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서평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정혜윤
(CBS 라디오 프로듀서)


저는 학자나 목회자가 아니라 정말로 소박한, 무지한
신앙인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세례교인이지만 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평소에 이렇게 입에 달고 다닙니다

난 탕자다. 난 집을 떠난 탕자다

정말이지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 탕자가 가출하고 싶어했던 이유를
열배는 더 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집을 나가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는 꽤 성공한 졸부 
부모처럼 굴고 있습니다
그들 말에 따르면
하느님은 하나에서 열까지
지상에 마치 사소한 일에 시시콜콜 간섭이나 하려고 오신 듯합니다

요즘 교회는 남의 성생활에는 관심이 있으면서
교회가 이권 나눠 먹기의 장소가 되고
중산층들만의 배타적인 지리멸렬한 사교 장소가 되는데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큰 건물 짓는데 혈안이 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만을 은총으로 여깁니다

대형 교회들의 타락상은 환멸감을 안겨줍니다.

한국에서 하나님은 이미 혜택 받은 자만을 특별히 사랑하는 분 같습니다
그리고 그 혜택받은 자들이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하고 기만적으로
남한테 진부한 훈계를 늘어놓는 것을 기꺼이 봐주시는 분 같습니다.
저 역시 그것 때문에 몹시 슬픕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목회자들이
삶은 엉망진창으로 꾸려나가면서
구원과 믿음과 사랑을
말하는데 저는 정말로 넌더리가 납니다

예수의 놀라운 약속
하층민들에게 주었던 놀라운 약속이
어떻게
부유층들의 전유물들이 되어갔는지
저는
예수님이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라고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제라도 한국 교회가
키에르케고르식으로 말하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를 구하는데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스스로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사람들은
신이 아니라 자기를 찬양해 왔을 뿐이다.
고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의 교인들입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제 절망감이 컸기 때문인지
저는 예수가 한 개인으로서 누구를 사랑했는지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적어도 그 성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동성애적 사랑을 했으니 동성애는 괜찮은가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솔직히 예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런 절대적 권위를 부여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란 제목을 봤을 때도
예수가 사랑한 인류 정도로 제목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에로스와 아가페란 단어에 대해 제가 처음 들은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 책 108페이지에 보면 이러한 구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아가페로 표현되었다는 사실로부터
특정한 우정 또는 성애적 애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출할 것이다
고 했는데
그게 바로 저입니다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은 동성애적 욕망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사랑이 보다 정신적인 형태로 승화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관계를 맺지 말아야한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로 말해질수 있는 사람이 친밀한 의미에서
특정하게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이로 판명되는 것의 부적합함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책이 열두제자중 혹은 열두제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를 사랑했느냐 추적하는 것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의 성생활에 밝히는 책도 아니고요.
저는 다른 것들을 기쁨속에서 봤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규칙들보다 인간적 행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다. 126페이지

-십자가에 달린 자가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공동체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127페이지

-노예적인 수용과 복종의 태도가 아니라
관습적인 도덕과 생활양식에 대한 훨씬 집요하고 끈질긴 전복이란 것이다

-그는 단적으로 거룩한 사람 예언자 메시아에 관한
어떤 기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벤덤이 말했듯이
인간의 행복과 중요한 진실에 대한 존중
애 관한 글이라고 읽었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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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영준
    2011.10.07 21:3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참으로 감사한 글입니다.
    돌아봐야지요.
    반성해야지요.
    더 없이 더 없이 더 우리가 아닙을 고백해야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내가 하는 즉시 바로 헛짓꺼리를 하닌까요.
    그저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서평

평등과 해방의 관계로 ‘제국’을 해체하는 예수의 새 가족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


저는 성서신학자가 아닙니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며 문서비평이나 양식비평적 차원에서의 공감이나 반문을 제기할 기초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신학적 시각을 가진 기독교사회윤리학자로서, 그러니까 주변자적 시선을 가지고 성서를 읽는 것에 상당히 익숙한 한 지식인 독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었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의 소박한 ‘독후감’을 나눌까 합니다.

1. 식탁 위에 차려진 만찬 즐기기, 예수 전승으로부터의 적극적 독해

예수는 게이였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아주 직접적으로 ‘예수가 게이였다’는 것을 설득하도록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예수가 게이라 해도 그의 메시지 전반의 핵심 내용과 위배됨이 없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가 게이인 것이 주변인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평등하게 바라보려는 그의 선교사역의 수행성으로 더욱 적합하며 그의 전반적인 메시지에 부합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여섯 구절밖에 안 되는 동성애혐오적 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수전승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싸움에 나선 개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리는 바닥에 깔린 몇 개의 부스러기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무시하고, 그 대신 신약성서 서사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만찬에만 집중하는 편”을 선택했다는(414) 제닝스 박사의 말처럼 말이죠.

흑인, 여성, 제3세계 민중의 시각에서 전통적 성서해석에 이의를 제기해온 그 모든 해방신학적 전통과 맥을 같이 하며 제닝스 박사는 이 책의 시도가 “‘완전한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다른 것들의 희생의 대가로 얻는 부분적인 해방은 예수 안에서 약속되고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지평 내에서 해방일 수 없”(19-20)으니까요.

