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쉬운 말 앞에서 머뭇거리다


김강기명
(연구집단 CAIROS 연구원)

 
가끔씩 노약자석 앞에 선 임산부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우리 때는 밭에서 일하다가 애 낳고 다시 일하고 그랬어."같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 자리를 양보하면서도 농담조로 저런 이야기를 보태기도 한다. 아마 그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 그렇게 했어도 살아남은 이들에게 말이다. 고된 시집살이를 계속 하면서 애까지 나아 길렀는데도 살아남은 사람들, 밭을 매다가 애를 낳고 다시 일을 했어도 살아남았던 사람들만이,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만이 ''을 할 수 있기에 그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거지만 이 이야기 뒤에는 수많은 은폐된 죽음들이 있다. "우리 때"의 영아사망율, 산모사망율이란 건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것 아니었나.

그러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늘날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주검으로 돌아갔다. 땅은 그들을 파묻어 버렸다. 벤야민이 이야기한 '신적 폭력'이 우리 앞에 스펙타클로 펼쳐졌다. 피 흘릴 틈도 없이 그들은 땅 속에, 뻘과 건축자재 속에 묻혀버렸다.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번 지진은 우상숭배에 대한 신의 심판이다"라던가, "하느님이 사랑이신데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던가 하는 말을 할 수 없다. '의미'는 산 자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전자의 이야기가 분노를 자아낸다면, 후자는 꺼림칙함을 자아낸다. 그래,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하자. 그런데 당신은 그 동안 그 하느님을 인간의 생사화복과 자연만물을 주관하는 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 하느님의 "주관" 아래에서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지진으로 죽은 자가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당신의 말에 항의할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다."가 되었던,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가 되었든,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발언이며, 신학이다. 어쩌면 모든 구원론이란 구원받은 자의 편에서, 살아남은 자의 편에서만 구성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살아남았기에 - 그러나 누군가는 죽었기에 - '살아남음'을 해명해야 했다. "나를 살려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에 집중한 자는 사랑의 신학과 구원론을, "하지만 저들은 죽었군요."에 집중한 자는 심판과 징계의 구원론을 각각 열심히 구성했다. 그것을 통해 신은 높여지고, 우리도 신과 함께 높여진다. 그들은 구원론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권리를 누린다. "우는 자와 함께 웁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예수님입니다."라는 사랑의 윤리조차도 살아남은 자들의 권리다.

우리가 죽은 자들의 편에서 구원론을, 혹은 신학을 전개할 수는 있는 걸까?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신의 창조물이 거대한 죽음으로 엄습해올 때 그것은 무엇인가. 그 신은 어떤 신인가?(물론 이 질문은 하느님이 생사화복과 자연만물을 주관한다는 고백을 하는 이들에게 해당할 것이다. 애초에 특수한 개인성이나 개별적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모든 것이 인연 속에서 빚어갈 뿐이라 사유하는 불교도에게는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불교가 이러한 죽음 앞에서 섣부른 악담이나 위로가 아닌 '빛나는 초연함'을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한 사유라고 생각한다.) 지진이 신의 심판이나 악마의 놀음이 아니라면, 그 신은 무엇보다도 '무의미'. 지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도래할 뿐인 것으로서 도래했다. 그렇게 절대적인 무의미로서, 해석되지 않고, 해석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은 임재한다. 죽은 자도 말이 없고, 죽이는 자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 산 자들의 시끄러운 그 구원론들, 그 신학은 바로 이 죽은 자들의 '무의미성의 신학' 위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삶이란 죽음 앞에서 삶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자랑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그림자로서 절대적인 무의미로서의 그 ''이 따라다니고 있지 않은가. "I am who I am"(3:13) 하느님이 그런 존재라면 그 신은 우리의 신학이 묘사하는 신의 모든 성품 - 심판하는 하느님이라던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같은 - 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무의미'한 존재로서의 하느님이 모든 '의미'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자들로 하여금 살게 하는 위로이며,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다. "하느님이 사랑이다."라는 말이 그런 위로와 도움을 낳게 한다면 기꺼이 우리는 그 말을 빈번하게, 확신에 차서 외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계속 살기 위해서라도, 죽은 자들의 그 '죽음'을 해명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이 무의미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고, 우리의 의미들은 무의미에 빚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빚을 모두 죽음과 무의미가 탕감해 준 것이다. 죽은 자가 빚을 받을 수는 없으므로. 무의미한 신이 우리에게 의미를 요구할 수 없으므로. 그러므로 이 죽음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신앙과 종교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자유인이 된 우리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다만 '탕감받은 자'로서 죽음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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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우
    2011.03.24 21: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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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회귀인가 귀환인가?
- 임필성의 <헨젤과 그레텔>에 관한 신학적 읽기

