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의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과학과 그 너머




안호성

(종교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베르그송의 첫 저작인 『시간과 자유의지』를 읽을 마음이 생겼다. 몇 년 전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으로 한글로 새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영어번역본인 Time and Free Will 에는 “An Essay on the Immediate Data of Consciousness”가 부제로 달렸다. 영어번역본은 베르그송이 한창 활동하고 있던 1910년에 나왔다. 원저는 1888년에 출판되었으니 상당히 빨리 번역된 셈이다. 윌리엄 제임스 등의 영향이 클 것이다.  

   베르그송의 테제는 ‘의식의 흐름이 구체적인 경험이라면, 시간을 양화(量化)하는 당대의 철학은 그것을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것 같다. 만약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 없다면, 근대 과학에 구현된 연장(extension)의 방법으로 현상을 해명하는 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근대 과학은 상식과 동조하여 의식의 현상들을 마치 연장인 것처럼 다룬다. 시간은 공간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작업은 다음 물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간은 공간인가? 그의 답을 거칠게 요약하면, 의식 현상들에 적합한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 지속이다.  

   베르그송의 당대에 사상계에 나타난 가장 큰 충격의 하나는 『종의 기원』의 출간이었다. 더 광범한 맥락에서 본다면, 19세기 중반에 과학의 심대한 위기가 발생하였다. 근대 과학이 19세기까지 300년 동안 독보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는 화이트헤드 등의 통찰이 맞는다면,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이 헤게모니는 다방면에서 흔들렸다. 위기의 시대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패러다임은 현저하게 교조적인 특성을 갖는다. 차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패러다임의 내부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심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불안은 단순히 과학 내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학의 위기와 전체 사회의 위기는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동안 삶을 고정하던 상징 세계의 위기는 합리적인 해결을 향하지 않고서 파국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베르그송은 19세기 중반에 공부하면서 당시 주도적인 방법에 천착했음은 당연하다. 그는 H. 스펜서의 사유에서 당대의 주도적인 방법의 현신을 보았다. 이 방법은 보통 “실증주의”로 불린다. 실증주의는 근대과학의 독단적인 표현이다. 콩트와 스펜서의 실증주의와 페히너의 심리물리학과 경험론에 터하는 연상주의(associationism) 등은 가족유사성을 갖는다. 보통 소박한 경험론으로 한데 묶인다. 경험론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관심의 하나이다. 이미 칸트는 강력한 경험론의 비판을 제시한다. 많은 면에서 칸트는 이후 철학을 지배한다. 베르그송이 칸트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제시하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사유는 칸트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누구의 철학을 비판한다면 기준이 필요하다. 무엇에 기대어, 누구의 사유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에 초점을 맞출 수 있지만 부차적이다. 경험과 현상을 우선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순수’ 경험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면? 경험을 신뢰할 수 있는가? 과학의 방법과 이론이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직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직관을 통한 순수 경험의 획득이 가능하다면, 이 경험은 현존하는 과학 이론에 대해 일종의 비판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포퍼 등의 진화론적인 인식론은 이 가능성에 정초된다. 그가 경험을 철저하게 분석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아무튼 경험이 이미 있다고 하자. 이 경험은 방법의 참과 거짓을 선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 경험의 풍부함이라는 착상을 생각해 보자. 풍부하다면, 어떤 방법이 이 풍부함을 제대로 포착하는가? 

    이 책에서 베르그송이 집중하는 것은 의식 현상들이다. 의식 현상들의 학은 가능한가? 베르그송은 프로이트와 같은 주제를 천착한다. 19세기에 정신 현상 내지는 감정들 등등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이미 로크와 흄에 의하여 일종의 완성을 이룬 것은 아니었을까? 라캉은 어떤 곳에서 근대 학의 승리는 측정(measure)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측정이라는 이상. 이 방법의 특징은 모든 주관성의 요소를 지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근대과학 이전에도 공간의 측정이 있었고 시간의 측정이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시간의 측정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8세기에 서학이 동양에 전래될 때 그 형이상학은 거부되곤 했지만 달력은 매우 진지하게 검토되고 수용되었다. 그런데 달력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의 측면이 아니라 공간으로 환원된 양화된 시간의 측면에서 추구되는 것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잠시 소설을 언급한다. 물론 자기를 기술하는 새로운 방법이 반드시 반(反)-과학일 필요는 없다. 그래도 베르그송의 철학에 깊이 기대면, 우리는 기술 자체가 갖는 한계를 검토해야만 한다. 그런데 모든 기술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큰 문제를 제기한다. 베르그송은 내적 통찰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심층을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내면성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 내면성을 다른 사람과 교통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 내지는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사용은 곧 내면 상태를 공간화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학에 종사하는 또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가 문제된다.

