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기 민주정부'가 성공한다면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 때 딴지일보와 한겨레의 합작으로 김어준이 정당별로 비례대표 후보 1인씩을 골라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인터뷰 주자는 단병호 전노협 초대 위원장. 그 인터뷰 에서 김어준이 물었던 질문 중 하나는 발모제를 바를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고, 단 위원장의 대답은 발모제를 바른다면 자신은 아마도 더 이상 단병호가 아니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김어준이 남긴 코멘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전봉준'이다. '동학'은 그의 '계급'이고, '백성'은 그의 '노동자'며, '구세제민'은 그의 '노동해방'이다. 그를 깨운 건 인간에 대한 연민. 무인정권의 탄압과 자본의 착취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 그 세력을 전국으로 규합하고 관에 맞선 '적두장군 단봉준'. 누군들 거저 사는 사람 있겠냐만 제 살을 깎아 남의 몫까지 대납하는 그 정도 삶 앞에선 주댕이 살짝 닥쳐 주는 게 예다.”

   이렇게 써 놓고, 그는 코멘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지난 17년간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노동계 야전사령관의 강철 화이바, 빨간 머리띠가 풀리는 날, 축배 대신 발모제를 도포해 주리라. 내 몫의 부채는 그렇게 변제하련다. 꾸벅.”

   이 인터뷰가 나간 후, 감동먹었다는 댓글이 대부분인 가운데, 이런 댓글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존경한다니까 권영길(필자주-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3.9%를 얻었고 이 당시는 창당 당시부터 민주노동당 대표로 재임 중이었음)이 다시 보이는군요.”


   2. 

   엄기호의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한 구절이 나온다.

   “왜 우리는 노무현을 미워할 수 없었던가. 그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분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었다. 분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전교조 교사가 자기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공교육이 싫어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 학부모가 방학이면 아이를 불러 선행학습과 과외를 시킨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 카페를 차리고 공동체 운동을 하는 후배는 주식 투자로 생계를 이어간다. 양심적으로 살아가며 많은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친구는 들어가 살 만 하면서 투자 가치가 있는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 살기 위해서는 삶이 분열되어야 한다. 이 분열의 빈틈에 적당한 합리화와 죄의식이 뒤죽박죽 엉킨 채 우리는 살아간다.

   노무현은 권력의 정점에서 이러한 분열적인 삶을 보여 주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던 날 노무현은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지금 국민들이 저를 보고 계십니까?"하고 읆조렸다고 한다. 그는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영혼과 그의 통치가 분열되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집권 내내 항상 자신의 영혼은 통치자의 자리가 아니라 '당신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이것이 집권 중에는 그를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막상 그가 가고 나자 우리는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우리 모두의 초라하고 팍팍한 삶을 그를 통해서 만났다.”

   앞의 두 텍스트가 보여주는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을 수도 있다. 이 텍스트들이 대상이 되는 두 사람과 각각에 얽힌 일들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이 텍스트들의 밑에 깔린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등등.

   그렇지만 어떤 판단을 내리든지 간에, 이 텍스트들에서 이러한 느낌은 충분히 추출해 낼 수 있을 듯 하다. 단병호는 ‘존경’의 대상은 되어도 ‘동일시’의 대상은 될 수 없지만, 노무현은 ‘동일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실제로 그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그리고 그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을 자임하는 이들의 삶과 관련이 크다고 말이다. 여기에, 설령 ‘존경’은 하더라도, 아니 어쩌면 ‘존경’을 하기에, ‘발모제’같은 ‘세련’을 덧붙이고자 한다는 것까지도 짚을 만 하겠다.



   3. 

   대선 기간 막바지에 문재인 후보의 인권변호사 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미담’들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이런 트윗이 나왔다.

   “경고한다. 정의당&노동당은 문재인 대통령님 앞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논하지 말라. 니네들 입으로 싸울 때 우리 문재인 대통령님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오신 분이시다.” 물론 이건 ‘극단적’인 케이스이다. 그러나, ‘극단적’이긴 해도, 분명한 것이 이 케이스가 ‘극소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니, 설령 ‘극소수’였다고 하더라도, ‘극단’이 이렇게 나온다면, ‘주류’도 저런 식으로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속칭 ‘깜’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지 마라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문재인’과 같은 (유능한) ‘인권변호사’, 즉 지원자의 자리가, 당사자를 대변하려 하는(그렇지만 힘이 약한) ‘정의당/노동당’보다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공유할 것이라 보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닐 성 싶다. 물론 저런 언설과 이런 생각에서 노동자들의 자리는 ‘노동 문제’라는, ‘객체’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고.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비단 41%에 달하는 그의 대선 때 지지자들만은 아닌 듯한 요즘인데, 그렇다면 그 때 ‘성공’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지원자’의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국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권익을 향상시키고 제도를 개선하고 싶을 것이다. 그 권익 향상과 제도 개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 상황이나 외교 관계의 호전 등도 물론이고. 그런 결과를 통해서 지지를 유지하고 재집권을 이루어낼 때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까. 조금 덧붙인다면, 이런 일들은 아마도 ‘그의 친구’가 15년 전에 집권했을 때도 하고 싶었을 터일 테고.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은 ‘그의 친구’의 완벽한 복권일 것이란 기대도 있을 것이다. 그의 추모식에서 그를 ‘앞서서 간 임’으로 모시며 ‘산 자여 따르라’고 노래 불러도 정당할 그런 완벽한 복권. 그렇다면, 그런 ‘성공’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게 되는 것일까.


4. 

   한국 사회 비정규노동 영역의 대표적 이슈 중 하나인 KTX 해고승무원 문제에 대해서 의외로 이런 반응들이 꽤 있다. 정규직 자리를 공정한 경쟁으로 따내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후 정규직으로 만들어 달라고 우기는 ‘샛길’을 뚫어서 차지하려는 욕심이라는 것.

   문재인 대통령의 첫 번째 행보로 주목받았던 것이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였다. 그리고 일부 대기업들이 이에 호응해서 정규직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정규직화’는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면,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문재인 정부 재임 내내 이어질 것 같고.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의 정규직’도, 적어도 고용불안이라는 중요한 문제 한 가지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성과와 진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정규직’과 ‘무기계약직’과 ‘자회사의 정규직’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어떤 것일까.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화가 본격화되면 어쩌면 이 ‘구분 기준’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일도 본격화될 터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차별 철폐가 아니라 차별의 합리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여기에서 바로 앞에 언급했던 KTX 해고승무원 관련 상황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사정은 딱하더라도, ‘공정한 경쟁에 따른 결과’라는, ‘합리적 차별’의 선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사실 KTX 해고승무원 케이스에 드러난 저런 시선은 저 사건이 처음 벌어진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미 한국사회에 일반화된 시선이기도 하다. 당장 얼마 전의 ‘교육공무직법’ 관련 사태가 딱 이런 경우이기도 했다. 능력이 있어서 공무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 대한 불공정이라는 시선이 꽤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선을 보여 준 사람들의 상당수가 아마 대통령 선거 때 문재인에게 투표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그의 지지자들. 특히나 그 정부에 강한 동일시를 보이는 그 지지자들이 꿈꾸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공정한 대접’을 받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것.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레토릭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 혹은 갖추기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기도 하겠고 말이다.


5.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회적 연대’라는 차원에서는 오히려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이 노무현 정부 시절보다는 더 나았던 것 같다. 같은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갔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의 김주익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 죽어서 내려오고, 이명박 정부 시절의 김진숙은 ‘희망버스’와 함께 살아서 내려왔음을 생각한다면. 문재인 정부가 만들려는 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합리적인 차별’이고, 그것에 ‘능력’을 갖거나 선망하는 ‘보통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사회적 연대’에서는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보다는 같은 ‘민주정부’라는 노무현 정부 시절과 가깝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기우일 뿐일까. 대통령 선거 당시, 그 때는 후보였던 지금 대통령 본인의 문제발언도 있었고, 지금 당장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군인들이 색출되어 처벌을 받으면서도,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의 비난이 오히려 벌어지는 성소수자 관련 이슈의 상황은, 아마도 그것이 ‘기우’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실마리일 듯 하다.

   확실한 것은,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 하에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잘못할 때’의 ‘비판’이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적어도 그 때 ‘비판’에 깔린 뉘앙스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비판’한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오히려 필요한 마인드는, 문재인 정부가 ‘성공’할 때, 그 ‘성공’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합리적인 차별’과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접’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바램이 실현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라면, 그 바램을 제대로 비판해 내지 못하면 사회적 연대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보통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도 할 터이니까.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나라다운 나라,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정치를 위해서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뉴스 보는 재미가 있다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비서진들과 커피를 들고 산책하거나 청와대 직원들과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유쾌한 김정숙 여사가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새롭지 않은 평범한 것들인데 가슴이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숨진 단원고 기간제 교사 김초원 선생과 이지원 선생의 순직을 인정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발표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두 분의 순직을 인정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다하려 한다"는 말에, 지난 10년 아니 지난 반세기 이상 짓밟히고 억눌려 온 사람의 마음 그 당연한 상식과 도리가 마침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처럼 감격하는 사람들의 마음, 기대와 희망에 부푼 심정들이 다시 절망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또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 답답함을 견뎌야 할지라도, 바른 길로 꾸준히 걸어 갈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아직은 허니문 기간이라, 기득권의 저항이 수면아래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조급하고 노골적입니다.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고 이틀도 지나지 않아 사면 이야기를 꺼내 들었던 보수 언론의 뻔뻔함은 이번에도 단 일주일도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재수사, 국정농단 사건과 정윤회 사건에 대한 재수사까지는 그래도 말을 아끼지만, 역사교과서 폐지나 싸드 배치에 대한 재검토 정도에 오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옵니다.


    적폐 청산은 좌파 운동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배타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고, 우파를 괴멸시키기 위한 전략이라 할 것입니다. 류근일 같은 사람은 적폐청산은 곧 운동권 본색을 너무 조급하게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평합니다. 그리고 국정농단 사태를 방조해온 검찰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임사를하면서 자신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이 가려지거나 정의가 외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왔다고 강변합니다. 오히려 새 정권을 향해서 나만 정의롭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충고까지 하면서, 수사의 미덕은 절제라고 가르칩니다. 적폐청산은 새 정권과 그 정권의 배후에 있는 운동권의 전략이며, 반미친중적이고 종북적인 본색을 드러났다고 대 놓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은 속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광화문 촛불 민심은, 종북적 운동권의 선동에 놀아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촛불의 광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정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폐청산이 아니라 통합을, 통합을 위해서 박근혜도 사면하고 기득권도 인정하라 할 것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이 기득권의 저항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냉철하게 주시하면서, 길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새 정부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며, 한 해 겨울을 거리에서 촛불로 지샌 민심이 뽑고 세운 대통령과 정부로서, 당연히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새 정부와 대통령은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난 9년간 아니 그 보다 훨씬 오랜 동안, 시민을 모욕하고 협박해 온 권력, 시민들과 유권자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들이 결정하고 밀어붙이고 억압하고 강요해 온 권력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표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중의 개 돼지라고 말하는 세상, 사람과 생명이 물건이 되고 숫자가 되는 세상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외침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오직 권력만을 지킬 뿐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대한 절망의 표현입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정치와 경제가 만들어 내는 세계 속에서, 여기 인간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요 외침인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도 우리가 보았던 것은 사람과 생명이 무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측 불허의 충동적인 인물 트럼프에게서도,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김정은에게서도, 그리고 그 둘이 벌이고 있는 위험한 게임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우리를 볼모로 잡고 희생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과 국가가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와 수용절차를 무시한 채, 고고도비사일방어체계 싸드를 배치하는 동맹국 미국은 물론이요, 동맹국의 요구라 해서 국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배치를 서두르는 대한민국 정부, 그들에게 과연 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관심은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싸드 배치와 관련해서 보복조치를 감행하고 있는 중국, 또 그 기회를 군사적 무장의 기회로 삼고 있는 일본에 둘러 싸인 채, 이 나라의 국민들은 '정말로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줄 나라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새 정부는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추구하는 촛불을 계승하는 시민주권의 광화문 시대는, 시민들이 스스로 참여하여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는 확신에 찬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새 정부와 대통령이 국정철학과 방향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도 염려가 되어서 몇 가지 생각을 더 말해 봅니다. 먼저 신영복 선생의 도로와 길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도는 도로의 논리가 아니라 길의 마음입니다. 도로는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이며, 길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동행하는 인간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매일 직선을 달리고 있지만, 동물들은 맹수에게 쫓길 때가 아니면, 결코 직선으로 달리는 법이 없습니다." 도로와 길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해서 어느 한쪽은 반드시 필요하고 다른 한쪽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길의 마음을 잃어버린 도로를 경계함이요, 사람을 버리고 가는 효율과 속도의 논리 곧 자본의 논리가 가진 위험을 경고함이며, 사람의 관계가 야수적 관계로 변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과 생명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되살려 내야 한다는 참으로 따뜻한 가르침이며, 사람 사이에 서로 주고받고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영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대통령과 정부의 마음 또한 그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에도 길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에 나오는 제자 도마와 예수님 사이에 있는 길에 대한 논쟁도 신영복 선생의 길과 도로에 대한 가르침과 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하는 이 때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요한 복음 14장 27절의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평화를 말하는 두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권력 유지를 위해서 사람과 생명을 희생시키는 평화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참 평화의 길일 것입니다. 핵은 핵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고, 상호간에 미움과 증오의 팽팽한 대결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일 각오를 하는 자만이 애국자라고 외치는 평화의 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습니다. 사람과 생명을 희생해서 지키려는 권력의 평화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의 길에 굳건히 서기를 바랍니다. 열강들의 이익이 각축하는 이 한반도에서 이와 같은 참 평화의 길을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 속에는, 분명히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살리는 정치, 사람다운 삶을 향한 소망을 열어주는 정치, 사람과 생명을 살리는 평화통일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를 온전히 정권이나 권력에게 맡겨 놓고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 50년간을 생각해 보면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언제나 권력은 민중을 배신해 왔습니다. 결국 촛불의 소망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참여와 감시와 견제는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새삼 묻는다, 


