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병합 100년, 무엇이 남았나?

양미강
(한백교회 담임목사 | 세계NGO역사포럼 운영위원장)

내가 언제부터 일제 피해자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지금으로부터 14년전인 1997년이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총무로 일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맨 처음에는 적대감 가득한 울분이 내 마음에 가득하더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또 다른 연민이 나를 감싼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식민지로 살았던 36년간의 세월은 일본이나 한국 모두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심각한 상처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증후군이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에 스며있다. 나는 이것을 역사적 트라우마라 일컫는다.

일제 식민지 피해자들인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 강제동원 피해자들, 원폭 피해자들, 한국인으로 일본의 포로감시원이 되었다가 BC급전범으로 내몰린 사람들 등등 수도 없는 피해자들 마음속 깊이 박힌 트라우마는 종종 피해의식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종종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과격한 민족주의적 반응 역시 트라우마의 한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피해자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가해자인 일본정부 역시 해방된 지 60년이 넘어서까지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트라우마의 왜곡된 현상 아니겠는가? 역사적 트라우마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과거를 직면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2010년 8월 강제병합된 지 100년이 되는 달,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었다. 과거 100년은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 밑바탕에 있던 트라우마의 아픈 모습이라면, 앞으로의 100년은 질적으로 다른 전환점을 요청받고 있다는 인식이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로 모이게 했다. 그 전환점이란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이다.

그동안 일본정부는 무라야마 총리, 고이즈미 총리, 칸 나오토 총리에 이르기까지 사과담화가 발표되었으나 정작 한국인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한 부분이었고, 또한 사과에 따른 법적 조치가 병행되지 않아 말뿐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했다. 당연히 정부가 해야할 몫에 관해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시민사회가 나선 것이다.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겠다는 의지가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한일시민대회에 녹아있다. 일제 피해자문제를 가지고 활동해왔던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140여개 단체들은 각각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2년간 활동해왔다. 8월 22일 1000여명이 참석한 일본 개막식을 시작으로,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한국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과 한일시민대회 폐막식이 주요행사였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연인원 3500여명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다. 8월 한달 내내 역사현장 기행, 전국단위의 달리기 행사 외에도 두 개의 문화공연, 표석제막식과 특별전시회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한일시민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이 가지는 의미는 2001년 더반 선언에서 나타난 식민지배와 식민주의가 반인도적인 범죄라는 선언을 이어받아 한일과거사 문제가 식민지 지배에 따른 범죄이며 동시에 더반 선언문이 제기한 반인도적 범죄라는 보편성을 제기한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구조에서 벗어나 식민주의와 식민지 책임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한일시민공동선언이 더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실천력을 담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일본총리들의 수많은 담화와 선언이 무색한 것은 그야말로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한일시민사회가 역사적 매듭을 풀겠다는 의지를 선언문에 담았으니 더도 말고 그대로 실천한다면 역사적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일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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