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화해시대 그리스도교 평화운동의 과제[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남북정상회담 일주일을 남겨두고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종전선언’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1953년 7·27 휴전협정은 양 진영의 ‘전투 행위 중단’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하여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남북대화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과제로 삼아왔다. 물론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닌 남한정부가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참여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남한이 사실상의 당사자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여 남한정부가 북한과 함께 종전선언을 한다는 것은 국제법적 효력을 갖지는 못하겠지만 매우 중요한 변수일 수 있다. 이것은 곧 열릴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문제’가 주요 의제로 부상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갈망하던 한반도 평화체제는 머지않았다.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6자회담 당사국들은 한반도 평화협정과 단계적 비핵화를 선언한 바 있다. 한데 새로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사실상 이 공동성명을 부정했고, 북한은 제2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한반도는 다시 냉전체제로 회귀했고, 그것이 남한에선 강경군부의 재정치화와 냉전주의자들의 정국 주도권 강화로 이어져 결국 박근혜 정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대중을 동원하여 박정희의 분신으로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냈다는 정치신학적 분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두 정권의 정치적 자원의 동원능력의 차이를 읽는 데는 실패했다. 사실 박근혜나 그 측근들도 스스로를 오인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주의적 지도자(즉 메시아적 정치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처럼 정권을 운영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박정희와는 달리, 결코 절대일인으로서 충성경쟁을 벌이는 관료집단을 거느릴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이해집단들이 냉전주의적 정치지형 위에서 극우주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면서 일시적으로 결속한 것이 박근혜 정권의 내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이 정권은 스스로 내파될 것이 예측되었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 이후 다시 기회가 왔다. 문재인 정권은 남북대화 기획을 재가동했고 ‘코리아패싱’이라고 조롱거리가 되었던 상황을 빠른 속도로 반전시켰으며, 한반도는 또다시 평화체제 출범 직전 단계에 도달했다. 아마도 현 정부의 지난 1년간의 정치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라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첫 번째 디딤돌을 성공적으로 놓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부가 앞서서 성공적인 평화의 디딤돌을 놓는 동안 시민사회, 특히 그리스도교계는 무엇을 했을까. 지난 1980년대, 남북한이 서로 강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대화의 돌파구를 연 것은 개신교 소수파인 진보세력이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막강한 국제 네트워크와 공신력을 이용해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물론 가톨릭도 이와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젊고 유능한 청년들이 경험을 쌓고 있었다. 현 정부의 남북대화 전문가들 중 이때부터 이 일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이들이 적지 않다.  

2018년, 남북화해시대가 꿈처럼 다시 도래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대 이후 개신교와 가톨릭의 평화통일운동은 그 밑거름이었다. 한데 지금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문의했던, 두 종단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속에는 종단 내에 냉전주의자들의 위세가 훨씬 강해서 시대를 역진하고 있다는 우려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한국개신교는 극우주의자들의 아성이다. 여기서 한국개신교에 대해 좀 더 얘기할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개신교 다수파는 극우주의 성향이 너무나 강했다. 그러나 이후 개신교 다수파인 극우주의적 세력은 정치전선에서 한발 물러섰고, 소수파인 진보세력의 반적대 평화통일운동이 빛을 발했다. 그런데 1990년 어간 한기총의 등장은 극우주의적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당시 전무후무한 거대 바이블벨트가 형성되었고, 개신교 극우세력이 그 축을 이루고 있었다.

한데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그 우파적 대연합이 붕괴하고 있다. 하여 극우 냉전주의적인 개신교 세력은, 여전히 그 위세가 강력하기는 하지만, 심한 위기의식에 빠져 있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위기의식의 퇴행적 반응이 지금 개신교 극우파의 행보를 특징짓고 있다는 점이다. 매우 공세적으로 증오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화해시대 개신교와 가톨릭 평화운동의 과제는 ‘증오연대의 해체’와 화해, 공존, 치유를 향한 실천을 구체화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0205300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4. 20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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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권 주체, 국민을 넘어 '사람'으로[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약소국이던 고대 유다국은 기원전 8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까지 60여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번영기를 맞았다. 한데 이 시기 소농은 몰락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분배를 강조하는, 소농친화적인 개혁세력이 결속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원을 독과점해온 귀족 친화적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쟁취했다.

2016~2017년 한국의 촛불대중처럼 소농세력의 집합행동을 기반으로 해서 요시야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정부가 들어섰다. 우리는 요시야 왕실이 추진한 성문법전에 대해 알고 있다. 성서의 ‘신명기’가 바로 그것이다. 필경 이것은 이후 거의 1000년 동안 조금씩 첨삭된 결과물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문서에는 요시야 개혁정부의 법안이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다.

신명기 법전의 중심 기조는 소농 중심의 사회개혁에 있었다. 요컨대 소농의 몰락을 억제하고, 이미 몰락한 이들을 복원시키며, 나아가 그들이 몰락 과정에서 빼앗겼던 토지까지 되돌리려는 급진적 기획까지 다루어져 있다. 그뿐이 아니다. 신명기 법전의 안식일 법은 ‘쉼을 의무화’하고 있다. 신이 노동 후에 그렇게 쉬었으니 7일에 한 번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은 누구를 향해 의무라고 말하고 있을까. ‘신명기’ 5.14~15는 이렇게 명시한다. ‘너희도 쉬고, 자녀도 쉬며, 노예도 쉴 것이고 심지어 가축도 쉬게 하라. 나아가 떠돌이 식객도 쉬게 하라.’ 여기서 이 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진 자는 자산가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자산가들은 자신에게 매어 있는 ‘권리 없는 자들’을 적어도 7일에 한 번은 쉬게 해야 한다. 이때 이들 ‘권리 없는 자들’에겐 안식일은 의무가 아니라 최소한 누려야 하는 기본권인 셈이다. (그보다 앞선 법전으로 추정되는 ‘출애굽기’의 안식일 조항도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추정컨대 이 텍스트의 현존하지 않은 원본은 필경 이웃의 선진국인 이스라엘국의 문서일 것이지만 현존하는 ‘출애굽기’ 십계명의 작성자는 요시야 왕실 서기관들이었을 것이다. 나의 추정으로는 ‘신명기’ 법전이 만들어지기 전, 타국의 법전을 개작하여 사용한 것이 ‘출애굽기’ 법전이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 법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이 요시야 왕실 법전의 독특성을 의심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주목할 것은, 안식일 법에 의하면 기본권의 주체는 귀족과 부농, 그리고 소농뿐 아니라, 노예, 가축, 떠돌이 식객까지 포함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떠돌이 식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그 집에 들어온 유민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개 이들은 노예보다도 못한 처지의 사람들이다. 노예는 인신이 주인에게 구속된 절대적 예속상태에 있지만, 그나마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조상대대로 주인에게 속해 있어 죽을 만큼 굶주리지는 않을 수 있다. 반면 ‘떠돌이 식객’은 그런 상태의 예속성조차 불안정한 존재다. 한편 이 기본권에는 가축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권에 관한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면 매우 진보적인 가치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해왔던 이전 정권들과는 달리, 국민이 우선인 정부를 만들겠다는 것, 정말 그런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국민의 염원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렇게 해석했다.

