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 8]


지젝 (1) : 까다로운 주체



허석헌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 박사과정, 조직신학)



주체의 문제


      탈근대 철학의 이론의 장에서 벌어진 논쟁의 화두는 ‘주체의 죽음’을 중심으로 벌어져 왔다. 인식론적 전환점을 찍은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와 헤겔을 넘어 후설의 현상학까지 경험의 주체를 실체론적인 형이상학에 의해 탈역사적으로 구성해온 부르주아 철학은 실존주의 철학(실존주의 역시 존재론적 시도의 한 형태이지만,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관념 체계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맑스주의, 구조주의에 이어 이마저도 한발 더 넘어서려는 탈구조주의에 의해 반박되어져 왔다. 이들 철학이론들의 지형은 엄연히 자기고유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의미에서 지지되어온 ‘주체’의 존립근거를 부정하는 전복적인 태도에서 만큼은 일치된 입장에 있다. 이로써, ‘주체의 죽음’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가장 적합한 용어처럼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이라는탈근대를 향한 급진성이 유행처럼 지나간 이후에, 주체의 죽음이 인간의 자유를 위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에 대한 물음은 모호한채 남겨졌다. 물론, 이성이 되었든 존재가 되었든 주체를 최종 판단의 결정권자로서의 권한을 부여한 결과, 그로 인해 구성된 세계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구조를 초래하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가 제거된 이후의 세계는 달라졌을까? 주체가 사라졌으니 마음놓고 자유를 만끽하라고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면, 주체의 죽음을 확신케 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권력을 향유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데, 바디우는 오늘날의 차이와 다양성의 문화가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강조한다. 즉 차이와 타자성이라는 말은 매혹적인지만 이들 용어들은 자본주의의 탐욕만을 충족시켜줄 뿐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운다. 바디우는 주체의 죽음이라는 급진적 현상이 다양성과 차이만을 강조한 채 사회적 갈등과 적대를 포스트모던의 풍토안으로 일시에 흡수해 버리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타자와 차이의 존중이라는 그럴듯한 주장을 앞세워 헤게모니를 영속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지배전략이 주체의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적으로 수용되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런 문제인식 위에서, 이 글은 먼저 지젝의 주체이론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칸트적 헤겔 또는 헤겔적 칸트의 이해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근대적 주체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지 않고 오히려 근대철학의 주체성 논의에서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두번째는, 데카르트부터 칸트, 헤겔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연결되는 지, 어떤 방식으로 라캉의 이론적인 토대로 기능하게 되는지를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이 라캉의 실재개념 안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현실 정치의 변혁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데카르트의 유령


    지젝의 철학적 사유는 주체의 죽음이 공언된 이 시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체를 부정함으로서 혁명의 가능성마저 제거해버린 탈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뒤에는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묵인하고 존속시키는 탈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음을 경계한다. 따라서, 지젝에게 철학적 문제는 근대적인 주체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혁명의 주체의 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주체의 가능성을 찾는 데 있다.


    지젝이 선택한 길은 두가지 방향에서 파악될 수 있는데, 하나는 맑스-레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학이다. 맑스-레닌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은 생소하게 보일진 몰라도, 맑스주의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에 맑스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외부로부터 이론적 보완을 시도했던 경험은 역사적 선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맑스주의에 도입한 경우가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왜곡되어 국가사회주의라는 파시즘으로 흘러간 경위를 프로이드를 통해 밝혀내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맑스주의를 실존주의적으로 수용하면서 맑스주의가 휴머니즘적으로 탈바꿈 할 때에, 알튀세르는 이러한 시도들을 수정주의로 파악하고 인식론적인 개입을 제거한 순수한 맑스주의 해석을 들고 나온 사례를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젝의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철학의 결합은 형식의 측면에서는 전혀 새로운 시도라고 보기 어렵다. 지젝의 프로젝트를 이전의 사례들과 구별짓는 데에는 형식적인 특별함이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에서 결여되었던 주체를 재구성하기 위해 라캉의 정신분석철학의 관점에서 데카르트, 칸트, 헤겔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온다는 점에 있다. 이글이 지젝에게 주목하는 점도 여기에 있다. 지젝의 철학은 주체 문제와 연관된 탈근대적인 해체주의의 성과를 전면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적 주체를 해방적인 역량으로 전유할 수 있는 이론적 시도를 과감하게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근대와 탈근대의 단절을 그 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특색은,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1999)’의 서문에서 쉽게 발견된다. 지젝은 주체를 재구성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 해체주의자, 하이데거적 지지자, 생태론자, 비판적 맑스주의자와 여성주의자까지 이어지온 ‘데카르트적 주체라는 유령’의 ‘성스러운 사냥’을 위한‘학술권력’들의 동맹에서 찾는다. 지젝은 주체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데카르트의 주체가 여전히 유령처럼 출몰해 왔음에 주목하며, 주체의 유령에 대한 반데카르트적 동맹이 지시하는 바는 역설적으로 데카르트적 주체성이 강력한 지적 전통으로 인정받아 왔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이처럼 지젝은 대세가 되어버린 주체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데카르트의주체를 저마다 희생양으로 삼아 학술권력을 지배해왔던 진보적 담론들과 대결을 벌인다.


초월론적 주체


    그러나 지젝이 부활시키고자 한 주체는 실체론적-존재론적인 데카르트식 주체 개념이 아니다. 지젝은 코기토를 시점으로 칸트로부터 인간의 이해에 적용되었던 초월적(선험적) 관념주의 철학에 의해 확인되는 것은, 사유하는 ‘나’는 인정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나’를 보증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즉, 칸트는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 코기토를 자기 초월론적 철학의 출발점으로 수용하지만, 세계를 인식하는 투명한 자기확증적인 주체로서 인간을 규정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식되어진 현상과 객관적인 대상(물 자체 thing-in-itself)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사유와 존재, 지각과 대상, 표상과 실재는 일치하지 않으며 양극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여기서 자기 동일적인 주체성이 설 여지는 없다. 이성이 알 수 있는 지식의 범위는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없는 것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영역이다. 칸트가 설정한 ‘물자체’는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영역, 초월적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비대상성에 속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현상이지 물자체가 아니다. 현상은 실재의 그림자이다. 실재로부터 유출되어 나오지만, 실재의 모사일 뿐이다.


    칸트의 초월론적 인식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두가지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나는 한계로서 이성의 지위이다. 이성은 객관을 직시할 수 없다. 언어, 표상, 감각, 기호, 말 등은 실재 즉 객관적인 대상, 본질 그 자체를 지향할 뿐,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계는 현상과 본질의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 . 그러나 이성의 한계가 실재와의 완전한 단절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는 사고로서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의미를 요구하기 마련인데, 그 의미는반드시 초월적인 로고스와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두번째로 지적되어야 할 점과 연관 되어 있다. 현상은 실재와 반성적(reflective)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성에 의해 파악된 세계는 실재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물자체는 지각에 의해 경험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부재하다고 할 수 없다. 실재가 없이는 상징계의 질서 또한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계로서의 이성은 이처럼 실재와 현상의 불일치 뿐 아니라, 실재의 존재를 확증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이처럼, 한계와 초월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칸트의 초월론에는 이성과 실재사이의 관계가 잠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초월적인 실재의 영역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져 있지 않다는 특징 또한 포함하고 있다.


까다로운 주체


    칸트의 초월론적 방식은 인간의 인식이 도달할 수 없는 물자체를 상정해야만 성립할 수 있었다. 인식은 단지 감각을 통해 주어지는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객관와 주관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말한다. 주관은 객관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사실상 칸트의 핵심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렇게 잠정적으로 가정된 초월적 통각 영역 너머의 물자체를 진리로서 수용할 수 없었다. 헤겔이 보기에 철학이 객관적 진리를 알 수없고 한계안에서 제약된 상대적 현상만을 파악할 수있다는 것은 철학의 무능을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헤겔은 칸트의 초월철학에 손질을 가한다.


    헤겔은 칸트와 달리 이성을 객관적인 것으로 본다. 객관성을 갖는 칸트의 오성 또는 초월적 통각은 이미 헤겔에서 이성으로 동일시된다. 헤겔은 칸트가 분리한 오성과 이성을 다시 이성안으로 통합시킨다. 이렇게 통합된 이성은 객관을 타당하게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실체론적으로 긍정하는 칸트와 달리 헤겔은 가정된 초월적 물자체를 부정한다. 칸트에게서 있을 것으로 가정된 물자체는 매우 약한 고리로 이성과 잠정적인 관계로 남아있었지만, 헤겔은 물자체를 가시적인 이성의 현실 영역으로 끌어온다. 현상은 객관에 대립하는 주관의 구성물이 아니라 바로 사물자체의 규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체로서 현상의 피안으로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현상계의 끝을 물자체라고 본 것이다. 물자체란 현상 세계의 너머에 있는 실체가 아닌, 현상계의 종착점이 바로 물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헤겔은 칸트가 끝까지 남겨 놓은 물자체마저도 주관의 영역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절대적 주체성을 복원한다. 이로써 현상과 실재 사이의 거리는 제거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반대로 잠정적이었던 틈새는 보다 확정적인 것이 되었다. 지젝에게 있어서 헤겔은 칸트철학의 극복자라기보다는 현상계와 물자체의 갈라진 틈새를 보다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가시화시킨 장본인으로 이해되는 이유이다. 이점은 헤겔이 칸트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며 전통적인 이성과 그로 인한 결과인 형이상학을 복권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온 일반적인 헤겔에 대한 해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젝의 헤겔에 대한 독창적 해석법은 여기에 있다. 지젝은 ‘나눌수 없는 잔여(1996)’에서, 헤겔이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은 “주체는 알수 없다는 칸트의 생각을 사변적으로 역전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물자체로서 “주체의 ‘알 수 없음’은 주체가 비실정적 공백이라는 사실을 오성이 잘못 인지하는 방식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주체는 알 수 없는 텅빈 X라고 말하는 곳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런 인식론적 규정에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즉 주체는 순수 자기정립적인 ‘없음nothing’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통각의 너머에 물자체를 인정하는 칸트와 달리, 헤겔에게 주체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의 담지자이며, 지젝은 이러한 부정성의 담지자를 “까다로운 주체”라고 부른다. 부정성에는 주체뿐 아니라, 대타자로 기능해온 물자체역시 부정성의 대상이 된다. 언제나 감각 너머이 있을 것으로 가정되어 온 물자체는 ‘그곳’에 없다. 이로써 대타자도 역시 ‘그 곳’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헤겔이 물자체를 이성의 범주로 소환하였듯이, 지젝에게 대타자는 상징계 안으로 진입한다. 


   여기에서 지젝은 헤겔의 부정의 변증법에 대한 해석을 칸트주의와 연결시킨다. 칸트에게 확인되는 것은 초월적 통각에 의해 종합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 아니라, 이성과 물자체 사이가 서로 대립과 긴장 속에서 근본적인 상호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듯이, 헤겔의 변증법은 정과 반의 긍정적 종합으로서 합이 아니라, 부정의 근본화, 즉 부정을 더욱 철저히 부정하는 변증법이다. 변증법을 부정의 부정이라는 운동을 부정의 근본화시키는 것으로 읽어내고 그로부터 ‘비어 있는 텅 빈 무’로서의 주체를 발견하려고 하는지젝은 헤겔을 반칸트주의가 아닌, 반대로 급진적인 칸트주의자로 해석한다.  


