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끈을 절단하는 아무도 아닌 이[각주:1]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이 책(『신정-정치』)이 출간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5월 9일 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이른바 정권의 교체, 민주정부 3기가 시작되었다. 광장을 달구며 ‘탄핵’이라는 점으로 수렴되었던 목소리 중 많은 이들은 승리의 환호를 질렀고, ‘수호되어야 할’ 정부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의견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목소리 즉, 이제 세워진 저 권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수호’하기만 하면 그 촛불’들’이 말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이에 대해 ‘신정-정치’는 그간 우리 사회는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기까지 걸어온 지난한 과정을 이야기하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이고 철저하게 은폐함으로 감춰졌던 어두운 역사의 경로를 폭로하여 광장에서 냈던 그 목소리’들’이 ‘새 정부’라는 알리바이 속으로 어느 하나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인양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미 자명하게 알고 있듯이, 역시 시작과 끝은 세계를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는 그 성스러운 끈(7), 곧 성스러운 화폐와 자본의 힘이다. ‘성스러운(거룩한)’과 ‘화폐/자본’을 연결하는 이 언어는 단순히 물질의 세계를 신화화하여 표현하는 게 아니다. 즉, 다시 말해 신정-정치란 돈을 물신화하는 은유가 아니라 등가적이며, 그 운동을 통해 세계의 실재를 구축해 나간다. 그것들은 무한하게 순환하며 서로를 떠받침으로써 우리의 실제적이고 물리적 삶을, 사회적 관계들의 끈끈함을 스펙터클-사회로, 다른 말로 ‘사이비 신성체’로(24) 전환시켜 나간다. 이를 골자로 한 제단 위에 각 종류의, 각 사연이 담긴 피들이 제물로 섬겨진다. 4. 16의 피, MERS의 피, 이창근의 피, 바로 지금의 언어로는 갇혀 있는 한상균과 동성애자 A대위의 피 등 유혈이 낭자한 (사이비) 사회. 거기가 바로 우리의 삶이 바들바들 떨며 놓여진 풍찬노숙/각자도생의 현장이다. 거기서도 모두가 한 입으로 외워야 할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다.(8)”


.

   신정-정치의 사제들은 사목의 권력을 이용해 먹이며, 살리고, 심지어는 머리털까지 센다고도 할 수 있는 바(누가복음 12:7), 진정 그리 살고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바틀비의 변호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고통 앞에서 마음의 운동을 자기 안락을 위한 자위의 도구로, 자기가 속한 법의 권역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로 환수하는 고통의 질료화/추상화(350)’하기를, 조남호가 그랬던 것처럼 김주익을 모른다 하며 ‘눈물을 훔치면서’ 김진숙을 불법자로 매도하기를(257), 그리고 바로 지금 최순실이 법정에서 진실을 묻던 의원을 딸아이의 영혼살인자로 매도하며 울부짖는 스펙터클을 매순간 집전한다. 그 ‘사이비성’과 실제 지금/여기의 삶을 묶는 전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최초의 가치이자 성부인 축적의 법과 그것을 운동시키면서 매개하여 잉여가치로 화하는 성자인 국법의 이위일체, “신-G’”(13)이다.


   이에 사람들은 저 ‘성스러운 끈’, 세계를 단단히 매고 있는 저 매개/매듭에 다양한 방식으로 봉헌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성스러운 끈의 매듭을 더 매는 방식으로, 그 반대 편의 이는 그 끈의 성분을 조사하고 끈을 푸는 지식을 체계화하여 이른바 ‘지식팔이, 책팔이’를 하는 방식으로, 또는 그 둘의 결합의 모양으로 이 세계에 매개의 매개를 더하고 있다. 그 끈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는커녕! 한 번 엉킨 작은 실타래나 목걸이를 풀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안다. 풀려고 할수록 더 엉키고, 자신이 더 엉김을 가하고 있는 자신, 변수에 기하급수적 변수를 얹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그 분노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모세의 사목권력적 후생체에 봉교하는 인간(92) 떼들에 맞서 정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매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 수단 그 자체를 그대로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목적의 영역도 아니고 이러저러한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영역도 아닌 인간 사유와 행위의 장으로서의 목적 없는 순수 매개성의 영역”(226)이다.


    그 정치를 누가 수행하는가? 누가 그 매개/매듭들의 경첩을 절단할 수 있는가? 비존재들을 분리/양산하고 그들을 재합성함(291)으로써 축적의 축적을 거듭하고 급기야는 모든 매개를 절멸시켜 ‘순수한 축적’ 곧 금융자본주의G-G’(96)의 체제 속에서 빚(Schuld)을 볼모삼아 피를 빨아먹고 사는 체제를 끝장낼 수 있는가? 바로 폭력의 당사자들 즉, 고통의 최전선에서 고통을 사변적으로 환원시키려는 자들에 분통과 원통으로 소리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을 위시하여 깨어 있기로 결단한 ‘모두가 된’ 이들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아니’었던 수많은 5. 18 엄마들이 ‘모든 이’로 화하여 4. 16 엄마들에게 보내는 저 절절한 인사말이 선취하였고 그것이 광화문과 곳곳의 불로 옮겨 붙어 최순실-박근혜-이재용(104)으로 이어지는 비밀의 카르텔을 끝장냈듯이.

<5. 18 엄마가 4. 16 엄마에게>[각주:2]


   고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각주:3] 라는 저 맑스의 말을 바로 오늘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의 불로, 세계의 무능/유능(406)을 도려내고 태워버리는 불로, 사목적 게발트로 위장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밀스런 끈으로 거듭re엮고 매회 짜이게 하는ligio, 그럼으로써 축적이라는 비밀스런 제 1목적의 위기를 관리하고 종교적religious 원상복구를 수행하는 공동 ‘비선’의 게발트”(118)를 대항하는 익명들 곧 ‘아무도 아니’(296)로 존재하는 고유한 존재자들로 맞아들이자. 최종목적론적이고 메시아주의적인 선언문을 쇠말뚝처럼 박아댐으로서 세계의 ‘잔여’(351)가 그 맹아로 품고 있는 ‘파송된 그리스도-아이들’(153), ‘바틀비-그리스도(348)’등을 절멸시키려는 의지를 꺾고, 계속해서 그 입지점을 ‘다른 곳에’ 세움으로 ‘사랑의 시도’(291)를 이어 나가는 그 말로 읽도록 하자. 그 ‘다른 곳’이란 김영민이 정의 내린 ‘세속’이 가리키는 바, “스치고 섞이면서 만날 수 없고, 겹치고 묶이면서 만날 수 없고, 손을 잡고 혼인하면서 만날 수 없고, 악수를 하고 계약을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어긋남의 표상. 내 속에 있으면서도, 아니,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너와의 아득한 거리에 대한 표상”[각주:4]이며, “개인의 호의 앞에 무력한 관계의 구조 곧 그 애틋하고 알뜰했을 호의가 속절없이 부닥치는 벽” [각주:5]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윤인로의 책 『신정-정치』(갈무리)에 관한 서평입니다. [본문으로]
  2. 오월어머니집과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등 5·18 단체 회원들이 지난 11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조속한 세월호 선체 인양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팽목항에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사진=5·18 기념재단. 연합뉴스 원문보기: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6508.html#csidx1afe6d7bc52ceb493856a24879f17e8 [본문으로]
  3. K. Marx,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2011. 25쪽 [본문으로]
  4. 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사, 2008, 164쪽. [본문으로]
  5. 앞의 책, 168쪽.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카메라 루시다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이 세상에 존재를 알린 지 이백년도 안 된 사진은 그것의 선배 격이자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에게 ‘예술’이란 이미지를 선명하게 남겨준 숱한 천재들을 배출한 ‘회화’에게 향하는 음울한 콤플렉스에서 이미 벗어났는가.
사진의 역사적 흐름을 보자면, 대상의 절대적 재현이라는 사진만의 기능으로 말미암은 사실적 증거자료로, 또는 회화주의 사진과 같은 사진의 자기 탐색이 결여된 시기를 거쳐, 세계대전 등의 보도 사진이 보여주는 실재와 조작, 계몽과 선동,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안락, 정치와 미학 등의 혼재된 경험을 치르며 지금의 디지털 증강 사진에 이르기까지 소비자본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그 당사자로서의 독특한 지위를 사진은 향유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수전 손택의 말대로 모더니스트들이 ‘모든 예술이 음악이 되기를 갈망’ 했듯 이제 ‘모든 예술은 사진이 되기를 갈망’ 하는 시대에 사진의 위치가 있다.
우리 모두의 손 안에 폰카를 들고 다니며 모든 개인의 생활이 낱낱이 찍히며 원하는 모습대로 뽀샵되어 물리적 감각 없이 무제한 타인에게 전송되는 전대미문이 시대에 어찌 보면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란 책은 너무 고루하고 정적인, 그리하여 이 시대 사진 미학을 설명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에 출판된 이 책에서 바르트 역시 그러한 것을 예감하고 있다.

