 곳이다.


    시간이 없다는 인식은 묵시록의 시간 이해다. 미국에서 그 인식을 재확인시켜준 건 냉전 시대의 핵전쟁 공포였다. 패스트푸드의 개발과 함께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이 진행됐다. 핵전쟁으로 먼저 파괴될 도시로부터의 탈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공간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역설적으로 사라졌다. 패스트푸드는 냉전 시대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 중심에 묵시록의 시간 이해가 있다. 자본주의가 끝나야만 새로운 시간이 열릴 것이란 기대를 일축하며, 자본주의로 시간이 끝난다는 어떤 예언을 패스트푸드는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냉전 시대 묵시록의 공포를 만들어내고 패스트푸드를 통해 ‘사라진 시간의 음식문화’를 만들어낸 자본주의를 묵시록의 철학이라 할 수 없을까. 맥도날드는 몇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으로 유명하다. 구매한 지 몇 년이 지나도 멀쩡한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박물관에까지 전시 되었다는 뉴스가 한때 화제였다. 또 한 달 동안 맥도날드 음식만 섭취하고 몸의 변화를 측정한 사람이 만든 다큐멘터리도 있었다. 음식이 썩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멈추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상태이고, 소비자 인간에겐 사라진 시간을 사는 상태다. 바로 여기서 묵시록의 시간과 자본주의의 시간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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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미국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도날드 트럼프 (Donald Trump)가 대통령 취임식을 할 날도 이제 열흘 남짓 밖엔 남지 않았다. 미국 대선 기간 내내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의 기독교 사회 윤리가 생각이 났다. 비록 나의 사회 윤리 관점이 니버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며 발전해 왔지만, 니버 만큼 미국 자유주의 신학 전통에서 사회, 정치 문제를 분석한 기독교 학자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니버의 입장에서 트럼프의 미국이 국제 사회에 가져올 불안감을 분석해 보고, 희망의 신학을 생각해 보고 싶다.


    니버가 쓴 많은 저서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 (Irony of American History)” 이다.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해, 니버는 비판적으로 미국의 자유주의 기독교 사상을 분석하며, 이 사상이 미국 정치와 경제,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 그리고 미국의 국제 사회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니버가 이 책을 쓴 1952년과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2017년의 미국은 별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트럼프는 니버가 생각하는 최악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니버는 미국이 강대국인 이유가, 기독교 칼빈주의의 입각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자본주의 체제 때문이라기 보다는, 광대한 영토와 자원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사회에 널리 퍼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윤리 사상은 브루조아 계층과 결합한 기독교 사상이지, 미국의 부를 설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미국은 이미 자연적으로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이 자산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부가 모든 계층에 공평하게 분배되지는 않았다. 니버는 부의 불평등 만큼이나, 미국 사회에 팽배한 부에 대한 무비판적 시각, 또는 부를 바라보는 순수함 (innocence)이 도덕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 사회는 정치적 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억압적인 정부나 거대 정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는 반면, 경제적 힘에 대해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한다.


   이미 60여년전에 니버는 돈이 가지는 힘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정치 뿐만 아니라, 돈 또한 위험한 권력이며, 돈을 가진 자본계급이 정치권력까지 가질 때, 권력의 집중화로 인해 사회 불평등은 심화되고, 권력의 균형 있는 분배 또한 어려워 진다. 도날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니버가 우려한 것처럼 부의 권력이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무지한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부유해 진다는 진부한 믿음이 도날드 트럼프처럼, 어찌 보면 일반인이 생각하는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는지도 모른다.


   도날드 트럼프는 미국의 국제 정치에 대한 정책이 별로 없다. 아마도 정책의 부재는 지식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 같다. 니버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강대국이 된 미국이 힘의 정치가 판을 치는 국제 사회에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해야한다고 경고했다. 니버에 의하면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피해야할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고립주의와 제국주의가 그 것들이다. 고립주의는 자국의 이익만 생각하며, 미국이 국제 사회에 가지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고, 제국주의는 국제사회의 반발 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니버의 세계관은, 소련을 경계하며, 미국과 동맹국들이 핵전쟁의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7년은 니버의 세계와는 달리, 냉전체제를 벗어났지만, 냉전체제 보다 더 위험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얽히고설킨 국제 정치 판에서 트럼프의 등장은 위험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니버의 눈으로 본다면, 트럼프의 국제 정치는 보호주의를 표방한 미국 고립주의, 힘을 이용해 다른 나라를 억누르려는 제국주의 밖에 없다.

  
   트럼프의 미국은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상당한 위협을 줄 수 밖에 없다. 트럼프는 대선 운동 기간 내내 주한 미군 방위 분담금을 한국 정부가 더 부담해야 하고, 북핵에 대해서는 강경 대응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거 없이 하는 그의 주장이 대중적 지지를 얻는 이유는, 그것이 미국 대중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전세계 도처에 있는 미군과 미군부대가 세계 평화를 위한 자국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통틀어 핵폭탄을 실제로 사용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 한데도, 이란과 북한과 같은 핵을 계발하는 국가들과 IS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으로만 비춰지고 있다. 미군기지 연구의 전문가인 아메리칸 대학교 (America University)의 데이빗 바인 (David Vine) 교수에 의하면, 비록 미 국방성에서는 686개의 미군기지가 자국 밖에 분포하고 있다고 하지만, 공식,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크고 작은 기지들과 군사작전들을 생각하면, 전 세계에 위치한 미군기지들은 1000여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만도 공식적으로 밝혀진 기지는 83개이며, 주한 미군은 2009년 현재 2850명에 달한다 (Base Nation: How U.S. Military Bases Abroad Harm America and the World, 2015). 미군 기지들은 해외에 거주하는 5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의 삶과, 그 기지 주변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삶, 주둔국들의 정치, 경제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친다. 바인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골프장, 리조트 시설, 아파트 단지까지 갖춘, 외국에 위치한 하나의 미국 사회인, 미군 기지는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오히려 미국의 국내 정치화 국제 정치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미국은 마초주의에 입각한 힘의 정치, 군사 정치로 국제 문제에 접근한 확률이 높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군을 생각하면, 국제 질서에 위협이 되는 힘은 실제로 미국이다. 니버는 이미 1952년에 미국이 세계 정치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  


    트럼프의 등장은 오히려 미국의 사회 운동 세력을 규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에서도, 대선 후,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도 여러 연설을 통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힘은 시민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현재 트럼프의 내각은 위험할 정도로 부유한 백인 남성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다양한 사회 운동 그룹들이 그 내각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 운동의 힘은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 여성 운동, 반전 운동, 소수 인종 인권 운동 등을 통해 다져진 힘이다. 유니온 신학교의 라인홀드 니버 석좌 교수였던, 기독교 사회 윤리학자 래리 라스무센 (Larry Rasmussen)은 이 힘을 “집단적 영성 (collective spirituality)”이라고 불렀다 (Earth-Honoring Faith: Religious Ethics in a New Key, 2013).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갈라 놓고, 군사주의가 자본을 보호하려고 들고, 자연이 인간에 종속되는 시대에, 집단적 영성은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생명이 서로에게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민중이 원래 가지고 있는 변화의 힘을 공동선을 위해 사용하도록 이끈다. 한국에서 불타오르는 수많은 촛불들은, 나에게 라스무센이 이야기한 집단적 영성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트럼프의 미국은 위험하다. 그러나 이것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나는 집단적 영성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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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9 : 묵시록의 영웅 트럼프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한국에서 요즘 많이 쓰는 ‘집단적 지성’이란 말을 접하면서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의심을 품은 적이 많지만 나 역시도 그에 대한 기대를 했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트럼프 대통령’이란 상상하기조차 싫었던 말을 듣게 되면서 깨졌을 때까지는 말이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예선전을 이기도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 나는 그 마저도 인정하기 싫어 뉴스 읽기를 거부했었다. 그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뉴스를 미국의 어떤 정신의 몰락과 내가 아는 묵시록의 한 페이지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의 충격도 그의 당선 소식이 준 충격과는 비길 수 없었다. 세상의 예측은 다 틀렸고, 미국의 경제와 정치의 내막을 가장 잘 알 것 같았던 뉴욕 타임스의 Paul Krugman도 자신이 미국을 잘 모르고 있었노라 고백을 하고 말았다. 지난 한국의 총선과 영국의 Brexit도 그랬다. 왜 빅데이터와 SNS의 개명된 시대에 그렇게 많은 돈과 기술을 투자하고도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그 개명된 시대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작동한 것일 수 있다. 어쨌거나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탄식하는 일은 모두에게 남겨진 몫이 되었다.  


    나는 미국의 선택을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없다는 종말론적인 심정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으니 정반대의 극단적인 수를 던져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문화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였다. 동성애 결혼 문제에 대한 법원의 진보적인 판결이 나오고 다수의 미국인이 이런 결정을 지지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다른 진보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는 것으로 보였다. 오바마케어라 불리는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보험 제도도 보수주의자들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면서 진보적인 색체의 정치가 주류로 정착되는 듯했다. 그에 따라 보수권 내에서도 새로운 정치권의 스펙트럼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찾아나가려 한다는 느낌도 받았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그게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개표 직후부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 시골의 가난한 백인남성들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외되고 주류사회의 변화를 받아드릴 수 없었던 그들이 정치적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것이 반란이었다면 그 의미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는 과거 어느 대통령 후보보다도 더 많은 81%의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나온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그 뿌리가 근본주의에 있고, 근본주의는 19세기 미국의 전천년설의 묵시록을 수용한 사람들의 신앙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지난 웹진의 글에서 다룬바 있다. 그들의 신앙이 정치화 된 시기를 1970년대 말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나의 입장은 그 현상을 미국역사 전체에서 찾아야 하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로 묵시록이란 개념을 여기서 쓰고 있다. 70년대 말 복음주의 신앙의 정치운동화가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성공하게 된 이론적 배경에는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과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만남이 있었다. Frederick Hayak에서 Milton Friedman까지 ‘자유’라는 개념을 화두로 삼아 세상의 가치를 자본주의의 가치로 바꿀 꿈을 꾸고 있던 신자유주의에겐 유권자가 필요했고, 정치적 플랫폼이 필요했던 근본주의-복음주의 신앙인들에게 ‘개인의 자유’만큼 매력적인 용어는 없었다. (60년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 이후 비대해진 국가권력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암묵적 적그리스도로 보았던 근본주의 신앙과 국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자본의 자유를 추구하던 세력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신앙운동이 바로 미국의 뉴라이트(New Christian Right)운동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들의 타협적인 도덕관에 맛서는 순혈의 ‘도덕적 다수’라 불렀다. 그들의 세계관은 미국의 묵시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몰락은 그 세계관의 토대였고, 세상은 적군과 우군으로 구분되었고, 적을 대하는 자세는 언제나 폭력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세계관은 청교도 이후 미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으로, 현대 미국의 종교와 정치는 이 세계관이 신자유주의 세계관과 만나 변신한 형태, 곧 70년대 후반 근본주의 개신교의 ‘도덕적 다수’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등장해서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 비극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 없이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성공한 이데올로기가 늘 그렇듯이,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그 테두리의 밖은 상상도 하기 힘들게 되었다. 성공한 이데올로기는 일상과 접목된 보편의 철학이 된다. 철학으로서 신자유주의는 반민주적인 철학이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자본가와 기업인에 의한 절대적 지배를 꿈꾸고 승자와 패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도박의 철학이다. 그 철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상을 움직이는 현실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현실을 이길 수 있는 건 비판이 아니고 혁명뿐이다. 그리고 모든 혁명은 주된 텍스트는 묵시록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선택한 신자유주의 철학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판의 대상이 될 신자유주의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미래를 모르는, 아니 미래가 없는 묵시록의 혁명이 아니었을까.


    좀 더 현실 정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트럼프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한 이유는 진보적인 이슈들을 수용하는 사회분위기에 저항하는 면도 있고,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철저하게 밖으로 내몰린 현실에 대한 왜곡된 표현이라는 면도 있다고 해야 하겠다. 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트럼프라는 인물에게서 찾아야 한다. 실제 트럼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한 유권자들은 많지 않았다. 소외된 백인들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분노의 정치를 공공연히 말하는 트럼프에게서 그들의 아바타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도 없었고, 전통적인 도덕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았고,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었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았던 세속의 인물인 트럼프를 보수 기독교인들이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묵시록이란 주제에 맞는 간명한 설명 하나가 가능하다. 그들은 트럼프를 묵시록의 영웅으로 본 것이다.  


    트럼프의 세계관은 묵시록에 기초한 것이다. 세속화된 그의 묵시록에서 종교적인 언어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은 없었지만, 세상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근본주의 묵시록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세상을 선과 악이란 이분법으로 이해했고, 미국이라는 선과 테러라는 악의 두 축의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싫어했다. 세상의 선과 악이 너무나 분명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설명은 과거의 정치, 행동이 아닌 말의 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선을 실천하기 위해서 폭력은 불가피할 수도 있었다. 세상은 무질서와 테러의 위험 앞에서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고, 지금이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그의 선언에서 진리와 예언을 읽은 사람은 의뢰로 많았다.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웃어넘길 수 없는 현재의 시간에 대한 진단이고 묵시록의 예언이었다.  


