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의 믿음

: Post Human, Post Religion 시대의 믿음에 관하여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Science and Religion


   필자는 2014년 여름, 10년간의 시카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미국유학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인상은 각 분야에서 Interdisciplinary Study(한국말로는 학제간 연구, 융복합 등으로 번역되는)가 상식처럼 보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 학계는 시대적 요청, 자본의 논리, 학문의 발전 등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면서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학제간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고, 그 결과 놀라운 성과물들이 학교로, 도서관으로, 그리고 시장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비교적 보수적인 신학분야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종교와 과학간의 대화가 아닐까 싶다.   

    미국내에서‘Religion & Science' 분야의 최고 연구기관 중 하나이자 정기적으로 기관지를 발행하는 ‘Zygon Center for Religion and Science’ Zygon 웹싸이트_ http://zygoncenter.org/ (줄여서 그냥 Zygon이라 부름)이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내에 있다. Zygon의 운영자이자 미국 '종교와 과학' 분야의 대부격 되는 인물 중 한분이 지금은 은퇴한 Philip Hefner이다. 훼프너 교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에 있는 테드 피터스(Ted Peters)와 러셀(Robert John Russell), 영국에서 활동하는 아서 피콕(Arthur Peacocke)과 폴킹혼(John Polkinghorne), 그리고 얼마 전에 타계한 이언바버(Ian G. Barbour) 등과 더불어 신학계 내에서 ‘종교와 과학’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인물이었고,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과 함께 Co-Creator 지위로 까지 부상시켜 생태신학의 기반을 제공했던 중요한 학자이기도 하다. 훼프너 교수 강의를 들을 때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책을 가지고 가서 겉표지에 싸인을 요청한 적이 있다. 너무 신기해하면서 기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테드 피터스가 편집을 맡아서 출간된 Science and Theology: The New Consonance (Westview Press, 1998)가 한국에서『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동연, 2002)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에 필립 훼프너 교수의 논문인“생명문화적 진화와 창조된 공동 창조자”가 실려있다.      

   나는 시카고에서 석사과정 수학하면서 훼프너 교수가 개설하는 'Epic of Creation’(2005년)과 ‘Science & Ethics’'(2006년) 두 과목을 수강했었다. ‘Epic of Creation’(번역하면 ‘창조의 새 기원’쯤으로 해석되는)시간은 시카고에 있는 유수한 대학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분자생물학자, 진화 생물학자들을 초빙하여 우주의 창조 혹은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신학적 의제의 폭을 넓히는 시간이었다. 빅뱅에 대한 이론을 과학자들이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구약학자들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음 시간에는 신약학자들이 신약성서에 나오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 다음 시간에는 물리학자들의 엔트로피에 대한 해설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한 학기 내내 창조부터 종말까지 과학과 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폭넓은 이슈들에 대한 논의들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수업이 바로‘Epic of Creation’이었다.


'뇌 과학'으로 바라본 Post Human의 쟁점들


   ‘Epic of Creation’을 마치고 다음 학기에 (2006년 봄 학기) 나는 회프너 교수가 진행하는 ‘Science and Ethic’을 계속 수강 신청해서 세미나에 참여하였다. 특별히 그해는 회프너 교수가 은퇴를 하던 해였던지라 대가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그 수업은 과학의 발전에 따른 윤리적 이슈들을 다루는 수업이었는데, 인간복제, 핵, 가상공간, 기술문명, 환경, 뇌 과학 등의 주제들에 대한 윤리적 담론 형성을 목표로 디자인 되었다.  

    ‘뇌 과학과 윤리’를 다루는 내용은 학기 후반부에 배치되었다. 시카고 대학 의대에서 뇌신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와서 수업의 반을 책임졌고, 응용윤리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나머지를 담당했다.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마음과 감정의 매커니즘을 알아버린 지금, 이러한 지식이 인간의 윤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를 탐구하는 것이 강의의 주된 목적이었다. 교수는 수강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졌다: “9.11 같은 끔찍한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녀들의 기억력과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 약을 먹고 뇌의 특정 부위에 대한 시술을 받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뇌과학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직관은 무엇으로 보장받는가?” 그 강의는 이처럼 뇌과학의 발전에 따라 등장하는 다양하고 묵직한 윤리적 함의들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하여 전통적 규범윤리학에 함몰되어 있던 나에게 윤리적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시간이었다.

    뇌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일어나는 회로를 파악하게 하였고, 그 지식을 토대로 인지능력의 개발과 보충을 가능케 하였다. 근육을 늘리고 강화하기 위해 무슨 약물들을 복용하는 것처럼, 기억력, 창의력, 감수성을 자극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문제는 어디까지 뇌 과학의 발전을 허용할 것인가? 인데, 이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문제와 최종적으로 조우한다. 왜냐하면 뇌 과학의 적용이 인간 조건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고, 호르몬 분배를 장악하여 인간의 감정과 기분을 통제, 조절하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될까? 과연 인간 마음 깊숙이에는 변하지 않는 정신의 숭고한 무엇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지배받는 것이 확실한가?

    그 밖에도 뇌 과학과 윤리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산적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뇌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발전이 그동안 전통적으로 간주되었던 인간의 이성, 감성, 자유의지 등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발생할 사회적, 윤리적, 철학적 딜레마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그것인데, 미국 내에서 뇌 과학과 윤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를 크게 두 분야로 나누는 것 같다.

