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우파'와 대형교회, 열네번째[각주:1]


결론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이 연재를 마감하기까지 두 번의 글이 남았다. 이제까지 내가 말하려 한 것은 웰빙우파의 문화공간으로 대형교회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웰빙’이라는 문화적 현상과 ‘우파’라는 사회정치적 범주가 엮이면서 하나의 문화적 주체로 형성되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장(場)으로 대형교회를 주목해보겠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웰빙우파의 문화공간으로서의 대형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총정리해보겠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이 연재 첫 부분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상상적 논점을 제기할 것이다. 최근 대형교회를 주요 장소로 하여 형성된 문화적 주체로서의 웰빙우파가 정치적 주체로서 재구성되고 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일지에 대한 것이다.  


'1990년대', 웰빙우파 형성의 시간적 범주


   ‘1990년대’라는 시간은 이 연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사회의 경제성장률이 급강하했는데, 개신교도 성장률이 급락했고 심지어 1995년 이후에는 절대수가 감소하기까지 했다. 한편 이 시기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또 소비사회로의 변화도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본격화된다.


    


   이런 민주화와 소비사회화가 본격화된 시대인 1990년대를 주로 30대의 나이로 겪었던 세대가, 두 번의 베이비부머 세대(제1차: 1955~1963년생/ 제2차: 1968~1974년생) 중 첫 번째 세대다. 이들은 한국 근대사에서 보릿고개를 겪지 않은 첫 세대이고, 최소한 초등과 중등 과정까지 근대적 학교교육의 수혜를 받은 세대다. 또 빠른 경제성장의 대가로 완전취업의 행운을 누렸다. 특히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들의 경우는 중상위층으로 안착하기에 가장 용이했던 세대다. 이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결혼과 함께 강남과 강동, 분당 등으로 이주하였거나 독립하여 살게 되었는데, 2천 년대에 이 지역의 지대가 급상승함에 따라 자산이 크게 늘은 것이다. 즉 직업의 안정성보다 훨씬 중요하게 지대의 상승 요인이 중상위계층으로의 안착에 유효했다.

   한편 이들, 1990년대에 강남・강동・분당 지역의 30대 고학력의 중상위계층 사람들은 그 무렵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라는 거대한 사회문화적 제도화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그 실행주체로서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2천 년대에 40대가 되었고 2010년대에는 50대가 되었다. 나는 이 세대를 기점으로 해서 ‘웰빙’우파라는 문화적 주체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추정한다.(물론 이 세대에는 여전히 극우주의적 이념주의자들도 많았고,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자도 많았다.) ‘웰빙’은 성장지상주의 시대를 통과하고 나서 소비사회로의 변화, 그리고 신자유주의로의 이행기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장지상주의적 주체와는 다른, 중상위계층적 고품격 문화를 가리키는데, 이 세대 이후 웰빙문화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다양하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웰빙’의 다양한 발전을 단순화하여 ‘우파’와 ‘좌파’로 분류하였는데, 그중 ‘웰빙+우파’의 문화가 발전한 주요 장소로서 대형교회를 제시하였다.  


'(캐릭터)대형교회', 웰빙우파 형성의 장소적 범주


   1990년대에, 내가 분류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가 대거 등장했다. 이 연재를 시작하는 글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대형교회를 두 범주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 범주는 한국사회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에 대형교회로 부상한 교회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두 번째 범주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성장이 정체 및 퇴조하던 시대에 빠른 성장을 이룩하여 대형화된 교회를 말한다. 즉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는 개신교에 새 신자의 유입이 현저히 줄어든 혹은 감소한 시기에 대형교회로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것은 이들 교회들이, 새신자보다도, 교회를 떠도는 수평이동 신자들의 새로운 정박지로 선택된 결과다. 한데 유념할 것은 수평이동 신자들은 1990년대 이전에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수평이동 신자들은 대개 목사나 은사자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수동화된 팬덤(fandom)에 다름 아니었다. 반면 ‘그 이후’, 즉 1990~2010년대의 수평이동 신자들은 30~50대 연령의 교회 직분(집사, 권사, 장로 등)을 맡은 이가 많았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 꽤 많이 알고 가장 활동적인 교인들 중에 교회를 떠도는 신자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이렇게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은 1990년대 말 이후 강남・강동・분당 등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이 지역들은 대단지 아파트들이 속속 세워짐으로써 단위 면적에 비해 유입 인구가 특히 많은 신시가지 혹은 신도시인데, 지대가 다른 곳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게 상승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하여 이주자들의 자산이 빠르게 증가하여 중상위계층화한 이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이다. 또한 위치상 이 지역들이 서로 인접해 있음으로 해서 중상위계층의 수가 다른 곳들에 비해 훨씬 많이 밀집된 곳이다. 바로 이런 지역에서 떠돌던 수평이동 신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크게 성공한 교회들, 내가 말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 다수가 이런 교회들이다. 

   이렇게 정박할 곳을 찾은 떠돌이 신자들은 ‘그 교회’에서 현재까지 적어도 20~30년, 혹은 그 이상을 주1회 이상의 공식모임을 같이 했다. 그밖에 교회를 매개로 하는 수많은 비공식 모임을 통해 삶이 엮이었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 장기간 동안 이런 공식・비공식 관계를 통해 경험과 기억이 얽히면서 서로간의 친밀성이 깊어진다. 또한 자녀의 ‘절친’의 부모로 얽히고, 부모의 장례로 얽힌다. 해서 삶의 위기에 높일 때 교인들은 도움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사업을 하거나 취업을 할 때에 혹은 자녀를 유학 보낼 때에도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나아가 자녀들의 혼인 관계로도 얽힌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빠른 도시화로 인해 가족과 이웃의 친밀성이 치명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시기에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친밀성의 공간이며 인맥공장이다.

    특히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계층적 다양성이 사라지고, 특정 계층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층적 문화가 형성되기에 용이했다. 학력도 비교적 높고 계층적으로도 안정된 이들이 많았기에 문화적 교류를 나눌 만큼의 여력이 충분했던 덕이다. 하여 바로 이곳에서, 사회의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웰빙우파 문화가 잘 터잡을 수 있었다.


'주권교인', 웰빙우파 형성의 주체


   대형교회들은, 두 범주 모두 예외 없이,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란 교회에서 작용하는 거의 모든 가용자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특정인이 장악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된다. 한데 두 번째 범주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첫 번째 범주와는 다르다. 첫째 범주의 대형교회에선 교인들이 수동적이고 충성도가 높아 담임목사의 일방주의적 전횡이 가능했다. 반면 둘째 범주에선 교인들이 과거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탓에 담임목사가 자신의 자원동원능력을 통해 콧대 높아진 교인들을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었는지가 중요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떠돌이 신자들은 교회를 알 만큼 아는 이들이었고,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주권의식이 꽤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소비사회를 경험하면서 종교도 상품처럼 선택할 수 있는 자의식이 발전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정보능력도 뛰어나 교회들이 내걸은 상품가치를 판별할 능력도 겸비한 이들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1990년대에 부상한 ‘주권시민’에 상응하는, ‘주권교인’이라고 불렀다.

   하여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주권교인’의 취향에 맞는 방식으로 교회를 개혁했던 ‘개혁군주’형 지도자였다. 즉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들은 주권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을 교회 개혁에 반영하고 그이들의 취향에 맞는 요소를 발명해냄으로써 수많은 떠돌이 주권교인들을 정박하게 하는 데 성공한 교회다.

    나는 이러한 ‘개혁적 발명’을 통해 각 교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특성화한 것을 ‘교회의 캐릭터화’라고 불렀다. 이때 캐릭터화를 특징짓는 요소를 여러 연구자들은 ‘개인주의’라고 불렀는데, 나는 ‘웰빙’이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

    가령 1990년대 이후 가열된 자녀교육 열풍은 명문대 지상주의를 낳았고, 이런 현상은 중상위계층에서 더 치열했다. 한데 몇몇 대형교회들은 2천 년대 즈음부터 명문대 지상주의를 넘어서 기독교 지도자를 통해 사회를 계도한다는 이상 아래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겸비한 전인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 양성을 추구하는 대안학교들을 만들어냈다.

    또 ‘부자 되세요’가 일상어가 될 만큼 신자유주의 시대 성공지상주의적 태도가 전 사회를 휘몰아칠 무렵 자신이 누리고 있는 풍요를 축복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신이 부여한 도덕적 책임의 맥락에서 보고자 하는 ‘청부론’이 일부 대형교회를 통해 확산되었다. 이것 또한 풍요를 천민화하기보다는 귀족적 덕성으로 재해석하는 웰빙신앙의 주요 항목에 속한다. 이렇게 대형교회의 캐릭터화의 기조는 웰빙신앙화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웰빙신앙적 캐릭터화가 얼마나 잘 수행되느냐를 시금석으로 하여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를 규정할 수 있다.