때문에 “오늘날의 게이적 또는 퀴어적 감수성의 관점으로부터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전략”(22)을 택한 이 책은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들을 감싸 안고 긍정하는 많은 증거에 대한 검토에 집중”(23)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제안 받으며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얼른 떠올렸던 전제처럼, 제닝스 박사는 제일 먼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사랑받는 자’에게 주목합니다. “예수의 무릎에 기대어 있고” “예수의 가슴에 등을 기댄 상태로 예수에게 말을 건네는”(49), 그리고 십자가 증인 중 유일한 남자였으며 예수가 죽기 전 자신의 생모 마리아와 그를 가족으로 연결해준 ‘그 남자’ 말입니다. 불트만이 이 사랑받는 자에 대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 즉 후대의 추가로서 이방인 교회의 전형으로 풀이한 것에 반대(79)하며 제닝스 박사는 “예수가 제자들 모두를 사랑하지만,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즉 성애적 의미에서] 이 제자를 사랑했음”을 강조합니다(81). 물론 이 사랑은 예수 사역의 공적 지위에서는 그 어떤 특별함이나 우위를 가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제닝스 박사는 무엇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메시지가 강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성애는 오히려 그 주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당시의 관습적 제도들이 가진 억압성에 반대했던 예수이고 보면 “결혼과 가족적 가치들에 의해 대표되는 관습성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서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동성애적 관계의 암시가 하나의 적절한 수단”(139)일 수도 있겠지요. 제닝스 박사는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예수와 그 제자의 관계가 성적인 표현을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는 가정에 기초할 때 가장 잘 이해”되며, 무엇보다 “텍스트 전체의 전반적인 세계관과 합치한다.”(169-170)고 결론짓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를 모든 면에서 비관습적인 인물로 표상한다. 그의 비관습성 자체가 동시대인들의 신학적-사회적 가정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래서 예수는 경건하고 인격적인 고결함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는 금식, 정결례, 성전 참배와 같은 경건함을 실천하는 예시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성서 해석에 대한 관습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경건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 죄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관습적인 방식들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먹보에 술꾼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오로지 (사회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구성원들인 창녀나 (로마 제국의) 부역자들과 함께 한다. 그는 자신의 의례적 정결함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며, 문둥병자, 시체, 생리중인 여자를 거리낌 없이 만진다.(181)

요한복음의 예수가 “정의와 관용 그리고 기쁨이라는 가치들이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정립하기 위해 관습적인 사회생활의 구조들을 전복시키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면(181)“사회적, 생물학적, 경제적 필요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성애적 관계를, 그래서 이성애적 관계들 역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성애적 관계를 예기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닝스 박사의 주장은, 이성애자인 저에게 그 어떤 거부감도 없는,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2. 예수, ‘게이’이거나 ‘젠더제한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이어지는 II부에서 제닝스 박사는 1-2세기에 유통되었던 ‘비밀의 마가복음’에서 전해지는 ‘부유한 젊은 관원’ 전승과 정경 복음서에 남아있는 ‘백부장과 젊은 애인’ 에피소드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미 제국의 질서 안에 일부 편입되어 있었던 초대 교회가 동성애적 성향을 ‘위험한 기억’으로 간주하고 이를 예수 전승으로부터 삭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흔적들을 주목합니다. 무엇보다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이 가지는 체제 전복적 메시지들, 주변화된 사람들이 주된 증거자요 체험자로 등장하는 구성을 고려할 때 동성애자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예수의 전승은 충분히 가능한 서사라는 것이죠: “그는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을 원했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욕망으로 그는 행동한다.”(257) ‘욕망’이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주디스 버틀러의 책 『안티고네의 주장』이었습니다. 국가의 법에 의해 범법자로 낙인찍힌 오라비이기에 그 시신을 수습하는 일 역시 역모로 규정되던 상황에서 오로지 사랑하는 오라비의 주검을 고이 묻어주고 싶은 그 욕망에 충실했기에 범법자가 되었던 안티고네 말입니다. 예수 전승에서 백부장은 제도와 규칙의 위반자로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믿음의 범례로서 예수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는 법보다 욕망의 지지자이기 때문이겠죠?

이 에피소드는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이 담고 있는 ‘젠더해방적인’ 담화들, 즉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환관들과 1세기 젠더적 역할 기대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선언하며 예수를 따른 여제자들의 이야기, 예수 선교사역의 클라이맥스에 주요한 역할자로 등장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 또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던 발을 씻기시던 예수’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커다란 서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게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제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젠더 역할들의 신성함”은 “예수 전승들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은폐하지 않고서는 동성 간의 성애적 행위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주장될 수 없다”(302)는 제닝스 박사의 결론입니다.

3. 평등과 해방의 관계로 ‘제국’을 해체하는 예수의 새 가족들

III부는 복음서들에 나타난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에 대한 예수의 전복적 가르침에 대한 검토를 통해 동성애자들의 상호적 성애가 배제되지 아니하는 예수의 (확대가족)공동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자매들의 연합과 연대 말입니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340) 사두개인들의 질문, 즉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관계 후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여야 하냐는 질문에 “예수는 결혼 및 가족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350)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녀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의해 소유권이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들이 부활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인간적인 제도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지배 또는 소유가 폐지된다는 것”(350)이었다는 겁니다.

결혼은 예수 전승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행동양식)를 구현하는 자유롭게 선택된 충실성을 나타내는 것”(365)이나 “두 사람이 욕망과 환희 내에서 연합하는 것”(370)으로서는 옹호되지만, “분리와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세상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가치들의 기초적인 생산 단위 내에 인간들을 얽어매는”(371) 제도로서는 거부되고 폐기됩니다. 때문에 이런 서사 속에서 “제도화되지 않은 성애에 대한 긍정”은 “동성애와 동성적 관계”라는 주제와 연관될 수 있다고, 제닝스 박사는 말합니다, 예수와 그가 사랑했던 남자 사이의 관계는 동성애라는 젠더적 특성보다는 ‘종속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호적 사랑’이라는 데 방점이 찍힌 채 읽혀져야 하니까요.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에서 선교적인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교체된다”는 제닝스 박사의 독해,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라’는 명령은 ‘선포하고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375)는 그의 읽기방식이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홍수 때 동물들의 생명을 구하는 방식과 비교하며,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내보낸 예수의 에피소드를 해석하는 방식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예수에게서 실현된 새로운 약속은 새로운 민족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내에서 완성에 이르게 될 새로운 운동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가 어떻게 열두 명의 아들이 아니라 열두 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이에 이어 땅 위의 모든 민족들로부터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는다.”(381) 사랑하는 두 사람을 연합시키는 욕망이 “자손에 대한 약속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382)이라면, 그 ‘연합에 동성애적 성애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제닝스 박사의 말에 동의합니다.