한데 이번 청와대가 발의한 헌법 개정안의 기본권조항을 보면,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헌법 개정안에 대해 3일에 걸쳐 해설한 첫째 날(3월20일) 조국 민정수석은 (떠돌이 식객 같은 신세의) 외국계 이주민들이 포함되는 기본권의 주체를 명시하기 위해 ‘국민’에서 ‘사람’으로 표기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의 우려처럼 이렇게 진취적인 법안을 담고 있음에도 거대 야당의 반대로 이 헌법 개정안은 무산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개헌이 현 정부 시기에 가능하든 않든 향후 기본권을 둘러싼 논의에서 그 주체가 ‘국민을 넘어 사람’이라는 논점이 끊임없이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권과 인권 논의의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그런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을 기대하며 성서의 안식일법의 논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2800년 전의 한 개혁정부는 기본권의 주체에 가축까지 포함시켰다는 것을. 또한, 비록 문 대통령이 대선과정에서 혐오의 대상처럼 동성애자를 말했지만, 그이들도 당연히 기본권을 누려야 하는 주체라는 점을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23211401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3. 23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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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Rahab)의 스캔들(scandal)로 바라본 Me Too[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그들이 나간 뒤에, 라합은 홍색 줄을 창에 매달았다. (여호수아 2:21)


01. 1968세대 vs 2018세대


올해는 68혁명이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1968년 3월 미국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그 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겹치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반전, 히피운동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 확산되었습니다. 68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독일 등 국제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소련 위성 국가였던 체코에서도 68년 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모토로 공산주의 내에서의 개혁이 도모되었습니다. 하지만 8월에 소련에 의해 진압당하죠. 유명한 ‘프라하의 봄’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체코 출신의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프라하 젊은이들의 방황과 좌절과 희망을 누설한 바 있습니다.

20세기 말은 68을 분기점으로 그 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어도 현대사상의 지형도를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68을 분기점으로 각종 post 담론들이 분출하게 됩니다.(Post 맑시즘, Post 모더니즘, Post 구조주의, Post 콜로니얼니즘, Post 페미니즘 등) 68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냉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강력하게 작동되었던 대타자의 목소리, 하나는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소련과 동부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교조적 공산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럽의 지성과 젊은이들은 “양자에게 우리는 속았다. 이제 그 푸닥거리를 멈춰라!” 이것이 68이 우리에게 선사했던 선물이었습니다.

68혁명은 우리가 페미니즘, 동성애, 인종주의와 같은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68 이후 적어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누구도 여성차별 혹은 비하, 인종주의나 동성애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내면 지식인의 범주에 끼지 못하는 수준이하의 사람으로 시민사회에서는 낙인이 찍힙니다.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라는 낙인만큼 서구의 성숙한 시민사회 분위기에서 반동성애자, 인종주의자, 여성비하론자로 찍히면 살기 피곤합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 것이 68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68혁명이 지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68혁명 50주년이라는 시의적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부각되는 것은 요 근래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이 각종 시위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8세대와 지금 젊은이들, 그들을 밀레니얼 세대(밀레니얼 세대란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2010년 이후 사회의 주역으로 점점 대두하고 있다)라고 부르는데, 양자 간의 차이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진보진영의 운동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울러 요 근래 번지는 Me too 운동은 이런 흐름 속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물론, 이런 세대론적 접근은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이죠. 출생, 지역, 계급, 거주지 등과 같은 것들이 그 변수들입니다. 미국 남부 농촌지역인 경우는 젊은이들의 투표경향은 대체로 부모세대와 같습니다. 미국 남부 같은 경우는 이런 세대론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대론적 분류가 유효하지 않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유명 사립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청년들의 진보정당 지지율은 거의 바닥일 확률이 높습니다. 서구사회 상위 5% 이내에 속하는 고소득자들의 진보정당 지지율은 어느 사회이건 얼마되지 않습니다. 즉 경도된 근본주의와 최상위 계급에게는 세대론적인 접근이 무용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중산층이하 밀레니얼 청년 세대들과 이전 세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68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간 운동의 차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68은 이데올로기의 세대라 할 수 있고, 현재는 생계형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미국 플로리다 고등학교에서 총기사고가 있었죠. 그래서 미국 고등학생들이 백악관 앞에서 행진을 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것의 구호가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Our Lives)'이었습니다. 21세기 청년들이 거리로 나오는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숭고한 이데올로기를 이땅에서 실현하기 위한 강철 같은 의지와 투철한 신념 때문에 거리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힘들어서, 최소한의 삶의 안전함을 위해서 거리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럽 전역에서 청년들이 대거 시위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17~18세부터 23~24세 까지 대표적인 밀레니얼 세대 청년들입니다. 주된 이슈는 세계평화, 민주주의 만세, 인류의 존엄 뭐 그런 거창한 구호들이 아닙니다. 유럽 전역으로 지지를 넓혀가는 보수당 정권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공공의료 서비스에 대한 민영화반대, 각종 복지정책 축소에 따른 불만으로 촉발된 삶에 대한 위기감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이탈리아 총선이 있었는데 보수우파가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복지 정책에서 축소지향의 시행이 예상되면서 역시 이탈리아 젊은이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하네요.


02. 생계형 좌파의 탄생, 그러나 조용한 (한국) 청년들


현재의 밀레니얼 세대들은 전후 최고의 스팩을 갖춘 세대들입니다. 지난 주 김진호 목사님이 하늘 뜻 나누면서 오늘 날 청년을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라 명명한다는 소개를 하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스팩을 보유한 세대들이 자신을 부르는 방식이 ‘획득’이 아니라 ‘포기’라는 절망의 아이콘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지옥의 묵시록 아닐까 라는 말도 했습니다.

현재 청년세대들은 6.25이후 최초로 부모세대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과 유럽의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샌더스 후보를 많은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들이 지지했습니다. 그들의 실질임금이 부모세대에 비해 20% 낮을 것이라고 여러 경제지표들이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서 샌더스의 발언과 정책이 미국 밀레니얼 세대들의 호응을 얻은 것입니다. 현재 미국 밀레니얼 세대 청년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평가는 회의적입니다. 거의 과반이 자본주의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분배와 완전고용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미국이 이 정도이면 좌파의 입김이 강한 유럽은 어떨지 짐작이 갑니다. 이렇듯 68 이후 50년이 되는 시점에서 68 때와 맞먹는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징이 이데올로기적 좌파가 아니라, 생계형좌파라는 것이죠.

우리나라 청년들도 이러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임금, 부채, 불안정노동과 주택 마련·양극화에 대한 불만과 제도권에 대한 불신을 한국 밀레니얼들이 해외 밀레니얼들과 그대로 공유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역사는 찬란했죠. 4.19부터 70,80년대를 거쳐 9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의 대학은 실로 사회 변혁의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어쩌면 70,80년대 상황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보기에는 민주화도 되었고 자유롭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은 상위 10%가 전체 부의 50%를 넘게 소유한 파렴치하고도 부도덕한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의 이력의 화려했던 한국의 대학가는 오히려 조용합니다. 전 세계 밀레니얼 청년들이 봉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당연히 레드컴플렉스 때문이다 라고 변명을 할 수 있겠으나 그건 너무 오래 우려먹는 핑계입니다. 지금 밀레니얼 청년들은 연애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시간과 여유도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알바를 해야 하는 까닭에 정치에 참여할 시간이 실질적으로 없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로 행동하지 않는 청년들을 탓하기에는 어딘가 좀 궁색합니다.