   한국에서 스펙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끈다. 스펙이라는 단어는 원래 공산품의 특징을 기술하는 용어가 아닌가? 이 스펙이라는 단어는 자본주의라는 시장에서 매력 있는 상품으로 사람이 전화되는 극단을 표현한다. 그 단어에 대해 구토를 느끼는 대신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확인한다. 베르그송이 제시하는 사유를 통하여 이를 해석한다면, 사람으로-있음의 자본주의적인 양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양화의 도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베르그송의 사유를 예수의 언명과 관련하여 고찰할 수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물론 말씀이 환기되는 순간 베르그송은 말할 것이다. 말씀마저도 양화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그런데 말 또는 언어는 절대적인 지평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말없이 사는 존재를 관찰할 수 있다.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아무튼 말이야말로 사람으로-있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말은 이미 획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으로-있음에서 변모하는 것이라고. 베르그송이 책의 한 대목에서 소설을 다루면서 표현하는 난점들을 기억한다. 내적 상태를 양화하지 않고서 기술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시. 또는 그림과 음악.

   1888년에 베르그송은 이 책을 출판했다. 그는 1859년생이니 서른이 되던 때였다. 그의 나이에 견주면 나는 십 수 년을 더 살았다. 세상에 내어 놓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공인된’ 자리 하나 잡지 못한 채 늘 막연한 고민에 시달리는 처지이다. 나는 이 세계적인 철학자 앞에서 부끄럽다.

   그런데 문득 이 부끄러움은 베르그송이 주장하는 참된 자기(self)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ego)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사람에게 있다면 그것은 양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를 사회적이고 과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ego)와 관련하여 사람은 비교된다. 비교된다는 말은 측정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일정한 키를 가진다고 하자. 만약 키가 사람으로-있음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한다면, 문득 키를 아주 세밀하게 측정할 것이다. 키에 따라서 차등하게 자원을 분배하는 세계를 생각해 보자. 이 세계는 분명 당혹스럽다. 그렇지만 베르그송의 한 사유의 입장에서 사람으로-있음의 값을 매기는 모든 일은 궁극에 있어서 키에 따라 사람을 일렬로 배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베르그송의 사유에 따르면, 이것은 현실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람으로-있음은 그렇게 양화할 수 없는 차원을 갖는다. 양화할 수 없는 차원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평등하다. 양화할 수 없는 것을 배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관점에서 현대의 문제는 양화할 수 없는 것을 양화하는 매우 섬세한 방법을 개발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화할 수 없는 수준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사유는 매우 심대한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을 갖는다. 다시 나의 부끄러움으로 되돌아가면, 나의 자아 또는 사회가 나에게 강요한 양화를 극복하고서 참 나(self)와 ‘더불어’ 자족하는 경지를 획득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이 경지를 자유라고 부른다. 그 자족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고 묻는 일은 다시 자기를 양화의 세계로 이끈다. 정말로 그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다. 머물면 무슨 유익이? 나는 그렇게 묻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양화하는 어떤 정신의 강고함을 느낀다.

   요컨대 베르그송의 자기는 지속으로 파악되는 세계이다. 그러면 지속을 긍정적으로 정의하는 일이 가능한가? 지속은 오직 부정적으로 포착되는 것이지 않을까? 정말로 긍정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앞서 예술을 거론하였다. 과학은 양화의 기술로 남아야 한다. 이 점에서 과학과 예술의 화합이라는 면이 거론될 수 있다. 과학이 문제되는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독단 때문이다. 과학이 만능이라고 착각할 때, 베르그송이 지속이라고 부르는 삶의 영역은 축소되고 왜곡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삶의 완전한 지속에 대한 헌신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다. 삶은 어떤 면에서도 불완전하다. 다만, 몇 가지 다른 영역들을 완전히 한쪽으로 환원하지 않고서 어떤 중도를 발견하는 ‘지혜’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이 지속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시간과 우연과 확률 같은 용어들이 엄밀 과학에 소개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새로운 변화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참조하는 과학이 될 것인가? 나는 현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어서 답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또는 깊이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사람으로-있음의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이 자기와 자아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 첨언한다. 자기는 지속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자아는 자기가 공간화 또는 양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양화된 것은 측정될 수 있으며, 이 영역이 심대하게 양화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현대 사회는 자아의 양화를 매개로 한 착취를 극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이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면 양화되고, 양화는 총체성(totality)을 지향한다. 만약 철학이 이 양화를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학이 양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학 내지 지식은 언제나 양화의 문제일 것이다. 더 섬세하고 말랑말랑한 양화가 있겠다. 그래서 학에 맞서는 것으로 비(非)-학이 있겠는데 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문학과 예술이다. 문학과 예술은 사람으로-있음의 복잡한 지속의 상태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타락과 위축은 베르그송적인 시각에서 현대가 직면한 큰 문제가 될 수 있겠다.