정혁현
(한살림교회 목사 | 본 연구소 운영위원)

한 편의 영화가 시대의 예표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지난 17대 대선이 지난 며칠 후 개봉되었던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영화를 검토하면서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해볼 수 있다. 이 대선을 통해 온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여기저기서 87년 이전의 군사독재상황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이 재연되고 있다. 재벌 등 가진 자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한계상황에 몰리고 있으며, 인사에서 입법에 이르기까지 공영방송과 인터넷의 비판 기능을 제거하려는 집요한 언론 통제 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의 거의 모든 정책을 토론과 합의 과정을 최소화 한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일관된 통치 태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폭력적인 국가 기구, 특히 경찰이 그 폭력적 속성을 감추지 못하고 전면에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거꾸로 흘러 8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고 탄식한다. 이러한 탄식에는 어떤 역사철학이 있다. 시간은 미래로 흐를 때 자연스러우며, 이러한 흐름 자체가 진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관에서는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만사형통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임필성 감독의 <헨젤과 그레텔>은 전혀 다른 시간 의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 역시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연관 관계를 사유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결코 흘러가버릴 수 없는 과거가 반복적으로 오늘로 ‘귀환’한다.

영화의 원작인 그림형제의 동화는 전 세계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작품이지만, 사실 상당히 어둡고 엽기적이다.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깊은 숲 속에 유기된다. 뜻밖에도 숲 속에서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하여 버려진 슬픔을 잊는가 싶지만 과자의 집은 식량을 구하는 마녀의 미끼였다. 아이들은 마녀와 먹느냐 먹히느냐는 처절한 생존의 쟁투를 벌여야 한다. 살벌하고 가혹한 세계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 동화를 읽어주며 아이들이 과자의 집이라는 환상에 빠질 것을 예상하며 흐뭇해 하지만, 아이들의 내면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임필성 감독은 원작의 기괴한 상상력에 기대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낸다. 영화 <헨젤과 그레텔>의 시공간적 배경은 오늘의 한국이다. 은수(천정명)는 깊은 산에서 차를 몰다가 부주의로 사고를 당한다. 골짜기에 떨어져 정신을 잃었던 그가 깨어났을 때. 그 앞에 동화 속의 소녀 같은 아이 영희(심은경)가 서있다. 은수는 몸도 불편하고 밤도 깊어 우선 아이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져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즐거운 아이들의 집’. 간판 그대로 집은 꿈과 환상의 공간처럼 지어졌다. 그러나 이 과도하게 환상적인 외양은 그 공간이 겪고 있는 비극을 감추는 가면일 뿐이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모범적인 엄마 아빠와 세 아이가 사는 집. 너무나 완벽해서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의심스러운 이 공간은 은수가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존재했던 세계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분명한 것은 두 세계가 공간물리학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이튿날 아침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의 다음날에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즐거운 아이들의 집’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세계의 공간은 중심에서 멀어지는 방식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중심으로, 다시 말해 공간의 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교과서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아이들의 부모는 친부모가 아니었다. 물론 양부모도 아니었다. 그들 역시 은수처럼 자신들도 모르게 이곳으로 끌려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곳으로 끌려 들어온 어른들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홀려 들어와 아이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사연이 좀 상투적이기는 하다. ‘즐거운 아이들의 집’은 원래 고아원이었다. 부모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이 기거하는 곳. 그만큼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했으나 원장 변집사(박희순)는 불쌍한 아이들을 이용해 치부를 하는 더러운 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갖가지 폭력을 행사하면서 변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악한 악마였다. 악마에 맞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일까? 함께 생활하던 아이들이 원장의 폭력과 착취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던 세 아이에게 파괴적인 능력이 생긴다. 마침내 원장을 죽인 아이들은 ‘즐거운 아이들의 집’을 그들이 꿈꾸던 동화의 세계와 같은 세상으로 꾸미고는 이 세계와 단절된 공간으로 폐쇄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아이들은 공간과 함께 응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죽었으나 죽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것이 모든 귀신들의 운명이다. 귀신들은 단순한 혼령이 아니다. 귀신들은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육체적인 존재,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인 존재들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죽었지만 상징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삶, 지젝은 이러한 상태의 존재를 ‘산 죽음’(living dead)이라고 지칭한다. 그들은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서 존재하면서 두 세계를 매개한다. 상징계가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구성된 세계라고 한다면, 실재계는 언어의 불완전성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인간의 언어로 포섭하지 못한 세계, 혹은 인간의 의미체계가 흘리거나 잊어버리거나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세계가 그것이다. 구태여 돌아갈 것 없이 노골적이며 분명한 예를 들어보자. 지난 1월 20일의 ‘용산참사’는 이명박 정부가 구축한 상징계, 즉 “경제 선진화를 통한 고품격 일류국가”의 실패와 불가능성이 뚜렷이 가시화된 ‘실재의 침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 자체가 하나의 실재일 수 있다. 1987년의 민주화 투쟁이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 민주주의에 돌이킬 수 없는 성과를 낳았다는 지난 20여 년간의 진보담화를 하나의 상징계로 본다면 말이다. 실재의 침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사회적인 차원에서든 언제나 섬뜩하고 끔찍한 사건이다. 그것은 언제나 개인이나 사회가 터하고 있는 상징체계 자체를 붕괴시키면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실재는 우리를 순식간에 암흑, 무의미, 혼돈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실재는 왜 나타나는 것일까? 과거는 왜 귀환하는 것이며, 영화 속의 아이들은 왜 다른 공간의 존재들을 자신들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아이들 역시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원장을 죽이고 폭력을 중지시켰지만 그들이 끊어버린 폭력의 흐름을 자신들이 소망했던 새로운 흐름으로 전개시키지 못하고, 중지 그 자체에서 멈춘 채 환상의 세계 속으로 스스로를 폐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폭력을 중지시켰던 아이들의 능력은 창조적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끊었던 원장의 폭력을 스스로 대행하는 반복강박의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소망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가족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아이들이 자신들을 폐쇄시킨 비현실과 소망의 구체적인 무대여야 할 구체적인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수 없는 심연으로 인해 실패로 귀결될 뿐이다.