    <Waiting for Armageddon>은 10년 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끝낼 아마겟돈 전쟁이 곧 일어난다는 묵시록을 믿는 약 5천만 명 정도라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Youtube에서 볼 수 있음). 비교적 편견 없이 그들의 신앙과 입장을 다룬 영화로, 묵시록의 신앙이 개인적인 믿음을 넘어, 곧 파괴되어 없어질 세상에 대한 인식이 정치화되어버린 현실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선택된 산 자와 죽은 자들이 한 순간에 하늘로 사라지는 휴거를 믿는다. 그 순간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환란을 겪게 되고, 예루살렘에서 재림예수가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최후의 전쟁을 벌여 승리한 후 천년왕국을 일으킬 것으로 믿는다. 이 묵시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를 현실의 일부로 이해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장르가 미국 영화의 대표적 장르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묵시록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가 오천만 명이 되고, 그들이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세한다는 게 미국의 현실이다. 


    트럼프가 선과 악을 넘어선 니체적인 영웅이라면 무리가 있을까. 자신의 삶이 전통적인 종교의 선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는지 그에게 악이란 개념도 종교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윤리를 넘어서 묵시록의 결단을 요구하면서 대통령이 됐다. 동성애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전통적인 도덕관이나 가치관의 회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웃에 담을 쌓고자 했고, 불법채류자들에게 가혹해져야 한다고 했다. 모든 국가는 한국은 한국의 문제이고 위대한 미국이 망하기 직전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고, 완전히 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는 협박도 있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립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현대 정치의 공식은 그에게 불필요했다. 암울한 공포의 디스토피아적인 비전만으로도 대통령이 되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은 묵시록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묵시록의 영웅은 재림예수일 필요도 없고 적그리스도일 필요도 없다. 세상의 몰락을 상기시켜주고 그에 합당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니면 몰락의 사실을 자신의 말과 제스처로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그런 영웅이 되기 위해 트럼프는 종교적일 필요도 없었고,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신학의 본질은 이미 미국적인 것으로 미국의 정신 속에 녹아져 있었다.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는 21세기에 많지 않다. 트럼프는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묵시록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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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7 : 헤겔의 미국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18세기의 유럽과 미국


    미국역사에서 내가 아는 제일 재미 있는 사건 하나는 역사책에서 ‘제퍼슨과 무스’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는 18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썼고 3대 대통령을 지낸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미국의 대사로 불란서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퍼슨은 큰 무스 한 마리를 사냥해 뿔까지 있는 상태에서 박제해 불란서로 보내라는 주문을 미국에 했다. 18세기의 운송수단으로 한겨울에 거대한 무스를 박제해 불란서로 보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나, 제퍼슨은 지속적인 요구를 했고 마침내 뜻을 이뤘다. 박제된 무스는 자연학과 지질학으로 18세기 유럽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부폰(Comte de Buffon)에게 보내졌다. 부폰은 지구의 역사를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했던 학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결과 그 역사가 4,000년이 아니라 75,000년이란 새로운 주장까지 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찰스 다윈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진화의 이론을 펼친 학자였다. 제퍼슨이 평소 알고 지내던 부폰에게 미국의 무스를 보낸 건 그의 우정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우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부폰이 자신의 저술 <자연사>에 신대륙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기술했고, 그 내용은 부폰의 명성에 걸맞게 미국에 대한 유력한 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부폰은 미주 신대륙의 토양이 유럽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았고, 그 증거를 동식물의 퇴행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즉 같은 동물이라도 미국에서 낳고 자란 동물은 연약하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동물도 그 땅에선 점차적으로 기운을 잃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 후 미국의 퇴행성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론으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같은 입장에서 미국을 연구한 결과물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부폰의 영향을 받은 드포우(Cornelius De Pauw)란 학자는 동식물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만일 유럽인들이 미국에 가서 살게 되면 몸과 마음이 연약해지고 정신적 활기를 잃는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과 행복추구라는 이념을 기초로 한 역사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자 했었던 제퍼슨에게 당시 유럽의 이런 미국론은 어처구니없고 근거없는 분석에 불과했다. 이를 반박하고 바로잡는 건 미국을 사랑하는 건국의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말이나 글로 부폰과 같은 대학자의 오류를 바로잡는 건 어렵다는 판단을 했을까, 그는 단번에 미국 자연의 왕성함을 보여줄 물증을 찾았다. 그가 떠올린 게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명물인 거대한 사슴과의 동물 무스였다. 박제된 무스를 받았을 때 부폰의 표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웃을 수밖에 없는 해프닝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진지한 학문의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불란서에서 귀국한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에 대한 기록’(Notes on the State of Virginia)이라는 미국의 자연과 정치제도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책을 썼고, 그 내용의 상당한 분량을 부폰의 논리에 대항할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자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데 할애했다. 그는 오히려 미국의 자연환경이 자신이 경험한 유럽보다 훨씬 났다고 판단했지만, 그 판단은 결국 습관적인 것이란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제퍼슨은 그 책의 불어판까지 낼 정도로 미국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 미국 특히 버지니아의 뛰어난 자연과 건국의 정치적 실험의 정당성을 유럽에 알리고자 했다.   



    부폰은 왜 과학의 이름으로 미국에 대한 황당한 주장을 했을까? 그의 저술엔 상당한 분량의 지구에 대한 지질학적 고찰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의 생각을 요약하면 미국의 환경이 퇴행적인 이유는 기온이 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미국의 땅은 늪지대가 많았고, 그런 지형에서는 생명의 진화가 더디거나 퇴보한다고 생각했다. 그 땅에서 태어난 원주민들은 게으르고 지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생식기까지 작았다는 주장은 당대 최고의 자연학자의 주장이라 믿기 힘들지만 그 논리만은 일관성이 있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미국에 오래 살다보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두포우의 주장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미국에서는 부폰이나 드포우 같은 학자들이 만들어낸 18세기 미국론을 주로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의 시작이라고 본다. 신대륙은 열등하고 미국은 결국 망할 나라라는 생각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식민주의적인 세계관을 반영했지만, 부폰 자신은 과학만을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훗날 자신의 미국론이 틀렸다는 고백까지 했었다.  


    (반미주의의 역사와 사상적 배경은 여기서 다룰 것은 아니지만, 미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개념에 대한 문제만을 제기하자면, 시대나 사안에 따르는 ‘반미’는 언제나 있을 수 있지만 ‘반미주의’라 지칭할 만한 이념의 역사가 실제 미국 밖에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반미주의란 개념은 미국 내에서 만들어진, 미국의 선민의식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입장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대립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선민의식을 고수하려면 이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을 적대시하는 세력들이 왕권주의, 공산주의, 테러리즘 등의 이념의 탈을 쓰고 도사리고 있다는 인식은 미국역사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를 반미주의라는 용어로 묶는 행태는 20세기의 일이었다.) 


    대통령 후보시절 오바마는 시골의 가난한 백인들이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소외되고 왜곡된 세상인식을 갖게 되었고, 국가의 정책으로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총과 근본주의 신앙에 빠진다는 말을 해 엘리트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얼마 후 미국 남부에서 활동하는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라는 록밴드는 오바마를 은연중 비판하는 “God and Guns”라는 곡을 냈다. 가사가 재밌다. God and guns/Keep us strong/That’s what this country/Was founded on/Well we might as well give up and run/If we let them take our God and guns. 


    18세기 유럽의 미국론을 반대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제퍼슨과 같은 미국의 학자들과 남미의 가톨릭 성직자들이었다. 제퍼슨이나 그와 함께 건국에 앞장섰던 매디슨 또는 먼로 같은 인물들이 건국의 이념과 백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면, 남미에는 17세기부터 원주민들의 학살을 막으려는 노력을 해온 예수회 신부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클라비에로(Francisco Javier Clavijero) 신부가 있었다. 그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그들이 만든 문명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 모두 계몽주의 사상에 익숙했었고, 그들의 논쟁은 이성적인 판단을 추구했고 또 상대에게 요구했다. 제퍼슨은 부폰의 논리를 정치적인 것으로 공격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언급하며 부폰의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클라비에로 역시 드포우와 같은 유럽의 학자들의 무지를 이성의 차원에서 나무랐다. 18세기 유럽의 학문을 유럽중심주의나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의 산물로 읽는 건 정당하고 옳을 수도 있지만, 의심과 해석과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20세기 학문의 산물이다. 


    유럽인들은 왜 신대륙에 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 관심은 영토 확장과 식민지 지배의 욕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극 관심은 유럽의 정체성과 역사의식과 실존적인 차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1492년 신대륙 발견에서 출발한다. 당시 유럽은 성경에 기초한 지리와 역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륙이 발견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땅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생명체들까지 살고 있었다. 그 땅이 어떻게 생겨났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곳에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실존적 고민으로 발전했다. 신학에 의존한 유럽의 세계관 속에 새로운 세상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신대륙 충격은 수많은 신학과 신화 그리고 철학과 과학의 상상과 해석을 낳았고, 신대륙은 근대유럽의 정체성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계몽과 이성의 시대라 불렸던 18세기까지도 그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데카르트와 코페르니쿠스가 대표하는 근대유럽의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은 그 충격이 만든 결과라 말할 수 있다. 


    그 충격의 신학적인 차원도 간략한 설명이 가능하다. 서구기독교에서 진리의 시간은 언제나 과거형이었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성경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온전히 신의 영역, 계시의 영역, 즉 묵시록의 영역이었다. 신대륙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사람들은 당연히 신학자들이었다. 많은 유럽인들은 교회에서 설명해주지 못했던 신대륙에 대한 이해를 중세의 예언서들에서 찾았고, 마침내 묵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묵시록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새로운 시대는 과거의 법칙들이 와해되는 시간이었고, 새로운 방법, 새로운 실험, 새로운 가치들이 등장하는 시간이었다. 교권이 억제할 수 없는 상상력과 새로운 지식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7세기 자연과학이 그 산물이었고, 유토피아라는 개념과 그에 대한 열망이 종말론적 묵시록과 함께 등장했다. 


    16세기 유럽의 지식인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신대륙의 원주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류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원주민들을 직접 목격한 스페인의 선교사들 중심으로 중세의 전통적인 존재의 구분법 - 신과 천사와 인간 그리고 동물과 식물 – 가운데 원주민이 속한 곳이 어딘지 묻는 것이었다. 원주민들도 유럽인과 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이후에도 그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란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그 이유를 마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계몽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설득력이 있는 답이 필요했다. 18세기에 등장한 유력한 설은 그 차이가 기후와 토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역이 다른 사람들이 기질과 성향에서 차이가 있고, 그 이유가 토양과 기후의 조건 속에서 결정된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환경이 사람의 성향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은 사실 오랜 역사가 있는 것이지만, 서양에서는 기독교 신학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등장한 세상의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이해의 일부였다. 부폰을 중심으로 ‘자연사’(Natural History)란 당시로선 모순적인 개념이 등장한 것도 그때였다. 지구의 역사가 교회에서 가르쳐준 것과 다르다는 주장은 지질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으로 나왔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에게나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부폰에게 신대륙의 사람들이 뒤떨어진 이유를 그 땅이 습한 기운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동식물의 성장발육도 더디고 동물들의 지능도 낮고 오히려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제퍼슨이 미국은 습하지 않을뿐더러 습한 것과 열등하고 퇴행적인 것은 도데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부폰은 왜 신대륙의 습도가 높다고 생각했을까? 신대륙에 큰 홍수가 있었기 때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아는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게 만든 홍수는 단 하나, ‘노아의 홍수’였다. 그러나 부폰이 언급한 홍수는 노아의 홍수가 아니었다. 왜냐면 노아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고, 그 이후 인류의 역사는 이미 성경에서 기록되고 서양에서 물려받은 역사밖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대륙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선 또 다른 홍수가 있어야 했고, 부폰은 제 2의 대홍수가 있었다고 믿었다. 오래전 바다와 육지의 경계는 지금과 달랐고, 육지의 지층에 바다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은 부폰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대홍수’라는 개념이다. 홍수로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는 건 서구역사에서 매우 익숙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 신화적 개념으로 신대륙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18세기 과학과 신학이 모호하게 연결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결국 그 홍수 때문에 신대륙의 기온이 습하고 되었고, 그 때문에 미주의 땅과 정신이 퇴행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었다.