“사진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이며 거부의 침해의 시대, 파열의 시대, 간단히 말해서 초조함의 시대, 모든 성숙을 거부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이 존재했다’는 놀라움도 역시 사라 질 것이다. 그 것은 이미 사라졌다.... 나는 그 것을 목격한 최후의 증인( 반 시대성의 증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이 책은 그 것에 관한 고풍스런 흔적이다”  (P94)

바르트는 자신을 반시대성의 증인이라 말한다. 이미 도래한 새로운 감각을 거스르는 자로써 자신을 정의한다. 또한 그가 늘 사진에서 얻는 놀라움의 원인이었던 ‘그것이 존재했다’라는 존재론적인 감각도 사라질 것이라고 고백했으며 그것은 실재성 없이 컴퓨터 기술로도 대상 자체를 만들 수 있는 디지털 사진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왜 이 ‘고풍스런’ 책은 여전히 사진 미학을 논할 때 빠짐 없이 인용되고 거론되는 걸까?
그것은 바르트의 글이 사회성과 역사성을 배제한, 오로지 사진과 사진의 ‘대상’ 안으로 침잠하는 작은 구멍과 같이 그 범위는 협소하나 그 구멍을 통과하고 나면 샘처럼 순수하고 근원적인 ‘인식론’의 새 국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부분의 이론서는 사진이 갖는 사회, 역사적 의미와 이미지가 인간에게 주는 실재적 영향에 대한 글들이라면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대상물’과 ‘갈망하는 사물’,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 대한 파토스 넘치는 극히 개인적인 에세이인 것이다.

“가장 강한 또 다른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사회적인 주석을 부정하라고 부추겼다. 어떤 사진들을 볼 때면 나는 스스로가 야만적이고 무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P15)

즉, 프리미티브 화가처럼 전통적 예술 문법을 따르지 않는 개인 특유의 경험과 강렬함으로 바르트 자신을 매개자로 하여 ‘보편적이 아닌 대상의 성격 그 자체에 의한 새로운 이론’을 밝히고자 한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자신에게 어떤 식의 공명을 일으키는 사진 앞에서 그 전까지의 사진이론으론 그 공명의 특질들을 설명할 수 없었음이 <카메라 루시다>가 탄생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학적이고 구조적인 해석에 대립하여 무규정적인 사진의 특질들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그의 용어는 ‘푼크툼’이다.

문화적이고 체계적인 사진 이해 용어인 ‘스투디움’에 맞서 비문화적이고 비체계적인 이해를 지시하는 푼크툼은 벤야민의 ‘아우라’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벤야민의 아우라가 어떤 때는 대상만의 유일하고도 마적인 현상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술의 제의적 요소로, 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부정적 요소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푼크툼은 대상에 밀착되어 무게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훨씬 더 날카롭고 가볍고 가변적이며 전혀 전통적이지 않고 제의적이지 않다.
푼크툼은 대상으로부터 마치 화살처럼 주체를 꿰뚫기 위해 날아오지만 그것은 대상이 소유했다기 보다는 주체와 대상사이의 지극히 은밀하고 사적인 소통가운데 있다.
바르트의 푼크툼은 철저하게 수용자 미학이다. ‘촬영자-대상-구경꾼’이라는 사진 내 역학관계에서 촬영자의 의도를 뺀, 대상의 사진적 특질과 그 것을 감상하는 구경꾼의 비의도적 재구성이 이 책을 이끄는 요소인데 이는 그의 또 다른 글 <저자의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촬영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맥락을 통한 결과물이 아닌, 독립적이고 장외적인 존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라틴어 ‘점’, ‘찌름’ 등을 뜻하는 푼크툼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카메라 루시다>를 쓰기 전부터 보여 왔던 사진에 관한 그의 관심을 종합하기 위해서였을까? 그 정도의 이론적 유희에서였다면 이 책은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의 이론만을 위한 거였다면 푼크툼은 기억되었을지 모르지만 진혼곡의 회색 빛 울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진의 증거, 사진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도 볼 수 있는, 그리고 그가 보기에 그 것은 모든 다른 영상과 구별 시켜 주는 이 사물을 찾아 내기 위해서 내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가야 만 했다. 나는 나의 개영시 (먼저 썼던 시를 취소하는 시)를 써야만 했다.” (P63)

즉 그는 자신 속 더 깊은 곳의 ‘어머니’란 상처를 이끌어내어 그 이전 기호적 체계로 이루어진 자신의 학문적 논리를 취소해야만 했던 것이다.

바르트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그것도 어머니의 다섯 살 무렵에 찍힌 아주 오래된 ‘온실사진’에서 존재의 푼크툼, 시간의 푼크툼에 찔린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머니다’라는 외마디 비명과 같은,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 장치에 지나지 않다.
“어머니다!”, “참으로 어머니다!”라는 이 지칭적 외침은 그 어떤 시각 예술과도 구분되는 사진만의 황홀한 특질이며 바르트 내면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환원되지 않는 외상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우선 그에게 사진은 ‘그것이-존재-했음’ 혹은 존재의 ‘완강함’이며 그것이 사진의 기반을 이루는 노에마이다.
‘그것이-존재-했음’에는 찍힌 대상물의 존재론적 자국과 과거에로의 시간적 역류가 동시에 포함된다. 사진에 의한 대상의 재현은 단순한 모사의 정도를 떠나 실재 존재와 ‘탯줄로 연결되듯’한 완강함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는 같은 이차원의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회화를 볼 때와는 달리 사진의 대상은 실재의 그것으로 확신하며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사진의 대상을 향한 관람자의 ‘상상적 의식 작용’에 의한 ‘아날로공’, 즉 ‘절대 유사’의 경험인데 이 아날로공은 바르트가 싸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서 차용해와 이 책의 기반을 이루게 하고 있다.

사진에서의 대상의 재현은 대상을 해석하거나 번역하는 인공적 규명 이전에 생성된 탈코드적인 것이며 발자국이 하얀 눈 위에 찍히듯 존재의 직접적인 ‘자국’이 된다.
즉, 빛에 의해 ‘그때’ ‘거기’ ‘그 대상’으로부터 발산하는 지표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자국으로서의 사진 현상은 후에 필립 뒤바 등에 의해 ‘사진-인덱스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진이 침묵 속에 보여주는 존재의 자국 혹은 물리적 지표들은 수용자에게 전해지며 마치 묵독이 내면화된 세계를 형성하듯 각자의 경험과 함께 또 다른 환유적 세계의 재구성을 사진을 통해 형성하게 된다.

바르트가 보았던 어머니의 ‘온실사진’은 그때 거기 어머니로부터 사출된 빛이 그에게 이른 것이며 단순히 어머니임을 알아 본 것이 아닌, 분위기라는 작은 영혼을 알아보며 “참으로 어머니!” “마침내 어머니!”를 깨닫게 된다.
그 때 “사진은 자신을 넘어선 하나의 영매가 되어 자신을 무화시키고 기호가 아닌 사물 그 자체”가 된다. 바르트가 사진을 통해 찾은 것은 ‘어머니’다. 일반적인 어머니라는 존재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은 ‘나의 어머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가 잃어버린 것은 “어머니라는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하나의 특질, 하나의 영혼으로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무엇”인 것이다.
그는 사진에서 죽음을 본다. 셔터를 눌러 삶이 정지하는 그 찰라의 순간에 삶의 장외를, 자신이 타자화되는 불편한 경험을 느끼며 어머니의 온실사진에서 출구 없이 꼼짝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변형시킬 수 없는 슬픔, 해독되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학문의 이론적 지성이 해결할 수 없는 충일한 이미지 앞에서 비환원적인 죽음의 무력감을 느낀다.
내가 느끼기에 바르트가 이 책에서 절규하는 것은 사진이론 자체가 아닌 “모든 환원적인 체계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사회적 의미의 죽음이나 인간 개체를 넘어선 종의 죽음이라는 진화론적인 냉혹한 설명으론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의 상실이었을 것이고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의 상실은 비환원적 세계로의 깨달음을 불러오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모성 숭배의 밀교적 제의로서 바르트는 ‘아픈 어머니를 통해 스스로가 어머니를 자식으로 낳고 어머니가 죽자 자신은 비변증법적인 죽음을 기다리며 진화론으로 환원되는 생명체의 행진에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그가 교통사고 이후에 치료를 거부하고 거의 자살하다시피 한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과 스스로의 죽음의 예감과 또한 자신만의 참 어머니를 되찾게 해준 사진적 특질들은 그로하여금 언어적인 학문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체계적이고 환원적 설명을 요구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해 전복적 사고로 저항하게 하는 푼크툼의 깊은 상처가 되게 하지 않았을까?
푼크툼의 그 전복적 저항은 바로 사랑이고 연민이며, 죽음이고 비언어이며, 무규정자이며, 역류하는 시간이며, 예술에 속하지 않으며, 사회와 문화에 순치되지 않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푼크툼은 광기다.
그것은 바르트의 광기이기도 하고 사진의 광기이기도 하다.