라캉과의 만남


    지젝의 해겔에 대한 독특한 독법은 헤겔의 철학을 타자를 주체로 환원시키고 차이를 동일성으로 통합시킨 형이상학적 철학의 토대로 이해해왔던 기존의 통념에서 한발 물러나 다른 시각에서 주체를 재구성할 여지를 남겨준다. 그러나 지젝이 다시 읽어낸 헤겔과 칸트만으로는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논하고, 현실정치 안에서 주체를 재구성의 대안으로 삼기에는 아직 이르다. 칸트와 헤겔의 해석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만나야 한다. 지젝은 칸트의 초월적 통각과 물자체의 개념을 라캉의 인식체계를 선취하는 모형으로 보았다. 라캉은 이를 상징계와 실재계로 구분하였다. 지젝이 데카르트로부터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을 읽어가는 관점은 이처럼 라캉의 개념과 맞물려 있는데, 이제 우리는 지젝이 해석한 칸트와 헤겔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되는지 볼 차례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지젝이 그의 주체 이론이 현실적으로 얼마만큼의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지도 검토하기로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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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2



심범섭*



들어가는 말


   지난 번 글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구절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이때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번 글에서 마저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노래”라는 표현에 담을 수 있는 의미 전달 및 통합의 뜻과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표현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본문


   먼저 의미 전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의미’라는 말에는 적어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모든 단어에는 의미가 있다”라는 말에서처럼 그 내용이 무엇이든 어떤 ‘뜻’이라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할 때처럼 ‘가치’, ‘목적’과 상통하는 뜻이다. 노래에는 언어로 이루어진 노랫말이 있으므로 노래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전달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노래는 특정한 리듬과 가락이 현저하게 감지되는 음악적인 성격 때문에 노랫말의 의미를 더 효율적으로 더 호소력있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별을 노래하는”라는 표현에서 “별”이 숭고하고 보편적인 이상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별을 노래하는 노래는 당연히 중요하고 진지한 의미를 담는다고 할 수 있다. 시에서 ‘노래’라는 말에 이렇게 무거운 의미가 담기는 예를 우리는 가끔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한용운 시인이 쓴“님의 침묵”의 마지막 행을 떠올려 보자.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여기에서 “사랑의 노래”는 님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진 절실한 경험에서 얻어진 어떤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고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이육사 시인의“광야”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시의 4연은 다음과 같다.“지금 눈 나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여기에서“노래”에 미래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소망에 해당하는 어떤 의미를 담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거운 의미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의 생명력을 증진시키면서 우리의 존재를 더 고결한 경지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이러한 자극을 주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인 참과 좋음과 아름다움, 곧 진선미가 그 답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국민윤리 과목을 맡으셨던 조영수 선생님은 등단한 시인이셨는데 첫 시간에 자기 소개를 하시면서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시 한 편을 쓰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분에게는 시라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다고 이해하게 된다. 참과 좋음과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속하는 구체적인 의미들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의 일부 또는 전체를 통일성 있게 규정할 수 있으며, 의미에 이끌림은 개인의 유한한 존재를 넘어서는 영속에 이끌림의 한 중요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의미에 헌신하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한, 나보다 큰 것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욕망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의미의 특성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럿이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의미가 생물학적인 필요라는 생각을 한번 제시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우선 신약성경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 받는 이야기 가운데 일부를 언급하고 싶다.


시험하는 자가 …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3-4절)



   여기에서 예수가 떡과 대비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물학적 생존과 안락과 대비되는 고결한 ‘의미’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예수는 사람이 이런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보람 있게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의미를 떡, 곧 먹는 음식과 대비시킴으로써 의미라는 것도 먹는 것이라는 행위와 관련시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생각은 제일 먼저 같은 신약성경 안에 등장하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성찬의례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 ‘의미(意味)’에서 ‘미’가 ‘맛 미(味)’자라는 사실에도 주목하게 된다. ‘의미’라는 말을 만든 옛날 사람들이 왜 ‘味’ 자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도 혹시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먹는 것으로, 살기 위해서 먹어야만 하는 것으로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예수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 그리고 ‘의미(意味)’라는 말을 만들었던 옛 동양 사람들 모두 의미를 먹는 것으로 은유하여 인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 이상 “의미(意味)는 의미(意米)다”라는 말장난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 네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랑클(Victor Frankl)은 자신의 극한적 경험에 바탕하여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할 때에만 충일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책에서, 프랑클은 인간이 의미를 찾을 때 기준으로 삼는 가치 체계의 근거가 생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인간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가치들을 위계화했는데, 이런 가치들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내재화되어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체가 되어) 어떤 상황을 평가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동원된다는 견해이다. 무엇이 의미 있다는 판단을 이루는 가치 판단의 기저에 진화 과정이 반영된 생물학적 요구가 있다면, 의미를 먹는 것으로 표상하는 것은 더욱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바꾸어 말해, 인간이 의미를 찾는 것은 음식을 찾는 것처럼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의미를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밥처럼 일상적인 것으로서 날마다 신경 쓰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살펴볼 때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의미 있음이나 없음 자체를 마주치기보다는 의미 있거나 없는 구체적 대상을 마주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미 있다거나 없다는 판단은 의식의 표면에 잘 떠오르지 않고 과연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의미 있다고 판단하는 대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자체로는 의미 있다고 하기 어렵지만 우리에게 가치 있는 목표를 성취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이다. 특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거나 고통을 견딜 때 이런 의미가 부여된다. 예를 들어 위내시경 촬영은 고통스럽고 그 자체로서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건강 증진이라는 의미 있는 목표 때문에 이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견디어 낸다. 하지만 어떤 경험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 좋은 자연 경관을 바라보는 것,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긍정적인 신비감이 있는 인물을 만나는 것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 자체로서 반갑고 소중하다. 그 자체로서 내 안에 있는 생명력을 확장시키고 내 존재를 고양시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많은 경우 동일한 대상에 이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부여될 수 있다. 그 자체로서 소중한 일이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대상 가운데에는 이 두 가지 의미 범주 밖에 머무는 예, 곧 아예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를 살면서 내가 마주친 수 많은 낯선 사람들과 조금만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의미 없는 대상들을 의미 있는 대상, 특히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 종교의 한 중요한 목표 아닌가? 때로 지금까지 나에게 의미 없었던 사람이 문득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험, 더 정확히 말해, 아직 의미 없는 대상과 의미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의미 있지 않은 대상 가운데에서 (전부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많은 것이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대상이 되도록 인식을 바꾸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한 중요한 목표가 아닌가? 그리고 이런 목표에 담긴 의식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에 담긴 의미 의식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별을 노래”하는 것에 포함될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두서없이 생각을 늘어놓은 다음, 이제 노래가 지니는 통합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노래가 부르거나 듣는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데에는 적어도 리듬과 가락과 노랫말이 역할을 한다고 이해된다. 이 가운데 리듬 자체가 지닌 통일하고 통합하는 힘에 대해서 마이클 드레이크(Michael Drake)는 무속인(shaman)의 북 연주를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유려하게 말한다.


우리 각 사람의 심장 안에는 우리를 역동적이고 서로 이어진 우주 전체로 연결하는 완벽한 리듬이 조용히 박동한다. 북소리는 무속인과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존재, 하나의 심장박동으로 연합한다. 북소리는 자연의 모든 구별되고 불일치하는 면을 화해시킨다. 북소리는 개인과 행성의 울림을 촉진하며 조화와 균형을 회복시킨다.[각주:1]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런저런 리듬을 구현하면서 그 존재를 영위한다고 할 때, 그리고 생명 있는 존재에게는 자신을 싣는 리듬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 때, 노래의 리듬처럼 쉽게 인지되고 호소력 있는 리듬이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한 리듬을 따르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노랫말의 경우 여기에 담긴 언어적 내용이 통합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내용이 여러 사람에게 같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같은 감동을 줄 때 이는 가능한데, 특히 노랫말이 위에서 이야기한 ‘무거운 의미’를 전할 때, 이런 근본적인 의미에는 강한 보편성이 있으므로, 노래 부르거나 듣는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그만큼 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노래 가운데 “그대는 저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라는 곡이 있는데, 첫 부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저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가? 

분노한 사람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그것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사람들의 음악. 

그대의 심장이 저 북소리에 맞추어 뛸 때에 

내일과 함께 곧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


   이 가사는 노래에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있으며, 이 하나됨이 운동이 되어 크고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호소력 있게 예시한다.“분노한 사람들의 노래”라는 표현에는 노랫말의 내용에 대한 암시가 있다. 그리고 맥락상 이 내용은 사회정의실현이라는 무거운 의미를 담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의 심장이 저 북소리에 맞추어 뛸 때에”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같은 리듬 아래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노래의 통합하는 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먼저 어떤 때 어떤 곳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사람들의 하나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은 이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의 내적 통합, 과거의 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통합, 미래의 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통합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과거 또는 미래 사람들과의 통합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역사 의식이라고 이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통합을 노래와 관련지어 생각할 때 앞에서도 언급한 이육사 시인의 작품 “광야”의 4, 5연이 떠오른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여기에서 시인은 현재에 뿌린 노래의 씨앗이 성장하여 미래에 우렁찬 노래가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것을 노래를 통한 현재와 미래의 통합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과 통합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를 잘 공부하고 보편적 가치를 잘 탐구하면 훨씬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미래를 향해 자라나 나중에 오늘과 미래를 하나되게 할 노래의 씨앗을 구하는 것이 오늘을 책임 있게 사는 한 중요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끝으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로 시작되는 문장과 밀접하게 이어지는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문장에서 화자는 그가 자신을 넘어선 존재(작품 안에서 이름을 찾자면 “하늘”이라고 할 수 있을)로부터 삶의 소명을 부여 받았으며 이 소명을 따르겠다는 뜻을 표현한다. 이 내용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하나는 이러한 소명의 길은 그 주체에게 근본적으로 홀로 가는 길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내가 갈 길이 무엇임을,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임을 정확히 알았을 때 사람에게는 좋은 의미의 고독감이 찾아오는 듯 하다. 20세기 인도의 신비주의자 성인인 푼자(Poonja)는 자신이 가는 길을 “너무도 좁아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 없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정한 소명은 원시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두 번째로 “그리고 나한테…”라는 이 문장을 내 나름대로 앞 문장과 연관 지어보고 싶다. 이 문장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앞 문장과 표면적으로는 “그리고”라는 순접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두 문장의 내용이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데 두 문장이 모두 화자의 삶의 내용을 다루므로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순차적’ 해석은 적절하지 않고, 두 문장의 내용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두 가지 동시 상황 사이에 더 구체적인 의미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둘 사이에 둘째 문장이 첫째 문장을 수단으로써 수식하는 관계를 상정하고 싶다. 다시 말해,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감으로써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이해를 시도하고 싶다. 보편적인 사랑을 자신만의 고유한 소명의 길, 사실 철저히 혼자 가는 길을 가는 가운데 실천하고 싶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그만의 독특한 사명이 있으며, 이 사명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것이라고 전제할 때 이런 해석은 자연스럽다. 보편적 이상을 가장 잘 실현하는 길은 각 사람이 고유한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그 이상을 추구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더불어 이런 해석은 시적 의미를 형성하는 차원에서도 보편성과 특수성이 만나 긴장을 이루게 하는 효과가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대목을 두고 앞뒤 없이 어설픈 생각을 늘어놓았다. 내가 한 이야기를 되돌아 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생각의 틀은 역시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인 듯 하다. “별”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보편을 향하지만 “나한테 주어진 길”은 특수에 관련된다. “노래”라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태어나므로 특수한 것이지만 그 통합하는 기능으로써 보편으로 향한다. 보편과 특수의 상호보완과 대립의 역학은 한 사람의 삶과 사회 전체의 움직임을 생각할 때 반드시 탐구해야 할 주제가 아닐까 한다. 나도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서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었으면 좋겠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Michael Drake,The Shamanic Drum: A Guide to Sacred Drumming, Talking Drum Publications, 2010, p.1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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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후마니타스(Homo-Humanitas)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인문학 위기의 요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유학 10년을 마치고 돌아온 고국은 놀라우리만큼 변해 있었다. 우선 표면적으로 정권이 바뀐 것이 가장 큰 낯섦이었다. 미국으로 갈 때는 노무현 정권이었는데 돌아와보니 이명박을 거쳐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이 연거푸 집권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권들 아래에서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훨씬 더 철저하고 착실하게 신자유주의를 이행하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 같았다. 구조조정이 상식이 되어버렸고, 계약직과 비정규직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갑/을 관계의 냉엄함과 잔혹함은 하늘을 찌른다. 연일 신문지상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비관 자살보도가 넘쳐나고, 20.30대들 사이에서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하게 발견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이다.

