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라 목사 ‘이단’ 시비를 통해서 본 ‘연대’와 ‘퀴어신학’의 가능성





김나미

(미국 Spelman College 교수, 종교학)




    이성애가부장제(heteropatriarchy)의 붕괴와 젠더 위계질서의 분열에 대한 두려움을 ‘동성애’에 대한 공격으로 분출해온 개신교 우파의 최근의 권력행사의 대표적 사례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성’ 여부 조사일 것이 다. 예장합동의 이단대책위원회가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성조사를 표명했고, 7개 교단 이단대책위가 공조 하면서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여부를 조사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급기야는 임 목사를 소환하겠다고 나섰다. 지금 한국 개신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 관련 ‘이단’ 시비는 ‘정통’과 ‘비정통’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이 성애가부장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신학적 입장, 목회, 목사를 ‘이단’으로 명명한 뒤에, ‘정통’과 ‘다르고’, 다르기 때문에 ‘비정상’이고, ‘비정상’이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에 ‘해’가 되기에 낙인을 찍겠다는 것이다. 비정 통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몰려 차별, 배제, 멸시, 폭력,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던 존재들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임보라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와 관련하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포럼을 개최했고, 나는 임보라 목사와 함께 포럼에 참여하였다. 동성애에 대한 ‘교리신학’적, ‘윤리신학’적 이해에 대한 짧은 고찰과 8개의 개신교 교단에서 자신들의 교단에 속하지 않은 임보라 목사를 왜 ‘마녀사냥’하듯 이단으로 몰아가는지에 대 해서 의견들이 오갔다. 한데 질의・응답시간에 나눈 의견들과 질문들 중 하나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고 있 다. 맨 마지막에 제기된 것인데, “이 날의 포럼이 퀴어들의 경험을 대상화하는 것은 아닌지”라는 것이다.[각주:1]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는 이 짧은 질문은 ‘퀴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하냐를 묻는 퀴어정치학(queer politics)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한, 이 질문은 성소수자,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하며, 더 나아가 ‘누가 퀴어신학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퀴어’(queer)는 일반적으로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 자신의 성과 젠더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일 컫고, 이들과 연대하는 ‘엘라이들’(allies)도 포함하는 총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이렇듯 ‘퀴어’가 LGBTQIA(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stioning, Intersex, Asexual)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의미로 규정될 수 없고 그렇게 제한되기를 거부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영어에서 명사로도, 동사로도, 형용사 로도 쓰이는 ‘퀴어’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지워버린다는 의미, ‘뭔가를 위반하는 행위’, 또는 ‘이성애규범 성(heteronormativity)에 대한 대항’ 등의 의미로도 사용된다.[각주:2]


    퀴어정치학은 성적인 ‘일탈자’와 ‘타자’로 규정되는 주체들을 소수자들로 낙인찍고 억압하는 여러 가지 규 제와 범주화에 의해 성적 주체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성정체성의 이분화를 비판하 고 이성애를 포함한 다양한 범주의 섹슈얼리티에 분포된 권력의 여러 지점들(힘의 불균형)을 예리하게 짚어낸다.[각주:3] 또한, 퀴어 이론가들은 동성애의 어떤 규범적 위치(position)를 옹호하는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에 대 해서, 그리고 ‘퀴어’를 ‘이상화’(idealization)하거나 ‘동일시’(assimilation)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4]


    이렇게 ‘퀴어’가 한 가지 의미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엘라이’로서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 자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엘라이로서의 연대는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성적 ‘일탈자’로 규정된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거나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연 대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근간인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 젠더 위계질서를 끊임없 이 비판하고, 성과 젠더의 사회적 작동과정에서 차별과 배제, 고통을 유발하고 재생산해내는 사회의 권력구 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의 아픔과 고통의 깊이를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는,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이 연대의 유의미한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정체성의 ‘다름’을 차별로 전환시키는 권력구조의 작동 임이라는 사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자신의 성과 젠더 정체성을 퀴어로 규정짓 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을 통해서 성소수자나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가 가능하게 된다. 다름을 비정상으로, 비정상을 해악으로 규정하면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메커니 즘을 각인하고, 그 속에서 여러 차별과 배제가 어떻게 생겨나고, 여러 가지 고통과 아픔이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인식한다면 그런 권력구조의 종식을 위해서 연대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연대 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획일적’으로 이성애를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엘라이가 이성애자나 시스젠 더(cisgender. 태어나면서 지정받은 '신체적 성별[sex]'과 자신이 정체화 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일치한다고 여기는 사람) 로서 알게 모르게 특권을 누려왔음을, 그러한 (무)의식적 메커니즘에 기생하고 있어왔음을 자기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또한 성소수자와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는 이성애가부장제와 그것을 지탱하는 다른 권력 구조와 억압 체제들에도 대항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왜냐면 억압구조들은 서로 교차하고 그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형성되고 작동되는 과정에서 편견과 차별, 배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대의 끈과 망은 계속 넓혀져 갈 수 밖에 없다.


    ‘퀴어’의 다양한 의미와, 성소수자와 젠더소수자들과의 연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퀴어신학에 대한 이해도 확장하게 된다. 약 30여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퀴어종교학(퀴어 기독교신학 포함)도 변해왔다. ‘퀴어’라는 용어가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듯이 퀴어종교학/신학도 내부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퀴어’를 LGBTQIA를 총 괄하는 용어로 규정하면서 퀴어정체성과 퀴어경험에서 출발하는 퀴어신학이 있고, 퀴어를 단지 성과 젠더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신학도 있다. 다시 말해서, ‘게이로서 신학하기’라는 정체성과 경험에 근 거한 신학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교의 뿌리 깊은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를 비판하고, 또 기독교내에 이미 존재하는 ‘퀴어성’(queerness)을 재발견해내려 하는 퀴어신학의 흐름도 있다. 이는 퀴어신학이 LGBTQIA의 경험만을 신학화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다름’을 ‘차별’로 규정하고 성과 젠더에 대한 지배 규범을 생산해 내 는 사회의 권력구조를 비판하면서 기독교 역사와 전통, 기존의 성서해석과 신학을 퀴어적 시각에서 다시 읽 고 재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렇게 ‘퀴어’가 한 가지 의미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엘라이’로서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 자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엘라이로서의 연대는 성소수자들이나 젠더소수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성적 ‘일탈자’로 규정된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거나 혹은 그들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연 대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근간인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가부장제, 젠더 위계질서를 끊임없 이 비판하고, 성과 젠더의 사회적 작동과정에서 차별과 배제, 고통을 유발하고 재생산해내는 사회의 권력구 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비록 성소수자들과 젠더소수자들의 아픔과 고통의 깊이를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는,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것이 연대의 유의미한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광범위한 퀴어신학의 한 분야인 퀴어적 성서 해석도 성서에서 ‘동성애’에 관한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들을 재해석하거나 성서의 몇몇 등장인물들을 ‘게이’로, 또 그들의 관계를 ‘동성 간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식론적 관점으로서의 ‘퀴어’를 통해 성서의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 가부장제, 젠더의 위계 질서를 비판하고, 성서에 나타난 규범과 비규범의 이분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비판함과 동시에 재해석 하고, 성서에 내재된 퀴어성을 해석해 내기도 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내부적으로 다양한 퀴어 신학은 정상과 비정상의 극명한 대조를 해체하고, 규범과 비규범의 경계를 지우고, 차이와 경계들을 만들어 내는 권력구조를 비판하며, 그런 권력구조가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질문 하면서 경계 허물기를 도모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신학적 시도는 소위 ‘정통’신학에 대한 비판까지도 포함한다.


    임보라 목사와 퀴어신학의 ‘이단성’을 판단하겠다는 세력에게 대항하는 방식으로서 그들의 ‘비정통성’이나 ‘이단성’을 되물으면서 또 다른 경계를 짓기보다는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권력구조의 억압성과 죽음 의 정치학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폭로하면서 그들의 낙후되고 치졸한 ‘이단’ 시비에 대한 집단적인 대항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여야 할 것이다.


    최근 교회의 경계 긋기와 벽쌓기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높고 폐쇄적으로 구축되어 가는 경계를 허무는 퀴어목회와 퀴어신학은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그렇기에 퀴어목 회와 퀴어신학을 실천하는 임보라 목사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내일로 미뤄질 수 없다.



ⓒ 웹진 <제3시대>



  1. 이 질문을 한 오세요 전도사님에게 감사드린다. [본문으로]
  2. Patrick S. Cheng, Radical Love: An Introduction to Queer Theology (Seabury, 2011), pp. 3~5을 보라. 또한 Susannah Cornwall, Controversies in Queer Theology (SCM, 2011)을 보라. [본문으로]
  3. Cathy J. Cohen, “PUNKS, BULLDAGGERS, AND WELFARE QUEENS: Radical Potential of Queer Politics?” GLQ vol. 3(1997), pp. 437~465을 보라. [본문으로]
  4. Lisa Duggan, The Twilight of Equality? Neoliberalism, Cultural Politics, and the Attack on Democracy (Boston: Beacon Press, 2003)을 보 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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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이슈에 자극된 생각들 1] 그들이 ‘이단’인 이유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Interdiscipilinary Studies박사과정(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 박사후보생,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인간 예수가 하느님이다”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부인할 수 없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그래서 더더욱 더 골치거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하느님인 인간 예수”가 있음으로 해서, 그리스도교는 같은 히브리 성서의 전통을 공유하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는 달리,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반드시 ‘삼위’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 예수 이전의 하느님, 하느님인 인간 예수, 인간 예수 이후의 하느님 이 3가지 현상을 반드시 함께 다뤄야 하니까. 한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3가지 현상을 관통하는 ‘한 가지’ 통일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하긴 오히려 그래서, 이 ‘3과 1이라는 두 숫자의 관계’에 대해서 담론이 풍성해지는 측면도 없지 않긴 하겠지만.

   게다가 이 ‘하느님인 인간 예수’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철저하게 구별된다는 사고가 기본에 깔려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위시한 소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의 특색인데, 갑자기 한 인간이 동시에 하느님이기도 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이다. 실제로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그리스도교 교회 중에서도, 사실은 ‘하느님인 인간 예수’가 아니라 인간성을 흡수하여 단일한 신성을 만든 ‘하느님인 예수’였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존재하니까.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 현재 ‘정통적인 견해’는 이런 것이다. 예수는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다”라는 것.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쨌든 모두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래야만 예수라는 존재를 온전히 해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담긴 견해라고 할 수 있겠고, 필자도 그러한 생각에 큰 이의는 없다.

   그러나, ‘참 하느님인 동시에 참 인간’이라고 말을 하게 되면, 다른 질문 거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도대체 ‘참 하느님’과 ‘참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2. 

   어느새 성소수자 인권운동 지지 기독교인의 대표격이 되어 버린 섬돌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에게 다른 교단에서 엉뚱하게도 무려 '이단 시비'를 걸었다. 그 이단 시비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과정에서 요런 소리가 나왔나 보다. 성소수자 이슈 관련 신학적 논의에서 예수를 성소수자라고 한대나. 그러니 이런 '이단 논의'를 소개하려는 목사가 '이단'이 아니면 뭐냐면서.

   글쎄. 먼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긴 한지부터가 확인이 되어야겠으나(뭐 필자도 예수와 요한복음의 '그가 사랑한 제자' 사이의 관계를 동성애적 상상으로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앞에서 본 것처럼 “참 하나님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그런 인간인 예수인데, 그 인간 삶의 중요한 측면 중에 하나인 '성'이라는 측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다는 것이다(그래서 덕분에 '막달라 마리아'와 짝짓기하는 상상이 종종 나오기도 하지 않던가). 웃기는 것은 그렇게 비어 있는 와중에도 '남성'이란 건 꼭 붙들고 앉아, 예컨대 여성이 신부나 목사가 되면 절대 안 된다는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고 우긴다는 것이지만. 

  사실 '그가 사랑한 제자'니 막달라 마리아니 뭐니 그런 상상하지 말고, 그냥 기록에 남은 대로 성 관련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즉 성 측면에선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라고 한다면, 농담 조금 심하게 섞으면 '고자'라 해도 할 말 없고, 조금 진지 모드를 섞어 보면, LGBT가 AIQ로 확장될 때 A(무성애자)라고 해 볼 만도 할 텐데, 그럼 예수를 성소수자라고 한다고 해서 굳이 틀린 말이 될 것도 없을 지도.