   베르그송의 사유에 있어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방식이다. 특히 과거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나중에 그가 기억에 관한 책을 쓴 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사람으로-있음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현상이다.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현재의 순간을 산다고 하자. 그런데 비유한다면 사람은 한 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린 공간이랄 수 없지만, 공간의 비유를 빌 수밖에는 덩어리로 산다고 해야 할까?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주체성은 출생 이전에 주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또는 유전자의 형태로 주어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많은 의문이 든다.

   나는 주체성이 출현한다고 보는 편이다. 주체성은 경험적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환경은 같을 수 없고, 유전자도 같을 수 없다. 이 미세한 차이에서 삶은 출발한다. 유전자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것은 온갖 가능성들의 집합이고, 환경은 온갖 우연의 집합이다. 이 둘의 결합과 더불어 삶은 시작된다. 불현듯 시작된다. 우리는 말 이전에 정말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연구할 방도가 없다. 동물에게 의식이 있는가 하는 점이 아직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듯이. 이것은 말을 통하지 않고서 소통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 또한 오직 말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이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들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무(無)라는 말인가? 무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소통되기 위해서는 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아직 말이 없는 시절에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말의 너머에 존재하는 그 세계를 아이의 세계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말 너머의 세계마저도 말이 있고나서야 존재하지 않을까?

   이 글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와서는 일기장에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을 적은 것에 비할 수 있다. 그런데 지속에 대한 베르그송의 사유에 따르면, 그와의 만남은 나를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그와의 만남은 두 가지 방식을 가질 수 있다. 한편으로, 그 만남은 나라는 기존의 사람으로-있음에 오직 피상적인 흔적만 남길 것이다. 자유의 실현이 없는 반복과 리듬이 부각된다. 극도로 미세한 관찰에 의하면, 여기에도 변화와 창조가 있기는 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만남은 과거-현재의 연속체와는 매우 다른 자기, 즉 사람으로-있음을 창조하거나 구성하기도 한다. 이런 자기창조의 가능성 때문에, 사람으로-있음의 해명은 과학 내지는 지식의 방법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내적인 의식 현상들을 양화하는 일은 사회생활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있음을 온전히 해명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베르그송은 과학과 과학의 너머를 지시한다. 너머에서. 물론 과학이 자신의 너머를 안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반드시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베르그송의 첫 저작에서 그가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과학에 맞서는 또는 나란히 존재하는 지속의 세계를 강조한다. 베르그송의 책을 읽고서 사람으로-있음, 너머와 자유, 창조에 대해 묵상한다.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악의 문제에 대한 신학과 과학의 대화



류헌조

(GTU Ph.D. Candidate)


 

   벌써 30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었지요.)시절 국내의 모 출판사에서 출판한 학습그림과학이라는 책을 읽고 충격과 흥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은 당시 앞으로 21세기가 되면 인류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재미있는 만화를 곁들여 아주 사실감 있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화상으로 전화를 할 것이고, 서울과 부산을 단 2시간 만에 주파하는 고속열차가 나타날 것이며,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여 음식을 만들고 집안 청소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꿈만 같던 상상 속의 이야기들이 이제 현실이 되었고, 사람들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니 앞으로의 미래는 또 어떻게 바뀌어갈 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더 편안하며 더 안락한 삶을 추구합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의 삶이 계속해서 발전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발전합니다. 삶은 다채로워지고 풍요로워지며 더욱 편리해집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발전이라는 밝은 면의 또 다른 편에서는 직시하기 싫은 어두운 역사가 계속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름하여 “악(evil)의 흑역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정말로 나쁜 사람들입니다. (때때로 이렇게 나쁜 사람들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습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배웠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히려 법을 준수하고 양심을 따라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법을 무시하고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이 자자손손 부를 축적하며 건강하게 사는 예가 많습니다. 살다 보면 겪지 않고 싶은 일들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수가 없구나”하면서 그래도 눈 딱 감고 넘겨버릴 비교적 가벼운 문제들도 있지만, 그 아픔이 너무나도 커서 평생의 한이 되고 예전의 삶으로는 도무지 회복되지 못할 치명적인 고통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질병과 이별의 아픔, 각종 사고와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의 폭력으로 인한 부상과 죽음의 충격들처럼 세상에는 감당하기 힘든 처참한 악의 현실이 존재합니다. 

   사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명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또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예전에는 악인 줄로 알았던 사건들이 세월이 지난 후 그것이 선이었던 것임을 깨닫는 경우도 있고, 고통의 시간을 지혜롭게 잘 통과하니 그것이 도리어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악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으로 경험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히 선으로 인식되는 동일한 사건이 다른 사람의 삶을 망치는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할 때,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싫은 것,”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악은 정말이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나쁜 것”입니다.  

