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치부 솔직하게 드러내 참사의 본질을 직시한 다큐[각주:1]


 

권오윤[각주:2]



       2009년 1월에 일어난 용산 참사는 이명박 정권의 비인간성과 자본의 민낯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뉴타운 사업이 철거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지연되자 용역과 공권력을 투입하여 무리하게 진압했고, 그 와중에 일어난 화재는 철거민 5명과 의경 1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법적 책임은 당시 진압을 책임졌던 경찰 지휘부나, 경찰 지휘 책임이 있는 정부가 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옥 같은 불길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철거민들이 그 책임을 떠안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참사에 원인 제공을 한 ’공동정범’으로 기소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됐지요.

       <공동정범>은 불공정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던 철거민 중 다섯 명의 출소 후 모습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당시 용산4구역 대책위원장으로서 함께 망루에 올랐던 아버지를 잃은 이충연 씨는 여러 언론을 통해 가장 주목을 많이 받은 인물입니다. 출소 후에도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반면, 다른 네 사람은 용산 지역 철거민이 아닙니다.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소속의 다른 지역 철거민으로, 당시 연대 행동을 목적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용산구 신계동 철거민 김주환 씨 , 동작구 상도4동 철거민 천주석 씨, 성남시 단대동 철거민 김창수 씨, 중구 순화동 철거민 지석준 씨가 그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아픔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진 : 시네마달


솔직한 묘사, 공감으로 이어지다.


       소수자의 입장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 때 창작자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은 그들을 지지하는 마음이 앞서 논지를 전개하는 데 유리한 측면만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 치부 같은 불리한 면모를 드러내면 왠지 이들의 정당성이 훼손될 것만 같고, 주장을 스스로 뒤엎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면만 보여주면 짧은 구호나 뉴스 기사 같은 이미지로만 남게 될 뿐, 관객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잘못된 판단을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이 앞설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을 오해하거나 왜곡된 기억을 진짜라고 믿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인간이므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작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노동 계급의 문제를 다뤄온 켄 로치 감독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중심인물의 치부나 한계를 보여주는 데 그리 인색하지 않은 편입니다.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죠.

      <공동정범>의 감독들이 가장 고민했고 조심스럽게 접근한 것도 이런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이충연을 비롯한 용산 쪽 사람들과 다른 지역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적 앙금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들 사이에는 참사 당시는 물론 출소 전후의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과 오해, 미안함 같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창작자로서 이들의 갈등을 아예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감정싸움은 벌써 사람들로부터 잊혀가고 있는 용산 참사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들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선택의 결과는 좋습니다. <공동정범>은 감정적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영화 속 용산 참사 관련자들의 심정은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것들이니까요.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은 철거민이 돼 본 적도 없을 테지만, 이들이 서로에게 가진 미안함과 서운함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용산 참사라는 비극의 본질을 다시 한번 직시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들이 고통을 겪은 이유는 턱도 없는 보상금에 분노해서 싸웠기 때문도 아니고, 다른 지역 문제에 오지랖 넓게 나서서 연대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자본의 편에 서서 공권력을 동원해 주먹을 휘둘렀고, 부당한 판결을 통해 이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은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니까요.


차이보다 공통점에서 얻는 희망


       어떤 모임이나 단체든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공존합니다. 대의와 목적을 위해 효율적으로 움직이자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과 연대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지요. 이런 견해차는 종종 다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갈등이 노출됩니다. 참사의 진상 규명과 재심을 위한 노력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충연의 태도와 인간적인 관계와 연대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지향점이 다릅니다.

       양쪽 입장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으로는 안됩니다.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기만 하면,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지쳐서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또한, 인간관계에만 신경 쓰다 보면 일반적인 동호회 모임과 다를 것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요.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백 사람이 있으면 백 사람 모두 각자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에만 주목하면 세상에는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차이는 인정하되 공유하는 가치와 목표에 집중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 <공동정범> 제작에 힘을 보탠 이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용산 참사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이 시급히 이뤄지길 빕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2018년 2월 2일자 기사 <갈등-치부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해 더 마음이 가는 다큐>(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01216)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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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잔향 

<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2017)> 




이희승*



  망자가 살아있는 자들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방황할 때, 우리는 쉽게 ‘유령’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게 됩니다. 새로 다가오는 것에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는 지나간, 혹은 지나가야만 할 것들을 통칭할때도 흔히 ‘유령’ 혹은 ‘망령’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지요. 선왕의 유령이 준비하지 못하고 맞은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달라며 젊은 왕자 햄릿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햄릿은 “그대는 성령인가, 악마인가? 천상의 영기인가, 지옥의 독기인가? 그대 마음속의 선악의 의도는 모르겠다만, 그런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말을 건네 보지 않을 수 없다”라며 용기를 내어, 밤이슬을 맞고 선 유령에게 말을 겁니다. 일말의 주저없이 선왕의 유령은 너무나 분명하게 살인의 순간을 묘사하고, 복수의 범위까지 세세히 지시하는 것도 모자라, 새벽닭이 울어 지하세계로 퇴장해야 하는 그 순간까지 머리가 터질 지경인 아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죠. “아듀, 아듀, 아듀, 리멤버 미!” 이렇듯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 그리고 살아 남은 자들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자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령은 결국 덴마크 궁정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한 시대가 갑작스레 막을 내리는 비극을 재촉하게 됩니다. 세익스피어의 무대 뿐만 아니라, 영화의 여러 장르에서도 유령의 존재를 산 자의 시공간에서 조우하는 경험의 영화적 재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얀 소복을 차려입고 무덤가에 출몰하는 처녀귀신이든, 피칠갑을 하고 교정을 배회하는 여고생이든, 사랑하는 여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애절한 약혼남이든, 남겨 둔 어린 자식의 육아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고스트 맘이든 말이죠.


  하지만 데리다의 유령론 (hauntology)이 제시하듯, 유령은 존재와 부재의 명확한 구분에 도전하는 ‘위험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부재를 전제로 하는 유령의 존재는 근대물리학에 기반한 ‘자연의 법칙’에 도전하는 한편, 직선적인 역사관의 한계를 벗어나는 변화와 확장의 가능성을 내포한 채,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조용히 개봉했다가 사라진 저예산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상상하는 대로 뭐든 만들어 내는 최첨단 디지털 시네마의 시대에, 구멍이 두개 뚫린 침대시트를 뒤집어 쓴 우스꽝스러운 유령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개인과 역사의 혼재에 관한 위험천만한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젊은 작곡가인 C (케이시 애플릭)은 아내인 M (루니 마라)와 함께, 한적한 교외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늘 혼자하는 음악 작업에 익숙한 조용한 성품의 C는 편리하고 깨끗한 도심의 아파트로 이사하기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에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하죠. M은 밤마다 으스스한 소리가 들리는 낡은 집이 무섭기 짝이 없지만 남편인 C는 부부의 짧지만 소중한 ‘역사’가 담겨 있는 이 집은 물론, 보이진 않지만 같은 시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듯한 존재에 설명할 수 없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남편이 죽고, 가족없이 홀로 남겨진 아내는 물끄러미 영안실에 누워 있는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 봅니다. 크게 울어 보지도 못하는 아내는 C의 얼굴을 하얀 시트로 덮고는 영안실을 빠져 나갑니다. 잠시후, 죽은 남편의 시신은 하얀 시트를 뒤집어 쓴 채로 영안실을 나와 병원 복도를 배회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죠. 대사 한마디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갔다가 다시 돌아온 ‘침대시트 유령’은 석양으로 물든 드넓은 푸른 초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 갑니다. 이때 영화는 그 흔한 특수 효과나 CG 없이 침대시트를 질질 끌며, 당연하다는 듯 표표히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유령을 익스트림 롱 쇼트로 보여 주죠.