   물론 기록이 없는 것뿐인데 함부로 추측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방금까지의 이야기가 ‘함부로 추측’이라면, 예수가 음경을 갖고 있었다고 ‘이성애자 남성’이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함부로 추측’이긴 마찬가지일 터.


   3.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는데, 그래서 ‘참 하나님’은 무엇이고 ‘참 인간’은 무엇인가, 그래서 예수가 어떤 존재라는 것인가를 물으려니, 당장 ‘참’까지도 안 가고 ‘인간’부터 이렇게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게 된다. 어쨌든, 예수가 ‘참’자를 달든 말았든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그건 1차적으로는 예수라는 존재, 더 나아가 그 예수라는 존재에 근거해서 신을 이야기해야 하는 그리스도교라는 지평을 깔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에 근거해야 한다는 뜻일 것은 분명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가 보면, 예수란 존재가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 예수라는 존재에 근거해서 ‘신’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을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신'이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 '인간'이란 것의 모든 구석구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다면 반대로 '인간'이란 것을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지금 이야기되지 않은 것'에서 나타날 지도 모르는 '신'에게 뒤통수 맞을 준비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당장 바로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한 종류인 성소수자 문제만을 고려해도, 상황이 꽤 달라지지 않던가.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건드린다면, 그런 '신'은 우리에게 어떤 따라야 할 '모범'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차라리 뒤통수 때리는 존재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나를 소환하는 그런 존재 말이다(그래서, 필자는 "예수를 본받자"라는 이야기가 그다지 맘에 내키지 않는 편이다. 그건 이미 '예수'를 어떤 '모범', 즉 이미 현재의 세상에서 '모범'이라고 수긍이 되는 존재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테니. 또한,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건드림으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신’이라면, 그 ‘신’을 이야기하는 근거가 되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는, 1세기 팔레스틴에 살았다는 기록을 남긴 존재로서의 ‘역사적 예수’와 동일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이야기하면서 '신'이란 것을 찾아야 한다면, 예수를 통해서 '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면, 예수를 통해서 이야기되는 '신'이 성소수자라는 게 '이단'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에 이단이라고 거품을 물면서 ‘신’은 절대 성소수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바로 그들이 '이단'이지 않겠나. 인간의 모든 구석구석을 통해 이야기되어야 하는 ‘신’을, 감히 ‘성소수자 인간’은 빼고 이야기하자고 덤비는 ‘신성모독’자들일 테니까 말이다.

   뭐, 길게 이 소리 저 소리 늘어 놓았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 한 마디면 될 일이다. 

   "아따, 성소수자도 되지 못하는 신을 어따가 쓸겨?"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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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한 담론: 정의의 문제이자 실천신학의 주제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최근 독일에 한 달 정도 머문 적이 있다.

    유럽 연합 국가내에서 최고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국가로서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고 불편한 점도 있었다. 동시에, 환경문제 극복을 위한 재생에너지 개발, 재활용 부분면에서 독일 정부와 독일에 사는 사람들이 해내는 멋진 실천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부러웠던 점을 이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다. 그건 바로 모든 도로에 설치된 자전거전용 도로이다. 

    한달 간의 체류동안 네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보았다.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나찌에 저항해서 개신교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선언을 작성하고 발표한 바르멘이라는 도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항이 작성되고 발표된 비텐베르그, 이 두 도시는 작은 도시에 속한다. 통일독일의 수도이자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를린과 동독 시절, 비폭력 평화기도회를 통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도출했던 기독교교회들이 속한 라이프찌히는 큰 도시에 속한다.

    이 네 개의 도시 어느 곳을 가봐도 모든 도로에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자전거만 건너는 신호등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자전거를 들고 전기차인 trams를 타고, 기차를 탄다. 기차역엔 자전거 승객을 위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기차안엔 자전거를 둘 수 있는 기차객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 모든 제반시설은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적극 독려하고 있다. 이 제반시설을 설치하고 그 설치를 위해 투여된 과학 기술과 재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삶의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생각있는 독일 사람들의 성숙한 의식과 의지에 감동을 받았다.

    전기차와, 기차, 자전거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기에 가솔린과 디젤로 인해 생성된 매연을 품어대는 차들이 일반 도시 거리에 별로 없다. 그런 차들은 아마도 고속도로나 아우토반을 가야 만나게 될 것이다. 고속도로에 즐비한 그런 차들이 일반 거리엔 많지 않기에 그 차들이 품어대는 엔진과 머플러 소음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이른바 교통체증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 체증으로 인해 짜증내는 운전자들의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았다. 그렇게 깨끗한 공기와 자동차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거리에서 독일 사람들의 일상적 하루의 생활들을 보고 감상하는 그 시간이 참 소중했고 아름다웠다.

    자전거 전용도로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독일에서 내가 본 자전거 전용 도로는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사는 카나다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스케일의 도로였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최소 자동차도로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자동차 1차선인 곳에도 자전거 전용도로는 마련되어 있었다. 전 세계 도시를 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장담하건대 대다수 도시에 제대로 된 자전거전용도로는 없다고 본다. 만약 있다하더라도 차가 다니는 도로차선에 비하면 아주 작게 할당된 일종의 깍두기, 구색만 갖추어둔 도로일 것이다. 약 1차선, 2차선 도로일 경우, 자전거전용도로를 기대하긴 어렵다. 꽤나 잘 만들어진 4차선 도로라 하더라도 한차선 정도만 할애된 자전거도로가 대부분이다. 4차선 이상되는 도로의 경우는 차들이 너무 빨리 달리고, 그렇게 속도를 내대는 차옆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마치 불나방이 불꽃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하다. 자전거를 앞질러 가는 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을 마시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 역시 불쾌하고 건강에 해롭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안 쓰고, 자전거를 타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쉽게 할 수 없다. 그 의지를 현실화하려면 그 의지를 뒷받침해주는 특, 즉 공간적 제반시설과 제도적 의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난 인간의 삶이, 아니 인간적인 삶, 특히 약자와 평범한 자들의 삶을 보호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길과, 인간이 만들어낸 공적 제반시설이 주는 중요성간 불가분관계를 보고자 한다.

    퀴어페미니스트이자 문화이론가인 쥬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는 정치적 행위, 즉, 시위, 공적 저항의 모임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모인 자들의 의지, 전술, 전략, 즉, 시위의 목적과 내용만이 아니라 그 모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공간, 즉, 제반시설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이 중요성을 적나게하게 드러내고자 제반시설의 약화, 제반시설의 부재에 대한 예를 드는데, 요약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여 시위를 하는 이유를 제반시설의 부재로 치자. 아니 대부분 우리가 시위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제반시설이 부재하거나, 있더라도 계속 악화되고, 그 상태를 고치고자 하는 정부, 책임자들의 방기가 계속되어가는 점을 지적하고, 그의 개선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위를 하는 거다. 즉, 노숙자, 피난민들을 위한 일시적 대기소, 또는 빈곤층들이 사는 게토화된 주변부 도시들, 이들의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반시설들의 망가짐과 부재가 이런 예들에 속한다. 실제로 이는 책에 등장하는 예만이 아니라 실제 세계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매일의 현실이다. 깨끗한 식수용 청결용 물의 부재, 그런 물의 정화하는 상수도 제반시설의 약화, 또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거나, 마련된 화장실 정수관이 막혀서 실제로 쓸 수 없는 상태, 또 비와 눈,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숙소의 부재와, 숙소의 열악한 상황이다.[각주:1]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정치적 시위를 하는 데 있어 그 시위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는 단순히 시위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그 거리 자체의 실재가 제반시설이라는 그 공간의 담론이 주는 공공선 (public goods)이라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다시말해, 제반시설의 개선과 확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할 때, 그 시위를 가능케하는 그 공간을 지켜내는 일 자체가 정치적 행위이자 시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여기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 물적 조건의 중요성을 각인하는 것이 바로 공적 발언과 공적 시위를 하는 근본적 이유와 직결된다는 그 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한다. 쉽게 말해, 시위를 할 수 있는 거리가 없다면, 아니 그 거리, 또는 광장이 시위를 하기 어려운 열악한 상태라면, 그 거리와 광장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일이 시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직결되는 것이고, 동시에, 구체적인 시위와 저항의 목적과도 연관된다는 것이다. [각주:2]

    물적 토대에 관심을 두는 이론은 막시즘, 그리고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포스트콜로리얼 탈식민주의에서 중요시하는 인식론이다. 즉, 선형적 시간 (linear time)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위계적 식민주의를 가능케한 인식론이었다면, 이를 반박하면서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공간적 다수성 (spatial plurality)이 제안된다. 즉, 과거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다른 그룹들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가해자와 피해자, 이주민과 정착민)이 공존하며 살아가기위해 창조되어야 할 그 다름의 공간, (plural differences), 공간적 다수성이 확보되는 담론으로 강조된다.[각주:3] 

   이런 공간의 중요성을 논하는 담론은 동시에 신학적 화두이자 실천신학에서 특별히 관심하는 주제이다. 실천신학은 매일의 삶에 관심한다. 그 매일의 삶이 그냥 다람쥐 쳇바퀴돌아가듯이 관성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매일의 삶이 풍부해지도록 의미있도록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한다. 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각주:4]그래서 예배, 의식,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몸에 관심하기, 용서하기, 고통 겪기, 치유하기,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하기, 축복하기, 그리고 심지어 잘 죽기, 이 모든 삶의 삼라만상, 생로병사가 신학적 주제이다.[각주:5] 더 나아가, 그 매일의 삶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소수자와 약자들의 매일의 삶이 풍성해지는 데 관심한다. 자전거 전용도로 제반시설에 대한 담론은 그런 점에서 실천신학의 주제이자 약자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의의 문제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서, 그 곳이 좋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그 한 기준은 바로 그 곳이 얼마나 공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가로 가늠된다. 즉, 가진 자, 특권층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평범한 곳, 더 나아가, 약자와 소수자가 안전하고 즐겁게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면, 그 곳이 살기 좋은 곳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즉, 공간이 말한다 (space speaks). 특히, 이런 공적 공간이 사유화, 신자유주의, 그리고 증폭된 경제적 불균등, 독재에 버금가는 전제주의체제의 증가로 피해, 아니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공간에 대한 담론이 신학의 주제로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자전거 전용도로에 대한 논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한국처럼 석유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남북이 분단되어 그 나마 작은 땅덩이가 절반으로 잘린 채 북적거리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황사와 매연 등으로 최악의 공기를 자랑하는 한국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일은 참 어리석다. 그런데도 한국만큼 자동차를 선호하는 나라도 없다. 왜 그럴까? 자동차 산업의 강국이어서?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역할관계로 인해 (우리가 만들었으니 소비해줘야지)? 부의 상징? 허례허식의 폐해? 불편함을 싫어해서?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 복잡한 대도시에서 운전을 해 본 적이 없는 대개, 자동차를 소유하고 매일 교통대란을 겪는 대도시안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 분들의 대답을 듣고 싶다. 

    한국에 갈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지만 대도시에 설치된 공공지하철 제반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몰게 하기 위해 여전히 산을 뚫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개선하는데 드는 비용이 자동차를 쓰지 않도록 독려하는 제반시설의 투자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고 대중교통수단의 질을 높이는 논의를 공간에 대한 담론의 한 시도로, 정의의 문제로 실천신학적 주제토론으로 삼으면 어떨까? 