   “무한경쟁”, “누구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마누라와 자식들 빼고는 다 바꿔라”... 이상은 신자유주의가 휘몰아치던 1990년대 광고카피들이었다. 무한경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기억되지 않는 2등을 면하기 위하여,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을 했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체험하면서 나는 신자유주의가 지니는 파토스와 인문학 사이에 모종의 결탁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와 질서 속으로 인문학이 녹아들어 가면서 신자유주의화 된 인문학, 신자유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협력하는 인문학이 한국 땅에서 돌연변이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문학이 신자유주의 이론을 축조하고 견고하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말이 아니다. 인문학이 신자유주의 논리를 학습하고 내재화했다는 말이다. 실례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인문학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논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문학의 위상이 막강하다. 각종 인문학 프로젝트들과 인문학 강좌들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서점을 둘러보면 온통 제목에 인문학字 붙은 책들이다. 10년 동안 국외자의 입장에 있다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이런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흥미로왔다. 그간에 고양된 한국인들의 인문학을 대하는 자세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불편해지더니 요즘은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이 모욕적이고 심지어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일까.


스펙(Spec) 우선주의


   지금까지 살펴본 바, 현재 진행 중인 인문학열풍은 한국인들에게 잠재해 있는 두 가지 욕망과 모종의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스팩(Spec) 우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힐링(Healing) 지상주의다.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인문고전 독서법』, 『동서양 천재들의 사색공부법』,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CEO가 읽는 인문학』 같은 제목의 책들이 인문학 관련 서적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높은 순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인문학 풍토에서 스펙 우선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부가가치가 높고 효율적인 스팩을 쌓은 사람을 신자유주의형 인간이라고 했을 때, 인문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최적화된 인간을 양성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지닌 불패의 정신으로 무장된 주체를 이 시대로 다시 소환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와 더불어 등장한 21세기형 주체는 너무나도 무력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액체근대’[각주:1]를 패러디하여 21세기 신자유주의형 인간을 ‘액체화된 주체’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시대 우리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 공동체, 대의, 국가, 체제 등과 같은 굳건했던 숭고함들은 전 지구적으로 몰아닥친 자본의 열풍에 녹아내려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바우만의 ‘액체화된 근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이후 변화된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액체화된 시대 속에서 강철과도 같은 의지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무장된 근대적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액체화된 시대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전과 같은 공동체 의식 혹은 투철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삶의 무게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 되었고, 그것에 대한 결과 역시 오롯이 개인의 책임이다. 우주와 세상 앞에서 개인은 홀로 이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그런 개인인 내가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 개인인 내가 세상을 지배하는 0.1%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잘 나가는 CEO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인문학은 더 이상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묻지 않는다. 전체 안에 깃들어 있는 부조리의 문제를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로 치환시키거나, 젊은 시절 감내해야만 하는 통과의례적인 과정 혹은 개인의 자기계발의 문제로 전환시키면서, 시스템의 균열과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든다. 대신에 아프니까 청춘이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다, 라는 말로 우리를 우롱하고, 아직 2%가 부족하다, 열심히 살다보면 내일의 태양의 뜰테니 ... 그러니 열심히 뺑이쳐라. 그러면 대박 날지도 모른다, 라는 말로 희망을 고문한다. 이것이 오늘의 인문학이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속삭임이고, 그러면서 인문학은 시장의 언어가 되었다.


힐링(Healing) 지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말하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균형, 신앙과 이성 사이의 긴장, 믿음과 논리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 말이라 하겠다. 바르트의 말을 빌어 한국의 인문학 열풍을 풍자하자면, 현재 한국인의 손에는 한 쪽에는 Spec, 다른 한 손에는 Healing 관련 서적이 쥐여져 있다. 아침 출근길에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쟁취하고 다시 도전하고 마침내 승리한다는 내용의 책을 읽고, 저녁 퇴근길에는 상처받고 좌절당한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힐링 관련 서적을 읽는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풍속의 단상이라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앞서 언급했던 Spec 우선순위와 더불어 한국 사회를 휩쓰는 인문학 열풍을 담당하고 있는 또 하나의 축은 Healing 지상주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상처극복 시리즈, 분노와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둘러싼 내면 강화시리즈, 희망과 행복을 상상하고 꿈꾸게 하는 환타지 같은 성격의 책들이 대표적인 힐링 관련 서적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한국인들은 Healing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한국의 힐링 열풍은 지나친 과잉이다. 어쩌다 우리사회가 힐링을 갈망하고 욕망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물론, 한국사회 전체가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아프고, 1등이 못되어서 좌절하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아 아프고,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에서 실업자로 추락하는 바람에 우리는 아프다. 그래서 모든 감기 증상들을 단번에 달려버리는 종합 감기약처럼, 우리 역시 모든 슬픔을 모아 단번에 달려버리는 종합처방전이 필요하다. 그것이 힐링지상주의의 요체라 한다면 너무나 과문한 진단일까.

    연대하는 공동체, 굳건한 이데올로기가 녹아내려 액체로 화한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액체로 된 세상 속에서 홀로 외로이 유영하면서 자기경영에 매진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허락한 문법이고 그곳의 개인은 한번 몰락하면 재기 불가능하다. 존재 전체를 걸고 전력투구를 해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은 항상 불안과 공황과 우울의 상황과 직면해 있다. 힐링은 대타자 신자유주의의 추하고 타락한 몰골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려는 체제의 전략이고, 또한 그것은 자본의 문제를 저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자본이 저지른 만행을 최대한 감추고 그것을 한 개인의 몫으로 전가시키려는 신자유주의가 고안한 간교한 계략이다.

    이것은 마치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교통사고로 인해 응급외상센터로 후송된 중환자에게 외상(外傷)은 크지 않아 네 마음이 그것을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 문제야, 라고 속삭이면서 몰핀을 계속 투여한다면 환자는 어떻게 될까. 여기서 교통사고를 신자유주의로, 환자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민으로, 몰핀을 힐링담론으로 치환하면 정확한 우리의 현실이 된다. 힐링은 쌓이고 쌓인 자본의 문제를 개인 내면의 문제로 변질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술책이다. 힐링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숭고하고 따뜻했던 의도와는 별개로 신자유주의 시대 힐링 열풍의 이면에는 이러한 음모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인문학의 기원, 혹은 전통


   그렇다면 우리는 스팩과 힐링에 갇혀버린 인문학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한 답을 르네상스시대에 부활한 인문정신을 복기하면서 찾고자 한다. 십자군 원정의 패배와 패스트의 창궐로 인해 중세유럽을 지배했던 교회의 권력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요청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신과 교회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성에 대한 재발견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두되면서 유럽은 중세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 근대를 향한 발돋움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발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동서무역로가 확보되면서 지중해무역권이 형성되었고 그 통로에 위치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 예를 들면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특히 동로마제국이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이어받았던 동로마의 학자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유입되었고, 동서문화가 다시 한번 대융합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고대 그리스 고전에 대한 복기가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로마시대의 자유학문(liberal arts)을 복원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필요를 수용하면서 새롭게 학문체계를 재구성하였다. 중세 대학은 고대 로마의 9 자유학문(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론, 의학, 건축학)에서 의학과 건축을 제외한 7과목을 삼학(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사학(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으로 구성하였다.[각주:2] 이러한 학문분류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로 상징되는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studia humanitatis(인문학)라는 이름 아래 재편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논리학이 위축되었고 수사학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역사학, 시학, 윤리학, 정치학 같은 학문들이 새롭게 부상하였으며 라틴어와 헬라어 원전에 대한 독해가 요구되어졌다.

    이 대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다. 르네상스의 모토로 알려진 ‘고전으로의 복귀’가 미래를 향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전통(경험)으로 돌아가다는 복고주의가 아닌가, 라는 의혹이 그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의 생각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고대의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여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 신화적 이야기를 현재를 위한 창조적 상상의 원천으로 소급하기 위해서 르네상스는‘고전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것이다. 변화된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시대는 요청하였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그 변화의 동력을 고대 그리스로의 복귀를 통해 탐색하였던 셈이다.

    이는 인문학의 위기론 속에서 인문학의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선사한다. 인문학이 스팩과 힐링, 즉 현실정복과 현실도피의 도구로 전락한 한국사회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충고는 인문학이란 상상력과 관계한다는 점이다. 현실에 대한 매몰과 현실에 대한 적응에 목적을 두는 인문학이 아니라, 현실과의 거리두기, 현실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현실에 대한 변혁을 꿈꿨던 사람들이 르네상스 시절 휴머니스트들이었고, 그들로 인해 유럽은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인문(人文), 인간의 무늬


    이 글은 스팩과 힐링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인문학 풍속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되었다. 천문(天文)이 ‘하늘의 무늬’이고, 인문(人文)을 ‘인간의 무늬’라고 할 때[각주:3],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배려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스팩 강화와 자아의 상처 극복을 테마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동시대 한국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욕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는 점에서 인문학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에 마냥 호의적일 수는 없다.

    인문을 인간들이 이루는 무늬라고 했을 때, 인문학은 그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이 된다. 무늬를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전체를 봐야 무늬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리므로 ‘인간의 무늬’라는 말 안에는 인간은 복잡다단하여서 두부모를 자르듯 인간에 대해 재단할 수 없다, 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인간을 쉽게 판단할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인문학은 사회 속에서 쉽게 환호 받으며 유통되고 소비되다 폐기되는 개념과 풍조에 대해 어김없이 삐딱한 태도로 회의하고 그것을 응시하면서 넌 누구니, 넌 어디서 왔니, 라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볼 때 현재 한국사회에서 스팩과 힐링으로 포장되어 열렬히 환호받으며 유통되는 인문학 풍속도는 인문학적으로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된다. 모든 사안과 문제 앞에 인문학이란 단어가 차고 넘치지만 실상은 인문학적 태도가 전무한 한국의 인문학 열풍, 그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문정신은 없다. 비행기 타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때 보이는 빨간 십자가의 풍년이 오히려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부패를 상징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의 인문학 열풍 또한 그런 처지로 타락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사회가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그러다가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울분을 품고 살다 고공농성을 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삶을 외면하면 안 된다. 대한민국 사회가 인문학, 즉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중시하는 열풍에 빠져있었다면 어린 학생들이 물에 빠져 죽어간 세월호에 사건에 대해 그리 무능한 대처와 무책임한 행보를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땅의 학부모들이 진정 인문학적이라면 인문학적 상상력 대신 점수따기식 학습과 수량화된 현재 학생 평가 시스템 안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밀어넣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무늬를 존중하는 인문학은 인간 현존 하나하나의 삶과 호흡에 관여하고 그 아우성과 몸짓에 일일이 반응하면서 최대한 성심껏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공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인문학이다


