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신학(社會神學) 탐구 2]



사회적 고통 이론의 지형(1)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총체성 : 신에서 사회로


    지난 글의 서두에서 ‘총체성’(totality)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신과 사회를 개념적으로 동일시하는 뒤르케임의 논의를 소개한 바 있다. 특히 사회가 “우리의 주관적 의지나 인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차원의 발현적 속성”, 즉 ‘외재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개별 행위를 제약하는 규범적 차원”, 즉 ‘강제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사실상 뒤르케임은 사회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과거 신이 누렸던 총체성의 지위가 이제 사회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신성한 실재는 사회라 불리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뒤르케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사회는 사회학의 탐구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사회신학’의 기본 전제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총체성에 관한 사유는 구체적 사건이나 사물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궁극적 원인에 대한 관심, 또는 ‘부분의 합 이상’으로서 개별자를 포괄하는 동시에 우선하는 전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해왔다. 다만, 근대 이전에는 그러한 총체성에 관한 사유가 신을 중심에 놓고 이루어졌다면, 근대 이후에는 사회나 사회적 체계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변화이다. 물론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이, ‘사회신학’의 기획은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등장한 새로운 총체성으로서의 ‘사회’를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차원에서 곧바로 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인 ‘고통’의 문제와 연관시켜 그 신학적 함의를 탐구하는 방식을 지향한다.

    신학적 사유체계 안에서 신정론은 신론이나 구원론에 선행하는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문제의식, 즉 “왜 죄 없는 이들이 이토록 지독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전능한 존재인 신이 정말로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라면, 어째서 그는 이런 참혹한 고통의 발생을 허용한 것인가?” 그리고 “왜 그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인간의 외침에 응답하지 않는가?”라는 신의 능력과 그 성격, 더 나아가 신의 존재와 그 정당성에 관한 물음으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통의 원인과 이유, 그 의미 등을 본격적으로 구명하는 과정에서 신정론적 문제의식은 결국 신학의 울타리를 넘어가 버리게 되는데, ‘사회정론’(sociodicy)이라 불리는 해석틀이 그러한 신정론의 세속적 판본으로 새롭게 출현했다. 사회정론이란 말 그대로 사회학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신정론이다. 브라이언 터너와 같은 사회학자는 아예 사회적 신정론을 사회문제에 관한 사회학적 탐구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사회적 삶에서의 고통과 죽음, 사고와 불운, 불평등과 부정의에 직면하는 모든 사회학은 필연적으로 신정론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 인간 가운데 불평등의 기원과 원인에 관해 질문을 제기하고자 시도하는 모든 사회학 안에 사회적 신정론의 문제가 현존한다.[각주:1]


   사회정론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현대의 사회적 고통 이론은 개인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사례들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매개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우발적인 개인의 성향이나 인격적 결함, 또는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히려 사회적 고통 이론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들 및 사회적 구조에서부터 찾는다. 사회적 고통 이론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고통은 사회적 삶의 주변부에서 나타나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잘 작동하던 사회적 체계가 어쩌다 가끔 잘못 기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수적 피해나 역기능의 효과도 아니다. 차라리 수많은 사회적 고통의 사례들은 사회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제시킬 수밖에 없는 사회의 외부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자기동일성 구축에 필수적인 존재조건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고통은 사회에 대하여 일종의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의 위상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의 경험을 삶의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총체적 과정 전반과 연관시켜 다루는 것이 사회적 고통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사회적 고통 이론이 다루는 구체적인 쟁점들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론적으로 사회의 구성 원리와 고통의 발생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 개념 그 자체를 중심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는 아도르노의 사회학은 사회를 부정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사회의 구성원들이 교환관계의 폭력 속에서 겪는 고통의 문제를 ‘사회의 객관적 운동 법칙’과 연관시켜 탐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에 사회신학에서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총체적으로 사회화된 사회


    뒤르케임을 좇아 사회를 총체성의 관점에서 접근한 대표적인 현대의 사회학자가 바로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이다. 아도르노는 일반적으로 철학자, 미학자, 음악이론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또는 ‘비판이론’) 1세대를 대표하는 사회학자, 정확히는 비판적 사회 이론의 주창자이기도 했다.[각주:2]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학 비판자’ 아도르노에게 모든 현상은 전체적 연관을 위한 자신의 기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회는 총체성으로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체계로 파악되었다는 사실이다.[각주:3] 그에 따르면, 사회에 대한 비판이론의 구상은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에 관한 개념과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각주:4] 아도르노는 자신의 사회 개념을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반복해서 사회의 총체적 성격을 역설한다.