   슬픔에 잠긴 아내의 곁을 안타깝게 지키는 유령의 모습은 <사랑과 영혼>에 등장하는 애절한 눈빛의 샘 (패트릭 스웨이지)과 닮은 듯 보입니다. 별반 의심없이 관객은 조금전까지 존재했던 C의 다정했던 모습을 새하얀 시트위에 투영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은 관계의 연속성을 성급하게 단정한 채, 우두커니 집안 한 켠에 서있는, 표정도 없고 말도 없는 이 유령을 죽은 남편의 ‘영혼’으로 간주합니다. 마치, 이승에서의 욕망, 의식과 의지가 죽음이라는 단절을 초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입니다. 하지만,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은 서서히 자의식과 기억을 잃고 이승에서 하릴없이 부유하게 됩니다. 햄릿의 아버지와는 달리 이 영화가 그리는 ‘고스트’는 인간성을 한 겹씩 허물처럼 벗어내면서, 머물고 싶다고 하면서도 부단히 앞으로, 미래로 내닫기만 하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강박에서 한걸음 비켜 서게 되죠. 산 자의 삶이 한방향으로 전진하는 운동이라면, C의 실존 뒤에 남겨진 잔향과 같은 이 유령은 지상에 매인 존재들을 관장하는 물리법칙과는 다른 궤적과 속도를 가진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아내, 내 집, 내 음악 이라는 주체의식이 무효한 긴 호흡의 시간을 타고 흐르며, 과거-현재-미래-과거라는 순환적인 내러티브가 스크린 위에 몽환적으로 펼쳐 집니다. 영혼이나 유령의 형상에 인간성을 대입해 만들어낸 여타의 유령 이야기들과는 달리, 영화 <고스트 스토리>는 유령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와 공존하지만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거나 관계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이야기를 구술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젊은 부부가 살던 작은 집에 다른 세입자들이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하고, 마침내 그 집과 이웃집들이 허물어지고, 별빛이 성성하던 그 자리에 밤을 대낮처럼 밝히는 마천루들이 들어서는 동안, ‘고스트’는 사념없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질을 목격합니다. ‘고스트’의 경험을 묘사하는 영화의 방식은 참으로 인상적이죠. 실재와 부재의 경계에 선 존재와 죽은 C를 동일시했던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합니다. 다소 더럽혀진 침대시트를 뒤집어 쓴 ‘고스트’는 요란하게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서, 분명 C에게는 상상도 못할 미래였을 수십년의 시간과 C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방인이였을 사람들 사이를 무심히 스쳐 지나갑니다. 마치 영안실에서 나와 넓은 초원을 걷던 영화 초반의 그 순간처럼 표표히. 전생에 마침표를 찍은 그 지점으로 되돌아온 ‘고스트’는 이제 막 삶을 마감하고 유령이 된 C와 같은 시공간에 서게 됩니다. 이 특별한 시간 여행으로 관객을 이끌었던 ‘고스트’가 영겁의 시간을 경험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새출발을 위해 집을 떠나는 부인 M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신참 ‘고스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아귀가 맞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화의 결말을 열어 놓게 됩니다.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 안에서 실재와 부재를 마치 아귀가 딱 맞는 댓구라고 상상했던 우리는 사뭇 ‘위험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은 시종일관 말없이 침대시트를 뒤집어 쓰고 느린 걸음으로 관객을 이끌면서, 세상을, 우주를, 시간을, 공간을, 존재의 속성을, 그리고 유령을 우리가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설정했던 모든 경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존재와 존재가 남긴 흔적들이 얼키고 설켜서 만들어진 <고스트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 대사, 빈틈없이 직조된 플롯, 세심하게 구성한 이미지 등에 의지하지 않고, 한때는 누군가 혹은 무엇이었던 존재가 남긴 은은한 잔향과 조심스런 공기의 울림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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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꿨던 반란...’커닝’ 스릴러 온다[각주:1]


 

권오윤[각주:2]



       끊임없는 시험의 연속인 학창 시절에 ‘커닝’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만큼 흔한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좀 덜했지만, 입시 부담이 높아지는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심지어 대학에서도 크고 작은 부정행위 시도는 늘 있었습니다.

       유형도 다양합니다. 남의 답안지를 무단으로 훔쳐보는 것부터 처음부터 여럿이 짜고 공부 잘 하는 친구의 답안을 공유하기로 하거나, 자기만 아는 곳에 공부한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놓기도 합니다. 남의 답을 그대로 베꼈다가 탈이 나는 경우도 있고, 좀 더 머리를 굴려 적절히 알아서 다르게 적거나 그냥 자기 풀이에 참고하는 정도로만 쓰기도 하지요.

       <배드 지니어스>는 바로 이 ‘커닝’을 소재로 한 스릴러입니다. 방콕의 명문 고등학교로 전학한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은 같은 반의 바로 뒷번호 학생인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와 친해집니다.

       그런데, 연기자를 꿈꾸는 그레이스는 일정 성적 이상을 받지 못하면 연극반 공연을 할 수 없다는 규정에 걸릴까 봐 고민입니다. 린은 그레이스가 제일 어려워하는 수학을 따로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막상 시험 시간이 되자 그레이스는 전혀 답안을 쓰지 못합니다. 보다 못한 린은 그레이스에게 시험 감독의 눈을 피해 답을 직접 알려 주게 되지요.

       그레이스의 부자 남자 친구 팟(티라돈 수파펀핀요)은 이 소식을 듣고 린에게 접근합니다. 자기에게도 답을 알려 주면 과목당 3천 밧(우리 돈으로 약 10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죠. 팟뿐만 아니라 다른 급우 몇 명도 똑같은 조건을 제시하며 답을 요구합니다. 린은 고민 끝에 본격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기로 하고, 완벽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사진 저작권자: (주)팝엔터테인먼트


흥미진진한 '커닝' 스릴러


       불법 행위를 모의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서스펜스와 스릴에 집중한, 전형적인 케이퍼물의 공식에 충실한 영화입니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블랙 유머, 서스펜스 넘치는 장면들이 돋보입니다. 그런데도 범죄극의 필수인 피와 죽음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순전히 돈으로 좋은 성적을 사려는 금수저의 욕망, 실력은 있어도 돈이 부족한 흙수저의 처지, 기발한 커닝 기법이 맞물리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은 감독 나타우트 폰피리야는 2012년에 <카운트다운>이란 데뷔작을 내놓은 신예로서, 5년 만에 두 번째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잘 짜인 샷 구성과 감각적인 편집을 통해 탄탄한 연출력을 보여주는데, 특히 인물의 심리 상태를 과장하고 영화 속 시간을 늘려서 서스펜스를 창출하는 실력이 발군입니다.

      무조건 높은 성적과 좋은 대학만을 원하는 과도한 교육열, 뭐든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극심한 빈부 격차가 동시에 존재하는 태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포착해낸 것도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태국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가 경제 성장 과정에서 겪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배드 지니어스>가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서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휩쓸었던 데에는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가 친숙하게 느껴진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극 중 린 역할을 맡은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을 비롯한 태국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편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미숙한 구석은 있지만, 자기 이익이 걸리면 어른 이상으로 영악해지는 중심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잘 살려내었습니다. 린의 아버지 역할로 출연한, 태국의 유명 록 뮤지션 타네 와라카누크로 역시 진솔하고 안정감 있는 연기로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합니다(그는 올해 BIFF 상영작이자, 선댄스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싱가포르 영화 <뽀빠이>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습니다).


부정행위 이면에 도사린 사회의 책임


       어떤 경우든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단 꼼수로 좋은 성적을 받겠다는 계획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반칙 행위를 저지른 학생들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굳이 이렇게 남을 속여 가며 점수에 연연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시험 점수로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고 미래까지 결정해 버리는 사회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요 인물들이 그토록 부정행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학벌과 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 자식의 진짜 능력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시험 점수와 좋은 학교 입학 여부에만 관심 있는 부모는 모두 이들의 공범입니다.