우리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80년대가 귀환하는 이유를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의 이행기적 성찰성을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김소연의 연구1)는 핵심을 찌른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영화의 시대성을 회복한 80년대적 비판적 성찰성과 미학적 실험성의 성과이자 90년대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끈 동력으로 평가받던 이 영화들을 단호하게 “이중의 실패”로 규정한다. “일차적으로는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들이 80년대성과 90년대성의 이접을 거쳐 결국은 80년대성의 폐기 혹은 순화로 나아감으로써, 영구히 반복되어야 할 생생한 80년대적인 혁명성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80년대의 히스테리적 혁명성 자체도 구조적으로 대타자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내속적인 위반이나 주변적 전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즉 아직은 온전한 여성적 윤리의 추구에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는 점이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의 일차적 실패에 가중치를 부여한다.”2)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에서 예표적으로 드러난 1990년대의 정신성은 80년대로부터의 도피, 나아가 80년대의 성과를 즐기기 위해 ‘미완을 완료로 규정하기’였다고 할 수 있다. 패배자의 내러티브를 성급하게 승자의 내러티브로 변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90년대는 <헨젤과 그레텔>의 아이들처럼 자신을 87년에 폐쇄시키고 환상 속에 유토피아를 건설해 안주해버린 시대가 아닐까? 그리하여 80년대성은 죽었으나 죽지 못하고 산죽음의 상태에서 끊임없이 오늘날의 세계 속으로 그 끔찍한 얼굴을 시도 때도 없이 들이미는 것이다. ‘완료’ 상태로 방부처리된 80년대가 박물관 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를 탈출하여 돌아다님으로써 ‘민주화, 선진화’ 담화의 실패와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섬세하게 영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은수는 어떻게 하다가 실재와 대면한 것일까? 물론 자동차 사고 때문이다. 그리고 사고는 운전 중 통화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자 친구 혜영과 통화하고 있었다. 영화는 명료한 상황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녀는 아마도 임신중절을 결심한 것으로 보였으며, 은수는 이를 “무책임한 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지에 빠진 여자 친구의 상황이 보여주듯 은수는 그 “무책임한 일”에 공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도입 장면을 근거로 우리는 <헨젤과 그레텔>이 어린이 착취 유기라는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게 만나는 지점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의 실재라는 개념은 단적으로 말해 프로이트의 ‘증상’ 개념과 통한다. 증상을 구성하는 것은 과거에 상징화되지 못하고 억압된 트라우마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사건이 언제나 현재로 귀환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징화 흐름이 잠시 어긋나는 어떤 지점에서, 예를 들어 영화 속의 은수처럼 여자 친구를 “무책임하다”며 과잉규정함으로써 자신의 공모를 감추려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트라우마의 과거는 현재로 귀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비극적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아니 이러한 악순환을 낳는 에너지를 어떻게 억압하지 않는 방식으로 승화할 수 있을까? <헨젤과 그레텔>이 예표적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이 영화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시점에서 이명박 시대를 앞서 보여준다는 것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트라우마를 성급하게 규정하고 응결시켜버리는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나 트라우마 앞에서 상대주의적 절망으로 도피하는 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3)와 달리 비억압적 승화를 향한 어떤 길을 모색하고 있다. 영화의 어느 시점에서 은수는 ‘밖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을 중단하고 ‘안으로’ 파고 들어가 ‘즐거운 아이들의 집’이라는 공간과 세 아이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하며, 성취되지 못하고 동결된 공간과 아이들의 소망을 ‘구원’하기 시작한다. 이는 동시에 은수 자신의 무의식적 내면을 향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비난했던 “무책임”과 폐쇄된 공간과 아이들의 진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로마서의 유명한 구절을 기억해야 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서 8: 19). 