 

    신대륙에 사람들이 살게 된 연유에 대한 많은 가설이 지금까지도 존재하지만, 근대 초기에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설명이 하나 등장했다. 16세기 초 스페인 출신 성직자로 남미에서 선교사로 있으면서 원주민들의 인간성을 증언하고 스페인 군인들의 참혹한 학살을 고발했던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가 제시한 설이었다. 원주민들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10개 지파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인간적으로 다뤄 기독교로 개종 시킨다면 이는 예수가 재림하는 마지막 날을 예비하는 길이고, 서구세계가 구원받는 길이라 믿었다. 라스카사스는 원주민들의 언어와 관습 속에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믿었고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이후 남미의 스페인 선교사들은 라사카사스를 따라 이 이론을 유럽에 소개했고, 미국의 백인들 중에서도 이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의 이론을 지금 보면 유럽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황당한 식민주의 이론이지만, 이를 통해 원주민들을 이 학살이 아니라 개종의 대상임을 켜야 할 분명한 이유를 제공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신대륙과 원주민들의 발견은 그에게 예언의 완성, 곧 새로운 하늘과 땅에 대한 계시가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 계시와 구원의 드라마는 원주민들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었다. 라스카사스의 이론이 맡았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신대륙에 살고 있던 새로운 인간들의 존재를 유럽의 세계관 속에서 설명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 민족의 사라진 지파라는 논리는 유럽의 지식체계 밖에 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사람들의 존재를 유럽의 입장에서 설명해주는 유용한 이론으로 쓰였다. 하다못해 일본인들의 정체가 이스라엘의 사라진 지파들이라는 설까지 비교적 최근 책으로 나올 정도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Joseph Eidelberg, The Japanese and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내리기 이미 100년 전에 미국의 종말론적인 사명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라스카사스의 논리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헤겔의 미국


    미국에 대한 헤겔의 언급은 주로 그의 <역사철학강의>에서 나온다. 18세기 부푼과 드포우는 신대륙과 미국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의 이해는 근거 있는 것으로 19세기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고 헤겔까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이 헤겔의 철학에서 중요하진 않더라도 그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역사철학의 묵시적인 차원의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그의 글 중에서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역사’란 개념이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땅과 연결되어 설명되기 때문에 그의 편견과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에 용의한 면이 있어서 오랜 시간 헤겔철학의 입문서로 여겨졌던 책이다. 이 글에선 그 책 앞부분‘역사의 지리적인 바탕’이라는 장에서 나오는 미국에 대한 언급만 살펴보겠다. 하지만 대상이 헤겔이기에 그를 미국이라는 상황과 연결짓는 배경설명이 빠질 수 없다. 19세기 유럽의 제일 중요한 철학자이지만 그만큼 제국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을 옹호하는 철학을 했다고 욕을 먹는 철학자도 없다. 그러나 헤겔 이후의 서양의 철학은 모두 헤겔과의 대화 속에서 나왔다. 사회적인 관계를 앞세우는 다양한 맑스주의 전통의 철학에서 인간의 개인적인 차원을 다루는 실존주의까지 헤겔을 싫어할 수는 있어도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긴 힘들었다.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전통을 세운 듀이와 퍼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에는 1989년 이후 동구권의 몰락으로 이념의 역사가 끝났다는 논쟁과 함께 헤겔이 다시 학자들만이 아니라 언론에서까지 회자되기도 했다. 자본주의 세계화의 등장과 함께 부쩍 늘어난 역사의 종말이나 묵시적인 역사의 이해에 대한 연구에서 헤겔의 철학은 빠지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학에서 보자면 헤겔이 없는 성서학을 생각할 수 없고,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였던 성부와 성자의 관계 즉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공해 준 사람도 내 생각엔 헤겔이었다. 여기서 헤겔을 다루는 이유는 헤겔 자신이 미국에 대한 언급을 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역사의 종말이라는 묵시록의 내용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철학에서 미국이 중요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이 역사의 철학이고, 그 철학에서 역사는 이미 완성된 종착점에 다다른 상태였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유럽의 의식 속에 등장한 신대륙이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헤겔의 역사철학의 중요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자.  


    헤겔철학의 가장 큰 공헌은 그의 역사철학에 있었다. 하지만 역사철학이라는 말 자체는 모순적인 면이 있다. 철학은 합리적인 전체의 통합성을 추구하는 것인데, 역사는 비합리적인 우연과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아닌가? 헤겔은 철학이 역사의 시간을 다루려면 그 내용은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의미는 역사가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이를 증명하는 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역할이란 말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헤겔만의 강력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변증법은 역사의 합리성을 논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역사는 합리적일뿐만 아니라 발전하고 완성과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역사에 끝이 있다는 가정이 어떻게 (신학이 아니라) 철학의 가정이 될 수 있을까. 역기서 ‘절대’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철학이 다루는 합리적인 이성은 상대적인 우연에 시달리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현대에서 용납되지 않는 용어이지만, 헤겔에게 ‘절대’(Absolute)라는 게 없으면 신학과 철학은 일상의 혼란 가운데 표류하게 된다. 역사가 합리적이란 말은 절대적인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말과 같다. 역사 속에서의 이성이 바로 그 유명한 헤겔의 정신이다. 역사는 ‘정신’이 스스로의 절대성을 찾아나가는 정신의 역사였다. 헤겔에게 역사의 출발으로 정신이었고, 또 역사의 끝은 정신이 절대적인 자기의식을 회복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시대가 바로 그 역사의 종말의 시대로 이해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헤겔이 역사의 끝과 자신의 철학이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들이 다양하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표현도 헤겔이 아니라 헤겔의 역사철학 해석으로 유명했던 코제브(Alexander Kojeve)와 니체 같은 이들의 해석이었지만 헤겔의 개념으로 흔히 쓰이고 있다). 


    헤겔에게 역사가 정신으로 시작한다는 말은 역사가 자연을 극복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말과 같았다. 헤겔이 왜 자연과 역사를 구분하고 세계사를 자연을 극복한 정신의 역사로 이해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역사철학강의> 서론에 나온다. 그의 입장은 18세기 계몽주의 학자들이 “유행”처럼 추구했던 자연 속에서 이성을 찾고 신을 찾는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작업은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에서 신을 찾는 것이었다. 역사의 선악과 굴곡진 모습을 합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하여 악의 문제가 신의 섭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헤겔은 이 사실을 증명하는 길을 역사 속에서 활동하면서 화해와 통합으로 갈등의 역사를 치유하는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신 자연은 새로운 것이 없는 시간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역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든 시간이 헤겔의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은 모든 민족의 삶 속에서 동일하게 존재하고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헤겔의 역사는 정신으로 시작하지만, 그 정신의 활동은 국가라는 제도를 통해 드러났다. 또 국가는 뛰어난 인물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세계사적인 인물’)들에 의해 이끌어지기 때문에, 유럽처럼 정신이 올바른 괘도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곳이 있는가 하면, 정신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고 따라서 역사의 발전이 더디고 이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민족도 있고, 집단으로 모여만 살뿐 역사 이전(Prehistory)의 자연과 같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 집단도 있다. 예컨대 원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역사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이식의 수준이 합리성에 이르지 못하는 야만의 시대가 지나야만 역사가 시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역사는 정신을 통해 발전하고, 현재는 과거보다 더 성숙한 정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를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헤겔에게 정신의 역사는 유럽과 그 이전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에서 제대로 발전을 했고,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역사를 통해 완성된다고 이해했다. 그 정신의 원리는 자유였고, 유독 서구의 역사 속에서만 자유의 개념이 발전했다는 헤겔의 입장은 19세기 유럽이라는 그의 시대적 한계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 역사는 이제 끝이 났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과거형이다. 헤겔의 철학이 닫힌 구조를 갖고 있다거나 전체주의적이라 비판하는 이유는 그의 역사철학에 과거의 역사와 그 역사가 끝나는 현재만 있을 뿐, 내일이나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겔은 미국이라는 난제를 만난다. 신대륙이라는 미국을 그의 역사철학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와 과거를 품은 현재밖에 없고, 철학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영원한 현재에 대한 관심뿐이다. 그래서 헤겔은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을 ‘미래의 땅’이라 불렀다. 미국이 미래의 세상을 주도할 것이란 의미가 아니었다. 헤겔의 역사관에서 미국은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래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유가 재밌다. 헤겔에게 신대륙이란 개념은 단지 새롭게 발견된 대륙이란 의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신대륙 자체가 유럽보다 지질학적인 나이가 어리다 믿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모든 것을 미성숙한 것으로 이해했다. 미국의 땅과 동식물만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원주민들도 그렇다고 보았다. 모든 게 작았고 약했다. 동식물들은 맛도 없었고,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등장하자마자 그 모습에 기가 눌려 몰락하기 시작했다. 헤겔이 미국을 다룬 건 <역사철학강의>의 앞부분 “역사의 지리적 바탕”이라는 장에서였다. 미국은 지리적인 땅일 뿐 정신의 역사에 이르지 못했다. 당시 의견이 분분했던 미국이 경제나 민주적인 제도는 성숙하지 못한 유럽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미국은 역사 정신의 무대인 국가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왕정체제를 선호했던 헤겔에게 미국의 민주주의는 성숙하지 못한 시민들의 망상적 실험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기서 헤겔이 제시했던 성숙한 국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 매우 특이하다. 농민들이 개척할 땅이 풍부하지 않아 도심으로 그들이 몰려들어야 했고, 계층 간의 구분이 첨예화 되어 긴장상태가 조성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과 긴장 가운데서 정신이 살아나 (헤겔식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인간이 자연의 삶을 영위할 수 없고, 경작할 땅이 부족하고, 계층 간의 긴장이 고조 됐을 때 정신의 역사가 시작한다면, 헤겔의 철학이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자유주의 체제의 태동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은 정당한 것이다. 


    ‘미래의 땅’이란 표현을 생각해보자. 역사는 현재로 끝났기 때문에 더 발전된 기술과 이념과 문명의 미래는 없었다. 역사의 미래는 없고, 더 나아가 헤겔의 미래는 (연속적인) 역사가 없었다. 미래에 역사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땅’이라고만 했을까. 땅은 역사 이전의 상태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지 않은 묵시록의 미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미래를 주로 땅과 흙의 상태로 표현한 현대문화의 장르는 Post-Apocalyptic이다. 영화로도 유명한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대표적인 Post-Apocalyptic장르의 소설이다. 묵시적 대재앙의 사건으로 세상의 역사가 끝난 인류의 미래는 잿빛 하늘과 땅으로 표현된다. 미래를 화려한 문명이 아니라, 죽은 땅이 다시 살아나 자연이 회복되고 다시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간주하는 건, 그 장르 작품들의 흔한 주제설정이다. 헤겔은 미국의 미래를 잘못 이해했지만, 그의 논리 즉 역사가 끝난 이후는 다만 역사 이전의 자연 곧 땅의 시대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논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국은 20세기 서구문명의 중심이 되었고, 세계사적인 국가가 됐지만 그 힘은 역사를 끝낼 각오와 힘, 곧 묵시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자신이 그런 미래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인류에게 남은 미래가 그런 미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헤겔은 인류의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지만, 그의 과오가 메시아주의나 그와 상응하는 다가올 무엇인가를 논하는 철학보다 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래를 다가올 내일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문명의 의미가 파괴된 땅과 자연으로의 회귀라면 19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상상력에 더 적합한 진단이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철학자로서 헤겔의 문제는 전체성, 통합성, 절대성을 표방하는 타협 없는 철학의 교리적인 확신에 빠져 이를 지켜내려 했던데 있었다.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절대 교리의 철학으로 통합시켜 신학과 예술을 포괄하는 철학을 꿈꿨던 헤겔의 자만심도 한몫을 했다. 

    헤겔은 분명히 자신의 철학이 역사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사의 시간이 앞으로도 더 지속되는 걸 부정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역사가 끝난 상태는 어떤 것일까. 철학이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적이고 영구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절대와 보편을 성취한 헤겔의 철학과 유럽역사의 영광은 계속되는 것일까? 역사는 더 이상 진보하지 않고 이제 남은 건 유럽 밖의 깨달음이 늦고 진화가 더딘 국가들이 유럽을 서서히 따라오는 것뿐이라면, 그건 미래가 아니라 유럽역사의 현재가 진행 중인 상태를 말한다. 전쟁을 예를 들자면, 한쪽의 절대적인 우세로 대세가 이미 기울었고 승전까지 선언된 상태지만 작은 전투는 계속되는 상황이 비슷한 경우일 수도 있다.  


    헤겔은 마지막 전쟁이나 묵시적인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헤겔이 불란서 혁명이 공포의 테러 체제로 변하는 과정을 묵시적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했던 나폴레옹이 예나(Jena)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이를 역사를 바꾸는 마지막 전쟁이었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미래의 예언은 철학이나 역사철학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헤겔을 묵시적으로 읽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완성되고 끝이 난다는 생각만큼 본질적으로 묵시적인 것은 없다. 헤겔이 철학을 역사의 끝에서 영원한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보았다면, 그 철학은 재림이나 천년왕국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개념들을 쓰지 않더라도 묵시적인 학문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 그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에 만약 미래가 있다면 퇴보적인 의미밖에는 가질 수 없다고 그의 생각에서 묵시록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헤겔에게 신대륙은 귀찮은 존재였다. 이제 역사가 완성되는 마지막 시점에 그 발전과 전개를 설명하는 논리의 선명함을 퇴색시키는 성가신 땅이었다. 귀찮은 것은 생각하기 싫은 법, 헤겔은 신대륙을 생각과 사유의 영역 밖의 존재로 내몰았다. 그러나 헤겔에게 생각 밖의 영역이 있을 수 있을까? 정신이 절대적인 자기의식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고 녹여내고 이해한 시대가 열렸는데, 생각 밖에 무엇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정신으로 완성되는 헤겔의 역사는 현재에서 끝나고 이미 완성된 역사는 미래가 필요 없다. 헤겔은 신대륙과 미국을 미래의 땅이라 선언했다. 여기서 미래가 절대적인 사유를 추구하는 철학의 영역 밖에 있고, 역사는 이미 끝난 것이라면 미래는 헤겔이 말했던 Pre-history가 아니라 Post-history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묵시 이후 (Post-Apocalyptic)한 땅이 되고, 19세기 유럽에 관한 헤겔의 진단과 선언은 묵시록에 속하게 된다. 


    헤겔은 인류의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지만, 그의 과오가 메시아주의나 그와 상응하는 다가올 무엇인가를 논하는 철학보다 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래를 다가올 내일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문명의 의미가 파괴된 땅과 자연으로의 회귀라면 19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의 상상력에 더 적합한 진단이었는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철학자로서 헤겔의 문제는 전체성, 통합성, 절대성을 표방하는 타협 없는 철학의 교리적인 확신에 빠져 이를 지켜내려 했던데 있었다.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을 절대 교리의 철학으로 통합시켜 신학과 예술을 포괄하는 철학을 꿈꿨던 헤겔의 자만심도 한몫을 했다. 



