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을 생각한다 - +a와 상징의 세계




안호성

(종교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서양의 해석학이 성경 해석을 둘러싸고 나타난 것처럼 나도 사춘기에 성경을 읽으면서 해석이 중대한 문제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떤 수녀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 강좌가 있었다. 많은 것을 배우며 많은 것을 의심하였다. 겉으로는 모범생이었지만 속으로는 반골이어서 성경 해석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축자적인 해석에 만족하지 못했다. 

   당시 처음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읽고는 얼마나 흥분하였던가? 지금도 어려운 그의 사상을 알았을 리 없지만 니체의 기독교 비판에 깊이 공감하였다. 니체의 비판은 기독교를 순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니체의 초인은 결국 예수이지 않겠느냐고 단정하기도 하였다. 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종교에 대해 더욱 더 다원적으로 되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석의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하였다. 전공으로 사회학을 택하면서 종교에 대한 나의 사유를 심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대학 시절에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가운데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있다. 포퍼와 쿤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에 대한 논쟁은 이 시절 나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해석은 무한하지 않지만 언제나 다양하다. 쿤의 업적은 자연과학마저도 해석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쉬운 언어로 설명했다는 점에 있다. 자연과학에 대해 무의식적인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인문(과)학자들이 쿤을 환영했음은 아주 당연하다. 나는 포퍼보다는 쿤을 더 좋아하였다. 과학을 포함하여 형이상학을 전제하지 않는 이론은 없다. 예수의 말을 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 진리는 오직 허위를 폭로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비판을 거치지 않은 이론은 언제나 독단과 광기로 흐를 뿐이다.

   그런데 쿤의 논의가 종종 과장되는 경우가 있다. 그의 주장은 정상 과학이 패러다임이라는 논증이 불가능한 기반에 서 있다는 것을 논증할 뿐 무한한 패러다임이 가능하다거나 모든 패러다임이 타당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소위 패러다임은 우리가 믿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에는 사람들의 의식을 넘어서는 곳에 각인된 패러다임이 전체 과학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한도 내에서 과학은 보편적이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진화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내게로 왔다. 그때부터 나는 진화라는 아이디어를 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진화론의 도통(道統)을 지키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반골의 자유를 즐긴다. 나에게 있어 종의 다양성은 진화의 역사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특수한) 원숭이에서 진화했지만 그 원숭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 원숭이 +a이다. 이 새로운 원리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질적으로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인간 이하의 동물은 필요(need)에 전적으로 지배되지만 인간은 요구(demand)에 매개된 욕망(desire)에 따라 산다. 이 차이를 설명할 때 +a가 요긴하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은 크게 두 가지 필요(본능)에 구속된다. 이 두 가지 본능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번식의 본능이다. 프로이트의 성욕과 공격성은 이 본능과 밀접하게 얽힌다. 성욕은 번식의 본능에서 공격성은 자기 보존의 본능에서 파생된다. 인간의 모든 성생활을 번식 본능의 변형이라고 설명하는 이론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 이론이 일리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따르지 않는다. 인간의 경우에 성생활은 동물의 번식(교미) 본능 +a로 설명될 수 있다. 단순한 해석이 언제나 미덕인 것은 아니다.

   음식을 예로 들어보자. 몸에 필요한 양분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그렇지만 음식이 자기 보존과 관련된 양분의 논리를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음식의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들을 보라. 백화점의 음식코너를 둘러보라. 요즘은 양분이 빈약할수록 고급 음식으로 통한다. 인간의 욕망들이 음식에 짙게 배여 흐른다. 인간에게 +a가 없다면 종교적 구도자들이 금욕하는 것은 오직 환상적이고 자학적인 광기로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아도 그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a가 있다고 믿으면서 산다. 

   인간의 고유한 특질로 지적되는 욕망은 오랜 진화의 단계에서 +a를 전제할 때에 (보다 잘) 설명될 수 있다. 덜 진화한 종을 설명하는 원리로 더 진화한 종을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설명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가령 인간을 몸으로 환원하는 의학은 인간의 삶에 대단한 유익을 주지만 의학적 설명이 인간을 전체로 설명한다고 주장할 때 의학은 독단이 된다.