    “인간의 지력, 인간의 사고에 의해, 또한 이와 동시에 사회에 의해 매개되어 있지 않은 것은 태양 아래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인간의 지력이 항상 개별적인 인간 존재에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지력, 인간의 사회에 인간이라는 종(種)의 전체적인 역사가 들어 있고 더 나아가 말해도 된다면 사회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각주:5]


    “하늘과 땅 사이에, 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서 사회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사회와 겉으로 보기에 극단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는 것인 자연과 자연 개념도 자연지배의 필요성과 이와 결합된 사회적 필요성과 본질적으로 매개되어 있습니다. 사회에 의한 이러한 매개는, 사회학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회학적 관점들에서 다루게 하는 것을 포괄하게 됩니다.”[각주:6]


    요컨대, 사회는 그것이 없이는 사회학이 아무 것도 탐구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의 중심 개념이다. 사회 개념은 단순히 분류상의 개념이 아니며, 모든 하위의 사회적 형식들이 그 아래에 정렬될 수 있는 사회학의 최상위 등급도 아니다. 아도르노가 “하늘과 땅 사이에, 사회적으로 매개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주장할 때, 이는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사회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도르노는 어떤 이유에서 사회가 하나의 총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에게 총체성으로서의 사회, 또는 사회적 총체성은 각각의 고유한 욕구를 갖는 개별자들이 형성하는 기능적 연관관계를 통해서 파악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도르노는 사회를 개별 인간의 총합, 또는 사회의 각 부분들의 합을 기술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를 과정으로서 파악하며 기능의 연관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도르노가 말하는 사회란 그 사회 안에서 각각의 기능을 떠맡은 모든 사람이 서로 의존되어 있는 동시에 그 각각의 기능들에 의해 모든 구성원들이 총체적으로 매개되어 이루어진 전체(das Ganze)에 다름 아니며[각주:7], 바로 이와 같이 사회를 기능적 연관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사회를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된다.


    “사회는 지난날 자유주의가 생각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총체적 기능연관으로 되었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타자(Anderes)에 대해 상대적인 것이며, 즉자로서는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는 주체가 실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의식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실체성과 아무 구분 없이 동일시되는 ‘존재’가 틀림없이 기능연관보다 더 오래 남으리라는 단언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각주:8]

  

   “사회 개념에 의해 의도된 대상 그 자체는 합리적으로 지속적이진 않다. 사회 개념에 의해 의도된 대상은 또한 보편 대 특수로서 사회 대 그 구성요소도 아니다. 그것은 역동적인 범주일 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범주이다. 그리고 여전히 꽤 추상적인 근사치인 이 처음 것에, 모든 개별자들이 그들을 형성한 그 총체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좀 더 나아간 조건을 붙여보자. 그러한 총체성에서 또한 모든 이들이 다른 모든 이들을 의존한다. 전체는 그 구성원들에 의해 충족된 기능들의 통일성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각 개인이 그 실존을 지속하기 위해선 모두 예외 없이 어떤 기능을 하나씩 떠맡아야만 하며, 실제로 그 기능을 지속하는 동안 이에 대해 감사를 표하도록 교육받는다.”[각주:9]  


    아도르노가 이렇게 사회 개념을 기능적 연관관계의 관점에서 제시하자 즉각적으로 그의 사회 개념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평범한 주장의 반복일 뿐이라는 비난이 제기되었다.[각주:10] 이에 아도르노는 자신이 견지하는 사회적 총체성의 형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사회를 기능의 연관관계로 보는 결정적 근거로 아도르노는 ‘교환원리’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를 기능적 연관관계로 만드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 바로 자본주의적 교환원리(Tauschprinzip) 또는 교환관계(Tauschverhältnis)이다. 쉽게 말해서, 교환원리/교환관계는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즉 서로 동일하지 않은 모든 것을 교환이 가능한 대체물로 만들면서 결국엔 동일한 것으로 관리해나가는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아도르노의 사회 개념은 단순히 사회 일반이 아니라 현대의 ‘자본주의적 교환사회’를 지시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명확히 드러난다. 