* 참고로  이 글은 절판된 ‘열화당’의 <카메라 루시다>에 관련한 것입니다.
   바르트의 책은 지금은 ‘동문선’의 <밝은 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법 밖의 정의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론에 대한 짧은 소개서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몇 년 전 하바드 대학의 한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을 펴들고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무장해제되어 정의가 가지는 복잡함에 주눅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저자가 슬쩍 끼워 놓은 답안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공동체주의라는 살짝 매력적인 단어를 꺼내놓고 결국 정의의 실현을 국가 정치의 장으로 제한하고, 열린 토론에서 최선이나 차선의 선택이 바로 정의라고 하는 결론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저자는 그것이 자신의 완전하지 않은 의견이라고 밝히기는 하였다.)

물론 내용 중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었다. 종교적 가치가 정치정의를 논함에 분리되기 어렵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종교적 가치가 갖는 편향성을 말하며 이내 화들짝 물러선다. ‘정의를 말함에 종교가 빠질 수 없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일까? 오히려 필자에게는 정의를 말함에 있어서 서양 종교의 뿌리가 된 유대교와 기독교를 논하지 않고는 서구 정치에서 정의를 말하기는 힘들다는 주장으로 들렸다. 근대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추구되어 오던 정교분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과연 종교, 또는 기독교가 우월한 인종주의나 전투적인 선교주의에 목숨을 거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현대 정치사회에 대안이 되는 정치론이나 정의론을 생산할 수 있을까?

철학과 종교, 그리고 정치에 관한 담론들이 분리되기 이전에, 로마제국의 엄청난 패도 앞에 유대교의 한 지식인이 제국의 정의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의를 외치며 나타났고, 그가 쓴 글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우리가 신약성서라고 부르고, 또한 그 안에 로마서라고 부르는, 바울이라는 쓴 사람이 쓴 서신. 바로 그 서신이 진정한 정의를 말하는 책이라고 테오도르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 교수는 말한다. 바로 이 글이 소개할 책,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ics of Paul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3)의 저자인 제닝스는 바울의 편지 중 하나인 로마서가 정의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현해 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제닝스 교수는 바울 텍스트의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인정하면서도 정의론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 로마서를 바르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흔히 이신칭의(以信稱儀, justification by faith)라고 말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설파하는 교리적 근거로 사용되는 로마서가 제닝스 교수의 손에서 메시아에 대한 충성으로 구현하는 정의로 탈바꿈 되는 것이다.

바울 서신을 정치적 관점에서 읽는 것은 철학과 성서신학 내에 소위 트랜드를 형성하고 있다.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이 바울의 서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고, 탈식민주의나 맑스주의 성서신학자들도 새롭게 바울을 읽는다. 그 핵심에 메시아 정치학에 대한 담론이 있다. 서구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에게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바울 새롭게 읽기는 크게 두 가지 즉, 기독교신학 외적인 흐름과 신학 내적인 흐름이 있고, 제닝스 교수는 정확히 그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책을 썼다. 그 두 흐름을 살펴보자.

기독교 내에서 오랜 세월동안 루터와 칼빈 식의 바울 서신 읽기는 개신교신학의 근거로서 받아들여졌고, 이후의 바울 신학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사실성에 대한 연구와 논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과연 믿음으로 구원이 끝나는 것인가, 행함은 의미가 없는가, 율법적인 신앙은 의미가 없는가 등의 기독교가 인간 구원에 대한 단 하나의 유일한 대책이라는 식의 기독교 우월론을 생산하는 데 중요한 해석의 근거가 되어온 것이 바울 서신이었다. 정작 예수는 반()율법주의를 주장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러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반유대주의적 신학을 기독교에 불어 넣었다. 기독교는 율법적인 유대교를 뛰어넘는 고등종교이고 유교, 이슬람교, 불교 등도 이에 다르지 않다는, 그래서 오직 예수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바울에게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해석들을 극복하는 흐름들이 성서신학계에서 일어났다. 물론 아시아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 이미 있었던 흐름들이지만 서구사회는 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들에 대한 대학살로부터 정신을 차린 이후에야 반유대주의적이고 종교우월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 바울 서신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도출된 성과들은 다음과 같다. 바울은 유대교적 전통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 아니다. , 바울은 반유대적인 가치로 기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하는 율법적 신앙 또는 율법적 정의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최근에 이르러서야 바울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유대교가 아니라 로마제국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바울이 말하는 율법이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법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보고 이를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고 그의 유대교적 전통에서 이를 새롭게 해석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작금의 경제 제국이 등장하는 시대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신학 외적인 흐름에서 바울의 서신이 중요해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자본주의의 끝도 없는 질주를 민주정치체제가 막아낼 수 없으리라는 의심이 확신이 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레닌주의의 재조명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자본주의 안에 살면서 자본의 힘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질문에 레닌은 형식(form)이 내용(content)에 선행한다는, 당이 당의 정신과 목표보다 먼저라는, 다른 의미로 말하면, 새로운 비전이 먼저가 아니라 희망을 생산할 수 있는 형식(form), 집단, 또는 공동체의 창설이 먼저라는 해답을 내어 놓았다. 이에 착안해 루카치와 지젝은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의 당의 형태로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고 보았다. , 바울이 제국에 대한 대안적 정치학으로 새 정치를 생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클레시아, 소위 현재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집단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만이 제국의 정치학을 벗어난 형태의 정치적 비전, 정의에 대한 인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바울의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엥겔스와 맑스가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초기 공산당의 조직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바디우와 아감벤이 국민의 삶 자체를 통제하는 국가 형태에 유일한 탈출구를 바울에게서 찾는 것은 그래서 공감할 만하다.

이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제닝스 교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어거스틴부터 근대의 바르트, 현대의 지젝과 같은 철학자들과 브리짓드 칼과 같은 성서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소개하며 로마서를 새롭게 읽어야 함을 제안한다. 아마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예수를 여호수아로, (righteousness)를 정의(justice)로 읽는 독해에 놀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희랍어 번역이고, 예수는 아람어로써 히브리식 이름인 여호수아를 말하는 것으로, 약속의 땅으로 신민들을 이끌 지도자를 의미한다. 또한, ‘라는 표현은 영어식 번역의 오류이며 이보다는 정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면, 로마서야 말로 바울의 새로운 정의론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제닝스는 바울의 시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바울해석의 역사와 정치론적 해석의 역사를 쉽고도 깊게 서술한다. 간단한 서론이 끝나면, 그야말로 로마서11절로부터 마지막까지 독자에게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며, 과연 새로운 정의와 그 정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한 바울의 증언으로 들려준다. 제닝스의 글의 장점은 쉽다는 것인데, 그가 사용하는 일차자료들의 고급정보에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닝스의 설명과 함께 새로운 정의의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신념을 듣다보면 로마서가 현대의 새 정치를 갈구하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외침임을 알게 된다.

그럼 도대체 정의가 무엇이냐고? 친절하게도 제닝스는 책의 제목에 이미 그 결론을 주고 있다. 첫째는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으로, 또는 법치정치로 의롭다함을 받지 않는다는 뜻의 진의이다. 이른바 Law and Order, 법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만드는 질서의 정치는 결코 정의를 생산할 수 없다. 정치적 최선차선이 결코 정의라고 표현될 수 없는 이유다. 둘째로, ‘정의는 설명할 수 있고, 선택하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를 살아내는 공동체가, 즉 메시아적 공동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그 공동체의 살아 숨쉼이 바로 정의이다. 이 공동체는 초법적인 기관이 아니다. 끊임없이 법과 인간의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핍박받는 공동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공동체를 만들고, 이끌어가야 할까? 이 질문에 관심이 생긴다면 다시 한 번 로마서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이 일생을 통하여 하려고 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evangelism)이라기보다는 정의을 구현하는 공동체(planting the assembly embodying Justice)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예루살렘 교회와의 끝없는 불화 속에서도 곳곳에서 쏟아지는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에서도 끊임없이 서신을 보내며 자신의 생각을 전하려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메시지를 듣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떤 식으로 응답해야 할까? 이모든 해석의 가능성에 대한 눈뜨임이 제닝스의 법밖의 정의를 통해 한국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웹진 <제3시대>

* 편집자에 의해 원글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글이 다소 수정됐음을 알려드립니다.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새책소개> 미국땅에서 ‘한.정.살림’의
통분 불/가능성을 묻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Korean Resources for Pastoral Theology: Dance of Han, Jeong, and Salim’ (Pickwick Publications, 2012)  James Newton Poling and HeeSun Kim

