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을 직시하며 고통을 통한 연대의 정당성을 묻다.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 연구활동가, 사회학)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정범은 지금까지의 '사회'파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던 문법을 깨뜨렸다. 보통 이런 '사회'파 영화들이 가진 기본적인 서사가 있다. 선량하게 살던 사람들의 삶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파괴되고 피해자들은 그 고통에 절규한다. 화면 가득한 절규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피해자의 '편', 혹은 피해자의 '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아니라 이들이 피해자라는 단수여야 한다는 점이다. 설혹 그 피해자들 안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봉합 가능한, 즉 큰 틀에서 국가나 자본에 의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라는 단수로 봉합가능한 차이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차이 같지 않은 차이로 무시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결코 복수일수가 없다. 단수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문법을 완전히 깨트렸다. 그 가정 자체를 부정하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이 피해자'들' 사이의 차이는 '봉합'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고통은 국가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삶에서 이들이 겪고 느끼고 분출하는 분노와 고통은 국가보다는 오히려 그 국가의 폭력을 '함께' 겪었던 사람들과의 반목 때문에 생긴다. 이전에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동지'라는 관계/언어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관계'가 박살났다. 이것이 국가가 가한 가장 큰 폭력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다른 사회파 영화와 달리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국가가 행사한 폭력은 관계를 박살난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관계만 박살낸 것이 아니다. 당사자들은 그 이후 '우리처럼'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을 박살내어 그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게 하는 것, 그것이 존재 자체에 가하는 국가 폭력의 핵심이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말한다. 이 사이를 두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얼굴로 만나는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맨 얼굴로 만나지 않는다. 항상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면'을 쓰고 만난다. 그리고 이 '가면'에는 언제나 사회로부터 오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동지'라는 이름으로 그 가면을 쓰고 만났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시민' 혹은 '민중'이라는 가면을 쓰고 이들을 만난다.

사람이 가면을 쓰지 않고 그저 '나'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그 만나는 사람도 그저 '그'로서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대단히 한정적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신이나 동물, 식물 그리고 아주 희박하게 사랑하는 사람정도다. 교회에서 통성기도, 무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 이전의 언어로만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그 언어는 침묵이거나 혹은 의성어나 절규와 같은 '소리'다.

첫 번째로 이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이들 사이에 더 이상 가면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상을 넘어서는 국가의 폭력은, 그 국가의 폭력 앞에서 이들을 묶어 놓았던 가면인 '동지'를 박살냈다. 동지가 서로 같은 뜻을 나누고, 서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함께 하는 것이라면, 이전에 쓴 글에서 말했듯 국가의 폭력은 이들의 '동지'라는 가면이 그저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가면이 아니라 얼굴로서의 그런 동지는 애시 당초 있지도 않았다.

그 가면이 깨어진 순간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누군가는 바로 거기가 출발점이 아니겠냐고 말하겠지만 그런 '민낯'에서 출발하여 새로 서로에게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가면'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탐색하여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 가면이 박살난 이후 관계에 대한 가능성이다. 이들은 어떤 가면을 쓴 얼굴을 서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로 그 가면을 쓴 얼굴을 대면하면서 그 가면 뒤의 민낯을 떠올리며 역겨워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바로 이 가능성을 찾기 위해 참사의 당사자들도, 끝 무렵에 등장하는 인권활동가들도 애를 쓴다.)

어찌 보면 자기 자신도 한 번도 제대로 대면해보지 못했던 추한 자신의 얼굴, 그 민낯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당사자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들 사이의 관계를 박살낸 국가권력이 향하는 종착지가 있다. 바로 더 이상 이들이 가면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 혹은 가면을 쓰고 있으면서 언제나 자산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것. 그래서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구역질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존재에 가하는 최종적인 폭력이다. 그 결과 이들은 가면을 쓰지 못하거나 가면을 써도 스스로에게 역겨운 존재가 되어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낯익은, 아우슈비츠에 던졌던,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던졌던 동일한 질문을 만난다. 이것이 사람인가? 가면이 벗겨진 존재, 더 이상 쓸 가면이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는 존재, 그래서 발가벗겨진 이 존재들은 과연 사람인가? 사람이 모든 이름을 박탈당하고 발가벗겨 졌을 때, 그래서 그저 사람에 불과하게 되었을 때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으로 전도되어 버렸던 아우슈비츠처럼 가면이 박살나고 더 이상 가면을 쓸 수 없게 된 이' 사람들은 사람인가?