   뇌 과학과 윤리를 다루는 개론적인 미국 책들을 읽을 때 두 가지 용어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ethics of neuroscience이고 다른 하나는 neuroscience of ethics이다. 전자는 ‘뇌과학의 윤리학’이고, 후자는 ‘윤리학의 뇌과학’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데 굳이 분류하자면, ‘뇌과학의 윤리학’은 뇌과학적 지식을 인간에게 적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절차의 문제들에 관심한다. 따라서 뇌 과학 자체의 윤리적 수행의 문제, 뇌 과학 연구자들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다룬다. 반면, ‘윤리학의 뇌과학’은 전통윤리학에서 다루어 왔던 윤리적 이슈, 예를 들어 자유의지, 선의지, 도덕성 등이 뇌과학의 등장으로 어떻게 다시 규정되는지? 에 대한 연구다. 즉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새로운 뇌 과학적 정의 혹은 버전이랄까. 윤리학 교과서를 뜯어서 다시 써야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뇌 과학자들을 윤리학자들에게 넌지시 농을 건다.

    미국 학계에서는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뇌 과학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학제간 접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뇌 과학이 지니는 이런 저런 염려 때문에 뇌 과학에 대한 통제를 해야 한다는 기독교 우파진영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고, 뇌 과학의 발전으로 예상되는 우리 삶의 변화된 모습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가십성 기사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양식있는 학자들은 차분히 여러 각도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성찰하면서 천천히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Post Human : 다시, 인간을 묻다


    결국, 뇌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 전망과 희망의 최종 종착점은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으로 귀환한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인간을 정의해야 할까? 뇌 과학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엄격히 말하면‘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로 바꿔써야 맞다. 뇌 과학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뇌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뇌 활동의 산물이라고만 국한 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제기에 맞서 뇌 과학자들은 ‘육화된 마음이론(emboded mind theory)’과 ‘확장된 마음이론 (extended mind theory)’을 주장하기도 한다. 전자는 인간의 마음이 온몸을 통해 형성된다는 이론이고, 후자는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이 뇌와 몸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우주 전체가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윤리적 문제는 또 다른 양상에서 전개된다. 외부와 맺는 관계의 양상, 관계의 법칙으로 확대된다는 말이다. 즉 나와 다른 타자와의 접속과 교감의 능력이 마음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또 한 가지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뇌 과학에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언젠가는 공상과학 영화 <블레이드러너>에서처럼 기억을 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으로 딸을 잃은 부모에게서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기억을 지우고, ‘딸은 성장하여 멋있는 남자를 만나 미국으로 유학갔고 지금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 라는 기억을 새로 심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사위에 대한 설명, 미국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자료, 딸의 연애과정, 결혼식 풍경, 공항에서의 이별 등 지금 살아 미국에 있는 그 딸에 대한 수많은 기억이 함께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이란 단편적인 것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은유와 환유의 고리와 연쇄를 따라 통합적으로 구성되는 사건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의 총합이 마음을 직조하고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과학에서 말하는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가능하여 실제로 누군가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쓰라리고 고통스런 과거, 혹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사건들의 기억을 지워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만약 이런 기술이 완성된다면 사람들은 괴로움을 잊고 평생 평안한 기분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아픔과 괴로움을 모르는 세상, 그런 세상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없는 세상일 것이고 아픔에 대한 연민도 소용없는 세상일텐데,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게 되는 그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그들은 이제 공적인 가치를 상상하지 않으면서 정신과 양심의 가위눌림에도 반응하지 않는 쿨한 인간들이다. 그 어떤 충격과 놀라움이 밀려와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간혹 쨉을 날리면서 자기만을 보호할뿐이다. 그들은 이제는 반성과 실천의 자 글이 다소 비관적인 관점으로 흐른 것 같은데,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뇌 과학이 지니는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 뇌 과학의 발달은 전통적 도그마에 갇혀있었던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다시‘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정직하게 대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미래의 인간은 어떻게 자리매김 될까? 솔직히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지만, 우리는 이 불쾌와 낯설움을 뱀과 같이 지혜롭게 긴 호흡으로 건너가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뇌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등장하는 Post Human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았다. 인간種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도모되는 Post Human 시대에 인간 마음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종교 또한 Post Religion 의 단계로 진입하였다고 한다면 너무 불손한 발언일까?

    문득 지금 이 순간 그동안 스쳐지나갔던 숱한‘Post-’담론들이 떠오른다. Post Modernism, Post Structualism, Post Marxism, Post colonialism, Post Feminism, Post Human, Post Religion 까지... 왜, 이리도 많은 Post 담론이 그동안 존재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Post 담론에 깔려 있는 정서는 불만과 불안, 그리고 위기의식이 아닐까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에 대한 위기의식이고, 포스트 맑시즘은 정통 맑스즘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나왔다. 탈구조주의 역시 구조주의가 담지 못하는 의미의 결핍 혹은 균열에 주목한다. Post Human 담론도 테크놀러지의 발달로 인해 새롭게 창조되는 인간種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으로부터 나왔고, 지금부터 다룰 Post Religion 역시 인간 삶의 조건이 바뀌는 격동속에서 인간의 믿음을 다시 응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위기라 부를 수 있겠다.


Post Religion이란?