모든 피조물 속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바로 이 신음소리로부터 세계를 보는 것. 이는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시도했던 것이다. “과거에 불완전한 운명으로 고통을 당했던 영혼의 행복과 완성을 증진하지 않는 것은 진보일 수 없다.”4) 벤야민은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근대성에 본래적으로 포함된 유토피아적 잠재력과 근대성이 보여주는 파국적·야만적인 작금의 현실을 병치하는 역사 이미지를 구성하려”하였다. 이렇게 병치된 이미지가 “혁명적 각성을 추동할 것”5)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명박 시대에 80년대가 귀환하는 것은 여전히 오늘의 세계가 80년대의 트라우마의 자장권 안에서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다시 성찰하는 데 다양하고 섬세한 지각과 재사유의 촉수를 뻗어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 이 글은 <세계와 선교> 198호(2009.3.1)에 수록될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와 <세계와 선교> 측 양해를 얻고 웹진 <제3시대>에 싣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1)김소연, 『실재의 죽음: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의 이행기적 성찰성에 관하여』, 2008. 도서출판b. 김소연은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라는 범주를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범주로 나눈다. 넓은 의미의 범주는 ‘현실에 대한 성찰성’을 공유하는 1980년 대 말에서 1990년 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라고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으며, 좁은 의미의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들을 소재에 따라 다시 네 개의 하위 범주로 분류된다.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당대 한국사회의 모순들을 폭로하는 영화들로서 <성공시대>, <칠수와 만수>. <구로 아리랑>,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며, 둘째는 충분히 공론화 되지 못했던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적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영화들로서, <남부군>, <부활의 노래>, <은마는 오지 않는다>, <개벽>, <하얀 전쟁>, <그 섬에 가고 싶다>, <태백산맥>, <꽃잎>이고, 셋째는 삶의 본질에 관한 다분히 종교적인 성찰을 담은 영화들로서 <아제아제바라아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화엄경>이며, 넷째는 연애담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는 <우묵배미의 사랑>, <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이다. 151쪽 참조. (본문으로)

2)김소연, 같은 책, 246. 여기에서 80년대의 ‘히스테리적 혁명성’이라는 개념은 80년대 진보운동이 지배 그 자체를 의문에 부치지 않고, 지배의 성격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뜻이며, 여성적 윤리라 함은 법 외부에서 자유롭게 향유하는 예외자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법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남성적 윤리와 달리, 예외에 대한 환상 없이, 법이라는 보편성에 기대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재정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최근에 번역 소개된 세 권의 책, 즉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2008, 새물결),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2007, 길),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2008, 코나투스)는 바울의 메시지를 라캉의 여성적 윤리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있다. (본문으로)

3)포스트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란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나타난 신경향의 영화들을 지칭한다. 대중성을 가진 범주인 장르의 미학을 수용하면서 가급적 매개된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성찰한다. <파이란>, <박하사탕>, <초록물고기>, <아름다운 시절>,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동감>, <시월애>, <번지 점프를 하다> 등의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본문으로)

4)발터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Lotze, Microkosmos(1858)를 인용하고 있다.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4, 325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5)수잔 벅 모스, 위의 책, 326(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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