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에 대한 신학과 과학의 대화



류헌조

(GTU Ph.D. Candidate)


 

   벌써 3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었지요.)시절 국내의 모 출판사에서 출판한 학습그림과학이라는 책을 읽고 충격과 흥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은 당시 앞으로 21세기가 되면 인류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재미있는 만화를 곁들여 아주 사실감 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화상으로 전화를 할 것이고, 서울과 부산을 단 2시간 만에 주파하는 고속열차가 나타날 것이며,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여 음식을 만들고 집안 청소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꿈만 같던 상상 속의 이야기들이 이제 현실이 되었고, 사람들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니 앞으로의 미래는 또 어떻게 바뀌어갈 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더 편안하며 더 안락한 삶을 추구합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의 삶이 계속해서 발전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발전합니다. 삶은 다채로워지고 풍요로워지며 더욱 편리해집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발전이라는 밝은 면의 또 다른 편에서는 직시하기 싫은 어두운 역사가 계속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름하여 “악(evil)의 흑역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정말로 나쁜 사람들입니다. (때때로 이렇게 나쁜 사람들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습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배웠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히려 법을 준수하고 양심을 따라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법을 무시하고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이 자자손손 부를 축적하며 건강하게 사는 예가 많습니다. 살다 보면 겪지 않고 싶은 일들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수가 없구나”하면서 그래도 눈 딱 감고 넘겨버릴 비교적 가벼운 문제들도 있지만, 그 아픔이 너무나도 커서 평생의 한이 되고 예전의 삶으로는 도무지 회복되지 못할 치명적인 고통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질병과 이별의 아픔, 각종 사고와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의 폭력으로 인한 부상과 죽음의 충격들처럼 세상에는 감당하기 힘든 처참한 악의 현실이 존재합니다. 

   사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명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또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예전에는 악인 줄로 알았던 사건들이 세월이 지난 후 그것이 선이었던 것임을 깨닫는 경우도 있고, 고통의 시간을 지혜롭게 잘 통과하니 그것이 도리어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악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으로 경험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히 선으로 인식되는 동일한 사건이 다른 사람의 삶을 망치는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할 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싫은 것,”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악은 정말이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나쁜 것”입니다.  