웰빙우파적 문화의 헤게모니화를 우려한다


    1990년대는 권위주의를 넘어서 한국근대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갑자기 다가왔고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내기엔 너무 짧았다. 10년도 못 가서 신자유주의의 괴물적 파괴력에 휘둘리는 시대가 도래했고, 2천 년대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반동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 1990년대에는 도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하위문화적 소리들이 등장했을 뿐 지배적인 대안적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거의 지배적 문화로 부상한 것이 없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웰빙우파’적 문화로 보았다. 오늘 우리 시대에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멋지고 규범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것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웰빙’이 적합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웰빙을 가장 잘 구체화한 것은 우파적 요소다. 그런데 이런 웰빙우파의 문화가 형성되고 자리잡는 데 가장 중요한 공간이 바로 두 번째 범주의 대형교회다. 그런데 이런 대형교회를 매개로 하는 웰빙우파적 문화의 헤게모니화는 다른 계층에 대한 타자화를 정교하게 제도화할 우려가 있다. 마지막 글은 바로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 1199호(2016 11 01)에 실린 '웰빙우파와 대형교회' 14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_id=20161004164036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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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끈을 절단하는 아무도 아닌 이[각주:1]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이 책(『신정-정치』)이 출간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5월 9일 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이른바 정권의 교체, 민주정부 3기가 시작되었다. 광장을 달구며 ‘탄핵’이라는 점으로 수렴되었던 목소리 중 많은 이들은 승리의 환호를 질렀고, ‘수호되어야 할’ 정부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의견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목소리 즉, 이제 세워진 저 권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수호’하기만 하면 그 촛불’들’이 말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이에 대해 ‘신정-정치’는 그간 우리 사회는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기까지 걸어온 지난한 과정을 이야기하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이고 철저하게 은폐함으로 감춰졌던 어두운 역사의 경로를 폭로하여 광장에서 냈던 그 목소리’들’이 ‘새 정부’라는 알리바이 속으로 어느 하나 휩쓸리지 않고, 온전히 인양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미 자명하게 알고 있듯이, 역시 시작과 끝은 세계를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는 그 성스러운 끈(7), 곧 성스러운 화폐와 자본의 힘이다. ‘성스러운(거룩한)’과 ‘화폐/자본’을 연결하는 이 언어는 단순히 물질의 세계를 신화화하여 표현하는 게 아니다. 즉, 다시 말해 신정-정치란 돈을 물신화하는 은유가 아니라 등가적이며, 그 운동을 통해 세계의 실재를 구축해 나간다. 그것들은 무한하게 순환하며 서로를 떠받침으로써 우리의 실제적이고 물리적 삶을, 사회적 관계들의 끈끈함을 스펙터클-사회로, 다른 말로 ‘사이비 신성체’로(24) 전환시켜 나간다. 이를 골자로 한 제단 위에 각 종류의, 각 사연이 담긴 피들이 제물로 섬겨진다. 4. 16의 피, MERS의 피, 이창근의 피, 바로 지금의 언어로는 갇혀 있는 한상균과 동성애자 A대위의 피 등 유혈이 낭자한 (사이비) 사회. 거기가 바로 우리의 삶이 바들바들 떨며 놓여진 풍찬노숙/각자도생의 현장이다. 거기서도 모두가 한 입으로 외워야 할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다.(8)”


.

   신정-정치의 사제들은 사목의 권력을 이용해 먹이며, 살리고, 심지어는 머리털까지 센다고도 할 수 있는 바(누가복음 12:7), 진정 그리 살고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바틀비의 변호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고통 앞에서 마음의 운동을 자기 안락을 위한 자위의 도구로, 자기가 속한 법의 권역을 보존하기 위한 장치로 환수하는 고통의 질료화/추상화(350)’하기를, 조남호가 그랬던 것처럼 김주익을 모른다 하며 ‘눈물을 훔치면서’ 김진숙을 불법자로 매도하기를(257), 그리고 바로 지금 최순실이 법정에서 진실을 묻던 의원을 딸아이의 영혼살인자로 매도하며 울부짖는 스펙터클을 매순간 집전한다. 그 ‘사이비성’과 실제 지금/여기의 삶을 묶는 전능성은 어디서 오는가? 최초의 가치이자 성부인 축적의 법과 그것을 운동시키면서 매개하여 잉여가치로 화하는 성자인 국법의 이위일체, “신-G’”(13)이다.


   이에 사람들은 저 ‘성스러운 끈’, 세계를 단단히 매고 있는 저 매개/매듭에 다양한 방식으로 봉헌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성스러운 끈의 매듭을 더 매는 방식으로, 그 반대 편의 이는 그 끈의 성분을 조사하고 끈을 푸는 지식을 체계화하여 이른바 ‘지식팔이, 책팔이’를 하는 방식으로, 또는 그 둘의 결합의 모양으로 이 세계에 매개의 매개를 더하고 있다. 그 끈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는커녕! 한 번 엉킨 작은 실타래나 목걸이를 풀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안다. 풀려고 할수록 더 엉키고, 자신이 더 엉김을 가하고 있는 자신, 변수에 기하급수적 변수를 얹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그 분노를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모세의 사목권력적 후생체에 봉교하는 인간(92) 떼들에 맞서 정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매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 수단 그 자체를 그대로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목적의 영역도 아니고 이러저러한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영역도 아닌 인간 사유와 행위의 장으로서의 목적 없는 순수 매개성의 영역”(226)이다.


    그 정치를 누가 수행하는가? 누가 그 매개/매듭들의 경첩을 절단할 수 있는가? 비존재들을 분리/양산하고 그들을 재합성함(291)으로써 축적의 축적을 거듭하고 급기야는 모든 매개를 절멸시켜 ‘순수한 축적’ 곧 금융자본주의G-G’(96)의 체제 속에서 빚(Schuld)을 볼모삼아 피를 빨아먹고 사는 체제를 끝장낼 수 있는가? 바로 폭력의 당사자들 즉, 고통의 최전선에서 고통을 사변적으로 환원시키려는 자들에 분통과 원통으로 소리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을 위시하여 깨어 있기로 결단한 ‘모두가 된’ 이들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아니’었던 수많은 5. 18 엄마들이 ‘모든 이’로 화하여 4. 16 엄마들에게 보내는 저 절절한 인사말이 선취하였고 그것이 광화문과 곳곳의 불로 옮겨 붙어 최순실-박근혜-이재용(104)으로 이어지는 비밀의 카르텔을 끝장냈듯이.

<5. 18 엄마가 4. 16 엄마에게>[각주:2]


   고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각주:3] 라는 저 맑스의 말을 바로 오늘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의 불로, 세계의 무능/유능(406)을 도려내고 태워버리는 불로, 사목적 게발트로 위장하여 “서로가 서로를 비밀스런 끈으로 거듭re엮고 매회 짜이게 하는ligio, 그럼으로써 축적이라는 비밀스런 제 1목적의 위기를 관리하고 종교적religious 원상복구를 수행하는 공동 ‘비선’의 게발트”(118)를 대항하는 익명들 곧 ‘아무도 아니’(296)로 존재하는 고유한 존재자들로 맞아들이자. 최종목적론적이고 메시아주의적인 선언문을 쇠말뚝처럼 박아댐으로서 세계의 ‘잔여’(351)가 그 맹아로 품고 있는 ‘파송된 그리스도-아이들’(153), ‘바틀비-그리스도(348)’등을 절멸시키려는 의지를 꺾고, 계속해서 그 입지점을 ‘다른 곳에’ 세움으로 ‘사랑의 시도’(291)를 이어 나가는 그 말로 읽도록 하자. 그 ‘다른 곳’이란 김영민이 정의 내린 ‘세속’이 가리키는 바, “스치고 섞이면서 만날 수 없고, 겹치고 묶이면서 만날 수 없고, 손을 잡고 혼인하면서 만날 수 없고, 악수를 하고 계약을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어긋남의 표상. 내 속에 있으면서도, 아니,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너와의 아득한 거리에 대한 표상”[각주:4]이며, “개인의 호의 앞에 무력한 관계의 구조 곧 그 애틋하고 알뜰했을 호의가 속절없이 부닥치는 벽” [각주:5]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윤인로의 책 『신정-정치』(갈무리)에 관한 서평입니다. [본문으로]
  2. 오월어머니집과 5·18 민주유공자 유족회 등 5·18 단체 회원들이 지난 11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조속한 세월호 선체 인양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팽목항에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라는 제목으로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펼침막을 내걸었다. 사진=5·18 기념재단. 연합뉴스 원문보기: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6508.html#csidx1afe6d7bc52ceb493856a24879f17e8 [본문으로]
  3. K. Marx,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헤겔 법철학 비판』, 강유원 옮김, 이론과 실천, 2011. 25쪽 [본문으로]
  4. 김영민, 『동무론』, 한겨레출판사, 2008, 164쪽. [본문으로]
  5. 앞의 책, 16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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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우파'와 대형교회, 다섯 번째[각주:1]


