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나 : 계시, 이성, 고전, 참여와 종말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프롤로그


역사적 예수와 관련해 한때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간주하기도 했던 웰스는 위에 인용된 고린도 후서 6장 2절을 설명하면서 왜 바울은 지상의 예수 시기가 아닌 자기의 시기를 구원의 날로 선포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다시 말해, 예수가 지상의 인물로 존재했다면 구원의 날은 바울이 선포하고 돌아다니는 지금이 아니라 갈릴리의 어느 한 때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주석을 달고 해명을 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왜 과거의 어느 한 때가 아니라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구원의 날로 선포했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이뿐이랴.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소식을 복음이라 칭하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향해 개들이라 딱지 붙이며 심지어 멸망에 이르는 소식을 전한다고 비난한다. 알다시피, 바울은 제자들처럼 지상의 예수를 본 적도 없으며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빚기까지 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훨씬 강경한 분파, 예를 들면 할례당과 같은 분파들과 갈등이 빚어졌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돌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구나 다른 학자들은 생애 마지막까지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 특히 주의 형제 야고보와 화해를 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대담한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베르거는 『신약신학의 역사』에서 “바울의 사도 개념에 나오는 유비들은 현재적 요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파송 받은 자의 개념과 관련됨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각주:1]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성령 체험은 할례로부터 자유로운 이방선교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모든 한계들을 제거하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각주:2]라고 적었다. 나아가 은사운동 및 종말론 역시 성령을 체험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양태가 처음부터 이렇게 존재했던 것일까? 다시 말해, 이러한 이해들은 예수에게서 연원한 것일까? 흥미롭게도, 베르거는 “헬라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주의자로 묘사할 수 있다.”[각주:3]고 말한다. 게다가, 성령을 모르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세례까지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던 전통이 초기에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행전의 이야기를 참조하면, 바울이 어떠한 전통에 서 있는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했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달변가이며 성서에 능통했다. 이 사람은 주님의 길을 배웠고 영으로 달아올라 예수에 관한 일들을 정확하게 말하고 가르쳤으나, 오직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아폴로가 고린토에 있는 동안… 바울로가 그들을 향하여 당신들이 믿게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그에게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잘 알다시피, 성령의 역할과 체험에 대한 강조 그리고 그에 따른 신학적 전개가 바울에게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 바울은 헬라파 유대계 그리스도인 전통에 서 있는 셈이다. 사실, 이 전통에서는 “종말론은 현존하지 않는 종말에 관한 가르침이나 소식이 아닌 하나님의 현존방식이다. 만약 이것이 성령이라면 비로소 축복과 저주 또는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각주:4]는 베르거의 말처럼 성령이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전승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가 역사적 정확성이 아니라 현재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이라는 인식이 빚어지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훌륭한 예가 복음서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서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분의 지상적 생애와 그 전승마저도 자신의 신학적 이해와 필요를 위해 때론 침묵하거나 때론 다른 방향으로 유도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장 6절),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갈 6장 17절)는 그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이라는 바울의 선포는 기괴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물론, 바울의 이러한 노력과 수고는 성서가 역사적 정보를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담고 있는 문헌이라며 성서무오설을 고집하는 문자주의자들이나 역사에 대한 정확한 복원만이 교회와 신학을 진정으로 새롭게 세우는 길이라며 역사비평학적 주석을 힘써 외치는 자들에겐 당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때문에,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문자주의자들이나 역사비평학적 주석자들 공히 이단이라고 외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 다소 보수적인 루크 티모시 존슨의 입장을 영지주의 입장이라고 공격한 크로산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존슨은 “우리의 주제는 역사적 방법이 추구하는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살아 있는 예수를 배우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런 복합적이고 비평적인 조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는 곳, 즉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각주:5]라고 받아친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각주:6]


나의 책에서 역사적 탐구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전제에 도전했습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전제에 도전했지요. 첫째 역사라는 용어를 좁은 의미에서 정의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과거에 대해 인간이 구성한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모든 역사의 불가피하게 선택적이고 편협한 성격과, 수정의 여지가 있는 성격을 강조했지요. 둘째 부활을 초기 기독교를 출발시키고 규정하는 근원적 요소로서, 또한 역사적 방법만으로는 온전히 입증할 수 없으나 “진정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신앙체험으로 강력하게 해석했습니다.


어쨌든, 존슨의 이러한 주장을 참고한 다음, 시계를 1세기로 돌린다면 존슨과 흡사한 이해를 지닌 사람으로 바울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존슨을 바울의 복화술사로 간주해도 무방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현존하는 분으로서의 주님/성령에 대한 바울의 체험과 그에 따른 살아 있는 주님의 현존에 대한 바울의 강조를 존슨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존슨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7]


예수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모든 것이 변한다. 이것은 더 이상 역사적 기록과 관련되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규칙을 깨뜨린 자 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묻게 되는 문제이다. 이때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시는 분이다. 다시 말해, 단지 분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억의 대상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대면하여 우리에게 지시하는 대리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관해 배운다는 것에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든 오늘날이든 바울과 존슨의 이러한 주장을 모든 사람들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크로산은 존슨을 영지주의자로 분류하고 있다. 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말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러한 관점은 적어도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 가지 유용한 관점은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이나 역사비평적 주석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성서 자체를 역사로 간주하고 문자를 고수/숭배하거나 아니면 엄격한 역사적 방법에 따라 역사를 정확히 복원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차라리 현존하는 주님/성령을 따라 이전의 전승들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심지어 변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임을 가리킨다. 내게 이것은 참여와 종말의 문제로 수렴된다. 텍스트 읽기와 관련해 에코와 데리다가 벌인 논쟁을 떠올릴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1.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된 성서


성서는 어떤 책인가 라고 물으면 일단 내 머리엔 어렸을 적, 교회 유년 주일학교 오후 시간 잘 부르던 찬송가 가사,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밌게 듣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면서 가슴이 따뜻하고 포근해지며 어느새 쉼과 위로와 관련한 여러 이미지들이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이런 순간은 대단히 짧다. 정신을 차리고선 성서가 무엇이지 자문한 다음 답변을 주고자 애쓰지만 곧바로 딱히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난처한 형국에 빠지게 된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디모데 후서 3장 16절,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라는 말을 은근 슬쩍 갖다 댄다. 그렇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이제는 낯설어진 용어 계시. 어쨌든, 이에 대해 라이프 성경 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각주:8]


문자적인 의미는 ‘···로부터 베일을 벗기다’, ‘펼쳐서 보여 주다’로서,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어 명확하게 밝히는 행위, 즉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구원의 신비와 거룩한 진리, 또는 당신의 뜻과 섭리를 사람들에게 친히 나타내 보여 주시는 거룩한 행위를 가리킨다(고후 12:1; 엡 3:3; 골 1:25-27). ‘묵시’라고도 한다. 하나님과 관련된 신적(神的) 지식은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택하고 세우신 신실한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시마다 때마다 당신의 뜻을 보여 주셨고,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 세상에 보내 당신의 선한 뜻과 섭리를 친히 보여 주시고 또한 이루셨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주체요, 내용이며, 완성자이시다(계 1: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지금까지 되어진 계시의 내용을 책으로 기록하여 주셨다(딤후 3:16; 벧후 1:21).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인데(옵 1:1; 나 1:1; 암 1:1), 이런 점에서 성경말씀은 ‘계시의 책’으로도 불린다.


이런 정의를 보면 감동을 느끼고 무릎을 치면서 진리를 얻은 냥 자신만만해야 하지만 사실 별 감흥이 없다. 신앙생활을 너무 오래해서일까. 글쎄다. 그보다는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런 정의는 성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일단 받기 때문이다. 이미 정경으로 승인된 성서본문을 들고 이런 저런 식으로 해명하는 꼴이라고나 할까. “비록 신약성서의 책들이 하나의 수집물의 일부로서만 교회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고는 해도, 그 책들 중에 어느 것도 그러한 수집물을 이루게 되리라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된 것은 없다… 1세기 말 이전에 이미 확정된 구약 경전이 있었는지, 따라서 원시 기독교가 구약을 하나의 완벽하게 규정된 통일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했는지 여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 Justin에서부터 2세기 말까지는 우리는 신약 정경의 발달에 대해서 단지 불확실한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각주:9]는 큄멜의 말을 참조하면, 과연 저렇게 간단하게 정의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정경이 형성되는 과정과 사도들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이야기나 편지를 쓴 그 순간을 서로 혼돈하지 말라고 충고할 것이다.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사실 이것도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성서 자체 내에서도 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대자들 간의 논쟁을 살피다보면 과연 하느님의 영감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난처한 상황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바울의 적대자들은 영감을 받지 않은 반면 바울은 영감을 받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바울과 달리 영감을 받지 않은 채 행동을 했던 것일까? 등등 여러 생각이 든다. 결국, 영감이나 계시라는 말은 정통과 이단이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삼을 때서야 비로소 타당하게 쓰일 수 있는 용어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뿐이랴. 사람들은 계시라는 말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각주:10]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영감된 것이며 무오한 것을 믿을진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성경도 영감된 것이며 무오한 것을 믿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예수의 말씀은 영감되고 무오한 것을 믿으면서 그것을 기록한 것은 유오한 것으로 보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곧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성서가 이처럼 무오하기에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세계관은 성경적일 때만 우리의 생활을 정당하게 인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1]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만을 참조한다면, 무오성 논지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사실 하나님이 영감을 불어넣어 오류가 전혀 없는 그 말씀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성서는 오류가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필사자들이 베낀 말씀이 아닌가? 부분적으로는 정확하게 베꼈을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부정확하게 베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자필 원고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더군다나 대다수의 사본들은 시간적으로 원문보다 수 세기나 후대의 것들이고,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각주:12] 게다가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같은 본문을 읽더라도 제리 폴웰 같은 사람은 성서에 근거해 인종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웰 뿐일까. 흑인노예들을 정당화한 서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서가 아주 요긴하게 쓰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때문에, 성서가 오늘날의 문제에 대해 정답을 주는 유일한 창구라고, 따라서 거기에 비추어 자신을 검토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스퐁의 말을 들려주도록 하자.[각주:13]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이방인, 혹은 악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여 분리되어야 할 것을 정당화하려고, 히브리 성경의 많은 본문들을 별 어려움 없이 인용하였다. 그것은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주제였으니, 예컨대 에스라 10:12, 15, 느헤미야 13:1~3을 보라. …복음주의적인 집단에서 하는 아동훈육은 보통 신체적인 처벌의 경향을 띠는데, 이는 아이들이 죄속에서 태어난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아이들은 악마적이기 때문에 성경의 잠언이 가르치는 바대로 길러야 된다. 즉 자식이 미우면 매를 들지 않고, 자식이 귀여우면 채찍을 찾는다(잠언 13장 24절). …똑같은 정신상태는 이른바 닳고닳은 주류교회들 속에서도 보다 복잡하고도 감정적인 이슈들에 대한 대응에서 발견된다. 이런 주류교회들은 미국 남부 근본주의자들이 옹호했던 흑백분리주의 패턴을 그대로 변호하라면 매우 당혹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편견은 창조의 과정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정해진 부분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리고 성경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정은 미국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미국의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듯한 여신도에 대한 비하나 성추행은 뉴스거리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민을 비롯한 동성애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문구에 박힌 전투적 신앙은 타종교에 대한 무례를 넘어 말살하고자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절에 들어가 땅 밟기를 하거나 단군상의 목을 자르거나 하는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더욱이 “한국은 독재를 해야 한다. 하나님도 독재를 하셨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가 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독재하는 곳”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대체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성서가 오류가 없는 진리를 전하는 책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 포이에르 바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아주 인상적이다.[각주:14]


신앙은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고 구별한다. 신앙은 진리를 오직 신앙에로 돌린다. 신앙은 본성적으로 배타적이다. 단지 하나의 일만이 진리이고 단지 한 사람만이 신이며 단지 한 사람에게 신의 아들의 독점권이 소속된다. 다른 모든 것은 무이며 오류이며 망상이다. 신앙은 특수한 명예감과 자기 감정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주인에게 공적인 명예를 돌리기 위하여, 자기를 위한 모든 공적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 공적이 그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의 명예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명예감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 신앙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대하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쁘게 대한다. 신앙 속에는 악한 원리가 가로놓여 있다. … 신앙은 본질적으로 비관용이다. 신앙은 사랑의 반대물이다. … 신앙은 처벌한다.