오늘날의 신학은 세계화된 세상속에서 차이와 다름에 대해, 다양성과 상이성에 대해서 열린 사고를 요청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가지 혁신적인 신학들이 싹터 올랐다. 흑인신학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백인 페미니스트 신학으로부터 소외되었던 흑인여성신학자들이 womanist theology를 이야기하고, 수 천년 동안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던 Queer 이론과 Queer theology도 밝은 광장에서 이제는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토착민의 관점에서 서구 식민주의의 잔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포스트콜로니얼니즘 역시 이러한 대열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이는 서구 신학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토양을 우리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기존 서구신학에 내재된 공허한 보편주의와 허위적 패권주의를 지적하고, 비어있는 그 곳에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을 선사하여 신학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동안 유행했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미국 신학계에서 한국신학을 알리는 주목할 만한 책이 출판되었다. James Poling과 김희선이 함께 쓴 ‘Korean Resources for Pastoral Theology: Dance of Han, Jeong, and Salim’ (Pickwick Publications, 2012)이 그것이다. 이 책은 한국적 소재인 ‘한, 정, 살림’을 미국 신학계에 소개하고, 그로 인해 미국 목회상담계의 지평이 확장되기를 바라는 기대에서 집필되었다. 사실, ‘한, 정, 살림’은 미국학계에서 한국신학을 말할 때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한’은 민중신학의 핵심개념이고, ‘정’은 이 책의 추천사를 쓴 Garrett의 Wonhee Anne Joh교수가, ‘살림’은 뉴욕 Union 신학교의 (정)현경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론신학의 영역에서 1세계 신학에 대한 저항담론으로 존재했던 ‘한. 정. 살림’이 종합되어 실천신학 파트인 목회상담에서 치유와 화해의 방법론으로 구체화된 예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앞으로 미국신학계에서 한국신학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본서의 결론부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두 Chapter(6장은 폴링, 7장은 김희선 단독으로 씀)를 제외한 본문의 모든 내용들은 저자들이 마치 탁구 치듯이 서로의 입장과 앎의 지평을 교환하면서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한 명은 진보 성향의 이미 유명하고 노련한 미국 백인 남성 신학자, 다른 저자는 목회상담과 포스트 콜로니얼 페미니즘을 전공하고 있는 신출내기 피가 끓는 젊은 한국 여성신학자이다. 이 둘이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다행히 이런 우려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한국적 재료인 ‘한. 정. 살림’을 메인 테마로 가지고 오면서 불식되었다. 폴링 교수가 지닐 수 있는 한국적 소재에 대한 낭만적이고도 소박한 일반화의 우려는 김희선의 도움으로 극복되었고, 김희선이 갖고 있던 서구신학에 대한 날선 칼날은 폴링교수의 다독거림으로 다소나마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이 책에 ‘Dance of Han, Jeong, and Salim’라는 부제가 달렸다. 몇 해전, 이 책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Karen Baker Fletcher가 쓴 ‘Dancing with God’이라는 책을 출판돼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삼위일체교리를 Womanist관점에서 춤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풀어낸 작품인데, 기존의 정태적인 삼위일체 이해에 맞서 춤이 담고 있고 변화와 리듬, 율동과 조화를 새로운 삼위일체 해석학으로 제시했던 책이었다. Karen Baker Fletcher가 흑인여성신학의 관점이었다면, 이 책의 저자 폴링교수는 Constructive 입장에서, 또 다른 저자 김희선은 포스트콜로니얼즘, 더 나아가 포스트콜로니얼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춤을 끌어 들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한, 정, 살림’을 함께 무대 위에 세우고 이렇게 말한다: “Shall We Dance?” 

기본적으로 이 책은 미국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우리가 알고 느끼는 ‘한. 정. 살림’과 이 책을 통해 전달될 미국사람이 알고 느끼게 될 ‘한. 정 .살림’은 분명 다를 것이다. 저자들은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최대한 서로의 입장과 지식을 조율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한국적 소재인 ‘한. 정. 살림’이 어느 정도 미국 신학계에서 통분 가능할런지를 묻는다. 물론, 통약불가능한 부분도 눈에 띨 것이고, 양국간의 여러 차이로 인한 ‘한. 정. 살림’을 둘러싼 의미의 과잉과 차액과 잉여들도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문제점들의 등장이 이 책의 저자들이 노리는 진짜 속셈이 아닐런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미국 신학계 내에서 ‘한. 정. 살림’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 역할도 물론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미국 신학계를 향한 의미있는 도전이고 불편함이다. 


James Poling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미국 목회상담계를 대표하는 학자이고 작년에 Garrett에서 은퇴하였다. 폴링교수는 미시적 차원에 머물던 목회상담의 영역을 사회적 구조와 폭력의 상관성으로 확대시켜 목회상담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별히 각 그룹별, 민족마다 지닌 독특한 역사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폭력과 희생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주체들이 어떻게 그 한들을 정의하고 풀어(치유해)나가는지에 관심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들을 미국 신학계에 소개하고, 미국 목회상담계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 를 고민하는 창조적인 신학자이다.    

또 다른 저자 김희선은 Poling 교수의 제자로 현재 시카고 인근 에반스톤 위치한 Garrett에서 목회상담으로 박사과정 중이고 현재 논문만 남겨놓고 있는 Ph.D Candidate이다. 한국에서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동대학원에서 신학수업을 받았고, 지금은 뉴욕 Union 신학교에 있는 (정)현경 교수 이화여대 재직시절 마지막 제자이기도 하다. 미국 유학 전 명지전문대학에서 외래교수로 강의하였다. 김희선은 목회상담 이외에 Postcolonial Feminist Theology를 부전공으로 택하고 있다. 시카고 신학교에 있는 Beyond Monotheism의 저자 Laurel Schneider 교수와 여성신학을, Heart of The Cross를 쓴 Garrett의 Anne Joh교수와는 포스트콜로니얼니즘을 함께 공부하고 있다. 


*아마존 책 소개 링크  

http://www.amazon.com/gp/product/1608995844/ref=cm_sw_r_fa_alp_I-3mqb0BYSM51#_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샌델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붙여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정의와 도덕이 시장과 만날 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안기순 역, 와이즈베리)을 읽는 내내 샌델이 인용하는 수많은 사례들 앞에서 먼저 그의 성실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사례들을 수집하고 검토하고 분석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사실 이 책이 제기하는 쟁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샌델의 저작들, 가령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나 『왜 도덕인가?』를 읽은 사람, 혹은 샌델의 하버드 강의 동영상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 제목만 봐도 샌델이 이 책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샌델의 2012년 최신작『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부제는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시종일관 유지되는 중심적인 쟁점은 “시장화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시장화(혹은 상품화)로 인해 인간과 사회에 나타난 폐해는 무엇인가?”로 정리할 수 있다. 그 폐해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된다. 첫째는 불공정성(또는 불평등성)이고, 둘째는 (가치 또는 도덕적 선의) ‘부패’ 또는 ‘타락’. 샌델이 시장화(상품화)의 폐해를 불공정성과 부패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그의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에서 제기된 두 가지 테마, 즉 ‘정의’와 ‘도덕’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이르러 마침내 “시장”, 더 정확히는 “자본”의 문제와 만남으로써 더욱 중요한 정치철학적 논의의 장(場)을 열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는다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시장지상주의’,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낸 삶의 방식,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도덕적 (판단의) 위기를 전세계에서 수집한 사례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러나 매번 조금씩 다르게 제시한다. 물론 우리에겐 시장지상주의와 같이 그 의미 전달 방식에 있어 상당히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차라리 훨씬 ‘추상적인’ 어떤(?) 단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더 친숙할지 모른다. 시장지상주의라는 협소한(?) 혹은 소박한(?) 표현으론 도저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과 그것이 만들어낸 우리네 삶의 현실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모두들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을 터. 그 단어가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명칭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구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폭력과 야만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그 이름. 바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다.
 
그러고 보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이상하리만치 잘 안 쓰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고, ‘시장화’니 ‘시장지상주의’니 또는 ‘경제화’니 하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선 너무나도 소상하게 밝혀내며, 그 여파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사회적 토론을 제기하지만, 정작 샌델은 그런 시장(지상주의)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에 의해 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시장화나 경제화 같은 용어들이 아무리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편리한 용어라 할지라도, 거기엔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법률, 사회적 관습 등을 포함하는 각종 제도나 국가의 정책,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적 신념 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통치성’(governmentality)이라 명명된 분석틀을 가지고 (신)자유주의 분석에 몰두했던 말년의 미셸 푸코와, 그런 그의 작업을 계승해온 일단의 연구자들에 따르자면, 신자유주의는 일련의 경제학적 논리들과 정치-사회적 실천들을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개개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특정한 주체화의 테크놀로지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사회적 주체성 형성의 관점에서, 즉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출현한 특권적인 권력작동방식이자 주체생산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목도하는 오늘날의 주체성의 다종다기한 형상들이 결국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political rationalities) 또는 통치이성(governmental rationality)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각주:1]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샌델의 책에는 사태의 ‘결과 보고’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넘쳐나지만, 사태의 ‘원인 분석’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샌델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들, 다시 말해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을 때 도덕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를테면 우정이나 인간의 장기(臟器), 어린 아이들, 명예, 대학 입학허가 등)에 대해 소개하면서, 시장화에 반대하는 논리의 주된 근거를 공정성과 부패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을 살펴보자.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살펴보려면 이 두 가지 논쟁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정성에 관한 반박에서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조건이나 경제적 필요성의 긴박한 정도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 때 생겨날 수 있는 불평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시장 교환은 시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항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농부가 굶주리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자신의 신장이나 각막을 팔겠다고 동의할지 모르나 정말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사실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불공정하게 강요받았을 수도 있다. […] 공정성과 관련한 논거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은 동의, 좀 더 정확하게는 공정한 조건하에 이루어지는 동의이다. 시장을 이용한 재화 분배에 찬성하는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시장이 선택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다양한 재화를 주어진 가격에 팔지 말지를 사람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 (157~158쪽)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표현이다. 대체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인가? 물론 샌델은 그런 질문을 던지진 않는다. 이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패에 관한 반박은 다르다. 이는 시장의 가치평가와 교환이 특정 재화와 관행을 변질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특정 도덕적 ‧ 시민적 재화는 사고파는 경우에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된다. 부패에 관한 논쟁은 공정한 거래계약 조건이 성립됐다고 해서 충족되지는 않는다. 평등한 조건과 불평등한 조건 아래서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 여기서는 동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치 평가와 교환 때문에 변질되었다고 여겨지는 재화의 도덕적 중요성에 호소한다. […] 부패 논쟁은 재화 자체의 특성과 재화를 지배하는 규점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공정한 거래 조건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힘과 부에 불공정한 차이가 없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157~159쪽)