전통적으로 바울에게 저작이 돌려지는 일부 서신들에서 여성억압적이고 반동성애적 언급들이 나오지만, 현대의 신학자들은 이를 후기바울적인, 그리고 종종 반바울적인 텍스트임을 밝히고 있는 마당입니다. 복음서와 동시대적으로 편집되었을 이 서신들은 기독교 초기 전통 안에서 예수 전승에 반하는 뚜렷한 한 흐름, 즉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그 구조를 신성화하려는 ‘제국적’ 의도를 보여줍니다. 제국은 ‘동질화’와 ‘보수화’를 그 핵심가치로 하는 시스템이니까요. 결론으로 가면서 저자가 분명히 하듯이 문제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이를 긍정하는 독해는 성서상의 모든 구절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지 않음”(415)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한 특정 시스템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두려움’ 말입니다. 그들은 근대・자본주의・가부장적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이성애적 결혼과 가족제도의 ‘신성화’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교회 전통의 시각에서는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년’으로 읽히고 거부되듯이, 동성애와 동성애자들을 향한 교회의 알레르기 반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제국의 중심 예루살렘이 아니라 주변인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상징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또한 그 여정이 점차로 예루살렘을 향해 갔던 것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 그 모든 차이들의 위계화와 분리가 해체된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이 책의 주장과 이 책이 선택한 읽기방식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녀)가 제국의 옹호자, 예수의 반대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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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축사

동성애자들과 민중
 


서광선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멀리 미국 쉬카고에서 방한하신 쉬카고 신학대학원의 제닝스 교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방한을 계기로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와 출판사 동연이 공동으로 하는 출판사업의 일환으로 제닝스 교수님의 역작인 2003년도 판, [The Man Jesus Loved]를 [예수가 사랑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참 좋은 일 하셨다고 치하하고 싶습니다.

저는 1950년, 61년 전에 터진 한국전쟁 당시, 해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미국 해군 종합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 만난, 미국 해군 친구의 도움으로 1956년 미국 서부에 있는 작은 기독교 인문대학에 유학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저는 철학공부를 시작해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신학공부를 뉴욕에 있는 유니언에서 했습니다. 북한에서 목사 아들로 성장하면서 철저한 근본주의 신앙으로 교육 받은 사람으로, 유니언에서 180도 다른 신학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구약성서 개론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창조설화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라는 것도 비로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성서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내 믿음이 허물어졌습니다.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하면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인간 억압과 노예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강요하는 일에 회의와 함께 분노를 느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워싱튼 연설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의 신학적 꿈을 키웠습니다. 저의 목사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만주에 망명한 항일 목사였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공산당 치하에서 반공분자로 낙인 찍혀, 625 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되어 평양에서 총살 당했습니다. 이념적 탄압,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독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겪은 사람으로서, 마틴 루터 킹의 꿈은 미국 흑인들의 꿈 만이 아니라 저의 꿈이 되었습니다. 남과 북의 독재 정권에서 시달리고 있는 한국 민중이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민주화 된 나라를 만드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우리 신학의 선배들,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박형규, 문익환, 문동환 등과 후배인 김용복 등과 함께 민중의 해방과 인간화를 위해서 일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전개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민중 연대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신학화한 것이 민중신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민중과 함께 민주화를 위하여 행동하면서, 우리는 성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서 속에서 민중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민중의 편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민중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는 신약성서의 오클로스의 친구이며, 동시에 민중입니다.

"민중"이 누구냐? "민중"을 정의하라는 학문적인 압력을 안과 밖에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민중"을 관념적인 어떤 범주에 넣기를 거부했습니다. 민중의 사회전기, 민중의 삶을 보고, 연대함으로써 알게 되는 실체입니다. 그러나 구지 서술하자면, 민중이라고 불릴 만 한 사람들은, 게급과 계층,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사람들,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윤곽 만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 가난하고 병든자들, 여자들,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오클로스, 구약성서의 하피루라고 했습니다.

저희 민중신학자들은 한국의 여성해방신학자들의 도전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여성은 민중 중의 민중이다. 정치적으로 억압 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무시당하고, 남성들의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자들과 여성신학자들의 연대는 아직 요원한 상태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닝스 교수님의 책을 통해서 또다른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방한하셔서 바로 이자리에서 강연하신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읽게 되면서, 동성애자들 역시 민중 중의 민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 개인적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사회에 발 붙일 수 없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 밖에 할 수 없는 극한상항에 처해 있어서, 연민의 대상으로서의 "타자 (Others)"거나, 싸구려 관용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민중이 아니라,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예수시대의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찌하여 요한복음의 분명한 구절들을 읽지 못했을까? 어려서 부터 수십번 읽은 성경, 신학교에서 시험까지 보고 합격한 성경말씀들, 대학에서 교회에서 수십번 설교하면서도-- 눈 먼 사람처럼, 예수 역시 성적 주변인으로서의 민중이라는 것을 왜 보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예수는 민중신학자들이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발견한 정치적, 문화적 반항아 이상의 혁명가,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관용과 기쁨을 설파한 선지자라는 것을, 이책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소경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겨우 눈을 뜨게 된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은 유교의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세뇌를 받아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국에 들어 온 서양 선교사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를 유교 문화와 접목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부장적이고 엄하고 강하고 폭력적인, 그러나 다분히 도덕군자 연하는 유교적 아버지로 알고, 교회의 목사들을 하나님처럼 모시라고 강요하고 절대 복종을 명령해 왔습니다. 가부장적이며 재국주의적인 선교사의 기독교와 유교가 힘을 합친 종교권력은 어느 나라 기독교 보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인간 해방의 복음을 우리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종교로 왜곡해 왔습니다.

"예수는 게이였는가?" 이 질문 만이 아니라, 차마 질문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 철통 같은 가부장제와 가족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지진의 굉음이 들리는 책입니다. 제닝스 교수님의 신학, 성서 읽기는 신학적 상상력을 넘어서, 신학적 용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학적 용기는 이단의 눈으로, 종교적 순교자, 지적 순교자,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는, "queer" 즉 이상한 사람, 색 다른 사람, 괴상한 사람, 수상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읽은 그대로 말하는 용기입니다. 예수를 따르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신 제닝스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난생 처음으로 번역하시노라고 수고하신 박성훈 선생님에게 경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혁명적이며 체제 해체적인 무서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연구소 김진호 실장님과 도서 출판 동연  김영호 사장님의 신학적 상상력과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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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한 남자> 출판기념회(2011.6.7) 인사말

교회가 소외된 사람들의 잔치마당으로 변하는 그날을 바라며

 


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1.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눈에 자기도 모르게 해석학적 색안경이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깨우쳐줄 책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것을 다 함께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자축하고 서로 격려하는 의미로 큰 박수를 칩시다.