이러한 지적과 함께 포이에르 바하는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인간과 인간 자신과의 관계,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과 자기의 본성, 즉 자기의 주관적인 본성과의 관계이다. 신적 존재는 인간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각주:15]라고 선언한다. 물론 이 같은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일말의 진실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잔혹한 종교적 행위들이 성서에 근거해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된 진리로 받아들이고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그것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을 윤리적으로 비인간적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인간적 욕망과 야욕을 하느님의 이름을 빌미삼아, 특히 계시된 성서라는 말을 들이대며 얼토당토않게 일삼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신존 존재는 인간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포이에르 바하의 말이 과연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성서를 빌미로 타자를 처벌하면서 동시에 자기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했다며 교회에서 칭송받기를 원한다면 포이에르 바하의 말을 한번쯤은 기억해볼만 하지 않는가.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쯤에서 사람들은 그러면 당신에게 성서란 대체 무엇이요 하고 물을 것 같다. 어만의 이야기로 대신하고자 한다.[각주:16]


나는 종종 이렇게 쓰인 범퍼 스티커를 본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믿는다. 그러면 결론은 분명하다.” 나는 그런 말에 이렇게 응답한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전해주는 책이라고 당신이 옆에 끼고 다니는 책이 만일 인간의 말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서가 낙태문제와 여성인권 문제와 동성애 문제와 종교적 패권주의 문제와 서구식 민주주의 문제 등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성서를 거짓된 우상으로 삼지 않고, 또한 전능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삼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서가 우리 삶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무오한 지침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명백한 이유는 많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를 파다보면 또 다른 이유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만이 유일하게 계시된 책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하는 난점이 존재한다. 일단 오늘날 카톨릭과 성공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서와 일반적으로 한국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서 간에는 차이가 있다. 일반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서에는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카톨릭과 성공회는 이러한 문헌들도 경전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며 소중히 여긴다. 이 문헌을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 간에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서로 차이 나지 않을까? 물론 차이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한데, 초기 기독교에서 성서란 구약이며 신약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구약이라고 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고 보는 큄멜의 말을 참조하면 또 다른 생각이 전개된다. 게다가 어만을 참조하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 것이다.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이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동고동락한 사도들이 썼다고 알려진 또 다른 복음서들과 행전들 그리고 서신과 계시록 계열의 다른 텍스트들도 신봉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각주:17] 사실, 작고한 하바드 대학교의 신약학자 헬무트 쾨스터는 『고대 기독교 복음서들』 이라는 책에서 정경에 편입되지 못한 책들을 살피면서 우리가 가진 정경문헌들만이 사도적 기원과 역사적 우선권을 지닌다는 주장은 도그마적 편견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Q자료, 도마복음서, 구주의 대화록, 에거톤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등을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할 때 권위를 지니는 유용한 문헌으로 제시했다.[각주:18]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가진 경전이 아닌 초기 교회에서 애용되던 다른 문헌들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오늘날 제기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답을 구할 수 있는 바는 아니다. “영지주의에 속하며 페이절스가 초기의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간주하는 도마복음 끝 부분을 살펴보자. 이 대목은 절대로 페미니즘에 속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학자 캐스린 그린 매그라이트가 지적하듯이 영지주의 저술은 여성과 관련해 문제 있는 신약성경 단락들 무색하게 할 정도로 여성 혐오증이 담긴 반여성적 진술로 가득하다.”[각주:19]고 지적한 맥그라스의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경에 편입되지 않은 문헌을 들여다보면 정통이 성서를 기반으로 어떻게 여성들을 억압해 왔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게다가 정경에 편입된 경전이 보여주는 가부장적 초기 기독교와는 또 다른 모습, 특히 오늘날 제기되는 페민과 관련해 정통과는 다른 모양을 취한 또 다른 기독교를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유익을 구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여타 비전되는 문서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내세워 여성의 활동이 베드로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간주하는 정통파 공동체 지도자들을 위협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 베드로가 저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그가 여성을 증오하기에 저는 그가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수에게 베드로와 자유로이 말을 나누지 못함을 알렸다.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정반대의 의견을 펼치고 있는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서한이며 대화 내용으로 응수하였다. 가장 유명한 예는 앞서 인용한 바울의 이름을 사칭한 서한이다. 디모데 전서 및 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여자가 남자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각주:20]

어쨌든, 이쯤에서 논의를 끝내자. 중요한 물음, 즉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계시가 아니라면 성서란 무엇인가와 관련해 되새기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바울의 말이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중심으로 현재의 삶의 모순들을 돌파하려는 그의 관점.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부딪혀야 하는 프론티어, 즉 선교사로서의 그의 삶, 나아가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그의 소망.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은 가슴을 울린다. 과거에 적힌 문자가 아니라 현존하는 하느님의 영을 따라 도래할 그분을 고대하며 성서에 박힌 문자를 읽어가는 방식. 성서란 내게 그러한 것이며, 따라서 읽기란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눈을 통해 읽을 때 드러나는 유한성을 인식하는 읽기다. 때문에 성서를 이성적으로 읽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찾을 때, 유용하게 쓰라고 준 도구라 믿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1. 클라우스 베르거, 『신약신학의 역사Ⅰ』, 박두환 옮김, 민들레책방, 2003, p.102 [본문으로]
  2. 클라우스 베르거, 같은 책, p.103 [본문으로]
  3. 클라우스 베르거, 같은 책, p.272 [본문으로]
  4. 클라우스 베르거, 앞의 책, p.103 [본문으로]
  5. 루크 티모시 존슨, 『살아있는 예수』, 손혜숙 옮김, 청림출판, 2012, p.31 [본문으로]
  6. 루크 티모시 존슨,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손혜숙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p.239 [본문으로]
  7. 루크 티모시 존슨, 『살아있는 예수』, p.23 [본문으로]
  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90258&cid=50762&categoryId=51387 [본문으로]
  9. W. G. 큄멜, 『신약정경개론』, 박익수,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p.482~494 [본문으로]
  10. 김의환, 『현대신학과 개혁주의 신학』, 총신대학교출판부, 1999, p.359 [본문으로]
  11.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 옮김,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1992, p.18 [본문으로]
  12. 바트 어만, 『성경왜곡의 역사』, 민경식 옮김, 청림출판, 2006, p.31 [본문으로]
  13. 존 쉘비 스퐁, 『성경을 해방시켜라』,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pp.24~28 [본문으로]
  14. 포이에르 바하, 『기독교의 본질』, 박순경 옮김, 종로서적, 1982, pp.129~133 [본문으로]
  15. 포이에르 바하, 같은 책, p.46 [본문으로]
  16. 바트 어만, 앞의 책, p.43 [본문으로]
  17. 바트 어만,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박철현 옮김, 이제, 2008, p.24 [본문으로]
  18. Hellmut Koester, Ancient Christian Gospels, SCM Press, 1990, p.xxx~xxxi [본문으로]
  19.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홍병룡 옮김, 포이에마, 2011, pp.124~125 [본문으로]
  20. 일레인 페이절스,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하연희 옮김, 루비박스, 2006, 여pp.118~1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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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깨우침
    2018.06.09 18: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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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읽었봤습니다 만 모든해답은성경에있습니다내가이해못한다고해서
    이런주석저런주석가져다내생각과비슷한것으로맞춰가시는신학은더이상신학이아닌인학입니다
    주석으로인해만국이무너져있습니다
    성경은하나인데수백수천의주석으로교단을나누고 성도를나누고서로비난과비평으로인해신앙인들이교회를떠납니다
    부디신학을하신다면성경말씀에충실하시면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X) 예수가 부활했다(O)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도둑들이 무덤 막은 돌을 굴려 버린 뒤 그 수의를 벗겨 가고, 다시 승냥이떼가 그의 죽은 몸을 물어 간 일이 입에서 입으로 옮는 사이에 좀 부풀리어 졌다손 네가 흔들릴 게 무엇이냐. 거기에 휘말린 줏대 약한 사람들이 헛것을 보고 그가 다시 살아 났다고 수군대며 다닌들 네가 두려워할 게 무엇이냐.”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설에 놀란 주인공 아하스 페르츠가 그가 찾아낸 신적 존재인 ‘위대한 존재’에게 달려갔을 때 그 위대한 존재가 아하스 페르츠에게 해 준 말로 나온다.

물론 이 이야기가 예수의 부활에 관련해서 특별히 사실성이 더 있다거나 그럴 것은 아닐 것이다. 애당초 어떤 역사서 같은 것의 기록도 아니고 말 그대로 소설 중의 이야기니. 그래도 예수의 부활의 사실성에 대해서 이 정도로 심한 야유도 드물 듯 하다. 하긴, 아예 예수라는 사람의 실존 자체를 의심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니 그런 입장에서 보면 저런 야유도 필요없는 셈이긴 하겠다.


2. 

사실 성서에서도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극구 애쓰고 ‘증명’을 하려 드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런 건 아니지 않나 싶다. 일단 잘 알려진 대로, 마가복음서는 초기 형태에서는 무덤이 비었다더라는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나중에 다른 복음서 부활 기사 요약본이 덧붙었다. 다른 복음서의 기사들도 도마가 못자국에 손 넣어 봤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처음 봤을 때는 모르다가 어떻게 알게 되니 사라지고 없더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바울의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이야기도 목격자 명단을 쭉 늘어놓다가 맨 마지막에 “나도 봤어요” 해 버리니, 바울이 예수를 생전에 봤을 리가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거 뭐하자는 거야 생각이 들 수밖에 없기도 하고.

여기에 덧붙인다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외부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시위와 선전을 하기보다는 내부 결속을 위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이들이 이미 많이 지적하는 대로, 성서 속에서의 부활한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만 나타났지, 그를 죽인 로마와 이스라엘 상층부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뭐 그래도, 확실한 것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처형당할 때 다 도망갔다가, 혹은 위에 언급한 예수의 실존 자체를 의심하는 견해까지 고려한다면 자신들이 그랬다고 말을 했다가,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하면서 다시금 자신들의 활동을 재개했고 오히려 그 전보다도 더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것이겠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반전을 생각한다면, N.T.라이트가 말했던, 그 당시 누군가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면 예수의 빈 무덤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거다라는 말이 그럭저럭 말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서두에 소개했던 야유가 사실이라고 해도 빈 무덤 사진은 찍을 수 있는 거긴 하겠지만.


3. 

그러니 이렇게 한 번 물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은, 그 추종자 집단이 아닌 외부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보였을까/보일까.

일단 부활이라는 것이, 생전의 몸과 같은 것이든 아니면 어떤 새로운 몸이든, 다시 생명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가 그 당시에 그리 드문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니, 그런 이야기 중의 한 건으로 수용이 되려면 될 수 있었을 것도 같다. 물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가 애당초 그렇게 손쉽게 수용될 이야기가 절대 아닌지라, 당장 복음서에도 에이 그게 말이 되냐 만약 그렇다면 예를 들어 형이 죽어서 동생이랑 결혼한 여자가 나중에 형이랑 동생이랑 자기랑 다 부활하면 어쩔려구 그래 이랬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서도.

그런데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어쨌든 수용이 가능한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활한 사람이 ‘예수’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다. 일단 이렇게 되묻게 되지 않을까. 예수가 도대체 누구여? 존재 자체를 의심받을 정도로 남긴 기록이 없다시피 하니 이른바 듣보잡 아니겠는가.

듣보잡에서 조금 더 알아 보니 이 친구 사형수란다. 그것도 그냥 사형수도 아니고 불온분자를 처형하는 십자가형을 당한 사형수. 얼레? 그런데 그런 친구가 무려 부활을 했다니 이건 말이 되냐 안 되냐는 둘째쳐도, 불온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듣보잡 혹은 불온분자가 부활했다고 이야기를 한단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 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란다. 속된 말로, 이게 말이야 방구야?


4. 

이게 말이야 방구야인 것 같은데 그런데도 그런 듣보잡 혹은 불온분자가 부활했다는 게 구원의 길이란다. 그렇다면 그런 구원은 지금의 삶을 그냥 유지하면서 혹은 더 상승시키면서 가능한 건 아니지 싶다. 어느 영화 대사를 문면만 보고 끌어 온다면, 오히려 인생을 망치는 구원, 듣보잡이나 불온분자의 길로 빠질 수도 있는데 그래도 받을래 말래라고 나를 밀어붙이는 그런 구원이라는 게 더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이런 구원은 다른 구원과 경쟁을 하거나, 혹은 다른 구원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다원주의’에 걸맞는 구원도 아닐 터이고.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그런 구원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 달 국가조찬기도회인지 뭔지 하는 자리에서 그 자리에 설교하러 나온 목사가 아니라 축사하러 나온 대통령이 오히려 진짜 설교다운 설교를 했다고 칭송이 자자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구원의 길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대통령의 ‘설교다운 설교’보다는, 후보 시절부터 대통령 본인이든 휘하 장관이든 계속 한국 기독교에 “적어도 이건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께”란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대상이 되는, 성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보면 그 ‘설교다운 설교’도, “적어도 이건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께”와 연관이 전혀 없지도 않은 것이기도 하겠고.

그러고 보니 어느새 1년이 가까워 간다. 대선 토론 자리에서 또 한 번 “교회가 원하는 대로” 발언을 해 준 바로 그 사람에게 성소수자들이 항의를 하러 찾아갔던 바로 그 일이.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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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스도인
    2018.04.15 08:5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신학의 기본은 성경을 믿는 것이다
    근데 성경을 안 믿는 신학?

