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 국가안보와 두려움의 상관관계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영어 단어 security는 한국어로 안전, 보안, 안보 등으로 문맥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요즘 미국에서 한국 관련 기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security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 개성 공단을 폐쇄하고, 미국의 록히드 마틴사가 제조한 사드 (THAAD)시스템을 들여오려고 하는 한국 정부. 이 틈을 타서, 국제적 문제아인 북한의 핵 위협에서, 자국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위대의 지위를 격상하려는 일본. 한반도에서 커지는 미국의 군세력을 자국 안보의 위협으로 보고 경제적,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는 중국. 그리고 침묵하는 북한.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미국 사이에 세계 평화는 고사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와 협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이들 국가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안보의 정의도 군사무기와 힘을 바탕으로 한 영토 수호와 자국 국민들 보호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박근혜, 김정은, 시진핑, 오바마가 가진 세계 안보와 평화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만약 21세기 교회와 기독교의 역할이 곽퓌란 (Kwok Pui-Lan)과 요그 리거 (Joerg Rieger)가 “종교를 정복하라 (Occupy Religion)”는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치와 경제 시스템의 현상유지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미국의) 강한 군사력에 의지한 대한민국 국가 안보라는 시스템에 어떤 자극을 가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반 기독교 사상가인 시모니 웨일 (Simone Weil)은 security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안전 (security)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안전은 영혼이, 짧은 순간이나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공포나 테러의 무게 아래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비록 영속적인 공포는 잠재적 상태만으로 존재해서, 그것의 고통스러운 효과는 거의 직접적으로 경험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질병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영혼의 준마비 상태이다 (Simone Weil, The Needs for Roots, 1952).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웨일은 반전 운동가는 아니였지만, 두 개의 세계 대전을 경험하면서,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열렬히 비난하였다. 특히 이들 전쟁이 노동자 계급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식민지 민족의 삶을 수탈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포와 테러에서 자유로운 안보/안전은 군사력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성 어거스틴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단순화시켜 생각해 보자. 세속적 왕국이 하늘의 왕국을 대신하지는 못 하더라도, 지상에서 평화와 질서를 지킬 의무가 있다. 외부의 침략으로 부터 영토와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킴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세속 왕국의 지배자가 해야할 의무이다. 비록 어거스틴이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 예방적 전쟁을 허용하기는 하였지만, 상대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란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가들도 동의하듯, 어거스틴에게 있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후의 수단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른 시일 내에 끝내야만 한다.  


         전쟁은 인간의 공포심을 먹고 사는 괴물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포심을 적절히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전쟁 당시 1.4 후퇴 때,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트루만 대통령은 국가 비상상태를 선포한 후에, 공산당에 의해 아시아가 무너지면 미국도 안전하지 않으며, 이는 곧 미국이 하느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자유도 없는 국가로 전락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산당을 악마와 동일시 하며, 국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한 것이다.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 또한 사실 확인조차 되지 않은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때문에 시작되었다. 인류의 반을 말살시킬 수도 있다는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공포감은 이라크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사담 후세인도 사라지고, 대량 살상 무기도 이라크에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지만, 이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전쟁은 항상 시작하는 것보다 끝내는 것이 더 어렵다—사실 전쟁의 후유증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 그러므로 현대의 평화 운동가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 자체가 평화 운동이며,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전략과 정치, 경제 환경 조성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불평등, 무역 불균형, 국가 간 경제 제재 등 갈등의 근원을 파악해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근원을 해소해 나가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갈등 상황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전 세계 여성 평화 운동을 연구한 영국의 사회학자 신시아 코번은 반전운동은 공포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표현한다. 그 비유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전쟁 그 자체가 일반 여성들의 삶에 가하는 해가 너무 크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일어난 일본군 위안부, 미군과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는 지역들의 성폭력과 조직화된 기지촌 성매매, 전쟁 중의 집단 강간, 여성 군인들에 대한 성폭력, 여성 군인들의 업적 비하 외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와 딸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 등 여성들이 몸으로 정신적으로 겪을 수 있는 전쟁의 폐해는 상상 이상인 경우가 많다. 적국의 여성들을 공격하는 일은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적에게 공포심과 무력감을 주는 비열한 전술이다. 여성이 겪은 전쟁 폭력은 전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려지는 경우가 많고, 알려진다 하더라도, 사회나 국가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피해 여성들을 위로하고, 사회 화합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을 하는 예가 거의 없다. 정신대 피해 여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일본과 협상한 대한민국 정부, 내전 기간 동안 집단 강간을 당한 보스니아 무슬림 여성들의 기념비 건립을 거부하는 세르비아 지역 주민들과 정부. 이들은 모두 여성들에게 그 영혼 깊숙히 공포와 테러를 심어주어서, 준마비 상태로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예이다.  