저는 여기에다 한 가지 더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국내 거의 대다수의 단체(그것이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간에)들이 갖는 조직 문화의 경직성과 보수성, 폐쇄성, 무감각한 젠더감수성이 더 이상 청년들로 하여금 어떤 희망과 의지를 가질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밀레니얼들은 수평적 평등적 관계를 지향하며 젠더감수성이 발달한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의 다수 진보 조직들조차(보수는 말할 필요도 없고) 여전히 8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위계질서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보스(들)를 정점으로 하는 서열의 논리로 조직이 돌아가고 그런 까닭에 성추행 등과 같은 일상적 인권 문제에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안희정, 이윤택의 예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청년들이 왜 행동 안하는가를 지적하기 이전에 한국의 모든 기관과 조직들은 인권과 젠더감수성에 대한 환골탈퇴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금의 세태에 대해 겉옷을 찢으면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 번지고 있는 Me Too 운동이 한국사회를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고, 이는 With You로 들불처럼 번져 삶의 정치, 삶의 윤리로 까지 나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03. 라합을 아시나요?


오늘 하늘 뜻 본문을 여호수아에 나오는 라합 이야기로 골랐습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Me Too 운동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Me Too와 With You 운동을 위한 신학적 상상력을 선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여러분, 라합을 아시나요? 마태복음 1장에 예수의 족보가 나오는데 거기에 5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한명이 라합입니다. 라합의 여호수아서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여리고의 창녀입니다. 모세가 죽고나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요단강 건너 가나안 진출을 도모하는데 가나안 입성의 첫 관문이 바로 여리고성입니다. 라합은 그 여리고성의 여관집주인이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주막집의 주모를 연상하면 될 것 같네요.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이 여리고성을 정탐하고 하필 숨어들어간 곳이 라합의 주막이었다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전조를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당시 전체적으로 가나안 땅은 중앙집권체제라기 보다는 성읍국가체제입니다. 지형적으로 가나안 지역은 북쪽 갈릴리 호수에 발원한 요단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사해까지 이릅니다. 거기만이 유일한 수원지입니다. 그로부터 멀수록 건조한 고원지대입니다. 그마저도 물에 염분이 포함되어 있어 농업용수로는 부적합니다. 이런 이유로 오아시스나 우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살았습니다. 그것이 성읍국가가 발달하게 된 원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 여리고는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큰 샘을 소유한 풍요로운 성읍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가나안은 또한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느슨하게 가나안을 관리하였습니다. 성읍국가 영주의 권력을 보장해 주는 대신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식민지 지역의 문화를 존중하는 다문화 포용정책을 펼치는 듯 하지만, 반란이나 조세의 원칙을 어겼을 경우 철저한 응징이 따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나안 민중들은 영주와 이집트 파라오에게 이중으로 약탈의 대상이었고, 라합은 그중에서도 최하층 계급의 여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여호수아 2장은 첩보영화의 대본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긴장과 서스팬스가 넘칩니다.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이 여리고 침공에 앞서서 여리고를 정탐하러 온 상황입니다. 가나안의 비밀경찰 조직이 라합의 집에 숨은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의 냄새를 맡고 라합의 집에 들이닥칩니다. 그러자 라합이 그 스파이들을 다락방에 숨기고 나서 태연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저에게 오기는 했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난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빨리 사람을 풀면 아마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여호수아 2;4-5) 아주 대담한 거짓말 입니다. 범인 은닉죄, 불고지죄, 허위진술까지. 여리고의 경찰과 사법부의 입장에서 볼때는 아주 중형에 처할 범죄입니다. 어쩌면 내란죄 죄목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이고 조국인데 무슨 이유로 이런 대담한 거짓말을 했을까요.

요령껏 왕의 병사를 따돌리고 지붕에 마련해둔 은신처로 올라가 정탐꾼들과 대화를 나누는 라합의 목소리는 아주 분명하고 단호합니다.“우리는 출애굽하면서 이적을 행하시고 당신들을 구한 야훼의 위대함을 안다..... 그러니 우리를 구해달라. 우리를 죽지 않도록 우리의 생명을 구해달라.”(2:9) 자기가 살고 있었던 공동체 여리고의 위기를 라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으면 내가 죽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라합을 계속 짓누르고 있던 때에 라합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의 운명을 의지하였던 것이죠. 그리고 나서 도망칠 방도들 정탐꾼들에게 일러줍니다.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은 라합의 성의에 감사의 말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약조를 합니다. “여기 홍색줄이 있으니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 당신이 우리를 달아 내렸던 그 창문에 이 홍색 줄을 매어 두시오. 그리고 당신의 식구들 모두 당신의 집에 모여있게 하시오. 그러면 살 것이다...”(2:18-20) 그리고 나서 등장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하늘 뜻 본문입니다. “그들이 나간 뒤에, 라합은 홍색 줄을 창에 매달았다.”입니다.


04. Me Too 운동, 그리고 반론들


라합이 주홍색 줄을 창에 매달았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다니엘 호돈의 <주홍글씨>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주인공(헤스터 프린)과 목사(딤즈테일)의 불륜을 다룬 소설이죠. 작년(2017년) 10월 한백 창립 30주년 기념 연극으로 올린 보스톤 마녀사냥을 주제로 했던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시련 Crucible>과 소설 <주홍글씨>는 엄격한 청교도 사회에서 성직자의 불륜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단 주홍글씨 A는 간음을 뜻하는 Adultery의 머리글자입니다. 당시 청교도의 가혹하고도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엄숙성, 광기를 나타내는 장치입니다. 주홍색 줄을 자기 창가에 내건 라합과 주홍글씨를 가슴에 단 헤스터 프린이 오버랩되면서 그들이 겪어야 했을 고초가 생각이 났습니다. 자칫 발각되면, 자기만 살겠다고 나라를 배신한 요부!, 라는 죄목으로 라합은 죽임을 당했겠죠. 그렇게 죽은 후에도 라합과 라합이 창에 단 주홍색 줄은 인구에 회자되면서 배신과 탐욕과 욕망과 저주의 아이콘으로 전승되었을 것 입니다.

내부에서 외부를 관조하면서 자기의 관점으로 대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 외부에서 안을 폭넓게 살피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속한 집단과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비판하고 잘못된 점을 발언하는 일은 어지간한 용기와 다짐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라합은 내부고발자이고 국가를 배신한 반역자입니다. 지금 Me Too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 역시 그들이 속한 공동체와 집단의 시각에서 볼 때는 내부고발자이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관습을 전복시키는 파국적이고 위험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된 Me too 운동이 안희정 수행비서인 김지은씨의 발언으로 지난 주에 정점을 찍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요? Me Too 운동을 둘러싼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진보분열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발언도 있었고, 근대적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의 인격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봉건시대 인권에 대한 접근이고 근대 이후 시민사회로 접어들어서는 인격 전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으로 인권을 대하는 태도가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성폭력을 저지른 인물은 전적 악마와 괴물 취급하면서 마녀사냥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좀 더 냉철한 접근 방법과 태도는 우리사회에서는 요원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엊그제 발생한 조민기씨의 자살소식은 이런 우려가 현실화된 경우라 개운치 않습니다.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이런 성폭력만을 소재로 한 선정적 이슈들이 페미니즘을 호도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페미니즘은 단순한 육체적 성과 억압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과 관습과 권력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이고 대안인데, SNS상에서 돌아다니는 Me Too 소식은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흐르고 있다. 자칫 이런 선정성이 페미니즘의 진면목을 가리고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으로 나가는데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은 항상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같이 정통 맑스주의 계열의 입김이 센 곳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시선이 우호적이지 만은 않습니다. 현재 진행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과도한 열풍이 중산층, 혹은 고학력 페미니스트들의 전유물 아닌가. 더 가난하고 약한 여성들, 페미니즘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여성들을 배제한 페미니즘 아닌가. 지금 Me Too 운동도 검사, 유력 대통령 후보의 비서 등 상층부 여성들의 입을 통해서만 들려지지 않느냐. 이것은 그동안 페미니즘 운동이 변혁의 기본인 계급성을 담보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반박합니다.