ⓒ 웹진 <제3시대>



  1. Judith Butler, Notes toward a Performance Theology of Assembl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본문으로]
  2. Judith Butler, “Rethinking Vulnerability and Resistance,” in Vulnerability in Resistance, edited by Judith Butler, Zeynep Gambetti, and Letical Sabs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13. [본문으로]
  3. Bill Ashcroft, Gareth Griffiths, and Helen Tiffin, The Empire Writes Back: Theory and Practice in Post-colonial Literature (London: Routledge, 1989), 36—37. [본문으로]
  4. Dorothy C. Bass, ed. Practicing Our Faith: A Way of Life for a Searching People (San Francisco: Jossey-Bass, 1997), X. [본문으로]
  5. 위에서 언급한 Bass, Practicing Our Faith는 몸 존중, 환대, 안식일, 증거, 분별, 공동체 만들기, 용서, 치유, 잘 죽기, 그리고 삶을 노래하기를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반면, 다음 책에선 고통, 치유, 놀기, 먹기, 사랑하기, 소비, 축복을 신앙을 형성시키고 삶의 도를 알려주는 실천신학의 주제로 다룬다. Bonnie J. Miller-McLemore, The Wiley-Blackwell Companion to Practical Theology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2), 23—8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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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19]



조르지오 아감벤 I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바울서신의 쟁점을 크게 두개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는 구원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종말에 관한 것이 된다. 즉, 구원론과 종말론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바울서신을 메시아니즘을 중심으로 읽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있어서 바울의 종말론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울 이전시대에 있었던 유대 종말론을 메시아니즘을 통해 바울이 어떻게 재해석하느냐가 그 방점이 된다. 유대의 종말론은 신의 심판과 다스림이 현재의 역사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측면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것은 이천년전이라면 모르겠으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어려운 도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않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다. 전통적인 바울의 종말론은 이 둘 사이에서 매우 애매한 입장을 취해왔다. 그 대표적인 이해가 바로 ‘이미’와 ‘아직’이란 도식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실히 ‘이미’ 시작되었고 그 완성은 ‘아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으며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지만 죽어서 가는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에 몇가지 질문을 해보자. 첫째로, 곧 온다던 예수는 틀린 건가? 둘째로, 예수가 곧 온다던 바울은 틀린건가? 세째로 그들이 틀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먼저 첫째와 둘째가 맞다고 한다면 일단 신학적 서술에서 종말론을 빼버려야한다. 바로 종말론이 없어도 제대로 설 수 있는 신학을 구성해야한다. 실제적으로 요즘의 신학은 구원론 중심의 신학이다. 특히나 바울의 신학이 ‘이신칭의’가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수 있다. 또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삶의 추구에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내세를 바라거나 메시아의 재림을 기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서서 자신의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학을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 최근의 성서신학은 몇가지 논쟁점을 남겨놓았다. 먼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종말론적 표현들이나 재림에 대한 표현들이 실제로 ‘역사적 예수’의 말인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들은 이러한 심판과 재림의 메세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 생각한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에게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신이 분부한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끈 혁명적 지도자로써 그려진다. 만약에 예수의 부활 이후에 성립된 것이 기독교의 종말론이라면 바울은 그러한 종말론을 구성한 일세대 신학자에 속하게 된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만약에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소위 종말론이라는 것, 즉 그리스도 공동체의 종말론의 1세대 정도되는 종말론 또한 ‘이미’와 ‘아직’이라는 도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아감벤은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바울의 메시아니즘의 정수는 메시아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는 가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자체를 새롭게 이해하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보통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라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새롭고도 보편적인 인간을 상상한다. ‘새시대 새일꾼’이라는 표현이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등은 이전의 역사를 끝마치고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뭔가 새로운 인간을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감벤에게 중요한 것은, 또는 아감벤이 생각한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시대를 어떻게 끝마칠 수 있느냐이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끝마치지도 않고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열수 있겠는가? 또는 이전의 시대를 맺음을 통해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 그 자체일 수는 없을까? 이를 맑스식으로 말하면 맑스가 꿈꾼것은 ‘새로운 계급’의 시대가 아니라 계급이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각주:1] 결국 핵심은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떤 사건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조건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 된다.[각주:2] 바로 메시아닉한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결국 주체가 새롭게 구축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아니라 주체가 그 현재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방법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확보되는 것, 즉 “오로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구원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3]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일이 부활을 통해 일어났다고 바울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하나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되지 않는다.[각주:4] 이 세계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세계의 개념들을 하나님 나라와 대치시키며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바울은 메시아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두개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하나가 법이고 두번째가 시간이다. 지난 웹진에서 필자가 아펠레스와 포로토제네스의 이야기를 다룰 때, 바울이 어떻게 법이 분리시킨 유대인과 비유대인, 로마인과 비로마인의 분리를 어떻게 새로운 분리를 더함으로, 즉 육과 영으로 분리시켜 법자체를 정지시키는지를 논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바울의 논의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으로 이전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것을 갈등의 극한으로 몰고감으로써 비판의 정점에서 반대로 완성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오랜 기간동안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율법관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바울은 율법을 반대하는가? 그런데 왜 완성시킨다고 말하는가?(롬 10:4) 아감벤에 따르면 오로지 율법을 그 극한의 갈등으로 스스로 몰아넣어서 마지막에 율법을 완전히 무장해재 시키는 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메시아닉한 관점에서는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각주:5]

    이후에 논하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알랜 바디우와 상극을 이루는 아감벤의 바울 읽기이다. 아감벤은 명확하게 바디우를 비판하는데, 아감벤은 ‘하나의 보편적인 생각이 어떻게 완전한 타자들의 기초위에서 동일성과 평등성을 나타낼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각주:6] 바디우에게는 바울이 어떤 새로운 보편성을 더함으로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었다면 아감벤에게 바울은 ‘유대인’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로 묶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법에 의해 생성된 아이덴티티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포착할 수 없음을 말한다. 결국 법자체를 inoperative(활동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아감벤은 새로운 주체가 아니라 법이 중지되어, 그 어떤 주체적 정의에도 포함되지 않는 ‘남은 자’(Remnant)들이 바울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 남은 자들은 “전체도 아니고 전체의 부분도 아니고, 부분이나 전체의 불가능성”을 나타낸다. 즉 모든 사람이나 민족들이 그 자신을 전체가 아니라 남은자로 놓는 것이다. [각주:7]예를 든다면 모든 사람들이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고 그 둘이 아닌 남은자가 될때 계급은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논의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상상력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데리다의 논의를 바울로 이끌고 들어와 바울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감벤의 바울읽기는 그의 시간에 대한 개념에도 나타나있다.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은 다음 웹진에서 논해보자.


참고도서

Agamben, Giorgio. The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Stanford, Calif.: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 웹진 <제3시대>



  1. Agamben, The Time That Remains, 31. [본문으로]
  2. Ibid., 41. [본문으로]
  3. Ibid., 42. [본문으로]
  4. Ibid., 43. [본문으로]
  5. Ibid., 48. [본문으로]
  6. Ibid., 52. [본문으로]
  7. Ibid., 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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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개혁하는” (Semper Reformanda):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합 총회를 앞두고

 



김혜란
(
캐나다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실천신학 교수)


 

    매 해가 의미있고, 매 해마다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난다. 매 해에 벌어지는 일들에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다. 의미부여, 의미 만들기, 의미해석하기, 이 작업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일이자 또한 신학자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2017년에 대한 신학적 단상을 하고자 한다.

    정치적으로 2017년은 의미있는 해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이자, 박근혜를 탄핵시킨 해이자,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이다.

    종교적으로 2017년 역시 의미있는 해이다. 2017년은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이에 맞추어 세계개혁교회연합 (World Communion of Reformed Churches, 전 세계개혁교회연맹, WCRC) 총회가 6월말 독일에서 열린다.

    이번 총회주제는 “Living God, Renew and Transform Us!” 이다. 주제가 명백하게 보여주듯이, 이번 총회는 개혁을 넘어 우리의 신앙과 삶,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본 연합 (WCRC)는 8천만명이 소속된 기독교인들을 대변하는 개혁교회 최대 에큐메니칼 조직이다. 이 조직을 하나로 묶는 신학적 끈은 첫째, “언제나 개혁하는” 개혁교회 신앙의 끈, 둘째, 코이노니아 정신을 모태로 분리가 아니라 연합을 향한 소망의 끈, 그리고, 정의추구가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고백의 끈이다. 이 세가지 끈은 다양한 신앙고백 (1982년 Belhar, 아파타이드 반대) 과 신학 선언 (2004년 Accra, 경제부정의과 제국 반대) 등을 통해 교회를 묶어왔고 엮어왔다.

    2017년 총회 준비 자료 (Prayerful Preparation)를 보면 “언제나 필요한 개혁”(Semper Reformanda) 개혁교회 모토를 신학적으로 조명한다.[각주:1]

    자료집 서문에서 WCRC 총무인 크리스 퍼거슨은 21세기 연합이 품고 가야할 전지구적 사회적 문제로 경제부정의, 즉,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빈부격차와 자본의 횡포가 날로 심각해지는 현실, 또 생태위기, 환경문제, 기상이변과 재해, 오염등으로 약자, 약한 나라, 인간이 아닌 생태계 생명들이 파괴되어가는 현실, 그리고 이주의 문제를 들었다. (다음 기고에 경제부정의, 생태문제, 그리고 이주의 문제를 연이어 다룰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세가지 이슈가 WCRC 를 엮고있는 세가지 끈, 신앙, 연합, 그리고 정의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관되는지 설명한다.

    WCRC 연합 의장인 제리 필레는 종교적으로, 성서문자근본주의에 입각한 차별의 문제를 들면서, 개혁교회 신학인 Sola Scriptura의미는 성서가 기득권자,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 선별적 해석이 되는 것으로 부터 보호할 책임이 개혁교회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Sola Gratia로 연결되는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신학교리에 대한 해석을 한다. 

    성서문자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양한 차별과(성차별, 남성성직자주의, 성소수자, 인종차별) 다양한 폭력 (성폭력, 전쟁폭력, 환경파괴)을 극복하는 신학적 응답과 실천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는 은총의 실천이 신앙의 잣대가 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세상의 이데올로기, 선입견, 편견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일만이 궁극적임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의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 삶, 그리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궁극적 힘이다. 아니, 예수님이 보여주신 은혜를 따르는 일이 선입견, 편견, 차별와 억압을 가능케하는 그 폭력을 끊어내는 저항과 변화의 힘이라는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 페니미스트 신약학자이자 이번 연합 총회 신학교육과정 Global Institute of Theology 책임담당자이자 학장인 무사 두베는 자료집을 통해 로마서 12장 말씀을 해석하면서 사도바울의 철저한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이 본 말씀에 담겨져 있다고 주장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12:1) 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변화되었기에, 부패한 제국이 우리를 억압하지만, 그 더러운 손길이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자유의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다음 구절 역시, 제국에 굴복하지 말고, 아니, 제국과 타협하지 말고 (confirm),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변화(transform)되라는 것이라고 본문에 대한 의미부여를 한다.

    본 자료집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또 한가지 문제는 바로 성차별의 문제이다. WCRC 소속 교회의 연합을 막고 있는 장벽으로 여성안수문제를 지적한다. 이를 위해 나도 자료집 저자로 발탁이 되어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하여, 본 총회를 통해 아직까지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주지 않는 WCRC 소속교단으로 하여금, 앞으로 7년 안에, 즉, 다음 총회까지 안수문제를신앙의 고백으로 실천할 것을 의결하는 안건이 올라와 있다. 동시에 성차별과 가부장제에 입각한 남성성직자주의의 문제는 성소수자에 대한 안수의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걸 지적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WCRC는 성소수자, 성정체성, 그리고 성 다양성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성찰과 실천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본 총회가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열린다는 그 장소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해석한다. 독일 신학자 울프 크뢰트케 (Krötke)는 자료집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그 해, 동독국가 종말의 시작을 알렸던 그 해부터 벌어진 월요일 비폭력시위 (Monday Demonstrations), 평화를 향한 기도회 (prayer for peace)가 라이프찌히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한다. 라이프찌히는 냉전시기엔 동독에 속한 도시였다. 기독교인들에게 동독에 속해서 종교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회주의체제안에 속한 교회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타협과 절충, 심지어 굴복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탄압과 교회에 대한 정부의 제제가 강해질수록 동독기독교인들의 저항과 인내의 힘은 줄지 않고 늘었다. 1980년대가 되면서 평화, 비폭력,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퍼져갔다. 그 와중 1989년 10월 9일 동독 국가 40주년 기념식에서 벌어진 시위는 120만명을 전대미문의 참여로 이어졌다. 같은해 벌어진 중국 천안문 사태를 주시하면서, 사회주의, 전제주의체제가 불러오는 폭력, 인권과 종교의 탄압에 대해 라이프찌히에 속한 교회들은 침묵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개혁하는” 개혁교회 정체성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정확히 1달 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500주년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의미는 과거에 대한 향수도 아니요, 기독교 문화 중심주의로 돌아가고자하는 절박함도 아니다. “언제나 개혁하는” 그 신앙, 파격적 (radical)이고 신앙적 (faithful)인 그 개혁교회 정체성을 되새기면서 현재 8천만 개혁교회가 교회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들과 교회가 소속한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예언자적으로 목회적으로 다루자는 의미이다. 


    2017년 세계개혁교회연합 총회가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역사적인 획을 긋는 총회가 되길 기도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주소서! 