ⓒ 웹진 <제3시대>



    (참고도서) 


    제퍼슨과 무스의 일화를 중심으로 18세기 유럽의 자연사 연구와 미국담론의 연구물로 Lee Alan Dugatkin의 [Mr. Jefferson and the Giant Moose: Natural History in Early Ameirca]란 책이 있다. 책의 표지그림이 흥미로워 글 앞부분에 삽입했다. 제퍼슨과 부폰에 관한 일화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는 1900년도에 출간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제퍼슨의 입장을 편집해 알파벳 순서대로 모아놓은 책인데, ‘기후’(Climate)와 연관된 글들을 참고했다. 18세기 이후 신대륙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을 다룬 것으로 잘 알려진 책은 1955년 스페인어로 처음 출간된 Antonello Gerbi의 [The Dispute of the New World: The History of a Polemic, 1750-1900]이다. 라스카사스가 신대륙 원주민들의 고난을 기록한 책은 [A Short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이다. 스페인의 남미정복 역사를 유럽과 타자의 만남이라는 개념으로 이론화 한 대표적인 저술은 Tzvetan Todorov의 [The Conquest of America]란 책이다.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영어판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Sibree 번역의 [The Philosophy of History]. 헤겔과 미국의 관계를 내게 처음 소개해 준 글은 20세치 초 스페인의 철학자 Jose Ortega y Gasset이 쓴 “Hegel and America”란 글이었다. 그 후 비슷한 연구는 남미에서 해방철학을 추구해온 Enrique Dussel과 같은 이들이 제삼세계의 입장에서 진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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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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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5 : 국기(國旗)와 국가(國歌)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몇 달 전 우연히 인터넷 CNN뉴스에서 54년 만에 쿠바의 아바나에서 미국의 성조기가 펄럭이는 모습을 보았다. 카스트로의 혁명으로 쫓기듯 국기를 내리고 대사관을 철수했던 미국이 쿠바와 수교를 맺은 후, 아바나에 대사관을 다시 여는 첫날 국기계양식의 모습이었다. 1961년 미국 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성조기를 내렸다는 3명의 해병도 노인이 되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성조기가 쿠바에서 다시 휘날리는 감동의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1961년 쿠바에서 그리고 1975년 베트남에서 자랑스러운 성조기가 강제로 내려지는 모습을 많은 미국인들은 ‘치욕’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들에게 쿠바에 다시 꽂은 성조기는 미국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쿠바에 가해진 보복의 테러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찾을 수 없었다. 굴하지 않는 의지와 멈출 수 없는 자유의 행진을 뜻하는 성조기 앞에 사과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기라는 깃발이 갖는 의미는 대부분 미국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국가와 애국심, 전쟁과 희생, 자유와 영광 등의 이념을 깃발 하나로 엮어낸 원조가 바로 미국이다.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도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 맹세, 다짐, 경외심, 바른 자세는 미국이 완성해낸 국가라는 종교의 성례전에 속한다. 그 대가는 초월적인 위안과 더 큰 실제인 국가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이다. 국기는 종교적 감성을 유발하지만 그에 따르는 규범은 언제나 군사적이다. 미국의 국기는 애초 독립전쟁 때 제정된 군기였다. 지금도 군사적 정신을 함양하고 희생과 복종의 정신을 요구하는 도구로 쓰인다.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의식을 제공하고, 안과 밖,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게 만든다. 따라서 국기는 군사문화를 상징하는 군기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세상 나라들의 국기는 모두 비슷한 역할을 한다.  


    미국의 자유란 개념이 군사주의를 연상시키지 않고, 미국의 문화가 군사적이라는 판단도 흔치 않다. 그러나 군사주의의 문화는 미국의 국민의식 저변에 깔려있다. 군사용으로 개발된 기술이 현대적인 삶의 필수적인 일부가 된 예가 많다는 사실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인터넷은 초기에 군사기술로 개발되었고, 군사주의가 지향하는 세상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세상은 감시와 통제와 검열에 익숙하고, 삶이 통계와 데이터의 가치로 평가되는데 익숙해 있다. 미국 정서의 무의식 속에는 명령과 복종, 법과 질서, 심판과 처벌이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군사문화는 전쟁으로 형성되고, 미국은 언제나 전쟁 중이다. 그러나 18세기 독립전쟁에서 21세기 이락과의 전쟁까지 미국의 모든 전쟁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자유는 전쟁에 초월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자유와 전쟁의 이념적 간극을 메워 근접할 수 없는 숭고한 신앙의 영역으로 만드는 역할을 성조기가 한다. 이를 초월적 신앙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투쟁의 영역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은 ‘총’이다. 미국의 많은 백인들에게 총은 성조기와 더불어 자유의 절대적 상징이다. 자유의 끝은 총으로 지켜야 하고, 그들이 믿는 성조기의 모든 것은 이를 증언한다고 믿는다. 미국처럼 일상에서 국기를 많이 접하게 되는 나라가 있을까. 고속도로를 차로 달리다 백인남자들이 선호하는 픽업트럭에 성조기가 차창에 부착돼 있는 모습을 가끔 본다. 불필요하고, 위협적이고, 기름 많이 먹는 트럭을 몰고 다니는 이유는 언젠가 긴요히 쓸 때가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내가 소유하는 모든 걸 싣고 떠나야 할 마지막 날을 위한 준비는 아닐까). 그런 트럭에 부착된 성조기에서 내가 읽는 의미는 ‘이 트럭 안에 총이 있을지도 모르니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미국의 전근대적인 총기사랑은 자유란 이념이 허용하는 군사문화와 병행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부분은 <총의 묵시록>이란 제목으로 차후에 다룰 생각이다). 


    미국의 군사문화를 내부에서 유지시키는 기능은 스포츠가 한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상처는 운동경기에서 되풀이 되는 전쟁의 본질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미국의 남자아이들은 야구와 풋볼 또 최근에는 축구를 통해 승리의 영광을 체득하고, 이를 위한 자기희생을 강요받으면서 싸움터의 가치를 내면화 한다. 모든 공식 스포츠 경기에서 부르는 미국의 국가는 이 문화를 초월적인 공동체의 가치로 수용하게 만든다. 미국의 대학 스포츠 중 특히 풋볼은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 문화는 명령과 복종과 승리를 절대가치로 그리고 패배를 치욕으로 받아들이는 군사문화의 규율이 만들어낸 것이다. 운동경기에서의 승리는 이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전쟁에서의 승리는 진실이 승리했다는 주장을 낳는다. 미국만큼 자신의 전쟁이 진리와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 믿는 나라는 없다. 베트남 전쟁과 같이 반대가 심한 전쟁도 있었지만, 미국은 싸워서라도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도그마에 다수가 동의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여기서 미국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자유론’은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 독립전쟁에서 남북전쟁, 세계대전에서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까지의 분쟁은 모두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자유는 청교도 시대부터 부여받은 미국의 사명이자 운명이었고, 이 자유를 이 세상에서 완성시키는 사명은 종말론적 사명이었다. 역사를 종결시키는 종말의 사명 앞에 후퇴나 타협은 있을 수 없다. 핵무기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거부했던 냉전시대의 전략과 이 시대 미국 밖의 다른 패권적 국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전략은 이런 종말의 사명을 배제하고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 


    미국의 국가(國歌)는 국기(國旗)인 ‘성조기’를 노래하는 군가다. 가사는 밤새 적의 포탄 공격을 받고도 새벽녘에 변함없이 휘날리고 있는 성조기의 위상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1931년 의회에서 국가로 공인되기 이전에도 100년 넘게 군대의 행사나 국기를 게양할 때 연주되던 곡이었다. 미국의 군사문화는 성조기의 물신(物神)화로 유지된다. 그 문화를 일상의 일부로 만드는 건 성조기를 바라보면서 국가를 불러야만 시작하는 스포츠 경기다. 오래 전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을 이어온 메노나이트 (Mennonite) 종파의 교인들이 세운 인디아나주에 있는 고션대학(Goshen College)에서 앞으로 운동경기 전에 미국국가를 부르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각종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대학이 국기의 우상화와 군사문화에 참여하지 할 수 없겠다는 용기와 결단이 당시에도 놀라웠다. 미국의 국가만큼이나 성조기의 우상화와 군사문화의 고착에 역할을 한 것은 ‘국기에 대한 맹세’(Pledge of Allegiance)다. 최근에는 학생들에게 강제로 국기를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고 충성을 맹세하도록 만드는 게 위헌이라는 논란이 많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허용하는 주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맹세는 지금도 일반적으로 미국의 초. 중. 고 학생들에게 적용되는 규범이다. 최근에 이 맹세를 거부하는 운동이 ‘강제’와 ‘강요’를 문제 삼았다면, 예전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국기에 대한 맹세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거부하곤 했었다. 


    미국의 국가만큼이나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미국의 혼을 잘 대변한다는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이라는 노래가 있다. 한국의 찬송가에도 ‘마귀들과 싸울지라.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가사는 좀 달라도 “Glory, Glory, Hallelujah” (영광, 영광, 할렐루야)라는 유명한 후렴은 동일하다. 미국에선 독립기념일이나 현충일과 같은 날엔 빠지지 않고 불리는 감동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그 가사와 작사가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나는 오래 전 그 곡의 묵시적인 내용을 알게 된 후 노래를 들으면서 관찰은 했어도 따라서 불러본 적은 없다. 군인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진리를 이루기 위해 적을 짓밟겠다는 가사는 전쟁을 국가 간의 대립과 분쟁이 아니라 선악의 싸움으로 이해하고 마치 십자군의 성전을 연상케 만든다. 가사는 영광 속의 재림한 예수가 분노하여 적을 짓밟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의 진리가 행진하는 병사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재림 예수의 진리를 위해 행진하는 군대는 마지막 심판과 최후의 전쟁을 준비하는 군대다. 계시록의 언어를 그대로 쓰고 있는 가사에서 종말론적 사명을 전쟁터에서 이뤄내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가사를 쓴 줄리아 하우(Julia Howe(1819-1910)는 원래 묵시록의 언어보다는 에머슨과 소로우의 초월주의 언어에 더 익숙했던 사람이었다. 당시로선 진보적인 시인이었고 여성운동을 펼친 작가였다. 칼빈주의의 억압적인 세계관을 포기하고 유니테리언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청교도 세계관의 묵시적 종말의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동화하고 자유를 노래하고자 했다. 하지만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행진을 목격하고, 북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노랫말을 쓸 때 그가 의존했던 것은 예언의 언어였고 묵시록의 세계관이었다. 그가 쓰고 남긴 것은 군가였고 동시에 적을 멸하는 신을 찬양하는 찬송가였다. 북군은 재림예수의 군대였고, 신의 분노를 사탄에게 드러낼 병사들이었다. 전쟁과 군대를 묵시록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건 미국이란 나라의 정서적 무의식의 한계일까. 미국이 구원의 사명을 받았고 이를 실천하고 위해 강해야 한다는 인식은 현대 미국에서도 유효한 신념이다. 하우가 곡의 가사를 쓰게 되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다. 하우는 그날 새벽에 잠에서 깼다. 다시 잠들기 전에 가사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고 어둠 속에서 펜을 찾아 써내려갔다고 한다. 마치 예언을 기록하듯 쓴 것이다. 그 내용이 계시록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1871년 신미양요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의 빌미를 제공한 운양호 사건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국기에 관한 것이다. 조선군의 선제 대포공격을 받은 미군은 이를 미국 국기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했다. 성조기가 해를 입지 않았지만 이를 미국 국기의 명예가 실추된 중대한 사건으로 규정짓고, 이에 상응하는 사과와 보상을 조선에 요구했다. 놀랄만한 논리의 비약이지만 이는 당시 미군 함대의 지휘관 Rodgers의 보고서에서도 등장하고, 전투에 참전했던 장교 Schley의 훗날 회고록에서도 같은 얘기를 한다. 이들은 조선군의 진지를 공격해 큰 인명피해를 입힌 것을 성조기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설명했다. (당시 미군함대의 병력은 최첨단의 무기로 무장했고, 남북전쟁에 참전해 실전경험을 쌓았던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군의 구식무기로 당해낼 수는 없었다). 여기서 성조기는 단지 미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아니다. 그 자체로 어떤 주권을 행사하는 실제라 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본다면 그 실제는 피와 제물의 제사를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는 신적인 존재, 아니 우상 또는 물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기에 대한 신격화를 일본이 배운 것일까. 일본은 조선군의 포격이 운양호에 위협이 되지 못했지만 이를 일본국기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했다. 곧 보복 공격을 가해졌고 많은 조선 수비대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의 국기가 법으로 제정된 지 몇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와 같은 국기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신미양요와 운양호 사건에서 국기와 관련된 주권의 전이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을까. 미국만을 보자면 시민에서 국기로의 전이, 즉 미국 내부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시민의 주권에서 팽창주의를 전제하는 국기로의 전이를 말할 수 있다. 국기는 시민과 달리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의미는 이미 자유로 규정된 미국의 운명으로 드러나 있다. 미국의 운명이 자유이고 그 자유의 주권을 국기가 간직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실제의 주권으로 국기는 섬김을 요구하고, 국기 앞에서 갖추어야 하는 모든 예의나 국기를 다룰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은 모두 그런 행위에 속한다.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미군은 모두 자유를 위해 죽었다는 칭송을 듣는다. 주검이 실린 관은 성조기로 감싸 헛되지 않는 죽음을 위로한다. 한국에서 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는 ‘태극기 앞에서’의 맹세를 말하지만, 미국의 맹세에선 ‘성조기에게’ 충성과 맹세를 요구한다. 태극기는 맹세의 증인 역할을 하지만 성조기는 그 대상이 된다. 두 사건 일어나던 강화도에는 성조기와 일장기가 꽂혔다. 땅에 국기를 꽂는 것은 그 땅을 차지했음을 선언하는 행위다. 달에 꽂힌 성조기 사진이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달이라는 상징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이 그곳까지 자유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주권의식을 포기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처음 제작된 것은 1882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준비할 때였다. 미국은 주권 국가들 사이의 조약에 국기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남북전쟁 이후 성조기라는 깃발을 중심으로 미국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고 제국주의의 꿈을 펼쳐나갈 때, 모든 국가가 그런 깃발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건 무리가 아니었고, 실제로 많은 국가들의 국기는 19세기 후반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특이한 것은 미국의 통상압력과 미국의 군사적 상징인 성조기에 맛서 내놓은 깃발이 도교의 우주관을 설명하는 태극기였다는 사실이다. 왕조시대 왕의 어기를 개조해 착안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의 군사적 팽창주의에 맛서 동양의 철학을 내세웠다는 상징적 저항을 읽을 수는 없을까. 미국의 각 주를 상징하는 하늘의 별이 새겨있고, 용맹과 순수를 나타내는 색깔이 장식된 성조기는 처음부터 군기로 제작되었고 지금까지 군사문화의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군사적 의례가 가능하다. 하지만 군사문화의 상징이 아닌 동양의 우주관이 담긴 깃발 앞에서 그런 경례와 맹세는 어색할 수밖에 없다. 국기계양식의 예를 지키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게 했던 군사정권은 태극기를 애국주의의 군기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1882년 조미통상수교에 미국을 대표해 서명을 했던 미 해군 장성 로버트 슈펠트(Shufeldt)는 1886년 선교사 아펜젤러를 일본에서 만나 그로부터 조선이 서구세계에 처음 문호를 개방할 당시의 정황을 글로 기록해 줄 것을 부탁 받는다. Korean Repository(1892)에 실린 슈펠트의 기록 마지막 문단에 흥미로운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슈펠트와 함께 배에서 내린 부하 병사들은 조약식을 위해 설치된 텐트 옆에 성조기를 ‘평화롭게’(Peacefully) 꽂았고, 조약식이 거행될 땐 Yankee Doodle이란 곡을 연주했다. 평화롭게 성조기를 꽂았다는 말은 성조기를 남의 나라에 꽂는 상황이 주로 평화적이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당시는 미국의 국가가 공식적으로 제정되기 전이었다. 1882년 미군이 제물포에서 연주한 Yankee Doodle이란 곡은 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어도 비공식적인 국가란 얘기를 들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당연히 군가였다. 독립전쟁에서 남북전쟁 그리고 조선에서까지 적을 조롱하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곡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군가라기보다는 동요와 민요로 일상의 의식 속에 남아있다. 미국의 국가나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이란 곡도 미국의 정신과 혼을 노래하는 곡일 뿐 군사주의를 찬양하는 군가로 보지 않는다. 이유는 미국정신의 발현은 늘 군사주의를 동반해 왔기 때문이다. 군사문화의 완성은 ‘군사’는 망각되고 ‘문화’만 기억되는 상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슈펠트에게 조선과의 조약은 서구문명의 영향 밖에 있던 마지막 국가, 즉 은자(Hermit)의 나라를 그 안으로 불러들이는 행위였다. 그는 이를 ‘콜럼버스의 달걀’만큼이나 쉬웠던 것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달걀은 인위적으로 깨져야만 누군가의 보편적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그날 제물포 텐트 옆 성조기가 펄럭이는 모습을 평화롭다고 본 사람은 슈펠트 혼자였을 것이다. 