          코번이 방문하고 인터뷰한 여성 반전 단체들이 전쟁의 공포심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 단체들은 전쟁과 군사화가 약속하는 평화가 인간 사회의 공포심을 기반으로 한 거짓이며, 알 수 없는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란 공포심에서 벗어나, 함께 반군사화 운동, 군비감축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말 그대로 국제 정치가 남성중심의 힘과 공포의 논리에서 벗어날 때, 지속 가능한 안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Cynthia Cockburn, From Where We Stand, 2008. 한국어로는 평화학자 김엘리가 번역한 것이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의 다양한 단체와 학자들이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미군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내놓고 있다. 그 연구들 중 하나가 과연 미군이 사용하는 군사 행동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또한 국제 안보에 기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래전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nah Arednt)가 이야기한 것 처럼 폭력은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이 힘을 잃기 시작할 때, 그것이 두려워 다른 집단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계속 복종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Hannah Arendt, On Violence, 1970). 아렌트의 논리대로 라면, 더이상 힘을 가진 집단이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 미국은 제국으로써, 초강대국으로써의 힘을 더 빠르게 잃기 시작한다. 사회 윤리학자 샤론 웰치 (Sharon Welch)또한, 다양한 사례 연구를 들면서, 미국이 테러리즘에 대한 공격을 빌미로 제개한 군사행동은 군사적으로 윤리적으로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Real Peace, Real Security, 2008). 미국은 군사행동을 통해 오히려 반미정서를 전세계에 퍼뜨렸으며, 이슬람 국가 (IS)같은 급진적 테러집단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괌, 사이판 등의 태평양 섬들과 호주를 잇는 거대지역은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군사지역이다. 중국의 군사력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끊임없이 이 지역에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명문을 찾고 있다. 이번 북한의 핵실험에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대응하며, 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미국과 합동 군사 훈련, 사드시스템 배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는 군사 폭력을 통해 세계패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양새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결국 일반 한국시민들이 미국의 군수업체들과 한국의 건설업체들에게 ‘안전함이 보장되지 않는’ ‘안보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고, 세상에 무관심해져서, 정작 두려워 해야할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불합리한 제도와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Silent Cry, 2001). 우리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한국 정부와 미국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두려워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우리의 공포심을 바탕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북한의 핵이 두렵다. 그러나 한국이 가지고 있는 핵, 원자력 발전소 뒤에 숨어있는 핵,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하는 극우보수주의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핵이 더 무섭다. 그리고 한국의 안보는 이미 세월호가 물 속에 가라앉을 때, 정신대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며 한일협상이 이루어졌을때, 이제 할머니가 된 생존자들에게 죽기 전에 일본을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애국어머니연합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사용자 중심의 노동법을 통과시키라고 국회에 강요할 때, 등등의 순간에 끝났다. 국가안보는 국경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몸과 마음을 정치적, 종교적, 성적위협, 재난과 재해, 경제적 억압과 착취, 성차별 등으로 부터 지키는 인간중심의 안보가 되어야 한다. 국가가 자국민들을 지킬 능력도, 지킬 마음도 없을 때, 또는 지킴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더이상 국가안보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중심의 국가 안보를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정의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도 상상하기 어렵다. 심판의 칼을 든 하느님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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