    “Living God, Renew and Transform Us!”


ⓒ 웹진 <제3시대>



  1. Prayerful Preparation: Exploring the 2017 General Council Them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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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하나의 키워드 : 이단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Ⅰ.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초기 기독교 이단 연구에 대한 비판적 읽기


     이단이란 정통종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교리나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흔히 붙여지는 종교적 용어로서 대체로 불온하고 미심쩍으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수반한다. 한 예로, 사전에도 "헬라어 원어 하이레시스의 기본 의미는 선택이나 의견으로서 단순히 분파, 파(벌) 등을 일컫는 경우(행22:22)와 교회 내에서의 편당(고전 11:19)을 뜻하는 경우, 그리고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벧후 2:1) 등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나온다. 하지만 사회학자 피터 버거에게 이단적 명령은 근대 사회의 전형적 특성에 속한다. "전근대적 인간에게는 이단은 가능성에 불과했고 대개 거리가 먼 가능성이지만,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전형적으로 이단이 하나의 필요성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근대성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이 상황에서 취사선택은 하나의 명령인 것이다."[각주:1] 따라서, 앞서 본 사전적 정의와 달리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 해석자로서 권위에 대한 도전을 감행한 개척자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이단에게 부여될 수 있다. 물론, 맥그라스라면 단호히 대처할 것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단이란 용어는 겉으로는 복음의 모양을 하고 있되 궁극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전복시키는 신앙 체계를 가리키는 말이다."[각주:2] 사실, 이단적 명령에 따른 하나의 신학적 프로그램으로 버거는 19세기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을 지지하고 있는데, 맥그라스에게 이것은 근대 유럽 초창기 자유지상주의의 열망과 궤적을 같이하는 인간주의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이단이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해방을 안겨준다는 신념은 1세기의 현실보다는 오늘날 서양의 문화 풍토와 훨씬 더 관련이 깊다."[각주:3]고 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확실히 이 같은 맥그라스의 비판은 어떤 면에선 꽤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알다시피, 해석자란 역사를 자기 시대와 관련해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에 대한 맥그라스의 견해 역시 비판적인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맥그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단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평가적 개념이다. 어떤 차원에서 보면 이단은 어떤 공동체의 사상에 대한 판단 내지는 평가가 낳은 결과인 만큼 구성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각주:4] 다시 말해, "이단은 역사적 분석으로 정당성이나 부당성을 증명할 수 없는 평가적 개념"[각주:5]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놓고 "이단에 관한 역사적 연구는 다른 이들이 이미 규정지은 것을 역사가가 묘사해야 하는 일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정통인지에 대한 판단은 역사가가 정당한 역사방법론을 활용하여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각주:6]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단을 정의하고 구성하는 그의 방식은 애초에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작업은 아닌 셈이다. 그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특정한 신학적 관점이 미리 전제된 작업이고, 그에 따른 평가인 것이다. "사실은 잘못된 견해가 초창기부터 등장했기 때문에 후대가 이를 바로 잡아야 했다."[각주:7]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게다가, 초기 기독교는 어떤 종류든 획일성을 강요하는 권위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훗날에 정립된 신학 공식들은 명시적으로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사상과 예배 속에 이미 내재해 있던 사상과 주제를 점진적으로 펼쳐 보이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각주:8]는 고어의 말을 자연스럽게 인용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 주장이라기보다는 기독교 교리의 역사를 설명할 때 정통주의자들이 흔히 동원하는 씨앗의 비유와 유사한 주장이란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4세기에 정립될 정통주의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정통주의를 발현할 씨앗은 처음부터 품고 있었다고 보는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당시의 정통은 그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는 중이었다고 말이다. 정통은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상태가 아니라 씨앗처럼 상당 기간에 걸쳐 자라나는 중이었다. 장차 정통의 구조에 편입될 모든 기본 주제들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각주:9]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분자생물학을 전공한 그에게 다윈은 기독교의 역사를 살피는 데에 적격인 인물로 등장한다. "교리의 발전이란 사상은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됨과 동시에 새로운 지적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생물학 세계에서 진화를 얘기할 수 있다면 사상의 세계에서도 그와 똑같은 과정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각주:10]

     그러므로, 기독교의 이단에 대한 맥그라스의 평가는 역사이기보다는 특정한 신학적 이해를 전제한 하나의 해석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발터 바우어라면 이러한 신학적 전제는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고 비판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2세기 말까지 대다수의 장소에 있었던 주류 기독교는 정통파가 아니라 이단들이었다."[각주:11] 앞서 언급된 맥그라스의 씨앗 비유를 참조하면 "정통은 최초의 원래 견해와 다수의 보편적 견해를 모두 함의하고 있으며 이단은 그러한 정통적 믿음을 고의로 저버리는 타락을 뜻한다."[각주:12]는 에오세비오스의 설명을 맥그라스가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 얼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각주:13]


바우어의 입장은 단순한 주장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에우세비오스의 기록과는 달리 최초기와 혹은 승리자측이 지배하기 이전에는 대부분 지역에서 이단적 형태의 기독교, 즉 승리자측이 나중에 공격한 기독교의 제형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후기의 정통 기독교인들은 승리를 거둔뒤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발생한 내분의 역사에 대한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어만의 이런 주장을 다소 과장된 레토릭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바우어를 비판하고 있는 맥그라스조차도 바우어의 핵심적인 테제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바우어가 확실히 옳은 점이 한 가지 있다. 초기 기독교가 당시의 대표적인 일부 인물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인상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양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더 이상 논란거리나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각주: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그라스는 바우어의 주장을 수용한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받아친다. 한 예로, 영지주의를 페민적인 평등주의 운동으로 보는 페이절스의 주장에 대해 영지주의 저술은 반여성적 진술로 가득하다는 매크라이트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전혀 근거가 없다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단이 정통에 대해 자신의 합법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는 바우어의 주장이 붕괴되진 않는다. 애석하게도, 이 지점에서 맥그라스는 논점을 교묘하게 흩뜨리고, 정통은 비록 원형적 혹은 씨앗의 형태지만 애초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 이단들에 대한 맥그라스의 작업을 단적으로 평한다면 발터 바우어를 비롯해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최근의 학문적 작업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각고의 노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가 당면한 진정한 도전은 정통이야말로 강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정서적으로 매력있고, 심미적 감각을 증진하며,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주는 것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각주:15]는 그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고의 노력이 “이단은 후기 고전 시대의 다원적이고 경쟁적인 세계 안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결함이 있고 무기력하고 진정성이 없는 기독교의 한 부류였다. 반면에 정통은 그 장래를 안전하게 지키는 수단으로 진정성에 대한 추구를 촉진하는 등 이단보다 더 강한 생존력을 갖고 있었다.”[각주:16]는 논리비약인 동시에 일종의 결과론적인 주장으로까지 치닫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안쓰러워 보인다. 어떻게 역사가 맥그라스가 말한 바처럼 씨앗으로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평가하고 마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 개념의 역사란 반드시 그의 점진적인 세련화의, 계속 증가하는 그의 합리성의, 그의 추상화의 변화율의 역사가 아니라 그의 구성과 유효성의 다양한 장의, 그의 사용에 있어서 계기적인 규칙들의, 그의 정교화가 추구되고 성취되는 복수적인 이론적 환경의 역사일 수 있다.”[각주:17]는 푸코의 지적은 애초에 상상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때문에, “마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전통을 재구성하는 것에, 진화론적인 곡선을 따라가는 것에, 목적론을 기획하는 데에, 그리고 끊임없이 생명이라는 은유에 호소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차이를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간극과 분산을 기술하는 것에 대한, 동일한 것의 확고한 형태를 해체시키는 것에 대한 어떤 거부감을 느낀 듯이”[각주:18]라는 푸코의 지적을 맥그라스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에 대한 푸코의 논점이 중세에만 해당된다고 맥그라스가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권력이라는 개념을 순전히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맥그라스의 푸코에 대한 오독이다. 푸코에게 권력이란 단순히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행사되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비교해볼 때 기독교는 믿음체계라는 맥그라스의 주장 자체가 푸코에겐 이미 하나의 권력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4세기 황제의 정치적 수단에 의한 이단 규정이 2세기와 같은 초기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지식의 형태라는 점에서 보면 권력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푸코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단일한 기원이라는 신화를 해체하고 복수적인 기원을 상상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을 맥그라스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발터 바우어의 논의를 숙고함으로써, 다시 말해 때론 수용하고 때론 거부하고 때론 혁신하면서 초기 기독교의 이단들과 관련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그런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예로 맥그라스가 이단으로 낙인찍은 에비온파를 들 수 있다. 하나의 이단적 명령으로서 “타종교와 심각한 대결을 한다면, 적어도 가설적으로 다른 종교 역시 진리라는 명제에 대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달리 표현한다면 종교간의 대결에 돌입하려면 자기 자신의 현실관까지도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각주:19]는 버거의 주장을 참조하고서 버메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경청한다면[각주:20] 다소 비극적이지만 그럼에도 초기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정통이 이단이라고 낙인찍은 에비온파는 유대교와의 대화에도 생산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화 등과 같은 기독교의 부착물 없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던 토라를 준수하던 유대인들로 구성된 1세기의 수확인 유대-기독교의 쇠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유대인 진영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이방인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가장 가까이 남아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여겼고 기독교인들을 그들을 이단으로 여겼다. 제롬이 어거스틴에게 보낸 글을 보면 그들은 유대인이면서도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기 원했지만 그들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져갔고 생존하던 몇몇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 진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예수가 전하고 실천했던 종교의 흔적은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비유대인 세계에서 헬라화된 기독교가 승전가를 부르며 승전을 거듭할 수 있게 되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생소한 교리적, 교회적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가난한 자를 위해 부를 포기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나 우리의 시대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람바레네에 있는 병든 자를 위해 초기한 알버트 슈바이처, 그리고 노구를 이끌고 캘커타의 더러운 거리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돌보는 테레사 수녀를 통해 본을 볼 수 있는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강조, 자비의 마음과 같은 예수의 경건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아직도 소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비온파와 관련한 맥그라스의 이야기 역시 상당히 흥미롭게 들린다. “최근에 유대적인 기독교가 부활함에 따라 예수의 중요성을 유대인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일에 새로운 관심이 생겼다.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헬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방식들이 그리스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진정한 유대적인 방식으로 다시 진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선지자로 보는 것이 그런 예이다. 이로 말미암아 유대의 기독교 진영에서는 에비온주의 그리스도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각주:21]


ⓒ 웹진 <제3시대>



  1. 피터 버거, 『이단의 시대』, 서광선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81, p.36 [본문으로]
  2.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홍병룡 옮김, 포이에마, 2011, p.291 [본문으로]
  3.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20 [본문으로]
  4.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59 [본문으로]
  5.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03 [본문으로]
  6.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03 [본문으로]
  7.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48 [본문으로]
  8.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45 [본문으로]
  9.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25 [본문으로]
  10.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12 [본문으로]
  11. 정용택, 『교회에서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 이야기』, 자리, 2012, p.45 [본문으로]
  12. 정용택, 같은 책, p.43 [본문으로]
  13. 바트 어만,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이제, 2008, p.365 [본문으로]
  14.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123 [본문으로]
  15.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343 [본문으로]
  16. 알리스터 맥그라스, 같은 책, p.134 [본문으로]
  17.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1998, p.21 [본문으로]
  18. 미셸 푸코, 같은 책, p.33 [본문으로]
  19. 피터 버거, 앞의 책, p.169 [본문으로]
  20. 게자 버미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 노진준 옮김, 은성, 1995, p.262 [본문으로]
  21. 알리스터 맥그라스, 앞의 책, p.17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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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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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진보 신학의 버팀목, 

시카고 신학대학원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각주:1]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프롤로그 : 시카고를 아시나요?


   시카고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시카고 대화재(1871년)와 1920년대와 30년대 시카고를 장악했던 미국 갱의 전설 알카포네, 1990년대 NBA를 장악했던 농구천재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건축과 재즈의 도시, 바람과 호수의 도시, 그리고 얼마 전 퇴임한 바락 오바마 대통령 까지, 이상은 빅테이터를 돌리면 나오는 시카고 관련 내용들입니다.