'주권교인'과 귀족영성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성령운동의 역사와 자본주의


    신사도운동(new apostolic movement)적 성령운동 이론가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20세기 북미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의 역사를 3번에 걸친 ‘물결’(wave)로 유형화했다. 그에 의하면 ‘제1의 물결’은 1900년대 초의 ‘오순절운동’, ‘제2의 물결’은 1960~1970년대의 ‘은사주의운동’, 그리고 ‘제3의 물결’은 1980년대의 ‘신사도운동’이다. 한데 여기서 신사도운동은 그 기원을 1980년대로 소급할 수 있으나 1990년대에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으니, 시기를 정정하는 게 낫다.

    한편 피터 와그너가 말하는 성령운동을 내 식으로 말하면, 개신교적 감성이 일으킨 종교적 열광주의 현상이다. 소리의 현상인 방언, 몸의 현상인 경련, 그리고 그런 현상과 결합해서 나타난 몸과 정신의 치유 등이 성령운동의 핵심적 구성요소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시기다. 성령운동의 첫 번째 물결이 휘몰아치던 시기는 미국의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 이들이 자본주의의 야만적 폭력성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던 때다. 두 번째 물결은 소비사회로의 이행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배제와 박탈의 새로운 양상이 심화되던 시기에 일어났다. 그리고 세 번째 물결은 신자유주의적 체제로의 변동이 폭력적으로 진행되던 때다. 요컨대 세 번의 성령운동의 물결은 모두 자본주의적 구성 양식의 급격한 변화와 관련이 있는데, 특히 그 변화 과정에서 심각한 고통의 상황에 놓인 이들 사이에서 성령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이성적인, 즉 계산 가능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개신교적 감성의 정치를 통해 폭력으로부터의 해방구를 찾아내려는 현상이 바로 성령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때 성령운동의 지도자는 대중의 감성을 집단적으로 고조시키는 전문가다. 그이를 매개로 해서 성령운동의 대중은 절망이 희망으로 반전되는 몸과 정신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물결인데, 이와 관련해서 하나 더 이야기할 것이 있다. 앞의 두 번의 물결은 자본주의적 변화 과정에서 주변화된 대중 사이에서 더 강렬하게 발생하며, 그 지도자들도 그런 체제에서 배제된 자 중의 하나였다. 한데 놀랍게도 세 번째 물결의 주요 대중은 사회적으로 결코 주변화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자산능력을 보유하고 좋은 직업을 가졌으며 향후에도 상승 가능성이 막힌 이들이 아닌 계층 출신이 많다. 그리고 지도자들도 대개 매우 성공적인 사회적 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한국에서 1970~1980년대에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성령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조용기와 순복음교회다. 그의 성령운동의 출발점은 1954년, 전후(戰後) 사회적 보건의료체계가 철저히 붕괴된 상황에서 방언과 병고침으로 유명했던 나운몽의 성령운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성령운동을 포장하는 신학적 서사를 채운 것은 미국의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적 성령운동의 담론이었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물결의 담론이 결합되어 조용기 현상의 서사를 구성한 것 같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시민K, 교회를 나가다》를 보라.)


신앙의 감성적 기획으로서의 ‘귀족영성’과 1990년대


    한편 신사도운동적 성령운동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80년대 초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부 성령운동 계열의 선교전문 신앙단체들에 의해서다.(마라나타선교회, 예수전도단 등) 하지만 1980년대 말 온누리교회가 ‘경배와 찬양’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이 프로그램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교회 성장의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고, 1990년대 말 이후 전국적인 붐을 일으켰다.

   ‘경배와 찬양’이란, 예배의 모든 요소가 설교자에게 집중되어 있는 전형적인 예배 형식을 파괴하고, 설교자만이 아니라 찬송, 공간구성과 운용, 조명 등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따로 그리고 서로 간섭하며’ 일으키는 메시지 효과를 통한 해체적 예배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워십 디자이너라는 기획자의 전문적 역할이 중요하다. 아무튼 이러한 해체적 예배 기획은, 설교자의 말을 통해 이성적 해석을 자극하는 개신교의 전통적 예배 양식과는 달리, 예배참여자의 감성을 자극하여 종교적 메시지를 체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성령운동과 친화적이다.  

    그렇다면 왜 성령운동과 친화적인 종교성이라는 캐릭터를 갖는 온누리교회에 수평이동을 거듭하던 교인들이 정착하게 된 것일까? 앞의 연재글에서 말했듯이, 이들 수평이동을 반복하던 교인들은 정보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이들이며, 그러한 능력에 걸맞게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이들이 많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은 종교시장에서 이들의 까다로운 종교성을 유념하며 종교상품적 이미지로서의 교회적 캐릭터를 창출한다. 즉 이들은, 소비사회의 소비주체적 시민에 대응되는, ‘주권교인’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왜 사회적 소외계층들이나 선택한다는 성령운동적 신앙에 집단적으로 매료된다는 것인가?


   한국계 독일 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는 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무한긍정의 정신으로 무장하며 더 높은 성과를 위해 끊임없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상을 강조한다. 성공한 자라고 멈추거나 속도를 늦출 수 없다. 그 순간 그이는 추락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를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가 바로 신자유주의적 세상이다. 하여 이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든 쉼 없이 자기를 불태우며 노동해야 한다.  

    문제는 노동의 대열에서 낙오된 자만이 추락의 위기를 겪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낙오되지 않으려면 성공을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몸과 정신의 자원이 과도하게 소진되어 버림으로써 ‘추락’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많은 이들이 소진성 질환에 걸린다. 소화기 계통의 질환들, 대사증후군(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심혈관계 질환, 우울증, 조울증 등에 시달리는 것이다. 나아가 소진성 질환에 걸리지는 않았어도, 추락의 예감 속에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말했듯이 이들은 일터에서 밀려나고 가족이 파괴되고 사회적 관계가 무너진 자들이 아니다. 아니 그 반대다. 무기력증이나 소진성 질환 같은, 이미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추락한 이들이 더 잘 걸린다는 증상에, 모든 것이 건재한 듯 보이는 중상위층의 귀족적 시민들도 고통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이러한 증후는 1997년 외환위기와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경배와 찬양’으로 표상되는 온누리교회적 영성이 전국화된 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즉 중상위계층 사이에서도 소진성 질환이 만연한 가운데 이러한 질병의 치유를 위한 종교적 기획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온누리교회의 성령운동은 그 중 가장 성공한 종교상품에 속한다. 예배에서 무대와 객석, 대중과 설교자로 양분되던 중심-주변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설교자의 강론에 집중되었던 메시지가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들 속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특히 ‘경배와 찬양’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찬양은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일렉트릭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가 중심축을 형성하여 건반과 타악기와 어우러지고 이것을 율동 섞인 찬양대의 팝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예배 대중의 감성을 자극한다. 대중은 찬양대와 함께 노래하고 율동하면서, 찬양대의 관람자인 동시에 일원이 된다. 그리고 찬양 이끔이가 그 사이사이에 간단명료한 멘트를 던져 대중과 함께 하는 경배 예배의 메시지를 명료히 한다.  

온누리교회의 '경배와 찬양' 집회


손기철 장로 집회에서 그의 안수에 쓰러지는 교인들


    이 멘트들은 네러티브 없이 한두 단어, 한두 문장 정도에 그친다. 하여 그 멘트는 전체 예배 속의 일부이면서도 예배에 견고히 묶여 있지 않고 따로 튀어나와 예배 대중의 개인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하여 예배 대중 개인이 겪고 있는 실존 상황과 맞부딪친다. 그런데 그 멘트의 내용은 대부분 축복과 윤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하여 예배 대중은, 전통적 예배의 집단성과는 달리, 개개인을 호명하여 축복을 선사하며 삶의 신앙적 규범을 부여하는 예배와 만난다. 이것이 ‘경배와 찬양’이 만들어내는 예배의 이팩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치유의 작용이 시작된다.