    흔히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의 진리를 믿지 않고
    오히려 성경의 모순을 파헤치는 자들이 많다

    왜 성경도 안 믿으면서
    신학이란 이름으로 그렇게 연구를 하는가
    시간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다른 종교를 연구하거나
    다른 학문을 연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신학정보가 아니고
    차라리 불신학 정보가 맞겠다

    앞으로 불신학 정보란 이름으로
    글을 올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바울신학가이드24]



알란 바디우 II : 바디우에게 진리란 무엇인가?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아감벤 이전에 다루었던 지젝과 바디우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 둘은 한 스승을 모신 사람들이다. 바디우는 직계제자쯤 되고 지젝은 그 스승의 글을 읽고 독학으로 엄청난 후계자로 우뚝 선 제자쯤 될 것이다. 아담 코스트코(2008, 77~78)는 둘을 소개하며 그들의 철학의 위치를 설명하였다. 지젝과 바디우가 모신 스승이 있었으니, 바로 포스트모던의 전설의 세 명의 고수 중 하나인 라깡이었다.(데리다, 라깡, 푸코) 이 세 명의 전설의 고수들이 포스트 구조주의 내지는 포스트모던의 주축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이른바 진리(truth)라는 단어를 인문학의 세계에서 지워버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은 없는데, 데리다는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해체라고 했을 것이고, 푸코는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으면서 득의의 웃음을 지을 것이고, 라깡 또한 프로이드를 재발견하며 진리라는 Big other는 이미 구조화된 주체가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그리움을 지우기 위해 위안거리로 만들어낸 무엇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결국, 그들에 의해 진리를 더는 말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또는 말하려면 그들 이전의 방법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말해야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결국 진리를 아무도 말하지 않는 시대에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라깡의 제자였던 바디우였다. 바로 스승의 진리를 없앤 그 자리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진리를 구성해나간 것이다. 먼저 왜 그랬어야 했는지 생각해 보자.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다원화된 사회라는 말이 필자에게는 유행이었다. 즉,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여러 가치들이 공존하게 된 사회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1990년대에는 이른바 플루럴리즘, 다원주의라 종교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 간의 대화라든가 구원의 길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는 여러 가지 말들이 유행처럼 번져갔다. 그것은 결국 포스트모던이라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거기에 대한 성찰과 개발이 필요한 시대였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그 이전의 종교적 도그마와 가치들로 그러한 조류를 억누르는 방법을 선택했었다. 아마 작금의 교회의 여러 현상은 그러한 선택의 부작용인지도 모른다. 자 그럼 생각해 보자. 과거로 회귀하는 방법이 힘들다고 한다면, 그럼 진리라는 것을 포기하고 다가 치적 사회에서 여러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로 나가야 할까?


바디우는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에 괄호를 치고,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또는 예측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엑스 표시를 하고, 순수하게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사건 중에 그야말로 보편적인 것 모든 가치를 안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현재화 할 수 있는 사건은 언제나 어떠한 조건(상황, condition)에서 시작된다. 한국이란 나라의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정치), 어떤 연구 담론에 의해 운영되는 하나의 과학적 상황에서(과학), 어떤 기대들이나 일반적인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한 예술적 상황에서(예술), 또는 개인들간의 관계에서(사랑) 진리 사건은 출연한다 진리-사건(Truth-event)이 출연하면 어떤 이들은 무시해 버리고, 또는 부정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고 이를 받아들인다.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주체들이 되며 이 진리-사건의 결과를 따르는 사람들의 시도를 진리-과정(Truth-process)이라 한다. (Kotsko, 78-79)


바디우의 생각에 좀 더 접근하게 위해 왜 그가 진리-과정의 예로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을 말하면서 철학을 언급하지 않는가를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철학은 그 스스로 진리-과정을 도출해내지 못한다. 오로지 “진리란 존재한다.”고 말할 뿐이다. 철학은 하나의 독립적인 담론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신의 영역을 위해 외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외부를 구성하는 것이 조건(Condition)이다.(Steven Corcoran, 2015, 68) 그 조건들을 바디우는 대표적으로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서구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울 플라톤의 철학은 바로 위의 네개의 조건들로 부터 그의 철학을 구성하였다. 그러므로 철학은 진리들이 머무르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역할을 하고 이 공간 자체는 시간과의 관계를 통해 진리를 나타내게 된다. 즉, 진리-사건이 진리-과정이 되는 것을 감지하고 거기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인 것이다.(Alain Badiou, 2009, 521)


아주 어설프게 바디우의 진리-과정과 철학의 역할에 대하여 설명하려 한 것은, 바로 바디우가 바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이란 조건에서 나타나는 진리-과정에 다시금 이름을 부여하는 철학은 비록 진리-사건이 그 이전에 계획되거나 예상되어진 어떤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의 지식의 형태를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로서 보편성을 확보해야한다. 바울은 이와는 달리 매우 구세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신화적 요소’를 가진 ‘예수가 부활했다’는 오직 하나의 선언에 기반하고 있다.(Badiou, 2003, 108) 그리고 바울은 그 하나의 특수한 선언을 통하여 보편적 진리-과정으로 들어가는 매우 독특한 사유구조를 보여준다고. 곧 바디우는 바울이 ‘보편에 대한 첫번째 이론가들 중 하나’(실천의 반대인 이론이 아니라, 현실성의 반대로서의 이론)라고 말한다. 다음 웹진에서는 바디우가 이천년전의 신화적 선언으로 통해 보편성으로 나아갔던 바울을 현대로 소환하는 이유와 그 이유를 통한 바울의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참고문헌 

Kotsko, Adam. Žižek and Theology. London: T & T Clark, 2008. 

Badiou, Alain, and Ray Brassier.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Badiou, Alain. Being and Event 2, 2. London: Continuum, 2009. 

Corcoran, Steven. The Badiou Dictionary. Edinburgh: Edinburgh Univ. Press, 2015.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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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 I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뽑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고, 세우고, 심는 야훼


우리가 ‘예언자’ 또는 ‘선지자’ 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든 애끓는 외침 또한 이런 타자를 생산해내는 구조를 타파하고 돌이켜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처음 이루었던 그 약조를 기억하고 그 약속으로 돌아가 공동체를 경영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벌이는 야훼의 불타는 사랑 고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렘 1:10)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스라엘 국가가 왕조의 시대를 열고 난 다음의 이야기를 간단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왕조가 생기고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이스라엘이 강력한 국가의 꿈을 꾼 것이 사울과 다윗의 때였는데,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운 후에 둘로 분열되고 말았다. 잠시 잠깐 팔레스타인 지방의 맹주 이스라엘이라는 ‘꿈’은 다시 힘을 잃고 몰락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한 때 오므리 왕조에서 큰 번영을 한 번 이루긴 했지만, 그 시기를 제외하고 많은 침략과 강대국 사이의 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남왕국 유다 또한 그나마 전쟁의 화마에서 비껴나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평성대를 누리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것이 아니라, ‘별로 탐나지 않는 영토’를 가진 탓에 산골 구석에서 떨며 세월을 보냈다. 두 나라 모두 이런 강대국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설움을 견디며 자생하려 애썼지만, 결국 비교적 강대국이었던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 기원전 723년에, 남왕국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왕조의 탄생 이래, 다윗 시대 나단처럼 국가에 속한 선지자이든지 엘리야, 엘리사 등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선지자 집단이든지 국가의 권력에 대항한 선지자 그룹이 남/북왕국 모두 계속해서 계승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결 같았다.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 맺어진 약조, 곧 ‘법’은 유효하며 지금도 그 법으로 다 형용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야훼 하나님의 신실한 ‘개입’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로서 고통 받을 때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간음 행위를 저지르고(호세아), 동족들을 신발 한 켤레 값을 갚지 않았다는 죄 아래 종으로 팔아 넘기고(아모스),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지 마음은 멀리 떠난(이사야) 행위를 서슴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버림 받은 자'들의 공동체였던 이스라엘이라는 기원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숨기려고 했다. 이들은 지나간 출애굽 사건을 운운하거나 기억할 때가 아니라 오로지 미래의 더 많은 풍요로운 ‘생산’을 국가의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구호 아래 야훼를 과거의 뒷방 늙은이 취급하였다. 그리곤 다른 나라들의 훌륭하고 멋지고 폼나는 기원을 가진 자들처럼 거짓 신화를 만들어내거나 야훼가 아닌 다른 신과의 동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뽑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어버리고 세우고 심는 삶의 역동성이라는 본질을 주제를 가차없이 내팽개쳤다. 이런 야훼의 속성은 불안하고 예측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등한시하고 바알의 ‘오직 성장, 오직 번영, 오직 풍요’의 길로만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야훼의 예언자 전통, 곧 나단이나 엘리야의 그것처럼 열정 넘치고 정념 어린 시도들이 가끔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외침’으로 여겨지며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뿔뿔이 흩어졌고, 잠시 고레스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통해 새로운 성전을 짓고, 다시 독자적인 공동체를 시작해보려 했지만, 이내 그런 시도들 또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 중의 하나인 로마를 만나 좌절당했다. 이제 더 이상 일어날 힘조차 없어져 버린 것이다.


예수가 '폐허 속에서' 꿈꾼 이스라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찬란했던 다윗 왕조의 역사와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마음의 자부심이 사라져 갔다. 선택받아 ‘약속의 가나안 땅’을 (무려) ‘차지’하게 된 우월하다고 여겨진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러번에 걸친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부서지고 짓이겨져 형체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수많은 야훼의 예언자들이 히브리의 전통을 기억하고 왜 우리가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선택받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일러주었지만, 그 모두 처음으로 돌이키기에는 늦어버렸다. 하지만, 예언자들을 통해 근근이 명맥을 이은 야훼 신앙과 이집트 노예 히브리와의 계약이라는 기원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고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예수가 등장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크로산은 추측한다.


사회적인 차별을 계속 당하고 불의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외세의 지배, 식민지 착취의 물결이 유대 영토를 휩쓸자 사람들은 오랜 동경으로 신성해지고 유토피아적인 이상주의로 충만한, 지나간 시대의 평화와 영광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미래의 다윗과 같은 지도자를 마음에 그리게 되었다. 예언자 미가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그보다 젊고 또 그와는 달리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이 미가의 책에 모아진 예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열렬한 희망이 들어 있다.(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각주:1]


그들에 대한 통제가 점점 더 총체적인 것이 되어 가고, 아울러 그 희망이 점점 더 절박하게 되자 당시의 개인들이나 집단들은 흔히 묵시종말적인(Apocalyptic)입장으로 돌아서 하나님의 개입(divine intervention), 즉 하늘을 땅으로 가져오고 땅을 하늘로 높이는 대규모적인, 세계를 뒤흔드는 하나님의 개입을 상상하기에 이른다.[각주:2]


로마가 유대 땅을 지배한 이래로 유대인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사람들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야훼 하나님이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닌지, 전쟁에서 졌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된 것인지, 혹 계속해서 메시야를 기다려야 한다면 그 메시야의 모습이 우리가 이제까지 상상하던 모습과 다른 건 아닐지 의견들이 분분해진 것이다. 이스라엘은 급기야 묵시종말적인 메시야를 기대하는 움직임들이 성행을 이루었다. 다윗 왕조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는 일이 아니라 야훼의 불과 칼로 모든 현재의 권력을 뒤엎고, 지금의 시공간을 중단시키며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열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라는 사건일 것이라 기대하기 시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가 그린 하나님의 통치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꿈꾼 ‘자유와 해방’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건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여기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너무나 현재적이고 너무나 현실적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자. ‘현실적’이란 말은 현재의 체제들을 다 인정하고 그대로 현재의 법들이 유효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이 아니었다. 현재의 정치 사회체제를 모두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있기에, 우리가 잘 모르는 ‘원형(archetype)’을 본떠 지금의 덕이나 윤리, 또는 ‘지혜’를 통해 슬쩍슬쩍 알려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배우고 마음 속으로 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조금은 도식적이지만 존 도미닉 크로산이 제시한 아래의 도표[각주:3]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가 주장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것은 묵시론자들의 그것처럼 너무나 타의적이어서 그것에 대한 ‘홍보나 설득’ 정도로만 국한되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또한 현자들처럼 윤리나 지혜의 어떤 박식하고 복잡한 것들을 습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고 정치적이며 우리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었고 새로운 이름을 얻어 자기가 사는 곳에서 모두 축제를 벌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엄연한 족보와 가문이 있어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었던 권력자들이 통치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지금을 끝장낼 하나님의 통치가 ‘언젠가는’ 이루어 질 것이라고 무력하게 앉아서 골방에서 하늘만 쳐다보는 무능력하고 모래알 같은 노예들의 나라도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계속해서 주장해왔던 이스라엘의 기원,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과 소속 없고 떠돌던 사람들로서의 이스라엘, 그럼에도 느슨하지만 아름다운 연합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품고 살아갔던 그 출애굽 공동체의 원형을 기억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간 이가 바로 예수다. 왜 그리 말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수많은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우리의 주제와 연관된 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예수가 가정을 공격했다는 점과 둘째는 너무나 파격적인 공동식사를 벌였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곧 혈통으로 형성된다는 주장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방의 사람과 결혼한 자는 곧 쳐죽여야 할 중대 범죄임을 성서 내에서 말하고 있고, 그것이 처음에는 이방신과 우상의 유입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대단히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배타성’을 지키는 강고한 논리로 이어졌다. 심지어 “이스라엘 = 혈통”, 즉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은 혈통으로만 계승된다는 논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있는 저 중동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 국가에서도 발견된다.[각주:4] 그런데, 예수는 2천여년 전에 이미 이스라엘 곧 야훼 하나님의 울타리는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각주:5] 두번째 파격적인 공동식사의 자리 이야기는 하나님이 애초에 만들었던 하비루들의 공동체가 어떠했는지 그 원형을 그대로 나타내준다.[각주:6] 이 공동식사에 관해서 크로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잔치 준비가 다되었는데 자리가 텅 빈 것이다. 주인은 오지 않은 손님들의 자리를 거리의 뒷골목에서 아무나(Anyone off the street) 불러다 채운다. 그런데 만일 실제로 뒷골목에서 아무나 데려왔다면, 그 자리는 모든 신분과 성과 계층이 온통 뒤섞여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각주:7]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고, 음식 속에서 다 뒤섞일 수 있는 식사란 무엇일까? ‘사회의 수직적인 차별과 수평적인 분열의 축소판 지도가 되는 식탁을 초월해서 함께 나누는 식사’[각주:8]인데, 곧 이런 식사를 통해 예수가 얻은 별명 곧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경멸적인 호칭은 ‘고대 지중해 지역의 문화와 사회에서 기본적인 가치가 되는 명예와 수치와 근본적으로 충돌’[각주:9]하는 것이다. 매우 섬세하게 구분해야 한다. 예수는 단순히 사회의 관습에 도전하는 멋드러진 히피(hippie)가 아니었다. 그는 명예를 모르고 수치도 모르는 성격 이상자에 가까웠다.[각주:10] 그 옛날 하비루처럼 어떤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떤 언어도 소유하지 못한 차가운 눈빛을 받는 그야말로 ‘마음이 가난한 자’였다.