    “사회, 조직화된 사회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인간 사이의 기능적 연관관계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존재로서,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연관관계입니다. 사회를 원래부터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교환관계입니다. 교환관계를 통해서 사회는 사회에 특별한 의미에서 개념적으로 기초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실재적으로도 기초가 만들어집니다. 교환관계는 사회의 개념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으로 결합시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표현한다면, 교환관계는 확실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사회들에 뒤이어 나타날 사회들의 전제조건까지도 표현합니다. 더 이상 교환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들에 뒤이어 나타날 사회들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임이 확실합니다.”[각주:11] 


    “사회적 분화의 모든 특수한 형태들 이상으로, 시장 체계에 함축된 교환원리의 추상화는 특수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것의 지배, 그것에 포획된 구성원들에 대한 사회의 지배를 재현한다. 환원의 실행계획, 노동 시간의 획일성의 실행 계획으로 제시될 수 있는 교환관계는 사회적으로 중립적인 현상이 결코 아니다. 인간을 교환가치의 대리자, 담지자로 환원시키는 그 배후에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숨겨져 있다. 때때로 수많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범주들이 직면했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전히 기본적인 사실로 남아 있다. 총체적 연관관계의 형식은, 만일 그들이 파괴되고 싶지 않다면, ‘이윤추구’가 그들의 주관적인 동기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교환법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각주:12]  


    사회적 총체성에 관한 사유는 “그 어떤 주어진 대상의 영역들 내부에 들어 있는 사회적인 모멘트들에 관한 성찰”, 즉 교환사회가 개별적 현상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한 성찰을 기반으로 한다. 교환원리의 철학적 전제는 동일성 원칙이다. 바꿔 말하면, 모든 교환관계는 곧 동일성 원칙을 구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선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서로 다른 사물들이 어떻게든 동질적이거나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교환관계에 동일성 원칙이 적용됨으로써, 동일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즉 교환이 가능한 ‘상품’으로 변화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동일시는 다양한 실재의 대상을 가리키는 ‘사용가치’를 억압하고, 모든 종류의 다양한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를 하나의 동일한 개념에 포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동일성의 교환원리를 통해서 모든 사회적 관계가 교환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상품교환 사회는 비동일한 대상인 사용가치를 동일한 관념, 즉 가치로서의 상품의 동일성이라는 교환가치 아래로 포섭하고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아도르노의 말대로, “인간의 노동을 평균 노동시간이란 추상적 보편개념으로 환원시키는 교환원칙은 동일시의 원칙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동일시의 원칙은 교환이라는 사회적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또 동일시의 원칙 없이는 교환도 있을 수 없다. 교환을 통해서 비동일적 개별 존재나 업적들이 통분될 수 있고 동일해진다. 이러한 원칙이 확장되면 전 세계가 동일자로, 총체성으로 된다.”[각주:13]  

    따라서 개별 인간도 교환관계에 의해 총체적으로 관리되면서 전체로서 작동하는 사회에서 하나의 기능을―개별 인간 자신이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과 교환되면서―떠맡게 된다는 것이 교환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기능적 연관관계의 기본 형식이자 사회적 총체성의 본질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다.[각주:14] 단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적 교환원리/교환관계가 사회적 총체성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매개함으로써, 다시 말해 모든 개인을 타인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교환원리를 통해 어떤 개인이나 대상도 교환관계의 외부에 거할 수 없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총체적으로 통합된 사회로 작동한다. 


부정적 총체성에서 사회적 고통으로


    이렇게 하여 아도르노가 말하는 총체성으로서의 사회란 모든 사회적 관계가 교환법칙에 따라 매개되고 작동하는 사회를 지시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아도르노에게 후기 자본주의사회는 교환원리가 지배적으로 작동하는 사회, 즉 교환관계가 “총체적으로 사회화된 사회”[각주:15]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요컨대, 총체성에 위치하지 않는 사회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아도르노에게 총체성이란 당연히 신이 아니라 기능과 생성의 과정으로서 파악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현존하는 사회적 총체성의 본질은 교환원리를 전면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운동 법칙’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아도르노에게 총체성이란 곧 사회의 총체성이다. 그런데 이때 다시 총체성으로서의 사회는 사회적 관계에 동일성 원칙을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교환원리/교환관계에 바탕을 둔 기능적 연관관계로 설명된다. 