    한데 종종 이 예배는 보다 본격적인 치유집회와 만난다. 온누리교회에도 손기철 장로라는 과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전문적 치유사가 활약했다. 목사 자신이 퇴마사(exorcist)였던 은사주의적 교회들와는 달리, 한 평신도가, 그것도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이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최근에는 그의 집회에 이단시비가 일면서 그의 집회는 온누리교회와 분리되었지만, 초기에 이것은 이 교회 성장의 주요 요소였다.  

    그의 집회는, 방언과 경련 등이 뒤섞이면서 무질서한 상태에서 은사체험과 치유가 일어나는 전통적인 치유집회와는 달리, 매우 질서 있게 진행되며 윤리적 강론의 비중이 매우 크다. 또 일반적 은사주의 퇴마사들은 병원의 치료(therapy)와 적대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는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가르지 않고 치유(healing)와 병행할 것을 권고한다. 현실의 모든 것을 상실한 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의지하는, 하여 일반 의료체계와 극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치유를 실현하려는 은사주의적 치유집회와는 달리,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축복의 징표를 얻어낼 수 있고, 사회 질서에서 일탈하지 않는 윤리적인 삶에 대한 요청이 동반된 축복이 강조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집회는, 제3의 물결에 속하는 일반적 성령운동처럼, 자신의 것을 다 걸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신앙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온누리교회가 표상하는 성령운동의 영성은 귀족적이다. 신앙에 삶을 다 걸지 않아도 되는 이들에게 닥친 삶의 위기를 축복으로 되돌려준다. 동시에 축복의 수혜자들에게 윤리를 부과한다. 즉 온누리교회적 귀족영성은 신비체험이자 윤리적 재무장의 과정이다. 내가 이 연재 서두에서 강조했던 중간범주의 존재들이 윤리를 통해 웰빙적 삶을 추구하고 나아가 사회의 계몽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것과 잘 결합되는 신앙의 양식이 이 교회의 귀족영성 속에 구현되고 있다.


캐릭터 교회들과 신자유주의


    1960~1990년 사이 대성장기에 대형교회들은 대개 유사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있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독재자의 그것처럼 일종의 영웅주의가 대성장기를 이끌었다. 한데 ‘주권교인’들이 수평이동을 거듭하는 가운데 그들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대교회들은 종교시장의 상품으로서 교회를 대외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캐릭터를 필요로 했다.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그런 현상을 선도했던 대표적 교회들이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주간경향>에서 연재하고 있는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의 다섯번째 글입니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6271603271&code=1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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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결단식 앞에서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4.16 세월호 유가족 협의회가 지금 광화문에서 “사생결단식”을 하고 있다. 사생결단(死生決斷)이라는 말과 단식(斷食)이라는 말이 합쳐 사생결단식이라 했으니, 살든지 죽든지 끝까지 가서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단식하겠다는 뜻이다. 왜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생결단식"이라는 엄청난 표현을 써가며 단식해야 할까? 효과적인 단식이 되려면, 희생자들을 포함한 많은 보통 사람들의 공감의 바탕 위에서, 그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권력자들이나 억압자들을 향해서 호소하고 저항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단식의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진실을 향한 공통의 인식이 얻어지고, 끝내 화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출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는 것이 단식이다. 하지만 "사생결단식"이라는 타이틀을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희망보다는 염려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슴 속에 자신들이 공감을 얻고 있다는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실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끝내 소통하고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사생결단식이라는 이 무거운 이름을 내걸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단식을 시작하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사생결단식을 시작하며>라는 글을 몇 번이고 읽었다. 사생결단식을 감행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배후가 하나 둘 그려진다. 온갖 방법으로 진실을 감추려고 하고, 진실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이 시대의 권력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진실보다는 권력이 중요하고 백성을 진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을 원할 뿐이라는 민중 개돼지론도 버젓이 활개치고 있다. 더 나아가 진실로부터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힘과 권력으로부터 진실이 나온다고 강변하면서, 먼저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 진실을 문제 삼겠다는, 그래서 먼저 권력을 달라고 외치는 소위 국민이 뽑은 대표들도 있다. 그리고 먹고 살기에도 바쁜데 진실이 뭐 그리 중요하냐며 말없이 힐난하는 눈빛들이 그 성명서의 배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의 확산을 애써 가로막고 서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찌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뿐이겠는가? 노동현장 곳곳에서, 내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우리 서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이야기 해보자는 외침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공감과 메아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적다.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가 들어주지 않고 공감하지 않는 문제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정치와 언론의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바라보고 듣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마치 인정 받지 못하는 증언이나 순교처럼,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나 대가처럼, 메아리도 없이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자신의 인간됨을 주장하면서 그리고 사람 대 사람의 진정한 만남과 대화를 요청하면서, 지금 거리에 서 있는 저 사람들이 이 무관심과 무공감의 시간을 얼마나 오래 견뎌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호된 시련이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묻고 있다. 정말로 이 세상이 인간이 살만한 세상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 이런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당신들이 정말로 인간일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관심과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무기력 앞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속으로 까맣게 타 들어간 이들의 분노가 지금 절망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생결단의 단식에 몸을 던지는 저들이 세계와 공동체와 인간 삶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진실을 향한 염원에 연대하는 길뿐이다. 하지만 이 공감과 연대의 길은 우리 자신이 지금 맺고 사는 모든 관계들의 변혁을 통해서 가는 길이다. 지금 우리는 모래 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그렇게 고립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기 위해서 수 많은 연결 다리를 놓고 있다. 하지만 그래 보아도 잠시 스치듯 만날 뿐, 결코 서로를 향해 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매우 간접적이고 사물화된 접촉이 있을 뿐이다. 그처럼 간접화되고 사물화된 관계를 넘어, 직접적이고도 긴밀한 인격적인 만남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서는, 서로 간에 진정한 공감과 연대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공감과 연대를 가로막는 엄청난 힘들 앞에서 우리는 지금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찌즘, 피시즘, 종교와 같은 신념의 체계들은 그 신념이 만들어 내는 불타는 증오심으로 수 백만을 살해했지만, 자본주의는 그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지금도 살해하고 있다고 보는 유발 하라리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와 권력으로 일컬어지는 사물을 향한 탐욕은 우리를 눈 멀게 하고 귀 멀게 하고 우리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왜곡한다. 만물을 생명과 인격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사물로 바라보게 하고, 공약 가능한 수나 양으로 바라 보게 만든다. 그래서 김포 공항 청소 노동자들은 온갖 수모와 착취를 견디다 못해 그저 "인간대접을 받고 싶다"라고 하였다. 임금 얼마에 모든 것을 포기한 노동기계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 달라고 하였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며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을 뿐이다. 


    사물에 대한 욕망이, 우리들로부터 관심하는 능력과 공감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 그 결과를 나향욱 기획관은 숨김없이 증언하였다. 그는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어떻게 자기 자식처럼 생각될 수 있냐고 반문하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라 하였다. 그에게 관심과 공감은 위선이다. 그에게는 사람과 사람이, 인격과 인격이 모든 장벽을 뚫고 서로 간절하고도 긴밀하게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생명과 생명이 만나서, 새로운 삶의 공동체, 곧 우리가 이야기하는 코이노니아나 코뮤니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우리들의 마비된 관심능력과 공감능력의 실상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들과 함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능력을 마비시키는 또 하나의 질서가 오랜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인간의 유한함, 불완전함, 혹은 다 알지 못함이 가져다 주는 불안과 두려움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언제나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두려움과 불안은 오히려 보다 높은 의미와 지혜를 추구할 가능성, 서로간에 보다 긴밀한 만남과 협력을 이루어낼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코이노니아, 코뮤니온, 페리코레시스 등과 같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에 대한 이상들은 바로 그와 같은 유한함의 두려움과 불안이 만들어내는 건강하고도 창조적인 생산물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억압적인 권력이 조장하는 두려움과 공포는 그 백성들을 끊임없이 노예로 만든다. 그리고 그 노예들 사이에 인격적 공감과 연대가 자라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한다. 전제정치 이데올로기나 분단체제의 이대올로기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지배를 벗어나면 곧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협박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체제다. 분단의 적대관계는 우리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 시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도 포기하도록 만들어 왔다. 사드 배치가 전쟁을 막는 수단인지 전쟁위험을 높이는 수단인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애국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인간과 생명들을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가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반도는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니라, 국제적 헤게모니 쟁탈전을 위해서 언제든지 전쟁터로 만들 수 있는 땅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물신주의와, 분단체제의 적대주의가 서로 돕는 가운데서,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볼 수 있는 힘을 점점 잃어 왔던 것이리라. 이데올로기적 강제와 무절제한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폐적 각자도생의 길을 있는 힘을 다해 찾아야 했고, 그러는 사이에 사회적 책임, 공감, 죄책감등을 때때로 표현하기는 했어도, 그것들이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은밀하게 세뇌하였다. 그래서 도덕적 윤리적 책임의식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태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왔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과대망상으로 치달아, 어떤 공감능력도 없이 세상을 자기 멋대로 심판하는 사이코패스적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이미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세상이고 삶이라면, 사생결단식이라는 말이 오히려 위태롭고 불안하게 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현재의 상황을 참으로 위태롭다고 느끼는 내가 어쩌면 과도한 상상에 사로잡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민중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분노는 자기 파괴적 폭발의 가능성과 자신과 세상의 삶을 변혁하는 새로운 힘으로 솟아 오를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배웠다. 사실 민중은 자기파괴적인 폭발의 가능성을 억제하여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지금도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달라고 외치는 그분들과, 사생결단의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이미 그와 같이 자신의 고통을 뜬 눈으로 직시하면서, 지금의 고난을 새 희망의 밑거름으로 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나찌의 억압하에서 아무도 들어주지도 공감해 주지도 않는 유대인들의 고통과 분노를 바라보면서, 마르틴 부버는 억압의 반대는 자유가 아니라 코뮤니온이라고 하였다.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각자도생의 삶으로 도피하는 길이 아니라, 끝내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이루어 내는 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미 민중은 그 길을 가고 있다. 각자 도생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향하여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진정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며, 진실을 향해 가는 길을 향해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제 응답해야 할 우리다. 이미 길들여진 무관심과 무공감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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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람'을 이야기해야 한다.