맑스주의는 계급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계급으로만 포획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여성문제, 소수자문제, 문화적 문제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정통 맑스주의 운동권에서는 비계급적 좌파라고 하지요. 범박하게 말하면 계급 좌파는 급진적인 노동운동가를 말하는 것이고, 비계급적 좌파들은 급진적 페미니스트, 퀴어운동가, 급진적 생태주의자, 급진적 문화운동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좌파의 외연이 넓어질수록 제대로 된 세상, 세련된 세상이 되리라 생각하는데...이 문제를 갖고 제 오래된 지인과 얼마 전 Me Too 운동을 놓고 이야기를 하다 설전을 벌인바 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단체에서 오래동안 일을 했던 그 친구는 저의 발언이 비계급적 좌파의 계급적 좌파에 대한 비난이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친구의 오해에 약간 빈정이 상해‘그런 굳어있고 화석화된 교조주의적 운동의 형태가 얼마나 혁명을 거칠고 무자비하게 만들었는가. 그래서 지금의 사태에 이른 것 아닌가,’라고 말을 해 버렸습니다. 그 다음 분위기는 여러분들이 알아서 짐작하십시오.

Me Too를 둘러싸고 현재 다양하게 전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보기에 따라서는 맞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Me too 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하고, 거리두기도 필요하고, 좀 더 냉철해 질 필요도 있겠죠. 이 모든 것들을 감안하고 종합하면서 좀 더 큰 틀에서 지금의 현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식자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합리적인 설명들을 들으면서도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고통의 문제는 몸이 기억하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면서 진정되지 않은 채 귀환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05. With You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라합이 주홍색 끈을 자기 창에 매단 후에 Jtbc 손석희 사장을 만나 지금의 심정을 말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국땅에 벌어지고 있는 Me too 운동의 증언자들과 라합 사이 놓여 있는 2500년 이상의 시간의 차를 뛰어넘어 이원으로 생중계를 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조민기, 이윤택, 조재현, 김기덕, 안희정 등을 고발했던 미투 동참자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지금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혹은 후배들을 위해 나섰다”고 하면서 어렵게 자신들이 당했던 일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속한 법조계, 극단, 학교, 교회, 정치적 동지를 배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자기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면서 까지 지금 이렇게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고발과 반역은 개인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고, 화제의 인물에 오르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굴욕적이고도 비참한 삶을 수백 수천년 동안 참고 견디면서 살아왔던 전체 여성들이 마지막으로 우리사회에 던지는 경고이자 절규의 메시지다’라는 생각이 저는 듭니다. 그래서 백만 스물 한번, 백만 스물 두번, 백만 스물 세번의 고통과 굴욕을 참아왔던 그녀들에게 백만 스물 네 번째 고통을 왜 못참느냐고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가자고 저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준 그분들을 지지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용기를 내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라합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고, 그 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 신이 우리가 겪고 있는 압제와 아픔과 절망을 끊어줄 것이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창에 주홍색 줄을 내린다!” 안희정 전지사의 성폭행을 고발했던 김지은씨는 인터뷰 말미에서“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게 방송이라고 생각”해 출연을 결심했고,“국민들이 저를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국민들이 저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라는 대목에서 울컥했습니다. 라합이 했던 “주께서 저를 지켜주십시오, 주께서 저를 지켜주실 것을 믿기에 저는 주홍색 줄을 창에 내걸겠습니다”라는 말과 겹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믿고, 우리를 믿고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국민이 답을 할 단계이죠. 그것이 With You 운동의 시작 아닐까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백 식구들 한분 한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06. 에필로그


한국 현대사에서 4.19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 세대가 나누어지듯, 80년 광주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듯, 97년 IMF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듯, 2014년 세월호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듯이, 역사는 분명 2018년 Me Too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눌 것 입니다. 저는 민주주의만 이룩하면, 경제정의만 이룩하면, 통일만 되면 세상이 바뀌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미완으로 남아있는 현재 진행형의 과제이지만, 그것들의 성취를 위해, 그런 대의를 위해 한국의 여성인권은 그동안 정상적인 가치를 누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억압되어 왔고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은폐되어 왔습니다. 남성과 더불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인권이 이정도인데, 성소수자들의 인권은 오죽하겠습니까. 어쩌면 Me Too 운동은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여성(타자)에 대한, 여성(타자)에 의한 자기 목소리가 날(生)로, 집단적으로 울려 퍼지는, 그리고 그 파급력에 있어서 최초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생활을 청산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척 중요한 신앙적, 역사적, 정신사적 전환의 사건이었습니다. 광야시대에서 가나안 시대로 넘어가는 연결지점에 여리고가 있었고, 여리고는 자신의 창에 홍색줄을 길게 내린 고난 받는 여성의 끝판왕 라합에 의해 무너집니다. 지금 이어지고 있는 Me Too 운동이 홍색띠로 길게 이어져 대한민국이라는 성에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이곳에 새로운 기운과 분위기가 조성될 것입니다. 그 싸움은 우리가 그동안 민주주의와 통일과 정의와 자유를 추구했던 가치와 투쟁과 노력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하고 급하고 간절하다는 사실을, 저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 웹진 <제3시대>



  1. 2018년 3월 11일 한백교회 ‘하늘 뜻 나누기’(설교) 원고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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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개신교에선 '미투' 운동이 이어지지 않는가[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미투’ 행렬이 사회 각 영역에서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대충 짐작했던 것들이지만 그 가해자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파렴치했다. 더욱 놀라운 건, 가해자인 저들 ‘소왕국의 군주’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그이가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였거나 무관심한 백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이가 ‘일그러진 영웅’에 다름 아니었음이 폭로되었다. 그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던, 있는 줄 알았던 날개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군주가 되어보지 못한 남자들, 내가 바로 그런 자의 하나인데, 그런 자들의 자숙의 시간이다. 새삼스레 뒤를 돌아보며 지난 시간들을 맹렬히 살핀다. 몇 개의 부역자 혹은 방관자 리스트가 머릿속에 작성되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다지 뼈저린 아픔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염된 손을 씻는, 일종의 자기방어의 기술에 가깝다. 그래도 ‘미투’를 외쳤던 이들의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절절한 용기 덕에 그나마 소박한 자숙이라도 했겠다. 그리고 사회는 그 소박한 자숙만큼의 각성할 기회를 얻는다.

   사람들과 미투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불쑥 말을 던졌다. “개신교에선 소식이 없나요?” 모두가 궁금했지만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던 것은 각자 그 대답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도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마음속으로는 누군가 말해주길 바랐겠다. 그런데 그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한 한 사람이 눈치 없이 말을 던진 것이다.  