    하지만 돌이켜보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종교는 현실에서 위기의 종교였고, 그래서 어느 시대건 종교는 항상 위기의 한복판에 자리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예수의 자리가 공백으로 남겨진 이후 역사적 그리스도교는 항상 위기의 연속이었고, 교회는 항상 위기의 공동체였다.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중세 교회 역시 표면적으로는 강한 도그마가 세상을 짓누르고 있었겠지만서도 그 수면 아래에서는 변혁에 대한 꿈과 상상을 욕망하면서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500년 전에 발생했던 종교개혁은 여러 가지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있겠지만 어쨌든 중세천년의 교회전통에 대한 반동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카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엄청난 위기의 현상학이었다. 고중세가 지녔던 온갖 신화와 미신과 주술에서부터 탈출한 근대는 또한 종교적으로 볼 때 얼마나 위기의 시대였나? 막스 베버는 이런 근대를‘주술과 신화로부터 벗어난 시대’라 평했을 정도다. 뮈토스에서 로고스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종교는 이신론에 입각한 자연종교의 경향으로 흘렀고, 유럽의 사회가 사회계약설에 입각해 급격하게 시민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종교는 시민종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종교적 권위와 신적인 주술로부터 탈피한 근대는 어쩌면 역사상에서 종교적 파국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새로운 유사종교의 등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물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시스템이다. 즉 사물이 지녔던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시장성으로만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 역시 그렇게 효용성의 원칙과 교환성의 원칙에 따라 서열화 되었다. 자본주의의 도래 전까지 인간을 지배했던 양식들, 예를 들어 우리의 전통, 관습, 역사, 윤리, 명예, 사랑, 대의, 양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까지도 자본주의는 화폐의 양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자본 특유의 마력 앞에서 각각이 지녔던 개별적 가치들은 화폐의 양에 따라 서열화 된 것이다. 모든 질적인 차이를 냉소하고 화폐의 양으로 등가시켜 버리는 자본주의 정신은 기존의 세상 법칙과 질서를 새롭게 바라보는 종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렇듯 매 시대마다 Post Religion을 둘러싼 논의는 존재했었고, 이는 당대의 종교 위기상황, 혹은 위기의 종교에 대한 대항 혹은 대응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Post Religion 논의가 지금 막 등장한 Hot하고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종교생활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현재까지, 종교의 위기가 운운되는 당대의 삶과 질서 가운데 늘 가시처럼 존재했던 것이 Post Religion 논의였고, 당대가 지녔던 종교적 위기를 전제하면서 그 위기에 대한 답변과 대안을 상상하고 제안하고자 했던 것이 Post Religion 담론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자본에 대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된 상황속에서, 21세기 Post Human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세계속에서 종교란 무엇인가?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온갖 기괴한 내공들이 인간정신의 흐름과 마음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조작과 변형이 가능해진 세상속에서 인류는 현재 인간種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에 대한 커밍아웃(Coming Out)


    얼핏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21세기 믿음에 대한 물음은 이미 전 시대에 한 차례 홍역을 치룬바 있다. 니체가‘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던 충격적인 대목에서 우리는 이미 종교적 파국을 경험하였다. 21세기 믿음에 대한 문제로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잠시‘신의 죽음’이 선언되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보자. 흔히 정신분석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 대타자 아버지는 기존의 질서와 법과 가치에 대한 상징으로 묘사되곤 한다. 엄마로 부터 전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아이는 생의 어느 한 지점이 지나면서부터 밀려오는 불쾌와 공포에 눈뜨게 되고 그것의 원인에 대해 알아가다가 마침내 엄마의 정부인 아버지와 대면한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상징세계(the Symbolic)와 맞닥뜨리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아이에게 있어 엄마가 당근이라면 아버지는 채찍이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육을 먹고 자라면서 정상적인 성인으로 성장하는데......이것이 정신분석학으로 풀어쓴 범박한 인류학이다.

    신은 서구인들의 집단무의식에서 아버지로 상징되는 법과 질서와 도덕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발언이 충격적인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진정 의도했던 것은‘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는 모두가 성인(成人)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신율(神律)이 작동되지 않는 허무의 상황속에서 인간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묻고 싶었다. 신이 사라진 이곳에서 어떻게 우리는 다시 사회를 조직하고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법은 무엇이고 그 법의 권위는 무엇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가. 대타자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고 대타자의 균열을 감지한 자식이,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자녀들이 어떻게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근대의 비극성이 확인되던 무렵 니체에 의해 제기된 ‘신 없는 세상 속에서의 믿음’을 둘러싼 문제제기다.

    대타자 신의 죽음이 선포되고, 틈이 없어 보이던 실재에 균열이 생기고 빗금이 그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니체 이후 사람 인간들은 비록 커밍아웃은 안했지만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것 아닐까. 대타자로서의 역할을 하던 기독교의 神 대신에 서양에서는 힌두교, 불교, 도교에서 영향을 받은 명상, 힐링, 마음수련, 요가 같은 수행프로그램들이 확산되고 있고, 종교적 대상에 대한 숭배대신 스포츠, 연예인,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더 강력한 신도들을 거느린다. 최순실 국정농단에서 드러났듯이 줄기세포 주사, 태반주사 등 온갖 첨단 의료기술을 이용한 성형과 생명연장의 욕망은 이제 우리시대 믿음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시대 믿음의 문제는 무신론자들의 믿음, 무신론자들의 신앙으로 수렴되었다는 점이다. 오직 자본의 명령만이 유일한 정언명령이 되어버린 21세기 세상속에서 그 명법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무신론자 아닌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Post Human을 꿈꾸는 우리는 유물론자라고 해야 맞지 않나. 이 보다 더 어떻게 무신론자일 수 있겠고, 이보다 더 어떻게 유물론자일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은 날카롭다.

   지젝은“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 이라고 말하면서 무신론자의 믿음을 논한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패턴을 “믿음 없는 신앙(Faith Wihtout Belief)”이라 정의한다. 지젝의 이러한 발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다.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들을 보라. 수백 수천억원대의 교회당을 지으며 신앙을 물적인 양으로 환산하여 드러내 보이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유물론자들 아닐까. 오히려 신의 존재를 믿지않은 유물론자들이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신학적 논의들을 신학자들보다 더 밀도있게 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유물론자들이 세상에는 물질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무신론자들의 믿음은 무엇일까?