샌델은 공정한 또는 평등한 거래계약 조건이라는 것을 가정하고서, 다시금 그 조건 하에서도 여전히 시장화로 인한 도덕적 위기는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샌델의 질문은 시장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까지 나가야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정한 계약조건을 가정하면서, 시장 안에 근본적으로 내속하는 부정의나 불평등성,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착취’와 ‘계급적대’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고, 공정한 계약조건 속에서 재화의 본래적 사용가치가 왜곡되고 부패하는 문제로 건너뛴다.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는 순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화폐가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물건은 그것의 쓸모(사용가치)가 아닌 시장에서의 교환가능성(교환가치, 즉 상품가치)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모든 물건의 교환가치는 화폐 속에만, 그리고 그 물건의 사용가치는 상품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것은 샌델이 말하는 식으로 시장지상주의사회가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공정한 계약조건’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공정한 계약조건’이라고 하는 샌델의 전제 자체를 의심하고 싶다. 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데 자발적으로 계약한 주체들의 실천이 정말로 실천 그 자체로선 아무 문제가 없는 평등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일까? 어쩌면 그들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생존 기회를 발견하려는 고투 가운데서, 그런 계약을 자발적으로 그러나 사실은 체제가 규정한 틀 안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즉 생존을 우선시한 전략적 타협의 일환으로 선택을 요구당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계약이 체제가 설정한 행동의 범주 밖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자율성과 타율성이 복잡하게 뒤섞인 체제와의 치열한 협상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치 않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주체의 순수한 자발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그 선택이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체제 내지는 사회가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 자체를 뛰어넘은 차원의 것, 다시 말해 체제의 질서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다소 극단적인 논리임을 인정하지만, 우리가 ‘자발성’이라는 말에 담긴 ‘자유’의 의미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주체가 그런 자유의 행위(act)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윤리학 본연의 의미에 입각한 윤리적 주체, 또는 주체의 윤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체제가 설정한 행동의 경계 자체를 뛰어넘는 윤리적 선택, 그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얻게 되는 체제의 질서 바깥이란 곧 상징적/사회적 ‘죽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바꿔 말하면, 윤리적 주체의 탄생은 ‘죽음’ 이후에야 도래한다는 것을. 이를테면 오늘날 널리 회자되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개개의 노동자들은 자기계발과 자기향상을 위해 노동 이외의 여가시간까지 모두 희생하여 자신에게 끊임없이 투자하고, 스스로의 비용과 편익을 철저하게 결산하며 삶을 관리해나가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살아간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노동자들의 이러한 자기계발은 철저하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인적자본으로서 노동시장 안에서 높은 상품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는 체제의 질서를 내면적으로 규범화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기계발이 과연 자유로운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체제에 의해 주체의 외부에 설정되어 있던 선택지의 조건을 개개인들이 벗어나는 순간, 그들이 맞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죽음’이 아니고선 현재로서 이 체제의 질서 바깥으로 완벽하게 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체제가 우리의 외부에 배치하고 규정해놓은 질서나 구조를 우리는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부자유한 조건 속에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따라서 탈주=죽음이라고 하는 위험이 뻔히 예측 가능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제 안에서 개인들의 자발적인 계약이란 순전히 공정한 것도, 완벽하게 평등한 것도 아닌, 차라리 반(半)강제적인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시장에 대한 도덕적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러한 우리의 삶의 조건, 즉 과거에만 해도 비(非)시장적 규범에 지배받던 삶의 영역들에까지 시장원리가 파고든 오늘의 현실이 과연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부터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질문은 앞서 말한 이러한 삶의 조건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 제도적 차원의 메커니즘, 즉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자본의 새로운 지배양식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덕적 분노를 넘어 신자유주의 분석으로
 
샌델은 차마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그 신자유주의를 푸코의 통치성 이론의 관점에서 정리한다면, 그것은 곧 시장의 논리를 사회 전체에 공고히 하기 위해 국가가 법적 개입을 통해 제도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국가 개입의 원리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그 체제 내의 개인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수단으로서, ‘경쟁’이라고 하는 시장의 제일원리를, 사회에 성공적으로 ‘접합’시킴으로써 탄생한 새로운 방식의 통치양식인 것이다. 요컨대 시장경쟁의 원리를 사회 전면에 강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전에 없던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한 상품화가 시작된 것인데, 그러한 사회의 시장화란 결국 자본이 국가를 통해 새롭게 구축한 통치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굳이 푸코의 논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샌델의 저작이 갖고 있는 이론적 결핍을 지적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예컨대 독일의 비판이론가 하버마스는 샌델보다 수십 년 앞서 후기자본주의의 구조적 병리성의 본질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테제로 요약한 바 있다[물론 푸코도 자신의 신자유주의 통치성 분석을 통해 '경제적인 것'에 의한 '사회적인 것'의 포괄, 즉 정부(통치)에 의한 시장원리의 전면적 증식에 대해 말했지만]. 난해한 푸코의 통치성 분석까지 끌어올 필요도 없이, 하버마스의 저 간명한 테제만 갖고도 샌델이 변죽만 울리고 있는 “시장이 비시장적 영역으로 확대되는 현상”의 원인 분석을 훨씬 구체적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하버마스에 따르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들 사이의 합리적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유지되어온 또는 그렇게 유지되어야 할 생활세계는 이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하는 체계 논리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그 결과 문화, 사회, 인격이라고 하는 생활세계의 구성요소들이 파괴되며, 결국 문화적 의미상실, 사회적 규범들의 정당성 훼손, 개인의 인격성 파괴, 사회적 관계들의 물화(物化), 시민에 의한 비시민의 사회적 배제, 배제된 자들의 자기 소외 내지는 타자화 현상들이 나타난다.[각주:2] 물론 이런 현상들은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전후 복지국가에서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온 후기자본주의적 통치성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가 샌델의 시장지상주의 테제보다 훨씬 분석적으로 가치 있는 이유는 적어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식민화시켜버린 체계를 말함에 있어, 그 체계의 하위범주에 시장만을 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킨 체계는 경제체계와 행정체계,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근대국가의 관료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중적 체계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문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 속에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한 이중적 체계가 생활세계로 침입하여 그것을 식민화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시장의 단독적인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 국가의 시장정책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란 점이다.
 
샌델의 책이 주는 많은 교훈과 장점들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만 읽고선 우리 시대의 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늠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건 시장지상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바꿔 읽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 본다. 다만, 신자유주의가 언제부터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계약조건의 불공정함이나 도덕적 가치 판단의 부패를 넘어) 우리 삶의 위기의 핵심적 요체가 무엇이고,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을 탐구하려는 자극과 동기를 제공해준 것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 이상의 가치를 이 책에서 찾는 것은 글쎄…

ⓒ 웹진 <제3시대>

 


  1.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8-1979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0); 사카이 다카시/오하나 역, 『통치성과 자유: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서울: 그린비, 2011). [본문으로]
  2. 위르겐 하버마스/장춘익 역,『의사소통행위이론 2: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서울: 나남, 2006). [본문으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안경환의 시대유감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태식
(대한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지도신부)


