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 : 신앙과 과학의 랑데부!



 

민기욱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1. “과학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무엇일까?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상이 변했다는데 그리스도인의 믿음에도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까?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우리의 믿음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바뀌기라도 한다는 건가? 

       2. 우리는 날마다 “과학”과 “기술”이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변화가 너무 빨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인해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됐지만 예전에 퍼스널 컴퓨터의 사용이 쉽지 않아 아예 포기하는 어르신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는데 훗날 필자도 언젠가 그렇게 될까봐 다소 두렵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3. 7월이 되면 생각나는게 있다. 그래서 캘리포니아 프리몬트에 위치한 로고스 교회에서 “신앙과 과학” 연속 특강에서 소개한 바 있다.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버즈 올드린 등의 우주비행사들이 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를 발사해 7월 20일 달에 처음 착륙한 이후 2년이 지난 1971년 7월 30일 아폴로 15호가 다시 달에 착륙했는데 이 때 한 실험 중 “해머와 깃털의 낙하 실험”이란게 있다. 일명, “갈릴레이 실험”의 확증이었는데 이는 “등가원리”를 증명해보이려는 것이었다. 실험의 이름 그대로 지구에서는 해머와 깃털을 떨어뜨리면 당연히 해머가 먼저 땅에 떨어진다. 왜? 그것은 공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갈릴레이는 중력에 의한 질량의 가속도 실험으로 물체가 가속되는 양은 질량과는 상관없음을 최초로 보였다. 그러나 갈릴레이 당시에 실험이 쉬웠을리가 없다. 이에 아폴로 유인우주선이 가져다 준 선물은 달 표면이었고 그곳은 공기가 매우 희박하기 때문에 갈릴레이의 낙하 실험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4. 여기서 잠깐! 등가원리(equivalence principle)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등가원리란 일반상대성이론의 기본 원리로서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이 같음을 다룬다. 중력 질량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힘을 작용하는 양이고, 관성 질량은 운동 제2법칙에 의해 정의되는 가속에 대한 저항이다. 이 둘이 선험적으로 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놀랍게도 아주 똑같은 값을 갖는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이 둘을 완전히 같은 물리적 개념이라는 논리로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큰 산을 넘어보려는 갈릴레이의 노력이 결국 몇 세기를 너머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졌고 1907년 등가원리라는 이름으로 확립되었으며,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이 같다는 중력 이론을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과학적 증명을 아폴로 15호의 데이빗 스캇이 다시 재현했던 것이다.[각주:1] 그런데, 이와 같은 때는 아니었지만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의 그 촌각을 다루는 엄밀한 과학기술의 홍수 속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5.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 중 한 사람인 올드린이 혼자서 성찬식을 달 표면에서 했던 것이다! 그 당시 NASA는 그리스도인인 우주비행사가 아폴로 8호로 달의 궤도를 돌고 있을 때 “창세기”를 낭독했던 것으로 인해 무신론자로부터 고소를 당한 상태였다. 즉, 우주에 있는 동안 우주비행사는 종교 활동을 금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올드린은 달에서 성찬식을 한다는 자신의 계획을 아내한테도 미리 말하지 않았고, 나중에 지구로 귀환한 후에도 당분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나중에 올드린에게 성찬도구를 제공했던 휴스턴의 장로교회는 그 때 사용한 잔을 그로부터 받아서 매년 7월 20일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달의 만찬의 날'로서 기념하게 되었다. 성찬식 장면을 지구로 송출하려는 원래의 계획을 포기했지만, “라디오 방송이 끊어진 상태에서 빵과 포도주가 들어 있는 조그만 플라스틱 꾸러미를 개봉했다. 나는 교회에서 준 성배에 포도주를 부었다. 중력이 지구의 1/6밖에 안 되는 달에서 포도주는 느리게 물결 치면서 컵의 가장자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어서 나는 성경 구절을 읽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올드린은 1970년 가이드포스트 잡지에 기고했으며 NASA는 그 날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http://history.nasa.gov/SP-350/ch-8-4.html (NASA)  