단단한 혈통이 아닌 '느슨하고 서먹서먹한 사이'로서 이스라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우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처음 형성되었던 시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된 예수까지 유일한 참 하나님, 야훼와 그의 ’선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각주:11] 어찌 되었든 야훼 하나님이 애초부터 꿈꾸고 불러 모았던 이스라엘은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야훼 하나님이라면 지금 중동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의 폭력으로 억지로 국가를 수립해버리고 거대한 장벽을 치고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나아가서 지금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지금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선민의식을 어떻게 보실까? 일요일이면 예배당에 가고, 밥을 먹을 때 기도를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비(非)신앙인들을 수렁에서 끌어올려주어야 할 사람으로 여기고, 또한 일부 근본주의자들[각주:12]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애자와 동성애를 배격하고 이단 사설들을 모두 궤멸시키는 사명을 하나님의 목표인 것처럼 말하는 이 ‘경계들’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다.’ 이 말은 곧 내가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결코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내가 내일이 되어서, 1년 후에도,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 어떻게 호언장담할 수 있는가? 믿음이 내 ‘의지’와 관련되어 너무나 흔들리기 쉬운 근거이기에 그것을 혈통이라는 아주 견고한 근거, 곧 내 몸 속에서 빼낼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그 피 속에 근거를 심었던 이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선택된 백성이란 곧 ‘순수 혈통’이란 믿음을 가졌던 유대인들, 아랍인들, 그리고 나치주의 에 물든 독일인들, 그리고 수많은 근본주의자들이 가진 폭력성을 우리는 이미 역사 속에서 많이 목도해 왔다.[각주:13]


또한 이렇게 확고하지 않은 이런 저런 근거(경계)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우리는 이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정체성, 선민의식을 하나의 특권의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다른 정체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부심의 근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는 않더라도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어떤 때는 누군가를 ‘구원’해 주어야 할 사명을 받은 자로, 어떤 때는 근엄하게 ‘훈계’해야 할 특명을 받은 자로 이해하고 있는건 아닌가?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중 한 장면>[각주:14]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래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주 어딘가로부터 떨어져 나와 외롭게 별이 되어 이 세상에 홀로 던져졌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나는 ‘원래’부터 태어나보니 금수저, 부자였네, ‘원래’부터 빼박상남자였네, ‘원래’ 어디 출신이었네”와 같은 말을 지껄인다면 그 수준의 저열함을 들키는 일이다. 그대의 ‘원래’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대가 말하고 있는 말 ‘이전의 상태’이며, 말로부터 유유히 빠져나온 가능성으로서 말 ‘그 이후의 상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런 ‘정체성’의 환상과 마법에서 늘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을지 그 긴장의 연속선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 중 2계명의 ‘우상숭배 금지령’의 정신이기도 하다. 내가 안주할 수 있는 나의 스펙, 나의 출신, 나의 가족마저도 우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연극 언어 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고안해 낸 ‘소격효과(疏隔效果 : Verfremdungseffekt)’라는 말이 있다. 풀이하면 "낯설게 하기”라는 뜻으로도 쓸 수 있는 이 말은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서, 의도적으로 관객과 작품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법’을 의미한다.[각주:15] 이것을 우리의 이야기에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내가 행동하고 따르고 있는 것들, 내가 나도 알지 못하게 움직이고 있는 규칙들을 늘 낯설게 보고, 거기서 빠져나와 세계와 부조화에 신경증적으로 시달릴 수 있는 사람만이 역설적으로 타인을 끌어안을 수 있는 자이며, 늘 실패하는 사랑으로서’만’ 존재하여 가고자 하는 곳에 끝끝내 닿지 못해 부둥켜 안으려 애쓰다가 실패하지만 또 다가가는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자이다.


<덧붙여>


마지막으로, 내가 최근 읽은 책 중 자신의 정체성과 비정체성 사이의 간극을 고뇌하면서 쓴 한 작가의 글을 옮기고자 마치려고 한다. 그는 자칭 ‘세속적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무엇이어야 하는지, 세계대전에서 수백만 이상이 희생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현대에 자기 자신과 인류 모두에게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 수없이 많이 고민한 흔적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고 있다.


나는 항상 지나간 고난을 탄식하는 데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일을 피해 왔고 과거의 불행을 보상받겠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난 여기에, 그리고 지금 넘쳐나는 불의를 찾아서 뿌리를 뽑거나 최소한 줄이기라도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속한다. 박해받고 희생당했던 과거는, 오늘날 박해받는 사람들과 내일 희생자가 될 사람들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난 역사 속에서 사냥꾼과 사냥감,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역할이 매우 자주 뒤섞이며, 그러한 하나의 장으로서 역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고 있다.[각주:16]


ⓒ 웹진 <제3시대>



  1.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50쪽. [본문으로]
  2. 위의 책, 66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96~101쪽의 내용을 도표로 요약한 것이다. [본문으로]
  4. 내(저자인 슐로모 산드)가 국민으로 있는 나라는 인구 조사에서 나의 민족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정의하며, 그 자신을 ‘유대 민족’의 국가로 부른다. 즉, 이 나라와 그 법을 만든 이들은 이 국가를 국민 전체가 가진 민주적 주권의 제도적 표현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지에 상관없는 ‘전 세계 유대인들’의 집합적 자산으로 간주한다. 이스라엘 국가는 나를 유대인으로 규정한다. 내가 유대 언어를 쓰고, 유대 노래를 흥얼거리고, 유대 음식을 먹고, 유대 책을 쓰거나 어떤 유대적인 활동을 통해 나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이며, 외할머니는 외증조할머니 덕분에(또는 때문에) 유대인이다. 그렇게 세대의 고리가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슐로모 산드, ⌈유대인, 불쾌한 진실⌋, 훗, 14~15쪽) [본문으로]
  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무리 가운데서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눅 11:26~27)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마 10:34~36) [본문으로]
  6. 21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였다. 22 그렇게 한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23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눅 14:21~23) [본문으로]
  7. 위의 책, 114~115쪽. [본문으로]
  8. 위의 책, 116쪽. [본문으로]
  9. 위의 책, 116쪽. [본문으로]
  10. 위의 책, 117쪽. [본문으로]
  11. 물론, 예수 이후 바울과 사도들로 이어지는 초대 교회 내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간의 이야기는 우리가 말한 이스라엘과 선민의식에 대해 나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와 많은 부분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12.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자기에게 타락한 현대사회의 치료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은 자기가 치료하는 척하는 그 질병의 증상이다.(John Gray, Straw dogs, London Granta, 2003, p. 18. 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110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3. https://www.youtube.com/watch?v=VbYqP5j1SVM ⌈The DNA Journey⌋,이 영상을 참고해 보라. [본문으로]
  14.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mbom74&logNo=220014597824&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본문으로]
  15. https://www.youtube.com/watch?v=LUocsdy-8TE 장 뤽 고다르가 보여준 여러 가지 파격적인 영화 편집 기법들은 당시 누벨 바그 영화들이 보여준 ‘소격효과’를 전형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 [본문으로]
  16. 슐로모 산드, ⌈유대인, 불쾌한 진실⌋, 훗, 60~61쪽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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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 (I)



김윤동
(본 연구소 행정연구원)

 



택하신 족속?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상반절)


교회에서 매우 좋아하는 성서의 구절 중에 하나기도 하고, 유명한 성경구절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만들고, 전쟁에도 능하시며, 모든 세계의 만물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신, 하나님에게 선택되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 곧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자리에 올라설 수 있으며, ‘거룩한 나라’, 곧 하나님이 친히 소유하고 계신 백성이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가슴 뛰는 일인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왜 가슴 뛰는가? 왜 우리를 설레게 하는가?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윤리적으로도 정당한 이야기일까? 우리만 특별하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또다른 진술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한 번 차근차근 이 질문들을 풀어나가도록 하자.


종교의 시작


종교의 시작은 인류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한다. 지금이야 종교가 갈등과 분란의 씨앗인 상황이 되었지만, 종교는 본래 인간을 대(大)집단화하고, 그런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초기 인류의 시대에는 인간의 개체수가 적어서 어떤 집단과 집단 간에 만날 일도 별로 없고 자원으로 인해 갈등이 벌어질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점점 인간의 개체수가 많아지고 유목 생활이 아닌 농업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과 만나야 하고, 협상해야 하고, 때로는 싸워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들 간에는 어쩔 수 없이 갈등이 생기고 누군가는 그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승리하고 다른 누군가는 배제된다.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전쟁을 하려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전쟁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죽임으로써 합의를 보자니 끝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의 의사를 배제하고 올라섰다는 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즉, 죽이지 않고도 의사결정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했다. 결국에는 누가 더 정당하냐, 누가 더 먼저냐를 평화롭고 순조롭게 합의하기 위해서, 또한 승리한 개인/또는 집단이 계속해서 그 승리를 보증할 수 있도록 이름표를 붙여주기 위해서는 서열이 필요했는데, 곧 시간적, 공간적 기원들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물체나 사건이라기보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의 집합이다. 곧, 기원을 상정하고 대집단을 이루는 것이 종교의 시작이자 목표다. 다시 말해, 종교와 기원을 만들어낸 이유는 ‘서열’과 ‘순서’를 창출해내기 위해서다.


인간이 대집단을 만들기 전, 그러니까 모두가 조그마하게 유목을 하던 시절에도 아주 단순한 애니미즘 계열의 종교는 있었다. 모든 생물체들이 자기들만의 영(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은 세계의 수많은 생명체, 영을 가진 존재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류가 대집단화 되면서 신들 또한 성장했다 -- 성장시켰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광범위한 영토를 다스리고, 심지어는 자연마저도 통제하며, 세상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위대한 신’의 등장이 필요했다. 고로 인간 집단의 전쟁이 벌어지면 이는 곧 신들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곤 했다. 전쟁을 하면서 신들에게 제의를 올림으로 전쟁의 승리를 염원했고, 전쟁이 끝나고 나면 신들의 서열이 재배치되고, 점점 그 과정이 반복되어 거대한 집단이 제국의 형태로 성장하면 그 제국의 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은 신이 아닌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이 ‘위대한 신’에서 훗날 ‘유일한 신’으로 바뀌게 되는 궤적이다.


애니미즘 이후 ‘위대한 신’들의 등장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種)의 위치 또한 격상되어야 했다. 많은 뭇생명들 중 하나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신계와 세속을 이어주는 신의 형상을 모방한 자(창 1:27)나 신을 대신하여 세속을 통치하고 경영하는 존재(창 1:28, 2:15)의 역할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수많은 생명들 중 하나의 존재였던 인간이 ‘신의 형상’의 자리를 부여받게 되고, 다른 생명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다. 성서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 그 중에서도 1,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 또한 그렇게 시작한다. 인간이란 존재에 부여된 우월성을. 이제 그 우월함과 열등함의 서열 정리는 단지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만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인간 안에서도 격렬하고 첨예한 서열다툼이 시작된다. 창세기 1장에서도 인간은 남자라고 표명되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그 갈빗대를 취하여 종속적이고, 모방적인 존재로서 ‘여성’이 등장한다. 이미 기원부터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기에 충분하도록 만든 설정이겠다.


이처럼 종교가 시작되면서 나와 내가 아닌 것, 우리와 우리 아닌 것 사이의 격렬한 투쟁의 상태, 그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상태로 우리는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에덴 동산부터 그렇게 지어졌다는데, 그 이전의 존재들 간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상태라는 상상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꼴이 되었다.