    미국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성조기 사진은 아마도 1945년 2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영토였던 이오지마 섬에서 성조기를 매단 깃대를 세워 올리는 병사들의 사진일 것이다. 사진가 조셉 로즌솔(Joseph Rosenthal)은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급하게 셔터를 눌러 역사에 남을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곧 성조기의 본질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로즌솔은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그 사진은 몇 개월 후 우표에도 실리게 될 정도로 빠르게 명성을 쌓아갔다. 사진 속에서 깃대를 세우던 6명의 병사 중 3명이 그 후 전사했다는 사실은 죽음으로 지킨 성조기, 목숨과 바꾼 성조기의 신화적 의미를 그 사진에 부여했다. 로즌솔의 사진이 성조기의 어떤 본질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조기의 상징과 실제가 군대의 병사들에 의해 세워진 성조기 그리고 그들의 희생과 죽음이라는 현실 속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마치 빼앗은 땅에 꽂은 성조기가 전쟁의 상처가 남은 자리를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처럼. 마치 그 성조기가 죄를 씻는 영세의 징표 또는 은혜의 징표인 것처럼. 그 사진을 처음 받아 본 미국연합통신의 편집인 John Bodkin은 “Here's one for all time!"(영원할 사진)이라고 외쳤다. 사진을 직업적으로 다루는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알아본 건 아니었다. 미국정부는 살아남은 병사 3명을 영웅으로 만들어 군사주의와 성조기를 동일화 시키는 군사문화의 확산에 앞장섰다. 




ⓒ 웹진 <제3시대>



    (참고) 


    아펜젤러가 자신의 이름으로 실은 슈펠트의 기록은 "The Opening of Korea: Admiral Shufeldt's Account of It"이라 제목으로 The Korean Repository (1892)에 실렸다. 신미양요에 참전했던 Winfield Schley의 회고록은 Forty-Five Years Under the Flag이었다. 모두 인터넷에서 검색이 가능하다. 

    미국의 국기에 대한 맹세(The Pledge of Allegiance) 전문: 

    "I pledge allegiance to the flag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o the republic for which it stands, one nation under God, indivisible,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의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Mine eyes have seen the glory of the coming of the Lord; 

    He is trampling out the vintage where the grapes of wrath are stored; 

    He hath loosed the fateful lightning of His terrible swift sword: 

    His truth is marching on.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His truth is march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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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2 - 청교도에 관하여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미국이 민족적인 동일성이나 지형적인 특수성에 기초하지 않고 이념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익숙한 사실이다. 그 이념을 자유나 평등과 같은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만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 저변에는 선택받았고, 다르다는 자의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목적이나 의도성이 없는 선택은 없다. 여기 연재되는 글에선 그 목적과 의도를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종말론적인 사명을 미국의 무의식의 일부로 또 아직도 진행 중인 미국의 세계적 역사의 일부로 이해한다. 이번 호에선 청교도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코튼 매더는 여기서 일부 다루고 그의 종말론은 다음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론과 함께 더 서술할 예정이다)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


    내가 교수로 있는 시카고 신학대학이 3년 전 지금의 건물로 이사 오기 전까지 한 백년 가까이 쓰던 건물에 특이한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일층 내부의 벽에 돌출되어 있는 작은 돌조각이었다. 바로 위엔 그 돌이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의 일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그 옆을 지나 다녔지만 그 의미와 상징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큰 것이었다. 플리머스 바위란 1620년 청교도들이 (엄밀히 말하자면 청교도들과는 견해가 약간 달랐던 필그림Pilgrim들이었지만 큰 맥락에서 청교도라 쓴다) 배에서 내릴 때 첫발을 디뎠다는 바위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바위에 불과했지만 반석 위에 세워진 미국의 정신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언약을 상징하는 징표로 이해되어 온 미국역사에서 더 없이 중요한 유물이다. 어떻게 그 역사적 바위의 한 조각이 1855년에 설립된 시카고의 한 신학대학 건물의 내벽에 부착되게 되었는지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광야와 같이 무질서하던 19세기 중반 시카고에 신학교를 처음 세우며 플리머스 바위와 같은 반석이 되라는 뜻이 담겨있는 건 분명한데, 그 바위조각의 출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당시 신문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플리머스 바위조각을 신학교에서 소장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당시 시카고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학교의 입장은 플리머스 바위가 해안가에서 최종 이전되기 전 개인적으로 바위를 깨서 기념품으로 보관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학교에서 소장하게 된 조각도 그렇게 사적으로 보관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황당한 사기극에 휘말린 거라 믿는 사람도 많았다.  


<Plymouth Rock>


    그 바위조각의 진위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플리머스 바위라고 하는 미국 사람들 마음속의 ‘만세반석’이 실제로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그런 바위가 아예 없었다는 게 상식적인 이해이고, 그렇다면 시카고 신학대학의 바위조각은 ‘실제적이지 않은 플리머스 바위의 비실제적인 조각’이 된다. 20세기 후반 사람들이 영광스런 플리머스 바위 옆을 무심코 지나쳤던 이유는 플리머스 바위의 신화 즉 미국이 신의 섭리를 토대로 시작되었다는 신화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광과 섭리의 신화가 미국역사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한때 플리머스 바위가 맡았던 역할은 - 다음에 더 서술할 기회가 있겠지만 -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이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면서 절대적 상징으로 등장한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가 맡고 있다. 


    그렇다면 플리머스 바위에 대한 신화는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사명을 안고 신대륙에 도착한 영국의 선민들의 첫 발자국이 어린 바위가 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보다 120년이 지난 후 대각성이란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당시 94세의 연로한 토머스 파운스Thomas Faunce 장로는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들려 플리머스 해안가로 향했다. 거기서 미국의 정신과 신앙의 토대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바위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파운스 장로의 증언 외에 플리머스 바위의 진실을 밝혀줄 증거는 없었지만, 그 바위의 진실은 결국 믿음이었기 때문에 당시 별 의심 없이 미국의 신앙과 정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파운스 장로가 그런 증언을 하게 된 동기다. 유력한 설은 영적인 각성을 요구하는 부흥운동이 감정주의로 치우치고 기존 교회공동체들과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청교도 교회의 제도와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그가 어렸을 때 들은 플리머스 바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 1세대들은 자신들이 반석 위에 내린 게 아니라 거칠고 마귀들이 들끓는 광야에 착륙한 것으로 이해했다. 파운스 장로의 해석은 청교도들의 역사가 끝나가는 시대, 거친 광야가 개척지로 변하고, 신대륙이 신앙의 실험장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로 변모해가는 시대에 가능했던 수정주의적인 역사이해에 속한다.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청교도들에게 아메리카란 개념은 없었다. 단지 새로운 땅이 있었고 그 위에 종교개혁을 완성시키고 새로운 에덴동산과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자는 신화적 상상력과 믿음이 있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후 아메리카라는 개념이 국가적인 정체성을 수반하길 요구받고 있을 때 광야가 아니라 반석의 신화가 필요했고, 따라서 플리머스 바위는 그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할 수 있다. 