    시카고는 미 중부 일리노이주에 있고, 미시건 호수 남서쪽에 자리잡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정치적으로 시카고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민주당 초강세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이런 까닭에 마약, 낙태, 총기규제, 반전, 흑인, 동성애와 이민자 정책 등에 있어 시카고는 미국내에서 진보담론의 진원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시카고의 특징들 가운데 빠진 것이 있다면, 시카고는 대학의 도시, 신학의 도시라는 점입니다. 명문 시카고대학, 노스웨스턴대학, 예수회 계통의 로욜라대학, 미국 내 최대 카톨릭 대학 중 하나인 드폴(De Paul)대학, 일리노이주립대학 등이 시카고에 위치하고 있고, 특별히 신학교육에 있어서 시카고는 바티칸 다음으로 가장 크고 내실있는 신학 네트워크가 조성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미 최대의 신학 도시, 시카고


   시카고의 가장 큰 신학적 특색을 꼽으라면 초교파적으로 구성된 12개의 신학교가 연합체(ACTS: The Association Of Chicago Theological Schools)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각주:2] ACTS에 속한 학생들은 어느 학교 수업이든 수강할 수 있습니다. 각기 다양한 신앙전통 속에 존재하는 신학, 예전, 역사들을 배우며 오늘의 신학을 재구성할 수 있는 풍부한 논의를 경험할 수 있는 있다는 말입니다. ACTS에 소속된 전임 교수는 260여명, 학생은 3천여명, 1년에 개설되는 강의는 총 700여 강좌에 육박합니다. 비슷한 형태의 샌프란시스코의 GTU나, 캐나다 토론토와 비교했을 때 비록 공동학위 시스템은 아니지만, 규모와 스케일 면에서는 가히 전미 최대 신학 도시라 할만 합니다.

    매학기 마다 수강신청을 하기 전에 무엇을 들을까 하고 ACTS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350개가 넘는 과목의 실라버스가 뗘 있습니다. 그것만 확인하는데도 일주일 넘게 걸립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 기독교윤리가 전공이었는데, 학기 시작 한 달전 ACTS에 소속된 윤리학 전공 30여명의 교수가 개설하는 50여 기독교 윤리 과목에 대한 research로부터 학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달 동안 실라버스 확인하여 강의 내용과 일정, Text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됩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내가 듣고 싶은 과목 3-4개를 선택하여 수강을 합니다.

    또한 ACTS에 속한 학생들은 수강 신청 전에 사전 협의만 하면 시카고대학, 노스웨스턴 대학, 로욜라(Loyola) 대학, 드폴(DePaul) 대학의 철학과 종교학 수업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책임윤리의 계승자로 알려진 시카고 대학의 슈바이커 교수의 강의를 오전에 듣고, 점심 먹고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건너가 철학과에서 데리다의 정치신학을 강의하는 도이처 교수의 강좌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로욜라 대학에 있는 미국 내 레비나스 번역가로 알려진 페이퍼 젝 교수가 개설하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 수업도 수강 가능합니다.

    종합하면, 시카고가 지닌 신학교육의 특징은 Interdisciplinary Studies (학제간 연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시카고가 지닌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의 상황속에서 시카고의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질문에 대해 철저한 제 학문간 연대와 제휴를 통해 신학적으로 다양한 색깔과 무닉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ACTS가 위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시카고 지역의 신학적 토양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미국 진보신학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 신학대학원(Chicago Theological Seminary, 이하 CTS)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시카고 신학교가 위치한 시카고 남부 Hyde Park[각주:3]


   시카고 신학대학원 길라잡이


   저는 2004년 시카고로 도미하여 2014년 학위를 마치고 10년만에 귀국했습니다. 멕코믹 신학교에서 석사과정(MATS)을 마치고(2007), 바로 CTS로 진학하여 7년 동안 윤리학으로 Ph.D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지금부터 시카고 유학시절 CTS에서 공부하면서 배우고 느낌 점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CTS는 미국연합그리스도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교단 소속의 신학교로서 1855년에 세워졌습니다. UCC 교단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교단으로 이민, 흑인, 반전, 동성애, 여성문제에 대한 선교정책에 있어 전향적인 자세와 실천을 이루어내고 있는 교단입니다. 우리 기장과는 1986년부터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서부 지역 회중교회들을 모체로 세워진 시카고신학교는 미국연합그리스도교단 출신 학생뿐만 아니라 개신교 각 교단과 천주교, 동방정교회, 나아가 유대교, 이슬람 계통의 학생까지 모여 공부하는 초교파, 범교단적 신학교입니다. 이름이 비슷해 혼동하기 쉬운 시카고대학 Divinity school과 CTS는 초기에 교수진과 학생 교류, 학교 행정을 같이 하는 관계였다가 1960년 이후에는 단순한 협력관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업과 도서관은 여전히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CTS는 역사적으로 교수와 학생 모두 시민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신학생들과 교수들은 사회적 문제와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이런 저런 형태로 현실의 문제에 개입합니다. 이라크 전쟁 반대시위,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Ocuupy Wall Street(월가를 점령하라!)’ 운동 가담, 그 밖에 동성애와 여성, 이민자 문제 등에서 CTS 구성원들은 대외적으로 활발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 때문일까요, CTS는 미국 인권운동의 대명사 마틴 루터 킹 명예학위를 주는 최고의 고등기관이기도 합니다. 이 상은 198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기독교의 반 인종차별 운동에 앞장섰던 투투주교에 수여되기도 했습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맨토로 유명한 트리니티 유나이티드 교회(UCC) 전 담임목사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가 CTS 출신입니다. 그는 미국의 패권적 외교정책에 대해 “Got damn America! (빌어먹을 미국)” 이라 비난하면서 문제적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1980년대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도 참여한 제시 잭슨 목사도 CTS 출신입니다. 이들은 CTS에서 행사(졸업식, 각종 기념식)가 있을 때 가끔씩 등장해 연설을 하면서 좌중을 쥐락펴락 하면서 행사장의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계절 학기 강사로 강단에 서기도 합니다.

       종합하면 CTS는 대사회적 메시지와 참여에 충실한 한신 신학의 학풍과도 매우 유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제가 Ph.D 과정 지원 할 때 SOP(학업계획서) 쓰면서 CTS 지원이유에서 ‘나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인 한신 출신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적었더니 교수님들이 흡족해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로 CTS는 미국 신학계에서 한국 신학계에서 한신이 점하는 위치와 같은 진보적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신이 요즘 안팎으로 변했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여전히 그 색깔을 변치 않고 시대에 맞게 진화하며 꾸준히 진보적 신학담론을 창출하는 CTS에서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시카고 신학대학원의 학풍


   CTS는 앞서 이미 언급 했듯이 미국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로 각종 사회적 이슈들에서 Radical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CTS는 전통적으로 아웃사이더 신학이 강합니다. 전에는 해방신학, 여성신학, 정치신학의 입장이 강했고, 근래는 Queer Theology (Ken Stone), Postmodern Theology (Jennings, Schneider), Black & Womanist Theology (Butler, Terrell)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학자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CTS는 목회상담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 안톤 보이슨(Anton T. Boisen)에 의해 전미에서 최초로 신학교에서 CPE를 시행했던 학교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CTS를 임상 목회상담의 산실로 우뚝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특별히 CTS를 오랫동안 대표했던 모어(Moore) 교수는 목회상담과 융과 틸리히를 연결하여 나름 그 분야 학제간 대화의 독보적 인물로 평가됩니다.

    특별히 저같이 데리다, 푸코, 라깡, 들뢰즈, 레비나스, 지젝등 현재 활발히 논의되는 유럽의 탈근대적, 좌파적 철학자들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어뗳게 해석하여 운동(윤리)의 차원으로, 해방의 차원으로 승화시킬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CTS는 미국내 최상의 학교입니다. Theology, Ethics & Human Science 분야의 전교수가 이 문제를 갖고 연구하는 분들이시고 권위자입니다. 올해 은퇴한 테드 제닝스(Ted Jennings) 교수는 요즘 가장 핫한 바울에 대한 정치신학 비평으로 유명한 학자이고, 서구 정신사를 인문 신학적으로 꿰고 있는 국보급 진보신학자입니다. 레비나스와 지젝을 통해 서구 전통신학에 반기를 들었던 서보명 교수는 근래에는 유영모,함석헌 사상을 바탕으로 서구신학에 대한 대안을 모색합니다. 지금은 벤더빌트로 옮긴 슈나이더(Schneider) 교수도 CTS에서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본회퍼와 탈근대 사상을 연결하는 학자이자, 차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할 신학자로 벌써부터 메이나 층이 형성된 신학자입니다

    CTS의 성서학은 전통적인 역사비평의 틀을 넘어서서 해석학적인 성서비평으로 유명합니다. 포스트콜로니얼의 시각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양승애 교수는 리타 나카시마 브럭(Rita Nakashima Brock)과 곽퓨란(Kwok Pui Lan)등과 어깨를 견주는 대표적 아시아 여성신학자입니다. 구약학자 켄스톤 (Ken Stone)의 이름은 앞으로 반드시 숙지하셔야 할 것입니다. 미국내 Queer 관점으로 구약성서를 재해석하는 독보적 학자입니다. 이렇듯 CTS에 포진하고 있는 엣지있는 교수들과 학교자체의 진보적 색채 때문에 전미에 분포하는 개혁적 성향의 신학도들에게 CTS는 여전히 매력적인 신학교입니다.


* CTS 새 캠퍼스[각주:4]


   변화하는 시카고 신학대학원


   2010년을 넘어가면서 CTS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신학교들도 그러하듯이 미국의 신학교들 역시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 내 진보성향의 신학교들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CTS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2012년에 큰 결단을 내려 원래 Hyde Park 55가에 위치했던 덩어리가 컸던 캠퍼스를 정리하고, 한 블록 위에다 새롭게 아담한 캠퍼스를 조성하였습니다.

    옛 건물을 처분하고 캠퍼스를 줄여 옮겨 가는 과정에서 이익이 발생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학사업과 그 밖의 교육프로그램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신학교협의회(ATS: The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로 부터 인가를 받아 Mainline Protestant Seminary 중 최초로 online으로 M.Div. 학위를 수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의 정신과 커리큘럼에 동의하고 흥미를 느끼면서도 거리상 입학할 수 없었던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신학도들이 CTS M. Div 온라인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Eco-Community(생태 공동체) 프로그램과 Interreligious Institute(종교간 센터)를 새롭게 만들어 운영하면서 좋은 평을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 기획된 프로그램들은 CTS에 기존에 있었던 LGBTQ Center (Queer theology), Christian-Muslim Studies, Christian-Judaism Studies, Center for Study of Black theology, Center for Study of Korean Christianity 등의 기관과 유기적으로 협조를 합니다. 이러한 커리큘럼 재정비를 통해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타자를 환대하는 목회자, 타자와 더불어 함께 연대하는 목회자 양성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관계자 말에 의하면 M.Div 온라인 과정 신설과 여러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전에 비해 30% 가까이 학생수가 증가했다고 합니다.[각주:5]

    몇몇 CTS의 상징적 교수들이 은퇴를 하거나 학교를 옮겨 교수보강이 시급했는데 좋은 교수들이 임용되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슈나이더 교수 후임으로 2015년 Christoph Ringer 교수가 Public Theology and Ethics 교수로 부임하였고, 불행하게 세상을 등진 모어 교수 후임으로는 작년 2016년에 Zachary Moon 교수가 새로 영입되었습니다. Stephanie Buckhanon Crowder는 womanist(흑인여성신학) 관점에서 성서와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독특한 학자인데, 새롭게 CTS의 교수진으로 수혈된 젊은 학자입니다. 특별한 소식을 하나 더 하자면, Bexley-Seabury 성공회 신학대학이 CTS 건물로 이주해 시설과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한 캠퍼스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신학교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에필로그


    CTS에서 유학생 하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던 것은 민중신학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입니다. 그것은 민중신학의 빛바랜 과거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화석화된 민중신학에 대한 주례사 비평은 더더욱 아닙니다. 단지 미국 와서 신학을 공부한다고해서, 몇 가지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신학이슈들에 발빠르게 대처한다고 해서 호박이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죠. 진보란 열려있음을 전제로 변혁을 꿈꾸는 정신성이고, 부단히 삶의 자리에서 실행되어야 하는 구체성입니다. 또한 진보란 부단히 흘러가면서 새로움을 상상하는 정신이자 그것을 감행하는 실재입니다. 이러한 진보적 유전자가 민중신학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CTS에서 공부하는 동안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CTS에서 배우고 살면서 느꼈던 것은 민중신학이 표방하는 성서 해석학, 예수에 대한 이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세계적인 신학이었고, 첨단의 신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해왔던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변했으니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더 악랄하고 집요해졌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민중신학의 자리를 점검하면서 새로운 진보신학의 언어를 발굴하고 적용하며 실천하는 일에 우리의 의지와 상상을 모을 때 입니다.