 



양권석

(본 연구소 소장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아직도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대세다.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기에 사고는 빨리 처리하고 정상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당위다. 진도 앞바다 동거차도의 산 언덕에서 맹골수도의 선체인양작업을 내려다 보며 부릅뜬 눈을 잠시도 닫지 못하는 유가족들. 바다 속에 잠긴 진실의 온전한 인양을 바라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딱딱하게 굳을 대로 굳어버린 시대의 가슴을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장사하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업과 시장에 보다 많은 자율과 자유를 주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일정한 생명의 파괴, 인격의 훼손은 모든 과정에서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보편적 동의하고 있는 인식이다. 그래서 국가와 정부도, 법과 학문도, 자신들이 사람과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과 기업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세상에서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는 가족들을 지켜 보아야 했던 옥시사태의 유가족들, 부모와 배우자와 자식을 잃고 거리에 나선 그들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생명과 인간의 훼손과 죽음을 방조하는 이 사회를 향하여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사람을 자원으로 상품으로 표현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기는 시대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생각이 그만큼 무섭게 변했다. 인격이나 생명이기 이전에 물건이나 상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지배적이다. 상품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듯, 사람들도 그렇게 경쟁한다. 상품에게 인격이나 생명과 같은 의미를 담지 않듯이, 경쟁하는 사람들도 인격이나 생명과 같은 의미들은 의도적으로 잊어야 한다. 상품이되고 물건이 된 사람들 사이의 경쟁, 여기가 바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빈부격차가 들어서는 곳이고, 조현병이라는 분열과, 묻지마 폭력과 오도된 혐오가 등장하는 자리다. 지난 5월 17일 서초동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이유도 모른 채 무참하게 살해당한 그 젊은 여성은 사람 사이의 관계가 혐오와 증오가 되고 강간이되고 폭력이되고 살인이 되어 버린 우리 시대의 희생자다. 경쟁관계가 폭력적 관계로 변화하고 있는 시대라면, 지금 우리는 우연히 살아 있을 뿐인 것이다. 


    지난 5월 28일 구의역, 위험한 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혼자서 일을 하다가, 달려오는 전차와 스크린 도어 사이에 끼어 숨진 19살 청년 김군. 49개의 지하철 역의 모든 스크린 도어를 단 여섯 명이 그것도 신고가 들어오면 1시간 내에 달려가야 한다는 계약이었다. 그래서 2인1조 작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물리적으로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이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비용으로 계산할 때만 가능한 계약이고 약속이다. 그 청년이 들고 다니던 갈색 가방과, 그 안에 필요한 작업도구들 사이에 보여지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는 우리들의 삶의 실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공기업 민영화의 참혹한 실상이 거기에 있었고, 이미 가질 것 다 가진 퇴직공무원들의 전관예우를 위해, 상위 포식자들의 밥상을 위해 그 젊은 몸과 마음에 착취와 상처를 안기는 세상이 보였고, 끝내 열 아홉 젊음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는 폭력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시편의 한 구절이 아리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시 42:3) 우리 시대가 던지는 조롱은 이보다 더하다.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는 정도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인격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며 비웃고 있지 않는가? 모든 것을 팔고 소비하는 시대에, 상품과 소비자만 있을 뿐 사람은 없다고 빈정대고 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상품처럼 생각하고, 상품처럼 행동하고, 상품처럼 관계 맺도록 교육하고 있는 사회다. 가장 인간적인 것마저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고 시장에서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다. 시장에서 소비자로서의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윤리적 한계나 도덕적 절제의 요구에 의해서도 구속 받지 말아야 하며, 인격이나 생명의 신비 같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인간 죽음의 허무가 지배하는 시대다. 소유와 소비를 통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 물질 신의 지배 하에 살아가고 있다. 무한 소유와 무한 소비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상품선택과 경쟁의 무한 자유를 수단으로 허락하고, 그 무절제하고 무자비한 자유가 만들어내는 폭력이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더욱더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세계다. 


    이처럼 시장과 소유와 소비가 인간과 생명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인간과 생명을 폭력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이곳에서 다시 인간을 말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구입가능하고 대체 가능한 상품으로서 인간에 대항해서 인간의 참모습을, 상품선택의 자유에 대항해서 인간 자유의 참 모습을, 상품적 가치판단과 경쟁관계에 대항해서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비젼을 새롭게 다듬어 내야 한다. 신학과 철학의 오랜 전통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부족함과 유한함이 인간의 자기파괴나 자학 그리고 경쟁적이고 폭력적인 인간관계의 이유가 아니라, 서로간에 보다 깊이 나누며 참여할 수 있는 참된 인간 관계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오랜 신념 위에 다시 서서 인간과 생명의 그 대체불가능한 신비를 다시 숙고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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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붙여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정의와 도덕이 시장과 만날 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안기순 역, 와이즈베리)을 읽는 내내 샌델이 인용하는 수많은 사례들 앞에서 먼저 그의 성실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사례들을 수집하고 검토하고 분석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사실 이 책이 제기하는 쟁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샌델의 저작들, 가령 공전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나 『왜 도덕인가?』를 읽은 사람, 혹은 샌델의 하버드 강의 동영상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 제목만 봐도 샌델이 이 책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샌델의 2012년 최신작『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부제는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시종일관 유지되는 중심적인 쟁점은 “시장화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시장화(혹은 상품화)로 인해 인간과 사회에 나타난 폐해는 무엇인가?”로 정리할 수 있다. 그 폐해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된다. 첫째는 불공정성(또는 불평등성)이고, 둘째는 (가치 또는 도덕적 선의) ‘부패’ 또는 ‘타락’. 샌델이 시장화(상품화)의 폐해를 불공정성과 부패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그의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에서 제기된 두 가지 테마, 즉 ‘정의’와 ‘도덕’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이르러 마침내 “시장”, 더 정확히는 “자본”의 문제와 만남으로써 더욱 중요한 정치철학적 논의의 장(場)을 열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는다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시장지상주의’,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낸 삶의 방식,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도덕적 (판단의) 위기를 전세계에서 수집한 사례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러나 매번 조금씩 다르게 제시한다. 물론 우리에겐 시장지상주의와 같이 그 의미 전달 방식에 있어 상당히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차라리 훨씬 ‘추상적인’ 어떤(?) 단어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더 친숙할지 모른다. 시장지상주의라는 협소한(?) 혹은 소박한(?) 표현으론 도저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과 그것이 만들어낸 우리네 삶의 현실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모두들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을 터. 그 단어가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명칭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구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수한 폭력과 야만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그 이름. 바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다.
 