   누구나 악을 경험하게 되면 많이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 악의 현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별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들(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에게 더욱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악을 경험하는 그 자체가 힘들기도 하지만, 내가 믿는 절대자 하나님이 도대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전능하고 선하며 사랑이 많은 분이라면, 어째서 나의 인생에서 또한 이 세상에서 이처럼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악의 세력이 힘을 떨칠 수가 있을까요? 악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적으로나(intellectually) 감정적으로(emotionally) 계속해서 신앙인들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켜켜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국 질문은 “왜(Why?”)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왜” 악이 발생할 수 있는 곳으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주일학교 시절 한 번 씩 이런 질문을 던져 봤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죄인이 되었고 세상은 왜 이렇게 살기 힘든 곳이 되었나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대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함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또 묻습니다. “인간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되었나요?” 선생님이 다시 답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인간이 이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질문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나요?” “음… 그것은…” 사실, 저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은 자유(freedom)야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게 선택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있는 인격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 가운데서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최고의 섬김, 최고의 대접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게 반대하고 저항하며 반역할 수도 있습니다.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실제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자유,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인간은 죄 지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이러한 가능성 안에서 참으로 안타깝게도 인간은 죄를 짓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된 주제 뿐만 아니라, 세상과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에도 비슷하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들이 사고가 나서 다치고 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셨나요? 하나님은 왜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싸움과 경쟁, 질병과 노화로 인해 계속해서 고통을 겪고 도태되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허락하셨나요?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홍수와 지진, 태풍과 쓰나미가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가족을 잃는 아픔을 당하도록 하셨나요? 이에 대해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연세계에 얼마 간의 자유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어떤 학자들은 우연(chance)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세계가 하나님과 피조물들간의 인식론적 거리(epistemological distance)를 확보하기 위한 장(field)으로서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연세계를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짜맞춰져서 기계처럼 돌아가는 고정불변의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로 충만하여 변화무쌍하지만 새로움이 발생하는 생명의 세계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세계는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어두운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과 새로움으로 가득한 아름답고 선한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 관심을 갖는 일련의 신학자(또한 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발생하는 악의 문제와 자연세계에서 발생하는 악의 문제를 아주 조십스럽게 서로 연결하여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reduction)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둘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본질적인 구조가 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피조세게가 갖는 어떤 본질적인 구조, 이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이치 또는 법칙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즉,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동시에 발생한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구조, 생명이 탄생하고 번식하여 살아가지만 동시에 병들고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구조,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동시에 창조주를 거역하고 멀리할 수 있는 구조, 이웃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동시에 이 자유로 인해 이웃을 미워하고 생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구조, 인류의 삶이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발전할 수 있는 만큼 그 이면에는 거짓과 폭력의 흑역사가 계속될 수 있는 구조, 이렇게 세상은 이중성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세상이 이런 식으로 밖에 창조될 수 없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답변을 시도해 왔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현재로서는 “unnecessary but inevitable(꼭 그래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이라는 개념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답변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했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A Christian Interpretation(한국 책 제목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죄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죄를 비롯하여 세상에서 경험되는 악은 꼭 반드시 발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과학자-신학자(physicist and theologian)인 로버트 존 러셀(Robert John Russell) 박사는 이러한 자연세계의 이중적인 구조, 또는 “unnecessary but inevitable”의 본질적 특성을 물리세계의 법칙, 특별히 열역학 법칙에서 발견합니다. 물론, 그가 분명하게 지적하듯이 신학적인 진술과 과학적인 이론을 아무런 여과 없이 일대일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과학의 두 영역 모두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세상의 본질적 구조를 서로 연결지어 살펴봄으로써 진리에 한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학창시절 과학시간의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열역학 제 2법칙 또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르면, 가용한 에너지 분실의 척도인 엔트로피(쉽게 말해서, 무질서의 양)는 닫힌 세계에서 언제나 계속해서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납니다. 자연세계에서 발생하는 생명체들의 계속되는 질병, 쇠퇴, 멸종, 죽음의 현상을 통해 엔트로피의 증가를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엔트로피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벨기에의 화학자 Ilya Prigogine(일리야 프리고진)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러셀 박사는, 세상에는 “무질서로부터 질서(Order out of Chaos)”가 출현하며,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의 구조로부터 생명이 탄생하여 살아가고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이 세게에서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inevitable) 요소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리가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엔트로피를 통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비유적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엔트로피가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은 엄연히 바꾸어 쓸 수 없는 서로 다른 개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악을 선을 위한 도구라고 정당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를 시도해 봄으로써 하나님이 선한 의도로 세상을 창조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세상에 악이 발생하였고, 어떤 면에서 볼 때 악은 피조물로서 창조세계가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구조 또는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cost)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질 수 있고, 저 스스로도 심각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present)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고 생명과 죽음이 함께 하며 행복과 고통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분명한 현실에 대해 신학과 과학은 나름대로 질문하고 답을 찾습니다. 세상에 악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정말이지 악은 있어서는 안 되고 또 없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악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고 말았고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통해 (또한 악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이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신도 마음을 돌이킬까?