가면이 깨어진 자는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폭력을 가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참혹한 폭력은 서로에게 '진심'을 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잔인하이 있다.사람에게 진심은 믿어주거나 서로에게 있다고 가정하기에 물어보지 않을 때 존재한다. 진심에 대해 그것이 진심이냐고 묻는 순간부터 아주 희박한 경우를 제외하고 진심은 존재할 수 없다. 진심은 답할수록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사과했을 때 문을 박차고 나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진심을 묻지 않고 믿어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맨 얼굴이 아니라 그가 쓴 가면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면을 쓴 우리 모두는 '위선자'이다. 스스로도 자기의 맨얼굴을 다른 가면으로 가린다는 점에서도 위선자이고 다른 사람의 진심을 진정으로 확인하지 않고 믿는 척 한다는 점에서도 위선자다. 그러나 이 '위선'은 단어가 풍기는 느낌과는 달리 나쁜 위선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가면을 쓰고 위선자가 됨으로써 자기를 보호할 수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게 된다. 사회는 이런 위선자들이 펼치는 일종의 가면무도회이다.

그러나 가면이 깨어진 자는 더 이상 위선자가 될 수 없다. 그는 가면이 깨어졌기에 더 이상 사람을 못 만나거나, 사람 아닌 존재만 만나거나, 혹은 서로에게 네 얼굴은 가면이라고 폭로하거나.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것이 가면이라는 것을 알면서, 요구되는 그 가면에 충실해버리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앞의 두 경우가 도피라고 한다면 뒤의 두 경우를 우리는 '위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한 '문제적' 인물처럼 위선을 부리는 것조차 그것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위악'이 된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유일'하게 충실한 사람이다. 피해자로서, 당사자로서 그는 자로 잰 것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참사의 다른 당사자뿐만 아니라 관객들조차 바로 눈치 챌 수 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충실하되 영혼이 없는 것처럼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까지 충실하게 드러낸다. 위선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조차 그가 자신에게 가하는 위악이다.

이것이 국가가 가한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삶의 터전을 부수고, 관계를 박살냈다. 이 이후로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지 않게 만들어 더 이상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참사의 당사자들을 스스로 내가 과연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영원한 고통으로 밀어넣었다. 또한 그 고통이 영원하기에 좀처럼 그 고통에서 벗어나 가면을 쓰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서 인'간'이 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존재가 말살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야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는가?

영화는 같은 질문을 관객에게도 던진다. 이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만나야할 것인가? 이 영화를 보며 관객은 깨닫게 된다. 이전에 이런 사회파 영화를 보며 그들을 만나던 가면으로는 이 영화에서 더 이상 이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시민이라는 '익숙한' 가면을 쓰고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역시 역시 피해자라는 단수의 '익숙한' 가면을 써야한다. 그런데 그들이 겪는 '피해'의 핵심이 바로 이 '가면'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이 영화다. 따라서 관객들 역시 영화를 볼 때 다른 가면을 써야한다. 무슨 가면? 그러니 관객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연대'라고 부르는 것이 언제 결정적으로 취약해지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저항한다고 하는 '국가'에 의해 그 가면이 깨어져버렸을 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저항을 분쇄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이 더 이상 '동지'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저항하던 국가에 의해 '동지'가 파괴된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동지'가 될 것인가? 그것은 가능한가? 이 영화가 출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여기이며, 사람들이 멈추고 싶은 것이 바로 여기다.

여기서 사람들은 싸늘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건 너네 문제다. 그러니 당신들이 알아서 해결하라. 우리 앞에서는 싸우지도 말 것이고, 내보이지도 말아 달라. 당신들이 해결하고 난 다음에, 혹은 당신들이 해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연대하겠다. 당신들이 불화한다면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역할을 위해 당신들의 역할에 충실해 달라. 우리의 역할을 위해 당신들의 가면을 써 달라. 그러니 관객들은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고.

그런데 이런 요구가 연대일 수 있는가? 가면이 박살나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고통의 원인 중의 하나인 그 '익숙한' 가면을 다시 쓰기를 원하는 것이 운동이고 연대인가? 피해자의 가장 큰 비극은 피해자로서만 살아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참사를 알리기 위해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언제나 피해자이기만 해야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말하는 것처럼 피해자는 피해자로서만 주체화된다.

연대의 잔인함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연대를 한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폭력은 그들이 피해자로만 박제된 삶을 살아야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아니라 연대한다는 우리를 '환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이 피해자로서 피해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그 피해에 연대하는 우리를 환대하는 것이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환대하기 위해 그들은 피해자로만 살아야 한다. 한 친구가 말한 것처럼 참사의 당사자들이 늘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다른 사람들이 올 때마다 '피해자'가 되어 '환대'한다. 우리가 그들을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환대'해야 한다. 이것이 연대인가?

그럼 이 영화는 연대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깨어진 가면 이후, 그들의 '민낯'을 보여주는 그런 영화인가? 전혀 아니다. 이 영화를 주로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그리고 이 영화가 나오기까지의 사회운동의 고민에 대한 완전한 모독이다. 만일 우리가 이 영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며 '민낯의 중요성' 운운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반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운동'이 지나간 자리를 허무와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위악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국가 폭력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일일 것이다.

