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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16 [신학정보] 예언자, 그들은 누구인가? (김진양)


예언자, 그들은 누구인가?





김진양

(Ph.D. 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the Old Testament))




    예언서를 연구한다는 것은 주로 예언자들의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빗대어 그들의 메시지를 분석함을 의미한다.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회정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만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예언자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만 연구하고 책으로만 만났으니 역사 한가운데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몸부림쳤던 치열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용히 잠든 세상을 마구 흔들어 깨워 요동치게 만든 예언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로 하여금 역사 앞에 자신의 몸을 과감히 내던지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랍비는 1962년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했고, 그의 책은 20세기 성서학의 걸작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예언자 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각주:1] 헤셸 랍비는 “신의 파토스”(Divine Pathos)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구약성서의 예언자와 예언서를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파토스의 신이라는 것이고 예언자는 신의 파토스를 몸으로 느끼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단순히 신의 말을 전단하는 메신저나 또는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자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의 연민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도덕 선생도 아니고 이성을 잃은 광분자도 아니다.


   예언자의 글은 신의 파토스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신의 파토스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자비와 사랑 때로는 실망과 분노와 같은 감정으로 표출된다. 예언자들이 열변을 토했던 것이 바로 신의 파토스다. 예언자는 세상의 불의를 보고 고함을 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예언자에 대한 단순한 접근일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신의 파토스는 역사적/사회 비평 같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이 신의 파토스를 전달하는 예언자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진노가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끊고 있어서, 내가 더 이상 주님의 진노를 품고 있을 수 없다”(렘 6:11).[각주:2]


   신의 파토스를 가장 잘 전달해주는 언어가 바로 시다. 구약성서의 예언의 독특한 점 하나가 바로 대부분의 예언이 시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헤셸 랍비는 예언자는 시인이라고 했다. 예언자라는 사람의 경험은 시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시적 영감으로 여기는 것을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른다. 예언자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감수성, 정열, 상상력을 부여받았다. 


    중세기 저명한 모세 이반 에즈라(Moses ben Jacob ibn Ezra) 랍비는 “히브리어로 시인은 예언자로 불린다”고 주장했다.[각주:3] 실제로 에스겔은 자신의 예언을 당시 사람들이 시가로 받아들이는데 불평을 토로했다: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겔 33:32).


    하지만 예언이 시라는 정의는 일리 있는 말이다.[각주:4] 구약성서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신의 파토스는 시라는 문학형식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예언은 시적 상상의 소산이다. 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시 안에서는 나무들이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모스는 번영과 향락을 일삼으며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여인들을 바산에서 풀을 뜯는 암소로 비아냥거리면서 하나님의 분노(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사마리아 언덕에 사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 

   저희 남편들에게 마실 술을 가져 오라고 조리는 자들아, 

   주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신다. 

   두고 보아라. 너희에게 때가 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갈 날, 

   너희 남은 사람들까지도 낚시로 꿰어 잡아갈 때가 온다. (암 4:1-3, 새번역). 


 이사야는 포로귀환의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주어진 포도주와 젖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신의 파토스)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사 55:1, 새번역).



 예언자는 시인일 뿐 아니라 설교자요 사회 변혁가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역사의 한 가운데서 신의 파토스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는 화산처럼 폭발하는 격정 속에서도 얼음같이 차고 맑은 냉철한 마음과 눈이 있다. 문익환 목사는 예언자의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설상 나는 죽었습니다.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숨쉬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숨쉬는 건 누구입니까? 

   아아아아 그것은 흐느끼며 휘몰아치는 

   바람입니다. 높아만 가는 

   겨레의 숨소리입니다. 

   벗들이여 

   그 속에서 불꽃 튕기는 눈망울 하나 불쑥 나타나 

   얼음같이 찬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각주:5]  


 예언자들의 마음을 역사 현장에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다. 따라서 헤셸 랍비는 예언자는 지금 역사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은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정점이었다. 셀마 몽고메리 행진 50주년을 기념하여 영화로도 나왔다. 20세기의 예언자로 불리는 헤셸 랍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주도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정의를 실천하도록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신의 파토스에 이끌려 예언자의 삶을 사신 또 다른 두 분이 있다. 바로 문익환 목사와 장준하 선생이다.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장준하 선생의 셋째 아들 장호준 목사가 “역사 바로잡기”라는 내용으로 강의하기 위해 시카고에 왔다. 장 목사의 강의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장준하 선생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준하를 “선생”으로 부르지만, 강연을 들은 이후 그분을 “우리 시대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로 다짐했다. 해방의 신 야훼가 아니라 가나안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출애굽 해방의 역사적 경험으로 초대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그분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일본제국 시절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는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 광복군으로,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 그분은 돈을 벌수 있는 많은 길이 있었지만 사상계를 출간하여 돈이 아니라 “생각해야 산다!”는 예언자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고, 돈 벌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베트남 파병도 반대하셨다. 그분은 파라오의 진수성찬이나(출애굽기 5장) 금 신상으로 표현되는 우상숭배 (출애굽기 32; 열왕기상 12장), 바알숭배에서 드러나는 풍요와 싸우셨던 것이다.  


 지난 2016년 4월 총선이 끝난 후 장호준 목사가 다시 시카고를 찾았다. 이번에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준 목사와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 선생의 토크 콘서트”라는 대담의 형식으로 문성근 선생과 동행했다. 특별히 이번 대담은 문익환 목사를 예언자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은 과히 신의 파토스에 따라 자신의 삶을 던진 이 시대의 예언자임에 틀림없다. 시인이면서 목사요 성서학자요 운동가로서 문익환 목사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언운동”이라고 규정했다.[각주:6] 문 목사는 “예언운동은 해방을 열망하는 억눌린 민중의 힘이 터져 나오는데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각주:7] 문 목사의 예언 운동은 바로 헤셸 랍비가 말하는 신의 파토스라고 생각한다.  


 헤셸 랍비는 “예언자들을 자세히 보면 결국 예언자들과 사귀게 된다”고 했다.[각주:8]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언자가 되게 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신의 파토스다. 우리는 바로 이 신의 파토스의 영감을 받고 그것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역사 한 가운데서 하늘의 파토스를 전하고자 몸부림치는 예언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 필자소개

    현재 미 연합감리교회 북 일리노이 연회에서 목회, 시카고 루터란 신학대학에서 구약학 전공(Ph.D.), Wartburg College에서 강의


ⓒ 웹진 <제3시대>

  1.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서울: 종로서적, 1996). [본문으로]
  2. 헤셸의 신의 파토스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Eliezer Berkovits, "Dr. A.J. Herchel's Theology of Pathos," Tradition 6 no. 2 Spr.-Sum. (1964): pp. 67-104. [본문으로]
  3. Shirath Israel (Berlin, 1924), p. 45. [본문으로]
  4. 헤셸, 172 쪽. [본문으로]
  5.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146쪽. [본문으로]
  6.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서울: 삼민사, 1990). [본문으로]
  7. 문익환, 136쪽. [본문으로]
  8. 헤셸, 머리말, x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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