   사람이 고유하게 가진 +a 때문에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에 비해 매우 복잡한 해석을 요구한다. 인간의 삶은 기호(code)가 아니라 상징(symbol)에 의해 얽힌다. 속담처럼 사람은 ‘아 다르고 어 다른’ 세계를 산다. 기호는 아무리 복잡하여도 오직 제한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가진다. 단순하게 말하면, 궁극적으로는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다. 물론 아주 단순한 기호라도 인간의 삶에 연루되면 언제나 애매해진다. 

   자연과학이 쉽사리 정상 과학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대상들이 기호의 세계를 산다는 점과 관련된다. 벌들의 현란한 소통의 방식이나 개미들의 복잡한 구조들은 타고난 본능에 의해 획일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본능은 상징이 아니라 기호의 세계를 구성한다.

   상징은 지극히 단순한 경우에도 아주 복잡한 해석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상징은 참과 거짓으로 나눌 수 없는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논리를 따른다. 거의 무한한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생산과 유통이 사람의 세계를 이루는 근본 사태의 하나이다. 

   경제학을 공부하다 보면 ‘모든 것이 일정하다면’ 이라는 구절을 자주 만난다. 이 구절에서 단순화의 욕망을 읽는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일정한 것은 없기에 경제학 이론들은 과학으로 포장되기는 하지만 지배 지식-권력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분과 적분의 현란한 수사로 포장된 경제학의 ‘한계효용의 이론’은 효용이 적어도 정상적인 다수에게 동일하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때에만 유효하다. 그러나 종종 나의 쓰레기가 다른 사람에게 보물이 되는 경우가 있지 않는가? 가끔 학자들은 말들이 갖는 의미의 애매함과 풍부함을 견딜 수 없는 ‘빅브라더’처럼 말을 단순화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전체주의자들은 언제나 상징을 기호로 만들려고 한다.

   인문(과)학이 직면하는 해석의 다양성은 사람이 기호의 세계가 아니라 상징의 세계를 산다는 점과 관련된다. 상징이 인간을 규정하는 특징인 한에 있어서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처럼 쉽게 정상과학이 되지 못한다. 정상과학으로 주장하는 대부분의 인문(과)학은 ‘나름대로 일리 있음’의 세계마저 벗어나서 억압적인 독단론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인문(과)학은 ‘위기상태’ 또는 정상과학의 전(前) 단계 상태를 항구적으로 견디어야 하는 운명을 갖는다. 인문(과)학자들은 정상과학이 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독단적으로 되는 학(學)을 거부하면서 영구적인 주변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지도 모른다. 인문학자들의 글에 유목이니 유배니 하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통속화된 표현을 빌면, 인문학자는 노마드이다. 그러나 ‘자유부동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반항하는 주변인을 닮았다. 

   해석은 기존하고 있는 해석들에 반대함으로써만 가치를 획득한다. 오랫동안 무시되던 면이 새로 부각되고 그 동안 과장되었던 면들이 마모되면서 텍스트는 새로운 삶을 획득한다. 해석은 ‘나름대로 일리 있는’ 의견을 생산하면서 기호의 세계로 환원되어 버린 텍스트를 다시 상징의 세계로 되살린다. 해석의 과정에서 해석하는 사람은 동물과 구별되는 +a를 소유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이 지속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시간과 우연과 확률 같은 용어들이 엄밀 과학에 소개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새로운 변화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참조하는 과학이 될 것인가? 나는 현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어서 답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또는 깊이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사람으로-있음의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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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과학과 그 너머




안호성

(종교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베르그송의 첫 저작인 『시간과 자유의지』를 읽을 마음이 생겼다. 몇 년 전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으로 한글로 새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영어번역본인 Time and Free Will 에는 “An Essay on the Immediate Data of Consciousness”가 부제로 달렸다. 영어번역본은 베르그송이 한창 활동하고 있던 1910년에 나왔다. 원저는 1888년에 출판되었으니 상당히 빨리 번역된 셈이다. 윌리엄 제임스 등의 영향이 클 것이다.  