야훼가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


종교는 기원을 설정하고, 그 기원을 통해 서열을 정리하는 것이 그 속성이라고 앞에서 정리하였다. 그렇기에 구약을 포함해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바로 ‘내력(תוֹלְדוֹת, 톨레도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창 2:4)으로 시작하고, 그것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한 무수한 사람과 가문의 ‘내력/족보’으로 이어졌으며,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의 세계(Genesis, 게네시스, 내력)’로 이어진다. 성경에 수많은 족보가 나오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지구라는 푸른 별 위에서 시작부터 이어져온 인류 및 각종 생명체가 서로 동떨어져 생겨나지 않았으며, 고로 우리가 태어난 맥락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기원에 대한 정당성, 나아가서 그것들 간의 서열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은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며 인류 모든 보편적인 기원과 그 족보에 관한 이야기 같이 보이지만, 실로 구약 성경은 인류의 기원과 내력에 관한 이야기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내력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직하다. 일단 성경은 히브리어라는 말로 쓰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고 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각주:1]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구약 성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고, 다른 집단에 비해 달라도 뭔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그 기원에 관한 책인 것을 알 수 있다. 선택되었다 함은 구별되었다는 말과 통한다. 왜 구별해냈겠는가? 당연히 특별한/우월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앞에서 읽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후반절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택하신 족속’이 된 이유는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다. 한 마디로 선민(選民)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이유는 애초부터 훌륭한 사람임을 보증해 주기 위해서다. 종교에서 어떤 이들을 가리켜 ‘선택되었’다 말할 때, ‘흙수저'로 선택되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선택에는 우월감을 부여하려는 목적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 선민이 되었다는 의식은 사전적인 의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떤 대집단 내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별도로 칭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성서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기원은 뭔가 수상한 곳이 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은 유전자가 우월하거나 전쟁을 잘한다거나 부자거나 특별히 잘 난 구석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Hebrew)의 기원


이스라엘은 히브리인들이다.[각주:2] 이스라엘은 히브리(Hebrew)라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다. 히브리라는 단어는 어디서 왔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히브리는 ‘천민’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다. 이집트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등 당시 성서가 기록되었던 근동 지역의 문헌에서 천민의 대명사로 나오는 ‘아피(비)루’, 또는 ‘하피(비)루’라고도 표기할 수 있는 말이 구약성서의 ‘히브리'[각주:3]이다. 고대 문헌에서 ‘하비루'가 사용되는 용례를 살펴 보면, 고향에서 뿌리 뽑혀 떠돌이 생활을 하며 남의 전쟁에 목숨을 거는 ‘용병’(메소포타미아 북쪽 도시 마리), 계약을 맺은 노예(티그리스 강가 도시 누지), 일꾼 또는 도둑떼/약탈자(주전 15C 이집트) 등으로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고향에서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각종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 바로 하비루들이었다. 이러한 배경들을 토대로 문익환은 히브리라는 특징적 집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히브리는 종족, 혈족으로 단위를 이루는 배타적인 칭호가 아니라, 당연히 자주적인 주격으로 해방되어야 할 밑바닥 계층,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약자들을 포괄하는 총칭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1. 전쟁포로들이 하비루가 되어 노예로 혹사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고 용병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이 된 사람들, 농촌에서 밀려난 이농민들이 하비루가 되었습니다. 

3. 야곱의 이야기나 모세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어떤 이유건 고향에 남아 있을 수 없는 사람들, 남에게 붙어사는 떠돌이, 더부살이, 천더기들이 하비루로 전락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각주:4]


바로 이런 부족이 없는 자들, 소속이 없는 자들, 집단 아닌 집단, 어떤 혈통에서 온지도 모르는 근본 없는 떠돌이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부유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하셨다. 이들이 히브리들이고, 그 히브리들을 향해 불같이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이기지 못한 야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출애굽기 3:7)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이집트의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제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여라. (출애굽기 3:18)


왕과 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지만, 이런 기원에도 불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히브리들은 자신들이 힘겹게 떠돌이 생활을 했던 것과 그 눈물을 불쌍히 여겨 압제에서 건져 내준 야훼의 사랑을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새로운 ‘내력’을 필요로 했다. 자기네들이 ‘천민’ 출신이 아니라 원래부터 선택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본래 어떤 개인도 그렇고 집단도 그렇고 전쟁에서 승승장구를 하다보면 문득 생각이 든다. ‘내가 진짜 잘 나서 선택 되었고, 어딘가 모르게 잘난 구석이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지점이다. 그것을 성서에서 ‘하나님을 잊은 백성’이라 표현한다.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준 야훼 하나님과 그와 맺은 영구적인 계약을 잊어 버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 시에만 기름 부음 받은 사사(판관)를 세워 위기를 극복하곤 했던 사람들은 급기야는 ‘왕’을 요청하게 된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다른 나라처럼 더 많은 영토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다.[각주:5]


매번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당하다보니 불안했다. 물론, 이제까지의 전쟁을 그 때 그 때 야훼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막아내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가장 훌륭한 방어전략은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영토의 확장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종교적인 사제가 다스리는 원시 부족 국가의 형태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왕을 가지고, 그걸 통해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낼 수 있는 멋진 정치 제도를 가지고 싶었다. 분명히 사무엘(을 통해 말한 야훼 하나님)은 이러한 요구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경고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요구는 끈질겼고, 이제부터 더욱 가열찬 영토 확장 전쟁을 하기 위해 ‘야훼(신)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선민사상은 왕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그 권력을 유지해야만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 그래서 집단 없고 소속 없는 사람들의 집단 히브리들은 자신들의 뿌리에 관한 역사를 조사하기 시작하고, 또한 그것을 강력한 기제로 만들기 위해 불문율이었던 여러 관습이나 전통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자신들만의 규율을 문자로 적어 표현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성문법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을 기틀로 하는 법전이다.


국가로서의 체제가 정비되고 영토가 확장되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의 신화는 정비되고 민족이 형성된 기원의 이야기가 정리되기 마련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법을 수령한 이야기와 출애굽의 이야기는 본래 다른 이야기였는데, 국가의 태동기에 두 이야기가 합류되었다고 주장한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떠돌던 규모가 작은 유랑 공동체에게 기록되고 명시된 법문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울 뿐더러 의사결정에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각주:6] 광야를 떠돌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하고, 그런 상황 변화에 고정된 ‘법문’으로 대처하기보다 역동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체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법 수령 설화와 출애굽 설화)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말이 두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야훼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하비루들은 애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비루들과 야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은 진실이며, 그것이 ‘열 가지 계명’이라는 전통으로 전해져 내려와 국가가 형성될 때 정비되고 다듬어져 국가 법령의 정신이자 기틀이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각주:7] 아무튼 이제 정착을 하고, 안정된 국가 체제를 가지기 시작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점점 더 이질적인 부분이나, 각 부족들의 이해관계를 넘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공동체성을 강고하게 가져가기 위해 십계명을 기초로 하는 법문을 세워 ‘법치국가’임을 천명하는 등 여러 가지 방책을 펼치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내부적인 결속을 위해 법을 만든다는 의미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어떤 선명한 바리케이트를 치게 되는 작업이고, 다시 이스라엘이 애굽 시대에 겪었던 것처럼 경계 바깥 사람들, 집단 없는 집단, 소속 없는 사람들을 새로이 ‘생산’해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겠다는 ‘의도하지 않은 의도’가 되는 것이다. 타자(곧 적, The enemy)의 생산 없이 어떤 집단이 생성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연관되어 또 하나 법을 세워 통치하겠다는 의미는 중요한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야훼 하나님을 ‘타자’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본래 유랑민이었을 때의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관계이다. 상황을 만날 때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을 물었고, 서로 의사가 교류되는 관계였다. 공동체 안에 맺어진 대원칙은 있었겠지만, 결코 어떠한 텍스트나 문자 속에 갇히지 않고 맥동치는 바로 그 살아있는 ‘긴밀한 관계’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원천이었다. 사사 시대의 그것은 다른 국가들의 강력한 법치보다 느슨해 보였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유연하고도 긴밀한 관계’가 국가의 더욱 소중한 요소임을 시간이 갈수록 잊었다. 그럼에도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순진했던 것일까? 자신이 법문 안에 갇힐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상 8장의 경고를 남기고 자신의 자리를 왕과 법에게 내어주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찬란한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나라는 쪼개져 버린 것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


ⓒ 웹진 <제3시대>



  1.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있다. 어떤 한 존재가 그 언어를 벗어나서 형성될 수 없다는 뜻이다. 언어란 단순히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의사소통을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음성과 문자가 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관습과 생각의 집합체, 즉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다. 성경 또한 이스라엘의 언어로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구성원의 이데올로기 즉, 그들의 ‘창’으로 본 것이고, 그 창으로 보여진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류 보편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가장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이스라엘이라는 언어의 ‘창’으로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문으로]
  2. 현재 서부 아시아의 남쪽, 이집트의 동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대인의 국가’로 정의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고학적이고, 역사적인 기원을 따지자면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아지므로, 마지막 별도의 내용으로 기술하도록 한다. [본문으로]
  3.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정한책방, 27쪽. [본문으로]
  4. 위의 책, 32쪽. [본문으로]
  5. 다음과 같이 사무엘상 8장에서는 사무엘과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해 놓았다. 4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10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11 "당신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합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입니다. 12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왕의 밭을 갈게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입니다. 13 그는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유도 만들게 하고 요리도 시키고 빵도 굽게 할 것입니다. 14 그는 당신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왕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당신들이 둔 곡식과 포도에서도 열에 하나를 거두어 왕의 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16 그는 당신들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의 일을 시킬 것입니다. 17 그는 또 당신들의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당신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18 그 때에야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9 이렇게 일러주어도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20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본문으로]
  6. ’법의 백성’이라는 호명은 국가 시대의 산물이다. 성서의 문맥을 보면 출애굽과 십계 이야기는 광야를 유랑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이 법의 백성으로 부름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텍스트의 역사적 자리는 ‘국가'라는 세속적 실체다. 유랑민들은 법이 필요 없다. 그만큼 규모가 작고 단순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법이 필요한 것은 여러 종족이 한 정치체로 묶이고 전이해와 현실이해를 달리하는 여러 기억과 경험들이 교차하는 상황에서다. 그리하여 법은 유랑 시대가 아니라 국가 시대에 등장한다. 그것도 원시국가 형태가 아니라 '잘 발달된' 국가 시대의 산물이다. (김진호 외 9인,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가장 숙고되지 못한 십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글항아리, 8~9쪽) [본문으로]
  7. 출애굽기 20장에 나타난 내용과 신명기 5장에 나타난 내용은 서로 상반된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1~2절)이라고 서문을 맺고 바로 계명이 나오는 반면, 신명기 5장의 경우 1~5절이라는 긴 서문을 진술한 후에, 서문이 등장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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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4] 잔인한 구원, 무서운 구원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좋든 싫든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 중 하나가 이른바 '개인구원'이라는 단어다. 어떤 입장에서는 이 단어는 그리스도교가 추구해야 할 근본적인 목적이 될 것이고, 다른 입장에서는 이 단어는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경우 많은 폐해를 낳을 수도 있는 단어라고 할 터이다. 아마도 후자의 입장에 대해서 전자는 근본적인 목적을 소홀히 여길 우려가 있고 실제로 그런 경우 꽤 봤다 그러기도 할 터이고.

그런데 한 번 이렇게 물어 보자. 만약 정말로 흔히 말하는 '개인구원'만 생각하면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건가.

무슨 말인가 싶은 분들에게 일단 들려드릴 야그 하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미국 어느 대학에 강연을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단다. 빵이라는 게 미국 같은 잘 사는 나라 사람들에겐 '육신의 문제'라고 칠 수 있더라도, 자신이 사는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에겐 '영적 문제'라고 말이다. 이 때, 빵의 문제를, 즉 살림살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른바 '개인구원'을, 특히 흔히 상상되는 대로 '사회적 구원'과 연관되지 않는 '개인구원'을 받는다는 게 가능이나 한 것일까. 빵이 영적 문제라는데.

이렇게 묻고 보니, 이 시리즈에서 계속 이야기해 왔던 성소수자의 경우도 어쩌면 크게 다를 것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명색이 구원이라면, 특히나 '개인'구원이라면,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에 대한 구원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할 터인데, 그 정체성 중의 중요한 한 부분인 성적 정체성 자체가 죄냐 아니냐라는 저울에 올려져 있다면 그걸 해결하지 않고서 구원이라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여기서도, '사회적 구원'과 연관되지 않는 '개인구원'이란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회경제적 소수자에 해당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사회적 구원'과 연관되지 않는 개인구원이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구원'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일단 본인이 소수자라고 깨달을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될 터이다. 자신이 소수자인 적이 없었다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큰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아니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든지.

조금 고약한 경우를 생각한다면, 이런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한 사람이 생각하는 구원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구원이 서로 대치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로 자신의 '개인구원'을 이룬다는 경우 말이다. 충남에서 인권조례를 기어이 폐지시키고 만 사람들이 아마도 딱 맞는 예가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개인구원'이란 말이 참 잔인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말이 되어 버린다.


2.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본다면, 구원이란 말 자체가, 적어도 그리스도교에서는, 원래 잔인한 말이 아닌가 싶다. 무슨 말이냐고?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출발점은 사실 따지면 이것 아닌가. 우리 모두가 지금 딴 사람 목숨값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라는. 그리스도교의 구원 담론의 중요 포인트인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대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생목숨을 잃는 누군가가 있어서, 그 누군가의 목숨값으로 살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렇게 남들의 목숨값으로 내가 살고 있는 것이라면, 그 목숨값을 지불하게 만든 내 죄를 직시하거나, 그 목숨값을 치를 사람이 죄인으로 몰리는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현실을 직시할 일이겠다. 그러니 구원이란 곧 심판과 동의어가 될 것이다. 죄인이라는 족쇄와 죄인이 아니라는 착각이 동시에 풀려져 버리는 순간일 터이니.


3.