       6.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과학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했던가? "기독교인의 삶은 답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물론 유명 학술 저널이나 논문을 쓸 때야 논리와 논증 등의 치밀한 학문적 전개와 설득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쩌면 올드린의 행동처럼 누가 보기에 따라 무모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7. 필자는 유학생이자 목회자로서 작은 교회에서 꽤 긴 시간동안 목회한 적이 있다. 교회를 개척하고 10여년 목회했던 선배 목회자를 존중하고 교회의 전통을 지키고자 애쓰는 교우들을 배려해서 예배 예전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7-8년 동안 사임할 때까지 지켜낸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학위 과정 중이라 한 주에도 수없이 많은 논문과 책과 씨름하면서도 교회에 가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묵묵히 매주 성만찬을 집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차갑고도 냉철한 학문의 세계 속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살과 피를 교우들과 서로 나눌 때 나 스스로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작업을 했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이중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8. 버즈 올드린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텍사스 휴스턴의 장로교회의 장로로서, 그는 MIT에서 궤도상 랑데부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NASA 우주비행사로 뽑힌 수재였다. 또한 당시 그가 쓴 궤도역학 논문이 이후 궤도상 랑데부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주비행사뿐만 아니라 우주개발사에 남긴 영향이 큰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과학자로서 꽤 영향력있는 사람인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착륙해서 한 일이 “성만찬”이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 매우 고무적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 혹시 이 역사적인 순간의 일을 처음 접하셨다면 이 일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이라 생각한다. 유명한 과학자가 특별한 역사적 순간에 한 엉뚱하고도 위대한 일! 성만찬! 이보다 더 멋진 “신앙과 과학”의 랑데부가 또 어디 있을까? 



ⓒ 웹진 <제3시대>

  1. http://web.hallym.ac.kr/~physics/course/grcm/pisa.ht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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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하나님의 뜻 그리고 종말



 

민기욱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아내와 차를 타고 가다가 잠깐 신학논쟁(?)이 벌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있던가? 결혼을 결심할 때, 왜 나를 선택했느냐가 주제였다. 아내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서운했다. 내가 매력적이었다거나, 장래가 있어 보였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착해 보여서 나를 선택했다고 말하길 기대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었단다. 가끔 교우들 중에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꼭 목사에게 “하나님의 뜻”일까 여부를 묻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말해 겉으론 진지하지만 속으론 웃을 때가 많다. “진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겁니까?”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두 가지의 양 극단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인형극장” 모델이다. 이 세상을 인형극장으로 생각해 창조주 하나님이 일일이 줄을 당겨서 오직 그 분이 하라는 대로 모든 창조계가 춤을 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운명을 점친다랄지, 팔자를 탓하는 것이 크게 보면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이는 결정론적 사고 모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관객” 모델이다. 우주라는 무대가 잘 돌아가도록 준비해 놓고, 이제는 무심하게 내버려두는 관객이 되어버리는 그런 하나님이다. 지난 세기의 “이신론” 즉 “눈먼 시계공” 모델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양 극단을 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최초의 창조를 시작하고서 팔짱을 끼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창조하고 계신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140억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창조주이셨고 오늘의 창조주이시다.  

      또한 그 분의 연속적인 창조는 “피조물들의 자유”를 허락하신다. 덕분에 역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이 생겨났다. 그러나 스스로를 자각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줄 아는 존재들이 우주 역사의 과정에서 순전히 우연으로 생겨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목적이 있다. 물론 역사의 우발성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진행하다보면 궁극적으로 만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악과 고통”의 문제다. 어느 누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먼저 “도덕적 악”의 문제에 직면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범죄를 듣고 본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악을 허용하셨는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잠시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라. 만약 우리에게 선 대신 악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세상을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통해 수없이 많은 전쟁과 인간의 잔악함을 본다. 우리의 선택을 통해 커다란 고통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기계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이렇게 악이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인간의 자유라는 더 큰 선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이며, 이를 “자유 의지 방어”라 부른다.  

       또 다른 하나는 “자연적 악”이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지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리스본 대지진을 아는가? 1755년 All Saints Day에 발생한 이 지진으로 교회가 무너져 5만 명이 죽었다. 과연 지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옥스퍼드의 신학자 오스틴 파러는 이렇게 답변했다. “신의 뜻은 지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그 본성에 맞게 작용해야 한다”고. 이를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자유 과정 방어”라 부른다. 하나님은 살인자의 행위와 병의 발생을 직접 의도하지는 않으신다. 다만 허용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약함”이거나 “간과함” 혹은 “냉담함” 때문이 아니다. 다만 불가피한 대가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고통의 미스테리나 “참담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버클리 지역도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잊을만하면 잠자고 있는 순간에,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에서, 예배를 마치고 주차장을 나서는 순간에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진이 잘 나는 곳이었지!” 하고 자각하게 하며 땅은 흔들어대며 나를 깨운다. 매번 무섭다. 어느 날은 책장에서 “종말론”에 관한 자연과학자와 신학자들의 대화를 수록한 책을 다시 꺼내 보았다. 대충 훑어 파악될 내용은 아니었지만 십 수 년 전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기억은 우리의 “종말”에 관해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절망을 말하고, 신학자들은 “희망”을 말하더라는 것이다. 왜 그들은 절망을 말하고, 희망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극과 극을 달리면서도 왜 그들은 서로 한 자리에 앉아 대화하려는 것일까?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데도 말이다.  