2.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세계 각 곳에서 갖 가지 해방운동들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갖 가지 급진적 신학사상들이 등장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남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당하는 격심한 경제적 불의로부터 해방하려는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 탄생했습니다. 1960년대 초에에는 백인과 흑인 사이에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여기에서 black theology(흑인신학)가 탄생했습니다. 1960년에서 70년대에 한국에서는 급속한 산업화 정책으로 희생을 당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쟁취 투쟁과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서 소외당한 민중들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젔습니다. 이 맥락에서 민중신학이 탄생했습니다. 민중신학은 현재의 체제 아래서 억압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해방신학과 흑인신학과 같은 궤도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 흑인의 해방, 민중의 해방보다 한 걸음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1970년대에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난 여성운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여성신학(femnist theology)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신학들은 주장하기를 설령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민중의 해방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여성의 해방은 자동적으로 이루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성은 고통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민중들 가운데서도 차별적으로 가장 고통을 당하는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성의 차별과 억압을 당연시하는 현재의 가부장적 제도와 문화를 변혁하지 않고서는 총체적인 인간 해방은 있을 수 없다는 기치를 내걸고 여성해방이야말로 참된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또 한 걸음 더 급진적으로 나아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성소수자 권리 운동입니다.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여성 동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권리옹호라 불리는 이 운동은 남성과 여성 양쪽으로부터 다 배제당하는 특별한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queer theology가 등장했습니다. 이 신학은 성소수자에 속하는 사람들에도 이른바 정상적인 남성/여성과 꼭 마찬가지로 차별없이 그들의 성정체성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 

우리나라에서는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차별금지법안이 2007년 10월에 동성애 조항이 삭제된 채 국회에 제출되어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일부 대형교회와 기독교인 네티즌들의 극렬한 반대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회가 약자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가장 배타적이며 보수적 성향의 단체임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교회가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하느냐의 가부를 놓고서는 교회가 분열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지경입니다. queer 신학은 교회가 성 문제와 관련된 현 사회의 지배적인 제도와 가치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성소수자의 처지를 단지 예외적 사항으로 보고 시혜적 차원에서 용인해 주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라고 비판합니다. 저자는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증은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성서본문들의 세밀한 해석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4.

독일에는 2년에 한 번씩 Kirchentag이라고 하는 신도대회가 열립니다. 이것은 교회 당국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주관으로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사회적 주요 당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2년마다 약 일주일 간 전국 곳곳으로부터 수십만명이 참가하는 큰 회의입니다. 1974년은 제가 독일에 간 후에 처음으로  Kirchentag이 열리는 해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 대회에서 호모섹스의 문제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공론화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호모섹스 집단도 이 대회에 참가 단체로 초청을 받았으며 그들에게도 자기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칠 수 있는 장(場)이 제공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집단이 발표하려는 연제는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3,000여명을 수용하는 대형 강당이 특별히 제공되었습니다. 많은 청중이 예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도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기다렸습니다. 동성애자의 연제가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니까 그가 동성애자로서 그의 상대역 되는 한 남자와 어떻게 동성애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이야기하리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귀을 귀울였는데 그는 한 남자, 즉 예수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기대와 전혀 달랐지마는 그 동성애자도 예수를 사랑한다면 똑 같은 예수를 사랑하는 우리와 그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Kirchentag 이후에 신학교 게시판에는 동성애자 파트너를 구한하다는 광고가 공공연히 나붙게 되었으며 교회의 목사가 동성애자임을 표명하더라도 해임당하지 않고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예수가 사랑한 남자>입니다. 예수와 한 여자, 예를 들어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에로틱한 로맨스 사건이 일어났다는 가상적 풍설에도 우리는 충격을 받을 터인데 예수와 한 남자 사이에 아가페적 사랑이라면 몰라도 육체적 친밀함이라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면 더욱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5.

성서는 억압, 차별, 착취, 탐욕, 교만과 같은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불의를 가장 큰 죄악으로 규탄했는데 이와 달리 교회는 인간의 성본능을 가장 가장 큰 죄악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강자들, 즉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과 지배자들의 죄악을 눈감아 줌으로써 그들과 한 편이 되어 특권을 누리는 길을 마련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 교회는 성에 대한 죄의식을 극대화하여 그것으로 모든 인간을 꼼짝없이 옭아매고 죄사함이라는 필요불가결한 미끼를 사용하여 그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섹슈앨리티(성애, sexuality)를 죄 중의 죄로 내세우는 난공불락의 신화를 일찍부터 쉽게 구축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교회는 동성애를 가장 혐오스러운 죄악으로 규탄하는 그 한 가지 일로써 교회가 이 사회에서 최선의 윤리를 수호하는 고귀한 투쟁의 최선봉에 서있다는 자기 최면에 빠집니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이성애적 교인들로 하여금 동성애와 무관하고 이성애적 성관계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성과 관련된 현재의 어떠한 제도와 문화에도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6.

이성애를 근거로 하여 대다수의 교인들은 혼인과 가족 제도, 자녀 출산과 같은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되는 완전무결한 절대적 가치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이 개인에게 안정을 부여하고 자녀 생산이 사회를 존속하게 해 주는 순기능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본 조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족 제도는 분리, 사유재산, 지배로 특징지워집니다. 교회가 이 제도를 현재 있는 그대로 영속 불변적인 것으로 보는 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가정의 폭력에 내동이치는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시집하고 장가가는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빛에서 혼인과 가족이라는 현재의 제도를 비판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7.

저자는 작년 이맘 때 이 자리서 “교회와 동성애”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밝혔습니다. 교회의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는 성소수자에 속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교회 밖으로 또는 죽음으로 휘몰아갔다고 고발하면서 교회는 이들에게 끼친 피해와 하나님의 말씀에 끼친 피해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교회가 가진 자들만의 잔치마당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하여 즐기는 잔치마당으로 변하는 그 날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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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서구신학을 쏘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자기의 윤리 vs. 타자의 윤리

‘자기의 윤리학’[각주:1]으로 세상의 눈물과 회한을 닦을 수 있을까? 레비나스의 의심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고 개인을 그 규범에 종속시키려했던 기존의 윤리에 맞서 니체-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계열이 ‘자기의 윤리학’을 전개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학’을 제안한다. 그의 시도는 근대적 주체가 지녔던 자율성(autonomism)에 반하는 타율성(heteronomism)의 추구라 할 수 있다.