가면이 깨어진 이들의 민낯을 포르노처럼 드러내는 것은 영화의 의도도 아니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 감독들의 운동이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 영화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다. 참사가 한 존재에 가하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존재가 말살당한 채 죽어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참사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자칫 참사의 당사자들에게 매몰되어 놓치지 쉬운 이 질문을 이 영화는 끝가지 붙들고 있다. 드러내야하는 민낯은 이들이 아니라 바로 국가라는 것을 말이다.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이것까지 알아야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바로 그 '이것'의 뒤에 있는 국가의 민낯을 폭로한다.

또한 관객에게도 질문한다. 참사의 당사자들을 '피해자'로서만 만나고 그들이 '피해자'로서 우리를 환대하며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는 너희는 정당하냐고 말이다. 이런 '우리'들의 연대는 겉으로는 우리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환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이 연대하려는 우리를 환대하기를 바라는 그 익숙하고 편안한 연대인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편안하고 감동적으로 고통과 연대하는 것, 그것이 연대인가? 그 연대는 정당한가? 스스로의 정당성을 허물지 않고 당사자의 정당성을 묻는 연대는 정당한가? 연대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허물고 질문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닌가?


ⓒ 웹진 <제3시대>



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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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공동과 각각의 언어인 공감, 고백 그리고 증언[각주:1]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 연구활동가, 사회학)

 


이 영화에는 '공동'이 세 번 등장한다. 그리고 그 세번의 공동을 만들어내는 각각에 대응하는 언어가 있다. 이 글은 공동과 그 각각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보고 영화/글을 쓰고 읽는 우리는 각각의 처지에서 어떤 언어로 무엇의 장치가 되어 어떤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용산 철거민들과 여기에 연대하러 온 다른 지역 철거민들 사이의 '공동'이 있다. 두 번째는 참사가 일어난 후 정부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어 처벌하기 위해 붙인 죄목이자 이 영화의 제목인 '공동정범'의 그 '공동'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김석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경주 시내를 돌아다니는 영화의 주인공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그림자처럼 보이는 '공동'이다.

첫 번째의 '공동'을 보자. 이들은 '같은' 철거민으로서, '전철연'이라는 같은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이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다. 동지란 같은 운명을 공유한 사람이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공동의 운명을 나눈 사람들이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고 각자의 재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공동'의 행동을 취한다.

망루는 그 '공동'의 상징이다. 이 망루 자체가 공동의 '짓기'를 통해 만들어졌다. 전기를 아는 사람이, 용산 당사자가 아니지만 같은 철거민이고 같은 투쟁을 하는 동지로서 전기를 따오고, 또 누구는 다른 그 망루에 자기의 힘을 보탰다. 싸움은 용산에서 일어난 용산의 일이었지만, 그 용산의 일에 마음과 힘을 보태는 것은 철거민 모두의 '공동'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동'은 정말 공동이었을까? 아니었다는 것이 중간 중간 철거민들의 인터뷰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말한다.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농성을 하는 계획도 몰랐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들에게도 투명하게 '공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참사 이후에 알게 된다.

여기서 이 '공동'의 허상이 드러난다. 운명을 공유하는 것으로서의 공동에는 핵심과 주변이 있을 수 없다. 공동의 생명은 위/아래도, 핵심/주변도 아닌 둥글게 마주 앉는 평등이다. 둥글게 마주 앉아 모든 것을 '같이' 결정했을 때 그 공동은 책임을 같이 지는 '공동'이 된다. 그 책임은 일을 같이 논의하고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공동' 책임이 되는 것이며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비로소 '공동'이 된다.

그럼 이번에는 이 공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자. 좋게 말하면 입장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해관계다. 철거민이라는 공동의 입장이 공동의 이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용산과 다른 지역이라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공동'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이 '공동'은 간단하게 자동적으로 만들어진다. 이해관계가 같거나 혹은 입장이 같으면 이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서로를 부르는 말인 '동지'가 되고 이 동지들은 차이를 넘어 '연대'하게 된다.

입장과 연대 그리고 공감에 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 중의 하나가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이 하신 '입장이 같다는 것은 비를 같이 맞는 것'이라는 말이다. 비를 같이 맞는 것은 말하지 않지만 같은 곳에 서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며 이게 연대라는 것이다. 이 말은 쉬운 말로 연대를 말하는 것을 경계하며 연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상기시키는 말로 곧잘 인용되곤 한다.

이렇게 같은 입장이 되어 비로소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고 '연대'할 수 있게 하는 언어는 무엇일까? '공감'이다. 이미 철거민들은 같은 망루에 서지 않더라도 같은 처지이다. 같이 비를 맞지 않더라도 이미 다른 곳에서 같은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서로의 처지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그 처지에서 비를 같이 맞고 피하기 위해 망루를 짓고 함께 또 비를 맞는다. 그렇기에 같은 처지라는 입장의 동일함에서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이기려고 것으로서의 '공감'이 '공동'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이 '공감'을 확 쳐낸다. 같은 고통을 공유하고, 같은 처지에서 같은 비를 맞은 사람들이 모여 더 큰 비를 같이 맞으며 '같은' 고통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동'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용산 참사 현장에 있던 이들을 통해 보여준다. 같은 아픔을 겪고 비를 같이 맞았다고 공감은커녕 반목과 불신만 생긴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기는커녕 그것을 더 공유할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한다. 