달포 전에 안경환 교수의 『시대유감』(라이프 맵, 2012)을 선물 받았다.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나, 정말 따끈따끈한 책이었다. 갓 출판된 까닭에 따뜻한 감촉이 표지에 남아있기도 해서였지만 글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시대의 소리가 귀에 살아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그래서 이런 일이 있었던 거구나!’ 라며 무릎을 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책장을 넘겨가며 시대를 들춰보니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무렵엔 어느덧 나도 상당히 유식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지식을 모임자리에서 한두 가지 풀어 놓으면서 친지들의 경탄에 으쓱해지곤 했다. 『시대유감』은 가히 정보 창고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시대유감』의 가치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에는 시대를 바라보는 지식인의 날카로운 풍자와 부드러운 연민과 놀라운 통찰이 담겨있다. 안경환 교수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소제목까지 영화제목으로 달은 것은 매력적인 조치였다. 화양연화, 와호장룡, 초콜릿,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만일 영화를 이미 본 독자로서 소제목과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는다면 훨씬 풍부한 감성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 때 인권의식이 형편없는 나라였다. 기성세대는 모두 공감하는 바지만 국가단결이라든가, 경제발전라든가, 반공방첩이라든가 하는 통치 이데올로기에 밀려 인권의식을 저당 잡힌 상태로 반세기를 살아왔다. 하지만 지난 일이십년간 인권은 양과 질에 있어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두었고 이제는 아무리 초라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세상이다. 『시대유감』에서는 우리나라의 인권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재 상태에 도달했는지 그 궤적을 잘 추적할 수 있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가치라 하겠는데, 저자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쌓았던 풍부한 경험이 표출된 결과로 보인다.
    요즘 우리나라는 장차 어떤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할지, 설왕설래 수많은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매번 대통령 선거 때마다 있었던 현상이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가진 이는 그에 합당한 인격까지 갖추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자신의 권력을 소중하게 다루어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할 책임 정도는 인식하고 있기를 바란다. 지도자의 자질을 윤리적으로 평가한 탓이다. 그런 까닭에 만일 지도자가 권력을 남용하면 인격에 파탄이 났거나 욕심이 지나쳐 본분을 망각했다고 분노하기 십상이다.
    꿈에도 그리는 사심 없는 지도자! 영국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홉스는 그런 지도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홉스는 힘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인간의 본능이며 이를 통해 일종의 안정감을 부여받고 그 안정감을 발판으로 새로운 도전에 맞서는 힘이 주어진다고 한다. 자기 개발에 있어 권력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리라. 그러나 만일 권력을 쥔 자가 그 힘을 한번쯤 사용해보고 싶은 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면 지도자 개인에게 거는 윤리적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게 옳지 않을까?  
    본성으로서 무한 권력을 추구하는 지도자의 욕심을 제한하는 도구는 성숙한 시민의식뿐이다.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방법은 권력에 대한 끝없는 감시와 견제다. 남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객체에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로 탈바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투표는 민주사회의 주인이 되는 교육과 훈련이다. 선거는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의식이다. 자신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105쪽)는 저자의 지적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많이 알았고 많이 배웠고 많이 생각했다. 이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지침서로 『시대유감』을 추천한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 책 소개 보러 가기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거듭나야 할 동성애 혐오증

 

 

이종원
(본 연구소 회원)



  동성애를 바라보는 눈

  “너 때문에 집안이 완전 개꼴이다. 더러운 자식!”

  지난해 방영된 SBS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의 대사다. 조카 태섭의 동성애를 알게 된 삼촌은 태섭에게 막말을 퍼붓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이 대사는 한국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지금은 동성애를 다룬 주제가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고 스크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각 또한 과거에 비해 많이 개방되었다. 21세기에 성적 다양성이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되며 유교 사상이 뿌리박혀있던 한국 사회에도 성적 다양성이라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교회문화는 아직도 동성애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혐오스럽고 그런 단어를 언급하는 자체까지도 경기를 일으키고, 수치심을 유발케 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병적이며 죄라고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 교회문화의 지배적 현실이다. 이러한 동성애적 혐오의 강한 보수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 배타성은 어느 종교보다도 강하다. 동성애 혐오를 넘어 그 자체에 강한 죄의식을 심어 우리를 동성애 혐오자로 만들고 있다. 이런 보수적 기독교를 향해 "예수가 게이였다?"라고 외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너무 뻔한 질문일 것이다. 어찌 감히 신성한 예수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신성모독이다. 경박하다, 불경하다, 마녀사냥 하듯 그 발언을 한 사람을 향해 이단 시비가 휘몰아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이 불경스런 질문을 던지는 책이 있다. 난 이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런 책을 기독교인이라면 필독서로 읽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보수 기독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방영될 때 시청거부운동 및 광고안내기 운동까지 펼쳤던 개신교 보수단체들로선 ‘펄쩍 뛸’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The Man Jesus Loved)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준 <예수가 사랑한 남자> 이 책은 미국에서는 2003년 출간된 책으로 올해 동연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는 테드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 교수. 시카고신학교 교수이자 퀴어 신학(Queer Theology·동성애 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한다.

  제닝스 교수는 이 책의 기획의 의도는 동성애혐오와 게이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성서 구절들을 우선 다루는 방어적 전략에서 벗어나서 성서에 대한 전통적인(오) 독해가 받을 만한 개연성보다 사실상의 ‘증거 우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즉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들을 감싸 안고 긍정하는 많은 증거에 대한 검토에 집중할 것이라는 의도를 밝히면서 복음서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전승들에 대한 탐구로,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의 논점들을 다루고 있다.

제1부 : 예수가 사랑한 남자

  ‘예수는 게이였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예수가 게이였다’는 것을 설득하지 않는다. 여섯 구절밖에 안 되는 동성애 혐오적 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수 전승인 성서 속에서 동성애에 호의적으로 볼만한 풍부한 텍스트가 있다고 제시한다. 예로 요한복음서에서 '제자'는 예수의 무릎과 품에 기대어 있었고(요 13:23, 21:20), 십자가 증인 중 유일한 남자였으며, 죽기 전 자신의 생모 마리아와 가족으로 연결된(요 19:25~26) 내용의 해석을 기존의 주류 해석학이 애써 숨겨 왔던 혹은 외면해 왔던 ‘예수가 사랑한 남자’에 관한 서사로 해석적 개입을 시도한다.

  제닝스 교수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워 있던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신약성서 내·외적 자료들에 대한 자세한 검토결과 성서는 동성애 혐오적이 아닌 옹호적 서사임을 증명하고, 여기에 고대 사회의 동성애적 관습 등을 참조하여 연구하면 신약성서가 재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동성애자로서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한다.

제2부 : 예수 전승

  ‘백부장과 젊은 애인’ 일화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미 제국의 질서 안에 일부 편입되어 있었던 초대 교회가 동성애적 성향을 ‘위험한 기억’으로 간주하고 이를 예수 전승으로부터 삭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흔적들을 주목한다.

 “그는(백부장)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을 원했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욕망으로 그는 행동한다. 그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소년애에 대한 관념을 전적비난하며, 그가 경험하는 종류의 사랑에 대해 어떠한 이해도 동정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리로 나서 한 유대인 치유사를 찾고, 거절과 조롱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사랑하는 소년 애인을 위해 도움을 청한다.”(p.257)

  또한, 제9장의 당혹스러운 젠더에서 거세된 남자들에 대한 일화중 에티오피아인 환관의 경우 “그는 경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고 ···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읽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환관이 읽고 있던 이사야서는 특별히 신의 통치 안으로 환관(거세된자)을 포함한 바로 그 예언자의 책이다. 또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이야기”,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던 발을 씻기시던 예수’의 이야기기는 전통적 젠더 역할의 전복을 권고하고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예수 전승에 대한 고찰로부터 젠더 역할들의 신성함이 예수 전승들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은폐하지 않고서는 동-성 간의 성애적 행위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주장될 수 없다고 제닝스 교수는 결론을 내린다.

제3부 :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나 자식,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그 누구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27)

  성서는 그 이름(예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라는 새로운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가족해체의 전복적 가르침은 동성애자들의 상호적 성애가 배제되지 아니하는 확대된 가족 공동체를 소개한다.

  사두개 인들의 질문, 즉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관계 후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여야 하냐는 질문에 예수는 결혼 및 가족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를 폐지해 버린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녀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의해 소유권이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들이 부활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인간적인 제도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지배 또는 소유가 폐지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에서 선교적인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교체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라”(새번역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선포하고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가족 제도에 대한 반대 그리고 이를 재생산하는 구조인 결혼에 대한 의혹은 동-성애적 관계들의 수용에 부합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급진적인 미래상을 증거하고 있다는 시각이 놀랍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의 특징이 되는 성애 혐오에 귀속될 수 없다고 제닝스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거듭나야 할 동성애적 시각

  역사적으로 성서는 노예제, 여성차별, 소수자에 대한 끝없는 학대를 정당화하고 지키는 근거로 성서를 인용해 왔다. 동성애 혐오를 지지하는 증거의 빈약함이 노예제 등 인종차별을 주장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훨씬 더 많지만, 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인종차별이 성서적이지 않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제닝스 교수가 동성애 혐오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인 교회의 입장이 성서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듯이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 전환자 등을 괴물로 만든 동성애 혐오증은 교회가 만든 신화일 뿐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자들의 평등을 부인하는 등 차별의 도구로 사용된 성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 주장으로 거듭난 것처럼, 동성애의 보편적 혐오적 시각에서 인종차별과 노예제의 철폐를 주장했던 운동이 동성애의 보편적 금지의 시각에서 눈을 돌려 성서 속의 진정한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끝임 없이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맹목적 신앙의 장애물을 재거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인습적으로 교회에서 순종하라는 지배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교회에서는 “믿음이란 그저 믿는 것일 뿐”이라는 너무 파렴치한 순종의 신앙을 강요해 왔다. 믿음의 증거로 자발적 맹목의 신앙에서 벋어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왜? 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금지를 탈피하고 생각의 외연을 넗혀 나가면 보다 큰 믿음의 세계를 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1.12.13 01:2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서평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정혜윤
(CBS 라디오 프로듀서)


저는 학자나 목회자가 아니라 정말로 소박한, 무지한
신앙인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세례교인이지만 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평소에 이렇게 입에 달고 다닙니다

난 탕자다. 난 집을 떠난 탕자다

정말이지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 탕자가 가출하고 싶어했던 이유를
열배는 더 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나가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는 꽤 성공한 졸부 
부모처럼 굴고 있습니다
그들 말에 따르면
하느님은 하나에서 열까지
지상에 마치 사소한 일에 시시콜콜 간섭이나 하려고 오신 듯합니다

요즘 교회는 남의 성생활에는 관심이 있으면서
교회가 이권 나눠 먹기의 장소가 되고
중산층들만의 배타적인 지리멸렬한 사교 장소가 되는데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큰 건물 짓는데 혈안이 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만을 은총으로 여깁니다

대형 교회들의 타락상은 환멸감을 안겨줍니다.