   실은 개신교에선 훨씬 먼저 ‘미투’ 운동이 있었다. 2010년 봄, 에 한 여성 신도가 삼일교회 담임목사인 전병욱에게 성추행당한 것을 제보하면서 시작된 사건은 개신교발 ‘미투’ 운동의 시작이었다.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노회한 시인이나 연극연출가와는 달리, 전병욱은 비교적 신선한 이미지의 신세대 개신교 지도자로 각광받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이 사건의 충격파는 적어도 복음주의 계열의 개신교 안에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많은 제보자들이 ‘미투’ 대열에 참여했고 그들의 증언을 담은 책 <숨바꼭질>이 발간되었다. 또 수만 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졌고, 그의 저작들에 대한 불매운동도 벌어졌다. 그의 성범죄에 대한 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고 그의 목사직 면직 청원운동이 벌어졌으며, 그가 속한 노회와 교단총회에 면직 안건이 상정되었다. 또한 여러 기관들에서 이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목사의 성범죄에 대한 심포지엄들이 열렸고, 법원에 형사, 민사 책임을 묻는 소송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아니 아직도 제대로 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점점 유야무야되고 있다. 그가 속한 노회도, 총회도 그의 성범죄를 확인하였음에도 당사자의 사과와 책임에 대한 이렇다 할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물론 전병욱도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성범죄를 저지른 교회에서 권고사직 당한 지 1년 반 만에,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새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피해자들은 상처받은 마음을 사력을 다해 보듬으며 용기를 내서 고발하였지만, 노회도, 교단도 그이들을 감싸주는 것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전병욱을 지지하는 사람들 일부는 피해를 증언한 그이들을 ‘이단’이라고 매도했다. ‘하나님의 종을 유혹해서 넘어뜨리려 했던, 신도를 가장한 이단’이라고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목사 성범죄를 다루는 교회법을 어느 교단도 만들지 않았고, 피해자가 안심하고 상담하며 신고할 수 있는 기관도, 치유와 보상에 관한 교회법도 여전히 전무한 상태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피해자들은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증언을 강요받았다. 2010년에 시작된 개신교발 ‘미투’ 운동은 이렇게 상처만 남기고 아무런 개혁도 일으키지 못한 채 지나가고 있다. 그러니 검찰, 극단, 문단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미투’ 행렬이 개신교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은 그리 밝지 않다. 이런 곳에서 용기 있는 증언은 상처만 남길 테니.  

    하지만 개신교 내부에서 피해자를 대신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또 논점을 제기하는 방식도 더 깊어졌고, 문제인식 또한 더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직 교회권력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계획이 없는 것 같고, 특히 일부 극우파 개신교 지도자들은 더 위악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다. 해서 교회권력을 향한 비판은 피해자가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없게 된 불임의 종교를 향해 보다 근원적으로 문제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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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223211400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2. 23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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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여전히 먼 이유 하나[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700만 촛불시민이 제기한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사람이 먼저다”라고 답한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 첫해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사람을 한갓 도구’로 취급해왔던 것들에 대한 청산이 진행되었다. 물론, 정권을 잃었음에도, 사회 구석구석 굉장히 많은 곳에서 적폐세력들이 제도권력을 쥐고 있기에 빠른 개혁의 속도에도 여전히 전체 사회는 사람을 위해 작동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갈 길이 먼 것은 적폐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제도들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개혁 슬로건, 그것을 전유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변화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슬로건에 열렬히 환호했던 우리의 심상(心想)에 가장 먼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갑질하는 특권층’ 대 ‘을로 전락해버린 시민/우리’라는 권력의 작동 방식일 것이다. 그것을 청산하는 일, 바로 그것이 이 슬로건이 지향하는 개혁의 중심적 함의겠다. 하여 갑-을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권리의 주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하나가 모호하게 취급되어 있다. ‘을’ 안에서 다시 ‘갑과 을’이 나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자기 자신이 ‘을’이 되어버렸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기가 또 다른 누구에게 ‘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를 말하는 데 급급하다 비시민으로 추락한 이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 그리고 때로 무의식중에 자기 자신이 ‘갑질’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이라는 문제 설정은 바로 여기에서 요청된다. ‘인권’의 문제는 누군가가 ‘우리’와 동등한 권리의 주체임이 망각되는 순간 일어난다. 가령, 1980~1990년대 대표적인 민중가요이고 내가 속한 교회의 찬송가이기도 한 <그날이 오면>의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를 목청 높여 부를 때, 그 자리에 함께 노래했던 여성들을 ‘그날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누락시키고 있음을 남자인 내가 떠올리지 않는 그 순간, 인권유린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타자란 이렇게 종종 우리의 심상에서 누락되곤 한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릴 때 은연중에 사람에서 배제된 존재를 우리가 자각하지 않는 순간 개혁의 길은 그만큼 멀어져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종교성의 장소이자 글쟁이인 내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주된 서식처인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이 종교만큼 누군가를 타자로 만드는 일이 잦은 곳은 별로 없다. 그 안에는 적폐의 원흉이라고 할 만한, 증오의 전문가들도 숱하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개신교 신자들은 특별한 증오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개신교 담론의 장치들에 세뇌되어 무심코 혐오주의적 언행들을 반복한다. 문제는, 증오의 전문가들은 개신교 대중을 그렇게 편견과 배제의 수행자로 만들어내는 주역이지만, 동시에 개신교 대중의 무성찰적 태도가 그런 증오의 사도들이 탄생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동대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도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 학교는 교수 한 사람에게 해임을 통보했고 학생 몇을 징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된 징계 사유는 ‘학교의 정체성에 위배된 행위’ 때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성애 반대’라는 기조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학교는 동성애 혐오주의를 추구하니, 학교에 속한 이는 누구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해도 안 되고 그것에 대해 알려 해도 안 된다. 그것이 헌법 11조, ‘누구든 성별이나 종교, 신분 등이 이유가 되는 어떠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에 위배되더라도, 이 학교의 구성원은 모두가 혐오를 정체성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수나 학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리야 없겠지만, 이 경우 그런 혐의로 혐오주의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은 학교의 이런 반헌법적인 문제적 ‘정체성’, 그런 원리주의적 권력의 폭력을 지지한다. 물론, 말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혐오주의적 집단폭력을 초래할 것이라고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혐오주의적 권력은 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제도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 한다. 하여 제도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도의 부속품이 되게 하려 한다. 그사이 ‘사람이 먼저인’ 개혁은, 그 길은 그만큼 더 멀어져버리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192040015&code=990100#csidx0d097d5f31be59da5bbe287ddf67a0a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1. 19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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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돌아갈 “처음”은 어디인가?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1. 다시 시작하는 꿈


    내가 속한 성공회의 교회 달력의 구성은 매우 예스럽다. 12월 25일 성탄절, 1월 1일 예수가 예수할례 받고 이름을 얻은 날, 1월 6일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난 공현절이다. 세상 달력으로도 1월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꿈을 꾸게 되지만, 교회의 전례 달력도 세상이 예수와 만났던 처음 순간의 기억 속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고 싶어 한다.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첫만남을 회복했던 순간, 말 그대로 비긴 어게인(begin again) 했던 순간을 계속 보여주면서, 우리를 그 첫사랑의 기억 속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로부터 취업을 결심하는 청년들까지 이 때는 모두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는 비긴 어게인의 결심을 해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의 서화 "처음처럼"을 새삼 떠 올리며 새해 인사를 전하고 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하지만 다시 처음 순간에 선다는 것, 비긴 어게인 한다는 것,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처음을 기억조차 하기 힘든, 너무 먼 곳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처음을 잊어버린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그 처음으로 되돌아 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매년 성탄절이 오고 새해가 되면 습관처럼 다시 시작할 각오를 하지만, 비긴 어게인하기 위해 되돌아갈 출발점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이미 처음을 버리고 멀리 떠나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욕심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매년 새롭게 하면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돌아갈 첫 순간은 어디인가?