5월 9일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선택을 할지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그리스도인이 선거에 임하는 자세?


    5월 9일이 다가오고 있다. 헌법 최초 탄핵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촛불을 들었건 들지 않았건 모두가 ‘내가 바라는 다음 세상’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고 있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나의 소중한 목소리를 내는 소중한 선거란 어떤 것일까? 분명 예년의 투표보다 그 무게가 남다름을 인지하면서도 짧은 선거 기간만큼이나 응축된 생각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하루하루다. 필자는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삶의 신념과 정체성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라 고백하는 1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거를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필자보다 더 오래되고 노련한 정치 의식-행동과 삶의 경륜에 의해 다져진 선택 방법에 대해 존중을 표하고, 아직 한참 모자라고 설익은 한 마디를 내놓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말이다.

   먼저는 이 질문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갖는 특정한 선거의 방법 또는 선거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이 과연 누구이기에 선거를 하는 태도가 따로 있다는 것일까? 우리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럼 예수를 우리의 삶과 이 세계의 주인, 통치자로 고백하는 우리는 예수처럼 선거를 하면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예수를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가만, 생각해보자.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있었던가?


.

2017, 예수의 선택?


   그렇다. 예수 당시에는 선거가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없었다. 통치에 관한 한 황제 1인이 다스리는 군주제도였고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제도가 있었다. 너무 난감하다. 예수의 투표 성향을 분석해서 우리도 그와 같이 투표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예수와 우리 사이에 있는 2천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한반도라는 공간 이 두 가지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걸까? 게다가 한 가지 렌즈가 추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티나의 역사적 체험을 전제로 하지만, 유럽의 역사 과정 속에서 탄생한 종교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앙 제도와 해석 체계는 유럽의 경험에 기반을 둔 예수 신앙의 산물이다. 즉,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유럽의 문화로 재해석되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삶의 기반으로 재구성되어온 역사를 인지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이 다중적인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소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접어두도록 하자. 이미 수많은 텍스트론들이 말하고 있다시피 예수에 대한 재구성은 ‘읽는 이’의 바람과 삶의 경험들에 의해 심하게 교란된다는 것이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 것 자체가 물음표로 던진 이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팔레스티나에 살고 죽었던 하나의 예수’의 구성은 불가능함이 천명되었기 때문에 ‘예수가 5월 9일에 투표한다면 0번에 찍을 것이다.’라고 점찍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직 말하고 싶은 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선거와 투표, 예수님이 지금 이 시점에 오셔서 투표하신다면? 이런 생각을 하려면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는 것이다. 곁가지로 생각해 보자. 우리 논의의 전제가 되는 것,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라는 것의 함의, 곧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분, 따라서 우리의 주인이라는 이 틀거리. 이 언어가 민주주의 사회 즉 백성(民) 또는 시민이 주인이라 하는 2017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신과 결별하고 ‘생각하는 인간(데카르트)’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 국가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주체라고 이미 천명된 근대 이후의 이 세계 안에서 당신은 정말 뼛속 깊이 이해가 되는가 말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로의 접근이 불가능하였듯이 예수와 선거를 연결짓는 일은 너무 깊은 작업이라 포기해야만 할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불가능하기에 더욱 흥미진진해 보이는 건 나 뿐인가. 비단 정치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아니었던가 말이다.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


    자, 이제 길었던 서문은 제쳐 두고 예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예수가 보여주었던 삶의 행적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야겠다.

    예수의 모든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이 글에서 모두 다룰 수 없지만, 그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삶이 보여주는 정치적 함의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작년(2016)에 진행된 본 연구소 신학아카데미 탈/향 강좌에서 김진호(본 연구소 연구실장)의 ‘예루살렘에서의 7일’이야기 중 일부를 발췌해 보도록 하자.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이것은 고대의 전형적인 ‘잔혹극’의 한 실례다. 잔혹극이란 ‘희생양’의 배제를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형식으로 공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권력의 지엄함을 승인하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체제는 피압박 대중의 욕망분출 방식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욕망 분출의 기회를 봉쇄하는 극단의 배제집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배제집단을 천민 계층(마지널 휴먼)이라 하는데, 대중은 이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무의식적인 카타르시스를 일상 속에서 경험한다. 이때 극단의 배제집단은 자신의 욕망분출의 계기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을 ‘광기’의 사람들, 즉 악령 들린 사람들로 만드는,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배제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사회적 지배의 기재로 활용된다. 다른 한 유형은 잔혹극을 통한 욕망의 카타르시스다. 대중은 출구를 찾아 정처 모르게 내면을 휘젓고 다니는 무의식적 욕망을 분출할 안전한 대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잔혹극의 희생양이다. 대중은 억압된 욕망에 분풀이라도 하듯 분노를 한껏 그에게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권력은 그 대상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잔혹하게 처벌한다. 권력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이기라도 한 듯이. 요컨대 잔혹극은 대중의 축제이기도 했다. 그 축제를 축제로서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자신이 역모자의 적극적 추종자임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형은 처형자를 위해 슬퍼하는 기색을 보인 사람을 재판 없이 함께 처형하는 관례를 동반했던 것이다. 

메시아가 일으킨 변혁을 향한 불, 아니 메시아라는 변혁의 불. 그것을 지르는데 공범이었던 자들이 어느 순간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하는 화재경보기에 놀라 무대에서 흩어져버린다. 이제 그들 중 누구도 성전의 억압의 장치들을 불 질러 태워버려야 한다는 ‘불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 화재경보기가 울린 뒤, 불을 냉동시켜버릴 듯 거세게 내뿜을 소방차의 잔인한 물줄기가 온 세상을 뒤덮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세상을 향해 찢어질 듯 경고음을 발한 뒤, 그 곳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불의 호소’만이 허공 속에서 춤판을 벌이며 남은 공연을 실연할 뿐.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고, 추종자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멀찍이서 침묵 속에 관망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찢겨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예수는 죽어간다. 여기서 ‘신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잔혹극의 가학성, 권력과 대중의 공모 속에 벌어지는 역사의 사디즘(sadism) 속에 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신은 죽었다. 아니 가학성을 가학성으로 보복하는 신은 죽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변혁 행위를 꿈꿨으나 하느님은 변혁행위를 통해 예수와 만나지 않았다. 예수사건은 바로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모든 이의 침묵 속에 도살당한다. 바로 그 현장, 신마저 침묵하고 있다는 바로 그 현장에서 변혁 행위의 주체인 신도 도살당한다.[각주:1]


    메시아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물러나 사람들의 마음 따위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피안의 세계를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도래하여 통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나라 는 죽음 이후인 내세의 삶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내면의 안정, 안심을 얻는 ’힐링캠프’는 더더욱 아니다. 메시아란 철저히 현실 내의 정치적인 존재였다. 예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이며, 현실적이라 함은 곧 생활 즉 삶을 이야기하는 예수를 통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를 일컫는다. 인간들은 예수를 봄으로써 현실(the Real)을 읽고, 예수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과 세상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하나님과 인간 및 세상이 화해한 ‘하나의 장소(One Place)’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까지 말했다. 즉, 우리의 현실은 어디인가? 그리스도라는 공간이다. 그리스도라는 공간 안에 채워진 그리스도의 삶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는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던지며 살았다/죽었다. 예수는 불을 지르는 사람인 동시에 아버지인 신을 도살하는 주체였다. 매일이 반복되는 이 지루한 일상의 세계가 변할 수 있음을 알렸고, 이전부터 약속된 바로 그 ‘야훼의 날’이 오늘 여기에 다가왔다고 선언하며 모든 죄와 아픔을 치료하는 실천적 존재였으며 ‘아버지’로 표상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상(像)을 파탄내는 무뢰배였다. 방금 살펴본 ‘예루살렘에서 7일’간의 행적은 모든 메시아로서의 삶을 축약하고 종합하고 결론짓는 일이었다. 즉,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의 삶 전체는 아픈 사람들의 병을 ‘지금 그 자리에서’ 고치고 사회 속에서 ‘죄’라고 여겨졌던 고정된 편견과 맞서서 싸워 논쟁을 일으키고 불화를 일으키는 삶이었다. 예수는 누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누가복음 12:49~53)


    제도정치를 주관하여 이 지루하고 억압된 일상을 마비시킴으로 유지시키고 유지시킴으로 마비시키는 제도의 권력들과 싸웠다. 제도의 권력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였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생각이 마비된 사람들이라면 질문으로 일깨우고, 사회적 시선으로 일상이 불가능한 이들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탄생부터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리고 죽는 순간과 다시 부활하는 그 순간까지 모두 그 한 걸음 걸음이 사람들에게 불을 던지고 일깨우는 정치적 존재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연극의 희생양으로 죽임 당했지만, 메시아 예수를 죽인 그 손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세상의 곳곳을 치료하며 불의한 세상에 균열을 내고 불을 던지는 사람들로 변화해 갔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정치, 예수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특정한 신의 특정한 뜻, 특정 계파의 이익을 대변하러 온 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그 하나님의 통치란 다름 아닌 사람이 어느 하나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태어났든지 간에 하나님에게 소중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는 꽃까지 모두 일일이 살리고 돌보시는 그 원리에 의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 그가 민의(民意)의 화육(化肉),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있음/없음들의 몸’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정치인들이 떠받드는 - 동시에 떠받들지 않는 - 민심의 지엄함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심의 부끄러운 민낯 또한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기도 하다. 훈련되지 않고 오로지 짐승 같은 대중의 에너지가 어떻게 권력자들에게 악용될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의 몸으로 똑똑히 대면시켜 주신 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불을 던져 놓고 그 불이 자기에게로 향하게 되었을 때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자신에게 들이대는 불길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후일에 자신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들도 상상하면서 말이다.


민주주의와 선거와 예수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와 민주주의는 사실 애당초에 불가능한 만남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떤 투표를 해야하는지 어렴풋하게 실마리를 잡아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2항>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 1조 1항의 말은 언설(言說)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인 국가이다. 민주 공화국이란 뜻은 사전 뜻풀이를 가져 오자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해서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여 ‘민’이 주인이라는 것은 개별 개체로서 ‘내’가 주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합체로서의 민의’이다. 즉, 공동의 의사 결정이 반영되는 정치를 말한다.