       먼저 “절망”에 귀 기울여 보자. 너무 낙담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는 마시라. 과학적인 사실일 뿐이다. 그들의 주장 속에 섞여 있는 환원주의적, 유물론적, 결정론적 “신념들”을 잘 파악하시고 새겨들으시기를 바란다. 1994년 7월을 기억하시는지. 나는 잊지 못한다. 7월 8일 토요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을 듣던 나는 판문점 근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부대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정말 아찔했다. 일명 GP, GOP에서 군복무하는 자들의 심정을 아시는지. 한달 동안 음산한 장송곡을 듣는 심정을. 우울증 정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일주일 후 7월 16일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유명한 “슈메이커 레비 9”이라는 혜성의 파편 중 21개가 거의 일주일 동안 목성과 충돌했었다. 이 충돌로 목성에 상흔이 생겨나 까맣게 반점이 목격됐는데 그 크기가 지구의 크기보다 더 컸다. 겨우 직경 1.5-2km 정도의 작은 파편으로 지구보다 큰 상흔을 남겼다. 그렇다. 만약 그 파편들 중 하나라도 지구와 충돌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이미 과학적 정설로 자리 잡고 있는 6천 5백만 년 전의 대규모 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종은 혜성과 유성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유성과 혜성에 의한 충격 분화구가 지구상에 몇 개나 남아있을까? 현재 140-150여개가 발견됐으며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지구상의 흔적과 혜성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우리는 또 얼마나 낙담하고 있는지. 그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언제든 “종말”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든든히 서 있는 이 땅도 지구 전체의 차원에서 볼 때는 마치 생계란의 얇은 껍질처럼 한없이 약한 지각껍질일 뿐이다. 지진이나 화산폭발에 의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절망”이다. 그러나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과학이 말하는 섬뜩한 종말은 너무나 순식간에 찾아오기에 기다릴 여유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24시간이라는 하루도 우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정말 절망적이다. 그러나 희망을 위한 이유들을 한 번 찾아보자. 우선 독일 본 대학의 신학교수인 게르하르트 자우터(Gerhard Sauter)가 던지는 우스개 소리로 절망적인 현재를 잠시 잊어 보심이 어떨지.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선한 우유 항아리에 두 마리의 개구리가 빠졌다. 한 개구리는 비관적, 다른 한 개구리는 낙관적이었다. 비관적인 개구리는 “이 항아리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 조만간 죽게 되겠지. 그렇다면 지금 바로 체념하고 모든 희망을 포기하자.” 그래서 곧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낙관적인 개구리는 희망을 결코 잃지 않았다.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몸부림을 칠뿐이었다. 밤이 새도록 발버둥 쳤다. 그러다 그 발버둥은 우유를 버터로 변형시켰고, 드디어 항아리 바깥세상으로 탈출했다. 정말 근사한 이야기다. 자 여러분은 어떤 개구리에 속하는가, 이렇게 질문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우터 교수는 비껴간다. 두 개구리가 어떤 기독교 교단에 속하는지 설명한다. 비관적 개구리는 개구리의 연약함을 걱정하며, 단지 하나님께 항아리 안으로 사다리를 넣어달라는 짧은 기도를 할 것이나 사다리는 보이지 않고 결국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독일 루터교에 해당한다. 다른 개구리는 자신이 힘차게 투쟁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는 미국 장로교 개구리였다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너무 단순할 뿐이며, 교회에서 듣기에는 너무 경박한 일방적 성공담일 뿐이다. 어찌 낙관주의, 낙천주의, 심지어 긍정적 사고가 기독교가 말하는 “희망”과 혼동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밝은 생각, 적극적 사고가 우리 삶에 풍요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혹시 멋진 차, 근사한 집이 생길지도. 그러나 종말이라는 거대한 폭풍에 대처하려거든 단단히 준비하시라. 비닐우산 따위는 그만 접어두는 지혜가 필요할 터. 좀 더 진지하게 “희망”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희망의 이유, 희망의 뿌리를 찾아 나설 때가 되었단 말이다. 