   나아가 이렇게 교환원리에 의해 동일성의 폭력이 관철될 때 나타나는 결과를 아도르노는 ‘물화’(物化, Verdinglichung)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르크스의 소외 및 물신숭배 개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아도르노의 물화 개념에 관해선 다음 글에서 보다 상세히 살펴볼 것인데, 일단 그 개념을 통해 아도르노에게 있어 총체성이란 철저하게 부정적이고 비판적 의미에서의 사회적 총체성임이 드러나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도르노에게 물화는 역사에 의해 정립된, 하나의 사회적 산물로서, 반드시 사회적 총체성의 기초 위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사회의 총체성이 더 이상 연대적으로 유지되지 않고 인간의 대립주의적 이해관계들에 의해서, 인간의 철저한 대립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사회는 총체성이되 계급에 의한 적대적 사회관계가 그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모순적인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총체성 개념의 재규정은 사회 개념의 재규정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이제 사회 역시 “모순들로 충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 가능한 것이며, 합리적인 동시에 비합리적인 것, 체계인 동시에 파편화된 것, 맹목적인 자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에 의해 매개된 것”[각주:16]으로 다시 설명된다. 아도르노는 사회를 단순히 어떤 구조 내지는 제도로 실체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는 그 내부로부터 인식될 수 있는 것이자, 인식될 수 없는 것 둘 다라고 주장한다.[각주:17] 사회의 모순적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사회’를 중의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사회가 담론의 유효한 대상으로 실체화될 수 없다면, 사회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가능할까? 실체화될 수 없는 대상인 사회를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비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관한, 아도르노의 답변은 바로 무력한 개인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통합적 사회 또는 총체화된 사회에 관한 비판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18]  

    아도르노에 따르면, 고통은 어떤 집단적 규범이 이해관계들 및 개인들의 요구와 충돌한다는 사회적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한 경험들은 육체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신체적인 것(the somatic)의 계기를 통해 사회에 관한 인식을 추동할 수 있다.[각주:19] 말하자면, 아도르노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행위자들로서 존재하는 인간들과 그 본질이 객관적 운동 법칙으로서만 파악되는 총체성으로서의 사회, 그 둘을 고통이라 불리는 특수한 사회적인 사실을 통해 매개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통(Leiden)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주체를 짓누르는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가장 주관적인 경험, 즉 주체의 표현이 객관적으로 전달된다.”[각주:20]라고 아도르노가 썼을 때, 그는 이론이 우리의 사회적 경험을 만족시키는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론이 또한 고통에 관한 적절한 지식을 구축하도록 시도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음에는 사회를 부정적이고 모순적인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아도르노의 사회학에서 신체적 고통의 주제가 갖는 중요성을 살펴보고, 그의 고통에 관한 사유가 어떻게 현실의 모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고통들을 ‘사회적 고통’ 또는 ‘고통의 총체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도록 사회신학의 이론적 실마리를 제공하는지 검토할 것이다. 나아가 호네트(Axel Honneth), 번스타인(J. M. Bernstein), 르노(Emmanuel Renault)와 같이 사회철학 및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고통에 관한 아도르노의 논의를 주목해온 학자들의 작업을 살펴보면서 동시대 사회적 고통 이론의 주요 쟁점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1. Bryan S. Turner, For Weber: Essays on the Sociology of Fate. London: Sage, 1996, pp.170~71. [본문으로]
  2. 본펠트는 독일 학계의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독해’(Neue Marx-Lektüre)의 맥락에서 아도르노의 사회학 비판 내지는 비판적 사회 이론의 기획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비판이론적 계승으로 해석한다. Werner Bonefeld, Critical Theory and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On Subversion and Negative Reason, London: Bloomsbury, 2014; 한편, 아도르노의 사회학 저술 전반에 관한 체계적인 분석으로는, Matthias Benzer, The Sociology of Theodor Adorno,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하르트무트 로사 외, 『사회학 이론』, 최영돈 외 공역, 한울, 2016, 149쪽. [본문으로]
  4. 테오도르 W.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세창출판사, 2014, 74쪽. 삶의 모든 영역이 자본주의적 교환원리에 의해 조건지어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적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가운데서도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에 관해서는, Martin Jay, Marxism and Totali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5.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36~7쪽. [본문으로]
  6. 같은 책, 143~44쪽. [본문으로]
  7. 문병호, 「옮긴이 후기」,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363쪽. [본문으로]
  8.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2003, 128쪽. [본문으로]
  9. Theodor W. Adorno, “Society,” trans. F. Jameson, Salmagundi, no.10-11(Fall 1969-70), pp.144~45. [본문으로]
  10.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71쪽. [본문으로]
  11. 같은 책, 71쪽. [본문으로]
  12. Adorno, “Society,” pp.148~49. [본문으로]
  13.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222쪽. [본문으로]
  14. 문병호, 「옮긴이 후기」, 363쪽. [본문으로]
  15.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413쪽. [본문으로]
  16. Adorno, “On the Logic of the Social Sciences,” in The Positivist Dispute in German Sociology, ed. T. W. Adorno et al. London: Heinemann, 1976, p.106. [본문으로]
  17. Adorno, “Society,” p.146. [본문으로]
  18. Ibid., p.153. [본문으로]
  19. “육체적 계기는 인식을 향해 고통이 없어져야 하고 상황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픔은 ‘사라지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특유의 유물론적 요인은 비판적 요소 내지는 사회적인 변혁적 실천으로 수렴된다. 불행을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일은, 이론적으로 선취될 수도 없고 어떤 한계를 명할 수도 없는 일정한 정도까지, 그 불행을 느끼는 개인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이 주관적으로는 인류와 분리되고 객관적으로는 무기력한 객체의 절대적 고독 속으로 밀려나게 되는 경우에도 인류의 몫일뿐이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286~87쪽. [본문으로]
  20. 같은 책, 7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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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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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II)[각주:1]