발터 벤야민, '유물론자의 신학'을 낳다.


    현대 좌파 철학자들 가운데 신학적 상상력으로부터 혁명의 기운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다. 자크 데리다, 알랑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야곱 타베스, 슬라보예 지젝 등이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들보다 앞서서 20세기 초반에 벌써 유물론적인 신학, 혹은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언급한 섹시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발터벤야민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들의 광기로 자행된 세계대전이 창궐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벤야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공히 취급되는 메시아담론을 유물론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혁명을 위한 정치술로 제안하였다. 벤야민은 자신의 유명한 소논문 <역사철학테제>에서 신학과‘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의 결합을 동화와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난쟁이 곱추로 그려진 숨어 있는 신은 메시아 혹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빛나는 메시아의 모습, 혹은 지난 역사에서 유토피아 건설을 가열차게 주장했던 혁명전사들의 늠늠한 모습에 비하면, 난쟁이 곱추로 묘사된 숨어 있는 신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렇듯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은 기존 메시아론과는 다른 느낌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거기에는 벤야민 나름대로의 계산이 깔려있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인류는 유토피아를 주장했던 많은 이들과 만나왔다. 그들은 본인들의 종교적 확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에 빠져 자신을 불살랐던 강철과도 같은 이들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몇몇 실험들이 디스토피아로 변했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우파 유토피아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치일 것이고, 좌파 유토피아의 실패는 스탈린으로 상징되는 교조주의적인 공산주의가 아닐까 싶다. 기독교의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불러일으켰던 만행에 대해 이 자리에서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십자군전쟁, 종교개혁에 이은 각종 종교전쟁들,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과정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만행들은 모두 유토피아를 내걸고 진행된 디스토피아 역사였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 다시한번 깨닫는 것은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없는 세상’혹은 ‘도래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유토피아에는 ‘부재하나 있어야 한다’는 공리가 또한 공존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과 기대, 그리고 욕망이 없었다면 어떻게 인류가 진보를 거듭해왔겠는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서로 짝패인 셈이다.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부재하면서 존재해야만 하는 운명속에서 우리는 메시아를 어떻게 이해해야하고, 유토피아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 것 일까?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유물론자의 신학을 태동하게 만들었다.


유물론과 신학의 공명


    지난 시절에 만들어진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 혹은, 메시아의 도래를 둘러싼 믿음은 목적론적인 역사관에 영향을 받은바 적지 않다. 목적론적 역사관이 무엇인가. 제1원인과 제1목적이 있고 만물의 변화와 운동은 그들로부터 기획된 순서를 따라간다는 것 아닌가. 그 종착점이 유토피아이고, 유토피아로 견인하는 작자가 메시아이다. 최종 목표인 유토피아는 이미 정해져있고 메시아는 그런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현실 속 우리를 강제적으로 그 길로 견인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신성모독일까.

    벤야민은 일단 기존의 유토피아 이론과 메시아에 대한 믿음에 의심의 해석학을 들이댄다. 벤야민에게 있어 구원의 때는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사후적으로 구성되어“지난 세대와 현 세대 사이에 비밀스런 협약이 있다. Our coming(구원을 상징?)이 지구상에서 기대되어 진다. 우리 앞을 살았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희미한(약한) 메시아적 힘이 부여되었다. 과거는 그 힘을 요구할 수 있다.” 현재 시간을 충만케하는 시간[Jetztzeit]이다.“역사는 특정한 구조물의 대상인데, 그 구조물의 자리는 단일하고(동일하고)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Jetztzeit(the presence of the now)에 의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고대 로마는 지금의 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간주하였다.” 벤야민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이런 시간관 때문이다. 벤야민의 시간의식은 변증법적 시간관과 다르다. 본래 그것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지평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변증법적 시간관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벤야민이 “희미한 메시아적 힘”과 “현재시간[Jetztzeit]”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끔 하는 통로이겠지만, 그것은 기존의 메시아관 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는 않다. 그것을 벤야민은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로의 도약” Ibid., 261. 이라 표현하였다. 유물론자는 그런 비상을 꿈꾸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벤야민은 다시한번 논리를 비튼다. 지금까지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던 유토피아는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체스게임 판 앞에 터키풍의 의상을 입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인형이 앉아있다. 이 인형은 게임을 매번 승리로 이끈다. 좀 더 그림을 살펴보면 인형의 배후에는 게임의 명수인 난쟁이 곱추가 있고, 그 둘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벤야민은 인형을 사적 유물론으로, 체스의 명수인 곱추를 신학으로 비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신학과 사적 유물론이 제휴하면 “그 누구와도 한 판 싸움을 벌일 수 있다” 고 말이다.