한국에서 하나님은 이미 혜택 받은 자만을 특별히 사랑하는 분 같습니다
그리고 그 혜택받은 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하고 기만적으로
남한테 진부한 훈계를 늘어놓는 것을 기꺼이 봐주시는 분 같습니다.
저 역시 그것 때문에 몹시 슬픕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목회자들이
삶은 엉망진창으로 꾸려나가면서
구원과 믿음과 사랑을
말하는데 저는 정말로 넌더리가 납니다

예수의 놀라운 약속
하층민들에게 주었던 놀라운 약속이
어떻게
부유층들의 전유물들이 되어갔는지
저는
예수님이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라고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제라도 한국 교회가
키에르케고르식으로 말하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를 구하는데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스스로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사람들은
신이 아니라 자기를 찬양해 왔을 뿐이다.
고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의 교인들입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제 절망감이 컸기 때문인지
저는 예수가 한 개인으로서 누구를 사랑했는지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적어도 그 성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동성애적 사랑을 했으니 동성애는 괜찮은가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솔직히 예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런 절대적 권위를 부여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란 제목을 봤을 때도
예수가 사랑한 인류 정도로 제목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에로스와 아가페란 단어에 대해 제가 처음 들은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 책 108페이지에 보면 이러한 구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아가페로 표현되었다는 사실로부터
특정한 우정 또는 성애적 애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출할 것이다
고 했는데
그게 바로 저입니다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은 동성애적 욕망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사랑이 보다 정신적인 형태로 승화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관계를 맺지 말아야한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로 말해질수 있는 사람이 친밀한 의미에서
특정하게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이로 판명되는 것의 부적합함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책이 열두제자중 혹은 열두제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를 사랑했느냐 추적하는 것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의 성생활에 밝히는 책도 아니고요.
저는 다른 것들을 기쁨속에서 봤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규칙들보다 인간적 행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다. 126페이지

-십자가에 달린 자가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공동체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127페이지

-노예적인 수용과 복종의 태도가 아니라
관습적인 도덕과 생활양식에 대한 훨씬 집요하고 끈질긴 전복이란 것이다

-그는 단적으로 거룩한 사람 예언자 메시아에 관한
어떤 기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벤덤이 말했듯이
인간의 행복과 중요한 진실에 대한 존중
애 관한 글이라고 읽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서영준
    2011.10.07 21:3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참으로 감사한 글입니다.
    돌아봐야지요.
    반성해야지요.
    더 없이 더 없이 더 우리가 아닙을 고백해야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내가 하는 즉시 바로 헛짓꺼리를 하닌까요.
    그저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서평

평등과 해방의 관계로 ‘제국’을 해체하는 예수의 새 가족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


저는 성서신학자가 아닙니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문서비평이나 양식비평적 차원에서의 공감이나 반문을 제기할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신학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사회윤리학자로서, 그러니까 주변자적 시선을 가지고 성서를 읽는 것에 상당히 익숙한 한 지식인 독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었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의 소박한 ‘독후감’을 나눌까 합니다.

1. 식탁 위에 차려진 만찬 즐기기, 예수 전승으로부터의 적극적 독해

예수는 게이였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아주 직접적으로 ‘예수가 게이였다’는 것을 설득하도록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예수가 게이라 해도 그의 메시지 전반의 핵심 내용과 위배됨이 없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가 게이인 것이 주변인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평등하게 바라보려는 그의 선교사역의 수행성으로 더욱 적합하며 그의 전반적인 메시지에 부합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여섯 구절밖에 안 되는 동성애혐오적 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수전승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싸움에 나선 개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리는 바닥에 깔린 몇 개의 부스러기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무시하고, 그 대신 신약성서 서사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만찬에만 집중하는 편”을 선택했다는(414) 제닝스 박사의 말처럼 말이죠.

흑인, 여성, 제3세계 민중의 시각에서 전통적 성서해석에 이의를 제기해온 그 모든 해방신학적 전통과 맥을 같이 하며 제닝스 박사는 이 책의 시도가 “‘완전한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다른 것들의 희생의 대가로 얻는 부분적인 해방은 예수 안에서 약속되고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지평 내에서 해방일 수 없”(19-20)으니까요.

때문에 “오늘날의 게이적 또는 퀴어적 감수성의 관점으로부터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전략”(22)을 택한 이 책은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들을 감싸 안고 긍정하는 많은 증거에 대한 검토에 집중”(23)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제안 받으며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얼른 떠올렸던 전제처럼, 제닝스 박사는 제일 먼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사랑받는 자’에게 주목합니다. “예수의 무릎에 기대어 있고” “예수의 가슴에 등을 기댄 상태로 예수에게 말을 건네는”(49), 그리고 십자가 증인 중 유일한 남자였으며 예수가 죽기 전 자신의 생모 마리아와 그를 가족으로 연결해준 ‘그 남자’ 말입니다. 불트만이 이 사랑받는 자에 대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 즉 후대의 추가로서 이방인 교회의 전형으로 풀이한 것에 반대(79)하며 제닝스 박사는 “예수가 제자들 모두를 사랑하지만,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즉 성애적 의미에서] 이 제자를 사랑했음”을 강조합니다(81). 물론 이 사랑은 예수 사역의 공적 지위에서는 그 어떤 특별함이나 우위를 가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제닝스 박사는 무엇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메시지가 강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성애는 오히려 그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당시의 관습적 제도들이 가진 억압성에 반대했던 예수이고 보면 “결혼과 가족적 가치들에 의해 대표되는 관습성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서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동성애적 관계의 암시가 하나의 적절한 수단”(139)일 수도 있겠지요. 제닝스 박사는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예수와 그 제자의 관계가 성적인 표현을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는 가정에 기초할 때 가장 잘 이해”되며, 무엇보다 “텍스트 전체의 전반적인 세계관과 합치한다.”(169-170)고 결론짓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를 모든 면에서 비관습적인 인물로 표상한다. 그의 비관습성 자체가 동시대인들의 신학적-사회적 가정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예수는 경건하고 인격적인 고결함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는 금식, 정결례, 성전 참배와 같은 경건함을 실천하는 예시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성서 해석에 대한 관습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경건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죄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관습적인 방식들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먹보에 술꾼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오로지 (사회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구성원들인 창녀나 (로마 제국의) 부역자들과 함께 한다. 그는 자신의 의례적 정결함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며, 문둥병자, 시체, 생리중인 여자를 거리낌 없이 만진다.(181)

요한복음의 예수가 “정의와 관용 그리고 기쁨이라는 가치들이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정립하기 위해 관습적인 사회생활의 구조들을 전복시키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면(181)“사회적, 생물학적, 경제적 필요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성애적 관계를, 그래서 이성애적 관계들 역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성애적 관계를 예기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닝스 박사의 주장은, 이성애자인 저에게 그 어떤 거부감도 없는,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2. 예수, ‘게이’이거나 ‘젠더제한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이어지는 II부에서 제닝스 박사는 1-2세기에 유통되었던 ‘비밀의 마가복음’에서 전해지는 ‘부유한 젊은 관원’ 전승과 정경 복음서에 남아있는 ‘백부장과 젊은 애인’ 에피소드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미 제국의 질서 안에 일부 편입되어 있었던 초대 교회가 동성애적 성향을 ‘위험한 기억’으로 간주하고 이를 예수 전승으로부터 삭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흔적들을 주목합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이 가지는 체제 전복적 메시지들, 주변화된 사람들이 주된 증거자요 체험자로 등장하는 구성을 고려할 때 동성애자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예수의 전승은 충분히 가능한 서사라는 것이죠: “그는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을 원했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욕망으로 그는 행동한다.”(257) ‘욕망’이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주디스 버틀러의 책 『안티고네의 주장』이었습니다. 국가의 법에 의해 범법자로 낙인찍힌 오라비이기에 그 시신을 수습하는 일 역시 역모로 규정되던 상황에서 오로지 사랑하는 오라비의 주검을 고이 묻어주고 싶은 그 욕망에 충실했기에 범법자가 되었던 안티고네 말입니다. 예수 전승에서 백부장은 제도와 규칙의 위반자로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믿음의 범례로서 예수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는 법보다 욕망의 지지자이기 때문이겠죠?

이 에피소드는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이 담고 있는 ‘젠더해방적인’ 담화들, 즉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환관들과 1세기 젠더적 역할 기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선언하며 예수를 따른 여제자들의 이야기, 예수 선교사역의 클라이맥스에 주요한 역할자로 등장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 또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던 발을 씻기시던 예수’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커다란 서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게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제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젠더 역할들의 신성함”은 “예수 전승들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은폐하지 않고서는 동성 간의 성애적 행위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주장될 수 없다”(302)는 제닝스 박사의 결론입니다.