: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부쳐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지난 51호 웹진에 이어>

IV

형. 이 대목에서 부정성에 입각한 민중신학의 윤리학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기에 앞서, ‘부정의 변증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수없이 나누었던 변증법 관련 대화들은 결국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 어떻게 종합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둘러싼 공방이었습니다. 헤겔은 이 대립을 철폐하면서 논리적 일치성을 향해 치달았고, 결국 모든 것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일원론(ex, 절대정신)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헤겔식 변증법의 정의라 한다면 너무 조야한가요? 
헤겔과 동시대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적인 변증법에 대한 최초의 반항아였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높은 단계에서 종합되는 헤겔의 ‘전체성의 변증법’에 맞서 본인 특유의 ‘실존의 변증법’을 고안합니다. ‘진리의 내용이 무엇이다’라는 논증보다는, ‘그 진리에 내가 어떻게 도달했고, 그 진리가 어떻게 내게 역사하는가?’를 묻는 것이 더 옳은 관전 포인트가 아니냐며, 헤겔을 물고 늘어진 것이죠.
예를 들어, 성육신, 즉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헤겔은 신과 인간의 대립을 너무나 서둘러 봉합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는 헤겔식 변증법의 논리와는 달리, 신과 인간사이의 간격(대립)이 여전히 유지되면서, 그 차이를 고스란히 느끼고 고민하는 가운데, 그 역설과 간격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닐런지요? 키에르 케고르는 바로 이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실존에서 절대적으로 역설과 간극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결국,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진리란 헤겔식의 거대하고 종합화된 ‘내용(What)’보다는 구체적 실존의 ‘어떻게(How)’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헤겔의 변증법이 한차례 의심의 대상이 되긴 하였으나, 막 일시 시작한 서구 근대의 진보적 사관과 낙관적 사고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19세기를 풍미하였습니다. 그리고 헤겔식의 종합과 체계와 전체의 변증법은 이런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니체와 맑스, 그리고 프로이트가 등장하여 그 질주에 제동을 걸긴 했지만, 아마도 헤겔 변증법에 대놓고 딴지를 걸었던 사람은 아도르노가 아닐까 싶군요.
그는 프랑트푸르트 학파의 탄생을 알린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기념비적인 작품인 <계몽의 변증법>과 더불어 <부정의 변증법>을 세상에 내놓으며 헤겔 변증법의 균열을 직시합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죠. 그는 종전 후에도 계속 이 문제에 매달렸고, 최종적으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히틀러의 광기가 아니라, 근대적 이성이 쌓아올린 동일성의 논리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본인의 주장을 파리의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행한 강연들을 통해 밝혔고, 그 강의들이 모아져 나온 책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1966)입니다.