윤리는 그동안 세상의 억압과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는 자율적 주체의 윤리적 행위가 무엇인지 물어왔다. 그러나 타자의 윤리학은 그 주체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윤리적 행위가 작동된다고 주장한다. 니체류의 윤리학이 서구 형이상학이 시도했던 초월에 반대하여 자기 안으로의 내재를 전략적 도구로 취했다면, 레비나스는 오히려 서구 형이상학의 초월개념에 대한 적극적인 윤리적 해석과 실천으로 그것이 지녔던 병폐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즉, 초월적 세계 저편에 있는 타자를 통해 바로 이곳에 있는 우리를 다시 발견하고, 이곳의 문제를 다시 바라본 것이다. 이때의 타자란 레비나스에 의하면 억압받고 소외된 경계 밖의 사람들이다.[각주:2]

결론과도 같은 서론으로 ‘자기의 윤리’와 ‘타자의 윤리’간의 굵직한 논쟁거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기의 윤리와 다른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윤리의 쟁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미국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레비나스에 대한 연구는 보통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후설-하이데거-레비나스로 이어지는 현상학적인 계보를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로젠츠바이크로 대표되는 유대교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레비나스가 직접 경험한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영향,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신학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필자는 이번 웹진부터 네 차례에 걸쳐 레비나스로 대표되는 타자의 윤리에 대해 다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전통적인 레비나스 연구의 경향을 따르지도, 레비나스에 대한 주례사적 비평도 지양할 것이다. 그보다는 레비나스의 서구형이상학을 향한 비판, 신학이 어떻게 악(고통)을 정당화 시키는 기재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추적, 그 고리를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렸던 레비나스의 타자론과 본회퍼의 타자론 간의 비교,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자의 윤리가 기독교 윤리학 안에서 차지하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예단하는 것이 이번 시리즈의 전체적 그림이다.

그 전에 일종의 워밍업 차원에서 지난 웹진에서 살펴보았던 라깡의 사유와 레비나스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이는 서구 전체성을 비판하는 레비나스가 지닌 비난의 탄착군이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레비나스와 라깡

근대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 시기였다. 계몽이성의 빛은 몽매한 중세의 두터운 장벽을 허물며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하였고, 인류에게 번영과 진보를 약속하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근대는 인간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른 생존경쟁의 난투극 속으로 몰아넣은 시기이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주체와 객체로 분류하고 주체로 하여금 대상을 지배하게 하는 논리가 싹튼 시기이기도 하다. 주체와 객체간의 간극은 헤겔에 의하면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진화하여 마침내 절대정신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형이상학이 지녔던 주술이었다.[각주:3] 레비나스는 이를 서양철학이 걸어온 ‘전체성의 향수’ 라 지적하고, 개인들의 고유성을 말살하고 타자를 제거하는 폭력적인 개념이라 비판하면서,[각주:4] 홀로코스트를 서양철학의 전체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지목한다.

우리는 지난 호 웹진에서 라깡에게 있어 타자가 상징계 속의 타자와 실재계 속 타자로 분류되고 있음을 알았고, 상징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 실재계속 타자를 향한 욕구를 욕망과 구분하여 향유라고 불렀음을 기억한다. 라깡적으로 해석하면 홀로코스트는 전체성의 철학이 실재(the Real)를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유토피아를 창조하겠다던 현실의 기표와 욕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실재였는지가 확인되었던 순간이, 이성의 법칙이라는 상징적 질서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실재계속 대상소타자가 우리에게 불쑥 다가 온 것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이렇듯, 라깡이 말하는 타자성의 진면목은 상징계속 타자에 갇히지 않는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레비나스의 표현대로라면 동일성의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연기되면서 미끄러져가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고 볼 때, 라깡이 말하는 향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기존의 서양철학의 전체성으로 타자를 포획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레비나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양자를 비교하는 이유는 서구 전체성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두 사람은 일정 부분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구체적 분석 틀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레비나스와 라깡은 공히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등장하는 주체에 대한 타자의 전유와 배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일성의 폭력안으로 말려들어가지 않는 타자를 다시 정초하려 했다. 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 양자는 길을 달리한다. 라깡이 의미의 결정을 계속 연기시키며 미끄러져가는 타자를 상정함으로 전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한 반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급격한 초월, 즉 계시의 단계까지 끌어올림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전체성과의 과격한 분리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 이러한 전 이해를 갖고 이제 본격적으로 레비나스의 전체성 비판, 특별히 서구 기독교가 어떻게 그것의 옹호에 기여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서구신학은 어떻게 전체성을 옹호하였나?

신정론(Theodicy, 神正論)은 의인에게 닥치는 고난과 악의 명백한 현존 속에서도 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한다는 사실, 그런 신의 전능과 계획에 의해 악과 고난은 현실적 차원이 아닌 신의 섭리가 작동하는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론이다. 근대적 이성이 사상적인 측면에서 주체의 타자를 향한 동일성의 폭력을 정당화한 사례라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신정론은 인간의 삶 속에서 부딪치는 삶의 타자들(죽음, 고통, 악)을 신앙의 동일성안으로 끌어들였던 또다른 폭력이었다고 레비나스는 평가한다.[각주:5]

