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퀀스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2016년 가을,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논단이 불러온 파국의 정치는 한국사회를 급속도로 촛불정국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하였다. 2016년 10월 29일(토) 1차 촛불집회부터 2017년 4월 29일(토) 23차 마지막 촛불집회까지 1600만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광장에 참여하였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2016년 12월 9일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인용처리 하였다. 그로부터 2개월 후 2017년 5월9일에 치루어진 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도 현 정부를 촛불집회로 이룬 혁명의 정부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보면 촛불은 새로운 정치적 해석과 상상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촛불의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촛불정국이 일단락이 된 현 상황에서 촛불이 지닌 의미를 다시한번 복기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고, 그 과정에서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정치적 상상과 윤리적 결단의 지점을 역으로 추적해 보는 기회가 된다면 글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다.


1. 촛불, 비정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


   현대국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비정상이다.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된 국가 권력 아래서 국민 개개인이 지니는 차이는 선거를 통해 결정된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무시된다. 서로 다른 개인과 우리는 국민이라는 집합명사 안에서 하나가 된다. 차이가 국가권력이라는 동일성 안으로 스며드는 밀도가 현대의 민주주의는 고.중세의 봉건제 보다 오히려 세고 견고하다. 이런 이유로 대의제 민주주의를‘동일성의 정치(Politcs of Identity)’라 부른다. 일찍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그들이 공저한 『계몽의 변증법』에서“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동일성에 의해 지배받는 사회”[각주:1]라 지적하면서, 이를 가능하게 했던 근대적 (도구적)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이성은 스스로를 보편적 주체로 서게 함과 동시에...이성은 자기 보존을 위해 세계를 제어하는 계산적인 측면도 갖는다.”[각주:2] 근대성이 지닌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꼬집는 날카로운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정치적 보편주의로 자리매김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근대성의 대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동일성에 기초한다. 동일성의 정치는 모든 국민에게 한 표가 있다는 평등성, 다수의 결정을 존중하는 원칙성, 그리고 소수인 우리가 내일의 다수가 되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낙관성을 축으로 작동하는 환상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현실의 민주주의에서 평등성은 형식상의 평등성이고, 다수가 지니는 정당성은 한국 국정원 댓글 조작사건에서 보듯이 모략과 음모의 결과물이며, 내일 태양이 뜬다는 희망과 가능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민들에게는 절대로 실현되지 않는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서구 시민사회의 발전은 대의제 민주제의 등장과 그로 인해 등장한 문제점을 치유해나갔던 역사였다. 서구의 경우와 다르게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았다. 촛불이 요구했던 것은 이런 비정상적인 민주주의의 정상화였다. 물론, 촛불의 요구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실현 불가능한 요구였다. 국가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과 그들의 출몰로부터 야기되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원치 않는다. 어쩌면 국가는 기득권세력의 부와 권력의 유지를 보장하는 기능과 새로운 질서의 등장을 억제하는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민주주의가 지녔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직접적인 시민 민주주의를 외쳤던 것이 촛불이다. 촛불은 대의에 묻혀왔던 개개인의 목소리와 색깔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국가에 의해 정리되고 관리되고 배제되어 왔던 개별자들을 셈하여 줄 것을 국가에 당당히 요청했던 사건이 촛불이었다는 말이다.

    문득 지난 촛불집회 기간 중 불렀던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이 말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권력을 강조하는 말이겠지만, 한편으로 문장의 주어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에게 잃어버린 민주와 공화를 찾아 돌려주자는 것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 모든 사회 구성원들끼리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 서로 조화를 이루는 대한민국을 되찾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의 대의였다.


2.  촛불,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


    매주 토요일마다 23차례에 걸쳐 1600만명이 넘는 시민을 광장으로 모이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촛불은 과거 정치적이지 않았던 일상들이 정치의 모습으로 소환된 사건이었다. 일상의 정치화가 진행되었기에 촛불은 계속 광장에서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 연합이 자기네들끼리 목소리를 내면서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그들의 언어로 시국에 대해 발언하고,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촛불현장에서 벌어지는 가부장제적인 현상을 비판한다. 광장으로 유모차를 대거 끌고 나오는가 하면, 시민들은 각자의 기억 속 인물들을 불러내서 광장에서 만났다.

    광장에는 수없이 많은 깃발들이 휘날렸는데 과거와 같이 웅장한 거대서사의 메시지가 깃발에 적혀있지는 않았다. 소소한 개인들의 치기와 풍자가 어린 작품들이 깃발의 형태로 전시된 케이스라고 해야 옳다. 장수하늘소 연구소, 91학번 별 보이는 모임, 끝나고 치맥한잔 등 소소한 일상들이 깃발로 등장하면서 촛불 광장은 예전의 피끓는 투쟁, 강철같은 투쟁을 연호하며 치열하게 싸웠던 전선이 아니라, 일종의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무대이자 마당이되었다. 과거 1980년대식 운동권 투쟁방식에 익숙해 있던 필자로서는 분명 촛불은 낯선 풍경이었다. 10년(2004~2014) 동안 유학을 핑계로 한국을 비웠던 지라 그동안 한국사회의 변화상을 내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자조 섞인 탄식도 내안에서는 분출하였다.