       아이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울지도 않고 엄마, 아빠가 있는 거실, 혹은 주방으로 걸어올 때가 간혹 있다. 다 컸구나! 그러나 내 경우는 달랐다. 심지어 십대 초반에도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 물론 울지는 않는다 – 부모님을 찾다가 당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방 저 방 두리번거리다가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 그 놀람이란. 휴거라고 들어보셨는지. 어린 시절 “휴거”에 관련된 영화가 어찌 그리 각인이 되었던지 지금도 텅 빈 집 안을 보다가 놀랄 때가 있다. 멋쩍다.

       그러나 내가 믿던 기독교는 종말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쳐왔던 게 사실이다. 어느 날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 예수의 재림이 도래하고 그렇게 종말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종말의 끝은 온 우주의 끝과 “새 하늘 새 땅”의 도래가 될 것이다. 그 새 하늘 새 땅은 영원한 낙원이 된다. 어떤가.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종말론은 어디까지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 또한 우주의 역사는 6천년 내지 고작 1만 년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다시 코페르니쿠스 이전으로 돌아가야 조화될 수 있는 종말론이다. 즉 온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어야 하고, 온갖 별들은 지구를 덮고 있는 저 천장에 촘촘히 매달려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와 십자가 사건 또한 지구 중심적 구원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어 왔다. 허나 자연과학은 기독교 신앙인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혹은 그렇게 믿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오늘의 신학은 아니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학문의 활동과 대화를 통해 늘 새롭게 구성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상식이다. 즉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 현대과학의 연구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신학적으로 수용하여 기존의 전통 교리를 새롭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종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가 현대 천문학의 견해에 따르면 몇 십억 년 후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구 결과에 의해 기존의 “종말론”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까마득한 미래보다 훨씬 빨리 예수의 재림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즉 지구의 시간에만 하나님의 심판이 묶여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인류 구원의 최종적 사건으로 이해되던 기존의 종말 역시 우주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은 글을 통해 종말론 전체를 기대하지는 마시라.)

       내 어머니에게서 들은 종말론은 그야말로 현실적이며 무시무시했다. “아마겟돈” 전쟁으로 인해 핵무기가 사용되고,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인류와 생명체들은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 받아야 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휴거를 받아 아마겟돈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구출되어야 한다. 물론 더 자세하게, 그리고 매끄럽게 기술되어야 하나 이를 우리는 “세대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그들이 말하는 종말은 그러나 지구상의 생명체의 멸절로 끝나는 단순한 “종말”일 뿐. 더 이상 현대 신앙인들에게 호소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입지가 너무나 좁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말하는 150억 년 더 생존할 우주적 차원에서, 혹은 50억 년 남은 지구의 생존 확률 속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편 현재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 – 생태계 파괴, 인구 증가, 자원의 고갈 등 – 을 볼 때 스스로 자멸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또한 성서가 말하는 경고 – 인간의 어리석음 – 에 대해 조금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초래하는 종말에 대해 더 고민할 때 “희망”이 싹트지 않을까.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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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마음을 돌이킬까?



 

민기욱
(GTU 박사과정)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내가 “과학과 신학” 분야를 공부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저널에 글을 한 꼭지 올려서도 아니요, 번역이든 학술적인 글의 출판도 아닌 일반 독자와의 만남과 “쉬운(소통하는)” 글을 통해 글이 나누어지고 응답을 접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은 현란한 어휘와 사고의 생산에 버금가는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쉬운” 글이 되길 바라며 과거 어느 지면에 썼던 글의 1.01판 정도 되는 글이니 독자분들의 이해를 부탁드린다. 