 

민기욱
(GTU 박사과정)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내가 “과학과 신학” 분야를 공부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저널에 글을 한 꼭지 올려서도 아니요, 번역이든 학술적인 글의 출판도 아닌 일반 독자와의 만남과 “쉬운(소통하는)” 글을 통해 글이 나누어지고 응답을 접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은 현란한 어휘와 사고의 생산에 버금가는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쉬운” 글이 되길 바라며 과거 어느 지면에 썼던 글의 1.01판 정도 되는 글이니 독자분들의 이해를 부탁드린다. 

       종교인들이든 아니든 우리는 “기도”라는 걸 하곤 한다. 기도는 물론 대상을 전제로 한다. 또한 그 기도의 효력에 대해 상대적이기는 하나 분명 어느 정도의 믿음 내지는 “기대”를 하게 된다. 과연 신은 기도를 들어주시나? 종교인이라면 크고 작은 문제에 직면하여, 특히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순간이 닥치게 되면 누구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마련이다. (잠깐 사고실험을 해보자!) 기도의 순간 잠깐 멈추어 보자. 왜 기도하지? 그렇다. 기도의 효력에 대해 어느 정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가? 항상 신이 들어주셨나? 아니다. 들어주시지 않았던 적이 많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크다. 어떤 이는 항상 들어주셨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렇듯 우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갈림길에 서서 우리는 신앙의 정도를 키재기 당할 때가 많다. 기도의 효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아닌, 기도의 결과에 대한 우리의 두 반응 사이의 갈림길에서 우리의 신앙이 재단된다. 이럴 때 목회자들은 흔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혹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응답하지 않으신다, 대답하곤 한다. 나도 목회자지만 답답하다. 그것 말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만일 신께서 마음을 굳건히 정하셔서 우리의 기도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절대불변하시다면 그 때는 어쩔 셈인가? 내가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없다면? 더 나아가 기도의 효과가 없다고 판명된다면? 그러나 다행히 어느 누구도 기도의 효과가 전혀 없다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가끔 과학자 중에 기도와 과학의 관계를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허나 교회에서도, 과학계에서도 변두리일 뿐이다.  

       나는 한국과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양자물리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출판한 적이 있다. 기초적인 전제는 신학의 패러다임이 자연과학의 패러다임과 궤를 같이 해 오고 있다는 것인데, 양자물리학의 발견 이후 신학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도대체 양자물리학이 무엇이기에 신학의 패러다임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물리학적 세계관이 바뀌었는데 왜 신학의 렌즈가 바뀌는가? 또한 “변화”했다면 무엇이 변화했다는 것인가? 기도에 대해 말하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양자물리학을 운운하는가? 궁금하지 않은가?

       양자물리학과 더불어 아이작 뉴튼의 고전물리학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철학과 과학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기껏해야 17세기부터다. 그러니까 철학과 과학이 각각의 분과로 나뉜 것이 400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다. 서로 나뉘어 각각의 길을 가고 있는듯 하지만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칸트의 철학이 뉴튼의 물리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따라서 뉴튼의 물리학을 알게 되면 칸트의 철학이 더욱 쉽게 다가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떤가? 신앙의 뼈대가 되는 신학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학도 당시의 사회, 문화, 사상,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과학의 영향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뉴튼의 고전물리학에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신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학은, 신앙의 색깔은 어땠을까? 

       뉴튼의 고전물리학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포탄을 예로 든다. 실제로 뉴튼의 물리학을 활용하여 전쟁에서 서로 대포를 쏘아댔다. 정확한 위치에 캐논볼이 떨어져야 한다. 여러 가지 초기 조건, 즉 대포의 위치, 포탄의 무게, 바람의 방향, 바람의 속도 등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필요한 모든 조건을 알게 되면, 그래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이런 기초적인 과학적 전제와 산물이 철학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필요한 초기 조건을 알게 될 때, 나중의 결과를 알게 된다는 것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라 말한다. 이를 신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뉴튼의 고전물리학에 영향을 받은 철학이, 그리고 신학이 어떤 색깔을 갖게 될까? “결정론적 세계관”이 낳은 신에 대한 생각(신론)을 일컬어 오늘날 “고전적 군주모델”이라 한다. 즉, 고정된 계급 질서 속에서 신의 절대 주권과 전지하신 계획 아래 모든 것이 통합된다. 신의 전능과 신에 의한 예정은 불변하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그런데 이런 절대적 신에 대한 기존의 상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도 “고전적 군주모델”을 통해 신을 이해할 때가 많다. 마치 오늘날에도 화성 등에 우주왕복선을 보낼 때 뉴튼의 물리학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주왕복선을 만들고 운행할 때 뉴튼의 고전 물리학만을 사용했다간 큰 사고를 당할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시세계를 또한 다뤄야 하는데 이 영역에는 다른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신앙도, 신학도, 교회도 더 이상 예수가 살던 시대 속에 있지 않고,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 속에 있는 것도 역시 아니다. 질서가 변했다. 물론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대가 변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다. 변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너무 빨리 변해도 문제고, 너무 변하지 않고 고집할 때도 문제다. 그렇다면 변화의 속도만이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변화의 방향도 문제 아닌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도 변화로 인해 뭔가 선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나뿐만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서 머리를 싸매야 하는 게 아닐까?  