       또한, 부조리한 기성세대의 행태도 이들의 윤리 의식을 흐릿하게 하는 데 한몫합니다. 영화에서 모범생 린이 커닝 사업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학교가 학부모들로부터 추가로 운영비를 뜯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불법을 저지르는 학교를 속이고 돈을 버는 행위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젊은 세대나 청소년의 비행을 언론 보도로 접하면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은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요즘 애들 참 문제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며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죠. 하지만 그렇게 모른 척, 아무 상관도 없는 척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에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회를 만든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니까요.

       젊은 세대의 악행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먼저 돌아보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고 힘든 부분이 있다면 곁에서 도와줄 수도 있어야겠지요. 이것이 바로 <배드 지니어스>에서 린의 아버지가 내린 결정이자, 이 영화가 제시하는 현명한 대안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11월 3일자 기사 <그시절 누구나 한번쯤 꿈꿨던 반란... ‘커닝' 스릴러 온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73707)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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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믿는 것이 인간의 길 

< 블레이드 러너 2049 (드니 빌뇌브, 2017)>




이희승*



  1982년 개봉했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19>는 ‘저주받은 명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극장판, 감독판, 최종판을 거듭 내놓으며 한 세대의 미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성비가 내리는 로스엔젤레스 시내.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암울한 도시 전경을 더욱 음산하게 비추는 네온 불빛.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무덤같은 건물들. 미국과 소련이 양분한 세계가 냉전시대의 논리 아래 안정된 듯 보이던 1980년 초반, 스콧 감독이 스크린 위에 정교하게 빚어낸 미래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시간이라기보다는, 환경오염으로 벼랑끝에 내몰린 생존과 기술의 발달로 극대화된 기형적 쾌락 사이를 오가는 죽음의 시간에 가까워 보입니다. 극도로 자동화된 세상에서 노동의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자발적으로 운동성을 잃어버린 인류. 그 인류를 대체하는 복제인간들이 인간이라는 종(種)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세상. 2019년이 2년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돌아 보면, 35년전 아날로그 기술로만 만들어진 이 SF영화가 제시하는 미래상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그럴싸한 이름표를 붙이고 이윤의 극대화라는 일관된 목표를 위해 쉼없이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가히 선구자적 비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1982년 원작은 질문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과학기술의 발달은 바로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던집니다. 복제인간 ‘로이(룻거 하우어)’는 인간보다 더 나은 능력을 지니고, 경험과 기억을 통해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지만 이미 프로그램된 4년이라는 수명으로 철저히 제한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품고 지구로 잠입합니다. 신모델 넥서스-6를 개발한 타이렐 박사를 만나지만, 로이가 창조주 혹은 아버지라고 여겼던 타이렐 박사와 개발자들은 더이상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이 의식있는 존재에 대한 질문과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재주많은 미숙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죠. 말할 수 없는 무상함에 괴로워하며, 자신을 제거하러 온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던 로이는 건물꼭대기에 매달려 위태로운 데커드의 목숨을 구하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리고 주어진 수명을 마감합니다. 의식과 생명력을 지닌 복제인간을 자신들의 장난감인양 취급하고, 쓸모를 다하면 무자비하게 제거해 버리는 인간들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영웅적이기까지 한 로이의 죽음은 비가 눈물처럼 흐르고 시퍼런 새벽빛이 빗줄기 사이로 떠오르는 영화의 결말에서 데커드와 관객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듯 합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리들리 스콧 감독은 개정판을 거듭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그을린 사랑>, <시카리오>, <컨텍트> 로 한창 연출력을 인정받고 있는 캐나다 출신의 드니 빌뇌브 감독과 손을 잡고 <블레이드 러너 2049>를 기획합니다. 젊은 감독의 비전을 존중하면서도 제작자로써 지원을 아끼지 않은 스콧 감독의 노력에, 원작의 과중한 무게나 장르적 요구에 매이지 않으려는 빌뇌브 감독의 고뇌가 더해져 만들어진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더이상 재갈을 물릴 수 없는 기술만능주의의 폭주에 대항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로 미래를 맞아야 하는가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압도적인 카메라 워크의 공중쇼트로 미래도시의 전경을 스크린 가득 채운 원작의 출발과는 달리 희뿌연 하늘아래 보이는 살풍경한 도시외곽을 훑어 지나갑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유전자 합성작물 농장을 지나, 어느 농가에 내려 앉은 경찰 비행선에서 내린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은 간신히 와이어로 여기저기를 지탱해 놓은 죽은 고목 옆을 지나 아무도 없는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곳은 30년전에 뿔뿔이 흩어진, 수명기한이 없는 복제인간 넥서스-8 중 하나가 숨어 사는 곳이지요. 농장에서 일하고 집안으로 돌아온 초로의 리플리칸트 새퍼는 K를 발견하고 자신의 운명을 직감합니다. ‘제거’되기 직전, 그는 K에게 묻습니다. 동족을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로 사는게 어떠냐고. 그리고는 너는 기적을 체험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노예같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노라고… 이 뜬금없는 퍼즐 조각은 순종형 복제인간이자 맡은 일을 성실히 잘하는 ‘착한’ 블레이드 러너인 K의 뇌회로에 불길한 바이러스를 심어 놓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과 유사한 존재들을 생산, 폐기하는 것이 일상인 이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적’의 존재에 혼란스러워진 K의 내면을 반영하듯, 영화는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을 이윤과 편리, 그리고 찰나의 쾌락을 위해 헌신짝처럼 버린 2049년에도 꿈꿀 수 있는 기적을 형상화됩니다. 어려운 임무 수행으로 받은 보너스로 K는 가상애인인 홀로그램 ‘조이’ (아나 디 아르마스)에게 휴대용 홀로그램 장치를 선물합니다. K 의 배려로 바깥 세상 구경을 하게된 이 아름다운 홀로그램 애인은, 내리는 빗방울을 전자파장으로 느끼며 디지털 신호로 구성된 자신의 존재를 넘어서서 세상과 조우하는 흥분과 경이를 고스란히 기억으로 저장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K 또한 30년전 데커드와 함께 사라진 레이첼(숀 영)이라는 복제인간이 임신과 출산을 했었다는 단서를 찾아내 추적하는 동안, 자신이 유전공학적으로 대량생산된 보통의 복제인간과는 달리, 부모의 사랑을 통해 탄생한 기적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제 그는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될 수 없었던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합니다. 이 기적과도 같은 체험을 통해 K는 제도와 시대에 순응하던 조용한 일상을 송두리채 내던져 버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위험한 여정을 시작하죠.


    도주하는 복제인간을 제거하는 임무 수행을 위해 생명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죽음의 평야를 자동비행모드로 가로지르며, 눈을 감고 졸던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한 복제인간 블레이드 러너 K는 이제 상상하지도 못했던 모험, 목숨을 위협하는 고난, 유일성 (singularity)라는 인간 정체성의 핵심을 공유하는 존재이고픈 강렬한 욕망,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상실의 고통, 환상과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절망,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의 허무, 그리고 그 속에서도 자아의 영역을 초월한 어떤 결단을 해야 하는 윤리적 체험을 차례로 통과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K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소복히 내리는 눈송이를 향해 손을 뻗습니다. 마치 자신을 사랑했던 홀로그램 조이가 처음 빗줄기에 손을 내밀던 그 순간을 기억하려는 듯 말이죠. 자신이 사랑과 소망을 통해 탄생한 기적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믿음으로, 확신으로 바꿔 주었던 조이. 그녀와 함께 뛰어든 혁명같은 삶의 소용돌이에 모든 것을 내던진 후에야 찾아온 휴식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K는 기적을 믿는 것만이 기적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그토록 찾던 인간의 길임을, 그리고 기적의 체험을 통해 또다른 기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 2049>는 35년전 원작의 결말이 그러했듯,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라는 어려운 질문을 다시한번 꺼내 놓고 끝을 맺습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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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가부장제의 역설,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각주:1]


 

권오윤[각주:2]



       전쟁은 모든 것을 망칩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며, 인류가 성취한 경제적 번영은 잿더미로 변하고, 사회 문화적 자산은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겨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요.