    시위의 풍경이 예전과 달랐다는 점은 지도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누가 23차례 집회를 주도하는지, 누가 1600만명을 조직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혹 누군가 과거처럼 큰 목소리로 가열차게 선동적으로 구호를 외치거나 자극적인 발언을 남발하면 광장의 촛불은 그들을 외면하였다. 연차를 거듭하면서 촛불집회가 청와대 인근까지만 행진하고 돌아가는 무력한 시위로 전락하지 않을까, 라는 위기감이 잠시 돌았다. 그래서 비폭력적인 집회방식에 대한 논쟁이 잠시 있었다. 청와대까지 진출해야하고 청와대를 넘어야 되는 것 아닌가, 라는 문제제기 말이다. 그 말은 경찰과의 대치와 폭력까지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익숙한 변증법적 논리학의 문법, 양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의 단계가 무르익었고 지금이 바로 행동을 해야하는 그때이다, 라는 주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2016~17 촛불광장에서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았다. 촛불은 과거와 같은 방식의 정세분석과 인정투쟁을 허락하지 않았다.

    촛불광장은 이념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거대한 대의를 실천하는 슈퍼에고(Super ego)의 집결지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각각의 개인들이 그동안 상실했던 본인들의 쾌락을 찾아 몰려드는 이드(Id)의 각축장이었다. 광장으로 몰려든 개인들은 자신들과 소통하지 않는 권위적인 정부에 대해, 자기들을 집합명사 취급하면서 관리하고 제어하려 했던 정부를 향해 난장을 피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신화화 되어있고 이데올로기화 되어있었던 제도로서의 정치는 깨어졌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일상이 정치의 역역으로 출현하였다. 촛불은 이렇듯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라는 새로운 환타지를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3. 촛불, 법 밖의 정의를 향하다


   비정상적인 민주주의를 고발하고,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를 실현시켰던 촛불이 최종적으로 겨냥한 목표점은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서 정의란 법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경제적으로는 뿌리깊은 정경유착이, 사회적으로는 세월호에 대한 은폐와 조작이, 문화적으로는 블랙리스트 작성으로 대변되는 획일주의와 검열이 한국사회를 지배하였다. 그 안에 정의는 없었다. 정의는“법 밖의 정의”[각주:3]다. 촛불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법 밖에 위치했던 정의를 다시 현실의 법 테두리 안으로 정상화시키려고 했던 몸부림이었다.

    “법 밖의 정의”를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 유대 사회의 법이었던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파국을 향해 달려갔던 예수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는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법 밖의 정의’를 끝까지 주장하며 행동했던 인물이었다. 배고픈 사람들이 밀 이삭을 좀 뜯어먹었다고 안식법 위반을 운운하고, 병자들을 안식일에 고쳤다는 이유로 도덕적 규범을 어겼다고 몰아붙이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는 분노하였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마15:3)”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도 예수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 한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타자이다. 역사적으로 양자 간에는 회복할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여 있는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초죽음이 된 유대사람을 섬김을 받아 마땅한 이웃으로 대접한다. 타자의 신음에 무조건적인 환대로 반응하면서‘법 밖의 정의’를 실현한 것이다.

    예수의 윤리에서 법 밖에 위치하는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가장 도르라지는 대목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최후의 심판’비유이다. 최후 심판 날 인자는 양을 자기 오른쪽에 염소를 자기 왼편에 세운다. 양과 염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상징한다. 이 심판은 지켜보는 청중이나 오른쪽에 있는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의 판정 기준 떄문이었다:“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마 25:35-36).

    마지막 날 판정기준이 유대교의 법을 잘 지킨 순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법 밖에 위치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예수가 추구했던‘법 밖의 정의’는 유대율법에 대한 해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율법 안에 숨어있는 진정한 의미, 즉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인간 사회에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는 율법 본연의 정신을 회복시켰다. 이렇듯 예수는 성서 안에 숨겨져 있는 명백한 진리를 다시 조명하면서 정도(正道)를 따라 정직하게 걸어간 인물이었다.

    촛불은 ‘법 밖의 정의’를 갈망했던 예수의 정신과 공명한다. 촛불은 자본의 법칙 안으로 함몰되어버린 법질서를 고발하고,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힌 정부 여당의 독선에 당당히 맞섰다. 또한 촛불은 진도 앞바다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세월호의 어린 생명들에 대한 애도를 불허하는 부도덕한 정권을 소환하였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세력과 집단을 검열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제하려 했던 후안무치한 정부를 법정에 세웠다. 그렇게 23주간 광장을 밝힌 촛불로 인해 마른 뼈와 같이 앙상했던 대한민국에 혈기와 온기가 돌기 시작했고, 붕괴되었던 민주주의는 회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촛불의 윤리는 상징적 체계, 즉 법을 위해 봉사하는 수동적 윤리일 수 없다. 촛불은 상징적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법 너머의 행위까지를 겨냥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21세기 법이라 할 수 있는 자본의 법칙에서 배제된 자들을 향하는 윤리이고, 우리시대 악법이라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혐오주의로 부터 차별받고 억압받는 타자들, 즉 난민, 여성, 동성애자,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해 달려가는 윤리이다. 이렇듯 2016-17년 대한민국을 밝힌 촛불은‘법 밖의 정의’를 여전히 믿고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불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고, 현실을 강제하는 체제와 시스템과 도그마를 향해 절단선을 그을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하였다. 그리하여 촛불은 대한민국의 실추된 존엄과 명예를 회복시켰고, 이러한 촛불의 기억은 대한민국이 정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상상해야하는 그때마다 귀환하여 우리의 귓전에서 그날의 추억을 들려주며 우리를 깨어있게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M. Horkheimer and T.Adorno, Dislectics of Enlightment (New York: Herder and Herder,1972), 7 [본문으로]
  2. Ibid., 83-84. [본문으로]
  3. Theodore Jennings,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cis of Paul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3); 올해 오랫동안 제직했던 시카고 신학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은퇴한 테드 제닝스 교수는 예수의 메시아 운동을 재해석한 바울신학의 핵심을“법 밖의 정의(Outlaw Justice)”라 정의하면서 요즘 급격하게 일고 있는 바울에 대한 현대철학의 해석과 대화를 시도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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