한국의 성소수자 혐오 영역에서 "이 구역의 미친 놈은 나"라고 대놓고 주장할 수 있을 국민일보에서 몇 년 전 한 트랜스젠더 노인의 삶을 보도하면서 동성애는 사랑이 아니고 혼자 늙고 결국엔 비참해 진다 운운하는 기사를 크게 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 기사를 본 사람들에게서 나온 반응 중의 하나는 성소수자이면서 사랑도 하고, 혼자 늙지도 않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언급하는 것이었다. 방금의 두 가지 중에 굳이 따지면 당연히 후자가 정상적인 사고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여지도 있지 싶다. 혼자 늙고 비참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방향으로 말한다면, 그가 혼자 늙고 비참해진 것이 그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의 증거이지는 않을까. 그를 혼자 늙게, 비참하게 살도록 몰아붙인, 우리의 죄 말이다.

이런 방향으로 말을 꺼내고 보니 생각나는 이야기. 나이 드신 여성 지인 중에 이미 아들들을 성년으로 키운 나이인데 자신의 성소수자 정체성을 실현하고 살아가는 분이 있다. 이 분이 처음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기로 마음 먹고 그걸 주변에 고백을 하니,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말리는 사람들이 있더란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혼자 늙어 길거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고.

앞에서 이야기한 트랜스젠더 노인과 같은 경우가 될 거라는 이야기인 셈인데, 그런 말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이 분은 그 이야기를 하나의 예언처럼 느끼셨단다. 입장의 동일함이 가장 치열한 연대라면, 그렇게 외면당하고 길거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싶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그 길거리가 자본주의의 끝자리라면 말이다. 무섭고 두렵고 싫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그래서 이 분은 기도하기를,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해도 피하고 싶지만 그래도 이루어져야 한다면,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아서라도 그 자리에 끌고 가시라고 한다.

외면당하고 길거리에서 죽는 그 자리에 머리채를 끌고 가셔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일단은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구원이라면, 참 무서운 구원이다. 그러나 외면당하고 길거리에서 죽는 그 사람들이 우리의 죄의 증거라면, 그들이 우리의 죄를 지고 있다면, 그리스도교적 지평에서 그들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연관짓지 않고 존재하는 구원이란 존재할 수 없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구원이란, 그들이 지고 있는 우리의 죄, 곧 나의 죄를 자각하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거나, 그들의 자리가 나의 자리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테니, 어느 쪽이든 내가 지금의 나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일 터. 이것이 무서운 구원이 아닐 도리는 없다. 그러나 무서운 구원이라지만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없다면, 갈 수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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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무너뜨리기: 언어의 상실, 권력, 그리고 소수성 살리기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이 세대 안에, 즉 앞으로 50년 안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고 상상 해보자. 이 무언가는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존재인데, 그 존재가 사라진다면?

생물학자들은 예고한다. 현재 20% 포유류가 멸종의 위기에 있고, 11% 조류가 멸종의 위기에 있고, 5%의 어류가 멸종의 위기에 있고, 10% 식물류가 멸종의 위기에 있다고. 우리 세대 안에 이 모든 생명체들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는 이 현실, 얼마나 충격적인가? 우리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은 우리가 알고 보고 배우고 보호하려 했던 이 다양한 동물, 식물, 생명체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없어진다는 뜻이다. 아니, 이들의 멸종으로 현존하는 생물체의 생존자체도 위기에 처해질 것이다. 그 생존의 위기는 우리 인간의 삶도 포함한다.

절반으로 줄어들 그 무언가, 즉, 50%가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바로 언어이다. 인류학자,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지구상에 쓰여지는 언어는 7,000개라고 한다. 그 중 3,500개의 언어는 더 이상 말해지지 않고, 우리 세대가 죽고나면 다음 세대로 전수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종을 울린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매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생동하는 언어의 절반이 멸종된다면, 이는 이미 인류의 대재난으로 선포할 만큼 절대절명의 위기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위기를 인식하기는 커녕, 우리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살고 있다. 왜 그럴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인류학자이자 식물학자인 웨이드 데이비스 (Wade Davis)의 연구와 지혜를 구한다. 데이비스에 의하면, 멸종의 위기에 있는 3500개의 언어 중 600개 이상의 언어는 100명이 채 되지 않는 극소수 원주민 (indigenous) 들이 쓰고 있고 이 수는 점점 더 줄고 있다. 이 원주민들의 삶과 생태계의 위기가 직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생태계의 위기로 빙하가 녹고, 바닷물의 수위가 높아져서 섬에 사는 원주민들은 삶터를 잃게 된다. 또는 북극에 사는 이들은 이들대로 삶터를 잃게 된다. 반면 가장 많이 쓰이는 10개의 언어는 번성하고 있다. 다시말해 여기서 번성의 의미는 그 언어를 배우고 쓰는 인구는 계속 늘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강자언어는 바로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아랍어, 중국어, 일본어, 힌디, 벤강리, 분자비이다.[각주:1] 이 10개의 언어를 쓰는 인구가 제 세계 인구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반면, 80% 전체 인구는 7,000개 언어 중 단지 83개의 언어만을 쓰고 있다.[각주:2]

데이비스의 통계를 한국인의 현실 우리의 삶으로 반영해보자. 아마 한글은 이 83개의 언어 중에 하나에 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들 모두는 다수에 속한다. 강자언어인 10개 언어에 속하지는 않지만, 한글은 전세계 인구 대다수가 쓰는 83개 언어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인으로서 인류의 절반이상이 쓰는 강자언어 10개의 언어들을 배우고자 시도해보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부터 모든 한국에 사는 아이들은 영어를 배운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경험을 했던 우리 조상들은 좋던 싫던 일본말을 배워야 했고, 조선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은 귀족과 교육받은 지식인들은 모두 중국말을 배워야 했다. 10개 언어 중 영어를 포함해서,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는 유럽식민주의의 영향이기에, 수백만 식민주의가 끝났어도 강자언어라는 권력으로 그 식민주의의 잔재는 탈식민주의 현실로 우리 삶을 지배한다. 나머지 6개의 언어는 모두 아시아대륙에 속한 언어이자, 변화하는 21세기 현실, 이슬람교의 증가와 인도 중국의 경제 성장을 잘 반영한다. 전형적 유럽 식민주의 언어였던 불어와 독일어는 지난 몇 년동안 떠오르는 신자본주의세력인 중국과 인도/파키스탄 등에서 쓰는 언어인 벵갈리, 분자비 언어에 밀렸다.

한국말이 비록 강자언어는 아니지만, 다수의 언어에 속한 것임은 분명하다.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한국말 이외 강자언어를 할 수 있고, 배우고 있기에, 우리는 다수자로서 언어의 상실, 인류의 대재난에 무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는 언어는 권력과 직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니, 언어의 상실과 다수의 힘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소수를 대변하는 언어의 다양성 (heterogenity), 언어의 독특성 (particularity)이 사라질 때 벌어질 일을 상상해 보자. 왜 소수성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지 생각해보자. 왜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인류가 한언어만을 쓰게 하지 않고 각기 다른 언어를 쓰게 하는 쉽지 않은 선택,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그 결정을 했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데이비스는 강의 중 누군가 너무 천연스럽게 (권력의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 한 언어를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모두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러므로 분쟁과 오해가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좋지요." 데이비스는 쉽게 대답을 하며 다음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 언어를 "하이다" (카나다 원주민 언어 중 하나), "요루바" (서아프리카에서 쓰는 언어 중 하나), 또는 "이눅투트" (카나다 북극에 사는 이들의 언어)로 하면 어떨까요?"

이 글을 읽는 그 어느 누구도 소수의 부족 언어가 인류 공용어가 되게 하자고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 것이다. 아니, 공용어를 위해 6999개의 언어를 없애고, 쓰지 못하게 하고, 그 언어를 통해 전승되었던 어마어마한 유산과 지혜, 문학, 구전예술과 문화적 공헌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걸 상상하는 건 참으로 고통스럽고 허망하고 폭력적인 일일 것이다. 더 이상 한글을 쓸 수 없다면, 한글이 이 지구 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언어는 단순히 문법 체계, 단어의 모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의 영혼을 담고 있는 매체이자 그 영을 교감하게 하는 끈이기 때문이다.

2018년 새해의 벽두가 시작한 지 두 달이 되었다. 우리 모두 21세기 중 약 오분의 일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80여년 간 벌어질 끔찍한 일들 중 하나는 바로 기상 이변과 지구 온난화 즉, 환경문제일 것이다. 앞서 나열한 것처럼, 생태계에 속한 다양한 피조물들이 멸종의 위기를 겪으면서 신음할 것이고, 그들의 삶과 더불어 우리 인간의 삶도 그 고통의 강도를 더할 것이다. 문제는 그 고통의 최전선에서 피해를 볼 자들은 바로 다수에 속하지 않은, 소수자들일 것이다. 앞서 말한 600개의 멸종의 위기에 언어를 쓰는 자들을 포함해서 신음하는 생태계를 지키고 본인들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바로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원주민들 공동체들이 바로 소수자들이다.

지난 몇 년동안 카나다 정부는 그동안 원주민들, 특히, 원주민 기숙학교 (Residential Schools)를 만들어, 유치원 갈 나이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집단 수용해서 교육을 했다. 이 교육은 거의 100년간 이루어졌고, 그 교육을 받는 동안 자체 원주민 언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오직 영어와 불어만을 쓰게 했다. 체벌은 물론, 성희롱, 성추행, 강간, 등 차마 입에 담긴 어려운 폭력이 성직자를 통해 이루어졌다. 탈출하려다 죽은 아이들도 수천명에 달하며, 아픈데 제대로 치료를 못해서, 배고픈데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은 아이들도 수천명에 달한다. 수세대에 걸친 이 교육으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철저하게 박탈 (cultural genocide)되었다. 언어를 통해 전수되어야 할 삶의 지혜, 공동체의 지혜, 관계의 중요성은 단절, 이니 멸절의 위기에 있다. 기숙학교 출신의 원주민들 중 많은 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아이들은 자신이 부모가 되어도 부모로서 할 역할을 몰라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방기하고, 알콜, 약 중독등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 기숙학교는 폐지되었지만, 식민주의의 폭력은 그 폭력의 잔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폭력의 악순환은 아직 끝나지 않앗다. 이 악순확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근 카나다 정부는 원주민들을 차별하고 억압한 식민주의 폭력을 인정했고, 사죄했고, 그 잘못된 사실을 기억하고 교육해서, 다시는 이런 억압과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다짐을 했다. 그 다짐의 일환으로 그 고리를 끊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실과 화해 위원회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이라는 기구를 통해 그 기숙학교를 나온 생존자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5년에 걸쳐 전국에 진행시켰고, 2015년 최종 보고서[각주:3]가 출간되었다. 그 기숙학교를 운영한 주체가 바로 교회 였기에 (로마카톨릭, 성공회, 장로교, 그리고 카나다연합교회) 교회는 그 TRC 최종 보고서를 받고, 교회는 교회대로 회개와 실천을 위한 다양한 사명 (Calls to Action)을 열거했다.

지난 가을 우리 학교 신학교 교수들과 원주민 학자들의 공동 책 출판 준비 심포지엄이 있었다. 이 심포지엄은 바로 TRC Calls to Action의 작은 실천이다. 원주민이 아닌 우리 학교 교수들이 각 전공분야에서 TRC 문제를 연구하고, 원주민 학자들 (법, 여성학, 종교학, 활동가)과 함께 교회에 속한 평신도들이 읽고 공부하고 화해를 향한 신앙적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을 함께 책으로 출판하자는 동기로 모였다. 이틀에 걸친 시간동안 많은 나눔과 이해, 그리고 서로의 학문 분야를 두고 주제 토론을 했다. 그 과정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원주민 학자들의 원주민 언어들은 다양했다. 그런데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부모밑에 속한 형제자매들은 아니지만, 우리들을 연결시키는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단어는 바로kinship이다. 이를 굳이 영어로 쓴 이유는 번역이 혈연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른 번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뜻이 사실 정반대이다. 혈연관계가 아닌 관계를 표현하는 관계, 우리 한국말에도 친형제자매친척이 아니어도, 우리와 관계가 있는 지인들, 친구들을 "삼촌, 이모" 이렇게 부르듯이, 이들 원주민들 언어안에도, 이런 관계를 표현해 내는 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필리핀 타갈로그 언어에도, 남쪽 아프리카에 속한 나라들에도 그 언어 (unbuntu)가 존재하고, 남미 원주민들 언어들에도 비슷한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을 공유했다. 물론 여기서 kinship은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피조물 하나 하나를 다 포함하는 우주적 생태학적 관계 개념이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강이 내 형제요, 산이 내 자매요, 바위가 내 사촌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포지엄 마감하는 마지막 시간에 하버드 법대 출신이자 유엔 원주민 인권을 위한 대선언 (UN Declaration on the Rights of Indigenous Peoples) [각주:4] 작업에 참여하고 공헌한 미그마 원주민 학자가 이렇게 말을 했다.[각주:5]


"인간이 만들어낸 그 모든 억압체계가 다 없어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식민주의가 없어지고, 공산주의, 사회주의, 전제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인종차별, 심지어 신학이라는 하나님 체계까지 없어지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남는 것, 바로 그것은 "kinship" 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그렇다. 생명과 생명을 연결시키는, 살아있는 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그 진리, 아니 죽어도, 그 관계는 계속된다는 그 진리가 바로kinship이다. 우리의 현실은 죽음과 과거와 미래가 이 kinship 으로 연결되어있고,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조상들과, 우리 이후에 살아갈 다음 세대들이 이 kinship으로 관계를 맺고 있고, 이 kinship으로 인해 살아있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그 진리만이 남을 것이다. 그래서 이 지구 (mother earth)가 바로 언어 (language)라고, 이것이 진리라고 다른 원주민학자가 덧붙였다!