그 결과 처지의 같음에서 연대하던 '공동'의 사람들은 낱개로 파편이 되어 밀려난다. 자신들의 공동이 허상이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자신들이 얼마나 고독으로 밀려났는지를 말이다.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고,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없다. 차라리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편하다.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 편하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영혼에 파스를 바른 것처럼 시원하게 한다. 말도 못하지만 자기가 손을 주는 만큼 정직하게 잘 자라는 식물과 달팽이만이 위로가 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공감에 대한 반대편의 진실에 도달한다. 아픔에 대한 동참을 통해 연대를 만들어내는 공감은 같은 처지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할 때, 함께 아픔을 겪는 이들 사이에 공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아픔을 같이 겪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나 '공감'은 가능하다. 같은 일을 겪으며 아파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절대 나눌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을 말이다.

고통의 나눔, 공감은 신과 달팽이, 그리고 식물하고 가능한 것이지 인간 사이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외로움 따위의 말이 아니다. 반대로 고통을 통한 공감, 고통을 통한 연대라는 것이 그 수사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그 불가능을 직시하지 못할 때 얼마나 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누구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에 함께함을 통해 연대하고자 한다면 신처럼 되거나, 달팽이처럼 되거나 혹은 식물이 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상찬하고 있는 이 영화의 '성취'가 여기에 있다. 고통과 연대, 공감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 그러 공감은 당신이 신/달팽이/식물이 되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사람과 세상을 더 추하게 만들 뿐이다. 같은 운명의 사람들이, 같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픔을 통한 연대는 공감이 아니라 불신과 반복의 지옥도를 만들어낸다.

두 번째의 공동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이다. 용산 참사의 총책임을 맡아야하는 정부는 참사의 피해자인 이들에게 '공동정범'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운다. 왜 하필 이들에게 부과한 죄목이 '공동정범'이었을까? 정부가 이들에게 '공동'의 혐의를 씌운 것은 영화에서 말하듯이 앞으로의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앞으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투쟁에 나선 사람 모두에게 책임의 위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 말이다. 이렇게 두 번째의 공동은 행위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공동이 아니라 행위자를 위협하기 위해서 정부로부터 만들어지는 강제된 범죄자로서의 '공동'이다.

또한 바로 이 '공동'으로부터 이미 연루되어 처벌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분열시키고 반목하게 하는 힘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첫 번째의 공동이 깨지면서 동시에 두 번째의 공동이 부과되면 연루되어진 사람들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왜 저 자와 똑같이 처벌받아야 하는가? 저 사람의 책임은 어디에 갔는가? 그가 먼저 자신의 책임을 고백한다면 그 이후에 나는 그와 함께 하겠다.  

이 영화가 묻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첫 번째의 공동이 깨어지고 두 번째의 공동이 강제될 때 공동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공동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 영화에는 그런 공동을 가능하게 하는 '영웅'도 등장하지 않으며 다른 이를 공동으로 엮어내는 '거룩한 희생자'도 없다. 다만 서로 반복하고 불신하며, 공동이라고 믿던 것이 공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이야기들만 나온다.  

이 영화는 말한다. 공동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말이다. 그리 쉬웠던 공동이, 참사 이후에는 오히려 한 번 만나는 것조차 힘든 것이 된다. 한 쪽에서는 만나는 것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분노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렇게 만나는 것이 무슨 '공동'이냐고 묻는다. 한 쪽은 만나서 소주도 한 잔하고 서로 마음을 터놓아야 다시 공동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다른 쪽은 그런 공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만나는 그런 공동만이 진짜 공동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정권이 이 '공동'을 만들어내는 언어가 '고백'이다. 재판의 와중에 범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고백이다. 고백을 통해 먼저 자기의 죄를 털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범죄인들이 자기의 죄, 즉 개별의 낱낱의 죄를 토해놓지 않는다. 그럴 때 그 낱낱을 묶어 한꺼번에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동정범'이라는 죄목이다. 앞의 공동이 허상이었다면 이 공동은 권력의 올가미다. 