    그럼 위에서 말한 예수가 꿈꾸었던 세상과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 체제는 예수가 꿈꾸었던 정치, 즉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제와 모습을 갖추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가 어떻게 통치하는지 그 체제의 정답을 어디에도 계시한 적이 없다. 왕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성서 기자는 하나님이 못마땅해 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사 시대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시대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하나님과 소위 ‘독대’하여 하나님과의 채널이 단일했던 모세-여호수아로 이어지는 광야와 초기 가나안 시절의 ‘임시정부’형 체제가 하나님의 통치에 더 가까웠을까?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족장 시대? 에덴동산…? 대체 우리는 그럼 얼마의 시간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이런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아니면 소위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듯 교회가 많아져서 ‘복음화율’이 높아진다면, 즉 교회에 등록한 기독교 신자들이 늘어나 그 수치가 100에 가까워지면 그 때서야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가장 ‘직접’ 반영하는 정치체제야말로 환상에 가까우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체제는 현재 잠정적으로 가장 우리에게 적합한 체제라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일치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이것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를 고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에겐 정의를 추구하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며, 다른 한편 불의를 행하려는 경향성도 지니고 있기에 민주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사회정의 실현에 있다.[각주:2] 오늘날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 즉 하나님께서 특정 매개자를 통해 통치하시는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여러 세속 정치 형태 중에서 민주주의가 희년 정신 즉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해 주는 정치 체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것은 곧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 도래의 선포, 곧 누가복음 4장 16, 17절의 말씀의 내용과 가장 가까운 정신을 구현한 체제일 것이라 고백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170509 대선의 의미


    여기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비단 정치체제의 조형(造形)만이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치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 즉, 금번 국정농단 사태, 소위 박근혜-최순실의 비(반)민주적 통치의 상태가 드러낸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은 우리 사회의 곳곳이 어디 하나 빠짐없이 병들어 썩어 문드러진 사회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각주:3] 특히 박근혜-최순실은 삼성의 이재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드러났다.[각주:4]



    즉,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기 위해서, 특히 이번 선거와 이어지는 정치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정치(제도)의 개혁, 경제의 민주화, 동북아시대를 맞이하면서 통일과 외교에서의 주도권 장악, 점증하는 생태위기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시급하고도 안전한 대책 등이 이번 선거를 시작으로 앞으로 계속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결코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체제”의 심판과 그 사태의 종결로서 인지 되어선 안 된다. 이제 대한민국, 아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디자인되어야 그 기초를 쌓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예레미야 31:31)”


그렇다면 나의 목소리를 내는 투표란?


    예수, 나, 민주주의, 그리고 2017 대통령선거라는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번 대선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일단은 선거를 해야 한다. 아무나 되겠지 하면 정말 ‘아무나’ 된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지도자로부터 통치를 받을 것이다. 그 때부터 당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옛날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하자. 마키아벨리를 통치기밀의 폭로를 통한 반-폭정주의 및 공화주의의 실천자로 인식했던 바로크시대 보깔리니는 법정에 선 마키아벨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검사는 마키아벨리가 한밤중 양떼 속에 숨어들어가 ‘개의 이빨로 만든 의치’를 끼우려다 발각되었으며, 그런 행위는 양의 젖을 짜고 털을 깎는 ‘목자들’을 위험에 빠지게 만들며, 이후 양떼는 목자들의 ‘휘파람과 지팡이’를 따르지 않게 될 것이고, ‘밧줄로 둘러친 울타리’로는 더 이상 양떼를 관리할 수 없게 될 것인바, 바로 그때 ‘양털과 치즈의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의 이빨로 만들어진 의치는 양을 개처럼 물어뜯을 수 있게 하는 힘, 목자들의 호명과 지시를 거절하는 힘, 목자들이 매번 재설정하는 목양의 울타리와 영양배분의 경계를, 목자들이 정립한 법의 경계를 무화하는 힘이다. 개의 그 이빨, 그 힘은 검사에 의해 ‘극히 위해한 성격의 안경’으로 기소되는데, 그 안경은 그들 목자들의 법 연관이 양털과 치즈 가격의 관리를 통한 축적의 보호상태임을 문제시하는 시력을, 그런 축적의 보호가 ‘신성의 가장’과 ‘국가이성이라는 폭정의 비밀’에 의해 관철되고 있음을 폭로하는 시력/시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각주:5]



    투표는 가장 작지만 확실하게 당신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가장 쉽고 가장 빠르고 가장 적확하다. 15명의 정치인이 대선에 출마했다. 누구를 찍든 찍는 게 당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작이다. 다시 말하건대, 이번 선거는’시작’에 불과하다. 근본부터 시작하는 선거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 ‘과연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 곳이, 내가 운명처럼 태어나게 된 이 곳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뜻’이 있다고 믿는 이 곳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현실’에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면 이제는 응답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이 단번의 투표에 이룰 수 없다. 투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당신은 당신이 찍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 사람과 그 주변의 세계가 당신이 점찍어둔 사람을 찍을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그 후 어떤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 비록 당신이 찍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 그 때부터 그를 사정없이 움직여야 한다. 정당 가입과 활동으로, 시위와 집회에 참가함으로, 전화로, SNS로 말해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당신’의 시작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16 신학 탈/향 강좌 <예수, 트랜스-크리스천 히스토리를 위하여>(강사 : 김진호)의 1강 ‘역사의 출발, 십자가에 달린 그 이’ 중 한 단락을 발췌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2017 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 지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 (2017, 동연) 11쪽 인용 [본문으로]
  3.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두 인물이 있지만, 사실 그들과 그들이 가지고 논 권력을 둘러싸고 있는 층위는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다. 일차적으로 그들을 비호하고 키운 정치 기관들 - 청와대 비서실, 국정원, 검찰, 헌법재판소 등 - 과 그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그리고 군대가 있고, 또한 그들의 충성스러운 ‘입(Speaker)’ 역할을 한 그들의 입장을 매일 매순간 퍼나르고 재생산해낸 언론권력(조중동 등의 일간지, 공영방송과 종편방송 및 포털사이트)이 있을 것이다. 비단 그것 뿐인가.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 소위 각계각층의 지식팔이 ‘전문가 집단’과 대중의 영적인 상태를 주관하는 종교권력들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자신의 역할들을 충실히 집행함으로써 직접 책임지지는 않지만 모두가 조금씩의 힘을 보태어 만든 사태가 결국 여기-지금 오늘의 생명-삶을 갉아 먹는 체제로 현신(現身)한 것이다. 사회학자 윤인로는 박근혜 정부와 그 주변을 둘러싼 권력들을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가 이야기한 ‘간접권력’이란 개념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 보호능력 없는 채로 복종을 요구하고, 정치의 위험을 몸소 받지 않고서 명령권을 가지며, 책임을 다른 기관에 강요하면서 그 기관을 통하여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간접권력’ (칼 슈미트, 홉스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 교육과학사). 여기의 간접권력이란 무엇인가. 체계적인 무책임의 통치상태, 곧 기술적(객관적, 기계적, 외적)으로 된 통치체의 중성화(다원화, 분권화, 합리화) 상태, 공모한 사적 당파성들의 ‘영원한 수다’ 상태.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90쪽) [본문으로]
  4. 가장 왼쪽은 실제 타임지(아시아판, 2012. 12. 17) 표지, 그리고 이후 2장의 사진은 패러디물이다. 각각 왼쪽부터 ‘독재자의 딸(박근혜)’, ‘독재자의 딸의 무당(최순실)’, ‘독재자의 딸의 무당의 후원자(이재용)’로 표현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윤인로, ‘신정-정치’(갈무리, 2017), 139쪽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세월호, 우리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세월호 얘기, 혹시 지겨우십니까? 지겹다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도 ‘왜?’라는 질문은 넘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9월 24일)이 벌써 162일째인데도 말이지요. 지겨워도 직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세월호 사고 당일로 돌아가봅니다…” _손석희, JTBC 뉴스 2014년 9월 24일 오프닝 멘트 중


안티고네를 소환하며


    오늘은 위의 손석희 멘트가 있었던 날로부터도 2년 반 가까이 흐른 날이고, 이제 2주후면 우리는 세월호 3주기를 맞는다. 문득 지난 3년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믿기지 않았던 세월호 침몰과 더 믿기지 않았던 구조과정들, 구원파를 끌어들여 사건 초기에 문제의 핵심을 호도했던 일, 세월호 유가족들의 애끓는 절규와 대통령의 눈물. 유민 아빠 김영호 씨의 목숨을 건 단식, 인상 깊었던 교황의 방한,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었다는 뉴스, 서울서 팽목항까지 세월호 인양을 위한 도보 행진, 팽목항에서 서울까지 유가족들의 삼보일배, 무의미했던 세월호 청문회, 대통령의 사라진 세월호 7시간, 대통령 탄핵 가결과 인용, 그리고 지난주에 있었던 세월호 인양 소식까지, 이상은 지난 3년간 세월호와 관련하여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굵직한 제목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3년이 지나도록 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조차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나지지 않았을 때 어느 문인(文人)은“어떤 경우에도 진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한 슬픔은 합당한 이유 없이 눈물을 그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각주:2]글을 쓰겠노라고 밝혔다. 그이의 다짐을 접하고 윤리학자로서 떠올랐던 단어가 진실과 애도다. 윤리는 진실의 윤리학이어야 하고, 윤리는 또한 애도의 윤리학이어야 맞다.

   졸고는 안티고네의 애도를 향한 정신분석학적 접근,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윤리에 대한 글이고, 그 윤리가 어떻게 현실의 불합리한 질서를 전복시키는 기제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상상이다. 안티고네의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애도는 진실을 향한 투쟁이었고, 그녀의 행보는 시스템의 안녕과 평화를 추구했던 전통적인 윤리학의 지형에 대혼란을 초래하였다. 나는 안티고네의 파국을 지향하는 윤리가 어쩌면 뒤틀리고 왜곡되고 변태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21세기 시민들이 지녀야할 윤리적 모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에 대한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넘긴다.


애도의 원형


   맑스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는《소설의 이론》에서 고대 그리스를‘서사시 시대-비극의 시대-철학의 시대’로 구분하였다.‘서사시 시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대표적인 작품이고, ‘비극의 시대’ 하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루카치는 고대 그리스가 ‘서사시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하나로 섞여 있었던 시대였고, ‘비극의 시대’는 이성과 감성의 분화가 일어났던 시절, 그리고 소크라테스로 상징되는 ‘철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감성과 욕망의 영역이 배제되면서 이성우월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밝힌다.

    애도에 대한 고전적인 판본은 고대 그리스 ‘서사시 시대’의 걸작 〈일리아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헥토르에 대한 애도의 장면과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이야기〉에 등장하는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이다. 〈일리아스〉는 기원전 12-13세기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브레드피트가 나왔던 영화 〈트로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일리아스〉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고 헥토르의 시신을 유린하는 장면이 나온다. 헥토르의 아버지가 밤에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내어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다음 날 헥토르의 시신이 트로이로 옮겨져서 그동안 치르지 못했던 애도의 의식을 벌이는 것을 끝으로 〈일리아스〉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일리아스〉 속 헥토르에 대한 애도보다 더 복잡하고 진화된 애도 이야기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등장한다.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국가(테베市)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버린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르려는 안티고네와 반역자(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응징의 차원에서 애도를 허락지 않는 테베왕 크레온 사이 갈등이 이 비극의 줄거리다.

    폴리네이케스는 테베國의 입장에서 볼 때 역적이다. 국가에 반기를 든 자들에 대한 역사의 형벌은 어느 민족이건 대체로 일치했다. 공동체 성원들 앞에서 공개적이고 잔인한 사형이 집행되고, 그 주검을 마을 어귀에 대롱대롱 매달아 공포의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거나, 혹은 그냥 시체를 들판에 내동댕이쳐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함으로써 반역자와 공동체 간의 거친 수직적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듯,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끼친 인물에 대한 응징과 처벌은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동체 성원들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당연한 처사다. 이 지점에서부터 안티고네의 문제의식은 시작된다.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사건은 안티고네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현실의 원칙,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현행법을 어기면서까지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되찾아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운영원리인 쾌락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현실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장례를 치르고, 고이 안장되어야 한다는 생명의 원칙, 진실의 원칙에 무게를 두었고, 그것을 현실의 삶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내 기억에는 안티고네만큼 ‘쾌락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오현우다. 1970년대 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외딴 마을에서 3개월 남짓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선다.