 

V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정-반-합’의 도식을 따라 어떤 사태나 현상에 대한 해결로 나가는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보편성과 동일성을 요구하는 모든 방법들에 대한 저항과 대립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각주:2] 특별히, 아도르노는 인식론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동일성의 법칙이 실질적인 삶에서 작동되는 자본주의 교환시스템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합니다. 동일성의 원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인간의 주체성을 물화된 형식으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입니다. 이곳 시카고에는 매일 새벽마다 인력시장이 섭니다. 어쩌다 새벽기도 가다 길을 잘 못 들어 그 곳을 지나치다 보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공원주변으로 모여드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멘트 할 줄 아는 사람 4명!” 하면서 차량 한대가 그들 앞에 멈춰서면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손을 급하게 흔들며 자신의 의지를 표명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마이클이 가도 되고, 호세가 가도 됩니다. 물론 나 이상철이 가도 되고, 김진호 목사도 가능합니다. 그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시멘트를 할 줄 아는 건장한 남자라면 말입니다. 이때 호세, 마이클, 이상철, 김진호는 서로 교환 가능합니다. 아니, 이 네 명만이 아니라, 시멘트를 할 줄 아는 신체 건강한 남자 모두는 이 교환 시스템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개별존재자들을 거의 예외 없이 100%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원칙입니다. 그것은 서구 근대이성이 이룩한 동일성 원칙의 결정판입니다. 이 법칙하에서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교환가치로 매개된 노동자와 자본가, 그리고 이 시스템을 뒷바침하는 부르주아 사회장치는 각각의 존재가 지니는 질적인 차이와 다름을 물화된 공동성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부정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점입니다. 동일성의 원칙에 의해 억압당한 단독자 혹은 비개념적인 것들,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들, 셈해지지 않는 것들, 혹은 셈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것들은 역사에서 고아와 과부였고, 여성이었고, 장애인이었고, 이교도들이었고, 흑인이었고, 유대인이었고, 제3세계 민중이었고, 불법이민자들이었고, 빨갱이었고, 그리고 동성애자들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해방을 위한 전략이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부정의 변증법>이었던 셈이죠.
흔히, 서구사상(신학 포함)은 아우슈비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아우슈비츠가 서구사회에 던진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전후 대륙 철학을 휩쓸고 있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던 철학, 해체주의 등은 기본적으로 동일성에 기반한 서구정신 전반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해체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아도르노에 의해 우리는 이러한 전조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정의 변증법>이 지닌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해체를 말하고, 부정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이 대목에서 ‘위기담론’에 대한 내용으로 화제를 전환할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대한 생각과 위기의 시대에 대응하는 ‘민중신학적 윤리’를 다루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VI

프랑스 철학자들이 해체를 말하고, 아도르노가 ‘부정의 변증법’을 말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현대 사회가 ‘위기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에 대한 신념과 신기루로부터 출항한 근대! 그곳의 사람들은, ‘비록 지금 우리에게 약간의 혼돈과 동요가 있지만, 저 지평선 너머에는 어김없이 찬란한 미래가 있다’는 환상에 휩싸였던 족속들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토피아를 향했던 동경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허무와 위기로 전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위기사회가 도래한 셈이죠. 2차 대전 후 확립된 미.소의 냉전체제와 그 구도 밑에서 전개되는 핵무기 경쟁도 이러한 위기담론을 급하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고전적 위기의식이라면, 지금부터 말하는 부분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버젼의 위기의식일 것입니다.
20세기 말을 휩쓴 냉전체제의 붕괴는 우리에게 다른 차원의 위기를 선사하였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역설을 봉합하려 했던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수명을 다한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세상의 변혁과 인류의 진보를 낙관하고 믿고 의지하였던 많은 사람들을 광장으로부터 떠나가게 했습니다.  텅 빈 광장을 바라보고 그 광장의 부활이 요원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기까지, 동시에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회고됩니다. 그 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된 온갖 종류의 위기담론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민중신학도 그 예외는 아닙니다.
진화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발달한 것이 위기본능이라고 합니다. 위기를 예감하고 그 위기에 대처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였고 물리적으로 우세한 다른 종들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의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종족을 보존시키고 문명을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펼쳐지는 위기담론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 위기의 요체는 우리 삶의 구조와 방식이 인간의 통제와 예측이 통하지 않는 강력한 자본의 자기장안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또한 우리가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인간이 교환가치로 전락되어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인간가치가 셈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어둡고 몽매했던 중세의 어둠을 비추던 한 줄기 이성의 빛,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자유와 번영을 구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빛은 주인의 손을 벗어난 통제가 안 되는 광선검이 되어 세상을 베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한번 가열된 원자로가 식을 때까지는 외부에서 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현대 문명은 이미 인간의 손을 벗어났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기술의 발달한 이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불투명한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미증유의 사태가 현 위기담론의 요체인 셈이죠. 그러므로 지금의 위기담론들은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왔고 지탱해왔던 중심들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들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 내지는 징후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위기는 요체는 ‘우리가 의지했던 중심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믿었던 그것이 아닌가 봐!’라는 황망함과도 연관됩니다. 즉 지젝식 실재(the Real)를 봐버린 후에 주체가 느끼는 트라우마 같은 것 말입니다. 밤새 달게 마셨던 바가지에 담겨 있던 그 물이 사실은 해골에 담겨져 있었던 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원효에게 다가온 그 실재(the Real)! 물론, 원효는 그 다음 단계에서 깨달음이 와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범인들은 어둠 속에 벨이 울리면서 다가오는, 그 동안의 믿음과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악스럽고 흉측한 실재 앞에서 위기를 느낍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 위치합니다. 중심의 부재와 상실, 그리고 믿었던 실재에 대한 배신, 실망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민중신학의 위기’를 발설케 한 것이죠.