그러나 영화에서 우리는 이 '고백'이 정권뿐만 아니라 참사의 당사자들에게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산에 연대하러 갔던 철거민들은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말로 고백을 요구한다. 그들은 누가 망루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는지, 누가 맨 먼저 뛰어내렸는지 등이다. 이를 통해 누군가가 이것이 내 책임이라고 말하고 시인한다면 그 고백에 기초해서 다시 공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은 그 모든 일에 그저 휩쓸린 사람이기 때문에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입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이 고백되었을 때 비로소 '함께' 할 수 있고 '공동'은 복원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절대 그것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용산 참사 현장에서 벌어진 '사실'에 대한 이야기일수는 있지만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피해자로서 모든 혐의를 부인한 것도 바로 그 이유라고 말한다. 자기가 책임이 있다고, 아니 더 큰 책임, 혹은 원초적인 책임이 있고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을 하는 순간 진짜 책임을 져야하는 권력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의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이며, 그 사실에 집착하는 한 진실은 빠져나가버린다며 완강히 거부한다. 그에게 고백은 진실로 나가는 문이 아니라 진실을 덮는 것일 뿐이다. 

진실과 사실, 혹은 한 쪽의 진실과 다른 쪽의 진실이 대립하고 그 간격이 커질 때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진실 그 자체다. 사실의 퍼즐들을 맞춘다고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진실이 사실 모두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과 진실이 대립하고 만남의 장이 사라지면서 사실을 조작하여 진실을 허구로 만들어낸 쪽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정권이다. 사실도 필요 없고 진실도 필요 없는 쪽이 이긴다. 그래서 이들은 오로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정범으로서의 '공동'만 남는다.

진실을 통해 공동을 만들어내는 언어로서의 고백.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고백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감독과 관객이다. 아마 한국의 다큐멘터리 대부분이 취하는 방법이 이것일 것이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고백'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카메라는 인터뷰를 할 때 항상 얼굴을 찍는다.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카메라는,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관객은 그 얼굴을 통해 가늠하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아마 많은 관객들은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의 눈동자와 표정을 살피며 그 고백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고백의 도구다. 우리 모두는 그들을 '취조'하는 형사, 즉 국가기관이다. 국가기관이 허접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국가를 대행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고백은 국가가, 동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심 있는 우리 모두가 요구하며 모두를 국가로 만든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상찬은 바로 이 고백을 강요하는 취조의 도구로서의 카메라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집요하게 인터뷰이를 몰아붙인다. 그래서 그들의 진실을 살핀다. 그러나 (정성일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그 진실을 고백하는 순간 - 즉 눈물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일부로 카메라를 돌리지는 않는다. 카메라는 고백의 장치가 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고백은 '죄인'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흔히 토로라고도 말하는 고백은 인터뷰이를 '피해자'로 완성한다. 인터뷰이들이 최종적으로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것은 자신이 겪은 아픔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눈물'로 상징된다.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홀로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통해 피해자는 피해자로 완성된다. 숭고한 피해자로 말이다.

대부분의 인터뷰-참여관찰을 통한 서사가 달려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고백을 하는 숭고한 피해자로서 재현/완성하는 것으로 서사는 숭고하게 끝난다. 피해자가 숭고해져야 서사도 숭고해진다. 서사가 숭고해져야 서사를 읽거나 보는 이도 숭고해진다. 이 숭고에 동참하는 것으로 '공감'이 발동하고 '공동'이 만들어진다.  

고백을 통해 용서할 수 없는 타락한 죄인과 누군가와 결코 나눌 수 없는 고통을 토로하는 숭고한 피해자가 만난다. 타락한 죄인과 숭고한 피해자는 한 쌍을 이룬다. 그 쌍을 만들어내는 언어가 바로 '고백'이다. 이 고백을 통해 이윤을 챙기는 것은 그들에게 진실을 강요하는 국가이며 그들의 얼굴을 통해 진실을 재판하는 관객이다. 고백은 국가와 관객을 하나로 묶는다.

그렇다면 공동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관객은 이 영화의 끝에서 다시 새로운 공동의 그림자를 본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들이 다시 둥글게 모여 앉는다. 첫 번째 모임은 고성과 반복으로 더 큰 상처만 남긴다. 그리고 두 번째 모임에서 이들은 비로소 둥글게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첫 번째에서는 서로에게 진실을 추궁하던 이들이 두 번째 모임에서는 사실을 가지고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이때 이들은 머리를 맞댄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의 기억, 즉 각자의 사실이 전체에 대한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그 날의 전체, 즉 진실에 대해 목마른 사람들이 그들이기에 서로의 조각에 기대 각자의 조각을 내놓고 빠진 부분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공동'정범'을 부인하기 위해 말하지 않던 것과, '공동'정범임을 부인하기 위해 상대에게 추궁하던 것을 내려놓는다. 위와 아래, 안과 바깥이 아닌 둥근 공동의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김석기에 맞서기 위한 공동의 행동을 편다. 