    결론적으로 인문학이란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강박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나의 아픔을 치유받을 수 있을까를 둘러싼 집착도 아니다. 오히려,“세상이 이렇게 불합리 한데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이것은 죄악이 아닐까?”를 묻는 것이 인문학이고, 타인의 불행과 나의 행복사이에 있는 함수와 변수를 계산하여 내 행복의 정체를 의심하고 타인의 불행에 대해 면목없어해 하는 마음이 인문학이다. 물론, 인문학은 나의 아레테를 발견하고 계발하여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는 긍정의 정신이고, 고통과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것으로 인한 상처로 부터의 회복을 바라는 희망의 변증법을 포함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인문학적 의제는 우리시대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함께 힘을 모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비참과 탄식을 극복할 방도를 모색하는 비판의 정신이어야 맞다. 그 마음으로 신자유주의가 선사하는 불편한 진실과 타협하지 말고 우리 시대 가장 비천한 이들과의 연대에 동참하는 것, 우리사회 속에서 잊혀지고 가려지는 진실들을 외면하지 않고 들춰내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진정한 우리의 스팩이고, 그 순간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힐링을 맛보게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액체근대』 (서울: 강, 2009). [본문으로]
  2. 서보명 지음, 『대학의 몰락』 (서울: 동연, 2011). 65-81 [본문으로]
  3. 『周易』 「賁卦」. “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_ 천문을 살펴서 시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문을 살펴서 천하를 화성한다.”- 이승환,“동양의 학문과 인문정신”, 『인문정신과 인문학』(한국학술협의회 편, 아카넷, 2007), 29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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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생각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함석헌 생각”이란 제목은 함석헌의 생각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만이 아니라 ‘생각’을 함석헌 사상의 독특한 면을 담아내는 개념 또는 고유명사로 보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함석헌에게 생각은 지적인 작용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의 지향성과 방법론까지 드러내는 개념적인 용어로 볼 수 있다. ‘생각’만이 아니라 함석헌의 글에서 등장하는 몇 개의 단어들을 부각시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폭넓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여기서 다룰 단어들은 함석헌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담아두었던 ‘철학,’ ‘소리’, ‘자리’, ‘생각’ 등이다. 이와 관련해 내가 이해하는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굴곡진 고난의 역사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특히 4.19 혁명 이후 한국을 위한 사상과 철학의 전통을 유산으로 남기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에 대한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산이 제대로 다음 세대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느낌도 이 글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따라서 나의 관심은 함석헌 사상의 현대성을 모색하고 그의 사상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는데 있다.




함석헌과 철학 (1)


    2008년 세계철학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1900년에 처음 개최되어 4년마다 열리는 국제적인 철학대회였지만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렸다. 개최 국가의 철학적 전통을 소개하는 특별한 분과모임에선 함석헌과 유영모의 철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발표됐다. ‘현대철학의 재고’라는 그 대회의 주제가 철학을 서양이라는 개념의 영토를 벗어나 이해하자는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함석헌과 유영모를 다룬 논문들은 대게 두 사상가의 학문에 담긴 철학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이 두 사람의 학문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저술은 많았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결국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면이 있었다. 철학이 무엇이고 또 무엇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질문은 지금도 묻게 되는 철학사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철학에 대한 다양한 새로운 정의와 이해가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지만, 다양성이 철학적인 작업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국제적인 철학대회가 철학성을 증명하거나 대신할 수도 없다. 이 부분을 면밀히 다루지 않으면 철학적인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기서 철학이란 일반적으로 그 용어로 지칭되는 서구 사상의 전통을 말한다. 그 전제 하에 함석헌이 철학에 대해 갖고 있었던 생각과 자신의 사상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이해했는지, 그리고 함석헌 사상의 철학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그의 글을 어떻게 철학적 행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개괄적인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20세기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함석헌의 사상은 학문적인 근거지가 없었다. 철학이라 하기엔 엄밀함이 떨어졌고, 신학이라 하기엔 다원주의적인 종교학 측면이 강했고, 역사학이라 하기엔 추상적이었다는 게 흔히 듣는 이유였다. 나름 근거가 있는 이유들이지만, 그 근거는 전공 중심적인 학문의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함석헌이 추구했던 학문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함석헌이 이루어놓은 학문적 업적은 오히려 근대적인 대학에서 전공을 중심으로 공부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전공 분야의 방법론에 고립시키는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함석헌은 근대 학문의 인위적인 경계에 갇혀있지 않았고 거기서 출발한 방법론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함석헌은 종교적으로는 다원론을 견지하면서도 형이상학적인 일원론을 지향하고, 사실의 증거에 충실하면서도 영적인 증언의 진리를 믿었고, 현실정치의 변혁을 위한 운동가의 역할과 예언적인 지식인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었다.


    함석헌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어디서부터 할까. 이 질문이 쉽지 않은 이유는 함석헌이 자신이 철학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는 말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석헌의 이런 입장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부정한 것은 철학적 자아만이 아니라, 그 어떤 학문의 지식인이나 전문가로서 규정되길 거부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적인 자기부정은 함석헌과 철학의 문제를 철학적 자아의 관점에서 접근할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함석헌의 글 속에 ‘철학’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가 1960년대에 쓴 글 가운데 철학이라는 단어가 제목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은 함석헌 자신이 때때로 철학을 한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철학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는 것은 분명하다. 1960년대 초반은 그의 사상이 학문적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무르익었던 시기였다. <생활철학>과 <누에의 철학>이 그 시기의 글이었고, <저항철학>은 몇 년 뒤 1968년에 쓴 에세이였다. 60년대 초반에 쓴 또 다른 의미 있는 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개정판에 쓴 서문이다. 1965년에 출판된 4차 개정판을 내기로 결정하고 본문을 수정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이었다. 당시 그의 완숙해진 사상적 직관의 능력이 그 개정판의 구성에 잘 투영되어 있다. 철학이란 단어가 제목에 없지만 철학적인 의미와 비중이 있는 글로 “한국의 발견”과 “우리민족의 이상”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두 함석헌을 철학적인 사상가로 재발견할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글들이다.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룰 계획이지만 그가 1960년대 초반에 그런 글들을 쓰게 된 것은 4.19 혁명을 한국 역사의 분기점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한국을 위한 철학을 만들고 실천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시기 함석헌이 이루고자 했던 학문적 성과는 미국의 에머슨이 19세기 미국의 정신적 독립을 주장하고 미국의 학문을 제창했던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앞으로 다룰 예정이다.


    <생활철학>은 1961년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의 국토건설단에 선발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함석헌은 그 글에서 당시 서구 철학에 대한 그의 인상이 담겨 있고,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단순하게나마 정리하고 있다. 현대의 철학이 분열적이고 논쟁적인 것으로 변한 것에 대한 비판도 했다. 철학의 과학주의가 철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도 파악했다. 함석헌은 철학이 분석과 대립을 넘어서 지혜와 생활과 삶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그에게 과학주의는 인간의 정신을 약화시키는 기술적인 사고의 지배와 과학에 대한 믿음이었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철학으로 등장했을 때 그것은 힘의 철학과 폭력의 정치로 변모하게 된다고 했다. 자연의 법칙만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뜻과 정신과 절대를 이야기 했지만, 철학적으로 그 입장은 반-자연주의(Anti-Naturalism)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철학과 종교의 영역을 ‘맛봄’이라는 미학의 경지로 이해했고, 함석헌에게 그것은 통합의 경지였다. (“나도 인생이야”라는 시에서 등장하는 “혀 아래 맛으로 듣는다”라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예리한 관찰력은 - 이 후에 다루겠지만 - 그의 사상이 추구했던 통합을 미적인 감각으로 이해한 예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철학이 상실한 삶과 통합의 지향성을 지적해주고 일깨워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함석헌은 철학과 종교가 이성과 믿음으로 나뉘고 절대적으로 다른 방법론의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철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끝없이 믿음을 얘기했던 이유는 그런 학문적 경향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기술적인 사유가 만든 정신적 혼란과 냉전의 위기로부터 세상을 건져낼 희망은 믿음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철학이 회의와 불신을 설명하는 이론이 되어가는 경향에 맛서 그가 제시한 믿음은 맹목적으로 선언된 믿음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과제이자 방법론이기까지 했다. 


철학과 한국


    함석헌이 요구한 한국 역사에 대한 반성은 철학적 반성까지 포함했다. 그에게 한국은 철학이 없는 민족, 아니 철학적 자기표현을 하지 못했고 그 의지를 상실한 민족이었다. 중국의 고전과 언어로는 한국의 정신을 드러내는 그런 자기표현을 할 수 없었다. 영어로도 한문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만든 민족의 혼이 있었다. 서구의 학문도 불교와 유교도 한국의 지적인 전통이 되기에 충분치 못했던 이유는 한국의 언어로 생각해서 만들어진 사유와 전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1963년 영국의 한 퀘이커 대학에서 했던 <우리 민족의 이상>이라는 강연에서 60년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철학의 문제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중국과 서양의 개념으로 한국 역사의 경험을 설명하려는 지적인 종속과 나태함을 질타했다. 사상의 빈곤은 수입된 개념과 모방을 통해 지식을 권력으로 행사하고 이득을 취하려는 지식인들 때문이었다. 한문의 사유를 아직도 하고 있고, 영어가 등장해 지배적인 언어가 된 역사는 한국 민중들의 고난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억압은 정치적인 무력행위만이 아니라 지식과 개념으로도 가능했다. 그 결과 민중들은 높은 뜻을 추구할 의지가 꺾인 채 숙명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함석헌에게 한국에 철학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미래도 없었다. 어제, 그제, 오늘, 모레는 있지만 ‘내일(來日)’은 한자이고 고유한 한국말이 없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표현이었다. 철학 없는 숙명적인 세계관으로 사는 것과 ‘내일’이 없다는 것을 동일한 현상으로 본 것이다. 철학이 없는 게 아니라 철학을 잃어버린 것처럼, 내일이란 말을 상실한 것이었다. 함석헌에게 <한국의 발견>은 철학적 자기발견을 의미했고, 한국의 미래는 한국에서의 철학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에게 철학이 없는 민족은 내일이 없는 민족이었다. 그가 찾았고 구현하고자 했던 새로운 한국은 내일이 있고 철학이 있는 한국이었다. 이 과정은 그에게 한국의 사상을 표현할 언어를 재발견하고 한국인의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함석헌에게 민중의 언어와 민중의 방식으로 할 수 없는 철학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철학의 가치는 인간의 자기이해와 자기표현에 있었고, 이는 민중의 현실과 경험의 한 축이었던 그들의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찾을 수 없었다. 함석헌에게 60년대 초반 한국에서 필요했던 것은 경제적 발전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혼이 담긴 언어로 구성된 새로운 철학이 필요했다. 함석헌은 된 자신의 강연과 글을 통해 그런 문제를 진단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새로운 철학을 예시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하기 위해 동양과 서양의 고전 연구도 필요했다. 특히 한국인에게 적합한 자기 이해를 위해서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서양의 가르침이 아니라 동양의 고전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양의 고전이 한국의 고전이 될 수는 없었다. 여기서 함석헌은 고전에 대한 색다른 이해를 내놓는다. 한국의 고전은 한국인 자신이었고 한국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서구 사상사에서 많은 고전에 대한 정의가 등장했지만, 함석헌의 내면의 고전이란 개념은 고전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 마음속 혼에 있는 고전을 조명하여 발견하는 것이 자아의 발견이었고 영혼을 돌보는 행위였다. 자아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은 철학의 고전적인 의미에 속한다. 영혼의 돌봄은 다른 민족의 말과 개념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에, 민족 고유의 언어를 찾고 다듬는 것은 그 자체로 영혼을 돌보는 철학의 행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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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말고 동무 I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나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 맞지?’