       신학과 신앙은 뼈와 살의 관계다. 뼈가 없이 살로만 살 수 없다. 또한 역도 마찬가지다. “고전적 군주모델”이라는 신학은 어느새 우리의 신앙이 되었고, 교리가 되었다. 뉴튼의 물리학으로 인해, 철학으로 인해, 더욱 탄탄한 시대정신이 되었고,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교회의 신학은 또한 살이 되어 신도들을 먹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신도 중에 비만이 생기는가 하면 배탈이 자주 나서 피골이 상접하기도 했다. 이때 교회 지도자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니면 체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않다. 음식 상태가 문제였다. 물론 같은 음식을 먹어도 탈나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심하면 모든 사람이 탈나겠지만.  

       그렇다면 음식의 상태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 원인이 뭘까? 수많은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세계관과 세계의 변화 상호간에 복잡미묘한 관계가 있겠지만) 세계관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단 말이다. 토마스 쿤이 지적하는 “과학혁명”이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여러 차례 있었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 다방면에 정말 큰 혁명이 일어났다. 이른바 양자물리학과 상대성원리의 발견이 그것이다. 아인슈타인이라는 개인에 의해 발전된 상대성원리와는 달리 양자물리학은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됐고,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무슨 혁명일까?  

       “양자물리학을 접하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양자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실로 놀랍다. 그러나 오늘날의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가 양자물리학의 영향 하에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양자물리학을 공부하다 처음 만나게 되는 용어는 아마 “불확정성 원리”일 것이다. 뉴튼의 영향 하에 포탄을 쏠 때는 몰랐던 사실이 미시 세계에서 발견됐다. 실험기구의 발달로 인해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미시세계에 이르러 철저하게 무너졌다.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름하여 “불확정성 원리”다. 우리는 단지 불확정적으로, 통계적으로 세상을 알 뿐이다. 그것이 자연의 성격이다. 이런 과학정신이 시대에 영향을 끼쳤고, 끼치고 있다. 이를 교회가, 신학이 비켜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첨단 전자장비와 통신기기는 교회에서 사용하면서도 실제로 과학정신이 교회에 스멀스멀 이미 들어와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과학기술이 모두 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고전적 군주모델”을 깨뜨리고 새로움을 주문하고 있다. 이를 불편하다 하여 무시할 수만은 없다.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 아닌가? 그렇다면 대화해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지난 2월 초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를 이곳 GTU에 초청하여 “과학으로 이해하는 창조세계”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연 적이 있었다. 학우들보다는 외부인들이 훨씬 많았던 강연이었다. 과학을 전공하고 “과학과 신학”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 도전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신앙인이자 과학자인 우 교수의 열정과 진지함은 실로 존경스러웠다. 그랬다. 오랫동안 “과학과 신학 독서 모임”을 꾸리고 신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아우르는 지성을 추구하는 모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때가 된 것이었다. 하여 특별강연을 빌미로 취지를 설명하고 홍보하여 드디어 소수이지만 지난 3월 12일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누구나 공감하듯이 우리는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장회익 교수의 말처럼 “과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분법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는 19세기 이전의 신학을 배운 목회자가 21세기를 살아갈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설명하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지배적이며, 냉정하고 통제적이며 이성적으로서 군주적 모델에 기반을 둔 “하나님 이해”와 기독교의 핵심인 “사랑”과는 상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교인이 겪는 혼돈과 갈등은 더욱 가중될 것이고, 교회에 대한 신뢰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로지 감정에 호소하고, 그것이 마치 성령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포장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세속의 음악도, 문화도 이성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교회가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교회에서 “역사”가 해석되어야만 하듯이 시대 정신인 “과학”도 말해져야 되는 건 아닐까.

       가끔 마켓 앞에서 십자가를 들고 계신 분들을 보게 된다. 정성이 대단하다. 그러나 묻고 싶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과 진지하게 세상에 대해 대화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대화”는 결과를 예상하지만 미리 결과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최종적인 결과를 미리 정해 놓는다면 더 이상 “대화”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의 전제와 비슷하다.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살펴 본 자연의 “실재”는 결코 “결정론적”이지 않다. 내가 생각할 때 하느님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미래를 결정하지 않으신다. 정해놓은 각본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뉴튼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빚어놓은 산물일 뿐이다.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다만 미래를 모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양자물리학이라는 체계에 의해 자리를 내주었다. 물론 양자물리학도 한 시대의 산물이겠지만 과거의 어떤 도구보다 더욱 견고하고, 더 폭넓게 사용되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게 현대 자연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인 거 같다. 물론 일관된 범주로 구성된 단 하나의 집합이 인간 경험의 풍부한 다양성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이는 뉴튼을 극복한 양자물리학도 마찬가지다. 한계를 지니고 있고 부분적일 뿐이다. 다만 “모델”일 뿐이다. 그렇다. “하느님에 대한 모델과 생각”이 “하느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도 마음을 돌이키는가?”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기도를 “대화”, 혹은 “사귐”이라고 배웠다. 그렇다.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서로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해야 한다. 한 쪽이 마음을 닫아 놓는다면 대화가 되겠는가? 생각해 보시라. 내가 마음을 닫고 있는지, 그분이 닫고 계시는지.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신학과 과학을 잇는 다리?