돌이켜보면 서구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악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에 있어 각 시대마다 다른 해법이 있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정론적인 전제로 묶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제도화 과정에서부터 중세까지 교회를 지배했던 계시신학,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중세신학을 완성한 스콜라철학은 자연의 조화를 인식함으로써 신에 이를 수 있다는 자연신학을 낳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스콜라적인 신학을 부정하고, ‘오직 믿음으로’ 신에 이르는 ‘십자가 신학’을 모토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다시 꾀한 패러다임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가 신앙의 영역에서 이성을 추방시켰다면, 칸트는 이성의 영역에서 신을 제외시켜 물자체의 영역으로 등극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양자는 라깡의 표현대로라면 ‘거울단계’에서 엄마와 아이가 상상적 양자합을 이루는 것과 같이 서로에 기대고 있다. 하나는 초월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내재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릴 수 있겠지만 ‘궁극적 실재의 다차원적인 존재방식(틸리히)’ 이라는 측면에서 양자는 서로의 거울이며 그림자이다. 헤겔은 이런 해묵은 종교 갈등을 ‘세계는 정신의 자기 전개과정’이라는 말로 통합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발전과정에서 치열하게 신론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고난과 악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양자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범박하게 표현하면, 신의 섭리와 은총 안에서 예수 잘 믿으면 보상을 받는다는 주장과 신이 우리의 고난과 함께 참여하면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간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정점에는 공히 십자가신학이 있다.[각주:6] 어쩌면 십자가 신학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했던 악의문제를 신앙인들이 직면할 때 마다 그 사건과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어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권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준 부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레비나스는 지난 세기에 있었던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 등 총체성에 입각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목도한 후, 고통의 신학화를 통해 이루어낸 고난의 유의미성, 절대정신으로 나가기 위한 발전단계로서의 고난, 신적 섭리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난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되는 고난에 대한 낙관적 해석을 거부하면서 최종적으로 신정론의 폐기를 선언한다.[각주:7] 만일 레비나스의 지적처럼 신정론이 현재의 고난을 미래의 축복으로 연결시킴으로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고난을 신앙적으로 무마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맑스의 종교 폄하발언, 즉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표현은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어떤 대응을 해야하는가? 다음 호 웹진에서 레비나스 사상을 대변하는 키워드인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과 ‘타자의 얼굴’을 고찰함으로써 서구신학 내지 서구윤리에 대한 반성을 도모하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1. 웹진 제3시대 29호에 실렸던 필자의 졸고 “자기의 윤리I-주체여, 안녕히!”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35)와 30호 기사 “자기의 윤리II-주체여, 다시 한번!”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41)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강영안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1996), 101. [본문으로]
  3. 근대의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많은 글들이 있다. 대부분 백인에 의한 백인의 자기비판 내지 1세계 관점에서 풀어보는 해법으로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마 전 출판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대학의 몰락』(동연, 2011)의 저자인 시카고 신학교 서보명 교수는 1.5세 이민자의 눈으로 서구의 근대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는 학자이다. 그의 저서 A Critique of Western Theological Anthropology: Understanding Human Beings in a Third World Context. (New York: Edwin Mellen Press, 2005)은 이러한 취지를 잘 살린 책이고, 특별히 이 책의 1장 The Project of Modern Theological Anthropology: The Question of Freedom 에 근대성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한 그의 신학적 분석이 잘 전개되고 있다. [본문으로]
  4. “헤겔철학에게서 정점에 이르는 서양철학이 모두 그렇다. 헤겔은 철학 그 자체의 정점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어떻든 영의 차원이든 분별력의 차원이든 모두 앎으로 해결하려고 한 서양철학 속에서는 어디서나 전체성의 향수를 볼 수 있다. 전체성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곧 죄인 것처럼 알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양명수 옮김 (서울: 다산글방,2000), 98. [본문으로]
  5.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96. [본문으로]
  6.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 중에 미국 신학계내에서 십자가신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몇 권의 책을 아래에 소개한다. /// _Jennings, Theodore W., Jr.Transforming Atonement: A Political Theology of the Cro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9.(한국에서는 퀴어신학자으로 알려진 시카고 신학교 제닝스 교수의 주된 관심사는 바울과 제국과의 관계를 데리다, 지젝, 맑스의 이론을 갖고 바라보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속에서 제닝스 교수는 십자가 신학이 어떻게 서구문명의 발전과정에서 자리매김을 해왔는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 _ Douglas, Kelly Brown. What’s Faith Got to Do With It? Black Bodies/Christian Souls. N.Y: Orbis Books, 2005.(유명한 The Black Christ 의 저자이기도 한 Kelly Brown Douglas는 이 책에서 흑인에 대한 lynching과 십자가 신학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대속론이 흑인들 스스로에게 체제의 폭력을 견디고 순응하게 하는 기재로 사용되었음을 밝힌다.) /// _Terrell, Joanne. Power in the Blood?: The Cross in the African American Experience. N.Y: Orbis Books, 1998.(시카고 신학교에서 윤리와 조직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Terrell은 유니언 신학교에 있는 흑인신학의 대부 제임스 콘의 직계제자이다. 그녀는 Womanist 관점에서 십자가 신학을 gender와 race, 그리고 power의 문제로 돌려 바라보고 있다.) /// _Westhelle, Vitor. The Scandalous God: The Use and Abuse of the Cro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6(시카고 루터란 신학교에 있는 Vitor Westhelle는 미국신학계에서도 보기드문 헤겔좌파 신학자이고 브라질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탓에 해방신학에도 조예가 깊으며 유럽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Vitor는 다양한 문화에서 이해하는 십자가신학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이 책을 통해 선사한다) /// _Joh, Anne. Heart of The Cross: A Postcolonial Christology. Louisville: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6(시카고인근 에반스톤에 위치한 Garrett신학교에서 Theology를 강의하는 Anne Joh교수는 Drew의 Catherine Keller의 제자이고, Heart of The Cross는 그녀의 박사논문으로 출판 당시 신학계에 화제가 되었던 책이다. Anne Joh교수를 언급할 때 흔히 ‘정(jeong, 情)의 신학’을 먼저 거론한다. 전통적인 서구 십자가 신학에 대한 포스트콜로니얼니즘적인 해석(혹은 여성신학적 해석)을 통한 기독교 구원의 재발굴은 한인 이민 2세로 미국땅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그녀의 고투와 맞물려 많은 착상과 울림으로 미국 신학계로 번져가고 있다. /// _Trelstad, Marit. ed., Cross Examinations: Readings on the Meaning of the Cross Toda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6.(Trelstad가 책임편집에 참여한 이 책은 근래 일고 있는 십자가신학 논쟁을 총망라한 책이라 볼 수 있다. 독일의 Moltmann 교수, 자칫 미시적 차원으로 함몰될 수 있는 목회상담의 영역을 정치와 사회 시스템 등 거시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고 평가 받는 Garrett을 상징하는 미국 목회상담계의 거목 James Poling, 뉴욕 유니언 신학교의 명예교수 Delores S.Williams 등 원로들의 글 뿐 아니라, 시카고 신학교의 Joanne Terrell, 주목받는 일본계 신학자 Rita Nakashima Brock 등 신.구 학자들이 공동으로 이 책에 참여하여 십자가신학의 이슈들을 다시 써 내려간다) [본문으로]
  7. Emmanuel Levinas, Entre Nous: On Thinking-of-the-Other. Trans. Michael B. Smith & Barbare Harshav.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8), 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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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17 15: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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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실수로 이번 원고에 지난 호 원고 한 문단이 삽입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정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혼동을 드린 것 같네요. 이상철 선생님과 이미 글을 읽으신 모든 분께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사랑을 카피하다: 매력적인 카피의 가벼움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사랑을 카피하다>는 가벼운 영화이다.
영화의 소재는 흔하디 흔한 남녀간의 사랑이다. 더욱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론처럼 되어있는 여자는 감성적이며 사랑만을 간구하고 남자는 현학적이며 사랑에 무감 하다는 식의
고정된 성 역할을 대변하는 두 남녀의 양 많은 대사가 영화 끝까지 이어지는, 그야말로
자막 읽기에 바쁜 영화다.
물론 고전적인 남녀간의 사랑과 갈등만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 <certified copy>가 암시 하듯 ‘오리지널’과 ‘카피’라는 매우 현대적인
화두가 영화 전반을 장식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랑을 카피하다>는 가벼운 영화이다.
대부분의 다중적 의미를 지닌 작품들이 그렇듯 해석과 결론의 몫은 관객의 것이기 때문이다. 혹 감독이 결론지어 주지 않았다고 해서 내 몫에 버거워 할 필요는 없다.
결말은 열려 있고 해석은 자기가 보이는 것 만 큼 만 하면 된다.
더욱이 내 해석이 감독의 의도와는 다른 무엇이면 어쩌나 하는 기우도 필요 없다.
그것 또한 ‘원본’에 대한 한물간 중압감이다.
바로 이 영화 원 제목이 <공인된 카피>인데 뭐가 문제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카피하다>는 매력적이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와 남자배우 윌리엄 쉬멜의 안정적인 중년의 모습과 자연스런 연기도 좋거니와 소재와 대사를 넘어 영화라는 형식 전체를 사용하여 삶과 기억의 복제들을 풀어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 하는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치기가 매력적이다.
 
