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에 클릭하기,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




이희승*



  학회 참석 차, 런던을 다녀 온 지 일주일만에 영국에서 들려 온 끔찍한 소식에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바로, 노동당의 젊은 여성 국회의원인 조 콕스가 백주 대로에서 한 극우주의자, 혹은 극우 성향을 가진 정신병자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일명 브렉시트라고 일컬어지는 영국의 EU 탈퇴의 찬반을 놓고 벌인 뜨거운 논쟁과 과열된 정치적 대립이 이렇듯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민낯을 드러내고, 사회운동에서 의회로 선한 영향력을 막 넓혀 가던 젊은 여성 정치인의 생을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잔혹하게 끝장내었습니다. 유월 초였지만 아직 매서운 기운이 남아 있던 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를 활기차게 지나던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거대하고 불균질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런던 거리의 잔상이 아직 가시기도 전에 접한 조 콕스의 피살 뉴스는 휴머니티, 공동체 그리고 이 모두를 집어 삼키는 신자유주의의 경제 논리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영화를 읽고 정신을 분석하는 일을 직업삼은 이가 복잡한 경제 논리와 정치 공학으로 파악해야 하는 브렉시트 논쟁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브렉시트를 둘러싸고 불거져 나온 대립항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오래된 영화 한편을 다시 꺼내 보기로 했습니다.


  여든의 나이로 올해 두번째 칸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영원한 좌파 켄 로치 감독의 1995년도 작품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이 바로 오늘의 영화입니다. 칸 영화제 대상을 두번 수상한 감독은 열손가락으로 꼽는다니 켄 로치 감독의 기나긴 여정에 대한 칸의 존경과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수상이었습니다. 물론,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별로 새롭지 않은 미니멀한 텔레비젼 영화 형식에다가 지난 40년간 지치지도 않고 표현해온 좌파적 세계관을 담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의 대상 수상을 놓고, 유럽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에게만 유독 편파적인 칸의 심사 기준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영화가, 그리고 켄 로치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휴머니즘을 핵심으로 한 좌파적 세계관이 유럽의 문제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본이 아니라, 노동 – 그것이 어떤 종류의 노동이던간에 – 으로 생존을 감당해야 하는 모두를 향한 노감독의 변치 않는 애정은 단순히 정치색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힘과 진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세상 힘든 줄 모르고 천방지축이던 이십대 초반의 저에게 이런 확신을 준 영화가 바로 이름조차도 너무 정직한 <랜드 앤 프리덤>이었습니다. 영국 노동자 데이빗의 눈으로 목격한 스페인 내전의 기록인 <랜드 앤 프리덤>은 ‘나, 내 가족, 내 나라가 우선’이라는 이기적이고도 폭력적인 명제를 훌쩍 뛰어 넘는 타인들 사이의 이해와 연대를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데이빗의 고독하고 늙은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두셋만 들어서도 비좁게 느껴지는 궁색한 아파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데이빗은 병원으로 향하던 응급차 안에서 말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남겨진 유품을 정리하던 이십대의 손녀는 거실 한 켠에 놓인 낡은 가방안에서 오래된 신문기사, 편지 뭉치, 사진들 그리고 빨간 머플러에 담긴 정체 모를 흙 한줌을 발견하지요. 그로부터 손녀는 관객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젊은 날을 향해 시간여행을 시작합니다.    


    1936년 프랑코 장군의 깃발 아래 모여든 파시스트와 왕정주의자들은, 국민 선거로 정당하게 선출된 국민의 대표인 공화주의자들을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세계 각지의 공산당, 노동조합, 무정부주의 단체에서는 스페인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 인간 존엄과 자유를 함께 지키기 위해 힘을 보태기로 하고, 영국 공산당 당원이자 실직한 노동자였던 데이빗도 리버풀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무작정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영화의 초반은 이 순진한 혁명주의자들이 인종, 국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치기와 우정으로 서로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아기자기하게 그립니다. 혁명은 장밋빛이고 연대는 순조롭고 파시스트와의 전쟁은 귓가를 간지르는 총성으로만 느껴질 뿐이지요.  