그러고 보면 샌델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이상하리만치 잘 안 쓰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자유주의라 말하지 않고, ‘시장화’니 ‘시장지상주의’니 또는 ‘경제화’니 하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선 너무나도 소상하게 밝혀내며, 그 여파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사회적 토론을 제기하지만, 정작 샌델은 그런 시장(지상주의)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에 의해 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시장화나 경제화 같은 용어들이 아무리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편리한 용어라 할지라도, 거기엔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법률, 사회적 관습 등을 포함하는 각종 제도나 국가의 정책,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적 신념 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통치성’(governmentality)이라 명명된 분석틀을 가지고 (신)자유주의 분석에 몰두했던 말년의 미셸 푸코와, 그런 그의 작업을 계승해온 일단의 연구자들에 따르자면, 신자유주의는 일련의 경제학적 논리들과 정치-사회적 실천들을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개개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특정한 주체화의 테크놀로지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사회적 주체성 형성의 관점에서, 즉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출현한 특권적인 권력작동방식이자 주체생산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목도하는 오늘날의 주체성의 다종다기한 형상들이 결국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political rationalities) 또는 통치이성(governmental rationality)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각주:1]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샌델의 책에는 사태의 ‘결과 보고’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넘쳐나지만, 사태의 ‘원인 분석’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샌델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것들, 다시 말해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을 때 도덕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를테면 우정이나 인간의 장기(臟器), 어린 아이들, 명예, 대학 입학허가 등)에 대해 소개하면서, 시장화에 반대하는 논리의 주된 근거를 공정성과 부패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을 살펴보자.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살펴보려면 이 두 가지 논쟁을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정성에 관한 반박에서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조건이나 경제적 필요성의 긴박한 정도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 때 생겨날 수 있는 불평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시장 교환은 시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항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농부가 굶주리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자신의 신장이나 각막을 팔겠다고 동의할지 모르나 정말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사실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불공정하게 강요받았을 수도 있다. […] 공정성과 관련한 논거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은 동의, 좀 더 정확하게는 공정한 조건하에 이루어지는 동의이다. 시장을 이용한 재화 분배에 찬성하는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시장이 선택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다양한 재화를 주어진 가격에 팔지 말지를 사람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 (157~158쪽)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표현이다. 대체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왜 만들어진 것인가? 물론 샌델은 그런 질문을 던지진 않는다. 이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패에 관한 반박은 다르다. 이는 시장의 가치평가와 교환이 특정 재화와 관행을 변질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박에 따르면 특정 도덕적 ‧ 시민적 재화는 사고파는 경우에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된다. 부패에 관한 논쟁은 공정한 거래계약 조건이 성립됐다고 해서 충족되지는 않는다. 평등한 조건과 불평등한 조건 아래서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 여기서는 동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치 평가와 교환 때문에 변질되었다고 여겨지는 재화의 도덕적 중요성에 호소한다. […] 부패 논쟁은 재화 자체의 특성과 재화를 지배하는 규점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공정한 거래 조건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힘과 부에 불공정한 차이가 없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157~159쪽)

샌델은 공정한 또는 평등한 거래계약 조건이라는 것을 가정하고서, 다시금 그 조건 하에서도 여전히 시장화로 인한 도덕적 위기는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샌델의 질문은 시장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까지 나가야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정한 계약조건을 가정하면서, 시장 안에 근본적으로 내속하는 부정의나 불평등성,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착취’와 ‘계급적대’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고, 공정한 계약조건 속에서 재화의 본래적 사용가치가 왜곡되고 부패하는 문제로 건너뛴다.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는 순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화폐가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물건은 그것의 쓸모(사용가치)가 아닌 시장에서의 교환가능성(교환가치, 즉 상품가치)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모든 물건의 교환가치는 화폐 속에만, 그리고 그 물건의 사용가치는 상품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것은 샌델이 말하는 식으로 시장지상주의사회가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공정한 계약조건’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공정한 계약조건’이라고 하는 샌델의 전제 자체를 의심하고 싶다. 시장에서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데 자발적으로 계약한 주체들의 실천이 정말로 실천 그 자체로선 아무 문제가 없는 평등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일까? 어쩌면 그들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생존 기회를 발견하려는 고투 가운데서, 그런 계약을 자발적으로 그러나 사실은 체제가 규정한 틀 안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즉 생존을 우선시한 전략적 타협의 일환으로 선택을 요구당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계약이 체제가 설정한 행동의 범주 밖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자율성과 타율성이 복잡하게 뒤섞인 체제와의 치열한 협상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치 않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주체의 순수한 자발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그 선택이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체제 내지는 사회가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 자체를 뛰어넘은 차원의 것, 다시 말해 체제의 질서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다소 극단적인 논리임을 인정하지만, 우리가 ‘자발성’이라는 말에 담긴 ‘자유’의 의미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주체가 그런 자유의 행위(act)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윤리학 본연의 의미에 입각한 윤리적 주체, 또는 주체의 윤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체제가 설정한 행동의 경계 자체를 뛰어넘는 윤리적 선택, 그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얻게 되는 체제의 질서 바깥이란 곧 상징적/사회적 ‘죽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바꿔 말하면, 윤리적 주체의 탄생은 ‘죽음’ 이후에야 도래한다는 것을. 이를테면 오늘날 널리 회자되는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개개의 노동자들은 자기계발과 자기향상을 위해 노동 이외의 여가시간까지 모두 희생하여 자신에게 끊임없이 투자하고, 스스로의 비용과 편익을 철저하게 결산하며 삶을 관리해나가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살아간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노동자들의 이러한 자기계발은 철저하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인적자본으로서 노동시장 안에서 높은 상품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는 체제의 질서를 내면적으로 규범화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기계발이 과연 자유로운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체제에 의해 주체의 외부에 설정되어 있던 선택지의 조건을 개개인들이 벗어나는 순간, 그들이 맞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죽음’이 아니고선 현재로서 이 체제의 질서 바깥으로 완벽하게 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체제가 우리의 외부에 배치하고 규정해놓은 질서나 구조를 우리는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부자유한 조건 속에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따라서 탈주=죽음이라고 하는 위험이 뻔히 예측 가능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제 안에서 개인들의 자발적인 계약이란 순전히 공정한 것도, 완벽하게 평등한 것도 아닌, 차라리 반(半)강제적인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시장에 대한 도덕적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러한 우리의 삶의 조건, 즉 과거에만 해도 비(非)시장적 규범에 지배받던 삶의 영역들에까지 시장원리가 파고든 오늘의 현실이 과연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부터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질문은 앞서 말한 이러한 삶의 조건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 제도적 차원의 메커니즘, 즉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자본의 새로운 지배양식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덕적 분노를 넘어 신자유주의 분석으로
 
샌델은 차마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그 신자유주의를 푸코의 통치성 이론의 관점에서 정리한다면, 그것은 곧 시장의 논리를 사회 전체에 공고히 하기 위해 국가가 법적 개입을 통해 제도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국가 개입의 원리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는 그 체제 내의 개인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수단으로서, ‘경쟁’이라고 하는 시장의 제일원리를, 사회에 성공적으로 ‘접합’시킴으로써 탄생한 새로운 방식의 통치양식인 것이다. 요컨대 시장경쟁의 원리를 사회 전면에 강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전에 없던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한 상품화가 시작된 것인데, 그러한 사회의 시장화란 결국 자본이 국가를 통해 새롭게 구축한 통치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굳이 푸코의 논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샌델의 저작이 갖고 있는 이론적 결핍을 지적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예컨대 독일의 비판이론가 하버마스는 샌델보다 수십 년 앞서 후기자본주의의 구조적 병리성의 본질을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테제로 요약한 바 있다[물론 푸코도 자신의 신자유주의 통치성 분석을 통해 '경제적인 것'에 의한 '사회적인 것'의 포괄, 즉 정부(통치)에 의한 시장원리의 전면적 증식에 대해 말했지만]. 난해한 푸코의 통치성 분석까지 끌어올 필요도 없이, 하버마스의 저 간명한 테제만 갖고도 샌델이 변죽만 울리고 있는 “시장이 비시장적 영역으로 확대되는 현상”의 원인 분석을 훨씬 구체적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하버마스에 따르면,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들 사이의 합리적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유지되어온 또는 그렇게 유지되어야 할 생활세계는 이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하는 체계 논리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그 결과 문화, 사회, 인격이라고 하는 생활세계의 구성요소들이 파괴되며, 결국 문화적 의미상실, 사회적 규범들의 정당성 훼손, 개인의 인격성 파괴, 사회적 관계들의 물화(物化), 시민에 의한 비시민의 사회적 배제, 배제된 자들의 자기 소외 내지는 타자화 현상들이 나타난다.[각주:2] 물론 이런 현상들은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전후 복지국가에서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온 후기자본주의적 통치성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가 샌델의 시장지상주의 테제보다 훨씬 분석적으로 가치 있는 이유는 적어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식민화시켜버린 체계를 말함에 있어, 그 체계의 하위범주에 시장만을 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킨 체계는 경제체계와 행정체계,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근대국가의 관료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중적 체계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문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 속에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한 이중적 체계가 생활세계로 침입하여 그것을 식민화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시장의 단독적인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 국가의 시장정책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란 점이다.
 