3. 평등과 해방의 관계로 ‘제국’을 해체하는 예수의 새 가족들

III부는 복음서들에 나타난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에 대한 예수의 전복적 가르침에 대한 검토를 통해 동성애자들의 상호적 성애가 배제되지 아니하는 예수의 (확대가족)공동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자매들의 연합과 연대 말입니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340) 사두개인들의 질문, 즉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관계 후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여야 하냐는 질문에 “예수는 결혼 및 가족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350)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녀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의해 소유권이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들이 부활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인간적인 제도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지배 또는 소유가 폐지된다는 것”(350)이었다는 겁니다.

결혼은 예수 전승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행동양식)를 구현하는 자유롭게 선택된 충실성을 나타내는 것”(365)이나 “두 사람이 욕망과 환희 내에서 연합하는 것”(370)으로서는 옹호되지만, “분리와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세상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가치들의 기초적인 생산 단위 내에 인간들을 얽어매는”(371) 제도로서는 거부되고 폐기됩니다. 때문에 이런 서사 속에서 “제도화되지 않은 성애에 대한 긍정”은 “동성애와 동성적 관계”라는 주제와 연관될 수 있다고, 제닝스 박사는 말합니다, 예수와 그가 사랑했던 남자 사이의 관계는 동성애라는 젠더적 특성보다는 ‘종속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적 사랑’이라는 데 방점이 찍힌 채 읽혀져야 하니까요.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에서 선교적인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교체된다”는 제닝스 박사의 독해,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라’는 명령은 ‘선포하고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375)는 그의 읽기방식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홍수 때 동물들의 생명을 구하는 방식과 비교하며,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내보낸 예수의 에피소드를 해석하는 방식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예수에게서 실현된 새로운 약속은 새로운 민족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내에서 완성에 이르게 될 새로운 운동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가 어떻게 열두 명의 아들이 아니라 열두 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이에 이어 땅 위의 모든 민족들로부터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는다.”(381) 사랑하는 두 사람을 연합시키는 욕망이 “자손에 대한 약속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382)이라면, 그 ‘연합에 동성애적 성애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제닝스 박사의 말에 동의합니다.

전통적으로 바울에게 저작이 돌려지는 일부 서신들에서 여성억압적이고 반동성애적 언급들이 나오지만, 현대의 신학자들은 이를 후기바울적인, 그리고 종종 반바울적인 텍스트임을 밝히고 있는 마당입니다. 복음서와 동시대적으로 편집되었을 이 서신들은 기독교 초기 전통 안에서 예수 전승에 반하는 뚜렷한 한 흐름, 즉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그 구조를 신성화하려는 ‘제국적’ 의도를 보여줍니다. 제국은 ‘동질화’와 ‘보수화’를 그 핵심가치로 하는 시스템이니까요. 결론으로 가면서 저자가 분명히 하듯이 문제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이를 긍정하는 독해는 성서상의 모든 구절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지 않음”(415)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한 특정 시스템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두려움’ 말입니다. 그들은 근대・자본주의・가부장적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이성애적 결혼과 가족제도의 ‘신성화’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교회 전통의 시각에서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년’으로 읽히고 거부되듯이, 동성애와 동성애자들을 향한 교회의 알레르기 반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제국의 중심 예루살렘이 아니라 주변인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상징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또한 그 여정이 점차로 예루살렘을 향해 갔던 것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 그 모든 차이들의 위계화와 분리가 해체된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이 책의 주장과 이 책이 선택한 읽기방식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녀)가 제국의 옹호자, 예수의 반대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 웹진 <제3시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대학, 조금 더 들어봅시다
- ‘말함을 돕는’ 인문학을 위하여


김신식
(《당대비평》간사)


# 1 올곧지만 무기력한

<대학의 몰락>은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9)를 묻는 책이다. 그리고 그 물음을 위해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역사적 접근이다. 책 속에서 역사적 접근은 대학의 ‘변질’을 고발하는 주요 방식이다. 원래 대학은 이런 모습이었는데, 오늘날의 대학은 이렇게 변하였다는 사고는 ‘대학의 몰락’이라는 제법 묵시록적인 책의 제목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본 책에서 저자는 깔끔한 도식을 만들어낸다. 저자가 책 속 도식에서 강조하는 잣대는 ‘세상과의 비판적인 거리라는 조건’(27)인 듯하다. 오늘날 세상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침윤되어 있고, 여기서 대학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이상이 시장의 아이템으로 절하되고, 이러한 대학은 현실과의 불화를 더 이상 꾀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 저자는 시종일관 이 주장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오늘날 이러한 주장과 그 주장을 위해 쓰이는 저자의 서술 방식이 ‘대학의 위기론’을 진단하는 전략으로서 무기력함을 숨길 수 없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이 책은 요즘 횡행하는 ‘~의 인문학’과 같이 ‘인문학’을 ‘생활용 교양’으로 취급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에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들었다. (조금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책 뒤에 적힌 네 분의 추천사도 이 책을 ‘정직하게’ 판단하고 쓴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 2 ‘인상 깊은’ 현실이 아닌 ‘인상만’ 남은 책 속 대학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대학 내 현실에 대한 문제점들이 큼직하다보니 그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언어들도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굳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굳은’ 언어는 그 어떤 문제점들이 닥쳐도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은 채 ‘성스러운 비판적 사유’를 전개하겠다는 ‘옳은 태도’를 보여주는 데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옳은 태도’는 “자본과 시장과 경쟁이라는 이 시대의 대학의 우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260)는 주장 그 자체의 올곧음만을 도드라지게 하는 데만 그 가치를 다한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대학의 기업화’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거리(distance)의 힘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 ‘거리의 힘’은 오늘날 대학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대학- 현장’과의 간극을 드러내는 한계로 작용한 듯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학의 잘못된 현실을 꾸짖는 데 있어 ‘대학의 이상과 목적을 질문하기 위한 사유’라는 실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책이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생활상, 구체적으로 ‘대학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사회상에 관련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상이 짙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아쉬웠던 점은 2장 ‘대학의 역사에서’와 3장 ‘대학과 철학’을 위해 할애한 저자의 ‘논리적 에너지’가 결국 대학의 현실을 ‘인상 깊게’ 살피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상만’ 살피는 데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 3 대학, 조금 더 들어보자

저자가 ‘대학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방편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면 그것에 맞는 ‘몰락의 징후’혹은 ‘몰락의 현실’들을 더 듣고 챙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이것은 비단 저자뿐 아니라 근래 ‘20대 담론’과 엮어 ‘대학의 위기’를 논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학점 쌓기? 토익 공부 치중? 경영학의 인기? 취업난? 경쟁? 효율성? (이미 많은 논자들이 제기하였듯이) ‘대학의 위기론’이 하나의 담론적 유형으로 우리 사회에 인식되면서 그러한 위기론을 강조하기 위해 드는 사례 혹은 개념들도 너무나 안이하게 관습적으로 분류,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분류, 배치를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학의 위기는 이 정도 알았으면 되었다’로 섣불리 귀결되어 이후 기계적으로 제시되는 온갖 해결의 언어들이다. 여기서 대학의 위기에 대한 ‘해결어’(특히 ‘20대 담론’과 묶어서)에 대하여 정작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꼬집어 볼 대목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알다시피, ‘대학의 위기론’은 ‘20대 담론’과 마찬가지로 말하기 신난 사람들만 더욱 신난 구조가 지속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통해 대학을 감싸고 있는 문제들을 더욱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문제점들을 단순하게 유형화시키고, 그 문제점 안에서만 대학의 몰락과 동시에 대학생의 몰락이란 비난 섞인 비판이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인기 있는 대화거리가 되었다.(여기서 인기 있는 이유가 ‘재단하기 쉽다’와 유사한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대학의 몰락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학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자들의 언어를 더 듣고 모으려는 진심어린 노력이라고 본다. 이 정도면 다 들었지 않았는가,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대학 내 현장의 언어를 당사자들이 더 말하게 함으로써, 그 말함의 표출을 ‘분노의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인문학은 너무나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넘친다. 정작 ‘말하도록 돕는’ 인문학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저자가 “인문이라는 학문의 언어는 원래 고백과 증언의 언어였다”(51)라는 언급한 대목을 지나칠 수 없었다. 단, 대학의 문제를 논함 가운데 이런 고백과 증언의 언어가 ‘대학의 위기론’을 설파하는 사람들만이 확보한 제한된 권리로만 행사된다면 유감일 것이다. 이는 정작 ‘인문학’의 길이 아니라 ‘인무(人無)-학’의 길로 빠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더불어 걱정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 느낀 유감이자 이 책에서 얻게 된 어떤 교훈일지도 모른다.

ⓒ 웹진 <제3시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04)
특집 (8)
시평 (92)
목회 마당 (58)
신학 정보 (131)
사진에세이 (38)
비평의 눈 (65)
페미&퀴어 (22)
시선의 힘 (131)
소식 (152)
영화 읽기 (30)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28,301
Today : 121 Yesterday :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