    벤야민의 발언은 Post-Marxism이 걸어가야 할 바에 대한 아포리즘 같은 역할을 하였다. 혁명이 더 이상 번지지 않고 단절된 상황속에서 황망해하고 있는 맑시스트들에게 혁명이란 인간의 하부구조뿐 아니라 그동안 혁명의 요소에서 도외시 되어왔던 인간의 상부구조, 즉 정신, 신화, 무의식, 그리고 종교적 믿음으로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이런 상상은 이후에 등장하는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견인하는데 중요한 모멘템이 되었다.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굳이 메시아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부재하면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자들의 갖는 믿음에 대한 고백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점근선에 위치하는 존재일는지 모르겠다. 수학에서 목표를 향해 무수히 무한히 접근하지만 닿지 않는 상태의 운동을 점근선이라고 한다지. 유물론자들은 계속 해서 그 점근선을 그리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21세기 무신론 시대의 믿음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자본의 무한질주가 유일한 삶의 원칙이 되어버린 사회속에서 우리의 신은 맘몬이다. 조물주인 맘몬이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동원하여 인간에 대한 리빌딩에 들어갔고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류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는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시나리오다. 미래를 소재로 한 공상과학영화(혹은 서적)들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SF영화 속 장면들이 실현되고 있는 현실의 상황은 영화에서 봤던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예민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종교적 감수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을 신학적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는 존 카푸토(John D. Caputo)는 『종교에 대하여 On Religion』에서 지금 시대의 종교상황을 “Religion without Religion 종교없는 종교” 이라 표현하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화된 종교와 독단적 진리를 해체하는 가운데 새로운 실천적 차원의 진리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이 카푸토의 과제다. “...the name of God in may post-modern Itinerarium is the name of infinity questionability...나의 포스트모던 순례에서 신의 이름은 무한한 질문가능성이라는 이름이다 ... God is a how, not a what 신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이다.”-Ibid.,134- 135. Post Human 시대를 맞아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을 요청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당연히 변화된 인간상에 걸맞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상상, 즉 Post Religion에 대한 담론을 마련해야 한다. 카푸토‘Religion without religion’은 나름의 답변이라 할 수 있을텐데,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How) 현실의 삶에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런지는 또 다른 문제다.

   카푸토는 어떻게(how)와 관련하여 데리다의 ‘차연’개념을 적용하여 ‘사건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차연(differance)은 차이(differ)와 지연(defer)의 합성어다. 차연으로서의 신은 세상과 차이가 나는 신이지만, 신의 임재와 도래는 무한히 지연된다. 신은 인간의 믿음, 행위, 고백, 이성적 판단 안으로 수렴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있는 이러한 가능성들과 대립하는 불가능한 형식으로 도래한다. 신으로부터 기인하는 사건이란 신의 현재화를 드러내는 표식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재화 될 수 없는 잉여를 남기며 미끄러져 가는 무엇이다. 사건의 결과 신은 현재화 할 수 없는 절대 미래, 절대 타자의 자리로 내몰린다. 그것이 카푸토로 하여금 “Religion without Religion”을 발설하게 하였고, 그 사건의 이름을‘사랑’이라고 카푸토는 말하고 싶었던 같다. “신의 의미는 사랑의 다양한 움직임안에서 규정된다....사랑은 정의되어야 하는 의미가 아니라 행하고 만들어야할 무엇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각각의 삶의 공간과 조건과 현실속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사건 속으로 개입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런가하면 라깡의 욕망이론으로 바라본 사랑은 파괴적이다:“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불가해하게도, 나는 당신 안에 있는 당신 이상의 어떤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파괴합니다.” 이 경우 사랑은 주체의 대상을 향한 전유, 혹은 집착의 형태가 된다. 이 사랑은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옆에 있는 이웃을 살피거나 뒤쳐져 있는 타자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만족을 모르고 전방만 주시하는 리비도의 돌진 앞에서 인간은 온전한 향유의 대상에서도, 관심과 배려의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사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카푸토가 말하는 사랑에 대한 서사는 다르다. 사랑과 욕망의 변증법 안에서는 ‘당신 안에 있는 당신 이상의 어떤 것’이 운동의 동력이 되지만, 사랑과 타자의 법칙성 안에서는 오히려 ‘당신 안에 있는 상처와 결핍’이 사랑의 원칙이 된다. 전자가 자기를 채워나가는 증산의 사랑이라면, 후자는 자신을 비워가는 감산의 사랑이라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욕망이론 속 사랑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라고 선포한다면, 카푸토식 사랑은 ‘내 안에 너 있다’라고 속삭이며 그(녀)를 품는다.

    이는 마치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모자이크와 같다. 수많은 파편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듯, 수많은 이들의 꿈과 기억, 그리고 사건의 조각들이 우리의 구원으로 들어올 것이다. 구원이란 언젠가 도래하리라 믿어지는 환상 속 메시아의 단 한번의 붓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환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투쟁하던(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속에 보존되어 있던 사건들이 어떤 시점과 계기에 재생되어 사후적으로 되살아나는 그것이다. 그 날은 분명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들을 갖고 이 땅에서 투쟁하던 각각의 인민들이 지니는 서사가 특별한 계기에 우발적으로 맞아 떨어진 그 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의 거리거리들에서는 사랑의 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노라고 누군가는 기록하겠지.


에필로그


    Post Human, Post Religion 시대의 믿음이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근대이후 전개되었던 ‘신의 죽음’, 2차 세계 대전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에서 확인된 ‘신의 침묵’은 ‘신의 무능’서사로까지 번지면서 무신론은 공공연한 진리가 되어버렸고, ‘무신론자의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테마를 낳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존의 신관념에 대한 변화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종교적 믿음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상상하게 한다.