       이 영화 <프란츠>는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의 어느 마을,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은 안나(폴라 비어)는 그의 부모와 함께 살며 날마다 무덤을 돌보고 있습니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나는 아직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는 프란츠의 무덤가에 서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프랑스 청년 아드리앙(피에르 니네이)을 보고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심지어 그는 저녁 무렵에 우수에 젖은 얼굴로 집까지 찾아와 프란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요. 안나는 아드리앙이 프란츠가 프랑스 유학 시절 사귀었던 친구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안나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아드리앙은 이후로도 여러 번 집을 찾아 프란츠에 대한 추억을 들려 줍니다. 프란츠의 부모와 안나는 예의 바르고 섬세한 아드리앙에게 금세 매료됩니다. 안나는 프란츠 부모의 배려로 아드리앙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자주 가지면서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도 하지요. 그러나 아드리앙으로부터 그동안 숨겨 왔던 진실에 대해 듣게 되고, 감정적으로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할리우드 고전의 리메이크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독일 출신 명감독 에른스트 루비치가 만든 <내가 죽인 남자>(Broken Lullaby)(1932)를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리메이크힌 영화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남성의 죄책감에 초점을 맞춘 원작과는 달리, 안나의 감정에 집중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 로케이션, 촬영 이렇게 세 가지에 공을 들여 담백하게 표현한 점이 돋보입니다. 프랑수아 오종 하면 재기발랄한 내러티브 구성과 도발적인 문제 의식 같은 것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형식상 매우 고전적입니다. 그림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배우의 자연스런 연기를 이끌어 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담는, 영화 제작에서 기본이 되는 것들에 충실합니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신중히 계획된 인물 샷들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앵글과 샷의 크기, 초점 이동 등을 세심하게 조절하여 화면에서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도록 하지요. 극의 구성상 중요한 장면들은 물론이고, 무덤가에 서 있거나 기차역에서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등 언뜻 평범해 보이는 순간들까지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곤 하는 것은 모두 그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 장면의 흑백 화면에서 꿈 같은 시간을 의미하는 컬러 화면으로 바뀌는 순간들, 아드리앙이 프란츠의 가족 앞에서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20번의 애수어린 멜로디 등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킵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사한 연인의 친구에게 끌리는 안나의 마음에 집중하며 서서히 절정에 다다릅니다.

       안나 역을 맡은 독일 여배우 폴라 비어는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선 굵은 연기를 보여 주며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섬세한 감정 표현보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와 드러낼 때의 극적인 차이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입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2016년 베니스 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의 비극 초래한 가부장제, 그것을 뒤엎는 역설


       이 영화는 전쟁이 초래한 비극에 가부장제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을 적시합니다. 극 중 프란츠의 아버지가 후회하듯,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은 조국의 영광을 앞세운 아버지들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의 희생양입니다. 약혼자의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장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권유받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극 중 안나가 겪게 되는 일들은 가부장제의 미몽과 억압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독일 마을에서 벗어나 파리와 프랑스 시골 저택까지 간 끝에,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만이 행복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안나의 각성은 두 가지 역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안나를 중심으로 오가는 거짓말들입니다. 프란츠나 아드리앙은 안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 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녀를 가부장적 질서 안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안나는 이것을 프란츠의 부모에게 고스란히 돌려 줍니다. 그들의 낭만적 환상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신이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내지요. 한 때는 그녀를 옭아맸던 허구의 이야기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나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보게 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자살>입니다. 살롱 전시에 선정되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한 화가를 적나라하게 그린 이 그림은 생생한 죽음의 현장을 담고 있지만, 안나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스토리가 안나의 애초 바람대로 흘러갔더라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것입니다.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낭만적인 연애담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감독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안나는 좌절을 겪은 끝에야 진정한 희망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절망의 끝에는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며 그것을 붙잡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영화 <프란츠>의 미덕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7월 30일자 기사 <전쟁과 가부장제의 상처, 그것을 치유하는 인생의 역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4653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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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 해야만 하는 일에 관한 우리의 입장 

< 택시운전사 (장훈, 2017)>




이희승*



  영화라는 매체 혹은 예술형식의 탄생부터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영화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은 숙명처럼 영화의 역사 그 자체와 궤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란 ‘과거’ – 그것이 역사적 과거를 복기하는 드라마적 구조이든, 카메라 앞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액션이 스크린 위에서 현재화된 환시라는 매체적 구조이든 – 를 현재의 시점으로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역사에 대한 주관적 기록 혹은 과거를 기억하고 소통하는 통로를 제공하는 것이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 중 하나라는 점도 영화가 역사를 재현하고 현재화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과정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나라 영화사도 이런 영화의 근원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과 <평양성> 처럼 삼국시대를 배경으로한 슬랩스틱 코메디, 유하 감독의 <쌍화점>이 보여 주는 성리학이 도달하기 전 고려시대 상류층의 섹슈얼리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수한 역사 드라마들, 일제 강점기를 살아 낸 한국인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다양한 영화적 시도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처럼 군사독재와 개발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발묶인 한국의 현대사가 빚어낸 비극적 인간상을 직시하는 영화 등, 수많은 한국 영화들이 역사와 영화라는 두 축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 나름의 좌표를 찍어 왔습니다. 올해 화제몰이를 하며 개봉한 두 영화,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는 이런 맥락에서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네요. 결코 밝지 않은, 회한과 수치심 그리고 분노가 마구 뒤엉킨 시대를 돌아 보는 우리의 입장에 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이 거의 동시에 개봉한 두 영화에 대한 평가를 분분하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최근 한국 영화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에 대한 소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저에게, 일본 문화사를 가르치고 있는 일본인 동료가 자신이 논문지도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인 한국 학생과 함께 뉴질랜드에서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를 함께 보자는 제안을 해 온 일이 있습니다. 영화 관람 후, 셋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참으로 오묘한 조합이었습니다. 그후 며칠 간격으로, 정확히 같은 세대로 같은 시대를 통과한 동갑내기 남편,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사춘기 딸아이와 함께 <택시운전사>를 보러 갔지요. 두 눈이 벌겋게 되어 영화관을 나오는 엄마 아빠를 올려다 보던 딸아이의 표정 또한 형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경험에 관한 정리된 생각을 전달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역사가 만나서 만들내는 공간이 결코 어떤 시제, 시점, 시선에 갇힐 수 없는 다면체적 경험을 유발한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네요.