* CTS 새 캠퍼스 로비에 있는 문익환 목사님 이미지[각주:6]



ⓒ 웹진 <제3시대>



  1. 『세계와 선교』(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실리게 될 ‘세계 신학교 탐방’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ACTS (http://www.actschicago.org/) 소속 12개 신학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UCC,기장과 자매교단), McComick Theological Seminary (미국 장로교, 기장과 자매교단), Meadvill·Lombard Theological Seminary (유니테리안), Luthern School of Theological at Chicago* (루터교), Bexley-Seabury Seminary Federation(성공회), Loyola Institute for Pastoral Studies (예수회), Garreett-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감리교), Nor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침례교), North-Park Theological Seminary (언약교단),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복음적 자유교회 소속), Catholic Theological Seminary (천주교), Mundelein Seminary (천주교) (*가 있는 학교는 Ph.D 학위가 있는 학교임), 이 밖에도 1800년대 중후반 시카고를 중심으로 미국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무디(Moody)을 기념하는 Moody Bible Institute도 시카고 시내에 있다. [본문으로]
  3. 오바마의 정치적, 사상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 남부 Hyde-Park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적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살아있는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인 제시 잭슨 목사, 오바마의 멘토로 유명한 제레마이어 라이트 목사 등이 모두 시카고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다. 위의 사진은 Hyde-Park에 위치하고 있는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신학교 전경이다. 우측 하단에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건물이 시카고 대학을 건립한 록펠러를 기념하여 세운 록펠러 채플이고, 바로 건너편 빨간 벽돌로 높이 솟아있는 탑이 시카고 신학교이다. 2012년 까지 이곳에서 신학수업이 이루어졌다. 사진 중앙을 가로 지르고 있는 길이 University Ave이다. 그 길 건너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카고 대학이 펼쳐진다. 좌측 중앙에 보이는 회색 건물이 시카고 대학 메인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뢰겐스타인 도서관이다. University Ave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신학자 폴 틸리히가 자주 갔다는 맥주집이 길 모퉁이에서 아직도 성업중이다. 저 멀리 시카고 다운 타운이 보이고, 사진 상단 파란부분은 남한 땅이 풍덩 빠져도 남는다는 미시건 호수이다. [본문으로]
  4. 새로 옮긴 CTS 캠퍼스. 위에 옥상의 동그란 부분이 채플실. 3층이 도서관과 학생 휴게실. 1,2층에 강의실 및 각종 부속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본문으로]
  5. CTS에는 다음과 같은 학위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석사과정에 M.Div, STM, MA, 박사과정에 D.Min, ph.D. 좀 더 자세한 입학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 학교 공식 홈피(https://www.ctschicago.edu/)에 접속하셔서 바탕화면에 떠 있는 Admission를 누르고 들어가면 됩니다. [본문으로]
  6. 새 캠퍼스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고자 분투했던 신앙인들의 얼굴이 우리를 맞습니다. 본회퍼, Harriet Tubman(노예였으나 탈출한 뒤에 수많은 노예를 해방시킨 '장군'이라고 불리었던 여성), 간디, Millard Fuller(해비타트 운동의 창시자), 마틴 루터 킹, Audre Lorde(흑인 여성주의자였던 시인), 로메로 신부, 마더 테레사 등....그리고 우리의 문익환 목사님도 그 벽화에는 새겨져 있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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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인종청소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피바다가 흐르는 끔찍한 땅으로 변질되었다. 사실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약속의 땅의 적나라한 모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당황스럽고 씁쓸하다. 구약 성서학은 거룩한 전쟁이라는 신학적 담론 아래 가나안 원주민의 희생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약속의 땅과 거룩한 전쟁 같은 이데올리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근대에 세워진 국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종청소”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 


  공교롭게도 성서에서 처음으로 “인종청소”를 언급된 곳이 다름 아닌 히브리 노예의 해방을 기록한 출애굽기다:


나의 천사가 너희 앞에서 너희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전멸시키겠다(출 23:23, 새번역).


  성서의 “인종청소” 언급은 신명기에서 더욱 심각하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사는 모든 남성, 여성, 심지어 어린이까지 죽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 우리 하나님이 그를 우리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와 그의 아들들들과 그의 온 군대를 쳐부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모든 성읍에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습니다(신 2:33-34, 새번역).


    더욱 놀라운 점은 신명기에서 “인종청소”의 주도적 역할은 다름 아닌 야훼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는 것이다(참조, 신 7:1-11; 9:1-; 11:8-9; 23:31-23). 여호수아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특별히 첫 번째 부분은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념 아래 “인종청소”를 합법적으로 설명한다(여호수아 2-12). 그야말로 야훼가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 원주민의 피로 얼룩진 땅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서의 “인종청소” 개념이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실이지만, 야훼가 이를 직접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충격적이다.


 성서의 거룩한 전쟁은 “인종청소”라는 면에서 도덕적/윤리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가나안 “인종청소”가 근대 이스라엘의 성립 과정 중 행해진 팔레스타인 “인종청소”에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각주:1] 더구나 고대에 기록된 성서가 근대의 역사에서 “인종청소”의 도구로 오용되도록 성서를 해석한 성서학자들의 학문은 재고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서 1장에서 12장에서 언급하는 가나안 정복설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 이스라엘은 다른 인종과 점진적이고 평화적 융합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초기 왕정시대인 철기시대의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의 거주지는 오히려 “가나안”과 “이스라엘”사이의 인종적 구별이 없음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은 외부에서의 침략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랜 세월동안 내부의 혼합 과정을 거친 평화로운 민족 형성의 과정이다.


 지난 2000년 9월 10일자 뉴욕타임즈에 150명의 유대인 학자와 랍비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시오니즘 운동의 정당성을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의 이스라엘 땅에 대한 존중을 표해야 한다.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다름 아닌 약속의 땅에 재건된 이스라엘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기초한 종교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사실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인은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다른 많은 이유로 근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에 유대인들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유럽의 유대인은 나치정권 유대인 말살정책인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인종청소”의 희생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근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말살하는 “인종청소”의 주역이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서를 언급하면서 미국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구애를 펼쳤다. UN과 미국의 지지 아래 1948년 근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된 이래, 이스라엘은 줄곧 미국의 어마어마한 재정적 지원을 받아왔다. 아래 도표에서 보듯이, 1948년 이후, 이스라엘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군사적이고 경제적 도움을 받은 최대의 수혜국이다.


 수많은 성서학자들이 땅에 대한 신학적/신앙적 논의를 하였지만, 정녕 “인종청소”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다. 미국 듀크대학 명예교수인 데이비스(W. D. Davies)는 자신의 책 The Gospel and the Land에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를 지지하게 되었다고 소고했다. 구약성서학의 대가인 발트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도 1977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 The Land도 같은 맥락이다. 브루거만 역시 성서신학에서 땅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가나안 원주민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달리 키스 와이트램(Keith Whitelam)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1948년에 세워진 근대 이스라엘을 정당화하는 날조된 학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근대 이스라엘의 합법성에 문제제기를 한 유일한 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책,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1997)에서 “다윗왕조와 근대 이스라엘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성서해석”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각주:2] 아래의 삽화는 1948년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근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종청소”의 의미를 한눈으로 잘 보여준다. 성서학자들은 “인종청소”라는 폭력적인 정책의 성서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바바라 로씽(Barbara Rossing)의 책 The Rapture Exposed: The Message of Hope in the Book of Revelation은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세대주의 종말론((Dispensationalism)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종말론 소설인 남겨진 자(Left Behind)와 같은 부류의 소설은 성서에 근거를 두지 않을 뿐 아니라, 폭력과 전쟁, 특히 “인종청소”를 정당화화는 위험한 책이라는 것이다.[각주:3] (필자의 블로그 참조: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종말론).


 구약성서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학문인 구약 성서학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를 옹호하는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과 화해를 위해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 야훼의 말씀을 오늘날 올바르게 재해석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 외래교수,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Michael Prior, "Confronting the Bible's Ethnic Cleansing in Palestine," in Burning Issues: Understanding and Misunderstanding The Middle East: A 40-Year Chronicle (eds. John Mahoney, Jane Adas, and Robert Norberg (New York: Americans for Middle East Understanding, 2007), pp. 267-90. [본문으로]
  2. Keith W. Whitelam,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London: Routledge; Revised ed. edition, 1997), p. 137. [본문으로]
  3. 바바라 로씽, 『미국의 중동정책과 묵시 종말론: 요한묵시록의 희망 이야기』 (번역: 김명수, 김진양;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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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토핑에서 민중신학까지–신은 명사일까 동사일까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세탁소 일을 두어 달 정도 했던 적이 있다. 세탁소에 처음 일하러 갔던 날 이것저것 일을 배우다가 어색한 단어 하나를 들었다. ‘배깅’이란다. 대충 bagging쯤 되겠거니 하고 이해했고 세탁물 포장하란 이야기인 줄이야 알아듣긴 했는데, bagging이라니 bag이 동사라도 된단 말인가 싶은 느낌.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현상이 부지기수다. 피자 토핑(topping) 같은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말일 터이고, 요즘 한국에서도 건설회사들이 하우징(housing)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모양이다. 교통 벌금이 두 배가 된다는 말을 doubled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럴 듯 하다. 작년 미국 대선 관련 기사를 읽다 보니 back이라는 말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트럼프 지지자를 두고 those who back Trump 뭐 이렇게 쓰는 식이다.

   그래도 이런 단어들은 영어 사전을 뒤지면 동사로서 쓰는 경우가 있다고 나오긴 한다. 그런데, 식품점에 장을 보러 갔더니, 야채를 쌀알 비슷한 모양으로 잘라놓고 파는데, 포장에 Riced라고 써 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싶은 느낌. 아마 한국어로 직역하면, ‘쌀한’ 혹은 ‘쌀된’쯤 되려나? 그러니까 대강 이런 이야기가 되겠다. 명사나 형용사가 그대로 동사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언젠가 서울시가 I seoul you라는 홍보문구를 내밀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은 적이 있었는데, 위와 같은 상황을 깔고 보면 이해가 전혀 안 가지만도 않겠다. 물론, 그래서 저 문구에서 정작 ‘seoul’이 뭔 뜻인지가 아리송하다는 게 문제겠지만. 


  2. 

   Bag, house, rice 같은 말을 저렇게, 명사를 그냥 동사같이 쓸 수 있다니까, 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본다면, 이런 용례를 God이라는 단어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물으려니 속에 뭔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은, God, 즉 신이라는 말은, 어쩐지 굳이 따져 본다면 명사를 동사같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동사를 명사같이 써야 하는 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분들도 아마 이런 이야기에는 동의를 할 것이다. 인간이 신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물론 ‘성서’나 ‘교회의 전통’ 등을 통해 더 많이 파악을 할 수 있다고도 하겠으나, 그것을 감안해도 결국은 ‘불가능’이긴 마찬가지다. 그 말은 곧 신에 대한 이해를 ‘명사’적인 방법으로 할 경우 그 ‘명사’의 내용을 완벽히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도 되지 않겠는가. 필자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최근에 내신 책 제목마따나, 신은 ‘알 수 없는 분’인 것이다.

   그러나, 명사로서의 신이 ‘알 수 없는 분’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고 실제로 많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아니, 종교와 신앙이란 것 자체가 바로 그 ‘어떤 사건을 두고 그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행위’의 집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집적된 행위들을 성찰해 가면서, ‘신’이라는 ‘명사’의 내용을 완벽하게는 불가능해도 더 많이 채우게 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신’이란 단어의 1차적 의미에 가까운 품사는 명사라기보다는 동사가 아닐까 싶은 것이고, 명사로서의 신은 그런 동사의 집적에서 명사의 요소를 뽑아내고자 할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3. 

   신이라는 단어가 동사를 명사같이 써야 하는 말이라면, 당장 직면하는 현실은 그 ‘동사’가 정말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사건에 신이 관여되어 있다고 할 때, 그 ‘어떤 사건’이라는 것이 정말 제각각이고, 그 제각각의 내용이 쉽게 타협이나 조정될 수 있는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제각각 중에서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리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가능한 한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리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면서 어떤 국면에서는 전자가 나타나고 어떤 국면에서는 후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필자는 굳이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전자를 고르고 싶긴 하다).