    최종적으로 카푸토의 조언에 용기를 내어 최종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무신론자의 믿음이란 대타자인 신의 음성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수동적 믿음일 수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우리를 지탱케했던 상징계의 법칙과 교리의 강제와 도그마의 환상을 버리게 한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이 일으키는 변혁의 사건들을 지지하는 사랑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자리란 모든 개별적 존재가 지니는 차이와 다양성을 자본이라는 등가의 원칙으로 서열화한 세상이고, 그 자리란 생명에 대한 존엄이 무너진 디스토피아 세상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곳은 성의 차이로 인한 혐오가, 계급의 차이로 인한 소외가, 종교의 차이로 인한 적대가 넘치는 그곳이고, 거기는 또한 새로운 인간種의 탄생으로 인한 파국 예상되는 이곳 지구다. 그 파국의 한가운데서 다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무신론자의 믿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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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는 가라![각주:1]

: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 소고(小考)




이상철
(본지 편집인 / 한백교회 담임목사)

 


Intro: 메시아의 귀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메시아주의는 미래의 어느 막연한 시점에서 현실의 절망적 공간안으로 귀환하는 한 슈퍼스타를 기다리는 열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아적 대망은 현실의 고통과 환난을 견디게 하는 종교적 위안이자 미래를 대망하는 종교적 비젼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녀)의 재림으로 인해 체제의 압제로부터 비롯되는 이 땅에서의 고통과 억울함, 분노와 절망은 일거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 땅의 민중들이여,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 이제 곧 그 분이 오신다!” 이것이 메시아주의를 바라보는 범박한 정의이자 주술이라고 한다면 불손한 발언일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역사에서 전개되었던 메시아주의의 현실은 배제와 차별, 적대와 응징의 매카니즘을 양산하면서 비극적 메시아 현상학으로 나타났다. 현실의 역사가운데 전개되었던 메시아적인 열망과 환상은 그것 이외의 것들을 끊임없이 타자화시키는 배제의 매카니즘을 낳았고 폭력을 정당화시켰다. 멀게는 중세 십자군 원정과 근세에 벌어졌던 서구 열강들의 제3세계 침탈 과정에서부터 얼마 전에 있었던 미국의 이라크 전쟁으로 대변되는 ‘테러와의 전쟁’까지, 시대와 이유를 떠나서 그 이면에는 서구열강의 음모를 메시아적 환상으로 등치시키고 그것들 이외의 것은 모두 악으로 규정하는 배제의 매카니즘이 깔려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 안에 깃든 광신성을 감지했던 데리다는 ‘the meesianic without messianism’이라는 다소 과한 표현을 동원하면서 전통적 메시아주의를 향한 적대를 선언한 바 있다.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메시아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서구 메시아론의 지형에서 보면 그 위상이 꽤나 독특하다. 역사적 예수가 성취했던 유일회적 그리스도 사건을 예수라는 어느 한 슈퍼스타의 일인 무용담으로 가두지 않고, 예수와 더불어 함께 한 민중(오클로스)까지를 포함한 사건으로 취급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당대의 화석화된 메시아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까지 민중의 함성과 저항을 통해 이어지는 살아있는 메시아 사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이유로 민중신학의 메시아론은 주체의 역동과 시대적 사명이 강조되었던 시기에 진보기독교 진영은 물론, 인문-사회과학에 몸담고 있었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당대를 해석하는 중요한 해석학적 창구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광풍이 몰아친 이후 주체의 죽음이 선언되고, 시대의 요구와 당대의 원칙이 대의와 명분에서 실리와 자본으로 바뀌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민중신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진보이론들은 변두리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한 이후 지금까지 자본의 무한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2001년 9.11 테러를 통해서, 2008년 미국을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거치면서 문제점들을 하나씩 노출하기 시작한다. 신자유주의가 갖는 모순들, 즉 체제는 숨기려 하지만 감출 수 없는 틈과 균열이 더 이상 은폐가 안 되고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움츠려 있었던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변혁에 대한 꿈을 다시한번 상상하게 하고 감행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맑스의 세례를 받은 진보적 좌파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교 논쟁이 근래에 핫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로 따지면 빨갱이들이 그리스도교로부터 변혁을 위한 상상을 끌어오고 있는 셈인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논의 주제가 메시아라는 점이다. 왜, 무엇 때문에 다시 메시아는 소환되는가? 이 글은 전 시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현대철학자들의 메시아 논의를 따라가면서 그것이 어떻게 신학적 상상력과 조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수고(手鼓)이다.  


서로 다른 메시아: 유대교 메시아 Vs. 개신교 메시아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유대교 메시아론과 개신교의 메시아론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이는 이후 전개되는 유대계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개신교 메시아주의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작업이다.  

    개신교의 메시아주의에는 역사적 종말과 인간의 믿음사이에 일정한 함수 관계가 있지만, 유대교 메시아주의에는 개신교의 그것과는 다르게 세상의 법칙과 하늘의 법칙, 세속적 질서와 신적 질서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구원이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원리도 아니고, 인간 주체의 변혁을 향한 의지와 노력과도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듯 초월적 질서의 도래가 현실의 세계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대 메시아주의는 개신교 메시아 주의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개신교가 구원을 믿음에 대한 신의 응답으로 이해한다면, 유대교 사상에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구원은 전적 초월의 사건이 되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유대 메시아론에서 메시아는 그(녀)의 도래를 염원하는 인간의 바람, 노력, 분투와 상관없이 스스로 오는 자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유대교 사상가인 발터벤야민과 자크데리다의 메시아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들의 조상, 발터 벤야민


    현대 좌파 철학자들 가운데 신학적 상상력으로부터 혁명의 기운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자크 데리다, 알랑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야곱 타베스, 슬라보예 지젝 등이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들보다 앞서서 20세기 초반에 벌써 유물론적인 신학, 혹은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언급한 섹시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들의 광기로 자행된 세계대전이 창궐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벤야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공히 취급되는 메시아담론을 유물론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혁명을 위한 정치술로 제안하였다. 벤야민은 개신교 메시아주의에서 말하는 강한 메시아가 아니라 약한 메시아를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기념비적 논문 <역사철학테제>에 등장하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과 연관이 있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이지리라는 기대와 지평 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벤야민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인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 끔하는 통로로 작용하지만 기존의 메시아론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 않다.