<오래된 정원> 중에서


    서울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비 내리는 시골길에서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다. “왜 가니?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 왜 가는 거야? 그곳에 뭐가 있길래… 이 바보야!” 오현우는 한윤희의 이 질문에 아무런 말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 안다. 그가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오현우는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까지 제공되는 쾌락의 공간과 시간을 거부하고, 그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죽음을 향해 나가는 것일까? 왜, 안티고네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원칙에 머무르지 못하고 죽은 오빠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내야겠다고, 아직 나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며 절규하는 것일까?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내면 이렇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타자인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오현우 역시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현실 질서(법)의 위협과 협박과 조롱과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켰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언어의 학습과 병행한다. 어린아이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이드(Id)가 지배하던 원초적 자아(상상계적 자아)에서‘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 속으로 편입된다. 사회라는 상징계 안으로 진입한 아이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법과 질서와 전통 안에서 자라면서, 사회가 설정한 기표를 따라가는 것이 생의 목표이고 기쁨이 되는 인간으로 길들여지게 된다.‘쾌락의 원칙’이란, 사회적 기표를 하나씩 따면서 생기는 삶의 기쁨과 보람과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쾌락 원칙은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적 불안과 소외를 피하려는 속성이다. 그것은 법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는 쾌락을 추구하지만, 불쾌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금지된 대상을 피하려는 성질이다. 이런 까닭에 쾌락의 원칙은 사회적 금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보수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에게는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측면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살고자하는 충동인 에로스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삶의 터전인 공동체의 원리를 거부하고, 자기를 끊어내는 죽음충동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재(the Real)란 무엇인가?


    안티고네와 오현우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인간의 욕동에 대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동을 ‘욕망desire’과 ‘주이상스jouissance’로 구분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욕망이란,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이데올로기적 학습, 혹은 법률 안에서 형성되고 허용되는 욕망으로, 그것은 사회적 가치, 내지 타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라는 상징계(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좀 더 많은 연봉을 추구하고, 육체마저 상품화하는 소비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좀 더 날씬하고 예쁜 외모를 욕망한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표(상징)를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 연봉 1억, S라인의 몸매, 고급 외제차, 명품 가방 등이 대표적 기표라 할 수 있다. 그 기표들의 연쇄를 따라 우리는 상징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표들은 사회라는 대타자가 만들어놓은 기준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남들이 원하니까 내가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인정받으니까. 그러면 내가 편하고 즐거우니까. 그래서 계속 그 기표를 따려고 쫓아다닌다. 결국 상징계속 욕망이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나 오현우는, 이런 식의 상징계 속 쾌락 원칙의 지배하에 있는 욕망과는 다른 욕망을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쥬이상스’다[각주:3]. 욕망이 상징계 속 기표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쥬이상스는 상징계로 진입하기 이전 상상계 시절 작동하였던 욕망이다. 이것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떠돌다가, 현실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실재(the Real)’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실재’란 현실을 초월해 있는 존재, 혹은 운동의 원칙이었다. 플라톤의‘이데아’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라캉은 이런 전통적인 실재와는 다른 실재를 언급하는데, 이를‘Das Ding(=the Thing)’이라 불렀다. 지젝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the Real’이라 명하면서 ‘실재의 윤리’로 나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잠시 여기서 실재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부연하면, 전기 라깡을 읽다보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가 뚜렷하게 경계 지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후기 라깡으로 갈수록 그들 사이 경계는 사라진다. 실재가 어느 특정한 공간과 층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실재계(界)라는 말은 적절치 못하다. 실재는 현실의 오작동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발생한 박근혜의 국정농단,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다원성이 강한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이 실재의 귀환을 설명하는 적절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시민혁명을 통해 높은 민주적 시민의식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 박근혜가 최순실 같은 작자에게 국정을 농단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다니!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의 천국 미국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와 적대의 메카니즘을 들고 등장한 쓰레기 같은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가 있나! 지젝이“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라고 말했는데, 너무나도 적절한 지적 아닌가 싶다. 박근혜라는 실재, 트럼프라는 실재는 대한민국이라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틈과 균열을 상징한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괴물의 숙주가 사람의 몸에서 기생하는 것처럼, 실재(the Real)는 세상의 틈과 균열로 존재하면서, 평온했던 상징계에 혼란과 불안을 선사한다.


안티고네와 실재의 윤리


    라캉은 실재를 겨냥하는 쥬이상스가 지닌 전복적인 힘에 주목했다. 쥬이상스는 상징적(세상적) 원칙과 질서로 제한하지 못하는 근원적 욕망이었다. 라깡은 안티고네 이야기를 그것의 적절한 예로 끌어들인다. 왕권을 놓고 숙부 크레온과 경쟁을 하던 폴리네이케스는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참혹하게 유린한 후 성 밖으로 내친다. 그것은 반역자를 향한 합법적인 법집행이었다. 아울러 백성들에게는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거두어 장례를 치를 경우 가차 없이 처벌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오빠의 장례를 치렀고, 그 이유로 지하동굴에 갇히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앞서 언급했듯이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였다. 쾌락의 원칙대로라면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는 실행되어서는 안되었다. 법을 어길 경우 짊어져야 할 형벌과 공포와 불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쾌락 너머의 원칙을 따라간다. 그것은 보편적인 하늘의 법도에 충실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례를 치를 권리가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인륜 말이다. 안티고네는 그냥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나, 윤리적 덕목에 입각해 행동했던 것이 아니다. 아주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인륜성에 기반한 행위였다. 이런 보편적 욕망에 충실했기에 안티고네는 체제가 만들어놓은 법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현실의 법과 대립각을 형성하는 것이었기에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안티고네는 찬란하고 슬픈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겨지게 된다.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그리스 비극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등극하게 된 연유다.

   하지만 안티고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티고네의 자살은 그녀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의 자살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디케의 죽음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크레온도 모든 것을 상실하는 파국을 맞게 된다. 안티고네의 법 밖의 것을 지향하는 윤리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법의 윤리를 무너뜨린 것이다.

    본래 윤리란 사회의 법규, 전통, 규범 같은 것들을 유지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마음의 자세, 그리고 그것을 위한 행위 일반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실재의 윤리는 사회, 혹은 국가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것, 규범적인 것을 뚫고 나간다. 국가가 제공하고 체제가 허락하는 규범을 따르면 편하고 안락한데, 이 쾌락원칙을 거부하면서 안티고네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는 것을 소망하며 나갔다. 그랬더니 옛 질서가 무너지는 결과가 발생했다.

    지젝과 더불어 슬로베니아학파의 얼굴로 떠오른 알렌카 주판치치는 기존 윤리와 다른 실재의 윤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실재와의 조우에 의해 우리에게 강제된 물음-나는 나를 탈구된 상채로 던져놓은 그 무엇에 조응해서 행위할 것인가, 나는 이제까지 내 실존의 토대였던 것을 재정식화할 각오를 할 것인가?-속에서 윤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바디우는 이 물음-혹은 오히려, 이 태조-을 ‘사건에의 충실성’ 혹은 ‘진리(진실)의 윤리’라 부른다.[각주:4]


    실재의 윤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윤리가 대타자인 공동체가 정한 법규와 규범을 아무 생각없이 따르고 복종하는 도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의 조우를 통해 진실을 겨냥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스템의 이면을 들춰내면서, 대타자의 목소리를 의심하고 자신의 쥬이상스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분석석학의 윤리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윤리는 진실의 윤리다. 진리와 진실은 같지만 다르다. 뉘앙스 상으로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둘 다 어떤 사물과 사건에 깃든 함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같다. 드러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거나, 사람의 진심이거나, 사건의 진상이거나, 혹은 종교적 깨달음이이다. 문제는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의 차이인데, 진리는 우리가 그동안 볼 수 없었고 몰랐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고, 진실은 우리에게 익숙했고 늘 봐왔던 사물(건)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진실의 윤리는 실재가 귀환하는 사건이다. 실재는 예측가능한 상징계의 질서 어딘가에 균열이 생겨, 예상치 않게 그곳을 통해 무엇인가가 융기하는데, 그것이 현실의 모순을 들추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법의 모순일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의 광기일 수도 있고, 맹목적인 도착된 믿음일 수도 있다. 실재의 귀환은 이런 상징계의 껍질을 깨면서,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억압하는 대타자의 목소리와 나의 진정한 욕망(쥬이상스) 사이의 괴리와 간극을 포기하지 않도록 한다. 그렇다면 실재의 윤리를 세월호에 대한 애도의 문법으로 전환하면 어떻게 될까?


다시, 애도를 묻다


    안티고네 이야기와 세월호 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권력은 그들이 보기에 애매하고 재수 없이 발생한 죽음을 둘러싼 진상규명과 애도 과정에 대해 난색을 표시하며, 빨리 그 애도의 기간이 흐지부지되기를 소망한다. 안티고네와 세월호 유가족들은 ‘당신들이 우리의 애도를 가로막는 처사는 옳지 않고, 너무 쪼잔한 것 아니냐?’며, 끝까지 체제가 강제하는 애도의 방식과 대결한(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애도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극명하게 다른 것일까?

   애도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그렇다면, ‘애도를 성공적으로 마쳤다’함은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극복되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성공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 애도가 되는 것 아닌가? 본래 애도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망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을 계속 지속시키는 행위여야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애도란 애도의 사전적 의미, 즉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를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유지시키는 행위다. 그러므로 성공한 애도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인터뷰에서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이 슬픔이 완전히 극복되고 잊히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애도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

   안티고네의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는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현실세계의 법칙을 뚫고 나온 실재(the Real)의 귀환이었다. 이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배제되었던 ‘그것(das Ding, the Thing)’이 현실의 질서 밑에 숨어 있다가 융기한 사건이었고, 그럼으로써 현실의 법집행에 차질을 초래한 사고였다. 세월호 사건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상징계를 뚫고 융기한 실재(the Real)라 할 수 있다.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가정의의 이름으로, 경제성장 혹은 경제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었던 한국 사회의‘그것(das Ding, the Thing)’이 현실의 수면 밑에서 응축되어 있다가 터진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안티고네는 그 실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오빠 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애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크레온이 장례를 막았던 이유는, 애도의식이 망자에 대한 기억을 공동체 내에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의 공유는 필연적으로 어느 임계점에 이르러서는 빅뱅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크레온은 안티고네의 애도행위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권력이 세월호에 대한 애도를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이유도 이와 같다. 세월호 참사는 무능하고 탐욕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실재가 드러난 사건이었고, 현 정부는 그 모든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진실을 향한 행위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일어날 사건의 파장을 너무나 잘 알기에, 정부로서는 이 애도를 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애도가 구천을 떠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미완으로 남겨진 채 배회하는 세월호를 향한 우리의 애도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다. 우리의 애도가 미완으로 남겨진 채 이어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들의 마음에 생채기가 생겨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윤리적 답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리에서 망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을 기억하는 행위를 계속 이어가야 할 것이고, 거기서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 간의 대화와 관계 맺음이 계속 유지되도록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도래하는(to-come) 변혁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전망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될 때, 세월호 애도의 불가능성은 오히려 변혁을 향한 가능성의 지점이자 거점으로 우리 앞에서 살아 있게 된다.