    지난 글에서 필자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어 쉼을 누리지 못하여 세계의 흐름에 반대되는 고정되고 틀에 박힌, 그래서 안정적인 나와 세계를 찾고자 ‘친구’라는 허위로 도망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밝혀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안심, 안정, 안돈’이라는 감정의 돌을 꼭 껴안은 채 침몰해 가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다시 의문을 품자면, 왜 사람들은 안심, 안정, 안돈에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두며 살아갈까? 2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 ‘바깥’과 창구역할을 하는 휴대폰을 바꾸고, 2년이 지나면 삶의 터전인 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이 배운 지식이 4년 후 졸업할 즈음에는 ‘헌 지식’이 되어 있고, 공학기술자가 지닌 지식의 수명은 5년이 되지 않아 폐기/신설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데도 평균수명은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에 육박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정초해야 할 기초가 사라지며, 뿌리내려야 할 지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마음 둘 곳이 없어지니 그야말로 고립무원이다. 고로 이 초고속시대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동색(同色)이었던 친구를 갈구하고,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자동적으로 가리키는 혈통으로 회귀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찌할 도리 없고, 피할 수 없는 세상 풍파를 어떻게든 면해 보고자 친구와 가족으로 퇴각하는 개개인들의 회귀를 침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불러야만 하는가? 김영민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온갖 연줄로 얽혀든 사회 속의 우리는 ‘남’이 되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고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르’게(198) 된다고 말이다. 즉,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눈빛으로 두려움을 읽고 눈빛으로 서로에게 말을 건넨다. 어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 ‘군중(또는 대중)’의 무리에서 자칫 떨어져 도태될까봐 두려워하는 공포를 말이다. 한 번도 ‘남’이 되어보지 못한 존재들이란 바로 그런 존재들이다. 이는 일종의 유아들이 겪는 분리불안 증세와도 그 종류가 비슷한 것일텐데 부모로부터 몸은 떨어졌으나 경제적, 사회적으로 자기 두 발로 서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폐적인 퇴각’(204)이나 ‘모든 종류의 실천과 연대를 방해하고 금가게 하는 냉소’(200)만으로 언제까지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가상의 현실 안에서 자기를 확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김영민이 제안하는 동무는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


동무, 듣는 관계


    친구라는 동색(同色)으로 향하는 자폐적인 퇴각을 막고 서늘하고 버텨 서서 같은 것(同)이 없음(無)을 통해 세세한 버릇의 양태를 서로 고치고 서로 성장시키는 동무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듣기’가 필요하다.

    여기서의 듣기란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잘 듣는 수동적 듣기’(210)를 말하지 않는다. 먼저 우리는 친구, 연인들간의 듣기는 매우 수동적인 듣기 방식이란 것을 우리는 알아채야 한다. 친구와 연인끼리는 별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저 하던 말을 하면 되고, 서로간에 조율된 ‘선’ – 여기의 선이란 ‘경계(Line, 또는 Borderline)’라는 의미와 선(Good, 또는 Virtue)’ 양 의미를 포함한다 – 에 의지하여 말하면 된다. 굳이 내 의지를 다해 미간을 좁히며 자세히 듣지 않더라도 맘놓고 떠들고 들어도 되는 듣기다. 김영민은 특별히 이런 말하기와 듣기의 풍경이 이루어지는 공간과 자리로 ‘술자리’를 많이 언급하는 편인데 대체로 아래의 사진의 분위기와 거기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상상해보면 된다. 아래와 같은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김영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술자리가 얹힌 ‘기운(Stimmung)’, 혹은 어떤 ‘두께’ 속에서 해반주그레하게 피어오르는 낭만주의,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 올라오는 대화적 휴머니즘은, 결국은 바로 그 기운 탓에 실없이 부풀어 오른 개인의 자잘한 자기도취에 기대고 있다. (380)


    이러한 ‘자잘한 자기도취’가 왜 문제인가? 바로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버릇, 혹은 그 버릇의 지향과 지형이 되먹여져 재생산될 기존 세계의 언어 수행, 생활의 양식 때문이다. 고로, 김영민이 제안하는 동무 간의 듣기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210)인 듣기이다. 시공간의 동질성에 근거한 추억과 의리의 과거적 관계는 ‘듣지 않고’(211)도 말할 수 있지만 동무 간의 듣기는 섬세하고도 서늘한 듣기, 즉 ‘버텨듣기’를 말한다. ‘사사화된 정리의 늪 속으로, 그 한 패거리의 움직임 속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저락하는 ‘친구’를 불러 세우고 일견 메마르고 서늘한 행위(211) 속에서 동무 간의 듣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동무는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다.


듣기의 본적(本籍), 침묵


    우리가 서로 만나 성장하는 사이가 되려면 실로 보낸 시간과 경험과 추억의 가짓수를 늘려서 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작업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돌보고 수행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그 방법을 한 번에 깨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삶의 양식과 ‘버릇’의 문제로 귀결된다. 곧, 다시 지적한 바대로 ‘일상의 만남/사귐의 구태를 번연히 고수한 채 새 이름의 기치 아래 재집결해서 서푼어치 인식의 확장을 꾀하거나 각오를 다진다고 대체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인가?’(205)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우리가 입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동무 간의 듣기를 하기 위해서는 ‘긴절한 침묵(209)’이 절실히 요청된다. 꺼지지 않는 카톡 대화방 알림 속에서 잡담과 수다와 고백을 일삼으며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회집(209)하는 게 ‘사귐과 교제’가 될 수 없다. 타자의 말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그의 말이 성성하게 살아 있는 그대로 응대하고 말의 표준화, 정식화, 그리고 축약화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210), 그저 듣기라는 행위가 하나의 ‘풍경’이나 ‘배경장치’가 아니라 관계맺음의 전면적이고 절대적인 행위임을 아는 것, 거기서 바로 동무 간의 듣기는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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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종교개혁'에 대하여[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기독교인 대상의 강연을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종교개혁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 되는 해이니 종교개혁이 적잖은 주목의 대상이 될 것임은 예상된 바다. 그래도 목사나 장로, 그밖에 열성신자들 정도나 관심을 갖지 않겠나 싶었다. 

   하지만 막상 기념일을 두 달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그 현상은 생각보다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학술단체들이 기획한 각종 포럼과 강연, 출판 등이 실행되고 있고, 교단별 혹은 연합행사로 준비된 기념행사, 교육프로그램, 연구모임, 기도회, 각종 경연대회 및 문화행사 등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기념연주회, 전시회, 기타 공연 등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순금의 기념주화, 크루즈 여행을 포함한 종교개혁투어 상품을 비롯해서 에코백, 머그잔, 텀블러, 배지 등 다양한 기념상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교회별로도 전 교인 대상 프로그램과 소모임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데가 많다. 그리고 목사들은 종교개혁을 다루는 설교를 수없이 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영향력은 개신교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에서도 종교개혁을 되새기는 각종 기획들을 시작했고, 비개신교권 출판계와 여행업계도 상품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또한 정치인들도 도처에서 비교적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그 평가는 유보하고, 현상만을 보면 개신교의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양상이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고 기능에 있어서도 다양한 주체들이 영역들을 각기 점유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주체성 또한 상당히 높은 종교여서 도처에서 독자적이고 자발적으로 추진되는 다중적 기념 프로그램들은 굉장히 다양하고 정교하다.  

   그런 효과인지, 웬만한 개신교 신자들은 종교개혁에 대해,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적잖은 정보를 갖고 있고 또한 관심도 많은 편이다. 아마도 내게도 이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는 것은 그런 현상의 일부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념행사를 주도하는 이들은 압도적으로 보수적 개신교 세력인데, 준비 양상이 보수주의 일색은 아닌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보수 성향이 강한 목사, 신학자, 평신도들도 종교개혁을 호교론적 기회로 삼기보다는 ‘오늘의 실패’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자는 의견이 적잖다. ‘제2의 종교개혁’ 운운하는 주장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쇄신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현재 한국 개신교가 그 지도자들 다수의 관점인 호교론적 태도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전히 사회 전반에 비해 개혁의 의지나 수위가 낮은 편이지만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제2의 종교개혁에 관해 의견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게 질문한 사람들의 요지이기도 하고, 사회 일반보다 결코 적지 않은 적폐를 가진 종교임에도 개혁의 의지나 수위에서 부족한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점에서, 개혁적 담론들이 표방하고 있는 주장들 위에 의견 하나를 더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500년 전의 종교개혁이 서양의 근대를 추동하는 계기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후 서양 사회는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으니, 서양의 근대는 세계의 근대이기도 하다. 여기서 서양의 근대가 무엇인지를 내가 충분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국경의 탄생’이라는 특징으로 근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가령 전근대의 국가에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변경지대가 있었지만 근대국가에는 국경이 있다. 변경지대가 면(面)이라면 국경은 선(線)이다. 즉 면으로서의 변경이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경계가 명료하지 않은, 일종의 대화적 중간지대를 의미한다면, 선으로서의 국경은 그 불명료함을 최소화하는 단절의 경계를 뜻한다. 그런 맥락에서 인권이든 복지든 민주주의의 중요한 제도들이 국경 ‘안’에서 형성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종교도 국가종교로 발전했고,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도 국가와 종교의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이 변화의 출발점에 종교개혁이 있었다.

    그런데 지구화 현상은 그런 국경의 지위가 크게 약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제 국경을 넘나드는 수많은 요소들이 사회 속에 가득하다. 그중엔 국경을 넘는 이주민, 양분화성 성(sex)의 국경을 넘는 다양한 성(동성애, 트랜스젠더 등) 등도 있다. 인권의 수많은 요소들은 이렇게 국경을 넘어서는 것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두 번째 종교개혁은 국경의 해체 시대를 준비하는 종교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최근 성소수자나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을 강조하는 신앙은 가장 대표적인 종교적 개혁 대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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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08252025015 이 글은 경향신문 2017. 8. 25일자 오피니언란에 실린 칼럼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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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심범섭*



   지난 번 글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의 한 행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번 글에서는 이 행 앞에 나오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수식어구와 (해당 문장과 함께 시에서 화자의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나타내는) 바로 다음 문장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문장을 이야기하겠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두 구절에 대한 글을 두 번에 나누어 싣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해석 일부를 말씀드리고 싶다.

   먼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별”에 어떤 뜻을 부여할 수 있을까? 김응교는 그의 책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니라 하든 갈망이라 하든 조국이라 하든 그 어느 별이라도 삶의 근원일 겁니다.”[각주:1]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 . . 별이라는 소재는 . . . 순수한 이상에의 동경을 표현”[각주:2]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현대시인론>에서 박철석은 “서시”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작품에 보이는 ‘하늘’, ‘바람’, ‘별’은 윤동주 시를 대표하는 사적(私的) 상징으로서 죽음이 사랑으로 변용된 릴케적 원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람’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데아 세계라 할 수 있다.[각주:3]


   이 인용문의 둘째 문장은 좀 이해하기가 힘들다. 지상의 가변적인 존재이며 작품 안에서도 어떤 시련 같은 것으로 더 쉽게 이해되는 바람을 이데아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별’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박철석이 글을 쓰다가 실수로 ‘별’ 대신 ‘바람’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가 과연 실수를 했던 아니든 나 자신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의 “별”에 권영민의 말을 빌리면 “순수한 이상”, 박철석의 표현을 빌리면 “이데아 세계”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는 김응교가 언급하는 “삶의 근원”이라는 의미와는 상통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각주:4]

   그렇다면 별로 표상되는 이상을 노래한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러 가지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먼저 별과 노래 사이의 대조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한 가지 의미를 얻어보고 싶다. 밤하늘에 높이 멀리 떠 빛나는 별은 여러 특수한 장소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바라볼 수 있으므로 쉽게 보편적이고 숭고한 이상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노래는 특정한 문화에서 태어난 특정한 리듬과 가락, 그리고 특정한 언어가 어우러진 것이다. 1990년대 초 크게 인기를 누린 신승훈의 노래 “미소 속에 비친 그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별빛보다 환하진 않지만 그보다도 따사로와.” 내가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사람은 별에게는 없는 따듯함이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노래는 구체적이고 따듯한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드높고 영원한 보편적 이상을 내가 오늘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에 담아 따듯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윤동주의 다른 시 “별 헤는 밤”에는 “나는 별 하나에 /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의 앞과 뒤에서 시인은 별 하나하나에 “추억, 사랑, 동경, 어머니,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 강아지, 토끼, 노루,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을 연결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별을 노래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노래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주어진 시구에 대한 이해를 넓혀 보고자 한다.[각주:5] 노래의 특성으로서 부르고 듣는 사람의 생명력을 증진시키고, 영속 또는 영원을 암시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통합하고, 어떤 의미(“의미 있는 인생” 같은 말에서처럼 진지하고 좁게 정의되는 ‘의미’)를 담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특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이 가운데 통합과 의미 전달 기능은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생명력을 증가시키고 영속을 암시하는 특성은 노래에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리듬이 있는 것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의 리듬은 “음의 장단이나 강약 따위가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네이버 국어사전) 같은 말로 정의되는 리듬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반복되는 움직임” (같은 사전),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어떤 행동이나 상황이 정기적으로 반복되거나 교체됨을 동반하는 조화롭고 질서있는 움직임’[각주:6]처럼 더 포괄적인 정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포괄적인 정의는 우리가 일상에서 ‘리듬’이라는 말로 가리키는 현상 일반을 아우른다.