<역사철학테제>가 전하는 새로운 메시아

 

    벤야민은 자신의 유명한 소논문 <역사철학테제>에서 신학과‘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의 결합을 동화와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체스게임 판 앞에 터키풍의 의상을 입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인형이 앉아있다. 이 인형은 게임을 매번 승리로 이끈다. 좀 더 그림을 살펴보면 인형의 배후에는 게임의 명수인 난쟁이 곱추가 있고, 그 둘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벤야민은 인형을 사적 유물론으로, 체스의 명수인 곱추를 신학으로 비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신학과 사적 유물론이 제휴하면 “그 누구와도 한 판 싸움을 벌일 수 있다”[각주:2]고 말이다.   

    난쟁이 곱추로 그려진 숨어 있는 신은 메시아 혹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빛나는 메시아의 모습, 혹은 지난 역사에서 유토피아 건설을 가열차게 주장했던 혁명전사들의 늠늠한 모습에 비하면, 난쟁이 곱추로 묘사된 숨어 있는 신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렇듯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은 기존 메시아론과는 다른 느낌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한다. 전통적 유대사상에서는 현실의 압제를 풀어줄 슈퍼스타의 등장을 대망해왔는데 그(녀)에 대한 기표가 바로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누구이고, 그는 언제 등장하며, 메시아가 등장한 후에 벌어지는 사건들,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동안 전개되어왔던 주된 메시아론의 토픽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의 핵심은 기존의 메시아론의 시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벤야민에게 있어 구원의 때는 전통적인 메시아관과는 다르게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사후적으로 구성되어[각주:3] 현재 시간을 충만케하는 시간[Jetztzeit]이다.[각주:4] 벤야민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이런 시간관 때문이다.앞서도 언급했듯이 벤야민의 시간의식은 전통적인 변증법과 다르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지평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변증법적 시간관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벤야민이 “희미한 메시아적 힘”과 “현재시간[Jetztzeit]”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젼을 보게끔 하는 통로이겠지만, 그것은 기존의 메시아관 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는 않다. 그것을 벤야민은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로의 도약”[각주:5]이라 표현하였다.  

    어쩌면 메시아적 현실은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환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투쟁하던(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속에서 재생되어 사후적으로 도래하는 것 아닐까? 벤야민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런지? 이는 마치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모자이크와 같다. 수많은 조각들이 이루어져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듯, 수많은 이들의 꿈과 기억의 퍼즐로 이루어진 것이 메시아적 사건이다. 어느 천재적 화가의 단 한번의 붓질로 미래의 언젠가에 완성되는 그림이 메시아적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파편들이 모이고 자리를 잡고 쌓여서 희미했던 메시아적 힘은 마침내 사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런 뉘앙스가 벤야민의 메시아론에 깃들어 있는 함의다.  


자크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


    자크 데리다는 벤야민의 메시아를 둘러싼 문제의식으로부터 본인 사상의 후기를 대표하는 명제인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각주:6] 을 끌어온다. 우리가 흔히 메시아론이라고 할 때 그것은“현실 세계와의 혁명적 결렬 내지 극적 파국의 과정을 겪은 후에 도래하는(to-come) 상태 내지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 the messianic’은 기존의 ‘메시아론을 배제한다(without messianism)’는 점에서 이채롭다.  

    우선,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은 벤야민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관부터가 종전 메시아론과 다르다. 데리다는 햄릿에 나오는 대사을 인용하면서, 메시아적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질서와‘시간이 탈구될 것(time is out of the joint)’이라고 예언하였다.[각주:7] 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변증법적 시간관과 더 나아가 변증법적 논리에 입각한 역사발전의 원리를 부정하는 입장을 데리다가 취했기 때문이다.  

    본래 변증법적 시간관은 과거(예: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예: 새하늘 새땅)를 향해 중단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 속에서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낙관적 세계관이다. 그런데 데리다가 “시간은 탈구될 것”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데리다는 ‘메시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햄릿의 대사를 인용했던 것일까?  