   세월호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세월호 문제는 종결되었다!’고 선언하는 세상의 음성에 파열음을 내는 것이다. 그것이 세월호 문제를 이대로 덥고 지나가려는 세력들에게는 부담과 불편으로 작동할 것이고, 그것은 세월호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그렇게 거짓된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진실을 감추는 자들을 향해서는 쫄지말고 정당한 목소리를 내면서 우리의 애도를 유포하다 보면, 우리 앞에 불가능했던 현실의 파국이 가능성의 형태로 우뚝 솟아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애도는 완성된다. 아니, 그때가 비로소 우리 애도의 출발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4. 10일 에큐메니안에 동일한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65 [본문으로]
  2. 신형철 외, 『눈먼 자들의 국가』, (서울: 문학동네, 2014), 231 [본문으로]
  3. Jacques Lacan, “The Paradox of Jouissance” in Seminar VII,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 trans. Dennis Porter(W.W. Norton & Company, Inc. 1992), pp.167-240. [본문으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이성민 옮김,『실재의 윤리』, (서울: 도서출판 b, 2004), 359.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탄핵 이후를 묻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2014년 4월 16일 그 날부터 사람들은 집에 있거나 길거리에서 풍찬노숙을 하거나 모두가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나라가 아니야! 잠꼬대하듯 중얼거리며 이 나라 사람들은 길고 긴 겨울 추위를 견뎌야 했다. 작년 4월 13일 매우 분명한 신호를 보았다.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노라는 결연함의 신호였다. 지난 10월 말부터 3월까지 넉 달도 넘게 촛불은 차가운 도시에 온기를 불어넣고, 식은 가슴에 뜨거운 생명의 율동을 되살려냈다.


    신영복 선생은 주역(周易)에 있는 ‘석과불식’(不食)을 풀이하면서, 겨울 찬바람을 견뎌낸 씨과실(碩果)은 역경과 고난의 상징이지만, 그것을 먹지 않고 땅에 심어 나무로 숲으로 키워내는 일이 석과불식의 정신이라 했다. 바로 이 희망을 위해 나무는 모든 잎을 떨구어 자신의 뿌리를 두텁게 덥고, 오직 뿌리만은 살려 내겠다는 일념으로 벌거벗은 나목으로 겨울 추위에 맞선다고 했다.


    촛불 시민혁명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탄핵은 헌법 1조가 살아 있음을, 국민이 권력의 원천임을 확인해준 사건이었고, 법 앞에서의 평등을, 사람이 법을 만들고 국가를 만든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케 해준 사건이었다. 그 점에서 광장의 촛불은 가장 평화롭고 명예로운 혁명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 혁명은 탄핵의 성취만으로는 결코 다 설명될 수 없는, 오래 묵은 깊고도 간절한 희망의 계시였다. 지난 넉 달 반의 과정을 생각하면, 자신을 보호하고 가릴 수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을 과감히 떨어내고, 오직 뿌리만을 지키기 위해서 북풍 한설 앞에 맨 몸으로 선 겨울 나무의 모습이 촛불 가운데 있었다. 인간과 생명의 존엄과 가치라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관계의 바탕을 다시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품은 촛불이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가 있기 이전부터 참사는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고, 최순실과 박근혜에 의한 국가 권력의 사유화와 독점이 있기 이전부터 공권력의 사유화와 독점은 우리 눈 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던 일이 아닌가? 저성장, 고용둔화, 노령화, 대기업 위주의 독식체제가 유지되면 청년층의 중산층 진입 경로가 차단되고, 양극화가 고착화 되고 저변도 넓어지게 되어, 그 결과 각종 범죄와 자살, 사회불신의 고조, 잃을 게 없는 청장년층의 묻지마 범죄 급증 등 사회병리 현상의 확산과 악화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예측과 경고는 하루 이틀 들어온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무절제한 사유화와 독점의 논리가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점령해 들어와 있었고, 그 깊이에서 삶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는 이처럼 권력과 부의 사유화와 독점을 정당화하는 의식의 체계, 문화상징들의 체계, 그리고 개념들의 체계가 만들어낸 것 아닌가?


    촛불은 결코 최순실의 구속과 박근혜의 탄핵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발표하던 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정작 일어서 뛰거나 소리지르지도 못하고,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던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그 순간의 감정을 소리 없는 눈물로 표현하고 있는 그들을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걸어온 결코 짧지 않은 과정이 보였고, 앞으로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걸어야 할 긴 여정이 보이는 듯 했다. 아직은 가야 할 먼 길이 있기에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음을 그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탄핵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향한 출발점일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 같았다.


    보수 언론은 지금 조급하다. 최순실과 박근혜로 꼬리짜르기 하기 위해서, 촛불을 울타리로 둘러치려고 할 것이다. 촛불은 탄핵을 위한 것이었고, 탄핵은 미르.K스포츠 두 재단 문제와 관련된 것일 뿐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다. 그 보수언론과 박근혜 정부가 했던 대부분의 일은 지극히 정당하고, 사드 배치, 위안부 합의, 국정교과서 모두 정당했던 것이고, 오직 미르.K스포츠만 문제라는 사실을 헌법재판소가 명백히 판단해 놓았다고 강변할 것이다. 이렇게 촛불, 미르.K스포츠 재단 운영 문제, 최순실구속 박근혜 탄핵으로 문제 해결, 이라는 폐쇄된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조급하게 서두르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즐겨 사용해 왔던 안보프레임을 재가동 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와 함께 통합이 적폐청산을 압도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보수 언론에서 통합의 이야기는 박근혜의 사면이야기로 이미 옮겨가고 있다. 정말로 통합이 사면 논의로 옮겨 간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말한 탄핵 당한 전직 대통령의 생각과 만나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달 반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문제의 깊이를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조급하게 울타리를 쳤다 해도, 그 안에 갇히는 촛불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때를 분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순간의 의미를 하느님의 뜻 가운데서 읽어내려는 사람들이다.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16: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시대를 읽는 일,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지금이 어떤 때인지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때를 묻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지금 여기를 지배하는 가치와 질서에 대해서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는 그러한 질서와 가치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그것들에 대항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실천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소명의 문제다. 촛불혁명은 시대의 실상과 우리의 소명을 한꺼번에 드러내 준 사건이었을지 모르겠다. 촛불이 드러낸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향한 부름에 기뻐 응답하는 삶이 되고, 신학적 실천이 되기를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냉소하라!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인)

 

역사의 종말


    1990년대라는 그로테스크한 시절이 있었다. 레닌의 동상이 붉은 광장에서 철거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자본의 전 지구적 승리가 선언되었던 그 시기말이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문구로 그 시절을 요약였다. 그것은 자본의, 자본에 의한 세계 재배를 찬양하는 축가였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에 대해, 맑시즘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게임이 끝났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를 기쁜소식이라 말하면서“자유민주주의는 이상이 더 개선될 수 없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마치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의 이성이 마지막 기착점인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절대정신에 이르러 인간의 역사가 완성되듯이 후쿠야마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목적지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마지막 목적지란 말할 것도 없는 자본이 시장에서 아무런 제재와 비판과 규제없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이곳 지구다. 그렇게 20세기 내내 지속되었던 혁명을 향한, 유토피아를 향한 상상은 1990년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철거되었다. 


광장에서 시장으로, 이념에서 자본으로


   이 무렵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던가? 87년 체제를 거치면서 혁명의 뜨거움과 혁명의 헛헛함을 경험했던 한국은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면서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우리는 세계 금융시스템이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따라야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정의와 대의, 자본의 원리에 반하는 인간의 가치, 자본의 원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양심과 이성의 소리들을 하나씩 포기해야만 했다.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세계화의 덫에 대한민국이 빨려 들어간 것이다.

   데이비드 헬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세계화를 묘사하면서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개별국가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보다 높은 층위, 즉 금융시장의 역학 속에서 국가의 앞날은 좌우된다고 밝혔다. 1997년 한국에 닥친 IMF 외환위기는 꼭 이와 같았다. 한국정부는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고, IMF관리체제 아래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기업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명목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대량해고로 인한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가 대두된 것이 이 시기였고, 공기업의 민영화로 인한 공공요금 인상이 서민경제에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노엄 촘스키는 이러한 신자유주의를 “민주주의적 형식 안에 있는 전체주의”라고 비난하였다. 이는 무소불위한 지위로까지 격상된 자본의 위력을 경고한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처럼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던 나라가 또 있을까? 시카고에서 10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2014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내가 제일 처음 던졌던 물음이었다.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이다. 이것은 비단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뼈속 깊숙이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는 신자유주의의 DNA가 자리잡았다. 노인부터 어린이집 아이들까지 하나의 거대한 염기서열을 이루어 그 원리에 충실한 신자유주의 완전체! 이것이 내가 귀국하여 3년 남짓 살면서 느끼는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그럼, 언제부터 이런 현상이 시작된 것일까? 세상사를 칼로 두부모 자르듯 야멸차게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사회를 언급할 때 IMF이전과 이후를 분리하여 진술한다. 김영삼 정권에 이어서 등장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대한민국은 가치와 이념의 시대에서 신자유주의의 프로그램에 입각한 생존과 야만의 시대로 서서히 변모해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한국현대사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했던 유일한 민주정부였다. 두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민들이 가졌던 원죄의식, 그것은 과거 개발독재시절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유린,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도외시 되었던 정의에 대한 부채의식을 말하는데, 그 빚을 김대중-노무현 시대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탕감 받았다. 민주정부 10년이 면죄부 역할을 한 셈이다. 노무현 어록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라는 대사는 이 시대의 풍경을 드러내는 증상이라 할 것이다. 그때 대한민국은 “광장에서 시장으로, 이념에서 자본으로!” 깔끔하게 말을 갈아탔다.

    이 무렵 등장한 각종 위기 담론은 그러한 시대정신과 일정한 연관을 지닌다. IMF위기, 경제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대학의 위기, 문학의 위기, 그리고 교회의 위기까지... 본래 위기란 최종적으로는 파국을 꿈꾸고 지향한다. 어쩌면 지금부터 다루게 될 냉소는 파국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마음, 혹은 파국의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과의 거리두기 일런지 모르겠다. 현실과의 거리두기가 냉소라 한다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꿈과 변혁을 비관하는 불행한 정신이다.


파국의 현상학 그리고 냉소의 도래


   현재의 한국사회가 냉소주의가 만연한 불임의 사회라고 한다면 그것의 시발점은 이명박 정부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국민들은 국가의 최고지도자를 뽑을 때 만큼은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었다. 국가지도자는 대의를 존중하면서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겠다며 선거때마다 낙선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부산으로 달려가 떨어진 노무현, 민주주의를 위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김대중, 하물며 김영삼조차 박정희때 민주주의를 위해 단식도 하고, 의원직도 재명당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처럼 대의와 명분, 지조와 신념을 가지고 자기희생을 치뤘던 인물들에게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표를 던졌다.

    그렇다고 볼 때, 이명박은 앞선 지도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다. 이명박의 대의와 명분은 오로지 자본이다. 앞선 대통령들이 지녔던 숭고한 아우라와는 다른 컨셉으로 이명박은 승부를 걸었고, 그런데 그것이 불행히도 먹혔다.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인권과 자유와 정의에 대한 원죄의식을 털어버린 한국 유권자들은 자본을 케츠프레이즈로 내건 이명박에게 몰표를 던졌다. 군사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면서 가졌던 원죄의식을 김대중-노무현 시기를 거치면서 씻어버렸기에 그 누구도 이제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과거에는 그래도 우리에게 최소한의 체면이 있어서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혹 돈을 주제로 대화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격멸하거나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대화의 대부분은 재테그와 부동산, 아이들 영어유치원, 혹은 명품과 성형으로 상징되는 자본의 페티쉬에 대한 내용들 뿐이다. 더 이상 대의와 명분, 의리와 도덕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본이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그 후 우리는 다같이 우리의 체면과 양심, 대의와 수치심과 윤리를 바닥에 내려놨다. 나는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 파국의 지형학이고, 냉소의 감정이 시작되는 포인트라 생각한다.

    문득 10년간의 미국유학을 마치고 2014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지인들이 내게 해주었던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비록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분신을 하거나 투신을 하던 열사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젊었던 어느 한 시절에서 조국과 자신의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토로하면서 긴긴 밤을 나와 함께 지새웠던 절친들이다. 40대 중후반이 된 나의 친구들이 10년 만에 귀국한 내게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해주었던 조언은 결국 이것이었다. “네 마음 다 알아, 하지만 해도 안 돼. 오직 돈이야”

       냉소주의는 이러한 세상의 법칙을 알아버린 성인(成人)의 마음이다. 지젝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다. 냉소적인 이성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특정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진 않는다.[각주:1]


    성인이 된 인간은 유소년시절에 가졌던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 혹 주변에서 여전히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냉소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다 알아, 네 마음 다 알아...하지만, 꿈 깨라! 현실은 냉혹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라고 말이다.