여기서 우리는 허상으로서의 공감과 국가 장치로서의 고백을 넘어 서로를 만나게 하고 '공동'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증언'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증언을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자기의 증인이 되는 것, 그러나 나는 이미 자기가 자기를 증언할 때 이것을 국가처럼 보고 그 진실을 판단하려는 카메라와 관객이 개입하는 순간 증언이 증언이 아니라 국가 장치인 고백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증언은 내가 나에 대해, 내가 겪은 것을 타자 앞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증언은 내가 아니라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말미에 인권활동가 박래군과 함께 비로소 만난 참사의 당사자들이 하는 것은 서로의 기억을 맞추는 것을 통해 서로를 '폭로'하는 것도 서로에게 '고백'을 강요하는 것도, 자기를 '토로'하는 것도 아니라 서로에 대해 '증언'하며 서로의 기억을 북돋아주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증언이 당사자들에 대한 폭로나 당사자의 고백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게 하는 것, 그것을 나는 증언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증언은 위태롭다. 고통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도 타인에 대한 증언이 타인에 대한 폭로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또한 아무리 용기를 북돋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마주 대하는 두려움은 증언을 거부하게 한다. 증언의 이름으로 거짓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진실을 향한 용기를 북돋는 증언은 매우 힘들고, 아주 희박하다. 증언은 폭로로, 고백으로 타락하기 딱 좋다. 당사자들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물어야하는 것이 바로 기록하는 자, 영화라면 감독일 것이고 책이라고 하면 저자, 둘을 묶어낼 수 있는 전통적 언어로는 지식인/활동가일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돌고 돌아 민중 혹은 피해자 혹은 서발턴을 기록하는 자로서의 지식인/활동가의 언어, 지식인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사르트르와 사이드, 그리고 스피박 등이 궁극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영화/글쓰기의 윤리, 아니 그 글쓰기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백을 강요하는 국가 장치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공감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그가 될 것인가. 저 국가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고백과 공감의 정치를 거부하고 증언의 '장치'로서의 '정치'를 하고 있는가? 감독들은 관객에서 무엇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또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과연 증언의 '공동'은 만들어지고 있고, 만들어질 것인가?  

첫 번째의 허상으로서의 공동, 두 번째의 올가미로서의 공동에 이은 이 세 번째 희미하게 등장하는 이 공동은 증언의 공동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김석기라는 '악'에 맞서기 위한 잠정적인 휴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을 서로 나누자고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소주의 힘을 빌려 빙빙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과,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싸움이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공동'이 아닌 '고립'이 더 심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공동에 대해 그리 쉽게 첫 번째로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 영화 이후에 우리는 다시는 첫 번째의 공동을 공동으로 여길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쉽게 저들의 농간에 말려 두 번째의 공동을 받아들일 수도 없게 되었다. 첫 번째의 공동이 '동지'와 '연대'라는 이름의 공동이었다면 두 번째의 공동은 '우리 안의 박근혜'류 따위의 공동이다. 첫 번째의 공동은 언제나 위와 아래, 핵심과 주변으로 나눠진 공동이었으며 두 번째의 공동은 고상하고 성찰하는 척 하는 공동이었지만 그 공동은 언제나 저들에 의해 '정범'으로 묶이는 공동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의 공동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그림자처럼, 마지막에 지나가듯이 희미하게 보여주지만 그 공동은 뚜렷하다. 그 누구도 진실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 소유하지 않은 진실은 누구에 의해 독점되며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가진 사실/진실의 파편들로 머리를 맞대고 퍼즐을 맞추며 나가야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가운데를 비우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진실을 향해 조각을 맞춰가는 것,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그것을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주인공도 아니고 중심인물도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인물/운동이 있다. 그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정성일이 말한 것처럼 길이도 맞지 않고 서사도 일관되지 않은 여러 에피소드들의 조각들로 산만하게 흩어질 것이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겠지만 영화의 말미에 반짝 등장하여 고백과 공감을 넘어 서로에 대해, 진실에 대해 용기를 내게 하는 인권활동(가 박래군)이다. 그가 이 과정에 대한 증언자로 되고, 희미하게나마 사람들을 증언자로 묶어내고 있었다. 여기가 인권활동의 자리가 아닐까.

나는 인권활동의 위태로움을 늘 경험하는 인권활동가 동료들이 우리의 언어가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하는지를 되묻기 위해 꼭 보았으면 한다. 우리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 웹진 <제3시대>



  1. http://khrrc.org/3536478#0 이 글은 '인권연구소 창' 홈페이지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게재되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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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포럼 취지

14인의 비평가와 신학자들이 지은 『사회적 영성』은 우리 사회 감성의 흐름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 책입니다. 이제 좀 더 많은 독자들과 책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 실천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대화마당을 마련하였습니다. 지난 12월의 1차 대화마당에서는 주로 신학적 · 종교적 차원에서 ‘영성’의 ‘사회적’ 전환에 관해 토론했다면, 이번 제2차 대화마당에서는 반대로 사회적인 것 안으로 영적인 것이 도입될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타자의 고통을 기억하고 신체와 언어에서 배제되어 있는 진리들에 응답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주체를 불러내기 위한 새로운 정치적 기획으로서 ‘사회적 영성’이라는 문제설정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을지를 함께 살펴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자본의 욕망을 넘어서 영성의 사회학, 영성의 정치학을 고민하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날짜: 1월 26일(월), 저녁 7시30분