       종교인들이든 아니든 우리는 “기도”라는 걸 하곤 한다. 기도는 물론 대상을 전제로 한다. 또한 그 기도의 효력에 대해 상대적이기는 하나 분명 어느 정도의 믿음 내지는 “기대”를 하게 된다. 과연 신은 기도를 들어주시나? 종교인이라면 크고 작은 문제에 직면하여, 특히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순간이 닥치게 되면 누구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마련이다. (잠깐 사고실험을 해보자!) 기도의 순간 잠깐 멈추어 보자. 왜 기도하지? 그렇다. 기도의 효력에 대해 어느 정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가? 항상 신이 들어주셨나? 아니다. 들어주시지 않았던 적이 많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크다. 어떤 이는 항상 들어주셨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렇듯 우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갈림길에 서서 우리는 신앙의 정도를 키재기 당할 때가 많다. 기도의 효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아닌, 기도의 결과에 대한 우리의 두 반응 사이의 갈림길에서 우리의 신앙이 재단된다. 이럴 때 목회자들은 흔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혹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응답하지 않으신다, 대답하곤 한다. 나도 목회자지만 답답하다. 그것 말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만일 신께서 마음을 굳건히 정하셔서 우리의 기도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절대불변하시다면 그 때는 어쩔 셈인가? 내가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없다면? 더 나아가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판명된다면? 그러나 다행히 어느 누구도 기도의 효과가 전혀 없다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가끔 과학자 중에 기도와 과학의 관계를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허나 교회에서도, 과학계에서도 변두리일 뿐이다.  

       나는 한국과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양자물리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출판한 적이 있다. 기초적인 전제는 신학의 패러다임이 자연과학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해 오고 있다는 것인데, 양자물리학의 발견 이후 신학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도대체 양자물리학이 무엇이기에 신학의 패러다임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물리학적 세계관이 바뀌었는데 왜 신학의 렌즈가 바뀌는가? 또한 “변화”했다면 무엇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기도에 대해 말하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양자물리학을 운운하는가? 궁금하지 않은가?

       양자물리학과 더불어 아이작 뉴튼의 고전물리학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철학과 과학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17세기부터다. 그러니까 철학과 과학이 각각의 분과로 나뉜 것이 400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다. 서로 나뉘어 각각의 길을 가고 있는듯 하지만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칸트의 철학이 뉴튼의 물리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따라서 뉴튼의 물리학을 알게 되면 칸트의 철학이 더욱 쉽게 다가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떤가? 신앙의 뼈대가 되는 신학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학도 당시의 사회, 문화, 사상,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과학의 영향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뉴튼의 고전물리학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신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학은, 신앙의 색깔은 어땠을까? 

       뉴튼의 고전물리학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포탄을 예로 든다. 실제로 뉴튼의 물리학을 활용하여 전쟁에서 서로 대포를 쏘아댔다. 정확한 위치에 캐논볼이 떨어져야 한다. 여러 가지 초기 조건, 즉 대포의 위치, 포탄의 무게, 바람의 방향, 바람의 속도 등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필요한 모든 조건을 알게 되면, 그래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이런 기초적인 과학적 전제와 산물이 철학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필요한 초기 조건을 알게 될 때, 나중의 결과를 알게 된다는 것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라 말한다. 이를 신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뉴튼의 고전물리학에 영향을 받은 철학이, 그리고 신학이 어떤 색깔을 갖게 될까? “결정론적 세계관”이 낳은 신에 대한 생각(신론)을 일컬어 오늘날 “고전적 군주모델”이라 한다. 즉, 고정된 계급 질서 속에서 신의 절대 주권과 전지하신 계획 아래 모든 것이 통합된다. 신의 전능과 신에 의한 예정은 불변하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그런데 이런 절대적 신에 대한 기존의 상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도 “고전적 군주모델”을 통해 신을 이해할 때가 많다. 마치 오늘날에도 화성 등에 우주왕복선을 보낼 때 뉴튼의 물리학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주왕복선을 만들고 운행할 때 뉴튼의 고전 물리학만을 사용했다간 큰 사고를 당할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시세계를 또한 다뤄야 하는데 이 영역에는 다른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신앙도, 신학도, 교회도 더 이상 예수가 살던 시대 속에 있지 않고,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 속에 있는 것도 역시 아니다. 질서가 변했다. 물론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대가 변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 변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너무 빨리 변해도 문제고, 너무 변하지 않고 고집할 때도 문제다. 그렇다면 변화의 속도만이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변화의 방향도 문제 아닌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도 변화로 인해 뭔가 선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나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서 머리를 싸매야 하는 게 아닐까?  

       신학과 신앙은 뼈와 살의 관계다. 뼈가 없이 살로만 살 수 없다. 또한 역도 마찬가지다. “고전적 군주모델”이라는 신학은 어느새 우리의 신앙이 되었고, 교리가 되었다. 뉴튼의 물리학으로 인해, 철학으로 인해, 더욱 탄탄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교회의 신학은 또한 살이 되어 신도들을 먹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신도 중에 비만이 생기는가 하면 배탈이 자주 나서 피골이 상접하기도 했다. 이때 교회 지도자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체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않다. 음식 상태가 문제였다. 물론 같은 음식을 먹어도 탈나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심하면 모든 사람이 탈나겠지만.  