   베르그송의 테제는 ‘의식의 흐름이 구체적인 경험이라면, 시간을 양화(量化)하는 당대의 철학은 그것을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것 같다. 만약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 없다면, 근대 과학에 구현된 연장(extension)의 방법으로 현상을 해명하는 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근대 과학은 상식과 동조하여 의식의 현상들을 마치 연장인 것처럼 다룬다. 시간은 공간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작업은 다음 물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간은 공간인가? 그의 답을 거칠게 요약하면, 의식 현상들에 적합한 시간은 공간이 아니라 지속이다.  

   베르그송의 당대에 사상계에 나타난 가장 큰 충격의 하나는 『종의 기원』의 출간이었다. 더 광범한 맥락에서 본다면, 19세기 중반에 과학의 심대한 위기가 발생하였다. 근대 과학이 19세기까지 300년 동안 독보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는 화이트헤드 등의 통찰이 맞는다면,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이 헤게모니는 다방면에서 흔들렸다. 위기의 시대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패러다임은 현저하게 교조적인 특성을 갖는다. 차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패러다임의 내부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심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불안은 단순히 과학 내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학의 위기와 전체 사회의 위기는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동안 삶을 고정하던 상징 세계의 위기는 합리적인 해결을 향하지 않고서 파국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베르그송은 19세기 중반에 공부하면서 당시 주도적인 방법에 천착했음은 당연하다. 그는 H. 스펜서의 사유에서 당대의 주도적인 방법의 현신을 보았다. 이 방법은 보통 “실증주의”로 불린다. 실증주의는 근대과학의 독단적인 표현이다. 콩트와 스펜서의 실증주의와 페히너의 심리물리학과 경험론에 터하는 연상주의(associationism) 등은 가족유사성을 갖는다. 보통 소박한 경험론으로 한데 묶인다. 경험론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철학의 중요한 관심의 하나이다. 이미 칸트는 강력한 경험론의 비판을 제시한다. 많은 면에서 칸트는 이후 철학을 지배한다. 베르그송이 칸트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제시하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의 사유는 칸트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누구의 철학을 비판한다면 기준이 필요하다. 무엇에 기대어, 누구의 사유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논리적인 모순과 비약에 초점을 맞출 수 있지만 부차적이다. 경험과 현상을 우선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순수’ 경험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면? 경험을 신뢰할 수 있는가? 과학의 방법과 이론이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직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직관을 통한 순수 경험의 획득이 가능하다면, 이 경험은 현존하는 과학 이론에 대해 일종의 비판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포퍼 등의 진화론적인 인식론은 이 가능성에 정초된다. 그가 경험을 철저하게 분석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아무튼 경험이 이미 있다고 하자. 이 경험은 방법의 참과 거짓을 선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 경험의 풍부함이라는 착상을 생각해 보자. 풍부하다면, 어떤 방법이 이 풍부함을 제대로 포착하는가? 

    이 책에서 베르그송이 집중하는 것은 의식 현상들이다. 의식 현상들의 학은 가능한가? 베르그송은 프로이트와 같은 주제를 천착한다. 19세기에 정신 현상 내지는 감정들 등등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이미 로크와 흄에 의하여 일종의 완성을 이룬 것은 아니었을까? 라캉은 어떤 곳에서 근대 학의 승리는 측정(measure)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측정이라는 이상. 이 방법의 특징은 모든 주관성의 요소를 지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근대과학 이전에도 공간의 측정이 있었고 시간의 측정이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시간의 측정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8세기에 서학이 동양에 전래될 때 그 형이상학은 거부되곤 했지만 달력은 매우 진지하게 검토되고 수용되었다. 그런데 달력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의 측면이 아니라 공간으로 환원된 양화된 시간의 측면에서 추구되는 것이다.