  영화가 삼분의 일 지점을 지나는 순간, 세계 각지에서 몰려 든 젊은이들은 타인의 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신들의 희생이 결코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 알 수 없는 지옥같은 혼돈과 난장이 눈앞에 펼쳐지고, 조금전까지 담배를 나눠 피우던 친구가 죽음을 준비할 새도 없이 쓰러지는 첫 전투는 모두를 두려움과 비통함 그리고 혼란으로 몰아 넣습니다. 산도 물도 사람도 낯선 스페인의 어느 시골 마을을 파시스트의 손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젊은 혁명주의자들의 첫 승리는 이제 마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입장 속에서 지루한 논쟁으로 치환되고, 땅주인으로부터 토지를 부여받아 농사를 지어온 소작인들, 토지를 받지 못하고 부역만으로 살아 가던 농부들, 주인집에서 평생을 봉사하던 하인계급들은 모두 제각각 마을 지주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입니다. 혁명군들 스스로도 이 문제를 보는 시각을 놓고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지요. 혁명의 정신을 다림줄 삼아 이 작은 소동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이하지만, 이 난장토론은 혁명군들의 마음에, 어쩌면 프랑코 군대와 벌이는 전투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함께 합니다. 스탈린의 개입으로 혁명군은 반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죠. 스탈린의 무기 원조와 병력 지원을 받아서 조직적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스탈린주의자들과 혁명은 조직화되고 권력화되는 순간 내부에서부터 와해된다는 순수 혁명주의자들은 끝내 서로를 밀어내고 적이 되어버립니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확신과 믿음을 바탕으로 이뤄낸 인간주체적인 연대는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실질적인 욕망 앞에서 흔들리게 됩니다. 공산당원이자 혁명주의자였던 데이빗은 이 두 편을 모두 오가며 자신이 서야 할 곳이 어딘지를 찾습니다. 결국 목표를 위해 정신을 희생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잘 정렬된 진지를 빠져 나와, 경제논리보다는 사람의 노동과 애씀을, 정치권력보다는 사람사이의 연대를 중심에 둔 혁명주의자들의 초라하지만 따뜻한 병영으로 돌아 옵니다. 비극적인 이 영화의 말미, 두 진영의 반목으로 내 몸처럼 애틋한 동지들이 죽어 나가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데이빗에게 스페인은 남의 땅, 그리고 스페인의 자유는 남의 자유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쓸쓸히 영국으로 돌아왔을 데이빗의 모습,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로써 ‘번영과 발전’의 시대를 살아낸 데이빗의 삶을 영화는 과감히 생략합니다. 데이빗이 대지로 돌아 가는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 긴 세월동안 침묵해야 했던 할아버지 삶의 구심점을 이해한 손녀딸은, 젊은 날 데이빗이 연인 블랑카를 스페인 땅에 묻고 돌아서면서 그녀의 무덤에서 가져온 한 줌의 흙을 데이빗의 관 위에 뿌립니다. 그녀의 땅과 그의 땅, 그리고 그녀의 자유와 그의 자유는 한치도 다를게 없는 한몸, 한뿌리라는 켄 로치의 선언이겠지요. 늙은 동지의 무덤가에 선, 백발이 성성한 몇몇 노인들은 데이빗이 젊은 손녀의 손에 남겨 놓은 붉은 머플러를 보면서 주먹 쥔 손을 짧고 힘차게 들어 올립니다. 다시 볼때마다 새로운 출발을 요구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1939년 끝나버린 스페인 내전에서 남겨진 ‘나와 타인’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 데이빗의 삶을 통과해 1995년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의 피날레에서, 브렉시트로 분열된 2016년의 영국땅에서, 그리고 자유시장의 방패 뒤에 숨어 타인의 땅과 자유를 나의 소유로 귀속하려는 탐욕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다시한번 진지하게 성찰되어지기는 바라는 켄 로치의 유산이 아닐까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네가지 영역으로 사랑, 예술, 정치, 과학을 꼽습니다. 영화 읽는 사람으로써 이런 영화를 볼때마다, 마음을 다해 나의 문제와 타인의 문제에 관한 최선의 답을 구하다 보면, 이 네가지 영역 모두를 아우르는 – 즉, 뚜렷한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면서도 과학의 객관성과 집요함을 잃지 않으며 소박한 예술적 감흥을 통해 인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애정을 소통하는 –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네요. 영화적 형식이나 주제로 볼때 그다지 화려하거나 새롭지 않고, 주제를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미학적인 의도나 계산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뚝뚝한’ 영화지만 꼭 한번 다시 보시기를 마음을 다해 감히 권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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