       그렇다면 음식의 상태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 원인이 뭘까? 수많은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세계관과 세계의 변화 상호간에 복잡미묘한 관계가 있겠지만) 세계관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단 말이다. 토마스 쿤이 지적하는 “과학혁명”이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여러 차례 있었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 다방면에 정말 큰 혁명이 일어났다. 이른바 양자물리학과 상대성원리의 발견이 그것이다. 아인슈타인이라는 개인에 의해 발전된 상대성원리와는 달리 양자물리학은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됐고,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무슨 혁명일까?  

       “양자물리학을 접하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양자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실로 놀랍다. 그러나 오늘날의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가 양자물리학의 영향 하에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양자물리학을 공부하다 처음 만나게 되는 용어는 아마 “불확정성 원리”일 것이다. 뉴튼의 영향 하에 포탄을 쏠 때는 몰랐던 사실이 미시 세계에서 발견됐다. 실험기구의 발달로 인해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미시세계에 이르러 철저하게 무너졌다.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름하여 “불확정성 원리”다. 우리는 단지 불확정적으로, 통계적으로 세상을 알 뿐이다. 그것이 자연의 성격이다. 이런 과학정신이 시대에 영향을 끼쳤고, 끼치고 있다. 이를 교회가, 신학이 비켜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첨단 전자장비와 통신기기는 교회에서 사용하면서도 실제로 과학정신이 교회에 스멀스멀 이미 들어와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과학기술이 모두 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고전적 군주모델”을 깨뜨리고 새로움을 주문하고 있다. 이를 불편하다 하여 무시할 수만은 없다.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 아닌가? 그렇다면 대화해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지난 2월 초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를 이곳 GTU에 초청하여 “과학으로 이해하는 창조세계”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연 적이 있었다. 학우들보다는 외부인들이 훨씬 많았던 강연이었다. 과학을 전공하고 “과학과 신학”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 도전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신앙인이자 과학자인 우 교수의 열정과 진지함은 실로 존경스러웠다. 그랬다. 오랫동안 “과학과 신학 독서 모임”을 꾸리고 신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아우르는 지성을 추구하는 모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때가 된 것이었다. 하여 특별강연을 빌미로 취지를 설명하고 홍보하여 드디어 소수이지만 지난 3월 12일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누구나 공감하듯이 우리는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장회익 교수의 말처럼 “과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분법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는 19세기 이전의 신학을 배운 목회자가 21세기를 살아갈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설명하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지배적이며, 냉정하고 통제적이며 이성적으로서 군주적 모델에 기반을 둔 “하나님 이해”와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과는 상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교인이 겪는 혼돈과 갈등은 더욱 가중될 것이고, 교회에 대한 신뢰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로지 감정에 호소하고, 그것이 마치 성령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포장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세속의 음악도, 문화도 이성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교회가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교회에서 “역사”가 해석되어야만 하듯이 시대 정신인 “과학”도 말해져야 되는 건 아닐까.

       가끔 마켓 앞에서 십자가를 들고 계신 분들을 보게 된다. 정성이 대단하다. 그러나 묻고 싶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과 진지하게 세상에 대해 대화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대화”는 결과를 예상하지만 미리 결과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최종적인 결과를 미리 정해 놓는다면 더 이상 “대화”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의 전제와 비슷하다.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살펴 본 자연의 “실재”는 결코 “결정론적”이지 않다. 내가 생각할 때 하느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미래를 결정하지 않으신다. 정해놓은 각본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뉴튼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빚어놓은 산물일 뿐이다.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다만 미래를 모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양자물리학이라는 체계에 의해 자리를 내주었다. 물론 양자물리학도 한 시대의 산물이겠지만 과거의 어떤 도구보다 더욱 견고하고, 더 폭넓게 사용되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게 현대 자연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인 거 같다. 물론 일관된 범주로 구성된 단 하나의 집합이 인간 경험의 풍부한 다양성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이는 뉴튼을 극복한 양자물리학도 마찬가지다. 한계를 지니고 있고 부분적일 뿐이다. 다만 “모델”일 뿐이다. 그렇다. “하느님에 대한 모델과 생각”이 “하느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도 마음을 돌이키는가?”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기도를 “대화”, 혹은 “사귐”이라고 배웠다. 그렇다.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서로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해야 한다. 한 쪽이 마음을 닫아 놓는다면 대화가 되겠는가? 생각해 보시라. 내가 마음을 닫고 있는지, 그분이 닫고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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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과학을 잇는 다리?