  5월의 광주를 영화화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전두환 - 노태우 정권의 삼엄한 통제, 민주화이후에도 터부시되어온 소재에 대해 상업영화 제작사들이 느끼는 부담감, 왜곡된 보도를 통해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광주민주화 운동을 기억하는 관객들의 혼재 등의 이유로, 아직도 5.18은 다루기 어려운 영화적 소재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처 깊은 과거사가 늘 그렇듯, ‘80년 5월 광주’를 스크린에 담는다는 것은 창작과 기록이라는 두개의 서로 다른, 심지어 배척되는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민해야 하는 과정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예상되는 불이익, 상업적 비평적 불확실성, 그리고 불투명한 역사기록 등등에도 불구하고 – 80년 5월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광주 사람들은 어떤 비극을 견뎌내야 했는가, 이 비극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적 답변을 시도하는 일은, 주관적 사고를 통한 수단적 접근이나 어떤 선행적 목표에도 의존하지 않는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절대명령(absolute maxim)은 광주의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스토리의 외적 공간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택시운전사>는 이런 절대명령에 반응하는 자각한 시민으로써의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일본에서 근무하고 있던 독일의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토마스 크레취만)은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옵니다. 영화의 초반은 환상적인 근무지인 일본에서 안온한 일상을 보내는 서양의 외신 기자들과 쾌적한 환경이 결국 언론인에게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하는 위르겐 힌츠페터를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일본을 떠날 때도, 그리고 다시 한국을 가까스로 빠져 나가 일본으로 돌아 가는 후반부 장면에서도, 그는 언론인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나 거대하고 초월적인 시대정신의 환상에 젖기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임박한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람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직업적 윤리 안에서 충실하게 이행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영화의 제목 <택시운전사>는 이 영화가 가진 옳은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같습니다. 의인 ‘김사복 혹은 김만섭’이 아닌 <택시운전사> 김만섭이라는 주인공은 옳은 일, 해야만 하는 일에 맞닥뜨린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선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관한,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선을 담지하고 있지요. 영화의 중반부에 김만섭이 순천에서 딸아이에게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 하는 사정을 전화로 설명하는 대사도 이런 해석을 확인해줍니다.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역사의 변곡점에 존재하는 비극들의 원인과 극복도 바로 이 정언명령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정희 암살 이후, 신군부는 정언명령에 배치되는 가언 명령에 충실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즉, ‘당연히’ 국민을 위한 최선을 추구해야 하는 국가 권력을, 야심에 눈먼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독점하고 국가의 방향을 자신들의 사적, 정치적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버리고 만 것이지요. 앞선 18년간의 군부독재의 결과로 엄청난 강도의 국가 권력이 일부 세력의 손에 좌지우지될 수 있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집중되어 있던 상황에서, 잘못된 국가 권력의 사용은 무고한 시민을 향한 어마어마한 폭력이 되고, 언론 장악으로 인해 초법적인 국가 권력의 폭력행사는 정당화되고 일상화되어 버립니다. 아직도 광주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이런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영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조우하는 우리 모두의 ‘지금’은, 이런 중첩된 역사적 과오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시나리오인 ‘북에서 내려운 간첩과 용공세력이 힘을 모은 광주 사태’라는 왜곡된 역사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현재진행형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택시운전사>는 이런 역사적 현상이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을때, 개인은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벗어난 초월적인 시선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라볼 능력이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위르겐도, 김만섭도, 그리고 위르겐과 김만섭을 사력을 다해 쫓는 사복경찰들도 ‘이게 도대체 다 무슨 난리인지’ 알지 못한채 80년 5월 광주로 흘러 들어 오게 됩니다. 이때, 영화의 주된 관점이 외부인의 시선과 동일시된다는 설정은 아직도 한국현대사가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비극을 겪은 내부자들의 시선과 합일되지 못한 채, 신군부의 ‘빨갱이들이 주도한 광주사태’라는 날조된 시나리오와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충돌을 통해 아주 천천히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는 과정 속에 있음을, 그 뿌리깊은 현대사 인식의 한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 <택시운전사>가 광주 택시가 아닌 ‘서울 택시’의 시선으로 5월의 광주를 통과하는 구조를 선택한 점은, 개인의 시점과 이해는 언제나 역사의 흐름에 대해 외부자로 존재한다는 근본적인 한계와 함께, 권력에 의한 의도적인 역사 왜곡으로 인해 발생한 한국 현대사의 문제점을 묶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한 대로 <택시운전사>는 다소 안일한 감상적인 접근이나 상업영화로써의 역할에 과도하게 몰입한 듯한 작위적인 설정들이 가지는 한계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가 가능하게 한 <택시운전사>의 정점은 간과하기 어려운 영화적 힘을 발휘합니다. 순천의 한 식당에서, 바로 옆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권력의 폭력에 대해 너무나 일상적이지만 치명적인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허겁지겁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있던 김만섭은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됩니다. <택시운전사>는 송강호의 연기를 통해, 일상화된 폭력의 진짜 얼굴을 목격하고도 그대로 눈을 감는 ‘보통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예상 가능한 모든 위험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두고온 손님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무조건적 명령에 반응하는 자각한 시민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의 고뇌를 정직하게 전달합니다. 온몸이 벌벌 떨리는 고뇌 끝에 택시를 돌려 다시 광주로 향하는 김만섭(송강호)의 얼굴을 정면에서 잡은 클로즈업은, 어떤 도덕적 기준이나 합리적 분석도 정언명령 앞에 선 개인을 도울 수 없음을 절절하게 표현합니다. 오로지 정언명령에 반응하는 윤리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을 행동으로 발현하는 용기와 결단은 평범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에 참여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도 말이죠. 저에게도 <택시운전사>의 클라이맥스는, 역사의 외부자에서 역사의 주체로 전위하는 그 순간의 고뇌와 희열을 경험한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시민사회가 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꽃잎>,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26년>, 그리고 <택시운전사>를 통해 80년 5월의 광주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는 이제 시작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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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팩트가 전하는 진실한 감동, 그야말로 ‘독보적’ [각주:1]


 

권오윤[각주:2]



       흔히 역사학의 의의는 과거의 일을 되돌아봄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갖고 영화를 만들 때도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일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거나 이야기의 밑 재료로만 활용하고 말아 버린다면, 역사적 사실에 관한 영화를 찍는 의의가 없는 것 아닐까요?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는 것은 힘들다 하더라도, 최소한 오늘날의 현실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은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영화 <박열>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황태자 암살 계획 모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한국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박열(이제훈)은 3.1운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 인력거꾼 등의 막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및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아나키스트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합니다.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호감을 느낀 일본인 동료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제의로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동거를 시작하기도 하죠.

       그런데 도쿄와 요코하마 일원을 강타한 간토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엄청난 피해로 인해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괴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시민들의 분노를 돌리려 합니다. 일본인들은 자경단 등을 결성하여 무려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외국인이 발음하기 힘든 '十五円五十錢'(15엔 50전)을 시켜 보고 이걸 제대로 못 하면 바로 죽여 버리는 식이었죠.

       이런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자,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대책을 세우려 합니다. 이때 주목받은 것이 바로 박열과 그의 동료들의 황태자 암살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폭탄 확보를 하지 못해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지만, 박열과 후미코를 '대역죄인'으로 몰아 국론을 결집하기엔 아주 좋은 재료였지요.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


       당시는 일본이 3.1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후 악화한 국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것을 시도했던 때입니다. 국제 사회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자기네가 대역 죄인에게도 공정한 법적 절차를 보장할 정도로 문명국이라는 점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박열은 이런 상황을 역이용하여, 재판 과정을 3.1운동과 간토 대학살의 진상을 세계만방에 알릴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영화는 이런 부분을 명확히 짚어 나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박열이 심문 도중에 일갈하듯, 일본이 만약 진정한 문명국이라면 식민 지배 자체를 말았어야 했습니다. 섣부른 유화책으로 여론을 호도하려 들지 말고요.