   누구나 악을 경험하게 되면 많이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 악의 현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별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들(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에게 더욱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악을 경험하는 그 자체가 힘들기도 하지만, 내가 믿는 절대자 하나님이 도대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전능하고 선하며 사랑이 많은 분이라면, 어째서 나의 인생에서 또한 이 세상에서 이처럼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이 힘을 떨칠 수가 있을까요? 악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적으로나(intellectually) 감정적으로(emotionally) 계속해서 신앙인들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켜켜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국 질문은 “왜(Why?”)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왜” 악이 발생할 수 있는 곳으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일학교 시절 한 번 씩 이런 질문을 던져 봤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죄인이 되었고 세상은 왜 이렇게 살기 힘든 곳이 되었나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대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함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또 묻습니다. “인간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되었나요?” 선생님이 다시 답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인간이 이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질문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나요?” “음… 그것은…” 사실, 저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은 자유(freedom)야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게 선택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있는 인격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 가운데서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최고의 섬김, 최고의 대접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게 반대하고 저항하며 반역할 수도 있습니다.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실제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자유,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인간은 죄 지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이러한 가능성 안에서 참으로 안타깝게도 인간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된 주제 뿐만 아니라, 세상과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에도 비슷하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들이 사고가 나서 다치고 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셨나요? 하나님은 왜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싸움과 경쟁, 질병과 노화로 인해 계속해서 고통을 겪고 도태되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허락하셨나요?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홍수와 지진, 태풍과 쓰나미가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가족을 잃는 아픔을 당하도록 하셨나요? 이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연세계에 얼마 간의 자유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어떤 학자들은 우연(chance)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세계가 하나님과 피조물들간의 인식론적 거리(epistemological distance)를 확보하기 위한 장(field)으로서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연세계를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짜맞춰져서 기계처럼 돌아가는 고정불변의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로 충만하여 변화무쌍하지만 새로움이 발생하는 생명의 세계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세계는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어두운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과 새로움으로 가득한 아름답고 선한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는 일련의 신학자(또한 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발생하는 악의 문제와 자연세계에서 발생하는 악의 문제를 아주 조십스럽게 서로 연결하여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reduction)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둘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본질적인 구조가 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피조세게가 갖는 어떤 본질적인 구조, 이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이치 또는 법칙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즉,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동시에 발생한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구조, 생명이 탄생하고 번식하여 살아가지만 동시에 병들고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구조,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동시에 창조주를 거역하고 멀리할 수 있는 구조, 이웃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동시에 이 자유로 인해 이웃을 미워하고 생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구조, 인류의 삶이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발전할 수 있는 만큼 그 이면에는 거짓과 폭력의 흑역사가 계속될 수 있는 구조, 이렇게 세상은 이중성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세상이 이런 식으로 밖에 창조될 수 없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답변을 시도해 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현재로서는 “unnecessary but inevitable(꼭 그래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이라는 개념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답변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A Christian Interpretation(한국 책 제목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죄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죄를 비롯하여 세상에서 경험되는 악은 꼭 반드시 발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과학자-신학자(physicist and theologian)인 로버트 존 러셀(Robert John Russell) 박사는 이러한 자연세계의 이중적인 구조, 또는 “unnecessary but inevitable”의 본질적 특성을 물리세계의 법칙, 특별히 열역학 법칙에서 발견합니다. 물론, 그가 분명하게 지적하듯이 신학적인 진술과 과학적인 이론을 아무런 여과 없이 일대일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과학의 두 영역 모두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세상의 본질적 구조를 서로 연결지어 살펴봄으로써 진리에 한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학창시절 과학시간의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열역학 제 2법칙 또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르면, 가용한 에너지 분실의 척도인 엔트로피(쉽게 말해서, 무질서의 양)는 닫힌 세계에서 언제나 계속해서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납니다. 자연세계에서 발생하는 생명체들의 계속되는 질병, 쇠퇴, 멸종, 죽음의 현상을 통해 엔트로피의 증가를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엔트로피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벨기에의 화학자 Ilya Prigogine(일리야 프리고진)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러셀 박사는, 세상에는 “무질서로부터 질서(Order out of Chaos)”가 출현하며,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의 구조로부터 생명이 탄생하여 살아가고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이 세게에서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inevitable) 요소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리가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엔트로피를 통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비유적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엔트로피가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은 엄연히 바꾸어 쓸 수 없는 서로 다른 개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악을 선을 위한 도구라고 정당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를 시도해 봄으로써 하나님이 선한 의도로 세상을 창조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세상에 악이 발생하였고, 어떤 면에서 볼 때 악은 피조물로서 창조세계가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구조 또는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cost)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질 수 있고, 저 스스로도 심각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present)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생명과 죽음이 함께 하며 행복과 고통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분명한 현실에 대해 신학과 과학은 나름대로 질문하고 답을 찾습니다. 세상에 악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정말이지 악은 있어서는 안 되고 또 없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악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고 말았고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통해 (또한 악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이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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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하나님의 뜻 그리고 종말



 

민기욱
(GTU 조직신학 박사과정)


 


       아내와 차를 타고 가다가 잠깐 신학논쟁(?)이 벌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있던가? 결혼을 결심할 때, 왜 나를 선택했느냐가 주제였다. 아내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서운했다. 내가 매력적이었다거나, 장래가 있어 보였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착해 보여서 나를 선택했다고 말하길 기대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었단다. 가끔 교우들 중에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꼭 목사에게 “하나님의 뜻”일까 여부를 묻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말해 겉으론 진지하지만 속으론 웃을 때가 많다. “진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겁니까?”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두 가지의 양 극단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인형극장” 모델이다. 이 세상을 인형극장으로 생각해 창조주 하나님이 일일이 줄을 당겨서 오직 그 분이 하라는 대로 모든 창조계가 춤을 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운명을 점친다랄지, 팔자를 탓하는 것이 크게 보면 이런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이는 결정론적 사고 모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관객” 모델이다. 우주라는 무대가 잘 돌아가도록 준비해 놓고, 이제는 무심하게 내버려두는 관객이 되어버리는 그런 하나님이다. 지난 세기의 “이신론” 즉 “눈먼 시계공” 모델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양 극단을 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최초의 창조를 시작하고서 팔짱을 끼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창조하고 계신다.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140억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창조주이셨고 오늘의 창조주이시다.  