한국과 청교도 그리고 천로역정


    한국의 기독교를 미국 청교도들의 신앙과 연관 지어 이를 책에 소개한 사람은 아더 브라운 (Arthur Judson Brown, 1856–1963)이 처음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해외선교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고, 초기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관여했던 인물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선교정책을 주장했던 목사였다. 선교지의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서구중심의 우월의식에서 벗어난 선교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급격한 교회성장으로 주목받던 한국의 선교현장을 돌아보고 극동의 정세와 한국의 선교 상황을 다룬 책 <The Mastery of the Far East>1919년에 출간했다. 한국의 미국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인 성향을 지녔고 한국의 교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는 그의 유명한 분석이 그 책에서 나온다. 브라운은 구체적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오래 전 청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키고, 춤이나 담배 또는 카드놀이를 죄악이라 생각했고,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전천년주의적인 믿음을 진리라 여겼고,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을 위험한 이단이라 간주했다고 지적했다. 이 내용은 이후 한국 개신교의 특성을 설명하는 글에서 자주 인용이 되어왔다. 그런 부류의 글에서 또 흔히 듣게 되는 건 한국교회 신앙의 뿌리를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찾아야 하고, 그 신앙을 본받고 회복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에서 청교도들에 대한 평가는 일방적이거나 단순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극적으로 대립되는 평가는 아직도 존재한다. 청교도적이라 했던 미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에 대한 브라운의 평가도 앞서 언급한 내용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최근 청교도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흔히 듣게 되지만, 20세기 중반까지 청교도들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인 면이 많았다. 청교도들의 유산을 극복의 대상으로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청교주의는 신정일치를 내세우는 권위와 독선을 연상시켰고, 다른 신앙의 노선을 이단이라 탄압하는 삐뚤어진 정통주의를 떠올리게 했다. 청교도들이 강조한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 이해는 역으로 유니테리언(Unitarian)이라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동기가 되었고, 에머슨의 미국적인 학문은 청교도들의 인간이해를 부정하면서부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청교도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기까지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청교주의를 비판한 소설 <주홍글씨>의 작가 나다니엘 호손이었다. 한때 에머슨과 소로우와 함께 콩코드에서 살기도 했던 호손의 고향은 매사추세츠 주 살렘이라는 동네였다. 청교도 역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는 살렘의 마녀재판이 있었던 바로 그곳이다. 호손은 뒤늦게 그 재판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요술 부리는 마녀로 낙인찍어 죽음의 형벌을 내렸던 판사가 자신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환멸을 느껴 자신의 성까지 Hathorne에서 Hawthorne으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호손은 <주홍글씨>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작품에서 청교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19세기 중반이후 미국인들이 청교도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데 크게 기여했다. 20세기 중반 미국에 매카시즘의 바람이 불어 양심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 당대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아더 밀러Arthur Miller는 이를 청교도 마녀재판과 비교한 희곡 <시련The Crucible>을 써서 마치 청교주의가 매카시즘의 원조였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호손이 살았던 시대 청교도들에 대해 매우 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란 고전적인 책을 쓴 불란서 사람 알렉시스 토크빌이었다. 그에게 청교도들은 종교적 실험을 하러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실천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토크빌은 교회의 권력만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까지도 분산시키고,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대의 정치제도를 실현한 것은 청교도들의 목적이 부의 축적이 아니라 자유의 실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파악했다. 토크빌은 그 자유의 개념, 더 나아가 개인적 자유의 개념까지도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출발한 것으로 신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믿었고, 미국의 역사적 운명이 이미 청교도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란 의미심장한 분석까지 했다. 미국을 잠시 다녀간 사람의 관찰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통찰력 있는 분석임에 틀림없다. 호손과 토크빌의 차이를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다. 토크빌은 미국의 제도를 설명하고자 했고 호손은 미국에서의 삶의 경험을 얘기하고자 했다. 민주주의의 자유가 토크빌의 주제였다면 호손의 주제는 종교의 억압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유산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달랐고, 그 엇갈린 평가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시 브라운으로 돌아가보자. 브라운의 책에서 ‘청교도’라는 낱말은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 선교사들의 성향을 설명하는 용도로 쓰였을 뿐, 더 큰 비교나 분석을 의도하지는 않은 것이다. 또 그가 청교도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청교도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안 드러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브라운은 일본교회에 비교해 선교사들의 신앙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의 책은 극동지역에서 일본의 패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독교에 대해 편향된 입장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한국교회에 대한 그의 진단은 지금 읽어도 매우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그는 한국교회는 왜 자율적이지 못한지 물었고, 어떻게 당시의 선교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록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가 한국을 중국과 일본에 비교해가며 내세운 이유들은 그다지 한국교인들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브라운에게 분명했던 것은 여러 이유로 한국인들의 마음속엔 선교사들의 복음의 씨앗을 받아드릴 기름진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브라운은 이것을 청교도 시대의 정서를 떠올리는 표현을 써가며 비유했다. 한국은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국 서부의 초원과 같았고, 반면에 중국은 뉴잉글랜드 해안의 바위 숲으로 비유했다. 한국의 교회는 준비된 심성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세계 어느 곳보다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주일성수와 전도에 대한 열정이 높은 교회를 만들었지만 그가 보기에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교리적 경직성이 문제였고, 신학적 입장은 달라도 복음에 대한 열정은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브라운은 그 이유를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의 청교도적인 신앙을 재생산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한국의 기독교는 다음 세상에만 관심이 있을 뿐, 복음을 사회변화에 적용시키지 못했다. 타락한 이 세상을 이 ‘세대’에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몰락할 세상을 증거하고 선택받은 교인들을 모아 예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브라운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교육과 질병치유 등 사회구제를 위한 노력을 했지만 큰 맥락에서 볼 때 개인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브라운이 청교도적인 신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면, 그 입장은 20세기 초반 미국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청교도적’(Puritanical)이라는 표현은 지금도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이지 않는다. 청교도 신앙을 ‘재생산’한 당시의 한국교회가 종말론에 치우쳐 있다는 그의 진단은 지금 들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브라운은 한국교회의 그런 신앙을 <천로역정>과 비교해 설명했다. 하지만 망해가는 이 세상을 버리고 천국의 도시를 찾아나서는 고행의 길을 우화로 그려낸 천로역정을 한국교회가 사실적인 묘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 않는지 우려했다. 브라운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게일 선교사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었고, 선교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외선교의 동반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도. 실제로 미국의 해외 선교지에선 <천로역정>이 성경 다음으로 번역되어야 할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브라운이 <천로역정>을 한국교회와 연결해 그만한 언급이라도 한 것은, 그가 그 책의 청교도적이고 종말론적인 배경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번연은 영국의 청교도였고 <천로역정>은 청교주의의 천년주의 사상에 기초해 쓰인 책이었다. 번연의 천년주의와 종말론 사상은 그의 다른 저작 <적그리스도>나 <거룩한 전쟁>을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천로역정>만으로도 충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서양 근대의 역사에서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책이 바로 <천로역정>이었다. 문체는 단순하고 철학적인 논리는 빈약할지 몰라도 세상에 미친 영향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이나 홉스의 정치학보다도 컸다. 이런 대조가 가능한 이유는 <천로역정>이 뛰어난 문학작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라고 할 만한 세상에 대한 의도성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로역정>의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영향력은 20세기에 와서 사라졌다. 최근엔 꿈과 우화와 풍자를 가르치는 영문학의 교재로, 때로는 문학 연구논문의 텍스트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을 제외하고 서구역사에서 그 책만큼 오랜 기간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내고 도덕의식과 종교의식을 형성한 작품은 없었다. 서구에서의 영향력이 사라지던 20세기 초 <천로역정>은 한글로 번역되어 새로운 땅에서 종말론적 개종과 회개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느낀다.  


    한국기독교에서 <천로역정>을 읽고 그 감동으로 회심과 개종을 하게 된 사람으로 흔히 길선주 목사를 떠올리게 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궁금해진다. 동양의 종교와 사상에 뛰어난 학식을 갖췄다는 학자가 <천로역정>을 읽고 무엇을 느꼈을까? 어찌 보면 삽화가 실린 그림책에 불과했던 책 한 권을 읽고 기독교의 어떤 진리를 만나게 되었을까? <천로역정>과 같은 기독교 고전의 영향력은 이미 증명이 된 것이지만, 그 책의 내용이 종말론적 세상인식이라는 독특한 신학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만은 지적해야 한다. 17세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그 책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었고, 바로 그들 자신이 망해가는 세상을 버리고 고난 속에 천국의 도시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 크리스천이라 생각했다. 몰락하는 유럽을 떠나 새로운 예루살렘을 신대륙에서 건설해 역사를 완성하자는 묵시적 관점에서 그 책을 이해했다. 크리스천이 거칠고 황량한 세상을 지나 도달하는 낙원을 청교도들은 천년왕국으로 이해했다. 이 책의 특징은 구원을 세례나 회심과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고 끝없는 광야에서 한걸음 씩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과정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낙원이라는 미래의 목적이 설정되어 있지만, 신앙의 삶은 광야에서의 순례였다. 모든 순례는 길 위에서 걷는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다. ‘길 위에서’라는 로드의 모티브는 이미 <천로역정>에서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청교도들은 광야에서 예루살렘을 꿈꾸었지만, 광야에서의 삶이 갖는 영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천로역정>이 길선주 목사에게 미친 영향은 그의 신학사상에서 읽을 수 있다. 길선주 목사는 계시록을 만 번이나 읽었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묵시적 종말론에 심취해 있었다. 말세를 연구해 풀이해 <말세학>이란 책도 썼고, 그 내용을 도표로 만든 ‘말세도’를 펼치고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길선주 목사가 20세기에 수용한 종말론은 번연보다 더 신학적으로 투철한 것이었다. 번연은 자신의 신앙의 비전을 풀어내는데 급급했다면, 길선주의 종말론적 신학은 당시 성행했던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천년설이 옳음을 증명하는 건 그에게 매우 중요했다.


청교도들의 종말론


    큰 의미에서 서구의 근대를 만든 사상은 합리주의가 아니었고 계몽이나 이성의 사상도 아니었다. 미셸 푸코가 비슷한 생각으로 한때 근대 내면의 긴장성을 이성과 광기로 대립으로 표현했지만, 나에게 광기보다는 ‘묵시’란 개념이 더 큰 함축성을 지닌다. 근대가 자유를 향한 시간의 행진이었다면 그 자유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상태, 종국에는 역사와 시간의 가능성을 끝낼 종말 앞에 열린 상태의 자유까지를 말한다. 시간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 자유까지도 포함한다. 근대의 역사에서 그 자유에 대한 상상을 떠맡은 건 묵시적 종말론이었다. 청교도들은 그 자유를 종교개혁의 완성과 연결 지어 생각했다. 자유가 종말론적인 차원을 지닌다면, 종교개혁의 완성은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들의 신앙 속에서 허용된 종말론적 사건은 적그리스도와의 전쟁, 재림 예수의 심판과 최후의 심판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이런 종말의 사건들을 준비하는 단계로 성서의 예언을 이루어낼 새로운 이상의 도시, 새로운 에덴 또는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었다. 그들의 종말사상은 16-17세기 영국의 치열한 정치와 종교적 갈등과 전쟁 속에서 탄생한 종말의 신앙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 신앙은 이후 미국을 통해 종교적 신념을 넘어 근대적 삶의 자세로 또는 세계관으로 포장되어 전해지고 있다.


   청교도들의 신앙이나 신학을 생각하면서 종말론을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겠으나, 그 이상 그들의 세계관을 설명해주는 개념은 없다. 그들에게 가톨릭교회는 마귀의 세력이었고, 이제 영국의 교회까지도 마귀의 세력에 함몰되었다는 인식은 절박한 것이었다. 마귀와의 싸움은 예수의 재림과 심판에 앞서 벌어질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살렘의 마녀재판의 배경에는 요술을 부리는 마녀들의 활동을 종말의 징조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응징을 재림 전에 있을 묵시적 전쟁의 수순으로 보는 시각도 분명히 있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예수 재림의 시기를 예언하는 천년설들이 구분하지 않았다.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또는 이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전천년설 또는 후천년설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개념이었고 무천년설은 그보다도 더 늦은 20세기의 개념이었다, 청교도들이 주로 전천년설을 믿었고, 청교도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가 후천년설을 처음 믿기 시작했다는 분석은 후대의 계산적인 평가일 뿐이다. 당시에는 환란과 심판과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만 혼재되어 있었고, 자신들의 생각을 이론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다음 기회에 다루겠지만 청교도들의 종말론적 사명의식은 ‘부름 받아 나섰다’는 선민사상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선민사상은 미국의 역사에서 세상을 이끌고 구해내야 한다는 메시아적 사명으로 드러난다.


코튼 매더 (Cotton Mather)


    시카고 북쪽에 Mather High School이라는 공립 고등학교가 있다. 예전엔 그 주변에 한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여럿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들은 기억도 없는데 나는 오랜 세월 그 매더(Mather)라는 인물이 17세기 미국의 청교도 목사였던 코튼 매더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준 기억이 있는 나를 행복한 무지에서 깨워준 건 인터넷이었다. 알고 보니 그 고등학교는 코튼 매더가 아니라 20세기 초에 살았던 그의 먼 후손으로 스티븐 매더(Stephen Mather)의 이름을 따서 세운 학교였다. 그나마 같은 집안의 인물이라 아주 틀린 건 아니란 생각을 위안으로 삼으며 들여다 본 인터넷 사이트에서 눈에 띈 건 스티븐 매더의 이력이었다.


    그의 조상 코튼 매더는 17세기 미국의 제일 중요한 사상가였다 (매더가 17세기 미국의 제일 중요한 사상가라면 18세기에 그 역할을 한 사람은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9세기엔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20세기엔 듀이John Dewey라 말할 수 있겠다). 뉴잉글랜드로 불리던 땅에 미국(America)라는 정체성을 확립시켰고, 엄숙한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청교도 신앙을 신학으로 정리했고, 곧 다가올 예수의 재림과 종말의 사건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했던 목사였다. 최근의 역사책에선 살렘의 마녀재판 때 무고한 여성들을 마녀로 낙인찍어 처형한 사건에 참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스티븐 매더는 조상의 신앙을 물려받지 않고 오히려 청교도 신앙에 저항했던 헨리 소로우 쪽에 더 가까웠다. 소로우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소로우의 사상을 환경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자연주의자 존 뮤어John Muir를 만나 큰 감동을 받고 미국 국립공원의 설립과 보존 운동에 헌신했다. 그런 공적과 시카고에서 살았던 이력으로 자신의 이름이 붙은 고등학교까지 생기게 된 것이었다.


    코튼 매더의 후손은 조상의 청교주의를 버리고 에머슨과 소로우의 초월주의를 선택한 것일까? 17세기 청교주의와 19세기 초월주의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생각했던 과거에는 그렇게 볼 여지가 있었지만, 20세기 후반 학자들의 연구는 청교주의와 초월주의 그리고 20세기의 실용주의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사상들이 중요한 부분에서 연속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그 관계의 공통적인 주제는 개인주의적인 인간이해, 모든 권력에 대한 회의 의식, 스스로 해야 한다는 자립정신 등이었다. 20세기 중반 미국 청교도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람은 역사학자 페리 밀러Perry Miller였다. 그의 대표작 은 출판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꾸준히 인용되고 있고, 그중에서도 ‘에드워즈에서 에머슨까지’란 장은 여러 번 읽을 정도로 내게 의미가 있었다.