   그런데 만약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릴 수 있다면, 그 때 그 ‘맞는 것’이 되는 ‘동사’로서의 신은 인간에게 ‘모범’이 되는 그런 ‘동사’일까. 일단 이 글은 ‘그리스도교인’ 대상이니까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이야기해 본다면, 그 ‘그리스도교’에서, 신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라는 ‘예수’는, 더도 덜도 아닌 정치범 사형수다. 게다가 그는 생전에는, 그 당시 신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라는 ‘율법’이나 ‘전통’을 두고, 그런 것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든 나는 이렇게 이야기할래 그게 맞어라고 뻗댔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예수’를 두고 묻는 적절한 질문은, 흔히 생각하곤 하는 이런 질문이 아닐 수 있다. “예수가 신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닮을 것인가” 혹은 “예수가 신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오히려 그런 질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런 질문 아닐는지. “예수가 신이라면, 정말 ‘저런’ 예수가 신이라면, 도대체 ‘신’이란 건 뭔가? 아니, ‘저런’ 예수를 신이라고 하는 세상이라면, 대체 그 세상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건가?” 즉, 예수를 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모범’이나 ‘절대자’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예수를 ‘신’이라고 밀어붙임으로써 세상을 당혹스럽게,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당혹과 난감을 풀어내기 위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도록 강제하는 일이라는 뜻도 되겠다.

   이런 예수 이야기의 양상에서 ‘신’을 이야기하는 데 대한 지혜를 빌어온다면, ‘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해답’일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이고 ‘출발’일 것이다. 또한, ‘신’을 이야기한다고 어떤 ‘권위’나 ‘보장’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직 그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의 삶에서의 ‘사건’에 다가가서, 자신의 출발점을 잡아내고 그것을 자신 스스로 얼마나 밀어붙일 수 있을까를 이야기할 수 있을 뿐. 그리고 ‘권위’나 ‘보장’이 없으니, 그 밀어붙임이 낳는 빛과 그늘에 솔직해야 할 뿐. 또한, 자신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닐 터이므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맞닥뜨리는 것을 감당해야 할 뿐.


   4. 

   민중신학 연구자 중 한 명인 필자의 사견은 방금 말한 것과 같은 방식의 신 이야기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신학 중 하나가 민중신학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두고,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학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면, 즉 ‘구원을 주는 존재’라면, 이 지점에서 나올 수 있는 적절한 반응은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기보다는 “아니 그런 게 구원이에요? 그럼 도대체 그런 구원을 왜 받아야 해요?”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구원이라고, 그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다”라는 말의 뜻이리라. 나는 이 자본주의 혹은 이 민주주의 세상에서 잘 살고 있으니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따로 구원이 필요없겠다 싶은 사람들에게, ‘잘 산다’는 것이, 그래서 ‘구원이 필요없다’는 것이, 착각일 뿐이라고 밀어붙이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것이 “강도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다”라는 말의 효과라는 것이다. 이 말을 출발점으로 하여 조금 더 나가 본다면, 그런 ‘잘 산다는 착각’이야말로, ‘사람’이 ‘강도’를 만나게 되는 세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지금은 어떤 종류의 ‘잘 산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을 일단 권력의 자리에서 막 떨구어 낸 시간이다. 아마도 6주 정도 지나면, 저런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것 같아 보인다. 이른바 ‘정권교체.’ 뭔가 ‘진보적’인 일들을 할 거라는 정권이 들어선다는 ‘정권교체.’ 그 ‘정권교체’가, 다른 종류의 ‘잘 산다는 착각’을 재생산하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도, 민중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권력을 잡든지 간에, ‘강도 만난 사람’ 앞에서 당혹해 하고, 그 당혹을 출발점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내라는 강제를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갈 때까지 가 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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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하라!



이상철
(한백교회 담임목사 / 본지 편집 주간)

 

영화 <우리 선희> 속 세 가지 시선


   홍상수 감독의 2013년 작품 <우리 선희>는 주인공 선희(정유미)와 세 명의 남자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그 세 명의 남자는 선희의 대학 시절 교수(김상중), 선배(정재영), 구 남친(이선균)이다. 영화로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추천서를 부탁하러 학교로 간 선희는 추천서를 써 주기로 한 교수 동현(김상중)을 만나고, 옛 남친이자 갓 영화감독으로 입봉한 문수(이선균)와 역시 대학선배이자 영화감독인 재학(정재영)을 만난다. 선희는 세 명의 남자로부터 차례로 자신에 관한 각각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선희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것이 <우리 선희>일텐데, 영화는 세 남자의 선희에 대한 각자의 내러티브를 종합하고 정리한 총량으로서의 <우리 선희>가 진정 ‘선희’라는 사건과 대상의 본질인지를 관객들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든다.

    추천서 때문에 오랜만에 자기를 방문한 제자 앞에서 교수는 이런저런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충고를 선희에게 늘어놓는다. 그렇게 추천서를 부탁하고 나오는 길에 선희는 자신과의 연애담을 기초로 영화를 만들어 감독으로 데뷔한 구 남친 문수를 만나 낯술을 하면서 그의 뒤늦은 사랑고백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음날 선희는 교수를 찾아가 “숨겨진 재능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는 없고...”라는 문구가 새겨진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추천서를 받는다. 선희는 다시 써 달라는 부탁을 할 겸 자리를 옮겨 교수와 술 한잔을 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사제관계를 넘어서는 뭔가 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 교수는 절친한 후배 재학을 만나 선희를 향한 마음을 털어놓는다(재학은 그 상대가 선희인지 모름).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재학은 선희를 우연히 만나 역시 술잔을 기울이는데... 두 사람 사이에도 묘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이렇듯 교수와 문수, 재학 사이에서 선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다. 서로의 감정과 애정사가 교차하고 빗나가는 지점에 선희는 존재한다. 이 세 명이 함께 모이면 선희에 대해 뭐라 말할까. 그들의 말들을 다 긁어모은 선희는 이렇다: “내성적이긴 하지만, 머리가 좋고, 안목이 있고, 또라이 같은 면도 있지만 똑똑하고 솔직한 여자.” 그가 바로 <우리 선희>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내내 세 남자의 선희에 관한 증언들, 그리고 회고담들이 과연 진짜 선희인가라는 의심와 회의가 점점 세게 밀려왔던 것은 왜일까. 셋이 모두 선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그 어느 것도 선희에 적중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 선희>는 선희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선희에 대한 오만과 편견 아니었나 싶다.

   영화는 텅 빈 기표로서의 <우리 선희>를 잘 드러내며 끝이 난다. 어느 가을날 창경궁에서 선희와 교수가 만나고, 동기는 선배를, 선배는 교수를 찾아 창경궁으로 온다. 그 순간 우리 선희가 사라졌다. 그러자 세 남자는 창경궁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 선희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우리가 봐왔던 선희가 진짜 선희였을까.


<우리 선희> Vs. <라쇼몽>


   영화 <우리 선희>를 보면서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 <라쇼몽>(1950)이 계속 생각났다. 일본 헤이안 시대 산속에서 칼에 찔려 죽은 사무라이 시체가 발견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살인 사건과 연루된 사람은 모두 네 명이다. 최초 신고자 나무꾼, 절에 도망쳐 있다가 잡혀온 사무라이 아내 마사고, 체포된 도적 타조마루. 그는 사무라이 아내 마사고를 겁탈하였고 그 후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무당이 등장하는데 그 무당의 입을 통해 죽은 사무라이 타케히로가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네 사람의 서사는 모두 다를 뿐 아니라,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 과연 누가 범인이고 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 <라쇼몽>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객관적인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주관적으로 왜곡되고 편향된 서사들의 환원불가능한 다층성만이 존재한다.”[각주:1] 지젝이 언급한 ‘환원 불가능한 진리의 다층성’을 추구하는 것이 ‘해체’라면, ‘객관적인 진실에 대한 믿음’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해석’이다. 그렇다고 볼 때 <우리 선희>와 <라쇼몽>은 해체가 무엇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영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진실에 대한 해체적 접근을 시도한다고는 하나, 객관적 진실에 대한 믿음을 100%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라쇼몽>에 등장하는 스님과 <우리 선희>에서 극 초반에 등장하는 또 다른 선배의 발언을 보면 말이다. 두 사람은 극에 등장하는 사람들이긴 하나, 비중도 미비한 영화 밖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텍스트 밖에서 혹 있을 수 있는 내부의 진실을 발설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 <우리 선희> 초반에 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러 학교에 온 선희가 우연히 만난 선배(이민우)에게 교수의 소재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이민우를 대하는 선희의 행동을 보면 주인공 세 남자들의 해석의 조각을 모두 합친 우리 선희, 즉 “내성적이긴 하지만, 머리가 좋고, 안목이 있고, 똘아이 같은 면도 있지만 똑똑하고 솔직한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 선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 선배는 선희에게 금방 들킬 거짓말(교수가 외국 출장갔다는)을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진심으로 화를 내는 선희에게 ‘재미있으라고 한 말이었다’고 변명한 후에, ‘너 참 순수하구나’라며 선희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앞의 세 남자의 평에서는 어디에도 순수한 선희는 없었다. 어쩌면 선희는 순수한 여자 아니었을까.

   <라쇼몽>에 등장하는 스님도 비슷한 케이스다. 그는 살인사건에 대한 증인들의 다른 진술이 참을 수가 없었다. ‘진실이 없다면 지옥’이라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나중에 나무꾼이 버려진 아기를 자기가 키우겠다고 하자 그 스님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당신 덕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훈훈한 말을 남긴다. 곧이어 아기를 안고 가는 나무꾼 위로 쏟아지는 밝은 햇살은 너무나 익숙하고 관습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는데, 변함없는 진실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해석학적인 냄새가 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단순비교 하자면, <라쇼몽>의 결말은 <우리 선희>보다 확실히 진리에 대한 미련이 더 강하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보다는 훨씬 세련되게 해석과 해체 사이의 간극을 잘 연출한 것 같다.


해석과 해체


    영화 <라쇼몽>중 어린아이를 안고 가는 나무꾼에게 쏟아지는 빛에 대한 이야기를 앞에서 했는데, 빛은 해석학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서양철학에서 추구했던 최고의 원리는 신플라톤주의를 창시했던 플로티누스 이래로 완전히 초월적인 절대 밝음에 대한 추구였다. 논리학에서 명증성(lucidity, lucid는 ‘빛나는, 밝은’)이 강조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반면, 최저의 수준은 절대 어둠의 영역인데 그곳에는 적나라한 물질이 있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유출설을 통해 설명하면서, 초자연적인 존재와 물질사이의 연관을 계층화, 등급화하여 하나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각주:2] 그리하여 그는 서구철학의 오래된 전통인 빛의 존재론, 빛의 윤리학, 빛의 미학을 정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 한다”라는 공리는 그런 의미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계몽주의의 영어표현이 Enlightment인데, 그 가운데 빛을 의미하는 단어 ‘lihgt'가 배치되어 있는 것도 중세를 암흑(타자)이라 상정하고 그것을 비추고 밝힌다는 의미다. 기본적으로 근대적 이성이란 계몽적 이성이고, 계몽(enlinghtmnet)이란 빛(light)의 사유다. 해석학은 이런 빛에 대한 믿음, 즉 빛에 의해 조명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이른다는 믿음에 의해 그 권위가 유지된다.

       루카치는 빛의 사유와 그것에 대한 믿음으로 유지되었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적고 있다:“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면서 갈 수 있고 또 가야 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각주:3] 하늘에 떠 있는 저 별은 온갖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우주전쟁의 배경이 되는 별이 아니다. 저 별은 고. 중세인들에게는 삶의 지도, 인생의 나침반, 선택의 기준이 되었던 좌표였다. 인간은 그저 하늘에 떠 있는 별로 대변되는 천상의 이치(로고스)를 따라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별을 보고 걷다 걷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이고, 우리가 꿈꾸는 구원에도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천상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는 빛을 매개로 하나로 이어져 삶의 완결성과 총체성을 완성하였다.