      또한 그 분의 연속적인 창조는 “피조물들의 자유”를 허락하신다. 덕분에 역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이 생겨났다. 그러나 스스로를 자각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줄 아는 존재들이 우주 역사의 과정에서 순전히 우연으로 생겨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목적이 있다. 물론 역사의 우발성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진행하다보면 궁극적으로 만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악과 고통”의 문제다. 어느 누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먼저 “도덕적 악”의 문제에 직면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범죄를 듣고 본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악을 허용하셨는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잠시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라. 만약 우리에게 선 대신 악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세상을 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통해 수없이 많은 전쟁과 인간의 잔악함을 본다. 우리의 선택을 통해 커다란 고통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기계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이렇게 악이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인간의 자유라는 더 큰 선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이며, 이를 “자유 의지 방어”라 부른다.  

       또 다른 하나는 “자연적 악”이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지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리스본 대지진을 아는가? 1755년 All Saints Day에 발생한 이 지진으로 교회가 무너져 5만 명이 죽었다. 과연 지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옥스퍼드의 신학자 오스틴 파러는 이렇게 답변했다. “신의 뜻은 지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그 본성에 맞게 작용해야 한다”고. 이를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자유 과정 방어”라 부른다. 하나님은 살인자의 행위와 병의 발생을 직접 의도하지는 않으신다. 다만 허용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약함”이거나 “간과함” 혹은 “냉담함” 때문이 아니다. 다만 불가피한 대가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고통의 미스테리나 “참담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버클리 지역도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잊을만하면 잠자고 있는 순간에,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에서, 예배를 마치고 주차장을 나서는 순간에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진이 잘 나는 곳이었지!” 하고 자각하게 하며 땅은 흔들어대며 나를 깨운다. 매번 무섭다. 어느 날은 책장에서 “종말론”에 관한 자연과학자와 신학자들의 대화를 수록한 책을 다시 꺼내 보았다. 대충 훑어 파악될 내용은 아니었지만 십 수 년 전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기억은 우리의 “종말”에 관해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절망을 말하고, 신학자들은 “희망”을 말하더라는 것이다. 왜 그들은 절망을 말하고, 희망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극과 극을 달리면서도 왜 그들은 서로 한 자리에 앉아 대화하려는 것일까?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데도 말이다.  

       먼저 “절망”에 귀 기울여 보자. 너무 낙담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는 마시라. 과학적인 사실일 뿐이다. 그들의 주장 속에 섞여 있는 환원주의적, 유물론적, 결정론적 “신념들”을 잘 파악하시고 새겨들으시기를 바란다. 1994년 7월을 기억하시는지. 나는 잊지 못한다. 7월 8일 토요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을 듣던 나는 판문점 근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부대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정말 아찔했다. 일명 GP, GOP에서 군복무하는 자들의 심정을 아시는지. 한달 동안 음산한 장송곡을 듣는 심정을. 우울증 정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일주일 후 7월 16일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유명한 “슈메이커 레비 9”이라는 혜성의 파편 중 21개가 거의 일주일 동안 목성과 충돌했었다. 이 충돌로 목성에 상흔이 생겨나 까맣게 반점이 목격됐는데 그 크기가 지구의 크기보다 더 컸다. 겨우 직경 1.5-2km 정도의 작은 파편으로 지구보다 큰 상흔을 남겼다. 그렇다. 만약 그 파편들 중 하나라도 지구와 충돌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이미 과학적 정설로 자리 잡고 있는 6천 5백만 년 전의 대규모 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종은 혜성과 유성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유성과 혜성에 의한 충격 분화구가 지구상에 몇 개나 남아있을까? 현재 140-150여개가 발견됐으며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지구상의 흔적과 혜성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우리는 또 얼마나 낙담하고 있는지. 그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언제든 “종말”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든든히 서 있는 이 땅도 지구 전체의 차원에서 볼 때는 마치 생계란의 얇은 껍질처럼 한없이 약한 지각껍질일 뿐이다. 지진이나 화산폭발에 의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절망”이다. 그러나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과학이 말하는 섬뜩한 종말은 너무나 순식간에 찾아오기에 기다릴 여유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24시간이라는 하루도 우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정말 절망적이다. 그러나 희망을 위한 이유들을 한 번 찾아보자. 우선 독일 본 대학의 신학교수인 게르하르트 자우터(Gerhard Sauter)가 던지는 우스개 소리로 절망적인 현재를 잠시 잊어 보심이 어떨지.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선한 우유 항아리에 두 마리의 개구리가 빠졌다. 한 개구리는 비관적, 다른 한 개구리는 낙관적이었다. 비관적인 개구리는 “이 항아리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 조만간 죽게 되겠지. 그렇다면 지금 바로 체념하고 모든 희망을 포기하자.” 그래서 곧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낙관적인 개구리는 희망을 결코 잃지 않았다.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몸부림을 칠뿐이었다. 밤이 새도록 발버둥 쳤다. 그러다 그 발버둥은 우유를 버터로 변형시켰고, 드디어 항아리 바깥세상으로 탈출했다. 정말 근사한 이야기다. 자 여러분은 어떤 개구리에 속하는가, 이렇게 질문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우터 교수는 비껴간다. 두 개구리가 어떤 기독교 교단에 속하는지 설명한다. 비관적 개구리는 개구리의 연약함을 걱정하며, 단지 하나님께 항아리 안으로 사다리를 넣어달라는 짧은 기도를 할 것이나 사다리는 보이지 않고 결국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독일 루터교에 해당한다. 다른 개구리는 자신이 힘차게 투쟁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는 미국 장로교 개구리였다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너무 단순할 뿐이며, 교회에서 듣기에는 너무 경박한 일방적 성공담일 뿐이다. 어찌 낙관주의, 낙천주의, 심지어 긍정적 사고가 기독교가 말하는 “희망”과 혼동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밝은 생각, 적극적 사고가 우리 삶에 풍요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혹시 멋진 차, 근사한 집이 생길지도. 그러나 종말이라는 거대한 폭풍에 대처하려거든 단단히 준비하시라. 비닐우산 따위는 그만 접어두는 지혜가 필요할 터. 좀 더 진지하게 “희망”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희망의 이유, 희망의 뿌리를 찾아 나설 때가 되었단 말이다. 