2. "처음"은 어디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우연한 순간에 신비롭고도 뜨거운 만남을 경험하는 그 첫 남은 어떤 것일까? 처음으로 하늘을 향해 서툰 날갯짓을 시작하는 어린 새의 하늘과의 첫 만남,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른 새싹의 첫 만남은 또 어떤 것일까? 하늘과 땅이 처음 만나는 그 창조의 순간, 그리고 다시 만나는 그리스도 탄생의 거룩한 순간은 어떤 처음인가? 갈릴리 나자렛 사람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처음 만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그 순간은 어떤 순간일까? 우리는 어떻게 그 뜨거운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물신이 지배하는 세계, 편견과 적대가 지배하는 이 세계를 살면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첫 순간의 기억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태초 곧 창조의 순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거리와 간격을 만든 순간이라 하였다. 레비나스와 함께 알랭 바디우 역시 사랑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다른 특질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차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경험하는 것이라 하였고, 그래서 사랑은 환원 불가능한 타자의 경험 혹은 타자성의 경험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처음부터 사랑의 바탕에 있는 것은 차이에 기초한 탈중심적인 세계와 삶을 구축하는 경험이라고 보았다 (조재룡 역, 『사랑예찬』, 길, 2010). 어쩌면 우리가 시작했던 그 처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의 첫 만남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너나 너가 예상할 수 있는 나의 발견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만들어 온 세계에 대한 확신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고, 내가 앞으로 만들어 갈 세계의 가장 탁월한 조력자를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사랑의 첫 만남은 내게는 없는 당신의 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고, 나의 모자란 반쪽을 정확히 알게 되는 그런 순간도 아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서로 모자란 반쪽을 채워 완전한 하나가 되어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또한 사랑의 첫 만남은, 나와 너 밖에서, 나와 너를 완전히 잊어 버린 채 몰입할 수 있는 어떤 신념이나 신앙을 발견하는 일도 아니다. 둘의 영원한 차이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계와 삶의 경험 그것이 바로 태초 혹은 처음의 진실이다.


마틴 부버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창조는 하느님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피조물들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순간이 아니다. 하느님이 피조 세계와 거리두기를 한 순간이고, 스스로 피조 세계와 피조물들인 우리를 모른다고 한 순간이다. 서로 모르는 상태로 만나기를 의도적으로 하신 사건이 바로 처음 순간이고, 창조의 순간이다.


처음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에게 하늘은 이미 알고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무한 가능성의 신비 속에 있다. 그래서 처음은 서로 다름과 서로의 모름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신비와 창조력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서로 다르고 모르는 것이 만들어 내는 전혀 새로운 발견들 앞에서 전율하는 경험이다.


3. '차이'와 '모름'의 회복을 향하여


첫 사랑의 순간이 까마득한 태고의 전설이 되어 버린 사람들, 이미 서로를 다 알아 버린 사람들, 그래서 더 이상 모를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처럼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들을 그 근본에서 의심하고 전복하는 일이다. 첫 사랑의 기억을 잊어 버린 우리는, 아니 첫 사랑의 뜨거움을 견디기 힘들게 된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수 많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쌓아 올린 나의 눈으로 남편이나 아내를 그리고 친구와 이웃을 재단하고 정의한다. 그러다가 자식을 낳거나, 직업을 갖거나, 어떤 신념이나 종교를 신봉하게 되면, 사랑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 일을 위한 동업자적 관계를 만들어 산다. 그리고는 그 동업자적 관계를 잘 만들어 가는 것이 곧 사랑이라 착각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처음을 잊어 버린 우리는 나와 당신이 둘이라는 사실, 나와 너가 서로 모른다는 사실, 나와 너가 어떤 인연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차이를 유지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나와 너가 둘이라는 사실,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 들 사이의 결코 동일화할 수 없는 차이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모르는 사람으로 재 발견하는 일 그것이 비긴 어게인의 출발점이다.


시몬 베유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느님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내 사랑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 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분명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할 때, 내가 그 말을 하면서 그리고 있는 하느님에 관한 어떤 것도 하느님과 닮지 안았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이 없다고 확신합니다.”(Waiting for God , New York: Harper & Row, 1973, p. 32.)


시몬 베유의 하느님은 있는 하느님이면서 없는 하느님이요, 아는 하느님이면서도 모르는 하느님이다. 나의 편견과 선입견에 결코 갇힐 수 없는 분이며, 그렇다고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주는 제삼의 원리나 존재를 허락하는 분도 아니다. 공통분모를 만들고, 동업자적 계약관계를 만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분이다. 아마도 이런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곧 언제나 처음처럼 살아가는 신앙의 삶일 것이다.


진정으로 다시 시작하려면, 시몬 베유가 하느님을 향해서 고백했던 그 표현을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에 서로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아는 그대에 관한 어떤 설명이나 정의도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대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처음으로 되 돌아갈 수 있고, 영화 제목처럼 비긴 어게인 할 수 있고, 둘의 모름과 차이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세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4. 다시 시작하는 평화의 길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보려는 이 꿈이 우리들의 가까운 인간 관계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는 분단의 땅 한 반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치적 꿈이 되기를 또한 바란다. 사랑과 정치가 다르다 해도, 둘 다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을 위한 모험이며, 사람들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적 관계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보는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분단체계는 엄밀히 말하면 이념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류 보편의 어떤 가치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편견관 증오심에 기초한 정체성의 정치다. 서로를 배척하는 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질서다. 오직 흡수와 통일만 있을 뿐, 서로의 차이는 물론이요, 서로의 모름도 인정하지 않는 체계다. 분단체계 극복을 위한 근본과제는 바로 이 폭력적인 정체성의 정치와 그것이 만들어낸 관계들을 극복하는 일이다. 이미 처음의 기억은 거의 없다. 유전자처럼 우리의 체내에 뿌리 내린 분단체계는 편견과 독선만을 허락할 뿐, 차이와 모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하고 다시 시작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독선과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서로의 차이와 모름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재를 통해서만 대화가 가능한 상태에서, 서로의 차이와 모름에 기초한 정말로 창조적인 남북 대화를 향해 먼 길을 가야한다. 참으로 위태로운 줄다리기 끝에 대화의 숨구멍이 열렸다. 이 대화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세계와 삶을 시작하는 새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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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세습과 한국 사회의 적폐[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명성교회의 담임목사 부자세습 사태를 주류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함으로써 개신교계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교회세습의 문제는 이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로써 개신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따가운 시선은 더욱 냉담해졌다. 게다가 이것이 최근 부각된 특채비리 문제와 연결되어 이해됨으로써 ‘청산되어야 할 적폐세력’이라는 개신교회의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문제를 가장 열렬히 제기해온 개신교계 시민단체인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는 교회나 교회와 재산권이 연결된 연관단체를 아들이나 사위에게 세습하는 것을 ‘교회세습’이라는 용어로 규정하였다. 이런 관점은 명성교회 사태를 보는 개신교계 안팎의 시각이기도 하다.