       이것은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비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 일본 정부의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미 아시아를 벗어났다고 속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겠지만, 여전히 그들의 정부는 간토 대학살은 물론 위안부 문제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아직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제국주의 일본이 보여 준 여론 통제 및 정치 권력의 부당한 재판 개입은 지난 박근혜 정부의 전횡을 곧바로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정당성을 잃은 권위가 억지로 그것을 유지하려고 할 때의 행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똑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훈은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특유의 아우라를 내뿜으며, 자유롭고 편하게 청년 박열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장난기와 결연한 의지를 번갈아 보여 주는 악동 박열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파수꾼>으로 처음 주목받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후미코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최희서는 이 영화의 진정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키스트 여성 활동가로서의 기백과 애인으로서의 사랑스러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후미코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인물로 만들었으니까요. 감독의 전작 <동주>가 송몽규의 영화이기도 하듯, 이 영화는 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동지적 연대에 기반을 둔 그녀의 강한 의지와 사랑은 박열의 투쟁을 밝힌 횃불이었고 굳건한 지지 기반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간악함을 대표하는 인물인,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역할을 맡은 김인우 역시 이번 영화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재일교포 3세 출신인 그는 <암살>, <동주> 등의 영화에서 최근 몇 년간 일본인 배역 전문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준 바 있지요.


감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역사적인 인물을 다루는 전기 영화로서 <박열>이 뛰어난 점은, 섣불리 감정을 자극하려 들지 않고 관객에게 인물이 처한 상황을 다각도로 따져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주요 인물들이 느꼈을 법한 진짜 감정과 딜레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존의 한국 역사물들과 이 영화가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그동안 객관적인 역사적 상황을 보여 주기보다는, 실존 인물이 느꼈을 법한 가상의 감정을 작가나 감독이 추정하여 극화한 영화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 장면은 대부분 사족이거나, 너무 단순해서 신파조로 느껴지곤 했지요. 최고 흥행기록을 가진 <명량>부터 몇 주 전에 개봉했던 <대립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가 공통으로 가진 약점이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인 <사도>나 <동주>도 이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특히 절정 부분이나 결말에 다가갈수록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그런 장면들이 생각만큼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인물 그 자체보다는, 인물에 대한 감독과 각본가의 해석이 더 중요했던 영화들이기도 했고요.

       그에 비하면 <박열>은 인물과 역사적 상황을 앞세우고 감독이 한발 물러서는 쪽이라서, 관객은 이 세기의 아나키스트 커플에게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기백과 의지, 동지로서의 연대,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동료들의 마음 같은 것들을 하나씩 가슴에 품어 가면서요. 바로 그런 것들이, 미끈하게 잘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진심을 담고 있는 이 영화가 건네는 소중한 선물일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6월 30일자 기사 <역사적 팩트가 전하는 진실한 감동, 그야말로 ‘독보적’>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38271) 으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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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파국에 이르는 소소한 균열

<세일즈맨 (아쉬가르 파르하디, 2016)> 




이희승*



  2017년 1월, 막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가 이란을 포함한 이슬람 7개국 국민의 입국 및 비자 발급을 금지하는 반이민 행정명령조치를 발표해서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마치 세상을 “그들”과 “우리”라는 이름으로 두동강 내려는 듯 말입니다. 제 89회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이란출신의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 역시 입국 금지 대상자에 포함되었죠.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아카데미 참석을 공개적으로 보이콧했지만, 그의 영화 <세일즈맨>은 오스카를 거머쥠으로써 오히려 트럼프가 정권 초기 야심차게 시도한 반이슬람 정책의 야만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파르하디 감독의 수상이 반트럼프적 정서를 가진 헐리우드의 정치적 계산이라는 해석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세일즈맨>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2011)> 이라는 작품으로 이미 아카데미의 영광을 누린 바 있는 파르하디 감독의 명성에 걸맞은 수작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세일즈맨>은, 연극 연출을 전공한 파르하디 감독의 예술적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연극무대와 그 연극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일상을 교묘히 엮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다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에 관하여(2009)>,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그리고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2013)> 등의 전작에서 보여준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익숙한 인물들과 꾸밈없이 평범한 대화를 비범하고 독창적인 영화적 구성 속에 담아냄으로써, 가장 일상적인 순간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섬뜩한 인간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이란 영화라 하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담담하고 동화적인 영화를 기대했던 저이기에, 파르하디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나서 느낀 서늘함은 쉽게 떨쳐 버리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란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공간이 갖는 의미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적 환경과 개인적 욕망, 그리고 이 두 인위적 요소를 지배하는 듯한 시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제가 겹쳐져 만들어내는 비극적 운명의 보편성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들은 소소한 일상의 균열들이 빚어내는 현대의 비극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네요.


  <세일즈맨>의 첫 장면에서 공연을 준비 중인 텅빈 연극 무대를 정적인 몽타주로 잡아내면서, 파르하디 감독은 이 영화가 캐릭터의 개별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의 운명이 만들어지고 결정되어지는 공간에 더 관심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잠시 암전이 있은 후, 소란스러운 소음이 어수선한 분위기로 장면을 전환하면서, 영화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라나와 에마드가 사는 아파트 내부로 관객을 안내합니다. 전쟁이라도 난 듯, 한밤중에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채 다급히 아파트를 빠져 나가느라 아우성입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아파트 유리창에 불길한 균열이 생기자, 카메라는 갈라지는 유리창 너머를 응시합니다. 긴박하게 대피를 해야 할 만큼 위태롭게 금이 가기 시작한 아파트 건물 바로 옆에서는, 늦은 시각까지 불을 밝히고 건물 기초 공사가 한창인 불도저가 바삐 땅을 파내고 있지요. 그러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건설과 붕괴가 한덩어리가 된 채, 사람들을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일순간 거리로 몰아내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이란의 실상을 꼬집습니다. 불도저식 개발, 그리고 사람과 환경보다는 투자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재개발로 얼룩진 도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말없는’ 카메라의 응시 속에 담긴 원망과 후회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시에 폐허로 변해버린 아파트에 짐을 챙기려고 돌아온 라나와 에마드의 분주한 모습 사이로, 집주인들의 예술적 기질과 지적인 취향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단정했던 보금자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마드는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인기있는 젊은 선생님이자 극단 활동을 하는 연극인이고, 라나는 그의 부인이자 예술적 동지입니다. 극단에서 준비하고 있는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둘은 주인공 부부인 윌리와 린다를 맡아 연기하죠. 살던 집을 잃은 라나와 에마드에게 같은 극단에서 연극을 하는 바박이 자신이 소유한 옥탑방을 빌려 줍니다. 몹시 낡고 좁지만 달리 대책이 없던 젊은 부부는 곧장 이사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전에 살던 세입자가 작은방에 짐을 잔뜩 쌓아 놓은 채로 이삿날에 나타나지 않자, 집주인인 바박은 무자비하게 방문을 뜯고서 찾아 가지 않은 그녀의 짐들을 집밖에 내놓기로 합니다. 라나와 에마드는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에 손을 대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속히 짐정리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바박을 말리지 않고 방관합니다. 그리고 그 밤, 허락도 없이 집 밖으로 버려진 이전 세입자의 짐은 세차게 퍼붓는 비에 속수무책 젖어버리죠.


    불운의 시작은 이 영화가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소멸과 생성이 자연스럽게 순환고리를 만들어야 하는, 옛 것과 새 것, 혹은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자리바꿈을 해야 하는 운명의 접점. 크고 작은 인간의 탐욕이 그 접점에 끼어 들어 원치 않는 운명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지점말입니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얻기에 급급한 성마른 자본주의적 선택으로 인해 건설과 붕괴, 건축과 재건축이 마구 뒤엉킨 그 공간 안에서 사람들 또한 서로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무심히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맙니다. 이사 다음날, 공연을 마치고 홀로 집에 돌아온 라나는 이전 세입자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 남겨 놓은 흔적을 부지런히 지워 버립니다. 여러 남자들과 수시로 관계를 맺었던 이전 세입자의 고객 중 한사람은, 다음 세입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못한 ‘그녀’의 물건들과 아직 깨끗이 비워지지 않은 공간에 밀고 들어온 라나와 에마드가 어색하게 공존하는 아파트를 불쑥 찾습니다. 그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던 라나를, 전부터 자신이 찾았던 ‘그녀’인줄로만 알고 범하려다가 크게 부상을 입히고 황급히 사라지죠.. 