한 영국 작가와 그 작가의 팬인 한 프랑스 여인의 만남으로 영화는 시작 되지만
투스카니 시골 마을로 여행을 하게 되면서 그 둘이 원래 부부였는지 부부인 척 하는 건지
모를 야릇한 상황으로 끝을 맺는다.
부부라 해도 좋고 역할극을 했다 해도 좋을 극의 흐름이 이어 지면서 그 사이에 감독이
보물찾기처럼 숨겨 놓은 ‘카피’를 의미하는 장면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영국작가 제임스 밀러의 강연이 열리는 강단 전면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을 기다리는 마이크와 주인공이 쓴 책 <copie conforme> 이 보인다.
책 표지는 다비드상 얼굴 두 개가 쌍둥이처럼 마주 보고 있는 디자인이다.
한 동안 주인공이 오지 않고 정지된 공간만이 비춰진다.
이 한 장면으로 앞으로 이 영화의 소재는 그 책과 연관된 ‘카피’의 문제가 될 것이며
별 이유 없이 강연에 늦고도 태연하고 지성적인 남자 주인공의 모습에서 그가
자신의 행위나 생각에 대해 완고한 사람임을 암시한다.
이런 남자 주인공 밀러의 완고함은 영화 마지막 부분 화장실 거울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이 영화는 거울에 비취는 모습으로써 ‘복제’의 의미를 상징하는 듯 한 장면들이 있는데
처음 것은 프랑스 여인의 골동품 가게에서 둘이 대화할 때 거울에 비취는 그녀의 모습이고
다음은 분수대 동상 앞에서 프랑스 여인이 한 중년의 부부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벽에 놓인 거울과 오토바이 사이드 미러에 동시에 비춰지는 장면이다.
두 장면 모두 남자는 바라 볼 뿐이고 여자가 비춰지는데 그건 아마도 ‘복제’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남자 주인공 밀러의 시각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벽에 있는 거울과 사이드 미러에 두가지로 보이는 장면은 더욱 복제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장면은 거울은 보이지 않고 거울을 보는 남녀의 표정만이
보이는 씬인데 이 거울씬은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가 극명하게 표현된다.
여자의 경우, 그녀는 거울을 보며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상기된 얼굴로
새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화려한 귀걸이를 이것저것 대어본다. 마치 처음 만난 그 때의 설레임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그녀는 그를 붙잡고 싶어한다.
반면 남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표정을 가늠할 수 없다.
사랑의 원본으로 되돌아 가고 싶어하는 여자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표정은 그에
부응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에게 예쁘게 보여지려는 이유만으로 거울 앞에 자신을 카피하고  남자는 그저 볼 일을 보는 도중 앞의 거울을 대할 뿐이다.
이렇게 감독은 거울을 이용하여 복제의 의미와 남녀간의 심리의 전형을 표현하려한다.