 

VII

하지만, 본디 중심이란, 데리다의 말처럼, 무엇인가 꽉 차 있어 중심이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으로, 실재하는 현실에 대한 不定으로, 반드시 도래할 그 무엇에 대한 대망으로 존재하는 중심이 아닐런지요. 그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세력에 대해 성서는 ‘선악과 이후 아담’, ‘바벨의 언어’, ‘금송아지 상’ 등으로 치환하면서 맹렬히 비난합니다. 성서는 또한 신의 자기비움(필리오케)을 통해야만 드러나는 그리스도 현존을 강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중심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 사라져 버린 중심의 형태와 격이 어떠해야 할런지를 성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민중신학이 이런 성서의 메시지에 너무나도 충실했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은 태생적으로 중심의 부재와 해체를 선언하면서 등장한 진정한 위기의 신학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본성상 주변에 위기를 선사할 수 밖에 없는 싸이렌의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이 민중신학을 여전히 현재진행적인 위태로운 사건의 문법으로, 혹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위험한 증환의 방식으로, 아니면 도래할 미래를 불러내는 유령의 언어로 남아 있게 하는 건지도 모르죠.
형. 그래서 저는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좋습니다. 물론, 민중신학의 위기론을 어떤 의도를 갖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선전을 통해 얻어지는 반사이익으로 비어있는 중심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민중신학의 위기론 유포를 통해 자신들의 불안과 조급증을 극복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을 향한 지적질과 그들과의 대결을 통해 민중신학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내용을 좀 더 촘촘히 가다듬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위기다!’라는 안팎에서의 걱정과 비난은 민중신학의 체질을 강화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제가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용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은 우리 안에 있는 결핍을 확인케 하는 거울이고, 그 결핍을 메울 환상을 제공 하는 기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보다 ‘광주사태’라는 말이 더 生으로 날것으로 다가와 살 냄새가 나고 피 냄새가 나서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였던 것처럼, ‘광주사태’라는 말을 곱씹으며 미완으로 끝난 우리의 혁명을 상상했던 것처럼,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 역시, 적어도 제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어떤 사태를 직감하고 예감케 하는 용어입니다.
맞습니다. 민중신학은 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민중신학은 여전히 위기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민중신학이 안전한 토대 위에서 그 위용이 전파되는 순간 이미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까닭입니다. 민중신학을 말하면서, “민중신학은 무엇이고,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선언을 물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호는 결단코 민중신학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은 부단히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해체적으로 대하면서 그 권위와 정당성이 유지되는 탈영토화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토화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선언되지 않고 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중신학이 위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비난에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리라 봅니다.      

형. 아도르노가 “진정한 깊이는 저항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지요. 결국, 모든 저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라는 의미로 저는 그 말을 해석하고 싶습니다. 민중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저항이 멈추는 날,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걷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민중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의 저항이 계속 지속되고 있다는 반증일테구요. 그럴 것입니다. Peace.  <다음 호에 계속>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본문으로]
  2. Theodor. Adorno, Negative Dialectics, trans. E.B. Ashton,(New York: Seabury Press, 1973), 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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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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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재형
    2013.05.10 14:4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형의 글을 읽고, 많은 영감을 얻고 공감을 갖습니다. 어서 빨리 형과 함꼐 배울 그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결핍과 부정이 민중신학의 동력이고 가능성이라는 말... 깊게 되새겨봅니다.^^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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