샌델의 책이 주는 많은 교훈과 장점들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만 읽고선 우리 시대의 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늠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건 시장지상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바꿔 읽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가능하리라 본다. 다만, 신자유주의가 언제부터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계약조건의 불공정함이나 도덕적 가치 판단의 부패를 넘어) 우리 삶의 위기의 핵심적 요체가 무엇이고,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을 탐구하려는 자극과 동기를 제공해준 것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 이상의 가치를 이 책에서 찾는 것은 글쎄…

ⓒ 웹진 <제3시대>

 


  1.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8-1979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0); 사카이 다카시/오하나 역, 『통치성과 자유: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서울: 그린비, 2011). [본문으로]
  2. 위르겐 하버마스/장춘익 역,『의사소통행위이론 2: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서울: 나남, 20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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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難民, Refugee)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J는 탈북자이다. 나이는 25, 신장은 162-3cm 정도로 남자로서는 작은 키이고, 턱뼈가 유달리 발달한 강인하고 초롱초롱한 눈매를 지닌 청년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3년전이었다. 우리학교(시카고 신학대학원) 한인학생회 주관으로 채플실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초청강사로 그가 왔었다. 북한의 실상과 탈북과정등을 이야기 하면서, 북한 관련 필름을 보여줬는데 많은 미국 친구들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 후로 나는 그를 우연찮게 2번 더 만났고, 지금은 내가 몸담고 있는 이민교회 청년부 회원이다.

 

어느 정도 나에 대한 경계가 허물어지고 난 이후,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하나씩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13살 때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떠돌아다녔다는 이야기, 그러다가 다시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북한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 다시 북한을 탈출한 이야기, 중국을 다시 떠돌다가 어느 선교단체를 만나 그곳에서 5년간 기거하면서 주님을 영접했다는 이야기, 후에 중국본토를 종단하여 황하를 건너고, 메콩강을 지나 태국에서 망명신청을 했다는 이야기, 태국에서 한국 or 미국으로 망명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택했던 이야기등등.

 

학창시절 지리시간이나 역사시간에 배웠던 나진, 선봉, 두만강, 연변, 북간도, 청도, 북경, 황하, 메콩강 등등의 지역을 지도에 새기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J를 보며 나는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에 성공했고, 망명하자마자 미국 영주권을 받았으며, 영주권 취득 후 5년 만인 올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래서 행복하단다.

 

 

미국 시민권자 J가 어느 날 내게 오더니

 

J: 목사님, 중국(연변)에 다녀오려구요

I: ?  

J: 아버지를 보고 오려고 합니다 

I: 어떻게? 

J: 브로커와 연결이 되어 북에 있는 아버지와 8년 만에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서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I: 어디서 만나겠다는 건데? 

J: 브로커를 통해 아버지가 두만강을 건너 연길로 나오면 제가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는 겁니다  

I: 그게 가능하니? 

J: 몇 가지 위험요소가 있지만 가능합니다. 돈이 좀 들지만

I: 잡히면?  

J: 글쎄요~ 미국 시민권자인데

I: “미국이? 너를? 웃기지마!” 

J: 그래도, 이제는 못 참겠습니다

I: 너는 그렇다 치고, 너의 아버지가 잡히면 어떡하니?

J: ……

I: 참아! 가지 마! 

J: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J는 중국으로 갔고, 아버지는 못 만났고, 브로커는 연락이 두절이고, 돈만 날리고 다시 열흘 만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가지 소득이라면 두만강 건너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며 그곳 사람들을 보고 온 것이 그나마 위안이란다. 그러면서, 내게 작년에 단행된 북한의 화폐개혁 후에 발행된 모든 북한의 지폐와 동전을 모은 화첩을 선물이라고 내밀었다. 두만강변에서 판매하는 것을 사왔다고 했다. 김일성, 천리마동상, 개선문, 김일성생가뭐 그런 그림들 위에 1000, 2000, 5000원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갖고 있으면 국가보안법 위반인가? (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알려주시기를) 하마터면 자기가 알고 있는 두만강변 비밀 루트를 통해 북으로 건너갈 뻔했다는 말을 J는 마지막에 덧붙였다.

 

그는 그곳의 뭐가 그리 그리운 것일까? J가 알고 있다는 두만강변 비밀루트는 정말 안전할까? J는 어떻게 자신 안에 있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증오를 동시에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날 들었던 생각이었고, 그 생각들 때문이었는지 그날 밤 나는 두만강변 비밀루트를 건너다 적발되는 악몽에 잠이 깨었다.


 

미국에서 인간을 분류하는 몇 가지 방법에 관하여

 

미국은 알다시피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너무나 잡스러운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오기에, 그들은 나름대로 국경을 넘어오는 인간들에 대한 검열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다. 일단, 나 같은 유학생들에게는 F-1 비자를,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H 비자를 제공한다. 전자가 학교에서 외부자의 신분을 보증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회사가 그()의 신원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밖에 종교인들에게는 R비자, 무슨 각종 연구원에게는 J비자, 그리고 여행객들은 여행비자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이보다 나은 신분상태는 영주권자이고, 영주권 취득 5년이 지나면 시민권 신청을 할 수 있다. 미국사회에 정착했다 함은 영주권 이상의 신분 취득을 의미하고, 흔히 그린카드로 불리는 영주권 쟁취를 위한 갖가지 정보와 속임수와 탈법과 묘책이 횡횡하는 사회가 미국사회이다. 엄격히 말하면 영주권, 시민권자는 이민자, 그 외 나머지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행자라고 볼 수 있다. F-1, H, J 비자 모두 미국체류가 만료되는 기간이 명시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리고, 미국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을 언급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계층이 불법체류자이다. 이들은 엄연히 존재하나 카운트는 안된 채, 미국 지하경제(3D업종)의 상당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다. 세계인구의 5-6%밖에 안 되는 미국이 세계 에너지의 35% 이상을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손길과 쓰레기를 필요로 하겠는가? 보이지 않는 그 허드렛일들은 어김없이 멕시칸, 아시안 불체자들, 그 밖에 세계 곳곳에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민국은 어느정도 불체자들이 포화상태에 이르면 그들을 색출하여 추방한다. 데리다는 신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지하경제의 운용을 위해 암묵적으로 불체자를 허용하고, 선거때가 되면 보수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그들을 내치는 증상을 일컬어 갱신된 인종주의(a renewed racism)’[각주:1]라 불렀다. 그렇다면, J와 같은 난민은 어떻게 분류될까?


우리에게 난민은 누구인가?

 

문득, 톰 행크스가 나왔던 <터미널>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동유럽 크라코지아 출신의 젊은이가 뉴욕 JFK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한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도중에 구데타가 발생하여 조국이 없어진 것이다. 떠나온 곳이 없기에 입국을 거부당하고, 돌아갈 나라도 없기에 미아가 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에게 허락된 장소는 오직 공항 터미널 안이다. 기표가 제거된 인간의 운명을 낭만적이고 로맨틱하게 이 영화는 그리고 있지만, 실제 그 상황은 사회라는 상징계속 질서에 기대어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죽음과도 같다.

 

라깡에 의하면, 나의 나됨은 타자의 시선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타자의 시선에 예민하고 충실하다는 말은 나의 존재는 타자들과의 섞임과 어울림과 차이속에서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나의 기표가 타인들의 행렬에 뒤쳐지지 않고 충실히 따라갈 때, 비로소 타자는 나를 나로 받아들이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나!’라고 외칠 수 있다.  

이렇듯, 현실의 세계는 무수한 기표들의 연쇄와 차이에 의해 운영되는 시스템이다. 이상철 혹은 한국인이라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철은 철수와 영희가 아닌 이상철이어서, 한국인은 일본사람, 중국사람이 아니라는 차이, 그것이 한국인임을 이상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톰 행크스와 J는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여 입증시켜 줄 기표, 즉 크라코지아와 북한이라는 기표가 사라진, 빗금 그어진 주체, 즉 난민이다.  