이 진리가 자유로와지도록, 옥죄어 숨이 막혀 죽지 않도록 하려면, 소수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소수 언어인, 멸종의 위기에 있는 언어들이 현 세대에 멈추지 않도록 해야한다. 강자언어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도록, 우리 다수자들도 원주민들과 연대하여 바벨탑 무너뜨리는 노력을 해야한다.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이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창세기 11장 1,3,4, 6-8절)


ⓒ 웹진 <제3시대>



  1. https://www.babbel.com/en/magazine/the-10-most-spoken-languages-in-the-world [본문으로]
  2. Wade Davis, The Wayfinders: Why Ancient Wisdom Matters in the Modern World (Toronto: Anansi Press, 2009), 5. [본문으로]
  3. http://www.trc.ca/websites/trcinstitution/File/2015/Findings/Calls_to_Action_English2.pdf [본문으로]
  4. http://www.un.org/esa/socdev/unpfii/documents/DRIPS_en.pdf [본문으로]
  5. https://www.usask.ca/nativelaw/staff/sakej-henderson.php [본문으로]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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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2.14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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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 2018.02.19 02: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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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란 교수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필자를 대신하여 댓글 드립니다. 출처 밝혀주시고 게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바울신학가이드23]



알란 바디우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박사)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1997년에 출간했을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왜 바울인가?’라는 질문을 물었을 것이다. 먼저, 알란 바디우는 기독교인도 성서학자도 아니다. 게다가 1997년은 지금처럼 너도 나도 바울에 대해 한마디씩 하던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처음 장을 ‘바울, 우리의 동시대인’(Paul: Our Contemporary)이라고 이름짓고, 왜 바울을 지금 이 시대에 소환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바디우가 직접 밝히듯이 바울이 소환된 정확한 지점은 “보편적 개별성(Universal Singularity)의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이 되기 때문이다.(사도바울, 31) 먼저 이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이란 말을 살펴보자. 보편적이라는 뜻은 누구에게든 차별없이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개별성이란 말은 그 어디에도 비슷한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이고 특별한 어떤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바울이 이런 것을 이야기하기는 했다. 보통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누구든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전의 자신의 모든 정체성 위에 그것을 놓게 된다. 흔히 ‘교회에 빠지면 부모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다. 이런 것이 ‘보편적 개별성’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보편적 개별성’을 말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의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마련해 놓은 그 조건이 동시대 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주 특별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그 조건을 먼저 살펴보기 전에, 왜 바디우는 하필이면 지금 이 시대에 바울을 소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바디우는 일견 매우 문제적인 발언을 던진다.


“인종적·종교적·국가적·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기 위해 진리들의 구체적 보편성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러한 황폐화가 늦춰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바디우, 20)


    지금 한국에서 성담론이 매우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바디우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매우 흥분할 수도 있다. 일단 차근 차근 풀어보자. 진리라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스스로 옳은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그 진리가 지향하는 바는 바뀌거나 양보될 수 없다. 그런데 흔히들 현대사회나 포스트모던 사회를 말하는 사람들은 ‘진리가 사라진’시대 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그 이전의 진리가 구세대의 종교적 권위나 근대의 ‘주체’라는 허상이나 어떤 이념의 조종을 받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또한 인간 사회는 언제나 그러한 당파성이나 권력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또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진리를 담기에는 부족하므로 더 이상 쉽게 진리를 입에 올리는 것을 우려하는 움직임이 팽배하였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인문학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하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의 명제를 상정하고 그것이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는 진리의 조건, 즉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조건을 말해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바디우가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디우의 말로 돌아가면 바디우는 먼저 진리들의 구체적 보편성을 포기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이른바 진리의 상대성이나 가치의 상대성을 직격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가 만약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진리를 인식하는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즉 어떤 누구나 따라야하고 지켜내야할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남은 것은 자신의 권리를 위한 투쟁밖에는 없다. 또는 그런 투쟁을 지지 하고 연대하는 것만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권리를 지켜내고 투쟁을 통해 그들을 위한 법을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행동을 바디우는 폄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들이 소위 자본주의와 의회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파국을 막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기억하자. 알란 바디우는 뼛속까지 맑스주의자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시대는 인간의 화폐가치로 환산하지 않으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누군가의 삶을 억압하는 일이 없는 시대 라면 그 시대는 이러한 운동들로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리 독자들을 위해 밝혀 두자면 지난 웹진까지 다루었던 조르지오 아감벤과 알란 바디우는 새시대를 향한 처방이란 주제에서 서로 상극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아감벤의 바울이 주체라는 것을 놓는 것 자체를 어떻게든 피하여 현재의 억압의 구조를 활동 정지시키는데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바디우의 바울은 현재의 구조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다시금 주체를 놓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단 바디우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자본주의와 국가모델이 한편으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국의 시민들을 보호하지만 그 보호를 위해 억압하는 것은 자국의 시민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다.(바 디우, 23) 예를 들자면, 현재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은 일반 시민이 누리고 있는 법적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 현재의 상태 자체가 국가의 법이 그들을 탄압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소수자들 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하면 법은 그 안에서 용납할 만한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해 줄지언정 다시금 새로운 방법으로 성소수자들을 정의하여 탄압하기 시작한다. 결국 “국민들의 부분 집합들은 매번 특수한 지위에 의해 규정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바디우, 24)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더욱 자유롭게 유통될 것이나 인간의 삶은 언제나 통제와 억압속에 있게 될 것이라 말한다.(바디우, 25) 그러나 이보다 더 날카로운 바디우의 문제제기는 바로 그러한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나누고 난도질 하는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문화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이다.(바디우, 25)


“탐욕스런 투자 자본에게 여성들, 동성애자들, 장애인들, 아랍인이 출현하는 것이 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잠재력인가!” (바디우, 26)


  이른바 다양성과 다원화라는 목표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해석학과 예술의 중요 과제였으나, 이는 동시에 자본주의 시장의 주요 목표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위해 자본은 새로운 소비 주체들을 생산해야 한다. 같은 사과를 먹더라도 농약이 없는 사과, 청정지역에서 재배한 사과, 당도가 더 높은 사과, 순수하게 사람의 손으로만 재배한 사과 등등 무한하게 분화시켜 개별적인 욕망을 충족 시켜줄 소비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이른바 진리 과정(Truth Process)이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일체의 원리들을 단절시키고 중단시켜 자본주의적 예측과 계산의 억압을 멈추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진리 과정의 사건)을 보편화시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열수 있는 어떤 희망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바디우, 27) 그 대 표적인 진리과정으로 바디우는 예술, 과학, 정치, 사랑을 들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네가지의 중요 주제들을 다루어 볼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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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도 재미나게
    2018.02.03 00: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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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 신학 가이드 22에서 아감벤의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바디우로 오셨어요. 아감벤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는 건가요? 아니면 거기서 끝내신건가요? 궁금합니다.
  2. 한수현
    2018.03.27 11:2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더 진행하고 싶었던 글을 이번해에 출간 예정인 저의 책에 좀 더 찬찬히 써볼까 합니다. 아감벤이 좀 방대해서 일단은 이정도로 정리한 것을 용서하세요^^
  3. 오늘도재미나게
    2018.05.10 19:3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앗, 기대가 됩니다. 어서어서 쓰셔서 좋은 책이 나왔으면 합니다.
    꼭 올해 안에 책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저는 신약은 잘 모르는데 전도사님의 강의와 이글들을 통해 새롭게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같은 독자들이 있으니 좋은 글을 써주시길 기대합니다.


이주: 21세기가 당면한 국제적 문제이자 신학적 주제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카나다연합교회 총회가 주관하는 선교와 봉사 (Mission and Service, 약칭 M & S)라는 기금이 있다. M&S 기금으로 후원을 요청하는 세계 에큐메니칼 교회들과 단체들은 도움을 받는다. 한국은 NCCK (교회협의회)포함해서, 파트너교단인 기독교장로회 소속 다양한 그룹, 그리고 한국여신학자협의회와 같은 기독교여성단체들이 이 M&S 후원을 받는다.

    많은 연합교회교인들이 지교회 1년 예산의 10%를 총회기금으로 설정하고 헌금한다. 사회정의와 약자보호를 더 열심히 하는 교회의 경우 20%를 총회 M&S 기금을 헌금한다. 지교회 재정 상황이 어려워져도, 총회 M&S 기금 액수를 줄이지 않고자 노력한다. 왜냐하면, 이 기금은 나 자신, 내 교회, 내 나라를 위해 쓰이지 않고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교회를 불리기 위해, 또는 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가 아니라, 파트너 교회와 단체가 요청하는 도움에 대한 후원이다.

    매 주일 각 연합교회 지교회 주일예배를 드릴 때, 헌금 순서 전, M&S Minutes (노트)를 읽는다. 주당 1페이지 분량으로 작성된 이 노트는 각 장마다 이 기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귀한 소식들이 담겨져 있다.

    얼마전 한국소식이 이 M&S Minutes에 실렸다. 한국의 이주 상황을 다루었다. 이주민의 숫자가 지난 30년전과 비교해서 5배가 늘었다는 소식과 함께, 비한국 이주민들이 겪는 어려움과 차별, 이를 위해 애쓰는 교회 단체 (이주민 센터)를 소개했다. 그리고 어떻게 M&S 기금이 이 단체에게 쓰여지고 있는지 보고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2017년 한국에서 이주의 문제가 어떤지 궁금해졌다.

    난,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떠나 사는 이주민이다. 통계에 의하면, 상대적 비율로는 (절대수는 중국인들이지만)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이주를 많이 하고 산다고 한다.

   지난 30년간 비한국인들이 한국으로 오는 이주의 비율도 높아졌지만, 분단된 남과 북, 더 비좁아진 한국을 떠나 세계 곳곳으로 이주한 한국인들도 지난 50년동안 엄청나게 늘었다. 물론, 일본제국주의시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주를 당한 한국인들,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과 스탈린 소련연방억압시대 러시아에서 추방당한 고려인들, 이들까지 포함하면 지난 100년이상 한국인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이주민들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주의 문제를 한국인으로서 다룰 필요가 있다. 아니 이주의 문제는 한국이라는 지역적, 일개 국가적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세계적 문제이다. 그래서 21세기는 글로벌 이주의 시대라고 불려지고 있다.[각주:1]

    여기서 난 기독교인으로서 실천신학자로서 예배학자로 교회를 본다. 기독교인의 사명과 책임이 교회에 국한된 것을 말하고자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이유로 교회를 보고자 한다. 즉, 이주라는 세계의 상황,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이 운동이자 현상(people on the move)에 의해 교회가 영향을 받고 있고, 교회도 흔들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기위해 교회를 보고자 한다.

    많은 출판사에서 이주에 관한 책을 펴내고 있다. 그 한 출판사는 영국 소속 Palgrave Macmillan이다. 최근 출판한 책 중 Church in an age of Global Migration: A Moving Body [각주:2] 이 2016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은 WCC (세계기독교협의회)가 1995년부터 이주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관련 글들과 운동을 벌여왔는지 소개한다. 더불어, 다양한 교단 출신, 성공회, 세례교, 정교회, 오순절, 장로교, 그리고 카톨릭 교회들에 소속한 저자들의 글을 통해, 전세계 교회들이 당면한 이주의 문제를 살핀다. 총 19명의 저자들이 속한 나라, 일하는 나라들도 다양하다. 필리핀, 호주, 과테말라, 미국, 카나다, 브라질, 이탤리, 레바논, 스위스, 영국, 벨기에, 인도, 그리고 동아프리카에 속한 에디오피아, 콩고, 수단, 소말리아, 우간다 등이다.

   역사가 다르고, 식민주의의 잔재가 다르고, 인종과 문화가 다르지만, 이들 나라들, 즉, 모든 대륙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 남미, 중동,그리고 유럽)을 포함하고 있는 이들 나라들 모두 이주의 문제를 겪고 있고, 그 이주를 통해 신학이 깊어지고 있고, 신앙적 실천이 다양해지고 있다. 이주라는 세계적 현상으로 인해, 그 영향을 받아서 새롭게 정립되는 교회론의 주제를 네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로 번역되는 헬라어 에클라시아, 보내진 자들의 모임, (those who were sent), 어원의 의미를 살린다면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보내졌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둘째, 교회를 순례라는 신학적 여정으로 본다면, 신앙인이 가야할 길과 이주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세째, 출애굽기의 핵심 주제이자,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킨 하나님의 가르침,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출 22:21)라는 성서전통을 전승하고 실천하는 교회의 역할과 현실 이주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네째, 신약 에베소서에서는 우리는 (교회는) 외국인도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느님의 가족 (2:19)이라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히 13:14) 라고 히브리서신은 이주의 신학, 즉, 정착하지 않는 믿음, 안주하지 않는 신앙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초대교회와 이주의 문제는어떤 연관이 있으며 어떤 실천신학적 과제가 도출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신학적 응답은 궁극적으로 기존의 교회론이라는 교리적 이론적 신학적 틀에 도전을 준다. 내면적이고 (inward), 정적인 (static) 신앙, 우리 교회교인만 생각하고 (exclusive), 또는 기독교중심의 제국주의 (Christian centric/imperialistic)를 자성하고, 자본주의적 번영, 성장, 물질중심주의적 복음 (prosperity Gospel)에 대한 반박으로써 대안적 교회론 정립이 시급하다.