 

민기욱
(GTU 박사과정)


 


       성탄절을 몇 주 남겨둔 12월 초에 나는 박사논문 Proposal을 앞둔 마지막 단계인 종합고사 구술시험을 간신히 치러냈다. 엘리뇨 현상 때문에 올 겨울은 덥고 비도 많이 온다고 하던데 역시 하늘은 꾸물꾸물 대며 시험을 앞둔 준비가 덜 된 수험생의 심정을 잘 안다는 듯이 심란했다. 종합고사 위원회 4명의 교수 가운데 한 분이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을 하루 전에 통고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그리 밝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그 분은 나와 공저로 책을 출판까지 했던 절친이자 아버지같은 존재인지라 나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망은커녕 내가 85세의 미안해하는 노신학자에게 줄 수 있는 건 위로와 기도뿐이었다. 

       지도 교수인 Robert Russell과 Ted Peters 교수, 그리고 Skype를 통해 Outside Reader인 미국 중부에 위치한 Concordia College의 Ernest Simmons 교수는 법정의 피고마냥 나를 2시간가량 고기 굽는 집게처럼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종합고사를 위해 준비했던 130페이지 가량의 페이퍼들을 잘 발전시키면 훌륭한 박사논문이 될 거라 격려했다. “휴~”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네 인생에 더 이상 시험은 없을 거야.” 2시간 정도의 종합고사 구술시험 후 또 다시 1시간 정도 박사논문에 대한 조언을 들은 후 밖을 나서는데 비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12월의 차가운 비였지만 눈송이처럼 달콤했다.  

      “신학과 과학”이라는 간학문적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이 곳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at Berkeley, CA)에 온 지 이제 10년을 넘어섰다. 석사과정 후 박사과정 6년차의 한국유학생이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고민이 깊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시절 “이안 바버(Ian G. Barbour)에 의한 양자물리학과 신학의 대화”를 목회학 석사 학위논문으로 쓰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유학의 길을 떠나 이곳 GTU에서 다시 석사 학위 논문으로 “God, Nature, and Quantum Theory”를 썼었다. 감사하게도 이 논문에 관심을 가졌던 Kenan Osborne 교수 (전 교황인 라칭거와 한스 큉의 제자다!)의 제안으로 2014년 1월 “Science and Religion: Fifty years after Vatican II” 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게 되어 “신학과 과학”이라는 학문에 첫걸음을 디디게 됐다.  

       그러나, 이 분야를 공부하며 큰 보람과 의미를 곱씹었던 순간은 학위 논문과 책 출판으로 인해 생겼던 저작권료가 아닌 지역 신문에 15차례에 걸쳐 썼던 “신앙과 과학” 칼럼으로 인한 반응을 목격하던 때였다. 각주 하나, 과학 공식 하나 없이 캘리포니아 지역에 사는 한인 이민 교인들을 대상으로 목회자로서 매주 아주 짧을 글을 쓰며 겪었던 고민과 반응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리에 생생하다. 한인 이민 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1회성의 세미나에 나섰다가 멱살을 잡힐 뻔한 경험은 오히려 “그래 내가 잘 하고 있구나!” 하는 보람을 안겨주었다. 책에 파묻혀 있던 내게 “전투력”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 지면에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 이 분야의 탁월한 학자도 아니고 글재주가 훌륭한 사람도 못된다. 그저 “서당개 3년”이라고나 할까! 몇 회에 걸쳐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니 큰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또한 이 지면이 학문의 진득한 향연을 펼치는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신문에 칼럼류를 쓸 만한 이 분야의 대가도 아니다. 다만 개인의 일기처럼 “과학과 신학” 분야에서 공부하는 신학도가 공부하고 독서하고 토론하다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을 모아다가 조금 정리해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라 여겨주길 바란다. 당연히 학문적인 글을 위해 인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또 하나. 조금 더 깊고 넓게 공부하고 싶은 이들은 혹은 재미있는 꿍꿍이가 있는 이들은 연락을 주길 바란다. 내공은 깊지 않으나 놀기는 정말 좋아하니까. (이어지는 글은 예전에 한국일보에 내가 썼던 “신앙과 과학” 칼럼의 일부에서 왔다.)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 “기독교 신학과 과학기술”의 연구는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이안 바버(Ian G. Barbour)를 중심으로 수많은 신학자들은 급변하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로 인해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자못 심각한 고민을 오늘까지 해 오고 있으며, 이러한 고민과 연구는 앞으로도 상당히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한신대학교 종교와 과학센터의 최근 출범은 매우 고무적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미래가 과학기술의 시대가 될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신학, 종교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개신교계는 이런 변화에 대해 무심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어쩔 수 없어 그냥 막연히 쳐다보거나, 또는 아예 반대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예를 들면, 10여 년 전, 한국의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해 국가 이익의 측면에서 무한한 부가가치를 예상해 국가가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을 무렵, 그리고 그 연구의 지나친 과장, 확대로 인해 재판까지 갈 때까지 한국 기독교 교계는 각 교단의 헌장에 “줄기세포(stem cell) 연구”에 대한 변변한 문구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지금은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그 이후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당선인 신분으로 “줄기세포” 연구에 막대한 연구비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그 저변에 있을 정치, 경제적 계산을 미루더라도 이미 미국 신학계의 경우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문제를 이미 상당 부분 확보했음을 볼 때 한없이 부러웠다.  