   한데 명성교회 사태를 둘러싼 교회세습에 대한 논의들에는 서로 섞이기도 하지만 결코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두 가지 시선이 뒤얽혀 있는 것 같다. 낡은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보는 시각과 최근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현상으로 나타난 특권의 혈통주의적 대물림으로 보는 시각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낡은 권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영역인 국가, 기업 그리고 개신교회에는 박정희, 정주영, 조용기로 대표되는 카리스마적 영웅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장을 위한 총동원 체계를 주도한 이들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카리스마적 리더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자원을 자녀에게 세습하려 하였는데, 민주화의 물결은 이러한 자녀에게 대물림되는 권력세습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수반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작동하는 영역에선 끊임없이 낡은 권위주의적 세습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신자유주의 시대는 민주화와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는데, 이 시대는 카리스마적 리더의 도덕적 위상의 격하 현상을 동반했다. 카리스마가 사라진 무수한 삶의 현장에서는 시민사회적 제도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 장(fields)에서 사람들은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연줄맺기다. 한데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연줄은 직계로 축소된 혈통주의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로운 혈통주의가 횡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원의 혈통주의적 대물림을 위한 경쟁에서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특권적 행위자들이 제도를 활용하는 능력을 더 많이 발휘했다. 그래서 특권의 혈통주의적 대물림 현상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삼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가 조사한 교회세습의 사례는 2017년 11월10일 현재 143건이다. 이는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전국 교회 숫자로 계산하면 0.2%에 불과하다. 물론 이 조사들에 포착되지 않는 세습교회나 교회 총수는 더 많겠지만 그 비율은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교회세습은 담임목사의 권력이 압도적인 교회들에서나 가능했다. 요컨대 교회세습이라는 개념은 위의 두 가지 시선 중 첫 번째와 깊이 관련된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담임목사의 위상이 점점 격하되는 추세다. 해서 목사의 압도적인 권력을 전제로 하는 교회세습 현상은 향후 점점 줄어들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이 너무나 퇴행적이고 추잡해 보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화의 문제를 포착하는 데는 충분치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교회세습’이라는 용어보다 ‘교회의 권력세습’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교회세습은 세습의 행위자를 담임목사에 국한시킨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압도적인 권력을 장악한 일부 목사들에 한정된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목사든 특권적 신자든, 소수의 권력집단이 담임목사의 청빙을 결정한다. 이때 교회 대중은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 경우 신임 담임목사는 이들 특권집단에 의존하는 목회사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즉 교회는 특권집단의 권력을 재생산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장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 있던 명성교회의 담임목사는 권력을 아들에게 대물림하기 전, 일반재정과 구별되는 800억원의 비자금을 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도 소수의 특권적 엘리트들은 사회 각 영역에서 작동되는 무수한, 불공정한 사적 네트워크를 교회를 매개로 하여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목사는 그러한 부조리한 연줄주의의 주요 행위자들의 ‘영적 세탁’을 담당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요컨대 교회의 권력세습 문제는 오늘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적폐의 핵심에 맞닿아 있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124211500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사유와 성찰' 란에 동일한 제목으로 11. 24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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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몸짓 '변방의 교회들'[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2015년 인구센서스의 종교인구 조사결과는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신교 인구가 감소한 2005년 인구센서스의 결과가 이번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무려 123만명 정도나 증가했고, 최대 종교였던 불교를 처음 앞질렀다. 

   문제는 사회적 신뢰도에선 개신교가 다른 두 종교보다 크게 밑돌았다는 데 있다. 불교와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각각 3배와 4배나 더 신뢰받는 종교였다. 그리고 이 수치는 2005년과 2015년에 별반 차이가 없다. 한데 시민사회가 불신하는 종교임에도 2015년에는 신자수가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이 이상한 현상의 비밀이 개신교의 적극적인 ‘신자마케팅’에 있다고 보았다. 2000년대 이후 개신교는 일종의 대상에 대한 ‘맞춤형 프로그램들’을 적극 개발했다. 연령별, 직업별 프로그램들뿐 아니라 비혼자, 1인 가족, 입시재수생 등 집단특성을 고려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2005년 무렵처럼 과거청산의 기조가 강한 시대에는 그다지 효력이 높지 않았던 반면, 사람들이 저마다 존재의 위기에 휩싸여 있던 2015년 무렵에는 그것들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활용한 주체는 단연 강남, 강동, 분당 등 중·상위계층이 많은 지역에서 급부상한 신흥 대형교회들이다. 이들 교회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으면서 빠른 성장을 이룩했다. 반면 새로운 신자마케팅 방법들을 활용할 만한 자원이 부족했던 대부분의 중·소형 교회들은 지속적인 역성장의 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여 2000년대 이후 개신교회의 양극화는 한결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중·소형 교회뿐 아니라 대형교회에 대해서도 시민사회는 사라져야 할 적폐에 다름 아니라는 따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신뢰도 조사들에 따르면 이런 비판적 인식은 개신교의 자폐적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세금 내지 않는 목사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탈법과 편법을 마구 써대는 교회들, 편견과 배제를 부추기는 개신교도들의 언행들 등등이 그렇다. 한마디로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서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일삼는 무례한 종교라는 시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교회들의 교세가 빠르게 팽창했다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성공’일 뿐이다.

    한편 가장 위기를 적나라하게 체감하는 교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소형교회’들이다. 그들 중 많은 교회들은 예배당을 유지하기도 벅차다. 어느 곳이든 예배당다운 공간으로 치장하기도 쉽지 않다. 어떤 교회는 다른 이들과 공간을 ‘셰어’해야 하고, 또 다른 교회는 이중 기능의 공간(가령 교회이면서 어린이 공부방)으로 활용해야 한다. 목사가 스스로를 성스럽게 치장하기엔 교인들과 너무 밀착되어 있다. 심지어 교회당 문을 열면 바로 시장통이고 위층엔 술집이 있고 옆집엔 식당이 있다. 종교적 성스러움을 과시할 만큼의 이웃과의 거리가 해체되어 버렸다.   

   이런 교회당과 목사의 현실에 부합하는 교회 전통이나 신학은 전무하다. ‘거리두기’를 기반으로 하면서 발전했던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해석들은 소형교회들의 현실과는 너무나 멀리 있다. 하여 오늘 소형교회들은 ‘변방으로 떠밀린 유민들’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변방의 교회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현실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목사와 신자의 거리두기가 해체된 교회는 수평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예배 형식과 내용을 발전시켰다. 또 예배당을 종교적으로 변별된 공간이 아니라 삶과 뒤섞인 공간으로 채워갔다. 나아가 이웃들과 간격 없이 직면한 교회는 이웃과 ‘밥’을 나누고 ‘가치’를 나누는 생활의 동료로서 살아가려 한다.

   그런 교회들이 자신의 명칭을 ‘작은 교회’라고 불렀다. 이들 ‘작은 교회’는 자폐적 성공을 추구하고 큰 교회가 되려 하기보다는 작음 자체를 향유하고 이웃과 공공적 가치와 삶을 나누는 운동을 벌인다. 그런 신앙운동을 각각의 지역에서 벌이는 교회들이 매년 모여 박람회를 열었다. 5회째 되는 올해엔 그런 경험들을 전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 나누고자 대회 명칭을 ‘작은 교회 한마당’이라고 바꾸었다. 여기엔 신학대학이나 교단 기구들로부터 어떠한 서포팅을 받지 못한 ‘작은 교회’들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재야단체들도 참여한다. 그리고 올해엔 작은 교회를 주제로 하는 신학자들의 책이 발간되었다.

   성장이 아닌, 이웃과 가치 있는 삶을 나누고자 하는 작은 교회들의 소박한 움직임이 이렇게 변방의 교회들로부터 꿈틀거리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개혁의 진정한 몸짓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10272102035 이 글은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17. 10. 27일자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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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총회정치의 민낯[각주:1]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9월 하반기엔 개신교 각 교단의 정기총회가 열린다. 최상층부의 교회정치가 불꽃을 일으키는 계절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누가 총회 대의원으로 선정될지를 둘러싼 경합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총회장 등 교단을 대표하는 임원과 각 기관장 등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거의 전쟁에 가깝다. 총회 기간이 임박해지면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금품이 살포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다. 또 계파 간의 정쟁과 합종연횡이 펼쳐진다. 한편 교단 산하 지역별 교회회의체(노회·지방·교구 등)나 사안별 기구들(위원회)에서 안건을 총회에 상정시키고, 그것에 대한 심의와 결의를 둘러싼 안건정치가 치열하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예·결산 정치다. 물론 여기서도 공방의 강도는 상상 그 이상이다. 