    그들은 이제 공적인 가치를 상상하지 않으면서 정신과 양심의 가위눌림에도 반응하지 않는 쿨한 인간들이다. 그 어떤 충격과 놀라움이 밀려와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간혹 쨉을 날리면서 자기만을 보호할뿐이다. 그들은 이제는 반성과 실천의 자리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세상사 별것 없다” 혹은 “인생 다 부질없어”라는 삶의 경륜과 지혜가 묻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말을 간혹 선문답처럼 날릴 뿐이다.


냉소의 고고학


    냉소주의를 철학사전에서 찾으면 cynicism으로 본래는 지금처럼 부정적이기만 한 정신은 아니었다. 냉소주의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견유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다.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필요한 것이 뭐냐?” 고 물었을 때 “그대여! 나는 햇살이 필요하니 해를 가리지 말고 제발 내 앞에서 비켜 서 달라!”고 했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 인물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본래 냉소주의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고, 체제에 대한 조롱의 정신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자본주의의 등장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의 발흥과 더불어 전개되는 냉소주의란 “돈이 되는 것이면 다 한다!”는 문구에서 선명하게 그 특징이 드러난다. 고.중세 사회 인민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했던 것들, 예를 들어 전통, 관습, 역사, 윤리, 명예, 사랑, 대의, 양심 등등을 거론할 수 있을 터인데, 근대 자본주의는 이것들을 화폐의 양으로 전환시켰다.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자본주의 특유의 마력 앞에서 각각이 지녔던 개별적 가치들은 화폐의 양에 따라 서열화 된 것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드라마 ‘가을동화(2000년 作)’에서 남자 주인공 원빈이 여자 주인공 송혜교에게 한 명대사가 있다: “사랑 웃기지마!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것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이 말은 지금도 회자되면서 패러디되는 유명한 드라마속 어록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개되는 냉소의 증상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봉건시대 귀족들이 내세우는 가치들을 냉소하고 화폐의 양으로 등가시키는 자본주의의 냉소주의가 앙시앙 레짐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기존 체제와 질서를 냉소하는(“웃기지 마!”) 정신이 현재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자본의 법칙에 타격을 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공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자본주의가 지닌 파토스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변혁을 위한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음을 상상하기도 하였다.

    지젝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간다.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맞아 거대서사가 사라진 상황속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서의 냉소주의”를 논한다. 지젝은 독일의 사상가 피커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쓴 『냉소적 이성 비판(Critique of Cynical Reason)』에 기대어 부정적이고 무력한 냉소주의(cynicism)에 맞서는 또 다른 냉소주의인 키니시즘(Kynicism)에 주목한다. 그는 시니시즘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부도덕한 입장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자체로 부도덕성에 봉사하는 도덕성에 가깝다”라고 비난하나, 키니시즘에 대해서는 “공식문화를 아이러니와 풍자를 통해 통속적이고 대중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두둔한다. 지젝이 말하는 냉소주의가 시니시즘에 머무르지 않고 키니시즘으로 나갔던 경우가 존재했었다. 바로 중세가 종말로 치닫고 근대가 도래하기 전 시기다. ‘죽음의 무도’가 울려 퍼지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멘트가 울려 퍼졌던 그곳으로 지금부터 타임슬립을 해보겠다.


타임슬립 : 아포칼립스(apocalypse) 중세


    ‘아포칼립스’는 신약성서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그리스어 제목이다. 신약성서는 고대 그리스 헬라어로 쓰여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포칼립스의 뜻은 신의 비밀, 신의 계시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신의 계시란 말할 것도 없이 종말이다. 종말에 대한 서사와 종말을 둘러싼 현상학에 관한 책이 요한계시록,‘아포칼립스’이다. 사실 돌이켜보면‘아포칼립스’는 요한계시록 뿐 아니라 성서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였다. 제국의 식민으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독교도로 온갖 고초를 당해야만 했던 초대 기독교도들에게 아포칼립스, 즉 파국의 도래는 두려움인 동시에 희망이었고, 임박할 파국에 대한 기대는 현실의 절망을 견디게 하는 에네르기였다.

    이러한 아포칼립스적인 환상과 예언은 서구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할 중요한 해법으로 요청되곤 했다. 그것이 유독 강하게 대두되었던 시기가 중세 말이 아니었나 싶다.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중세교회의 권위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유럽인구의 1/3을 죽음에 이르게 한 흑사병의 창궐로 위기에 빠진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나갔던 십자군은 이교도들에게 패배의 수모를 당하였고, 흑사병으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는 그 누구도 비껴가지 않았다.

    언젠가 김연아 선수가 세계 피켜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생상의 <죽음의 무도>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연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곡은 중세 말 유행했던‘죽음의 무도 dance macabre’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백성, 귀족, 사제, 심지어 교황까지 해골과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마치 전 세계가 죽음과 한판 대동의 춤을 추는 형국인셈이다. 죽음이 선사하는 공포와 슬픔, 허무를 초극하려는 의지가 오히려 춤이라는 모멘트로 승화되면서 ‘죽음의 무도’라는 찬란한 슬픔을 만들어 냈다.‘메멘토 모리 memento mory’, 죽음을 기억하라! 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시대를 향한 냉소적(키니시즘) 발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중세 말을 지배했던 주술적이고 신비적이었던 죽음의 광시곡과‘죽음을 기억하라’는 주문은 대척점에 놓여있던 이성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죽음의 무도’를 추면서 존재에 대한 허무, 실존에의 불안, 미래를 향한 공포를 지나갈 수 있었고, 그것은 죽음에 포로가 되어 염세적으로 흘렀던 중세 말을 벗어나 좀 더 합리적인 틀에서 보다 이성적인 잣대를 가지고 사건과 대상을 대면하자는 움직임과 맞물려 근대를 재촉하고 있었다. 실존적으로 다가왔던 삶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를 초극하려는 죽음에의 행위를 인식론적으로 회의하게 되면서 서서히 근대가 다가왔던 것이다.‘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그 상황속에서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향한 냉소의 메시지 였던 셈이다.


변화된 냉소의 지형학


    다시 21세기 대한민국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냉소해야 하는 걸까. 세상이 변하기 전에는, 서두에서 밝혔던 1990년대라는 크로테스크한 시절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냉소의 대상은 분명했다. 반독재, 반통일, 반외세, 반자본. 너무나 많고 다양한 냉소의 메뉴가 있었고 우리는 아무런 고민 없이 그것을 골랐다.

    하지만 1990년대가 지나면서 선명했던 전선은 흐트러졌고 망가진 국경너머로 초국가적이고 전 세계적인 자본이 넘나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무엇인 진리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전 시대의 패러다임으로는 판단이 안서는 계절이 도래했다. 그러나 잠시 소란스러웠고 불투명했던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자본으로!

    이제 적은 외부에 있지 않다. 내 안에 있다. 나의 탐욕이 문제의 원인이 되었고, 나의 욕망이 유력한 사건의 용의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자본이 뒤에서 원격조정하고 있다. 시절이 바뀌면서 냉소의 성격도 변화하였다.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냉소에서 자본의 음성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나의 욕망과 탐욕이 냉소의 대상이 되었다. 냉소의 칼끝은 이제 그 누구도 아닌 나를 향해 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새로운 냉소의 지형학이다.

    자본의 위력에 기대어 모든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는 감정이 냉소였다면, 21세기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탐욕의 마음을 다시 한번 부정하는 냉소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렇다고 볼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냉소의 현상학은 다분히 변증법적이고 이중적이다. 모든 가치를 무화시키는 자본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정신과 21세기 자본이 선사하는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한 유혹과 욕망사이에서 우리는 지금 홀로 외롭게 서있다.


에필로그 : 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라!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도 쓰여져있고, 마르크스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인용한 이솝 우화에 나오는 대사 하나를 적는다: “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라! (Hic Rhodus, hic saltus! 히크 로두스 히크 살투스!)”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다. 어떤 허풍쟁이가 자랑을 했다고 한다. 자기가 로도스 섬에 있을 때는 높이 뛰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여기가 로도스 섬이라면 잘 뛸 수 있었을텐데”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듣다가 그에게 한말이 바로“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라!”이다.

   맑스는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고,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녁에 날개를 편다고 말했다. “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라!”는 혁명의 날이 밝았다는 신호이고, 비상(飛上)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며, 양적 축적에 따른 질적 승화라는 변증법적 논리학의 기초문법에서 승화의 순간을 가리키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은 그 혁명의 때를“지금 시간(Jetztzeit)으로 충만된 시간”이라 불렀다.

    우리는 자기가 머물고 있는‘지금-여기’서의 사소한 실천과 투쟁에 인색해지기 쉽다.‘아직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고, 아직 상황이 이르고, 좀 더 냉철해져야 하고, 소영웅주의에 휩쓸리지 말고 조금만 진정하라’며 스스로를 다독거린다.‘실행에 옮기는 것은 나중에 좀 더 지켜본 후에 하면 된다’는 말이 ‘로도스에서는 잘 뛰었는데’라는 허세와 동일하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이다. 자, 이제 그대는 무엇을 냉소할 것인가? “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라!”