   이 기술의 특징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잠시 소설을 언급한다. 물론 자기를 기술하는 새로운 방법이 반드시 반(反)-과학일 필요는 없다. 그래도 베르그송의 철학에 깊이 기대면, 우리는 기술 자체가 갖는 한계를 검토해야만 한다. 그런데 모든 기술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큰 문제를 제기한다. 베르그송은 내적 통찰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심층을 조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내면성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 내면성을 다른 사람과 교통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 내지는 이미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사용은 곧 내면 상태를 공간화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학에 종사하는 또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가 문제된다.

   한국에서 스펙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끈다. 스펙이라는 단어는 원래 공산품의 특징을 기술하는 용어가 아닌가? 이 스펙이라는 단어는 자본주의라는 시장에서 매력 있는 상품으로 사람이 전화되는 극단을 표현한다. 그 단어에 대해 구토를 느끼는 대신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확인한다. 베르그송이 제시하는 사유를 통하여 이를 해석한다면, 사람으로-있음의 자본주의적인 양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양화의 도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베르그송의 사유를 예수의 언명과 관련하여 고찰할 수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물론 말씀이 환기되는 순간 베르그송은 말할 것이다. 말씀마저도 양화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그런데 말 또는 언어는 절대적인 지평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말없이 사는 존재를 관찰할 수 있다.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아무튼 말이야말로 사람으로-있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말은 이미 획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으로-있음에서 변모하는 것이라고. 베르그송이 책의 한 대목에서 소설을 다루면서 표현하는 난점들을 기억한다. 내적 상태를 양화하지 않고서 기술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시. 또는 그림과 음악.

   1888년에 베르그송은 이 책을 출판했다. 그는 1859년생이니 서른이 되던 때였다. 그의 나이에 견주면 나는 십 수 년을 더 살았다. 세상에 내어 놓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공인된’ 자리 하나 잡지 못한 채 늘 막연한 고민에 시달리는 처지이다. 나는 이 세계적인 철학자 앞에서 부끄럽다.

   그런데 문득 이 부끄러움은 베르그송이 주장하는 참된 자기(self)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ego)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사람에게 있다면 그것은 양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를 사회적이고 과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ego)와 관련하여 사람은 비교된다. 비교된다는 말은 측정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일정한 키를 가진다고 하자. 만약 키가 사람으로-있음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한다면, 문득 키를 아주 세밀하게 측정할 것이다. 키에 따라서 차등하게 자원을 분배하는 세계를 생각해 보자. 이 세계는 분명 당혹스럽다. 그렇지만 베르그송의 한 사유의 입장에서 사람으로-있음의 값을 매기는 모든 일은 궁극에 있어서 키에 따라 사람을 일렬로 배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베르그송의 사유에 따르면, 이것은 현실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람으로-있음은 그렇게 양화할 수 없는 차원을 갖는다. 양화할 수 없는 차원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평등하다. 양화할 수 없는 것을 배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관점에서 현대의 문제는 양화할 수 없는 것을 양화하는 매우 섬세한 방법을 개발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화할 수 없는 수준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사유는 매우 심대한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을 갖는다. 다시 나의 부끄러움으로 되돌아가면, 나의 자아 또는 사회가 나에게 강요한 양화를 극복하고서 참 나(self)와 ‘더불어’ 자족하는 경지를 획득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이 경지를 자유라고 부른다. 그 자족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고 묻는 일은 다시 자기를 양화의 세계로 이끈다. 정말로 그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다. 머물면 무슨 유익이? 나는 그렇게 묻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양화하는 어떤 정신의 강고함을 느낀다.