장소: 한백교회 안병무홀 (서대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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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통해 한국사회 청년층 문제를 새롭게 환기하여 주목받았던 엄기호의 신작. 기존의 인문사회과학이 관계 단절을 하나의 문제적 현상으로만 여겨왔던 관성에 도전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의 양상, 즉 우리가 언제 누구와 접속하며 또 언제 누구와는 단절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중산층, 시민사회 등의 사례를 채집해왔고,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자신이 속한 가족, 직장 내에서 소통이 쉽지 않음을 호소하면서도 그 불통의 당사자와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취향의 공동체’ ‘힐링’을 통해서만 이를 해소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책 속에는 관계 단절이 어떻게 개인의 무기력을 낳고 곧이어 사회의 붕괴로 이어지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누구의, 어떤 관계의 단절인가

제1부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

1장 정치공동체의 파괴: 폭로하고 매장한다
2장 단속사회의 출현: 타자와 차단하고 표정까지 감춘다
3장 기획된 친밀성: 철저히 감시하고 매끄럽게 관리한다
4장 사생활의 종언: 고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제2부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

1장 관계: 질문하면 ‘죽는다’
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3장 노동: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라
4장 국가폭력: 껍데기까지 발가벗겨라

제3부 고통에 대면하기, 사회에 저항하기

1장 성장은 가능한가
2장 무엇이 우정을 가로막는가
3장 경청이란 무엇인가

에필로그 누구에게 말을 걸 것인가

주석

 

* 당일 북토크와 관련하여 미리 참조할 만한 저자의 인터뷰를 추천합니다.

1. 엄기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듣는 감수성http://ch.yes24.com/Article/View/24805

2. ‘단속 ’ 아닌  애도의  권리를  애도의  공간을  http://education.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5600.html


 

  • 저자 : 엄기호  
최근작 : <단속사회>,<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상상하라 다른 교육> … 총 32종 (모두보기)
소개 :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때 폭력적이고 부패한 교사를 만나 교육과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에 눈떴다. 전교협 해직교사들의 편지글 모음인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를 중학교 때 읽으며 다른 교육의 가능성을 갈망하게 되었다.
사회학과에 진학하였지만 학부 시절에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고 가톨릭학생회 동아리 활동에 푹 빠져 있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고서야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곧 국제단체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태평양 사무국에 나갔다. 당시 한창 달아오른 반세계화 현장에 참가하며 주로 대학생들의 사회의식을 고양하는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하자센터에서 글로벌학교 팀장을 하고 늦은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문화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와 청년 하위문화를 주로 연구하였다. 돌아보면 늘 교육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셈이다.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페다고지를 만드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2013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덕성여대 겸임교수,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을 하고 있다.
저서로 《닥쳐라, 세계화!》(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2009),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2010),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2011)를 냈고, 이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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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
   - 위기의 지구화 시대 청소년이 사는 법

▷ 지은이 : 백소영ㆍ엄기호 외 지음
▷ 펴낸곳 : 도서출판 이파르
▷ 기   획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우리신학연구소, 한신대 평화와 공공성 센터
▷ 2011년 6월 30일 발행 | 값 12,000원 | 304쪽
▷ 분   류 : 사회>사회비평/비판>한국사회비판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지구화 시대 공공성의 위기와 청(소)년의 삶
지구화, 세계화의 폭력적인 확산으로 근대적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도처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은 근대적인 공공성의 위기를 의미한다.
최근 공공성 논의가 부각되는 것은 이런 맥락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지구화라는 길고 복잡한 터널에 진입하여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의 공공성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지구화로 인한 공공성의 위기를 가장 격렬하게 몸으로 체현하는 연령적 계층인 청(소)년에 집중하는, 한국적 공공성의 인문학을 모색한다.     

잉여와 잉여짓, 청(소)년의 고통과 저항은?
지구화 시대 공공성의 위기로 청(소)년은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불안한 미래에 인생을 저당 잡힌 채 고통과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는 가운데 많은 청(소)년은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자, 곧 잉여가 되고 있다. 또한 잉여로 전락하지 않은 청(소)년들도 그들의 많은 행동들이 잉여짓으로 분류되는 고강도 규율 아래 놓여 있다. 
자원화될 수 없는, 쓸데없는 짓으로 낙인찍힌 행동들을 해서는 안 되는, 오직 스펙 쌓기 머신이 되어야 하는 청(소)년, 그들의 고통과 저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제1부는 이러한 청(소)년의 고통을 다룬다. 청(소)년의 자기 진술을 듣고, 그 배후를 추론하여, 지구화 시대의 공공성의 위기의 맥락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 이것이 제1부의 목적이다.
제2부와 3부는 청(소)년의 저항을 다룬다. 제2부에서 다루고자 하는 저항은 잉여짓을 적극적으로 재전유하는 청(소)년의 창조적인 행위들에 관한 것이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는 것으로,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재전유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체제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감행한다. 제2부는 그러한 탈주, 탈주체화의 기록들이다.
제3부는 그러한 저항을 제도화하는 시도들을 다룬다. 즉 재주체화의 기록들이다. 그 과정은 때로는 기성의 제도를 개혁하는 실천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기성 제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제3부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 저항의 양면을 점검해보는 글들을 모았다. 