ⓒ 웹진 <제3시대>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2002), 60.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배종걸
    2017.02.18 10:0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혼란스러운 요즘을 보내는 데 안성맞춤의 내용을 써줘서 감사드립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고찰 II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지난해 11월 원고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기를 다시한번 고찰한다고 약속을 했다.
지난해 11월 원고를 쓸 땐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한국에선 박근혜 최순실 파일사건으로 매일 매일 한국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던 때였다.
지금 1월 이 글을 쓰는 이번주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주다.  특별히 선거기간동안 벌어진 성차별과 여성혐오의 문제에 저항하면서 취임식에 맞추어 1월 21일 여성들의 대대적 시위 (Women March)가 준비되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카나다에서도 여성 동시다발 연대시위가 계획 중이다. 지나 두 달간 한국은 6주에 걸친 엄청난 수백만명의 끈질긴 시위로 인해 12월 9일 국회는 박근혜의 대통령직을 탄핵하는 결의를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취임을 하지만, 트럼프가 제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해 낼지는 오리무중이다. 헌법재판소로 탄핵건이 넘어갔지만, 박근혜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을지 역시 오리무중이다. 알 수 없는 이런 정치적 흐름은 비관적 또는 냉소적 판단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변수와 어려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해준다. 우린 이러한 위기에 대해 자각하는 차원에서, “깨어있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기면서, 11월 소개했던 제니퍼 웰쉬의 역사의 회귀로 돌아가보자.[각주:1]
웰쉬는 역사의 회귀라는 큰 테제를 야만주의; 대다수의 인구의 이주; 냉전체제 그리고 불평등의 회귀라는 소테제로 나누어 어떻게 부정적, 폭력적 역사가 회귀하고 있는지 통찰한다.
웰쉬는18세기 시작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 정립된 서구자유민주주의는 3그룹의 차별을 기반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하면서, 서구 자유 민주주의가 지닌 본질적 한계를 날카롭게 집어낸다. 여기서 이 그룹은, 재산이 없는 자, 여성 그리고 유색인종이다. 즉, 서구 자유민주주의는 귀족, 백인, 그리고 남성을 보호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데 기초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영국의 경우 투표권은 오직 재산 (부동산)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졌다 (귀족계급). 1918년이 되어서야 서구 유럽사회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1965년이 되어서야 흑인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이런 차별정책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입각한 제국주의 세력 (나치, 일본군국주의)을 패배시킴으로써 본 힘을 갖기 시작했다. 1960년대 유럽식민주의하에 속했던 나라들이 독립을 성취하고 탈식민주의국가로 변화되면서 민주주의는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보편화되어버린 민주주의지만, 완전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모습, 위기를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인 야만주의의 회귀의 예는ISIS의 등장이다. 민주주의에 도전을 주는  ISIS의 등장은 아이러니칼하게도2011년 아랍 스프링, 민주주의투쟁의 여파로 등장했다. 중동지역과 아프리카지역 이슬람 대중들은 전제독재주의를 반대하고 독재자 (예. 시리아 바샤 알아사드)들을 권력에서 끌어내는데 성공을 했지만, 그 성공의 여파는 길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 권력의 공백을 틈타ISIS가 권력을 잡았다. ISIS가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는 전쟁에 대한 정당방위논리이다. 2001년 911 테러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쉬의 논리와 비슷하다. 테러를 대항한 전쟁 (War on Terror)를 선포하면서 그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전쟁은 정당화되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 전쟁 후유증은 계속되고 있다. 아니 ISIS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역사의 회귀와 재현을 논하면서 주목할 점이 있다. 이는 역사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점이다.  즉,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그 길로 돌아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현재의 욕구를 역사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 새마을 운동 및 경제개발을 그리워하는 이들에 의해 이명박이 경제 대통령이 둔갑을 하고 그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것이 그 한 예가 아닐까?
3장에서 웰쉬는 피난민의 문제는 전대미문의 대다수 이주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소위 “안보주의”라는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두려움, 기득권자들의 기득권상실에 대한 공격적 표현이 실체화되어 피난민에 대한 배타적인 반응이 더 큰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미국 트럼프의 선거 당선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바로 백인기득권자들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백인 정체성 상실에 대한 화풀이로 표현되었고(p. 154), 그렇게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장벽을 높이고 국수주의 안보를 강화하는 그 댓가 (cost)는 기본 인권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인종, 국적, 성, 계급을 넘어서서 누구나 누릴 권리), 자유 (자유롭게 움직이고 정착하고 살 권리)라는 기본 가치를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p. 158).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의 발원지에 속하는 유럽의 나라들도 제2 , 제 3의 트럼프를 정치지도자로 선출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국수주의와 인종/종족 말살주의 입장이 공공연하게 세계 곳곳에서 발현되고 있다.
민주주의 또 다른 위기인 냉전체제의 회귀의 단적인 예는 푸틴이다.  2005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냉전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연방체제의 달콤한 과거는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영화로운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런 욕망을 웰쉬는 “근육강화” 정책으로 표현한다 (p. 193). 2011년부터 악화되고 있는 현 시리아 사태 역시 러시아의 근육강화정책의 일환이다. 러시아의 인권유린, 인권침해, 언론의 통제 등 내부 상황과 동시에 주변국가 사이버 공격을 통한 정보유출의 행태는 심각하다. 이런 행태는 주권민주주의 (Sovereign Democracy) 정책의 결과이다 (p. 234). 웰쉬는 이 주권민주주의는 철저하게 국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새로운 교리라고 설명한다. 이 주권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반자유주의다. 그런 점에서 레닌-스탈린 시대의 공산주의독재의 모습과 유사해 보이지만 다르다. 국수주의 측면에서 반자유주의적이지만, 자유시장경제체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자유를 지향하고 동시에 지양하는 이런 모순의 기로를 걷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소련연방체제와 현 러시아 체제가 같지 않은 이유중 하나는 종교의 자유이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종교는 아편이고, 그러므로 제거될 존재이다. 그러나, 현 러시아 주권민주주의하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인정된다. 푸틴 대통령 권위 다음으로 권위를 행사하며 다양한 특혜 (조세, 법) 받고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p. 237).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경제불평등의 회귀이다. 지난주 발표된 옥스팜 보고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62명의 재산을 합하면 세계 인구의 절반 36억명이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합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편차는 매년 놀라운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각주:2] 이런 부의 편중은 1980년대 레이건 미정권과 대처 영국 수상의 시절에 등장했다.  11월 원고에서 인용했듯이, 1989년 후꾸야마학자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외쳤다. 같은 책에서 미국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평등한지, 누구든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계급없는 사회를 주장했다 (p. 256). 그러나 소위 우리는 99%라는 “Occupy Movement”가 미국 전역을 휩쓸 때, 2008년 뉴욕증시가 추락했을 때, 계급이 없기는 커녕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간격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역사는 진보한다는 낭만적이고 안일한 선형적 역사관이 팽배할 1980년대, 신자유자본주의를 견제할 공산주의가 몰락한 그 1980년 후반기부터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사회는 경제적인 정체와 퇴보를 겪고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대부분 99% 수입은 상대적으로 줄고 있고 1%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1% 그룹은 직접적인 생산노동에 동원되지 않은 그룹을 지칭하며 그 그룹이  자본주의체제하에서 누리는 특혜를 웰쉬는 지적한다 (p. 265). 무슨 직업을 가졌고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부모밑에서 어떤 자산을 상속받고 현재 소유하고 있는지가 부의 증가에 영향을 미친다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한국의 속담은 거짓이다.
웰쉬는 경제불평등은 실제로 인권유린만큼이나 민주주의에 치명적이라고 설명한다. 이자놀이로 1997년 한국경제를 흔들었고 지금도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IMF 국제금융기구조차도 경제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빈부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p. 269). 왜냐하면, 빈부격차에 기반한 불평등 경제는 경제활동기회라는 기본권을 박탈하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된다는 뜻은 개인과 공동체의 존재적 위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단지 돈이 없다고 또는 일자리가 없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상실, 기본 존엄성의 상실로 이어지기에 그 불평등은 사회적 불안정으로 직결된다. 이 점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불평등이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경제와 정치가 만날 수 밖에 없다. 공공성은 단지 부의 재분배만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정책의 입안이요, 그 정책의 수행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다수가 혜택을 볼 수 있는 공공성, 즉, 공적 관심과 공적 이익을 지향한다.
이 점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도 민주주의 위기 극복에 한 몫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본다. 종교적 삶은 기본적으로 이기주의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서 살기보다 나누고 섬기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약자와 소수라는 이웃에 대한 관심, 타자에 대한 개방성, 즉 근본적으로 부정의에 저항하는 예언자적 전통이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의 진보와 낙관을 보장하는 숭배의 대상도 완전한 제도도 아니다.  실제로 민주주의 선봉자 (나찌즘에 맞서) 윈스턴 처치힐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형태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외 정부형태는 더 최악이기에 이를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서구자유민주주의가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전제주의, 공산주의, 군사독재주의보다는 낫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헌신한 그 지도력을, 그 과거를 기억해야하며 이 민주주의가 정체하고 부패하지 않도록 현재 깨어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이렇게 부족하기에 강하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즉,  우리 (공동체)의 바르고 꾸준한 노력으로 더 성숙하게 유지, 지속될 수 있는 역동적 존재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미국의 최근 선거를 보면서 얼마나 무지가 폭력적인지 배웠다. 사실이 거짓으로 진리가 기만으로 둔갑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아니 안하는) 대중들의 무지, 비판적 의식의 부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했다. 그래서 난, 인권유린, 경제불평등과 함께 민주주의를 부패시키는 독소는 바로 무지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해방신학에서 critical mass (비판적 대중), 민중신학에서 의식을 가진 주체로서의 민중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본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위기 극복은 공적 지식, 즉, 비판적 의식(critical consciousness), 상생의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실천이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최근 한국의 남녀노소가 다 참여한 대대적 시위를 보면서, 정치를 한다는 권력층이 대중들을 기만할 때, 대중들이 그걸 알았을 때, 그 무지에서 깨어나 뿜어내는 힘은 엄청나다는 것을 보았다. 이 힘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힘을 더 키울 때다.



ⓒ 웹진 <제3시대>


  1. Jennifer Welsh, The Return of History: Conflict, Migration, and Geopolitics in the Twenty-First Century (Toronto: Anansi Press, 2016). [본문으로]
  2. https://www.theguardian.com/business/2016/jan/18/richest-62-billionaires-wealthy-half-world-population-combined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인간과 진실에 대한 신념을 회복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뒤늦은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지난 한해 동안 웹진 제삼시대를 편집을 맡아 수고해 주신 이상철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항상 제삼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과, 이 웹진의 애독자들께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새로운 사회와 교회를 위한 신학을 찾아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희망 가득한 새해가 되기를 빕니다.  


    새해 첫날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인도 체나이에 와서 대학관계자들 회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하루 종일 회의실에 앉아 빽빽한 일정을 부지런히 따라가다 보면 시간 감각도 무뎌지고 이때쯤이면 누구나 갖는 여유와 성찰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도 어색할 지경이 됩니다. 그러다 문득 방으로 배달된 아침신문을 접어들 때 비로소 시간을 기억해 냅니다.


    체나이에서 발행되는 1월 2일자 데칸크로니컬(Deccan Chronicle)이라는 남인도 지역신문의 우리 식으로 말해서 오피니언란에 실린 아닐 다커(Anil Dharker)라는 언론인의 글입니다. 2016년을 채웠던 테러, 난민, 브렉시트, 그리고 미국 대선이 보여주었던 묵시가득한 세계와 민주주의의 불안을 그는 “트럼프”(trump)라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미 동사가 되어 버린 단어로 표현합니다. “거짓과 편견이 합리성과 진실을 뒤덮어 승리를 외쳤고(trumped), . . . 선거운동 과정에서 편견을 부추기고 거짓을 퍼뜨리는 일에 전력을 다한 트럼프(Trump)가 미국의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현실, 이것이 바로 2016년 세계의 모습이었다 합니다. 테러와 난민 문제는 서구 사회를 분열시켰고, 문제 해결을 위해 설득하고 조정해야할 국가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고, 거짓과 유언비어로 조장된 공포가 결국은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터키 해안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어린아이 이안 크루드의 죽음을 바라보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부끄러워하던 그 마음이 세계인들의 한결같은 마음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비참해지고 낮아질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의 마음을 다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수치와 분노로부터 인간과 생명의 존엄회복을 향한 사람들의 외침과 참여가 당연히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마음이 숨어 있었고 다른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살던 곳에 살 수 있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보트에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국경을 넘어설 각오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난민들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데,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자라나고 있었고, 오히려 그 상황을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난민들을 나의 소유와 나의 특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여기에 영국 돈이 유럽으로가서 난민들을 위해서 낭비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통했고, 미국인들에게도 이민자들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립주의적으로 또 내향적으로 자기 자신들만을 바라보는 이기적인 시각을 더욱 거세게 불러일으켜, 온갖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채워진 선거운동이 가능한 상황이 되고, 끝내는 거짓과 편견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압도해 버리는 상황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연말 객담의 자리에서 지금은 “민란의 시대”라고 하시던 어떤 교수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와 정치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대중이 광장으로 나와,, 예측 불가능하게 자신들을 표현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샤이 박근혜”라는 말도 생각나고, 안심하지 말라 박근혜보다 더한 대통령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경고하시는 어떤 분도 함께 생각납니다. 분명 우리는 광장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에 도취하면 그 광장은 그야말로 대중의 밀실이되고 대중의 도피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어디를 향해갈지 모르는 민란의 한 복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숨어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고 무서운 배신을 감행할 여지 마저 충분한 상황입니다. 바로 이곳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교차하는 이 곳에서, 인간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그것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전을 엮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회의 도중에 영국에서 온 한 신학자로부터 종교개혁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들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 그 중에서도 영국 종교개혁은 교회론적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비젼이 교회론적 변화의 결과물의 만들어 냈다고 해석했습니다. 교회의 개혁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통해서 온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정말 새로운 이야기 처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인간이 비천해지고 낮아진 상황을 거듭해서 탄식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긍정을 요구합니다. 지극히 시장화되고 상업화된 세계, 그래서 인간마저 상품과 소비재로 삼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신학적으로 다시 다듬어 내는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신학적인간학 자체를 다시 선언하고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애써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실 보다는 설득력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세계, 아니 진실이나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세계, 그래서 최대한 사람들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욕심을 이끌어 내서라도 설득하고 이길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세계, 이런 세계 속에서 진실과 가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신학적으로 깊이 숙고하고 다듬어 내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곧 광장의 희망을 우리 일상의 변혁으로 그리고 신학과 교회의 변혁으로 이끌어 가는 우리의 광장신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실패가 허락되지 않은 삶들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진실이 갖는 허무함


    그렇다. 실로 진심으로 우려하던 바가 실제로 밝혀졌다. ‘그’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한다. 7시간 중 90분의 행동이 나왔고 나머지 시간을 캐는 건 의미 없다. 이미 90분 머리한 게 이미 7시간을 대표하고 있다. 나머지 5시간 반은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 그냥 ‘그’는 머리를 하기 전에 전날 고질적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수면제를 먹었거나 평소 즐겨하던 약물을 맞고 그 기운에 취해서 자고 있었을테다. 그리고 일어나서 머리하고 옷 입고 중대본으로 나갔다. 돌아와서는 평소와 조금 달랐던 일과를 보낸 기념으로 ‘보약’인 밥을 한그릇 뚝딱 해치웠을 것이다. 7시간 동안 취해 있었던 주사가 마늘 주사든 태반 주사든 프로포폴이든 수면제든 마약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닌듯 싶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머리하기 전에는 잤고, 머리하고 난 뒤에는 옷 챙기고 메이크업했다. 상의는 정해졌으니 바지 고르고 화장하고 나간 것이다. 부스스하게 머리를 만진 것도 크게 의미 둘 필요 없다. 옆에서 참모들이 너무 평소대로 화려한 “육여사 올림머리” 하고 가면 좀 그래 보이니까 적당한 연출을 하자는 것 뿐이었다. (평소 참모들이 하는 말이 고작 이런 수준의 말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랬다. 그는 청와대의 해명 그대로였다. 한 일이라고는 오로지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보고를 "받.고.만 "있었다. 보고를 받는 순간의 그의 대사를 예상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 그런가요. 아이들이 빠졌군요. 하던 대로 조치하세요.” 