   이주라는 현상과 이주의 성서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교회론은 교리적, 이성적, 추상적 신학적 사유를 넘어서서 경험적, 현상적, 그리고 실천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이주라는 현실은, 이주가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하나의 운동, 움직이는, 변동하는 현실이다. 소위 이주는 고체가 아니라 액체이다. 그러므로, 동적 사고, 움직임을 직시하고 대처하는 교회론과 신학을 요구한다. 이미 정해진 이념이나 정돈된 사상이 있고, 이를 적용하는 식의 연역적 방식의 신학은 현 이주를 담아내기 부적합하다. 귀납적 방식의 신학, 유연하고 개방적인 신학과 실천을 요구한다. 이주라는 현실은 나와 같은 우리 (예. 동일한 언어공동체, 인종, 종교)가 다른 이들을 만나야 하는 상황을 불러온다. 그들과의 공존을 추구해야 하기에, 공존하지 않으면 분쟁과 폭력을 가져오기에, 다름을 포괄하는 신앙, 자기를 비우면서 타자에 관심하는 믿음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 공존의 삶은, 한번하는 구제가 아니라, 일상의 삶으로 이어지는 여정으로 교회가 자리매김할 것을 요청한다. 공존을 추구하지 않아서 최악의 경우 인종, 종족 말살 분쟁이 일어났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인류 최악의 사태를 직면할 수 있다. 우려되는 바는 죽이지는 않아도 이주민들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정책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변화하는 세상을 향한 신앙을 위한 예언자적 소리를 내야한다. 그 신앙이 교회안팍에서 녹아나는 구체적인 실천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야한다. 보내진 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순레자로서의 교회, 출애굽 해방의 후손자로서의 교회, 나그네로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 이 모습을 현 21세기에 실현하는 교회로 담아내야 한다. 물론, 이런 이주의 문제를 씨름하는 과정에서 두려움, 무지 등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을 것임이 분명하다. 동시에 기존에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과 행위를 통해 교회의 본 모습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런 긍정적인 측면에서 최근 카나다에서 벌어진 교회소식 하나를 나눈다.

    최근 하인즈 토마토 케첩 공장이 있는 도시로 유명한 리밍턴이라는 카나다 남부 지역에 속한 한 성공회 교회가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드리도록 교회 문을 열고, 예배 공간을 나누어 쓰기로 한 사실이 알려졌다.[각주:3] 시리아 피난민들의 이주가 30가정 이상으로 증가되면서 그들이 따로 예배드릴 공간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성공회 교회가 예배당을 오픈 한 것이다. 예배의 핵심은 기도이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기도가 없는 곳에서 그 어떤 다른 신앙적 실천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예배당을 열고, 이슬람교인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배려한 점은 일종의 기도이자, 실천신학적 교회론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예가 다른 실천, 이른바 이슬람에 대한 편견제거하기, 서로의 신앙과 믿음 배우기, 함께 연대하고 공공선을 이루기 등으로 이어지리라 본다. 이렇게 교회가 이슬람교도들을 위해 예배당을 여는 일은 단순한 구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기독교인)도 나그네라는 고백과 이슬람인들도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혐오와 이슬람 종교에 대한 배타적 사고가 너무도 팽배한 기독교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사례이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를 하지 말라고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권고했다 (롬 12:14). 소수였던 초대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교회는 에클라시아이다. 교회라는 곳으로 모인 자들 한 사람 한 사람, 원래부터 있던 기득권자가 아니라, 보내진 자들이요 초청받은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다. 영원히 좋은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를 틀어쥐고 있는 특권받은 자들이 아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집짓고 살자는 유혹에 빠질 때, 과감히 내려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떠나야 하는 순례자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다른 이주자들도 만날 것이고, 그 이주자의 삶의 조건이 어려우면, 그들을 돕고 환대하는 것이 보내진 자, 박해경험을 가진 자가 할 일이다 (히 13:2). 우리는 본향, 장차 올 도시를 향해 가지만, 그래서 현실에 집착해선 안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저버리거나 현실의 삶을 수동적으로 살라는 뜻은 아니다. 가는 그 여정 순간에 충실하면서,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내야한다.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주어야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며, 그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차별, 억압,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온전히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출애굽해방의 전승을 계승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리밍턴 성공회 교회는 그런 보내진 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예배당 건물을 영원히 자신들이 소유할 것으로 쥐고 앉아 있지 않고, 기도를 요하는 이슬람 교인들을 위해 소유가 아니라, 성전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주로 인해, 이슬람 이주자들을 만났다. 이 성공회 교회를 세운 신앙의 선배도 어딘가에서 온 이주자였을 것이다. 박해건, 전쟁이건, 또는 경제적, 문화적,종교적, 교육적 이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교인들의 조상도 이주를 했다. 익숙하고 편안한 고향, 고국, 자기 집을 떠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주라는 과정은 대부분의 경우 자발적 선택보다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더 많다. 특히 피난민으로서의 이주는 훨씬 더 그 힘든 여정을 동반한다. 그래서 피난민을 받고, 이주민을 만나는 우리 기독교인들, 이미 정착한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단순히 자선베품의 단계를 넘어서 이 만남, 사귐을 통해 그 이슬람 교도들을 포함해서, 피난민들, 새로운 이주민들로부터 받을 배움에 관심을 두자. 그들과의 만남으로 본 교회의 모습을 되찾으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귀한 정체성을 확인하자. 상생과 공존의 경험, 공존을 위한 실천을 위해, 신학적 성찰과 성서적 지혜를 구해야한다.

    디어드리 코넬은 예수님이 이주민이었다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이주한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주민으로서 공생애의 삶을 사셨다고 주장한다.[각주:4]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이주라는 것이다. 이주민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을 보내면서, 이주의 문제에 관심을 두길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1. Stephen Castles and Mark J. Miller, Age of Migration, 4th e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9). [본문으로]
  2. Susanna Snyder, Joshua Ralston, and Agnes M Brazal, eds. Church in an Age of Global Migration: A Moving Body (Palgrave, 2016). [본문으로]
  3. http://www.cbc.ca/news/canada/windsor/leamington-ont-anglican-church-opens-doors-to-muslim-worshippers-1.422166 [본문으로]
  4. Deirdre Cornell, Jesus was a Migrant (Maryknoll: Orbis, 20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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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3] 요 8:11과 마 7:1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성소수자 혐오자들, 특히 기독교 계통의 성소수자 혐오자들이 기를 쓰고 ‘증명’하려는 것 중의 하나가 성소수자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 굳이 ‘후천적’이라는 것을 기를 쓰며 주장하는 이유는,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이 ‘선천적’이라고 주장한다고 이들이 믿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반박하려는 것일 터이며, 나아가서는 ‘후천적’인 것이므로 당연히 ‘교정’도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실 ‘선천적’/’후천적’이라는 프레임은 성소수자 옹호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도 종종 채택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선천적’으로 그렇다는 데 어쩔 거냐 그런데 왜 안 된다고 난리냐 이런 ‘옹호’ 의견이 종종 보이는 것도 현실이니까.

   어쨌든 저런 요설에 대해서는 바로 ‘후천적’이면 어쨌다는 건데란 반문이 나올 것이고 사실 이거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이야기해 볼 거리가 있다면,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선천적’/’후천적’ 프레임으로 읽는 것이 애당초 맞는가 하는 것일 터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이 자신들에게도 “어, 이상해, 나는 남들과 좀 다른 것 같아”라고 ‘발견되는’ 것이라는 것이며(그래서 어떤 성소수자 운동가는 이런 의미에서 성소수자는 비이성애자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이 어떻게 성립된 것인지 추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니까. 이런 이야기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냐 아니냐’라는 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좀 더 성실히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선천적이니 후천적이니 이런 야그로 읽어 치워 버리지는 말아야 할 것은 확실할 것이다.

  특히나, ‘기독교인’이라면 문제가 또 달라진다. 왜냐고? 당장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되새겨 볼 일이다.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이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모태신앙’이 아닌 이상 ‘선천적’이란 말은 못 할 테지만(사실 ‘모태신앙’이라고 해도 그걸 ‘선천적’이라 할 수 있는지는 또 의문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신앙이 ‘후천적’이라고, 지금 이 글의 맥락에서라면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앙을 가지게 된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고백은 당장 걷어치워야 할 테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가장 중요한 정체성에 ‘선천적’/’후천적’이란 잣대를 들이댄다는 게 넌센스임을 이렇게 잘 알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다른 이들의 성 정체성/성 지향성엔 그 잣대를 들이대겠다니, 이거야말로 코미디 아닌가.


2. 


  소위 ‘후천적’이란, ‘선택’이라고 굳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심보를 조금 더 뜯어 본다면, 그 심보를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들의 입에서 종종 오르내리는 또다른 이야기를 끌어들일 만할 것이다. 동성애가 그 당사자들간의 ‘선택’일 뿐이거나, 혹은 당사자 외에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인정해 주어도 된다면, 소아성애도, 근친상간도, 다 인정해 주어도 되느냐는 그 이야기 말이다.

  일단 바로 생각나는 말대꾸가 있다면 그거 다 ‘이성애’ 아닌가요일 것이다.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는데 왜 동성애를 끌어들여 지지고 볶고냐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대꾸가 틀린 거야 절대로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말대꾸를 하기 전에, 저 소아성애도 근친상간도 어쩌고 하는 말을 조금만 더 뜯어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그럼, ‘선택’일 뿐이거나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인정’의 근거로 삼고 나면, 소아성애니 근친상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반대할 근거라고 들고 올 것이 더 이상 없어져 버린다는 것인가? 그렇게 근거가 없어져 버리니 소아성애니 근친상간이니 하는 것들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어져 버린다는 것인가?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인정하면 안 되는 건 자명하니, 역으로 ‘선택’이니 ‘피해 없음’이니 하는 근거로 동성애를 인정해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인가?

  이렇게 질문을 묻고 나면, 아무리 봐도 소아성애니 근친상간이니를 들먹이는 이 이슈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걸 들먹이면서 이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답시고 여기는 사람들일 것 같다. 그들이 그걸 들먹이면서 지키고자 하는 소위 ‘성윤리’라는 것이 속 빈 강정도 이런 속빈 강정이 없다는 말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 속 빈 강정 주제에 감히 남의 삶을 좌지우지하겠다고 지껄이고 있으니 더더욱이나.


3. 


  1과 2에서 언급했던 집단들이 목청을 높이는 이슈 중 하나가 ‘군형법 제92조 6항’이다. 남성 군인들 간의 합의에 의한 성관계마저도 처벌하는, ‘계간죄’ 어쩌고 하는 바로 그 조항. 어디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걸 본 적도 있다. 남자들끼리만 모여 있는 군대에서 ‘동성애’를 허용해 주면, 그건 대놓고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당하라는’ 이야기 아니냐고.

  여기에 대해서도 바로 말대꾸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면 하급자에게 강제력을 행사한 상급자만 처벌하면 그만 아니냐 왜 쌍방이 처벌되어야 하냐. 그리고 이런 경우도 아니고 ‘합의’에 의한 경우까지 처벌하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냐 이런 이야기부터. 이미 성소수자 군복무를 허용한 나라들이 있는데, 한국은 그런 나라와는 다른 ‘별종’들만 사는 나라라는 소리냐는 이야기도. 실제 군대에서 자신이 성소수자라고 밝히게 되면 오히려 피해를 보는 경우(물론 ‘성폭력’에 가까운 피해까지 포함해서)가 많다는 현실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말대꾸를 당연히 수긍하면서도 역시 여기서도 저 말 자체를 조금 더 뜯어보고 싶은 구석이 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대놓고 ‘당하라는’ 운운하는 바로 저 이야기. 이걸 ‘당한다’ 어쩌고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상급자가 하급자를, 저항할 수 없는 하급자를 ‘여자’ 보듯이 할 수 있어서 ‘여자’에게 하듯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터인데, 그럼 대체 평소에 ‘여자’를 어떻게 보고 있길래, ‘저항할 수 없는 조건’이 된다면 저런 행동이 만연할 것이다(고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말이다. 즉, 여기서도 정작 드러나는 건, 동성애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이성애자 남자들이 ‘여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그 시선을 ‘저항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어떻게 옮기고 있는가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4.


  성소수자들, 아니 비단 성소수자들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배제를 겪는 존재들에 대해서 동맹의 자세를 취하려 하면, 흔히 기독교인이라는 작자들이 반론이랍시고 들먹이는 성서구절이 요한복음 8장 11절이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말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그런데 지금까지 글을 쭉 써오다 보니,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 7장 1절을 봐야 할 거란 생각이 든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가능하면 2절까지도 봐야 할 거다. 비판하는 그 잣대로 자신들도 비판을 받을 거다라는 그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아마 같은 장의 22~23절도 보면 더 좋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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