   중요한 것은 이 포괄적인 정의가 말하는 리듬이 이 세계의 거의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한 본질적인 요소 또는 원리라는 사실이다. 자연의 영역에서는 태양과 지구의 움직임, 계절의 변화, 밤낮의 교체 등에 어떤 리듬이 있다. 우리 몸을 보아도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 중 하나인 심장의 활동은 단순한 리듬으로 뛰는 것을 한 요소로 한다. ‘뇌파’의 존재는 우리의 인지 및 정서 경험의 한 측면이 리듬임을 알게 한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배가 고프고 잠이 오는 평범한 경험도 우리 몸이 어떤 리듬을 따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물리학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지해 있는 사물도 깊이 들여다보면 아원자 입자(subatomic particles)들이 리듬있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 차원에서도 우리는 리듬에 따라 살아간다. 해마다 명절을 쇠고 기념일을 지키고 생일을 축하할 때 우리는 리듬 속에서 존재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리듬의 존재이다.

   노래는 리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리듬을 명확하게 느끼게 한다. 어떤 리듬은 너무 미세하여, 어떤 리듬은 너무 거대하여 제대로 감지할 수 없지만 노래가 구현하는 리듬은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 자체로서 정서적 영향력이 큰 소리라는 현상을 매개로 하므로 이 리듬은 더욱 우리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 같다. 노래를 통해 이러한 리듬을 만나는 것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 우리가 더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물론 모든 노래가 한 사람에게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2017년 4월 20일(목) KBS에서 방영한 <문화의 향기>에서 예술감독 송승환은 그가 기획한 뮤지컬 <난타>의 호소력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심장의 박동으로 살기 때문에 리듬에 원초적인 감흥이 있습니다.” 이 말은 리듬의 존재인 사람이 음악의 리듬을 만났을 때 생명력이 더해짐을 느끼는 현상을 잘 요약해서 표현한다.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에 생명력을 북돋아 주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할 때 기억나는 영화 장면이 하나 있다. 2003년 미국 영화 <엘프 (Elf)>는 환상적이고 유머러스한 내용으로 크리스마스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 산타의 썰매가 뉴욕 센트럴 파크에 추락하는데, 썰매가 다시 날아오르려면 크리스마스 정신이 더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조비(Jovie)가 사람들 앞에 나서 이렇게 말한다. “크리스마스 신명을 퍼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듣도록 크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산타 클로스가 마을에 오네 (Santa Clause is Coming to Town)”을 부르고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따라불러 썰매는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크리스마스 정신이 사랑과 나눔과 감사의 정신이며 그러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할 때, 노래를 부름으로써 이 정신이 증가한다는 것은 노래 부르기가 우리의 행복을, 곧 우리의 생명력을 더 증가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 강영계는 그의 책 <죽음학 강의>에서 장례식의 의미를 논의하는 가운데 노래의 생명력이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예를 소개한다.


각종 음식과 장송곡은 일종의 상징이야. 죽음은 말 그대로 무이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가 완전히 무화되지 않고 아직 삶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는 거야. 또 죽은 자에게는 악마(마귀)가 들러붙기 쉽기 때문에 . . . 고인이 강한 생명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인을 해칠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서 산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거야.”[각주:7]


   생기를 더해주는 힘과 더불어 노래에 영속과 영원을 암시하는 특성이 있는 것은 노래의 리듬과 관련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노래의 리듬이 일깨우는 생명력 자체에 영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생명력은 생명의 지속을 뜻하며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영원히 살고 싶은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리듬은 어떤 요소가 반복되면서 나타난다는 사실도 영속과 관련이 있다. 어떤 것이 되풀이될 때 우리는 은연중에 이 반복이 계속되리라고 기대하는 듯 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관여하겠지만 반복은 그 자체로서 반복되는 것을 긍정하기도 한다는 사실도 무관하진 않으리라 본다. 리듬에 실린 우리의 의식에는 작지 않은 관성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조르바와 소설의 화자 ‘나’가 조르바의 산투리 연주에 맞춰 함께 노래부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때 경험하는 내적인 변화를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의 근심은 흩어졌고, 사소한 문제는 사라졌고, 영혼은 절정에 이르렀다. . . . 크고 작은 걱정들, 모든 것이 푸른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고, 이제 남은 것은 강철로 된 새, 노래하는 인간 영혼밖에 없었다.


   이 구절에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생명력이 넘쳐나는 경험과 영원을 감지하는 경험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이해한다. “노래하는 인간 영혼”을 “강철로 된 새”라고 비유할 때 “새”는 자유로움, 곧 비등하는 생명력을, “강철”은 영속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노래와 리듬과 반복과 영원을 서로 연결시켜 생각할 때 지나쳐버릴 수 없는 현상은 우리가 많은 경우 마음에 드는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거나 듣는다는 사실이다. 우선 우리가 어떤 노래를 다시 경험하고 싶은 것은 이 경험에 (비록 늘 밝은 정서나 행복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은 가치는 영속할 자격이 있는 가치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영원한 가치를 되풀이해서 경험하고 싶어 우리는 그 통로가 되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거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각주:8] 이때 노래의 리듬, 곧 이미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어 노래가 되풀이될 때 반복의 반복 현상을 보이는 리듬도 영속할 자격이 있는 가치를 경험하는데 기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구체적인 노래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노래의 리듬이 어떤 방식으로든 어느 정도로든 다시 경험하고 싶은 노래의 감흥에 기여한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럴 때 노래의 리듬은 영원이라는 개념과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노래에 별과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상황과 맥락을 반영하는 특성이 있다고 했고, 이어서 노래 자체에 생명력 증진과 영속성 암시라는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이런 생각을 모두 아울러서“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이해한다면 ‘보편적이고 숭고한 이상을 내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여 생명력을 증진하고 영속적인 의미를 창조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그 다음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도 잘 어울릴 수 있다고 보인다.

   다음 글에서는 “노래하는”에 담긴 통합 및 의미 전달의 함의와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또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 필자소개  

영어강사. Rice Univ 언어학 박사(Ph.D) 후에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과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 웹진 <제3시대>



  1. 문학동네, 2016년, p.347. [본문으로]
  2.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년. [본문으로]
  3. 민지사, 1998년, p.358. [본문으로]
  4. 마이클 퍼버(Michael Ferber)가 쓴 <문학상징사전 (A Dictionary of Literary symbol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에서는 별이 서양문학에서 상징했던 의미로서 ‘달, 해, 영광, 영웅, 황제, 명성, 구원, 천사, 방향, 운명, 기후, 점술,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사랑하는 사람, 셀 수 없이 많음, 1년 중 시점(절기, 계절), 인간 의지에 대한 영향력, 탄생과 죽음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 등을 제시한다. 한국 시인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별”의 의미를 얻기 위해 서양 문학사에 등장하는 “별”의 의미를 참조하는 것은 쓸모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윤동주의 독서에 서양 문학 작품이 포함되었고 특히 그가 릿교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가 영문학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서양 문학사에 나오는 별의 뜻을 보면 대개 진중하거나 거창하거나 고상한 뜻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별의 연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식을 우리는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의 다음 구절에서 만난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본문으로]
  5. 물론 이 시에 나오는 “노래”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의 ‘노래’보다는 어떤 다른 활동이나 태도를 뜻하는 은유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은 듯 하다. 하지만 어떤 은유를 이해할 때 그 문자적 의미의 함의를 통해 의도하는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당연하고 적절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노래’의 문자적 의미에 연결된 의미들을 탐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문으로]
  6. 이 정의는 다음 두 사전에 나오는 ‘rhythm’이라는 표제어의 정의에 바탕하여 형성했다.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4th ed.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Unabridged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본문으로]
  7. 새문사, 2012년, p.153. [본문으로]
  8. 영원과 반복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생각을 배운 것은 마크(Marc)라는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 <못된가톨릭(BadCatholic)>에 올린 “의례, 영원의 증거(Ritual, Evidence of Eternity)”(2013년 4월 1일)라는 글에서이다. 이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영원은 반복을 요구한다 (Eternity demands repetition)”이다. http://www.patheos.com/blogs/badcatholic/2013/04/ritual-evidence-of-eternity.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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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교육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한참 종북몰이를 하는 야당 국회의원이 나오는 TV를 시청하던 한 초로의 택시기사가 내게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저렇게 말하죠?” 전임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말한 그는 평생 보수를 지지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저런 말에 짜증난다고 토로했다. 그는 영화 카피 같은 말 한마디를 던지며 식당 밖으로 나갔다. “저 양반(야당 국회의원)의 시계는 거꾸로 가나봐!”  

   순간 그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역을 하는 한 여성 목사가 떠올랐다. 내 생각엔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목사 선배들의 계보를 이을 만한 대단한 인물이어서, 후배임에도 늘 경이롭게 올려다보는 이다. 그는 얼마 전 한 보수적 교단 산하 ‘이단피해대책 조사연구위원회’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교단 총회에 제출된 안건에 따라 이단성 여부를 조사 중이니 자기들이 요구하는 자료를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신학적 관점을 달리하는 타 교단 소속 목사에게 이런 식의 공문을 보낸 단체의 무례함의 근저에는 자신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은 악마의 마수에 걸려든 자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예상대로 그 단체와 교단에 조롱과 비난이 폭주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 법이다.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이들은 대개 무수한 대중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위용’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우선 쪽수가 밀린다고 생각했는지 동료들이 몰려왔다. 이른바 ‘한국교회 8개 교단 이단대책위원회’라는 단체가 입장 발표를 했다. 이들 8개 교단은 한국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신자 수와 교회당 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 그 발표의 내용은 문제의 목사에 대한 이단성 조사에 공조하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퀴어성서 주석’의 번역을 주도했고 성소수자 인권 증진 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성소수자’ 문제가 그들의 무례한 행동의 요체였다. 그들에 의하면 성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성서를 ‘일점일획도 어길 수 없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불가피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가령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는 <레위기> 20장13절을 들이대며, 성소수자 인권이라는 건 ‘극단적인’ 반성서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과연 게이 간의 사랑을 문제시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는 이 본문을 제사장 중심의 정치체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제사장적 순결주의를 정치적 어젠다로 활용한 흔적으로 해석하였다. 물론 그들은 내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니, 그들 식으로 이 본문을 보자. 이제 그들은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의 사랑에 대해서 좀 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성서는 트랜스젠더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않고 있고, 레즈비언에 대해선 억지 해석이 필요한 텍스트들이 몇 개 있을 뿐이다. 더욱 문제인 건, <레위기> 20장의 16개나 되는 극형 목록에 ‘남의 아내와 성관계를 한 자는 사형에 처하라’는 구절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목사들의 성추문 사건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단들은 성추문 주역인 목사들에 대해 경미한 징계를 내리거나 아예 모른 체한다. 더구나 이것은 십계명에도 등장할 만큼, 남자 간의 성관계보다 엄중한 죄에 속한다. 그렇다면 그들 식의 해석을 따른다면 목사의 성추문을 묵과한 목사들 모두는 이단 심판의 대상이다.