    이웃들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 두려움과 수치심에 사로잡힌 라나와, 아내의 상처보다는 괴한의 공격에 정신을 잃은 라나가 벌거 벗은 채 욕실에서 피흘리는 모습을 이웃에게 보인 것 때문에 더욱 괴로운 에마드는 이제 더이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지각없는 난상 개발이 아파트 벽에 만들어 놓은 균열은 이 부부 사이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 놓은 듯 합니다. 따뜻한 시선을 주고 받던 둘은 이제 서로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합니다. 둘 사이의 명랑하고 지적인 대화는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비난으로 변하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을 아내를 소리없이 원망하고 각자 자신을 분노와 절망 속에 고립시키고 가두어 버립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에마드는 당황한 범인이 흘리고 간 단서를 가지고 범인 찾기에 집착하고, 그런 에마드를 지켜 보는 라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두 주연배우의 거듭되는 실수로 공연은 엉망이 되어 가고, 이제 연극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 윌리의 고독과 소외, 그리고 때이른 죽음이 아니라, 느닷없이 닥친 불행에 몸부림치는 라나와 에마드를 위한 무대가 된 듯합니다. 파르하디의 영화는 첫 장면에서 암시한 것처럼 두 개의 세계가 성급히 하나로 모아지는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비극을 세밀한 필체로 그려냅니다. 무대위의 비극과 무대 밖의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담아 내는 감독의 치밀함은, 거듭된 난개발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이 곳곳에 균열이 드러난 이란의 도시 풍경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야기가 중간 지점에 도달할 즈음, 연극 출연을 잠시 중단한 라나는 극단에서 함께 연극을 하고 있는 이혼녀 사남의 어린 아들을 돌봐 주기로 하고 아파트로 데리고 옵니다. 이 작은 아이는 라나가 내동댕이친 이전 세입자의 이삿짐 사이를 헤집고, 전에 살던 아이가 벽이 그려 놓은 낙서에 정성스레 덧칠을 합니다. 이제 오래되고 잊혀지고 지워져서 창백해진 나무에 진한 초록색을 덧입힙니다. 마치 옛 시간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 버리는데 집착하던 라나와 에마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소멸과 생성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하나의 운명임을 보여 주려는 듯 말입니다. 일상적 이미지에다 독창적인 구성으로 새로움을 불어 넣는 <세일즈맨>은 사소한 균열들이 치명적인 비극을 향해 달려 가는 이야기의 반환점에 벌써 해답을 숨겨 놓은 것 같네요. 어디서 멈추고 숨을 고를지는 개인의 선택으로 남긴 채 말입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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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와 공포의 경계에서 차별을 말하다[각주:1]


 

권오윤[각주:2]



       공포물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프로이트적 개념을 충실히 구현한 장르입니다. 일상에서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것들이 고약한 형태로 나타나 주인공을 위협하지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문명 세계에서 추방됐던 유령이나 괴물이 출현하고, 인간에 대한 공격성과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체화한 살인마가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면, 우리가 그동안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억눌러 온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겟 아웃>은 이러한 공포 영화 특유의 설정을 공유합니다. 흑인 사진작가 크리스 워싱턴(다니엘 칼루야)은 매력적인 백인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엄스)와 사귀고 있습니다. 주말을 맞아 로즈의 가족을 방문하기로 한 크리스에게,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경찰인 로드(릴 렐 하워리)는 백인인 그들이 널 반길 리가 있겠냐면서 농담조로 조심하라고 합니다.

       다행히 로즈의 부모는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적어도 겉으로는 크리스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크리스는 좀처럼 불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가사 일을 돕고는 있지만 괴이하게 행동하는 흑인 하인들과, 예의 바른 태도 속에 차별 의식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로즈의 가족들 때문이지요. 더 껄끄러운 것은 바로 그 주말이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가족 행사 때문에 백인 손님들을 초대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상식과 합리,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아래에 있는 백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의식입니다. 이것은 극이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끝에, 후반부에서 뒤틀리고 일그러진 방식으로 형상화됩니다.

       처음에는 풍자적인 블랙 코미디인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쿨한 척하는 백인이라도 별수 없구나 싶어 쓴웃음을 머금게 되지요. 그러나 뭔가에 홀린 것처럼 행동하는 흑인 하인들과, 로즈네 가족 행사에 참여한 유일한 흑인 손님 앤드류의 모습을 보면 이게 그냥 비웃고 넘길 상황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유발된 궁금증과 왠지 모를 껄끄러움은 로즈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는 후반부까지 극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줍니다.

       로즈 가족의 계획과 그들이 여는 행사의 정체는 '흑인들의 육체적 능력만큼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지적 능력은 별 볼 일 없다'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는 순간, 이제까지 나왔던 모든 장면은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배려와 친절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모두 끔찍한 계획과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니까요.

       영국 출신의 주연 배우 다니엘 칼루야는 크리스가 겪는 다양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코미디와 공포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영화의 전략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모국에서는 주로 TV에서 활동했으나 최근 들어 할리우드 영화에도 진출했습니다. 내년 개봉 예정인 마블의 <블랙 팬서>에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합니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조던 필은 이 작품이 감독 데뷔작이지만, 오랫동안 TV에서 활약해 온 코미디언입니다. SNL과 자주 비교되는 MadTV 출신으로, 동료 키건 마이클 키와 공동 기획하고 함께 출연한 스케치 코미디 프로그램 <키 앤 필>(Key & Peele)로 2016년에 에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보여 준 인종 차별에 대한 풍자적인 묘사를, 공포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이 영화 <겟 아웃>의 매력을 더했습니다.

       미국 흑인의 시점에서 백인의 인종 차별 의식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이 영화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온전히 즐기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미국 대중문화에서 인종 차별을 풍자할 때 사용되는 코드에 익숙하지 않으면, 폭소를 터뜨리기는커녕 약간 냉소적인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지나가기 쉽지요. 그러나 이것을 우리에게도 익숙한 성차별 문제로 바꿔 보면,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꼬집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차별 관련 이슈가 부각되면 많은 남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니 싸잡아 이야기하지 좀 말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성별이나 인종, 혹은 사회 경제적 위치에 있어서 차별당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려는 노력을 따로 하지 않으면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이 아닌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게 별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차별은 일부 극단주의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될 때, 혹시 그것이 자기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만 상식인 것은 아닌지 반드시 돌이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실질적인 노력 없이 자신의 양심과 결백함을 증명하려 하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여 개념적으로만 평등을 주장하면 차별 문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겟 아웃>이란 영화가 풍자적인 코미디와 공포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전하려고 한 메시지입니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5월 22일자 기사 <웃다가 공포에 떨게 되는 영화, 어떤 메시지 담았나>(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27300)로 게재된 원고입니다.” [본문으로]
  2. <발레교습소> <삼거리극장> <화차>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연출 데뷔작을 준비 중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물 [권오윤의 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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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무감한 시대에 던지는 화살  