기획 과정
이 책은 한신대 평화와공공성센터가 주최하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와 우리신학연구소가 주관하여 2010년 11월에 3회에 걸쳐 진행한 평화와공공성 콜로키움을 발전시켜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HK 연구교수와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 기획주관을 맡아, 콜로키움에서 발표된 4편의 글을 수정 보완하고, 추가로 8편의 글을 청탁하였다.
백소영 외에, 인류학자 엄기호, 신학자 구미정, 문화기호학자 김수환 외 10명의 필자가 참여해 12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출간일에 맞추어 필진의 일부가 다시 모여 비공개 집담회를 열어 향후 작업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책의 외연. 공공성의 인문학이라는 기획에 대하여
공공성에 관한 논의가 학계의 여러 분야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 책의 기획진과 주관 단체인 두 연구소(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우리신학연구소)는 공공성에 관한 여러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이 책의 방향과 향후 공공성 담론의 방향에 대해 잠정적인 논점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적인 공공성의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기존의 공공성 담론은 지구화 시대의 위기를 공공성의 위기의 관점에서 다룬다.
하지만 우리는 공공성의 위기라는 말은 부정적이면서 긍정적임에 주목한다. 즉 공공성의 위기는 근대 민주주의의적 기획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위기에 빠뜨린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의 위기를 다루는 공공성의 인문학은 근대 민주주의적 기획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공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탈근대적인 인문학적 시도이다.
한편 공공성 담론은 국가와 종교, 국가와 시민사회 등과 같은 거시적 주제를 중심으로 공공성의 위기와 대안을 물었는데, 우리의 공공성의 인문학은 구체적인 위기의 현상 읽기에서부터 물음을 시작하고자 했다.
이 책이 청(소)년을 말하고, 그들로부터 잉여짓에 관해 청취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이것은 인류학적 연구나 문화연구 등에서 이미 시도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 논의들은 공공성에 관해 묻지 않았다. 반면 공공성 논의는 미시현장의 소리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은 이 두 별개의 논의를 공공성의 인문학적 시각에서 연결시키고자 하였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 공공성의 인문학은 중범위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장의 구체적인 문제에서 한국 사회의 공공성의 위기를 살피는 작업은 우리의 공공성의 인문학이 한국의 지역학적 문제의식과 맞물려 있음을 뜻한다.  
한국적 공공성의 인문학의 문제의식을 우리는 이 책에 한정하지 않고 더 발전시켜 다룰 예정이다. 곧 이 책은 그 첫 번째 모색이다.
향후 계획에 관해 이 책의 기획진은 생각을 다듬고 있는 중이다. 
 
저자 소개(가나다 순)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상임연구원
구미정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김강기명  연구집단 CAIROS 연구원
김수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HK 연구교수
유승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인권연구소 '창'의 연구활동가
연규홍  한신대 교수. 한신대 평화와공공성센터 소장
이규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객원연구원
정용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차 례

머리말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제1부   고통

         잠재성을 잉여라 부르는 세상__백소영

         이것은 우리 잘못이 아냐!
                   ―세 청년의 이야기__엄기호


제2부   저항 하나
        제도에 흠집 내기 

         청(소)년의 패러디 문화, 잉여짓 또는 잠재적 혁명성?__백소영

         너희가 병맛을 아느냐?
                  ―웰 컴 투 더 <이말년 월드>__김수환 

         학생들과 무슨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고백에서 증언으로의 전환__엄기호 

         김예슬 선언에 나타난 엑소시즘
                   ―지구화 시대의 시장 귀신 내몰기__ 구미정  

         도시, 청(소)년, 그리고 정치의 한 방식
                   --홍대 앞 두리반과 청(소)년의 집합행동__김강기명

제3부  저항 둘
       제도를 창안하기 또는 포섭하기 

         촛불과 팬덤
                  --팬덤의 정치화 또는 정치의 팬덤화__이규원
        
         단기 선교와 자발적 섬김
                  --지구화 시대 개신교적 주체 형식__유승태
        
         카리스마 운동이 추구하는 신앙과 공공성
                  --지구화 시대 천주교적 주체 형식__경동현

         자기를 이야기하는 청(소)년, 세계와 적대하는 인간__정용택


맺음글   잉여의 시선으로 공공성의 인문학을 꿈꾸다__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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