   해석학적 전통 안에서는 경험의 잡다한 다발들과 그로 인한 상대적 관점들이 각자도생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의 목표점을 향한 초월의 행렬을 이루고, 최종적으로 그 행진은 끝에서 객관적 진리와 만날 것이다. 해석은 이러한 믿음 위에 서있다. 그렇다면 해체란? 해체는 해석이 지니는 믿음에 딴지를 걸고 조롱하고 야유하면서, 해석이 만들어 놓은 절대적 믿음의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행위라 할 것이다. 해체는 절대 초월적 진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of the text)”[각주:4]

    해석학적 믿음은 텍스트 밖에 로고스(혹은 코기토)로 상징되는 해석의 빛이 있어서 텍스트 안으로 그 빛을 비추어 텍스트 속에 숨어 있는 천상의 진리를 발견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자궁에 있는 태아가 탯줄에 의지해 산모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천상의 진리 이데아는, 이성의 원리인 로고스 혹은 코기토에 의해 인도되어 텍스트와 교신한다. 데리다의 발언은 서양철학 전반에 뿌리 깊게 베어있는 해석학적인 믿음에 대한 반기라 할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해체주의 사상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자크 데리다의 삶과 사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자크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1930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제리에서 광폭하게 시행된 프랑스의 반셈주의와 페탕정책(학교에서 유대인 학생의 비율을 7% 제한하는 유대인 차별정책)의 피해를 받으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데리다가 그의 글이나 발언에서 강조하는 차이와 다름, 그리고 타자에 대한 환대개념은 유소년 시절 식민지 국가 알제리에서 유대인으로 살았던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 사후적으로 재구성되어 귀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각주:5] 알제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데리다는 프랑스로 건너와 몇 차례의 낙방 끝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1952) 수학하였다. 27살(1957년)의 나이에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데리다는 1964년부터 1984년까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데리다 연구자들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가 패망한 이후의 데리다와 그 이전 데리다를 구분한다. 데리다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 절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1992년에 후쿠야마가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를 선언한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썼고, 그로부터 1년 후에 데리다의 가장 문제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유령들』[각주:6]이 출판된다. 이 책을 기점으로 해서 전기 데리다와 후기 데리다를 나눈다. 전기 데리다는 주로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에 주력하면서 그에 대한 전략으로 언어, 기호, 텍스트에 대한 천착을 그 특징으로 한다면,[각주:7] 후기 데리다는 정치, 윤리, 법, 신학,정의론 등 정치철학과 신학적인 부분으로까지 자신의 관심사를 확대하여 해체론을 적용하기에 이른다.[각주:8]

   데리다가 활동할 무렵 프랑스에는 가히 천재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상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 샤르뜨르, 폴 리꾀르, 미셸 푸코, 들뢰즈, 알튀세, 바디우, 자끄 라깡, 레비스트로스, 소쉬르, 야콥슨, 레비나스 등 서로 다른 무닉와 색깔을 지닌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하면서 그야 말로 백가쟁명의 시대를 연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데리다는 당대 철학의 상징으로 우뚝 자리한다. 이런 데리다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해체와 차연이다.

    통상 해체주의는 파괴, 전복,폭력 등의 용어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어렵고 무거운 느낌을 던져준다. 이런 까닭으로 데리다를 변호하는 학자들마다 제일 먼저 시도하는 것은 해체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작업이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즉물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해체란 기존 텍스트 안에 묻혀 있었던, 저자 조차도 의도하지 못했던 진실을 발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텍스트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과정 혹은 절차 일반을 의미한다.

    이것은 데리다가 지니고 있었던 문헌학자로서의 특이한 이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후설, 하이데거, 소쉬르 등의 책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기존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의 텍스트를 읽어냈다. 데리다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Timaeus』를 읽으며 플라톤조차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코라(Khora)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코라’는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창조 할 때 물질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세상은 이데아의 모방(imitation)이고, 세상속에서 이데아가 구현되는 터, 질료, 대지가 바로 “코라”다. 이데아가 질서(Order)라면 코라는 혼돈(Chaos)을 상징한다. 흔히 서양 철학의 오래된 질문이라 할 수 있는 형상과 질료, 주관과 객관의 조화란 범박하게 말하면 이데아를 코라에 이식함으로 코라의 혼동을 극복하고 현실가운데 안정과 질서, 그리고 통일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플라톤 스스로도 의도하지 못했던 코라의 의미를 찾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하여 발견한 것이 ‘코라 없이는 이데아도 없다’는 것이다. 코라는 지금까지 논외의 영역이었고, 단지 이데아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으로 치부되었었는데, 데리다의 꼼꼼한 텍스트 분석에 의해 코라는 이데아 못지않은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코라에 이데아가 심겨져야 비로소 그것이 발현되는 것으로 말이다. 이렇듯 그동안 묻혀있었던 텍스트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 혹은 그 과정 일반을 데리다는 ‘deconstruction’이라 불렀다.


'차연'에 관하여


    해체주의(deconstruction)의 대명사격인 데리다의 ‘차연’개념은 데리다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과 동시에 이후 다루어지는 데리다의 사회철학으로 접근하는 데 있어 통과의례적 성격을 지닌다.‘차연’으로 번역된 differance는 어원적으로는 Differ(다르다) 와 defer(연기하다), 이 둘이 합쳐진 조합어이다. 영어로 번역된 데리다의 저작을 보면 불어인 differance를 그냥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영어로 differance를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데, differ와 defer의 의미 다 들어간 단어를 만들어 내기가 만만치 않은 까닭에 굳이 그것을 만드는 것 보다는 불어인 differance를 그대로 쓰는 것일 게다.

    미국 Northwestern Univ 철학과에서 현상학을 가르치면서 데리다 해석의 권위자로 각광받는 페넬로페 도이쳐(Penelope Deutscher)교수는 데리다의 차연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차연은 현존(present)도 부재(absent)도 아니다. 그것은 현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일종의 부재이다. 그것은 동일성(identity)도 아니고 차이(difference)도 아니다. 대신 그것은 일종의 미분화(differentiaition)이다. 그것은 그러한 동일성들 사이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효과를 산출한다.”[각주:9]

    differentiation는 수학용어로는 미분을 뜻하는 말이다. 미분이 무엇인가? 계속 잘게 쪼개는 것이다. 이렇듯 Differntiation은 사전적으로는 ‘미분화하기’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차이화하기’로 치환된다.[각주:10] 미분했다는 말은 쪼개어져서 이 전 형태와 다른 차이가 발생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볼 때,‘차이화 하기’라는 말은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차이’ 와 ‘연기’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말이고,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틈과 여백이 계속 생겨난다는 뜻이며, 해석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자면 해석에 대한 독점없이 해석의 준거점들이 계속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 글에서 ‘차연’은 틈과 여백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틈과 여백이란 의미가 재현할 수 없는 공간을 뜻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카푸카의 소설 <굴>이다.[각주:11] 소설은 굴을 파는 짐승의 시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굴을 파는 짐승이 있다. 어느 정도 안락한 거처를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짐승은 그 소리가 분명 바깥에서 들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짐승은 그 소리의 출처를 찾아 끊임없이 탐색한다. 소설은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카푸카의 <굴>을 읽다보면 그 소리가 바깥이 아니라, 이 짐승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짐승은 그 소리가 밖에서 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 확신이 바로 자기동일성이고, 환상이고, 환타지다. 어쩌면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자기동일성’이란 타자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그래서 그 틈을 메워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히스테리였고, 변증법이란 그 틈과 여백을 메우기 위해 고완된 정신의 방어기재인지도 모르겠다. 헤겔은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과정이다”라고 말했다지만, 데리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은 서구인들의 허풍이고 위선이다.

    현대철학은 헤겔류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반동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자기동일성을 ‘Totality’(전체성)이라 비난한 후, ‘전쟁의 존재론’[각주:12]이라는 저주를 퍼부었고, 푸코는 서구의 근대가 그려나갔던 자기동일성의 역사를 ‘광기의 역사’였다고 회고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 역시 이러한 서구가 지녔던 자기동일성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체적으로 산다는 것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이의 간격을 유지한 채 나이스하게 서로의 다름을 넉넉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 이것이 글로벌하고도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명법이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법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왜곡하고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식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데리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의 유령들> 출판이후에 이런 오해들이 다소나마 풀리기는 했지만, 데리다를 향한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는 다소 곡해가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차이’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명사화된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차이가 계속 발생하는 상황과 차이가 발생하면서 일으키는 사건과 사태에 관심한다. 이것이 데리다의 차연이 지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간과가 데리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셈이다. 데리다의 ‘차연’은 차이를 계속 발생시키면서 도래하는 사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차연을 현실의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차이가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는 여성혐오, 동성애혐오, 장애인혐오,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백인제외), 특정 종교(이슬람)에 대한 혐오가 난무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 차이가 적대의 매카니즘으로 작동되는 것일까. 혹 절대적 진리에 대한 초월의 사유, 초월에 대한 믿음, 그리고 초월적 진리에 대한 해석의 전통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연후에 그것 이외의 것들을 적(敵), 혹은 균(菌)으로 분류하여 증오하고 혐오하면서 순혈주의를 강화하다보니, 우리와 다른 차이는 우리 사회에서 악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해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남성중심주의, 이성애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기독교중심주의로 상징되는 절대적 믿음의 시스템속에서 차이를 계속 발생시키는 행위이고, 뿌리깊은 해석의 권위에 틈을 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여혐에 대해 저항하고,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한국교회가 지닌 아집과 독선에 대해 회개운동을 펼쳐나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되고,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해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본이라는 초월적 보편성에 딴지를 걸고, 자본의 원칙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것이다. 무엇이 있을까. 4대강, 강정, 밀양, 핵발전소, 사드배치 등, 거대자본의 논리와 특정집단의 이익에 따라 국토를 유린하는, 국가의 행정집행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게는 편리와 유행이라는 시대의 유혹 때문에 잃어버렸던 내 삶의 습관과 방식을 점검해보는 것, 그리고 나서 좀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유행과 욕망에 둔감해지는 방법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고민한 후에 실행해보면 어떨까.

   결국, 해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창하지도 무시무시한 것도 아니다. 내가 내 삶속에서 차이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의심해보고 재해석 하면서, 나만의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것, 이것이 자본으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해체적 인간이 출현하는 지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시차적 관점』, (서울: 마티, 2009), 349. [본문으로]
  2. 에버렛 퍼거슨 지음, 박경범 옮김, 『초대교회 배경사』 (은성, 1993), 384-386 [본문으로]
  3. 게오르그 루카치, 반성완 옮김, 『소설의 이론』(심설당, 1998) [본문으로]
  4. Derrida, Jacques., Of Grammatology, Corrected edition. Trans. Gayatri Chakravoty Spivak (Bultimore and London: Johns Hopkins Press, 1997), 158. [본문으로]
  5. 제이슨 포웰, 박현정 옮김, “1장, 알제리”,『데리다 평전』,(인간사랑, 2010), 37-53. [본문으로]
  6.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Translated from the French by Peggy Kamuf (N.Y:Routledge, 1994). [본문으로]
  7. 데리다는 1967년에 세 개의 주요 저서, 『목소리와 현상 Speech and Phenomena』(김상록 역, 인간사랑, 2006),『그라마톨로지 Of grammatology』(김성도 역, 민음사, 2010 개정판),『글쓰기와 차이 Writing and Difference』(남수인 역,동문선, 2001)를 발표하면서 일약 스타철학자로 급부상하였고, 1972년에 두 번째 세 개의 주요저서인 『산종 Dissemination 』,『철학의 가장자리 Margins of Philosophy 철학의 가장자리』,『입장들 Positions』,(솔출판사, 1992)을 발표하면서 그의 전기 사상을 완성지었다. [본문으로]
  8. 『법의 힘 Force of Law』(진태원 역, 문학과 지성사, 2004),『환대에 관하여 Of Hospitality』,(남수인 역,동문선, 2004),『불량배들: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Rogues』,(이경신 역,휴머니스트, 2003),『우정의 정치학 Politics of Friendship』(1994)등이 있다. 특별히 『The Gift of Death』(1986)과『Religion』(1998)은 해체론과 신학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9. Penelope Deutscher, How to Read Derrida (New York: WW Norton & Company, 2005), 29. [본문으로]
  10. “그것은 미분화(differentiation)된 상황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거리두기(간격두기)를 말하는 것이고, 어떤 기호도 자기폐쇄적인 동일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Ibid., 31. [본문으로]
  11.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굴”,『변신.시골의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민음사, 1998) [본문으로]
  12. Levinas, Emmanuel.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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