    데리다가 ‘메시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시간이 탈구’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메시아주의로 대표되는 신학적 도그마와 교리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피안의 세계에 대한 맹목적 황홀경도 아니다.‘메시아적인 것’이란 나를 한곳에 정주하지 않게 하고 나를 체제에 순응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인 것’이고,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 교리와 도그마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메시아적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적인 것’은 역사의 계기에서 스스로를 산종하다가 메시아적 계기를 불어넣고 다시 체계에 갇히지 않고 사라지는 역사의 새로움을 겨냥한다. 전통적인 강한 메시아론이 기실 헤겔적인 변증법의 포로에 불과하다면, 데리다에게서 ‘메시아적인 것’이란 변증법을 넘어서는 진공의 상태 혹은 그 가장자리에서 변증법을 조롱하다 뒤돌아서 예측 불가능성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기표가 차연을 통해서 영원히 지연되는 의미의 껍데기만을 지속적으로 산출해내는 것처럼, 데리다에게 있어 메시아란 하나의 기표일뿐이고, 이 지점에서 일어난 ‘메시아적인 것’역시 단순히 껍데기로서 이후의 전혀 새로운 산종에 자신을 양도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꽉 찬 중심을 지향하는 강한 메시아주의(messianism)와는 다른 개념이다. 메시아주의(messianism)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확신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던가? 이런 이유로 데리다는‘the messianic’을 그 누구도 정착할 수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적인 것’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둔 이유는 보다 더 정치적 속셈이 있다. 텅 빈 기표로서 ‘메시아적인 것’이 현재의 지배적인 시스템속에서 틈과 균열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고, 그 틈과 균열을 통해 도래하는 사건과 희망을 예감하고 전망하자는 취지다. 이 대목에서 ‘메시아적인 것’은 위험한 정치적, 윤리적 상상으로 전환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메시아적인 것'의 정치학, 혹은 윤리학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입장과 생각이 다른 타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억압된 욕망을 건강하게 승화시키는 일은 우리시대 중요한 과제다. 특별히 차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간격을 유지한 채 나이스하게 서로의 다름을 넉넉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이 광명한 글로벌하고도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명법이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법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왜곡하고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식자들에 의해 의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별히 맑스주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이런 비판은 드세었는데, 그 중에서도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수평적 다양성이 혁명에 이르는 수직적 적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 지적하였다. 한마디로 사이비 저항을 멈추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의 유령들> 출판이후에 이런 오해들이 다소나마 풀리기는 했지만, 데리다를 향한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는 다소 곡해가 있다. 데리다의 차연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차이 자체에는 방점이 없다. 차연은 엄격히 말해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은 불확정성, 비대칭성, 비등가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데리다는 후에 ‘차연’을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라는 용어로 정치-신학화 하였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메시아주의에 대한 대항담론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되고, 그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이 세계속에서 ‘메시아주의’가 아닌 ‘메시아적인 것’을 유포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일까?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이 견고한 텍스트에 차이를 발생시켜 균열을 내고, 주름을 만들고, 틈을 내고, 그래서 이 시스템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메시아적인 것’ 안에 담긴 정치적 음모가 아닐까? 그리하여 체제로 하여금 불순세력에 의한 공작이 이 사회속 어딘가에서 획책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고, 뭔가 상스럽지 못한 기운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이고, 거리에선‘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주문이 환청이 되어 들리면서, 이 사회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유포시키는 것! 그것이 데리다의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 안에 깃들어있는 정치적 음모이고 윤리적 강령이라 한다면?  

   그러므로,‘메시아적인 것’은 신에 대한 경외를 암시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고백과 성찰에서 기인한 말도 아니다. 오히려 신은 텅 빈 기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초월적 메시아가 스스로를 비워 이 땅으로 하강하는 힘이다. 그런 면에서 신은 충만과 충족의 신이라기보다는 결핍과 잉여로서의 신이다. 텅 비어 있는 신 자체를 세계에 집어넣음으로써, 구멍 자체인 신을 기입함으로 세계는, 그리고 상징적 질서인 세계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그것이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것’이 노리는 계략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혁명은 다시 사유되고 시작된다.  


ⓒ 웹진 <제3시대>



  1. 본고는 에큐메니안에 기고한 기사 '메시아는 가라!'의 원고입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87 [본문으로]
  2.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253. [본문으로]
  3. 벤야민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 세대와 현 세대 사이에 비밀스런 협약이 있다. Our coming(구원을 상징?)이 지구상에서 기대되어 진다. 우리 앞을 살았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희미한(약한) 메시아적 힘이 부여되었다. 과거는 그 힘을 요구할 수 있다.”-Ibid., 254. [본문으로]
  4. “역사는 특정한 구조물의 대상인데, 그 구조물의 자리는 단일하고(동일하고) 비어있는 시간이 아니라, Jetztzeit(the presence of the now)에 의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고대 로마는 지금의 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 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간주하였다.”-Ibid., 261. [본문으로]
  5. Ibid., 261. [본문으로]
  6. “the messianic without messianism”-Jacques Derrida, Acts of Religion. Edited by Anidjar (N.Y:Routledge, 2002), 56. [본문으로]
  7.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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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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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를 쓰는 수도사
    2016.08.24 20: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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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미있고 재미있는 설명과 해석입니다. 발터 벤야빈과 자크 데리다의 차이는 시대적 배경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가 사회적 체제로서 자리잡은 유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신, 하나님은 진작부터 공기같은 존재로 여겨졌지요. 때문에 저는 메시아론을 검토함에 있어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개신교의 차이라고만 규정하기에 뭔가 부족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그런 차이는 구태여 구분하자면 묵시론과 종말론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뭐 어쨌거나 벤야민이나 데리다나 인격적인 또는 외부에서 진입하는 메시아론에는 반대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요, 오늘날 금융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개신교와 같이 걷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는지요? 이른바 메시아닉 유태인들 messianic jews 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적어도 미국에서 이를테면 성서고고학 등의 분야에서 개신교와 공조해왔다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벤야민이나 데리다가 이런 현실을 직시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메시아적 틈새가 과연 어떤 동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개신교의 메시아론이 특별하다고 보십니까? 님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의 메시아는 정치적 함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집단적 기대치라고 말할 수 있고요, 개신교의 메시아론은 도리어 정치적 개념을 탈각시킨 그럼으로써 현실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치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집단과 개인 양자를 모두 포괄합니다. 예수가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를 거부한 것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메시아는 현존하는 모든 인간의 질서 즉 지배를 추구하는 체제에 반하는 하나님의 질서를 이 지구에 항존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그게 완성되는 시점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파국이지요. 그때까지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되고, 인간의 행위도 계속되겠지요.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는 엔트로피 법칙을 따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가 복잡해지겠지요.

    메시아에 대한 전제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최종국에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 전체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는 메시아의 나라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오는 그 나라는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이 틀린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론이 틀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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