    이런 게 바로 이단몰이의 특징이다. 성서를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극한적인 증오를 퍼붓는 것이다. 마치 종북몰이가 그렇듯이.  

   이단몰이까지는 아니지만, 최근 위의 8개 교단들을 포함한 개신교의 무수한 교단들에선 여성혐오주의도 커다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령,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단에 속하는 한 교파는 총회 대의원 가운데 여성이 1.6%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하는 안건이 제출되었는데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대의원들이 그 제안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여성 대의원이 가장 많다는 교단도 10~15%에 그치는 형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교단들에서 여성은 목사도 장로도 될 수 없다. 그러니 총회 대의원 비율은 당연히 0%다. 이런 놀라운 비율은 전 세계적으로 기록에 남을 만한 일임에도 한국 교회에선 말도 꺼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 교단 총회장의 분위기를 전한 신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거긴 여성혐오주의가 토네이도처럼 휩쓸고 지나간 현장이에요.” 

    한국 개신교는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 여성혐오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전 지구적으로 인권의 관점에서 가장 주목받는 범죄다. 그런 범죄가 불꽃을 일으키는 현장, 그곳에 일부 목사들이 있다. 그들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06302108015 이 글은 경향신문 2017. 6. 30일자 오피니언란에 실린 칼럼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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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14 : 대중문화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설국열차


    <설국열차>란 특이한 제목의 영화가 묵시록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그 영화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알고 보니 그 영화의 원작은 이미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만화였고, 미국에선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기대하면서 기다리던 마니아들이 많았었다. 다행히 동네 도서관에 영문 번역판이 있어서 빌려다 보았다. 그런 정성까지 들인 이유는 묵시록 장르의 소설이 한국에서 어떤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고, 또 서구사상의 깊은 열망이 담긴 묵시록이 한국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최근 <부산행>이란 좀비 영화도 동일한 궁금증을 갖고 보았다. 비서구권에서 일본은 핵폭탄의 경험을 통해 묵시록의 영화가 일찍부터 등장했고, 대재난과 몰락의 서사는 일본의 대중문화 속에 중요한 일부로 남아있다. <설국열차>는 지구에서 생명이 끝날 때 멈추지 않는 기차에 올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고, <부산행>은 죽은 자가 깨어나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좀비영화의 일종이다. 좀비 영화가 지속해서 유행하는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패러디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미 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고도 죽지 않고 좀비와도 같이 사람들을 파멸의 길로 끌어들이는 자본주와 이를 피해 쫓겨 다녀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속에서 찾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좀비는 바이러스를 통해 유지되고, 인류가 멸종하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묵시록의 의지로 무장해 있다. 두 영화에서 묵시록에 대한 한국적인 해석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찾기 힘들었던 건 그런 의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설국열차>에서 한국인 주인공의 등장은 묵시록의 주제를 희석시키기도 하지만, 원작에서부터 드러나는 세상이 망한 이후에도 인간사회의 갈등이 존재한다는 문제의식은 영화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설국열차>의 기차는 목적 없이 궤도를 돈다. 목적이 없는 게 아니라 엔진이 꺼지지 않고 끝없이 얼음과 눈 위의 궤도를 돌아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움직임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기차 안에는 끝나는 세상을 피해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있다. 남들보다 먼저 기차를 탄 사람들은 엔진이 있는 앞부분에 자리를 잡고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계급과 차별과 억압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곳에 종교가 없을 수 없다. 기차를 지키는 게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기차는 종교였고 엔진은 신으로 섬김을 받는다. 속도가 떨어지는 기차의 엔진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원작의 줄거리다. 영화에선 기차가 멈추어도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와 같은 최근 미국의 포스트 묵시록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토피아의 건설은 세상이 철저히 망해야만 가능하지만, 세상이 망하게 되는 과정이나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에 심판이나 재림은 없다. 대중문화 속의 묵시록이 세속화된 것을 보여준다.


미국과 영화


    활동사진의 기술을 우리가 아는 영화로 만든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에게 영화는 기술이나 예술 또는 오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영화에서 미국을 발견했고, 또 영화를 통해 미국을 생산해냈다. 그 결과 우리의 상상 속의 미국과 영화는 분리될 수 없는 상태에서 미국은 영화로 또 영화는 미국으로 남아있다. 20세기의 역사가 견딜 수 없는 악몽의 역사였다면, 실제와 가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미국이 현실 역사의 대안으로 혹은 역사 없는 초현실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아도르노(Adorno)는 영화와 미국이 하나가 되는 모호함을 자본주의 영화산업 때문이라 파악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미국의 현실 도피적인 병리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반면에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사건이 역사가 아니라 영상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미국을 그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실험장으로 삼았다.


    미국의 사막과 고속도로에 주목한 것은 보드리야르만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서부 곧 미국 문명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사막과 그 문명의 상징인 대륙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그리고 그 둘이 만나 형성하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형상은 미국에 대한 상상에서 빠질 수 없다. 생명의 습함을 앗아가는 사막의 광활함은 역사가 비껴간 빈 공간으로 이해되었고, 그 위의 도로는 임의적인 두 장소를 이어주는 길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형이상학의 기호를 연상시켰다. 사막의 형이상학은 프랑스 학자들 특유의 심오함이 아니어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막은 극기와 수양과 초월의 의지를 시험하는 곳이었고, 이를 통해 접신을 꾀했던 공간이었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던 청교도들이 상상했던 광야의 미국적인 원형이 사막이었다. 서부영화에서 사막은 선과 악이 벌이는 최후 결투의 장소였다. 그 장소는 문명의 타협과 계산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다만 지리적인 장소에 불과했다. 여기서 선과 악은 제도화되지 않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사막은 미국 서부의 끝이고, 한때 서구 문명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그 끝에서 역사의 끝, 곧 묵시록의 사건을 상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사막의 토양 위에 할리우드라는 환상과 자본의 산업이 탄생해 미국 그 자체를 재생산해온 것이다.  


    미국역사에서 사막이 묵시록의 무대였다는 사실은 영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사막은 과거 핵실험의 주 무대였고, 지금도 종말의 핵무기들이 대기 중인 곳이다. 무수한 외계인과 UFO에 관한 음모와 소문의 진원지이다. 네바다 사막의 ‘Area 51’이란 곳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거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군사기지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막의 묵시록은 당연히 영화를 통해 완성됐다. <매드맥스> 영화 시리즈가 사막에서 벌어지는 종말의 전투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지만, 사막이 핵전쟁으로 생명이 사라진 세상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막의 묵시록을 다루는 영화는 많다. 묵시록이 최근 종교가 아니라 영화의 장르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건 아니다. 묵시록에서 종말은 언제나 세상의 종말이고, 그 종말이 누구의 행위 때문에 시작되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종말의 사건들이 묵시록이란 예언이 변하는 방식이 중요하고 그 방식은 대중문화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읽는데 매우 중요하다. 묵시록의 영화는 미국의 영화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단지 그런 영화들이 흥행성 때문이 아니라 미국역사의 묵시록을 이어받아 그 이념을 지속해서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역사의 시작부터 세상의 종말에 관심이 있었다. 영화 산업이 출범하던 시기가 서구 문명의 몰락을 고했던 1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이유도 있었고,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매체로 영화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장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적인 것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것이었고, 전쟁만큼 실제의 극치는 없었다. 20세기 첨단의 무기는 인명 살상만이 아니라 세상의 파괴를 가능케 했고, 그 파괴된 세상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작업을 영화화해낸 측면이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속의 묵시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상이다. 세상을 한순간에 끝낼 수 있는 핵무기의 등장이 가져다 준 정신적인 분열과 충격은 이루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세상의 종말만큼이나 창의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195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묵시록의 영화는 다양한 종말의 사건과 그 결과를 예측해 주었다.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파괴된 세상의 종말론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슈퍼맨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구하는 서사는 할리우드 영화가 완성한 묵시록의 구조였다. 최근의 묵시록이나 디스토피아 영화에선 구원자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해피엔딩이 아니라 고통과 좌절의 사건들을 반복되는 영화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건 세상이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암묵적 합의가 공동체 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할 에덴동산도 없고, 꿈꿀 유토피아도 없는 세상은 이루어진 묵시록 또는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말한다.