 

민기욱
(GTU 박사과정)


 


       성탄절을 몇 주 남겨둔 12월 초에 나는 박사논문 Proposal을 앞둔 마지막 단계인 종합고사 구술시험을 간신히 치러냈다. 엘리뇨 현상 때문에 올 겨울은 덥고 비도 많이 온다고 하던데 역시 하늘은 꾸물꾸물 대며 시험을 앞둔 준비가 덜 된 수험생의 심정을 잘 안다는 듯이 심란했다. 종합고사 위원회 4명의 교수 가운데 한 분이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을 하루 전에 통고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그리 밝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그 분은 나와 공저로 책을 출판까지 했던 절친이자 아버지같은 존재인지라 나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망은커녕 내가 85세의 미안해하는 노신학자에게 줄 수 있는 건 위로와 기도뿐이었다. 

       지도 교수인 Robert Russell과 Ted Peters 교수, 그리고 Skype를 통해 Outside Reader인 미국 중부에 위치한 Concordia College의 Ernest Simmons 교수는 법정의 피고마냥 나를 2시간가량 고기 굽는 집게처럼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종합고사를 위해 준비했던 130페이지 가량의 페이퍼들을 잘 발전시키면 훌륭한 박사논문이 될 거라 격려했다. “휴~”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네 인생에 더 이상 시험은 없을 거야.” 2시간 정도의 종합고사 구술시험 후 또 다시 1시간 정도 박사논문에 대한 조언을 들은 후 밖을 나서는데 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12월의 차가운 비였지만 눈송이처럼 달콤했다.  

      “신학과 과학”이라는 간학문적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이 곳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at Berkeley, CA)에 온 지 이제 10년을 넘어섰다. 석사과정 후 박사과정 6년차의 한국유학생이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고민이 깊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시절 “이안 바버(Ian G. Barbour)에 의한 양자물리학과 신학의 대화”를 목회학 석사 학위논문으로 쓰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유학의 길을 떠나 이곳 GTU에서 다시 석사 학위 논문으로 “God, Nature, and Quantum Theory”를 썼었다. 감사하게도 이 논문에 관심을 가졌던 Kenan Osborne 교수 (전 교황인 라칭거와 한스 큉의 제자다!)의 제안으로 2014년 1월 “Science and Religion: Fifty years after Vatican II” 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게 되어 “신학과 과학”이라는 학문에 첫걸음을 디디게 됐다.  

       그러나, 이 분야를 공부하며 큰 보람과 의미를 곱씹었던 순간은 학위 논문과 책 출판으로 인해 생겼던 저작권료가 아닌 지역 신문에 15차례에 걸쳐 썼던 “신앙과 과학” 칼럼으로 인한 반응을 목격하던 때였다. 각주 하나, 과학 공식 하나 없이 캘리포니아 지역에 사는 한인 이민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회자로서 매주 아주 짧을 글을 쓰며 겪었던 고민과 반응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리에 생생하다. 한인 이민 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1회성의 세미나에 나섰다가 멱살을 잡힐 뻔한 경험은 오히려 “그래 내가 잘 하고 있구나!” 하는 보람을 안겨주었다. 책에 파묻혀 있던 내게 “전투력”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 지면에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 이 분야의 탁월한 학자도 아니고 글재주가 훌륭한 사람도 못된다. 그저 “서당개 3년”이라고나 할까! 몇 회에 걸쳐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니 큰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또한 이 지면이 학문의 진득한 향연을 펼치는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신문에 칼럼류를 쓸 만한 이 분야의 대가도 아니다. 다만 개인의 일기처럼 “과학과 신학” 분야에서 공부하는 신학도가 공부하고 독서하고 토론하다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을 모아다가 조금 정리해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라 여겨주길 바란다. 당연히 학문적인 글을 위해 인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또 하나. 조금 더 깊고 넓게 공부하고 싶은 이들은 혹은 재미있는 꿍꿍이가 있는 이들은 연락을 주길 바란다. 내공은 깊지 않으나 놀기는 정말 좋아하니까. (이어지는 글은 예전에 한국일보에 내가 썼던 “신앙과 과학” 칼럼의 일부에서 왔다.)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 “기독교 신학과 과학기술”의 연구는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이안 바버(Ian G. Barbour)를 중심으로 수많은 신학자들은 급변하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로 인해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자못 심각한 고민을 오늘까지 해 오고 있으며, 이러한 고민과 연구는 앞으로도 상당히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한신대학교 종교와 과학센터의 최근 출범은 매우 고무적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미래가 과학기술의 시대가 될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신학, 종교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개신교계는 이런 변화에 대해 무심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어쩔 수 없어 그냥 막연히 쳐다보거나, 또는 아예 반대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예를 들면, 10여 년 전, 한국의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해 국가 이익의 측면에서 무한한 부가가치를 예상해 국가가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을 무렵, 그리고 그 연구의 지나친 과장, 확대로 인해 재판까지 갈 때까지 한국 기독교 교계는 각 교단의 헌장에 “줄기세포(stem cell) 연구”에 대한 변변한 문구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지금은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그 이후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당선인 신분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막대한 연구비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그 저변에 있을 정치, 경제적 계산을 미루더라도 이미 미국 신학계의 경우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문제를 이미 상당 부분 확보했음을 볼 때 한없이 부러웠다.  