참고서적에 대하여


    아더 브라운의 책 <The Mastery of the Far East> 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참고한 부분은 한국기독교를 다룬 32장과 33장이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참고한 부분은 주로 1권 3장에서 청교도들을 다룬 부분이다. 파운스 장로의 일화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내용을 글에서 간단히 옮겼지만 깊이 있는 논의는 플리머스 바위의 역사적 상징성만을 다룬 란 책 특히 3장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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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들어가는 말


    지난여름 오랜만에 학교에 갔더니 우편엽서 한 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필기체로 흘려 쓴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앞면의 그림을 먼저 확인했다. 수채화 같아 보이는 그림은 낡은 오두막집이었다. 더 이상 궁금해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아는 그런 오두막집은 오직 하나, 바로 헨리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짓고 2년을 살았던 그 오두막집을 그린 것이었다. 엽서를 보낸 사람은 두 학기 전 <에머슨> 수업을 들은 학생이었다.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자랐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 오랜 사회생활을 하다 뒤늦게 떨쳐낼 수 없었던 질문들을 가슴에 안고 신학공부에 뛰어든 중년의 백인 학생이었다. 에머슨과 소로우가 남긴 사유의 전통과 그들이 남긴 미국에 대한 상상과 기대에 감동이 있었던지 방학을 이용해 월든 호수가 있는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란 동네까지 여행을 떠난 것이다. 소로우를 생각하면서 호수를 구경하고 엽서 한 장을 구입해 내게 인사차 보낸다고 했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소로우의 오두막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미국사람들이 적지 않다. 호수만큼이나 커 보이는 주차장만이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지만, 순례를 하듯 그곳에서 미국의 정신적 본질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소로우의 월든에 투영된 정신이 미국의 어떤 가치를 대변해주고, 그의 사상에 문학이라는 분야의 역사를 넘어 재발견되고 이 시대에 실천될 수 있는 이상이 담겨 있다고 믿는 건 어렵지 않다. 경향에 흔들리지 않고 양심에 이끌리는 삶, 전체의 이름으로 용납되는 구속에 저항하는 독립적인 삶, 타인이 나보다 특별히 나을 게 없다는 자존적인 삶의 자세는 소로우가 19세기 중반 미국에 남긴 유산이다. 자유를 실천으로 완성하고, 자연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새롭게 이해하자는 그의 주장은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실천한 삶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가 에머슨과 함께 미국의 정신적 독립을 선언했다는 말도 틀리지 않다. 20세기의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은 그의 이름을 앞세웠고, 그의 사상에서 미국을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기억을 하자면 오래 전 뉴저지 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첫해, 교과서를 제외하고 구입했던 책 세 권이 있었다. 헨리 소로우의 <월든>,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그리고 로버트 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었다. 특별한 독서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고, 당시 미국학생들이 많이 읽는 걸 보았고 대화의 화제로도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책들이 얘기하는 독립적인 사고, 자유로운 삶, 저항의 정신 같은 것들을 상상하고 추구하는 건 자본주의에 완전히 취하지 않았던 그 세대 젊은이들의 특권이자 의무였다. 책들이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었고, 그 주제가 미국이나 미국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케루악과 피어시그가 소로우의 <월든>을 시대에 맞게 응용하고 있다는 것도 별다른 해석 없이 알 수 있었다. 예컨대 피어시그 책의 주인공은 모터사이클 여행길에 소로우의 <월든>을 갖고 떠난다. 마치 그것이 정신적 나침판 또는 지도책이나 되는 것처럼. 케루악은 어린 시절을 소로우의 그늘에서 보냈다. 작가로서의 정신세계만이 아니라, 케루악이 성장했던 로엘이란 도시가 실제로 소로우의 콩코드에서 차로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었다. 소로우의 첫 작품 <소로우의 강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에 나오는 매리멕 강은 로엘을 가로질러 흐른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 소로우는 산업화 되어가는 세상에 저항해 집을 나섰다. 걸어서 몇 십 분밖에 걸리지 않는 호숫가였지만, 그에게는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었고 그가 추구했던 의도적이고 삶을 실천하기 충분한 공간이었다. 소로우의 뒤를 따른다는 생각을 했던 케루악은 그보다 100년 후 핵무기가 지배하는 냉전시대가 등장하던 때 길을 나섰고 저항을 선언했다. 소로우의 책은 지금도 가끔 찾게 되지만, 케루악의 책은 몇 년 전 그 책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드디어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여하간 미국에 대한 내 생각의 방향은 오래전 이들과 함께 설정되었고, <미국의 묵시록>이란 주제와 연관된 소로우와 케루악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에 자세히 쓸 생각이다. 


    미국에서 오랜 시간 이방인으로 살아온 나에게 미국은 언제나 풀어야 할 숙제였다. 막연한 실존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내가 선택한 공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목에 미국이란 단어가 있는 책들에 언제나 눈길이 갔고, 분야에 구분 없이 나의 관심사였다. 영화와 문화이론에서 미국에 대한 설명을 찾았고, 에머슨과 소로우에게서 그들의 이해를 구했다. 존 듀이와 리처드 로티도 그들이 미국에서 미국의 철학을 했다는 차원에서 중요했다. 그러나 내가 공을 들여 공부한 분야는 (만약 그런 분야가 있다면) 미국 밖에서 본 미국이었다. 19세기 이후 유럽의 지식인들 가운데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험을 특이하게 생각하고, 그 현상을 학문적인 관찰로 담아낸 사람이 많았다. 토크빌에서 디킨스, 헤겔에서 아도르노, 사르트르에서 보드리야르까지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들에게 미국은 상상과 환상 또 이론과 철학의 대상이었다. 이방인의 관찰이 특별히 더 나을 게 없고 미국을 그들 철학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에 무리가 따르기도 하지만 미국의 역사는 이미 이념의 역사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은 단지 거기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미국이 이해를 필요로 하는 나라가 된 것은 그만큼 쉽게 파악이 안 되는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의 역사로 이해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개념들을 배제하면 이해하기 힘든 나라도 미국이 유일하다. “미국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차원의 질문이 성립되고 그런 질문의 역사가 지성사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일 수도 있고, 변증법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인 정체성이 분명히 드러난 20세기 중반 이후에도 그 질문은 계속되었다.


    이 웹진에 기고를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만약 글을 쓴다면 내게 가까운 얘기들을 주제로 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미국이란 주제도 쉽게 떠올렸지만 미국에 관한 어떤 논의가 읽을거리가 될 수 있을까 약간의 고민이 없지 않았다. 비교적 덜 논의되는 부분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의 묵시록>이란 제목을 정했다. 결론적인 주장부터 얘기하자면 이렇다. 미국의 역사와 문화 저변에 깔려있는 사상은 묵시록 (Apocalypse)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묵시적 종말론이다. 종말론은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만든 사상이다. 하지만 그 사상은 가치중립적인 시간에 대한 관찰이 아니었다. 언제나 환란과 파괴와 멸망의 예언을 동반한 묵시적 세계관이었다. 서양역사의 순간순간 동기와 의미를 제공했던 그 사상이 미국이라는 땅에서 꽃을 피웠다. 미국의 사상을 생각하면 계몽주의를 흔히 떠올리게 되고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계몽과 묵시 사이를 오가며 때때로 묵시적 예언의 판단이 계몽의 이성을 이겨온 역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청교도들로부터 조지 부시, 핵무기에서 일반인들의 총기문화, 선민사상에서 예외주의까지의 미국역사는 묵시적 상상과 환상 그리고 묵시적 믿음을 무시하면 온전한 설명을 할 수 없다. 미국의 군사문화나 심판과 종말 그리고 재림과 같은 개념들이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된 현상도 마찬가지다. 묵시적 종말론은 19세기 미국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고, 선교운동이라는 종말론적인 현상으로 한국과 같은 나라에도 전파된 세계관이었다. 그 세계관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도가 아직도 높을 뿐 아니라 세속화 논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미국인들의 종교적 성향의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그 세계관은 대중문화 속에 녹아져 있고 묵시적 종말은 가장 영화의 가장 흔한 소재가 되고 있다.  


    묵시록을 서구사상의 서자로 취급하던 역사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환란과 고통과 종말의 예언, 최후의 전쟁, 지구의 멸망, 휴거, 재림과 같은 시간의 끝, 마지막 날을 상정하는 개념들을 체계적인 이해와 질서를 추구하는 서구사상의 중심에서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와 시간이 끝날 것을 전제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 끝을 상상하는 건 필연적인 결과다. 이는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한계이자 조건에 속하는 것이다. 서구의 사상에서 그 부분이 배제된 사상은 드물다. 어거스틴, 단테, 콜럼버스, 루터, 홉스, 뉴톤, 밀튼, 블레이크, 헤겔 등의 종말론을 황혼의 외도쯤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20세기 미국의 가장 유명한 영성가였고 참선의 수도사였던 토마스 머튼이 묵시록의 언어로 미국에 대한 시를 쓸 정도로 그 언어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대한 상상은 예언의 영역이었다. 새 하늘과 새 땅, 예루살렘의 정복,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은 서구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와 만나게 했고 서구중심주의의 근거가 되었다. 서구역사의 근대라는 시대를 연 콜럼버스는 돈을 벌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되찾고자 했다. 그것은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는 수순이었고, 여기서 자신을 묵시적 종말론의 주인공으로 여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역사의 절정인 근대라는 시대는 그런 종말의 시대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콜럼버스는 말년에 세상 끝을 예언하는 글까지 쓰면서 간접적으로나마 근대라는 시간의 묵시적인 뿌리를 증거 했다. 그러나 그 뿌리가 감추어질 수 없는 근대 서구역사의 동력이었다는 사실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미국의 역사다. 


    미국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친미와 반미 사이 중간의 공간은 별로 없다. 세상에 좋고 나쁜 나라가 따로 있을 수 없지만, 미국은 어떤 정당이 지배하든 미국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입장을 바꿔놓지 못한다. 한 이유로 미국이란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데 충실한 그저 또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선과 악, 옳고 그름의 판단에 익숙한 이념으로 형성된 사실을 들 수 있다. 미국을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흔히 지적하는 이유는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정책이 스스로 내세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개념과는 상관없이 공격과 지배와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미적인 성향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틀린 얘기가 아니지만 미국을 그렇게 만든 내적인 동기는 설명하지 못한다. 미국이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높아져도 미국 내부에서는 미국의 선한 동기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와 민주의 종주국인 미국이 결코 나쁜 의도를 갖고 있을 수 없다는 순박한 선민의식이 거기에 작용한다. 그런 의식이 미국은 다르다는 예외주의를 만들었고, 예외주의는 예외적인 심판자라는 자의식을 만들어냈다. 최후의 심판은 신의 영역일지라도, 예외주의와 선민사상은 심판과 판결과 종결에 익숙한 미국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거기서 서부영화 보안관의 선악관과 최근 미국 경찰의 총기사건들 사이의 공통적인 이념적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법의 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고, 동일한 범죄에도 가장 긴 형벌을 내리는 가혹한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에도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국민의식은 종교적 이념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카고의 다른 곳에서는 총알 16발을 발사해 흑인 청년 한명을 살해한 시카고 경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먼 캘리포니아에서는 얼마 전 IS와의 연관성을 의심받는 충격적인 테러 총격사건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IS는 묵시적 종말론을 신봉하는 테러 단체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 한 사람은 이런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사람들이 총기를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이 순간 <지옥의 묵시록>을 떠올리는 건 무모한 상상일까. <지옥의 묵시록>은 1979년에 개봉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다. 영어로는 Apocalypse Now, 번역이 쉽지는 않지만 묵시적 파괴와 환란으로 세상이 지금 망해가고 있음을 뜻한다. <지옥의 묵시록>이란 번역은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질 묵시록이 결국 지옥밖에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어서 나쁘지 않다. 코폴라는 세상이 망해갈수록 모두가 미쳐가는 지옥을 그리고 있다. 전통의 묵시록은 현재의 상황을 주로 대환란 또는 망하기 직전의 상태로 이해한다. 그 묵시의 드라마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어도, 그 드라마에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만은 하게 된다.  


    앞으로 이 웹진에서 여러 차례 글을 쓸 계획이다. 미국의 특정한 모습을 설명하는 글이기 때문에 묵시록이란 개념의 역사를 따로 서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시작은 미국 청교도들의 정체성과 종말론을 다루는 글로 할 예정이다. 그 후 미국 안팎의 여러 인물들이 제시한 미국론을 주제와 연결시켜 정리할 계획이며, 한국 개신교와도 연관이 많은 미국의 천년주의, 선교운동, 말세론과 재림 등의 개념들을 통해 미국문화 형성의 일부를 살펴볼 생각이다. 끝으로 미국의 묵시록이 형상화 되어있는 여러 장르의 영화를 다루면서 묵시의 세속화 내지는 재종교화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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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難民, Refugee)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J는 탈북자이다. 나이는 25, 신장은 162-3cm 정도로 남자로서는 작은 키이고, 턱뼈가 유달리 발달한 강인하고 초롱초롱한 눈매를 지닌 청년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3년전이었다. 우리학교(시카고 신학대학원) 한인학생회 주관으로 채플실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초청강사로 그가 왔었다. 북한의 실상과 탈북과정등을 이야기 하면서, 북한 관련 필름을 보여줬는데 많은 미국 친구들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 후로 나는 그를 우연찮게 2번 더 만났고, 지금은 내가 몸담고 있는 이민교회 청년부 회원이다.

 

어느 정도 나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지고 난 이후,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하나씩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13살 때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떠돌아다녔다는 이야기, 그러다가 다시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북한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다시 북한을 탈출한 이야기, 중국을 다시 떠돌다가 어느 선교단체를 만나 그곳에서 5년간 기거하면서 주님을 영접했다는 이야기, 후에 중국본토를 종단하여 황하를 건너고, 메콩강을 지나 태국에서 망명신청을 했다는 이야기, 태국에서 한국 or 미국으로 망명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택했던 이야기등등.

 

학창시절 지리시간이나 역사시간에 배웠던 나진, 선봉, 두만강, 연변, 북간도, 청도, 북경, 황하, 메콩강 등등의 지역을 지도에 새기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J를 보며 나는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에 성공했고, 망명하자마자 미국 영주권을 받았으며, 영주권 취득 후 5년 만인 올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래서 행복하단다.

 

 

미국 시민권자 J가 어느 날 내게 오더니

 

J: 목사님, 중국(연변)에 다녀오려구요

I: ?  

J: 아버지를 보고 오려고 합니다 

I: 어떻게? 

J: 브로커와 연결이 되어 북에 있는 아버지와 8년 만에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서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I: 어디서 만나겠다는 건데? 

J: 브로커를 통해 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 연길로 나오면 제가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는 겁니다  

I: 그게 가능하니? 

J: 몇 가지 위험요소가 있지만 가능합니다. 돈이 좀 들지만

I: 잡히면?  

J: 글쎄요~ 미국 시민권자인데

I: “미국이? 너를? 웃기지마!” 