   요컨대 베르그송의 자기는 지속으로 파악되는 세계이다. 그러면 지속을 긍정적으로 정의하는 일이 가능한가? 지속은 오직 부정적으로 포착되는 것이지 않을까? 정말로 긍정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앞서 예술을 거론하였다. 과학은 양화의 기술로 남아야 한다. 이 점에서 과학과 예술의 화합이라는 면이 거론될 수 있다. 과학이 문제되는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독단 때문이다. 과학이 만능이라고 착각할 때, 베르그송이 지속이라고 부르는 삶의 영역은 축소되고 왜곡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삶의 완전한 지속에 대한 헌신 같은 것도 가능하지 않다. 삶은 어떤 면에서도 불완전하다. 다만, 몇 가지 다른 영역들을 완전히 한쪽으로 환원하지 않고서 어떤 중도를 발견하는 ‘지혜’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이 지속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시간과 우연과 확률 같은 용어들이 엄밀 과학에 소개된 지도 오래 되었다. 이 새로운 변화는 베르그송의 지속을 참조하는 과학이 될 것인가? 나는 현대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어서 답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또는 깊이 관심을 갖는 측면에서 사람으로-있음의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이 자기와 자아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 첨언한다. 자기는 지속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자아는 자기가 공간화 또는 양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양화된 것은 측정될 수 있으며, 이 영역이 심대하게 양화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현대 사회는 자아의 양화를 매개로 한 착취를 극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이 베르그송의 용어를 빌면 양화되고, 양화는 총체성(totality)을 지향한다. 만약 철학이 이 양화를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학이 양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학 내지 지식은 언제나 양화의 문제일 것이다. 더 섬세하고 말랑말랑한 양화가 있겠다. 그래서 학에 맞서는 것으로 비(非)-학이 있겠는데 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문학과 예술이다. 문학과 예술은 사람으로-있음의 복잡한 지속의 상태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타락과 위축은 베르그송적인 시각에서 현대가 직면한 큰 문제가 될 수 있겠다.

   베르그송의 사유에 있어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방식이다. 특히 과거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나중에 그가 기억에 관한 책을 쓴 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사람으로-있음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현상이다.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현재의 순간을 산다고 하자. 그런데 비유한다면 사람은 한 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린 공간이랄 수 없지만, 공간의 비유를 빌 수밖에는 덩어리로 산다고 해야 할까?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주체성은 출생 이전에 주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또는 유전자의 형태로 주어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많은 의문이 든다.

   나는 주체성이 출현한다고 보는 편이다. 주체성은 경험적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환경은 같을 수 없고, 유전자도 같을 수 없다. 이 미세한 차이에서 삶은 출발한다. 유전자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그것은 온갖 가능성들의 집합이고, 환경은 온갖 우연의 집합이다. 이 둘의 결합과 더불어 삶은 시작된다. 불현듯 시작된다. 우리는 말 이전에 정말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연구할 방도가 없다. 동물에게 의식이 있는가 하는 점이 아직 우리에게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듯이. 이것은 말을 통하지 않고서 소통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 또한 오직 말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없이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들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무(無)라는 말인가? 무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소통되기 위해서는 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아직 말이 없는 시절에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말의 너머에 존재하는 그 세계를 아이의 세계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말 너머의 세계마저도 말이 있고나서야 존재하지 않을까?

   이 글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와서는 일기장에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을 적은 것에 비할 수 있다. 그런데 지속에 대한 베르그송의 사유에 따르면, 그와의 만남은 나를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그와의 만남은 두 가지 방식을 가질 수 있다. 한편으로, 그 만남은 나라는 기존의 사람으로-있음에 오직 피상적인 흔적만 남길 것이다. 자유의 실현이 없는 반복과 리듬이 부각된다. 극도로 미세한 관찰에 의하면, 여기에도 변화와 창조가 있기는 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만남은 과거-현재의 연속체와는 매우 다른 자기, 즉 사람으로-있음을 창조하거나 구성하기도 한다. 이런 자기창조의 가능성 때문에, 사람으로-있음의 해명은 과학 내지는 지식의 방법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내적인 의식 현상들을 양화하는 일은 사회생활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사람으로-있음을 온전히 해명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베르그송은 과학과 과학의 너머를 지시한다. 너머에서. 물론 과학이 자신의 너머를 안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반드시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베르그송의 첫 저작에서 그가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과학에 맞서는 또는 나란히 존재하는 지속의 세계를 강조한다. 베르그송의 책을 읽고서 사람으로-있음, 너머와 자유, 창조에 대해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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