   이번 각 교단의 총회들에선 교단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시민사회에 비칠까? 거의 20년 동안 사회적 신뢰도가 한국의 3대 종교 가운데 꼴찌를 면치 못해왔고 특히 온라인과 오프라인 영역에서 여론주도층의 불신이 점점 커져 급기야는 파국적 상황이 머지않았다는 재앙담론이 유포되고 있는 상황에서 심각한 불신의 벽을 넘을 작은 가능성이라도 제시할 수 있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라고 하면서, ‘개혁’이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있다시피 한 올해 개신교 교단들은 과연 시민사회의 불신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만한 쓸모 있는 개혁의 깃발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예상한 대로 이번 총회들에서 주목할 만한 논점은 동성애 문제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파의 하나인 예장통합은 가장 강력한 반동성애 조치들을 결의했다. 동성애자나 동성애를 지지하는 이는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 그리고 대학 등 산하기관의 직원이 될 수 없으며, 신학대학 입학까지 금지하기로 했다.

   예장합신도 그 못지않은 강경안을 결의했는데, 동성애자는 물론이고 동성애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포함한 일체의 옹호행위를 한 이들을 면직과 출교시킨다는 것이다. 한편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에서도 또다시 ‘동성애연구위원회’ 설립 안이 부결되었다. 연구해 보자는 안건조차 거절된 것이다. 이 주제를 둘러싼 공적 토론조차 일절 안된다는 얘기다. 그나마 이런 안건은 다른 교단들에선 상정조차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다.  

   최근 대법원장 후보자의 국회 인준 정국에서 드러난 것처럼 동성애자 문제는 보수주의 정치세력들에는 더 이상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양상이다. 그것은 산산이 부서져 있는 보수대연합을 극우주의 기조로 재구축하는 핵심 어젠다로 부상했다. 온건보수세력의 보수대연합 어젠다가 거의 무력한 상황에서, 극우주의적 어젠다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물으면 동성애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인권적 가치에 따라 관용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될 때는 극우주의적 혐오주의에 견인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막강한 자원을 소유한 개신교 목사들의 주류세력들이 동성애 혐오동맹으로 광범위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극적 관용조차 말할 수 없고 그것을 둘러싼 토론조차 불허되는, 거의 맹신적 합의가 그들을 일사불란하게 엮어내고 있고, 이것이 보수주의적 정치권의 행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개신교계 일각에서 회자되는 음모론적 얘기가 있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국정원 관련 인사들이 교단정치에 관여하여 요직을 차지했는데, 그들이 바로 최근 동성애 이단론의 진원지라는 것이다.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는 국정원의 행보들을 보면 이런 음모론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든다. 

    아무튼 국정원이 개입했든 아니든 개신교 주류권 목사들의 동성애혐오론, 토론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저 맹신적 확신에 대해 시민사회는 어떻게 볼 것인가? 보수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던 2014년에도, 동성애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보는 이들과 아니라고 보는 이들의 비율은 47.1% 대 23.1%였다. 심지어는 개신교 신자의 경우도 39.9% 대 29.6%로 크게 차이가 났다. 그런데 주류 개신교 목사들은 압도적으로 동성애혐오주의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의 생각을 담지 못하는 소수 의견이 개신교를 과잉대표하면서 극우적 보수대연합의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미움과 공포를 퍼뜨리는 목사들, 다수의 반대 생각조차 경청하지 않으려 하는 목사들, 공존과 상호존중의 미덕을 포기하고 적대를 퍼뜨리는 그들이 과잉대표하는 교단의 총회, 그것을 시민사회, 아니 합리적 개신교 신자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총회정치로 대변되는 개신교의 재앙은 이미 도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222049015&code=990100 이 글은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17. 9. 22일자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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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호
    2017.09.28 03:0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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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에 대한 반대 논쟁이 지금, 이 상황(진보적-비수구적- 가치관이 활개하며, 그 대표격인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70%를 오가는 사점)에서 퍼져 나가는 이유를 정치적 극우주의자들의 설자리를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상호 결탁 하에 마련하기 때문이다"라고 읽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보수주의는 언감생심 기독교 근본주의자 축에도 낄 수 없는 21세기 한국 기독교 이단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믿으며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고 하지만 그 끝이 다른 이단. 그 끝에는 자신의 천박한 정치적 입장이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조선족 왜곡하는 영화들[각주:1]


조영관

(이주민센터 친구 상근변호사)

 



    김주환 감독의 영화 <청년경찰>은 외출 중 우연히 범죄를 목격한 두 명의 젊은 경찰대생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그린 영화다. 최근 <택시운전사>의 스크린 독주 속에서도 누적관람객 300만명을 넘기는 알토란 같은 흥행을 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이번 영화 <청년경찰>은 지금까지 제작된 한국 영화 중에서도 ‘조선족’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악의적인 혐오가 가장 짙게 그려진 영화다. 영화의 대부분은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일터이자, 수만명의 거주민이 생활하고 있는 대림동은 아무런 개연성 없이 범죄의 소굴로 묘사된다. ‘여권 없는 중국인이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는 곳’이라거나, ‘경찰도 손을 못 대는 곳’이라는 대사가 이어진다.

   여성을 납치하여 불법적으로 난자를 채취하는 인신매매 범죄조직원의 대부분은 어눌한 ‘옌볜 사투리’를 구사하는 조선족이다. 선과 악, 젊고 정의로운 영웅과 무자비한 악당의 대결에서 조선족 동포는 늘 악역으로 소비되고 있다.

   한국 영화에서 최근 10년 사이 ‘조선족’을 폭력적인 범죄 집단으로 손쉽게 소비하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는 점도 우려스러운 점이다. 영화 <황해>(2010)에서 조선족은 돈을 위해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폭력적 존재로, 산발한 머리에 짐승뼈다귀를 메고 다니는 모습으로 소개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신세계>(2013)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로, <차이나타운>(2014)에서는 채무자들로부터 신체포기각서를 받고 장기매매를 하는 폭력조직으로 그려졌다. 최근에는 스크린을 넘어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늘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폭압을 피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이주했던 역사를 가진 동포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오로지 폭력조직과 범죄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제 조선족의 범죄율이나 폭력범죄 발생률이 내국인에 비하여 높은 수준일까? 객관적인 연구자료를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로 조사된다. 형사정책연구원에서 최근 발행한 <외국인 폭력범죄에 관한 연구(2017)>에 따르면 체류 외국인의 범죄율은 내국인의 절반수준에 불과했다. 외국인 범죄자가 가장 많이 증가했던 2011년에도 내국인의 범죄율이 외국인에 비해 2.5배 이상 높았다.

    문화적인 이유로 조선족이 칼이나 무기를 소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있는데, 조사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본국에서는 치안의 부재와 방어 목적으로 무기를 소지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치안이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총·칼과 같은 무기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응답이 많았다. 법제도와 공권력의 신뢰도에 대한 인식조사에서도 조선족의 경우에 ‘한국의 폭력 관련 법지식’이 오히려 내국인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물론 과거 조선족의 잔인한 강력범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의 흉악 범죄가 조선족 전체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외국인의 범죄가 내국인에 비해 사회적으로 더 주목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질적인 타자로 인식되고, 개별 피해자를 넘어 우리 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인의 경우 낮은 범죄율을 보이면서도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조선족을 범죄자로 묘사하는 영화적 소비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을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은 부당한 차별을 만들고 사회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혐오범죄 등 또 다른 사회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근거 없는 혐오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편견을 지우고 바라보는 대림동 거리는 어느 곳보다 평화롭고 활기차다.


ⓒ 웹진 <제3시대>



  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08201342011 이 글은 경향신문 칼럼 2017. 8. 20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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