       아이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울지도 않고 엄마, 아빠가 있는 거실, 혹은 주방으로 걸어올 때가 간혹 있다. 다 컸구나! 그러나 내 경우는 달랐다. 심지어 십대 초반에도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 물론 울지는 않는다 – 부모님을 찾다가 당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 방 저 방 두리번거리다가 집 안에 아무도 없을 때 그 놀람이란. 휴거라고 들어보셨는지. 어린 시절 “휴거”에 관련된 영화가 어찌 그리 각인이 되었던지 지금도 텅 빈 집 안을 보다가 놀랄 때가 있다. 멋쩍다.

       그러나 내가 믿던 기독교는 종말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쳐왔던 게 사실이다. 어느 날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 예수의 재림이 도래하고 그렇게 종말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종말의 끝은 온 우주의 끝과 “새 하늘 새 땅”의 도래가 될 것이다. 그 새 하늘 새 땅은 영원한 낙원이 된다. 어떤가.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종말론은 어디까지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 또한 우주의 역사는 6천년 내지 고작 1만 년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다시 코페르니쿠스 이전으로 돌아가야 조화될 수 있는 종말론이다. 즉 온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어야 하고, 온갖 별들은 지구를 덮고 있는 저 천장에 촘촘히 매달려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와 십자가 사건 또한 지구 중심적 구원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어 왔다. 허나 자연과학은 기독교 신앙인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혹은 그렇게 믿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오늘의 신학은 아니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학문의 활동과 대화를 통해 늘 새롭게 구성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상식이다. 즉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 현대과학의 연구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신학적으로 수용하여 기존의 전통 교리를 새롭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종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가 현대 천문학의 견해에 따르면 몇 십억 년 후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구 결과에 의해 기존의 “종말론”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까마득한 미래보다 훨씬 빨리 예수의 재림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즉 지구의 시간에만 하나님의 심판이 묶여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인류 구원의 최종적 사건으로 이해되던 기존의 종말 역시 우주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은 글을 통해 종말론 전체를 기대하지는 마시라.)

       내 어머니에게서 들은 종말론은 그야말로 현실적이며 무시무시했다. “아마겟돈” 전쟁으로 인해 핵무기가 사용되고,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인류와 생명체들은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 받아야 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휴거를 받아 아마겟돈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구출되어야 한다. 물론 더 자세하게, 그리고 매끄럽게 기술되어야 하나 이를 우리는 “세대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그들이 말하는 종말은 그러나 지구상의 생명체의 멸절로 끝나는 단순한 “종말”일 뿐. 더 이상 현대 신앙인들에게 호소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입지가 너무나 좁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말하는 150억 년 더 생존할 우주적 차원에서, 혹은 50억 년 남은 지구의 생존 확률 속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편 현재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 – 생태계 파괴, 인구 증가, 자원의 고갈 등 – 을 볼 때 스스로 자멸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또한 성서가 말하는 경고 – 인간의 어리석음 – 에 대해 조금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초래하는 종말에 대해 더 고민할 때 “희망”이 싹트지 않을까.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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