<그렇다, 그는 졸려 보인다>


   멍했다. 자다 일어나서 “아이들이 구명 조끼를 입었다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라고 말한 걸 번역하자면 ‘나는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의 변형이다. 즉, 사고 전부터 아무 생각이 없었고, 보고 후에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조치를 해야할 순간에 조치를 하지 않았다.


'얌전한' 광기


    사람들은 생각한다. 매우 거대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정윤회 문건 수사를 막아야 했고, 부정선거 의혹을 잠재워야 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보여온 행태를 보면 매우 치밀하게 음모를 꾸밀 만한 사람이라고. 중대본에 나타나지 않는 와중에는 손가락 물어 뜯으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광인’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통영함과 미군 함대의 출동을 막았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수상하기는 하다. 하지만, ‘광기’라는 것이 매우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그러한 ‘얌전한’ 광기와 더불어 참모들도 그의 광기와 그닥 다르지 않았음은 불보듯 뻔하다. 그들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윗선에서 아무 지시가 없는데 구조한답시고 움직였다가 뭔 불호령을 들을지 모르는 인간들이다. 즉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받드는 우리 내각과 관료들이 출동을 막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김기춘이 바로 ‘그’ 옆에서 이 모든 정황들을 만들어내는 구심점이다.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시대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단련된 이가 김기춘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부터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는 이가 김기춘이다. 자기 죽은 아들을 팔고서도 결코 진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괴수가 김기춘이다. 그런 이가 ‘그’ 우편에서 호위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참모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  


    실로 그렇게 아무 일은 없었다. 그들은 보고했고, 그는 보고를 받았다. 점심도 먹었고, 저녁도 먹었다. 머리도 했고, 자기 리듬에 따라 출근한다. 급박한 상황은 바닷 속에 갇혀 있는 사람과 갇혀 있는 사람의 가족들 몇몇에게만 급박했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심기의 문제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장면을 연상해보면 좋겠다. 삼성의 이재용을 비롯한 9명의 재벌 총수들이 12월 6일에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장면 말이다. ‘모르겠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송구스럽다, 죄송하다, 더 잘하겠다’를 마치 ‘자동응답기’마냥 되풀이하는 이들을 보고 한편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질책 아닌 질책을 받는데 괴롭지는 않을까, 자기에게 추궁을 저리도 하는데 심란한 마음을 갖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럴 일은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 그는 그 와중에 건조한 입술에 립밤을 바른다>


    우리가 글의 앞에서 ‘그’라고 부르는 정체 모를 생물의 눈빛은 매우 일관되다. 삼성의 전(또는 현) 주인 이건희를 비롯하여 그 일가와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최순실을 비롯하여 그 일가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기계적이고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닮아 있다. 깜빡임도 별로 없고, 사람의 희로애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딘지 모르게 멍하다.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누가 질문을 하면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을 하기보다는 일단 ‘죄송하다’고만 선수를 친다. 묘하게도 이 생물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증인 장시호에게 안민석 의원이 ‘나 밉죠?’라고 물어보았을 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고 대답하는 것은 김기춘의 ‘신중한’ “모릅니다.”, “부덕의 소치입니다”와는 대비된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모질게 단련이 되어 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지는 요령에 도가 텄다. ‘대의’라는 큰 그림에는 절대적으로 소인배처럼 행동하며, 후일을 기약하는 간신 눈빛을 하다가도 바로 그 즉자적인 상황을 모면하는 것에는 도가 트였다. 고(故) 황유미씨의 500만원 이야기에는 꿈쩍 않다가도 자기 상속세 이야기에서는 동공이 지진 나는 게 그런 생물들의 특징이다. 후일에 벌어질 뒷처리를 해주는 사람과 '아버지'를 비롯한 후견인이 있으니 자기는 그 상황만을 넘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 사람에게나 한껏 짜증을 내고도 뒤에 있는 엄마를 믿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버지의 눈만 속이고 형제들 몇몇만 제거하면 8조의 재산이 내 통장에 들어와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쉽고 간편한 ‘e-편한세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실패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의 거대한 실패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뭔지 모른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적인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먹이를 포착하는 맹수와 같은 살기가 있지만, 그 외의 상황 자체에 대처하는 능력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생존과 관련하여 특화된 몇몇 상황에만 기가 막힌 대처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멍한 채로 구명조끼를 이야기할 수 있고, 바닷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주사를 맞을 수 있고 엄중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립밤을 바를 수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실제로 거대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큰 존재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대타자’라고 명명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들의 아버지는 실로 막강한 권력과 막강한 대통령과 재벌 총수다. 박근혜의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었다. 그는 북한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남한 사회의 영웅이었고, 말 한 마디면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것은 예삿일이었던 것이 아버지 박정희다. 부하의 배신에 스러졌지만, 전쟁의 잿더미에서 국가를 일으킨 불멸의 영웅 아니던가. 이재용의 아버지 이건희는 20세기 말과 21세기 들어 휘몰아친 경제의 흥망성쇠간에 꿋꿋이 살아남은 삼성 재벌가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소위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선의 화신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들 또한 경쟁자들을 뚫고 아버지의 권력과 부의 옷을 입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 아니겠는가. 한 번의 실패는 곧 낭떠러지이며, 죽음이다. 실패를 통한 배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패는 죽음과 동의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실패는 실패 그 자체다.  수많은 정적들을 제쳐야만 한다. '박근혜 5촌 살인사건'의 전말을 보고 우리는 영화가 현실인지 현실이 영화인지 그 경계마저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보통의 멘탈로는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내야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재용 또한 지금의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형제자매를 제쳐야 했고, 수많은 외척들과 싸워야만 했다. 빈 틈은 죽음이다. 자기들 나름대로 눈물 흘릴만한 '시련'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실패를 허락받지 못했던 그들의 가슴에 종국적으로 붙여진 이름표는 ‘살인마’다. 박근혜 살인마는 304명을 죽이고, 5천만 대한민국 시민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인류의 존엄을 모욕했다. 이재용 살인마는 고(故) 황유미씨를 죽이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정을 짓밟았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돈 귀신을 심었다.


우리 아이들을 실패하게 하라      

 

    우리는 촛불을 오랫동안 들었고, 국회에서 탄핵안은 가결되었다. 앞으로도 먼 길이 남아 있다. 누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누가 더 실패했는가를 따질 것은 따지되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작은 실패를 가르쳐줄 때다. 넘어지기를 가르치고, 무너지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 넘어지되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환경, 그렇지만 그것을 아이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세밀한 셋팅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넘어져도 괜찮다, 잃을 것은 강냉이 몇 개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광장 안의 페미니즘 : 예민함과 자기검열



조은채*

 


       매주 집회에 나가면서 어떤 혐오 발언들은 나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혼자만 어떤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 불편함은 구체적인 행동이 되기 전에 망설임으로 종결되곤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예민하다거나 유난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집회 때 쏟아졌던 “미스박”, “강남 아줌마”, “아몰랑” 등 수많은 혐오 언어들을 보고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에게 집회에 참여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에서 피하려고 노력해왔던 수많은 혐오와 정면에서 부딪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거리에 나섰다.

        쏟아지고 있는 여성혐오 발언에 제동을 거는 것은 대통령 혹은 비선실세를 옹호하는 일이 아니다. 혐오 발언을 멈추자는 것은 그들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성혐오 발언을 반복하는 것은, 여성성 비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은 사회에 여성혐오가 얼마나 만연하였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들은 모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로 조롱당하고, 분열을 굳이 조장하는 불온한 움직임이라고 낙인 찍힌다. 이 낙인은 혐오 발언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를 망설이게 한다. 더 거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는데 작은 소란을 크게 키우고 있는 걸까? 계속 입을 닫고 있었으니 이번까지만, 혹은 이번에도 참아야 하는 걸까? 자기검열에서 기인한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기검열만 거듭하다 포기해버린 경험은 이번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은 어디에나 있었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양성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성희롱이 난무하던 단톡방을 고발한 피해자들은 동기들에게 그렇게까지 하고 싶으냐고 도리어 비난을 당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수많은 공개 폭로는 업계를 들쑤신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예민한 여자’들 때문에 조장된 분열과 갈등으로 변모한다. 유난스러운 일부 여자들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에 중립적인 남성인 나조차 ‘너희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는 훈계가 뒤따른다. 예민하거나 이기적인 여자, 혹은 혐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검열의 끈을 더 조이거나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더라도 여성혐오를 멈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여러 번 순화된 언어를 써야만 했다. 최대한 남성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는 것처럼 세심하게, 덜 과격하게 느껴지도록 중립적이고 온건한 어휘를 사용하면서. 상대가 예민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 페미니스트처럼 느껴지면, 남성들, 혹은 더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시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례를 들 때도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예시를 골랐다. 자기검열의 기준은 내가 발화하는 어휘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확성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눈에서 얼마나 덜 거슬리는지, 그리고 들어보고자 하는 의사를 불러일으키는지였다. 일명 ‘받아들일 기분이 나는’ 페미니즘을 찾고 있었던 셈이다. 

        자기검열의 결과물이긴 했지만, 결국 지극히 남성의 눈을 기준으로 검열된 언어로 할 수 있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탈당했던 여성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셈이니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그런 태도를 유지했던 것은 언젠가는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민함’이라는 낙인을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그 낙인이 찍히고 나면, 내가 말하는 모든 부당함이 그저 일부 여성 고유의 예민함의 발현인 것처럼 결론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은 피해의식에 가득 차서 분열이나 갈등을 부추기는 일부 여성의 문제로 규정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 낙인은 결국 내 말들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 설득력을 앗아가 버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과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말은 나를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더는 그런 말들에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지 않으려고 한다. 페미니즘이 향하는 곳은, 굳이 따지자면 분열이 아니라 균열이다. 유구하게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을 통해서 지워져 왔던 존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제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는 말이나 내 예민함을 비난하는 말들에 속지 않는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분열이 아니라 균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균열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낙인이 있든 없든, 자기들에게 불편한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낙인 찍히는 것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저 타자였던 여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성가실 예민함으로 불편한 목소리를 이어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 필자소개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하면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현상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법을 배웠다. 동일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여 공부를 이어갈 생각을 가지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779)
특집 (8)
시평 (91)
목회 마당 (57)
신학 정보 (126)
사진에세이 (36)
비평의 눈 (62)
페미&퀴어 (19)
시선의 힘 (126)
소식 (150)
영화 읽기 (28)
신앙과 과학 (13)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3)
새책 소개 (38)
Total : 315,302
Today : 34 Yesterday :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