<피에타 (김기덕, 2012)> 




이희승*



  신기하기만 합니다. 촛불을 들고서 다시는 찾지 않을 줄 알았던 빈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지난 겨울부터 예감은 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절규, 고통 그리고 죽음을 지불하고 겨우 벗어난 줄 알았던 과거의 망령을 소환해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까지 옭아매려 했던 그 세력들이 줄줄이 포승줄이 묶여 심판대로 향할 때, 다시 뒤로 가지는 않으리라 확신을 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지켜본 이번 대선은 승부를 알고도 손에 땀이 나는 경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침 뉴스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네요.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 오르기를 바랬던 많은 이들도 서서히 이 흥분과 기대에 전염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손수 양복 저고리를 벗어내려 놓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거꾸로 향했던 이정표를 바로 돌리려고 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막연하지만 꽤나 단단한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라면 단 한가지. 그가 타인의 고통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고통에 민감함으로 번민하는 지도자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문득, 고통의 교감에 번민하는 외로운 영화감독 김기덕의 <피에타(2012)>가 떠오릅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신기한’ 발명품으로 세상에 첫선 보였던 영화는, 새로운 예술매체로써의 가능성때문에 현대를 함께 열어가던 많은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지요. 활발하고 진보적인 실험과 모험의 대상이었던 영화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불행히도) 개인적 관음의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구조 위에 재조립되어 버렸습니다.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을 잠시라도 잊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와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헐리우드의 상업적 이해가 만나 탄생한 여러 장르 영화들은 스크린에서 재현되는 인간의 갖가지 감정들을 궁극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은 호러 영화의 문법을 통해 말초적 쾌락의 도구로 재활용됩니다. 욕망하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고뇌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좌절은 멜로 영화의 제조 공정을 통과하면서, 삶을 관통하고 변화시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카타르시스보다는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상큼하게 떨쳐버릴 수 있는 소모성 슬픔을 선사하죠. 예술 영화라고 분류되는 영화들조차도 거의 장르화되어버린 엘리트적 주제의식과 시각적 탐미주의을 통해 일부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미학적 쾌락을 제공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해외에서의 평가와는 달리, 국내 비평가나 관객들과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도 이런 도식화된 예술영화로 해석될 만한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특히,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보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여성의 육체를 가학적 유미주의의 재료로 사용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인류의 구원이라는 추상적 주제를 위해 희생한다는 지적을 온전히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을 잠시 뒤로 하고, 열띤 찬반 논쟁의 한가운데 서기 일쑤인 그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고통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영화인 <악어 (1996)>에서부터 그가 직간접적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탄생시킨 거의 모든 영화들은, 어떤 장르적 장치를 통해서도 관음적 쾌락으로 온전히 전환할 수 없는 ‘불편한’ 고통의 경험을 관객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기죠. 단순히 센세이션널리즘이라고 폄하하기에는 긴 세월동안, 그의 작품활동과 평범하지 않은 삶의 여정은 고통이라는 일관된 테마를 고스란히 실재화하는 지난한 과정으로 보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소외계급의 고통을 매개로, 계급화된 문화 엘리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예술영화의 지평을 넓혀 보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보여 줍니다. 마치 그 무게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커다란 붓으로, 아직 제대로 형상화되지도 않았으며 영화예술의 구조적 변화없이는 제대로 형상화될 수도 없을만큼 ‘날것’의 고통을 스크린에 그려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볼때마다, 쾌락을 상품화하는 문화산업에서 고통의 공감을 통해 인류와 문명의 변화를 촉구하는 예술로 영화를 복원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국내외에서 상당한 호평을 끌어낸 영화 <피에타>는 비문명의 수준에 가닿은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이윤추구, 누적된 피로와 고통과 절망을 감당하며 서로를 물어 뜯어야 하는 도시빈민들,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자기 희생과 구원에 대한 물음을 거칠게 던져 놓은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포스터와는 달리, <피에타>의 주인공인 강도(이정진)는 다 허물어진 청계천 골목을 누비며 악덕 사채업자를 위해 채무자들의 사지를 절단해 불구로 만들고는 그 보험금을 가로채는 하이에나같은 존재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남자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이, 태어나서부터 버려진 채 거칠게 자란 강도는 돈을 벌겠다는 욕망보다는 원초적인 폭력에의 본능에 의해 움직입니다. 성적 쾌감을 위해 남이나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새디즘과 메조키즘이라는 발전된 형태의 욕망의 구조를 찾아 볼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잔인성을 표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죠. 느닷없이 어머니를 자청하며 찾아온 미선(조민수)은, 청계천 개발을 핑계로 수십년간 자리잡고 있던 군소업체들이 내쫓기고 황량하게 변한 도심 한복판의 메탈정글에서 홀로 살아 가고 있는 맹수같은 강도를 ‘관계’라는 문명의 첫 단계로 끌어 들이게 됩니다.


    이 묘령의 여인이 자신을 버린 엄마라는 사실에 치를 떠는 강도의 모습은 야수적인 폭력성을 극복하고 문명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내적 외적 고통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미선을 강간함으로써 자궁으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강도는, 수치심과 고통에 휩싸여 신음을 토해내는 미선의 얼굴을 내려다 봅니다. 채무자들의 팔다리를 절단하면서 수없이 본 고통의 장면이었건만, 강도는 미선이 느끼는 고통을 고스란이 교감합니다. 김기덕 감독은 미선의 비명과 절규가 귀를 멍멍하게 하는, 고통이 가득찬 클로즈업을 눈에 띄게 거친 핸드헬드 카메라로 잡아내며 ‘고의적인’ 줌인을 사용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강도의 망설임에 주목하게 합니다. 미선이 느끼는 모욕과 수치심과 고통을, 가해자인 강도와 그 가해의 현장에 비밀스런 공모자로 함께한 카메라가 함께 체험하는 듯합니다. 강간이라는 폭력행위의 영화적 재현에 내포된 가학적, 피학적 쾌락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생생한 고통을 스크린 너머로 전달하는 이 충격적인 장면은, 근친 상간이라는 근원적 욕망의 대리만족을 통한 관습적인 쾌락 추구에 젖은 관객을 향해 찬물을 끼얹습니다. 


    자신을 문명의 경계 안에서 성찰한 적이 없었던 강도는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체험적으로 교감하면서, 그간 채무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했던 자신의 폭력과 그 끔찍한 결과를 하나하나 되짚어 갑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향한 무한한 애정, 그 사람을 잃는 단장의 고통을 통과하면서 강도는 자신이 부지중에 공모했던 자본주의의 야만적 본성을 자각하게 되죠. 어느날, 한 채무자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강도는 묻습니다. “돈이 뭐죠?” 미선은 대답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버린 ‘돈’이 가시 돋힌 그물로 모두를 옭아매고 신음하게 만든 청계천 풍경은 이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이자, 현대문명의 척박함에 김기덕 감독이 들이댄, 필터없는 거울인 것 같습니다. 영화 곳곳에 고스란이 드러나는 청계천의 뒷골목들은 다소 도식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내긴 합니다. 하지만, 최소의 자본(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데 김기덕 감독은 미처 2억원이 안되는 버젯을 사용했다고 하네요)이 최선의 선택을 통해서 탄생시킨 이 암울한 미장센은, 우리가 상승욕구에 몸을 맡기고 최고를 외치는 동안 잔인하게 파괴하고 멸종시킨 주변인들이 화석이 아니라 살아서 고통을 느끼는 인간임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유수의 비평가들은, 이제는 김기덕 감독이 피비린내나는 몸부림과 비명으로 가득한 가학과 피학의 미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허나, 프로이트가 천명했듯이, 고통이란 성적 쾌감을 목표로 주조된 육체의 환상인 새디즘과 메조키즘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능력입니다. 고통은 원초적 폭력성에 대응하고 대항하는 인간 본연의 초월적 방패막이로써, 문명을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예술성 혹은 종교성의 근간이 된다는 해석이지요. ‘고통에 처한 신체’라는 저서에서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은, 당하는 이에게는 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끔찍한 체험이지만, 고통을 진정으로 교감하는 이에게는 고통을 당하는 이의 관점을 체화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세상을 새로이 창조하는 경험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때, 김기덕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처럼, 타인에게 가해진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나의 것으로, 더 나아가 나의 책임으로 끌어 안으려는 예술적 시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문이 살짝 열린 듯한 ‘새로운’ 시대가 많은 이들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교감하려는 수많은 이들의 안간힘으로 탄생했음을 잊지 않기를, 그리하여 진정으로 거듭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에 우리가 서있는 것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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