J: 그래도, 이제는 못 참겠습니다

I: 너는 그렇다 치고, 너의 아버지가 잡히면 어떡하니?

J: ……

I: 참아! 가지 마! 

J: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J는 중국으로 갔고, 아버지는 못 만났고, 브로커는 연락이 두절이고, 돈만 날리고 다시 열흘 만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가지 소득이라면 두만강 건너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며 그곳 사람들을 보고 온 것이 그나마 위안이란다. 그러면서, 내게 작년에 단행된 북한의 화폐개혁 후에 발행된 모든 북한의 지폐와 동전을 모은 화첩을 선물이라고 내밀었다. 두만강변에서 판매하는 것을 사왔다고 했다. 김일성, 천리마동상, 개선문, 김일성생가뭐 그런 그림들 위에 1000, 2000, 5000원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갖고 있으면 국가보안법 위반인가? (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알려주시기를) 하마터면 자기가 알고 있는 두만강변 비밀 루트를 통해 북으로 건너갈 뻔했다는 말을 J는 마지막에 덧붙였다.

 

그는 그곳의 뭐가 그리 그리운 것일까? J가 알고 있다는 두만강변 비밀루트는 정말 안전할까? J는 어떻게 자신 안에 있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를 동시에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날 들었던 생각이었고, 그 생각들 때문이었는지 그날 밤 나는 두만강변 비밀루트를 건너다 적발되는 악몽에 잠이 깨었다.


 

미국에서 인간을 분류하는 몇 가지 방법에 관하여

 

미국은 알다시피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너무나 잡스러운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오기에, 그들은 나름대로 국경을 넘어오는 인간들에 대한 검열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다. 일단, 나 같은 유학생들에게는 F-1 비자를,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H 비자를 제공한다. 전자가 학교에서 외부자의 신분을 보증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회사가 그()의 신원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밖에 종교인들에게는 R비자, 무슨 각종 연구원에게는 J비자, 그리고 여행객들은 여행비자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이보다 나은 신분상태는 영주권자이고, 영주권 취득 5년이 지나면 시민권 신청을 할 수 있다. 미국사회에 정착했다 함은 영주권 이상의 신분 취득을 의미하고, 흔히 그린카드로 불리는 영주권 쟁취를 위한 갖가지 정보와 속임수와 탈법과 묘책이 횡횡하는 사회가 미국사회이다. 엄격히 말하면 영주권, 시민권자는 이민자, 그 외 나머지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행자라고 볼 수 있다. F-1, H, J 비자 모두 미국체류가 만료되는 기간이 명시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미국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을 언급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계층이 불법체류자이다. 이들은 엄연히 존재하나 카운트는 안된 채, 미국 지하경제(3D업종)의 상당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다. 세계인구의 5-6%밖에 안 되는 미국이 세계 에너지의 35% 이상을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손길과 쓰레기를 필요로 하겠는가? 보이지 않는 그 허드렛일들은 어김없이 멕시칸, 아시안 불체자들, 그 밖에 세계 곳곳에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민국은 어느정도 불체자들이 포화상태에 이르면 그들을 색출하여 추방한다. 데리다는 신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지하경제의 운용을 위해 암묵적으로 불체자를 허용하고, 선거때가 되면 보수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그들을 내치는 증상을 일컬어 갱신된 인종주의(a renewed racism)’[각주:1]라 불렀다. 그렇다면, J와 같은 난민은 어떻게 분류될까?


우리에게 난민은 누구인가?

 

문득, 톰 행크스가 나왔던 <터미널>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동유럽 크라코지아 출신의 젊은이가 뉴욕 JFK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한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도중에 구데타가 발생하여 조국이 없어진 것이다. 떠나온 곳이 없기에 입국을 거부당하고, 돌아갈 나라도 없기에 미아가 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에게 허락된 장소는 오직 공항 터미널 안이다. 기표가 제거된 인간의 운명을 낭만적이고 로맨틱하게 이 영화는 그리고 있지만, 실제 그 상황은 사회라는 상징계속 질서에 기대어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죽음과도 같다.

 

라깡에 의하면, 나의 나됨은 타자의 시선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타자의 시선에 예민하고 충실하다는 말은 나의 존재는 타자들과의 섞임과 어울림과 차이속에서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나의 기표가 타인들의 행렬에 뒤쳐지지 않고 충실히 따라갈 때, 비로소 타자는 나를 나로 받아들이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나!’라고 외칠 수 있다.  

이렇듯, 현실의 세계는 무수한 기표들의 연쇄와 차이에 의해 운영되는 시스템이다. 이상철 혹은 한국인이라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철은 철수와 영희가 아닌 이상철이어서, 한국인은 일본사람, 중국사람이 아니라는 차이, 그것이 한국인임을 이상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톰 행크스와 J는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여 입증시켜 줄 기표, 즉 크라코지아와 북한이라는 기표가 사라진, 빗금 그어진 주체, 즉 난민이다.  

 

영어로 난민에 해당되는 말이 refugee(:a person who has been forced to leave their country or home, because there is a war or for political, religious or social reasons)이다. 국가의 강제에 의해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이유로 쫓김을 받은 사람, 혹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자유를 찾아 도망친 사람, 아니면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타국을 여행하다 다시 조국으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여행자와도 다르고, 자신이 태어난 조국을 등지고 떠났다는 점에서는 이민자와 비슷하나, 조국의 전복을 꿈꾼다는 점에서는 이민자와 다르다. , 그들 난민은 나라 밖에 산다는 측면에서는 외부인이지만, 조국의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젼을 여전히 대망한다는 측면에서는 내부자이다.

 

 

신자유주의와 난민

 

우리가 흔히 난민하면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사진전이나 신문기사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보트피플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는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다시는 이런 냉전의 희생물인 난민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예상도 했었다. 하지만, 탈냉전 이후 오히려 난민 발생은 급속하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보스니아와 코소보 사태 등으로 대표되는 각 대륙에서 발생하는 민족분규와 종교 분규, 최근 들어서는 이상 기후와 천재지변으로 인한 환경난민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난민의 이유는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자본의 세계화 전략은 취향의 평균화, 기호의 표준화, 선택의 획일화를 낳았다. 21세기는 얼핏 개성과 개별을 찬양하는 것 같으나 오히려 개체를 자본의 운영이라는 전체성의 깃발아래로 군집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여기 오리지널 구찌 가방이 있고, 그 주변에 짝퉁 A, 짝퉁 B, 짝퉁 C가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오지지널을 살 수 없는 사람은 짝퉁 C에서 짝퉁 B, 그리고 짝퉁 A로 자신의 욕망을 키워나가며 오리저널를 향한 꿈을 키워나간다. 옛날에는 우주표 가방도 있었고, 쓰리세븐 가방도 있었는데, 이제 우리는 오직 명품으로 가방 선택의 기준을 표준화 평균화 획일화 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젝은 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을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면서 이 물음에 답을 한다. 잉여자본과 잉여쾌락은 같은 원리여서, 자본주의가 자본의 잉여를 계속 산출하면서 작동되는 것처럼, 인간 정신 역시 욕망의 잉여를 계속 흐르게 함으로서 유지된다. 신자유주의는 에 대한 욕망의 매카니즘을 내재화한 변종 바이러스와 같다. 그리하여, 그동안 터부시되어 왔고 은밀했던 에 대한 욕동을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게 한다. 전에는 누군가 까놓고 돈과 물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속물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런 것을 감추고 숨기는 사람이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라 평가받는다. 나의 욕망을 끝없이 발현하여 그에 걸맞는 물적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 최고의 미덕이고 경쟁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공약이나 인물에 대한 검증 없이, 오직 돈벌게 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다. 원칙과 명분, 소통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또한 신자유주의는 전 시대의 다른 보수적 체제와는 다르게 자신에게 해가 되는 집단과 세력에 대해서도 너그럽다. 아니, 오히려 그 적대자들을 자신들의 뜰 안으로 초대한다.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나꼼수>의 경우가 그렇다.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실랄한 조롱과 멸시와 욕설들을 통해, <나꼼수>는 대중들로 하여금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냉소적 거리두기를 제공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이 보수의 진화 혹은, 신자유주의적인 게임의 법칙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냉소에 너무나 익숙하다. 이명박이든, 조용기든, 한나라당이든, 조선일보이든, 한기총이든 우리는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들의 몰상식과 파렴치와 무식함에 대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들을 조롱하며 엿을 먹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마치 마스터베이션 같다. 지젝은 바로 이점을 경계한다. 신자유주의라는 대타자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방정식안에는 이미 대중들의 냉소와 그것의 적당한 사정(射精)까지 다 계산되어 있다. <나꼼수> 정도의 냉소주의는 단지 우리에게 체제를 향한 배설의 욕구를 말초적으로 만족시키거나, 체제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을 확인시켜줄 뿐,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여전히 신자유주의와 아무런 대립없이 부자가 되기 위해, 자기의 계급을 배반하며 자발적으로 그 체제에 참여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 대립을 진정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체제에 대한 냉소는 오히려 그 체제를 작동케하고 강화시키는 기재에 불과하다.[각주:2]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신자유주의를 거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해관계와 복잡하게 얽히면서, 오히려 냉전시대 때보다 더 확고한 전쟁의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세계화된 시대의 세계시민은 촌스럽게 정의, 평등 같은 전시대의 유물에 연연하지 않고, 통 크게 주판알을 튕길 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무슨 이념이, 신앙이 자본과 욕망의 잉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 결과 자원 확보를 위한 국지전이 일반화되고 이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은 테러가 되며 그 테러에 대한 응징으로 더 큰 군대가 동원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의 정점이 바로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화된 미국의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이고, 그것의 완성이 빈라덴과 후세인의 최후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결과 유일하게 현재 드러나는 증상은 아프카니스탄에서 발생한 200 만명의 난민과 이라크에서 생겨난 150만명의 난민들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와 난민 사이에서 발생하는 함수이다. 그렇다면, 세계시민들은 현재 이러한 난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대한민국과 난민


OECD 30
개국 회원국 인구 대비 난민 비율은 1000명당 2명이다(2009년 기준). 스웨덴이 인구 1,000명당 8명으로 가장 높은 비율이고, 독일은 1,000명당 7, 영국은 1,000명당 4, 미국은 10,000명당 8, 일본은 100,000명당 1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200,000 명당 1명의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 단연, 최하위다. 독일에는 59 8천명의 난민이, 미국은 27 5천명, 영국은 26 9천명, 스웨덴은 8만 명, 네덜란드 7 6천명, 스위스 4 6천명, 아일랜드 1만명, 룩셈부르크에 3200명의 난민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268!. 

  

한국은 1992 난민협약 및 의정서 가입한 이래로, 2000년도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 상임 이사국 선출되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아시아에서 드물다는 정치적 민주화 과정과 더불어 경제의 급격한 성장은 대한민국의 선호도와 신용도 상승으로 이어졌고, 2002년 월드컵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과 반기문 UN 총장 배출 등 어딘가 모르게 우리나라가 외국인들이 보기에 나이스했는지 난민신청 건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2009년엔 난민 신청자 249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다 개뿔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2009년 한국의 인구대비 난민 비율은 인구 20만 명당 1명으로 OECD 가입 국가 중 최하위다. 1992년에 난민협약과 의정서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2001년에서야 겨우 1명의 난민만을 인정했다. 2009년에 이르러 74명의 난민을 인정한 것을 법무부에서 홍보하면서 진정한 호혜평등 어쩌구 저쩌구~”, “떠오르는 아시아의 허브! 미주알 고주알~” 무슨 인천 공항선전도 아니고아니, 어쩌면 그들은 난민을 항공사업과 연계시키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난민센터를 영종도에 짓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말 기막힌 발상이다.    

 

 

에필로그:  국경의 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豆滿江)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巡査)

왔다 ―― 갔다 ――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학창시절 배웠던 김동환의 <국경의 밤>이라는 장편 서사시중 첫 장이다. 그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시에서 두만강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강이고, 여전히 건너야 하는 강이라고… 100년 동안 세상이 그토록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은 변함없이 그 모양 그 모습이다. 그래,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우리 앞에는 여전히 체제가 가로막아 놓은 강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그 강을 어떻게 건널지를 놓고 여전히 갈등하며, 그 강 너머의 세계를 꿈꾼다. 블라블라~ 지금 돌이켜보니 참 순진하고 철없던 시절의 생각이었다. 


얼마 전에는 생각을 바꿔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우리가 그 두만강이었고, 외투 쓴 순사였고, 철조망이고, 폭압적인 체제이고 편협한 이념이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넘어가는, 혹은 우리에게 넘어오는 그들에게 그토록 가혹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좀 어딘가 오바같다.

 

요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2011년 두만강은 여전히 민족의 비극 내지 원죄의식을 지시하는 주인기표임과 동시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념대결의 상징인 그곳에서 돈이 될만한 것이 뭘까?’를 놓고 고민하는 욕망의 대타자일런지 모른다. 그러기에 얼마 전 바뀐 북한의 새로운 화폐가 국경에서 기념품으로 거래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고, 탈북한 사람들 혹은 탈북을 시도하려는 애달픈 사람들을 놓고 온갖 상품이 뒤에서 거래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아직까지 건재한 이념의 장벽과 새롭게 빠른 속도로 번지는 욕망의 장벽을 뚫고 탈출은 계속되고난민은 이어진다.

ⓒ 웹진 <제3시대>


  1. Jacques Derrida, Ethics, Institutions, and the Right to Philosophy, Trans. Peter Pericles Triphonias.(Maryland:Rowman and Littlefield, 2002), 140. [본문으로]
  2.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28-30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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