       이런 거대 담론을 제쳐두고서라도 우리와 같은 소시민이 일상 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과학과 신앙”의 고민, 즉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많은 고민거리들이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이에 나는 “신학과 과학”이라는 간학문 분야에서 공부하는 신학도이자 도반으로서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을 준비하고자 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그 고민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혹은 그 고민과 갈등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의 것임을 깨달아 서로 연대하고 공감하는 일에 내가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과학기술자로 한평생을 사셨던 내 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다. 실험이 끝난 어느 오후 무렵, 40대 중 후반의 후배가 책상에 엎드려 그야말로 “엉엉” 울고 있더란다. 집안에 불상사가 생겼나 걱정돼서 물었더니, 과학자와 기독교 신앙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때문에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울고 있다고 말하더란다. 이 말씀을 전하시면서 아버지는 자못 심각하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 이 갈등이 모든 신앙인들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내가 하는 공부가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GTU는 여러 개의 신학교가 유기적으로 연대하고 있는 연합신학대학원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침례교뿐만 아니라 몇 개의 가톨릭 신학교가 서로 긴밀하게 협업을 하는 유기적 공동체를 꿈꾼다. 덕분에 GTU에서 공부하는 신학도는 자연스레 여러 교단을 넘나드는 에큐메니칼 스승을 두게 된다. 내 경우 United Church of Christ 목사인 Robert Russell이 지도교수이고,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목사인 Ted Peters와 Franciscan 신부인 Kenan Osborne 이 스승이다. GTU 소속 Pacific School of Religion 캠퍼스의 마당에서 보면 멀리 금문교가 보인다. 내 지도교수인 Robert Russell이 설립하고 내년이면 35주년을 맞이하는 CTNS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의 로고 그림은 금문교다. 두 곳을 잇는 것이 다리인 것처럼 “신학”과 “과학” 혹은 “종교”와 “과학”을 잇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안 바버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량적 역할을 통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꾸 의문이 드는 건 왜일까?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잇고, 서로 오고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자, 그러면 “신학”은 이쪽에 “과학”은 저쪽에 있다 하자. 신학 하는 이들은 과학 혹은 기술 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묘사하고 때론 적극적으로 경고한다. 이에 과학 하는 이들은 신학 혹은 종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묘사하고 간섭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물론 내 스승인 Robert Russell 교수는 Creative Mutual Interaction 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신학”과 “과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주장한다. 그러나 내 인상은 “신학” 혹은 “종교”에서 종사하는 이들의 바램일 뿐 “과학”은 그야말로 “무심”하다. 물론, “신학과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러 학자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유형을 묘사해 오고 있다. 나중에 이 유형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전히 뭔가 자꾸 만족스럽지 않은 게 남는 까닭은 뭘까?  

       한국에 계신 아버지의 소원을 기억한다. 그것은 전 세계에 있는 “다리” 사진을 찍는 거였다. 무슨 “대교” 이런 것도 있겠지만 크게 꾸미지 않은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찍고 싶은 거였다. 부전자전이랄까? 나는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놓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그저 유랑하면서 찍고 싶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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