       이런 거대 담론을 제쳐두고서라도 우리와 같은 소시민이 일상 생활에서 부딪히게 되는 “과학과 신앙”의 고민, 즉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많은 고민거리들이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이에 나는 “신학과 과학”이라는 간학문 분야에서 공부하는 신학도이자 도반으로서 “과학시대의 기독교인”을 준비하고자 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그 고민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혹은 그 고민과 갈등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의 것임을 깨달아 서로 연대하고 공감하는 일에 내가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과학기술자로 한평생을 사셨던 내 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다. 실험이 끝난 어느 오후 무렵, 40대 중 후반의 후배가 책상에 엎드려 그야말로 “엉엉” 울고 있더란다. 집안에 불상사가 생겼나 걱정돼서 물었더니, 과학자와 기독교 신앙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때문에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울고 있다고 말하더란다. 이 말씀을 전하시면서 아버지는 자못 심각하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 이 갈등이 모든 신앙인들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내가 하는 공부가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GTU는 여러 개의 신학교가 유기적으로 연대하고 있는 연합신학대학원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침례교뿐만 아니라 몇 개의 가톨릭 신학교가 서로 긴밀하게 협업을 하는 유기적 공동체를 꿈꾼다. 덕분에 GTU에서 공부하는 신학도는 자연스레 여러 교단을 넘나드는 에큐메니칼 스승을 두게 된다. 내 경우 United Church of Christ 목사인 Robert Russell이 지도교수이고,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목사인 Ted Peters와 Franciscan 신부인 Kenan Osborne 이 스승이다. GTU 소속 Pacific School of Religion 캠퍼스의 마당에서 보면 멀리 금문교가 보인다. 내 지도교수인 Robert Russell이 설립하고 내년이면 35주년을 맞이하는 CTNS (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의 로고 그림은 금문교다. 두 곳을 잇는 것이 다리인 것처럼 “신학”과 “과학” 혹은 “종교”와 “과학”을 잇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안 바버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량적 역할을 통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꾸 의문이 드는 건 왜일까?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잇고, 서로 오고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자, 그러면 “신학”은 이쪽에 “과학”은 저쪽에 있다 하자. 신학 하는 이들은 과학 혹은 기술 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묘사하고 때론 적극적으로 경고한다. 이에 과학 하는 이들은 신학 혹은 종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묘사하고 간섭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물론 내 스승인 Robert Russell 교수는 Creative Mutual Interaction 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신학”과 “과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주장한다. 그러나 내 인상은 “신학” 혹은 “종교”에서 종사하는 이들의 바램일 뿐 “과학”은 그야말로 “무심”하다. 물론, “신학과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러 학자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유형을 묘사해 오고 있다. 나중에 이 유형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전히 뭔가 자꾸 만족스럽지 않은 게 남는 까닭은 뭘까?  

       한국에 계신 아버지의 소원을 기억한다. 그것은 전 세계에 있는 “다리” 사진을 찍는 거였다. 무슨 “대교” 이런 것도 있겠지만 크게 꾸미지 않은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찍고 싶은 거였다. 부전자전이랄까? 나는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놓고 싶은 건가, 아니면 “다리 같지 않은 다리”를 그저 유랑하면서 찍고 싶은 건가. 



ⓒ 웹진 <제3시대>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제3시대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by 제3시대

공지사항

카테고리

웹진 <제3시대> (835)
특집 (8)
시평 (96)
목회 마당 (61)
신학 정보 (139)
사진에세이 (41)
비평의 눈 (59)
페미&퀴어 (25)
시선의 힘 (139)
소식 (154)
영화 읽기 (34)
신앙과 과학 (14)
팟캐스트 제삼시대 (12)
연구소의 책 (15)
새책 소개 (38)
Total : 381,869
Today : 63 Yesterday :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