 

영어로 난민에 해당되는 말이 refugee(:a person who has been forced to leave their country or home, because there is a war or for political, religious or social reasons)이다. 국가의 강제에 의해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이유로 쫓김을 받은 사람, 혹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자유를 찾아 도망친 사람, 아니면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타국을 여행하다 다시 조국으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여행자와도 다르고, 자신이 태어난 조국을 등지고 떠났다는 점에서는 이민자와 비슷하나, 조국의 전복을 꿈꾼다는 점에서는 이민자와 다르다. , 그들 난민은 나라 밖에 산다는 측면에서는 외부인이지만, 조국의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젼을 여전히 대망한다는 측면에서는 내부자이다.

 

 

신자유주의와 난민

 

우리가 흔히 난민하면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사진전이나 신문기사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보트피플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는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다시는 이런 냉전의 희생물인 난민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예상도 했었다. 하지만, 탈냉전 이후 오히려 난민 발생은 급속하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보스니아와 코소보 사태 등으로 대표되는 각 대륙에서 발생하는 민족분규와 종교 분규, 최근 들어서는 이상 기후와 천재지변으로 인한 환경난민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난민의 이유는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자본의 세계화 전략은 취향의 평균화, 기호의 표준화, 선택의 획일화를 낳았다. 21세기는 얼핏 개성과 개별을 찬양하는 것 같으나 오히려 개체를 자본의 운영이라는 전체성의 깃발아래로 군집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여기 오리지널 구찌 가방이 있고, 그 주변에 짝퉁 A, 짝퉁 B, 짝퉁 C가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오지지널을 살 수 없는 사람은 짝퉁 C에서 짝퉁 B, 그리고 짝퉁 A로 자신의 욕망을 키워나가며 오리저널를 향한 꿈을 키워나간다. 옛날에는 우주표 가방도 있었고, 쓰리세븐 가방도 있었는데, 이제 우리는 오직 명품으로 가방 선택의 기준을 표준화 평균화 획일화 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젝은 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을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면서 이 물음에 답을 한다. 잉여자본과 잉여쾌락은 같은 원리여서, 자본주의가 자본의 잉여를 계속 산출하면서 작동되는 것처럼, 인간 정신 역시 욕망의 잉여를 계속 흐르게 함으로서 유지된다. 신자유주의는 에 대한 욕망의 매카니즘을 내재화한 변종 바이러스와 같다. 그리하여, 그동안 터부시되어 왔고 은밀했던 에 대한 욕동을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게 한다. 전에는 누군가 까놓고 돈과 물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속물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런 것을 감추고 숨기는 사람이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라 평가받는다. 나의 욕망을 끝없이 발현하여 그에 걸맞는 물적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 최고의 미덕이고 경쟁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공약이나 인물에 대한 검증 없이, 오직 돈벌게 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다. 원칙과 명분, 소통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또한 신자유주의는 전 시대의 다른 보수적 체제와는 다르게 자신에게 해가 되는 집단과 세력에 대해서도 너그럽다. 아니, 오히려 그 적대자들을 자신들의 뜰 안으로 초대한다.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나꼼수>의 경우가 그렇다.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실랄한 조롱과 멸시와 욕설들을 통해, <나꼼수>는 대중들로 하여금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냉소적 거리두기를 제공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이 보수의 진화 혹은, 신자유주의적인 게임의 법칙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냉소에 너무나 익숙하다. 이명박이든, 조용기든, 한나라당이든, 조선일보이든, 한기총이든 우리는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들의 몰상식과 파렴치와 무식함에 대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들을 조롱하며 엿을 먹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마치 마스터베이션 같다. 지젝은 바로 이점을 경계한다. 신자유주의라는 대타자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방정식안에는 이미 대중들의 냉소와 그것의 적당한 사정(射精)까지 다 계산되어 있다. <나꼼수> 정도의 냉소주의는 단지 우리에게 체제를 향한 배설의 욕구를 말초적으로 만족시키거나, 체제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을 확인시켜줄 뿐,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여전히 신자유주의와 아무런 대립없이 부자가 되기 위해, 자기의 계급을 배반하며 자발적으로 그 체제에 참여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 대립을 진정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체제에 대한 냉소는 오히려 그 체제를 작동케하고 강화시키는 기재에 불과하다.[각주:2]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신자유주의를 거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해관계와 복잡하게 얽히면서, 오히려 냉전시대 때보다 더 확고한 전쟁의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세계화된 시대의 세계시민은 촌스럽게 정의, 평등 같은 전시대의 유물에 연연하지 않고, 통 크게 주판알을 튕길 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무슨 이념이, 신앙이 자본과 욕망의 잉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 결과 자원 확보를 위한 국지전이 일반화되고 이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은 테러가 되며 그 테러에 대한 응징으로 더 큰 군대가 동원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의 정점이 바로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화된 미국의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이고, 그것의 완성이 빈라덴과 후세인의 최후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결과 유일하게 현재 드러나는 증상은 아프카니스탄에서 발생한 200 만명의 난민과 이라크에서 생겨난 150만명의 난민들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와 난민 사이에서 발생하는 함수이다. 그렇다면, 세계시민들은 현재 이러한 난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대한민국과 난민


OECD 30
개국 회원국 인구 대비 난민 비율은 1000명당 2명이다(2009년 기준). 스웨덴이 인구 1,000명당 8명으로 가장 높은 비율이고, 독일은 1,000명당 7, 영국은 1,000명당 4, 미국은 10,000명당 8, 일본은 100,000명당 1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200,000 명당 1명의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 단연, 최하위다. 독일에는 59 8천명의 난민이, 미국은 27 5천명, 영국은 26 9천명, 스웨덴은 8만 명, 네덜란드 7 6천명, 스위스 4 6천명, 아일랜드 1만명, 룩셈부르크에 3200명의 난민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268!. 

  

한국은 1992 난민협약 및 의정서 가입한 이래로, 2000년도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 상임 이사국 선출되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아시아에서 드물다는 정치적 민주화 과정과 더불어 경제의 급격한 성장은 대한민국의 선호도와 신용도 상승으로 이어졌고, 2002년 월드컵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과 반기문 UN 총장 배출 등 어딘가 모르게 우리나라가 외국인들이 보기에 나이스했는지 난민신청 건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2009년엔 난민 신청자 249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다 개뿔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2009년 한국의 인구대비 난민 비율은 인구 20만 명당 1명으로 OECD 가입 국가 중 최하위다. 1992년에 난민협약과 의정서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2001년에서야 겨우 1명의 난민만을 인정했다. 2009년에 이르러 74명의 난민을 인정한 것을 법무부에서 홍보하면서 진정한 호혜평등 어쩌구 저쩌구~”, “떠오르는 아시아의 허브! 미주알 고주알~” 무슨 인천 공항선전도 아니고아니, 어쩌면 그들은 난민을 항공사업과 연계시키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난민센터를 영종도에 짓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말 기막힌 발상이다.    

 

 

에필로그:  국경의 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豆滿江)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巡査)

왔다 ―― 갔다 ――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학창시절 배웠던 김동환의 <국경의 밤>이라는 장편 서사시중 첫 장이다. 그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시에서 두만강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강이고, 여전히 건너야 하는 강이라고… 100년 동안 세상이 그토록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은 변함없이 그 모양 그 모습이다. 그래, 세상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우리 앞에는 여전히 체제가 가로막아 놓은 강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그 강을 어떻게 건널지를 놓고 여전히 갈등하며, 그 강 너머의 세계를 꿈꾼다. 블라블라~ 지금 돌이켜보니 참 순진하고 철없던 시절의 생각이었다. 


얼마 전에는 생각을 바꿔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우리가 그 두만강이었고, 외투 쓴 순사였고, 철조망이고, 폭압적인 체제이고 편협한 이념이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넘어가는, 혹은 우리에게 넘어오는 그들에게 그토록 가혹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좀 어딘가 오바같다.

 

요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2011년 두만강은 여전히 민족의 비극 내지 원죄의식을 지시하는 주인기표임과 동시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념대결의 상징인 그곳에서 돈이 될만한 것이 뭘까?’를 놓고 고민하는 욕망의 대타자일런지 모른다. 그러기에 얼마 전 바뀐 북한의 새로운 화폐가 국경에서 기념품으로 거래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고, 탈북한 사람들 혹은 탈북을 시도하려는 애달픈 사람들을 놓고 온갖 상품이 뒤에서 거래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아직까지 건재한 이념의 장벽과 새롭게 빠른 속도로 번지는 욕망의 장벽을 뚫고 탈출은 계속되고난민은 이어진다.

ⓒ 웹진 <제3시대>


  1. Jacques Derrida, Ethics, Institutions, and the Right to Philosophy, Trans. Peter Pericles Triphonias.(Maryland:Rowman and Littlefield, 2002), 140. [본문으로]
  2.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28-30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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