공룡의 상상력


    1950년대 미국에 고속도로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시카고에서 제일 중요한 도로는 미시간 호수를 옆에 끼고 도심을 남북으로 가르는 레이크쇼어라는 길이었다. 1990년대 재공사를 하기 전까지, 그 도로를 타고 도심을 지날 때면 한 박물관을 정면으로 보고 달리다 그 건물을 우회해서 지나가게 돼 있었다. 마치 그 웅장하고 고전적인 건물을 바라보면서 경의를 표하고 그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받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건물은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란 개념이 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과정도 매우 흥미롭지만, 미국에 있는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기울이는 투자와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드뮤지움이라 불리는 시카고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물은 단연코 ‘수’(Sue)란 이름의 공룡이다. 13m의 길이에 현재까지 발견된 공룡 가운데 가장 크고 많은 뼈가 남아 있는 T-Rex(티라노사우루스)라 한다. 인기가 많아 다른 나라에 대여되기도 한다. 몇 천만 년 전에 살았다는 동물에 대해 현대인들이 갖는 관심은 합리적이라 하기엔 너무 과하다. 화석이 된 공룡의 뼛조각을 근거로 생겨난 공룡 산업은 영화에서 박물관 그리고 관광상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규모가 크다. 미국의 여러 주는 그 주의 공식 공룡까지 지정해놓고 있고, 모든 주들은 공식 화석을 갖고 있다. 일례로 일리노이 주는 털리몬스터(Tully Monster)라는 삼천만 년 전에 살았다는 해조류 동물의 화석이다. 동물의 화석에 대한 환상적인 애착, 그 긴 시간의 거리를 애써 무시하고 인간과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의지를 어떻게 설명할까? 지구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탐구 정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최소한 문명의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생각해야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관점에선 화석화된 동물에 대한 애착과 그 속에서 인간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를 ‘멸종’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공룡에 대한 관심은 공룡이 멸종했다는 데에서 출발했고, 더 나아가 멸종한 공룡의 뼈를 발굴해 전시하고 또 찾아가 이를 확인하고 증언하고자 하는 현상을 종교적 종말론의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구 사상사에서 화석의 의미는 매우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기독교 세계관에 더 큰 충격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천문학은 우주의 찬란함을 연구해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영광을 돌린다는 의도의 자연과학 발전을 초래했고, 화석의 발견은 지구과학 발전의 동기가 됐다. 하지만 화석의 발견은 성경을 역사책으로 보던 시각에 큰 도전을 의미했고 인간이란 존재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혔다. 코페르니쿠스보다 다윈이 서구역사에서 더 큰 논란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화석의 의미는 그 동물이 멸종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멸종이란 개념은 18세기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멸종이 인간의 세상 인식에 등장하면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에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에 살았던 동물 중에 지금은 멸망해서 사라진 동물의 종이 있다는 사실은 신의 계획에 따라 창조된 세상에 대한 믿음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신이 의도를 갖고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세상의 일부인 동물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창조질서에 대한 믿음도 문제였지만 멸종이 가져다준 또 다른 문제는 종말에 대한 이해에 있었다. 기존의 종말론은 신의 뜻 안에서 역사가 끝나면서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었으나, 멸종으로 종말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끝이 한 번만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종말론을 뜻하는 것이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세상에 존재했던 동식물 중 절대 다수가 이미 멸종했다는 연구결과는 신과 창조물의 관계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였다. 인간의 끝을 멸종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본질을 새로운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멸종을 설명하는 일은 이후 많은 학자들이 풀려고 했던 오랜 숙제였지만 그 의미는 지구역사의 이해나 지질학의 범주를 넘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이유가 있었다. 종말론에 대한 관심과 세상에서 인간이 갖는 의미를 찾는 관심이 반영된 것이었다. 멸종에 대한 근거를 처음 제시한 조루즈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멸종의 이유로 홍수를 포함한 어떤 커다란 재난이 지구를 덮쳤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윈의 진화론도 멸종의 원인을 제공하는 이론이었다. 퀴비어의 재난설을 거부한 다윈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 등의 논리로 적응력이 떨어지는 종이 자연적으로 도태된다는 설명을 했다. 특히 다윈은 멸종하지 않은 동물도 진화를 통해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 간다는 이론을 펼치면서 인간의 존재 역시도 상대적이고 우연적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가능성을 제기했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의 충격은 기독교 신앙에만 가해진 게 아니었다. 멸종과 멸망이 신의 주권과 권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의 내적인 구성논리에 의한 것이란 인식은 재난 묵시록의 보편화로 나타났다. 종말의 묵시록이 종교인들만의 세계관이 아니라 소설과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일반적인 세상 이해가 된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멸종의 가능성이 신의 불완전함을 의미하고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그 논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멸종에 대한 언급 없이 창조의 목적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고, 멸종이라는 게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에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논리도 등장했고, 멸종되어 사라진 동물들이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란 입장을 펼친 사람도 있었다. 멸종을 설명한 다윈의 진화론은 19세기 미국에서 무신론의 원형으로 또 사탄의 이론으로 비판받고 근본주의가 형성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지금도 멸종과 창조질서가 병행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의 실제적인 주제는 종말론이다. 성서적이라는 종말론과 다른 종말의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충돌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드러나는 건 서구 사상사에서 종말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 중요성은 오늘날 화석이 된 공룡의 뼈를 발굴해 모셔놓고 또 설치된 뼈를 보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현상은 생명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집념을 드러낸다. 최근 멸종된 동물에서 DNA를 채취해 다시 탄생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공상과학의 논의는 멸종을 번복할 수도 있다는 종말론의 새로운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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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묵시록 13 : 자본주의 묵시록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21세기 초반 묵시록 담론의 중심에 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은 자본주의 묵시록에 의해 대체되었다. 냉전 체제가 붕괴한 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세상의 몰락을 읽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경쟁 속에서 자연과 생태계는 파괴되어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믿음과 세상이 망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을 것이란 자괴적인 인식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자본주의 소비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동원된 반생명적인 기술의 대가는 신체의 질병과 인류가 쌓아 올린 가치의 파괴로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욕망과 소비의 주체로 만들었다. 이전의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 이해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인간 이해로 대체되었다. 인간은 경쟁의 상황 속에서 가장 인간적일 수 있고, 세상은 도덕적인 인식이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모여도 건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자원으로 전락한 자연은 균형을 잃고 결국 재난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치고 있고 결국에는 몰락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진단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세상의 파괴와 종말의 묵시록으로 이해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에 의해 디스토피아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 개념이 좀비다. 좀비는 무기력하게 죽음과 삶 사이를 배회하면서, 반죽음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살을 뜯어 먹어야 한다. 결코 이길 수 없는 경쟁의 서바이벌 게임을 하도록 강요받고 사는 현대인들은 좀비에서 그들의 아바타를 찾았다. 인간적인 세상은 이미 끝났고, 마지막 세상에서 생존해 있기 위해서 모든 가치의 종말과 패배를 인정하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떠도는 모습이다. 그 상태에서도 유지되는 생각 없는 생산과 소비는 자본주의가 원하는 세상을 완성하고 있다. 인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좀비 영화들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 인문학의 공통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미국문화의 저변에 묵시록적인 종말론이 흐른다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그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실제로 자본주의를 미국의 정신으로 인정하고 미국이 없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상할 수도 없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종말론을 연결할 수는 없을까?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유명한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추론을 해보자. 베버는 청교도들로부터 시작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기원을 그의 책에서 다뤘지만, 거기서 묵시록의 근거도 찾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에게 미국은 청교도의 나라였고, 그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면 어떤 종교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베버는 그 이유를 청교도들의 신학 즉 칼빈주의의 예정론에서 찾았다. 구원은 신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예정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저주의 대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상태는 두렵고도 외로운 번민의 상태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의 삶은 외부에서 보기에도 달라야 했다. 그들은 신의 부름을 받아 세상으로 왔다고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게 하늘에 합당한 선민의 삶이었다. 베버에 의하면 그런 삶은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모든 맡겨진 일에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임하는 자세를 요구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일상의 생활에서 성실하고 자신감 있게 산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베버가 다루지 않은 부분을 생각해보자. 베버는 청교도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의식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런 모습이 선택받은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 했지만, 청교도들의 소명의식 중에 세상의 마지막 날을 준비할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한다는 종말론적인 사명을 간과했다. 세상의 사람들과 구분되어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은 그 자체로 종말의 사건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을 신에게 선택된 사람에게 합당한 성실과 열성을 다해 살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만약 베버의 말대로 청교도들의 소명의식이 자본주의 정신의 조건이었다면 그들의 삶은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종말론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인 삶은 종말의 과도기적인 삶이었고 곧 사라질 시대를 사는 방식이었다는 추론도 제기해볼 수 있다. 그 방식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세계관을 도입해 불필요한 생각과 활동을 제한하고 단순한 삶의 추구를 의미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서구의 기독교 문화 속에서 등장할 수 있었을까 묻는 것은 그 문제가 더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지금도 가치 있는 질문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정신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자본주의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19세기에 자본주의의 탐욕이 아닌 정신을 얘기한 사람은 흔치 않았다. 베버와 같은 학자의 영향과 자본주의가 체질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와 기독교가 모순된 가치라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베버 자신은 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가치가 중세에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탐욕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베버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청교도들이 자본 친화적인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했던 세계관을 칼빈주의의 예정론에서 찾았지만, 그 연결고리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돈을 벌고 재물을 축적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고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와는 큰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재물을 쌓아두는 행위 그 자체를 죄악이라 생각했던 종교문화 속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했다고 믿기 위해서는 큰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고 이를 베버는 잘 알고 있었다. 베버에게 그런 발상의 전환을 체득하여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한 인물이 벤자민 프랭클인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부자가 되는 법>은 그가 살아있던 18세기에 이미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자였다. 그는 지금도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미국인으로 손꼽힌다. 베버는 프랭클린을 청교도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묶어낸 인물로 설정하면서 그의 근면 정신과 시간 이해에 주목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또는 ‘시간은 금이다’와 같은 프랭클린을 통해 알려진 격언들에 그의 인생철학이 담겨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의 핵심은 그의 시간관이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은 언제나 짧다. 시간을 잘 시켜라. 쉬고 싶으면 시간을 잘 써라.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을 수 없다. 시간을 낭비하는 건 인생을 헛사는 길이다. 프랭클린은 청교도의 후예였지만 교회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신 중심의 생활보다는 합리적이고 정직하고 근면한 생활을 더 강조했다. 그의 생각은 매사에 신의 뜻을 찾지 않아도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행위 그 자체에 도덕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물이 목적이 될 수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 도덕성을 부여하게 된 것은 큰 발상의 전환이었다 할 수 있다. 프랭클린에게서 종말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자본주의 정신이 청교도의 윤리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세속화된 것이라면, 돈과 시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즉 시간이 돈이기 때문에 아까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짧아서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등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개인의 종말 또는 시대의 종말 앞에서 재물의 있고 없음이 중요하지 않다면 프랭클린에게 자본의 도덕성은 과도기적이거나 마지막 시대의 현상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약 청교도들이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를 닦았고 또 그들의 삶의 형태가 종말론적인 것이었다면, 청교도들은 그들의 삶, 즉 자본주의적인 삶을 종말론적인 것이라 보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런 생각이 가능하다면 청교도들은 이미 자본주의 종말론 또는 종말의 자본주의를 예견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종말론의 차원에서 이해한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으로 인한 과잉생산으로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그 잔재 위에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적인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의 진단이다. 여기서 종말론은 자본주의가 망해야 천년왕국과 같은 역사의 완성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역사의 구조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가 이 세상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현대 인문학의 진단이다. 맑스주의는 미국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이 예언한 자본주의의 종말과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미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이유를 자본주의가 이미 미국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반대를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자본주의가 미국에서 그만큼 용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 시대부터 현재까지 흐르는 미국의 종말론적인 사상 때문일 가능성이다. 그리스도가 지배할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 혹은 곧 닥칠 환란과 휴거에 대한 기대 때문에 자본주의의 탐욕을 마지막 날의 현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도적 제한을 두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자유를 실천하는 이념이라는 공식이 성립한 후에는 자본에 대한 규제는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자본주의의 ‘자유’를 다가올 천년왕국의 가치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본주의에서 다가올 천년왕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과 자본주의가 세상을 재난과 파괴의 종말로 이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중립적인 입장은 있을 수 없다.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미국의 제도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가 ‘자유’를 지향하는 시스템으로 포장되어 홍보된 역사가 있다. 자유는 원래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들에 의해 기독교의 본질로 그리고 미국정신의 근거로 뿌리내린 개념이었다. 지금도 자유는 미국을 의미하고 대변하는 개념으로 인정받고 있고, 미국은 곧 자유라는 관념의 등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유를 표방하는 개념으로 포장되지 않으면 미국에서 수용될 수 없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미국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이 주류의 시민 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미국의 정신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최고의 정치와 경제의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논리가 펴졌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가 미국의 신앙으로 변하게 되기까지 오랜 홍보와 선전의 역사가 있었다. 미국에서 ‘기업’이라는 영리를 위한 조직이 19세기에는 법적인 사람의 권리를 갖게 되고, 자유의 주체가 되고, 20세기에는 무소불위의 통제되지 않는 권력으로 부각되는 역사다. 시장의 자유가 그 어떤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자유이고, 시장의 자유를 못 믿는 사람은 자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1960년대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미국의 자유를 자본의 자유와 동일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시장의 자유를 종교적 양심의 자유로 또 미국의 정신으로 승화시킨 건 신자유주의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행태가 용인되어온 미국의 역사 저변에 자본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미국정신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묵시록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픽션이나 실존의 갈등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묵시록의 힘은 어떤 실제적인 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공상과학이란 장르가 묵시록의 테마들을 차용했다고 해서 묵시록이 공상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묵시록에 대한 신뢰가 남다른 미국 보수 기독교인들은 지구온난화의 현상을 믿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종말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선과 악, 재림과 부활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자본주의라는 인간 제도의 남용과 같은 하찮은 이유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온난화의 과학적인 근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미국엔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학적인 사고를 우선시하던 사람들은 묵시록의 종말론을 추종하던 이들을 광신적인 종교에 빠져있고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류가 묵시록의 종말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묵시록을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존적인 픽션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의 묵시록은 급박한 종말의식을 종교적 세계관에서 상식과 과학의 세계관 일부로 만들었다. 냉전 이후에 등장한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는 묵시록의 전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핵폭탄의 묵시록은 핵무기를 소유한 소수의 국가들에 세상의 운명을 맡기고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불공평한 세상의 현실을 반영했지만, 세계화 시대의 환경재난의 묵시록은 모든 인간을 공범으로 만들어 자본주의 묵시록을 보편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묵시록은 멸망의 묵시록이고 이 시대 유일한 보편적인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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