한편 거울이 ‘시각적인 복제’를 말 한다면
카페에서 남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던 플로렌스에서의 어느 모자의 모습을 설명하는 부분은 기억에 의한 ‘언어적 복제’를 의미한다. 멀찌감치 걷고 있었다는 모자의 모습과
다비드상 앞에서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엄마는 아들에게 그 상은 복제이고 원본은 아카데미아에 있다고 말했을 거라는, 남자의 상상과 기억이 섞인 설명을 들었을 때 여자는 그 것이 자신과 아들의 모습이었음을 알아챈다. 그리곤 얼굴이 굳어지며 눈물을 흘린다. 남자에 의해 언어로 카피 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러워서였을까?
아님 기억을 핑계로 하는 남자의 덧붙인 상상이 부당하다고 느껴서였을까? 아님 영화 속 대사 그대로 힘든 시기였던 그 때가 생각나서 그랬을까?
카피와 변형에 대해 관대한 남자는 다비드상 앞에 있던 모자의 들리지 않는 대화를 자신 스스로 상상하여 완성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반면
카피에 대해 그리고 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여자는 오리지날 격인 자신의 모습에 덧붙여지는 상상과 변형을 동반하는 남자의 언어적 카피가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세 쌍의 부부는 바로 주인공 남녀의 ‘자아의 복제’일 수 있다.
이들 세 쌍의 부부로 인해 주인공 남녀는 더욱더 부부 역할에 빠져 들 수 있었는데
이제 갓 결혼식을 올리는 젊은 신혼부부는 함께 사진을 찍을 것을 간청하기도 하고 야외에서의 피로연 모습이 보여지기도 하면서 풋풋한 주인공남녀의 젊은 사랑을 재연하고,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한 프랑스 중년 부부는 밀러에게 부부간의 필요한 조언을 건낼 만큼
완숙한 중년의 사랑을 재연한다. 그리고 노파 부부는 두 주인공에 앞서 걸으며 호텔에 까지 이르게 한다. 다름 아닌 완벽한 부부의 재연 공간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영화에는 본다는 것의 불안정함 즉 모두들 원본이라고 믿는 것들의 허술함과
왜곡현상을 암시하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먼저 카페 여주인이 두 남녀를 부부라고
확신하는 부분이다. 두 남녀는 영어로 이야기 하였고 카페 여주인은 영어를 모르는 이탈리아인이 건만 그들을 부부라고 확신하며 주인공 여자로 하여금 역할극을 시작하게 만든다.
다음은 분수대에서 만난 중년 부부 중 남편이 소란스럽게 전화를 하는 장면인데
화면을 등진채 부인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여서 처음 얼마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남편이 부인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남자가 걷기 시작하면서 그 것이 전화 통화였음을 뒤 늦게 보여 준다.
또 다른 장면은 영화 후반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버린 여자를 찾기 위해 남자는 성당문을 열어 어두운 실내를 들여다 본다. 너무 짧은 순간이어서 의자에 않아 있던 사람의 뒷 모습이 주인공 여자 였는지 관객은 확인할 시간이 모자랐건만 남자는 여자가 기도를 하고 있던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여자는 가방에서 자신의 브래지어를 들여보이며 답답했던 것을
벗으러 성당에 들어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영화는 원본과 복제, 확신과 왜곡, 또 그것들의 혼동을 표현할 수 있는 영화적 방법을 동원해 곳곳에 배치해 놓았는데 압권은 사랑을 빙자한 두 남녀의 역할극 놀이에 있다.
그들이 원래 부부였을까. 아님 부부인척 한 남남이었을까.
전체적인 흐름으로 봐선 부부 역할극을 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부부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사적이고 감정적인 대화들이 그들이 부부임을 주장해도 무방하게 만든다. 결국 부부라 해도 부부인척 했다 해도 영화는 달라질 것이 없다.
오히려 감독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들이 부부였다면 남남인척 만나는 부분이 카피이고 부부가 아니였다면 부부 행세를 한
부분이 카피이다.
감독은 주연을 통해, 조연을 통해, 소품을 통해, 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그러나
강권하지 않는 가벼움의 형태로 자신의 것을 말하고자 한다.
남자 주인공 밀러가 쓴 책의 바뀐 원제목은 <원본은 잊고 질 좋은 짝퉁을 사라>였다.
이건 그야말로 감독의 의도를 직설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공인된 카피>이던 <원본은 잊고 질 좋은 짝퉁을 사라>이던 이들 제목만 보더라도
오리지날의 아우라가 붕괴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감독이다. 현대 미디어 예술의 총아격인
‘영화’는 애초에 ‘원본’이 없다. 원본이 어디 박물관 유리관에 모셔있고 우리는 복사본을 돌려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세계 구석구석 동시 다발적으로 카피된 것을 상영한다.
영화는 ‘카피’로 존재한다. 그 것이 영화의 태생이다.
그러니 감독이 원본과 복제의 위계를 고집할 리는 없지 않겠나.
내 책장에 꽂힌 미술도록에 있는 앤디 워홀의 <마린린 몬로>를 보는 것은 미술관의 특별전에 걸려있는 비싼 <마린린 몬로>를 보는 것과 감흥이 다르지 않다.
붉은 입술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스타로서의 아우라를 표현하기 위해
또는 원본으로서의 아우라를 표현하기 위해 미소 짓는 것이 아니라
복제된 스타의 이미지, 아우라의 이미지를 내 뿜을 뿐이다.
복제의 시대 이전엔 없었던 현대인들의 방법론으로 감독은 ‘영화’라는 예술 장르를
변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회귀할 원본 없는 현대인의 인식 자체를 변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영화속 그녀는 어딘지 진부해 보인다. 사랑의 원본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을 남자에게서 갈망하는 그녀는 이미 감독의 뮤즈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다분히 개념적으로 보이지만 <사랑을 카피하다>는 여전히 무겁지 않다.
감독이 말하는 사랑도 원본도 카피도, 영화 속 이탈리아 길가 사이프러스 나무 처럼
되돌아 보면 하나 하나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이 불멸의 고전으로 박제 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흔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것들 이기에
쥐어도 보고 펴도 보고 탱탱볼 처럼 벽에 튕겨져 나가기도 하는
가볍고 매력적인 영화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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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아스(종원)
    2011.07.08 14:5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사랑을 카피하다"이 영화를 다시보는 느낌이 들정도 였습니다.
    이영화의 두 주인공이 부부행세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중년 부부의
    연기가 진짜 부부라는 착각이 될 정도로 자연스러운이 이영화의 매력이었습니다.
    영화를 본다기 보다는 중년부부의 삶을 관조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오종희 샘" 글 잘읽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 -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

▷ 원서 : The Man Jesus Loved - homoerotic narratives from the new testament
▷ 지은이 : 테오도르 W. 제닝스 지음 / 옮긴이 : 박성훈
▷ 장르 및 쪽수 : 신학 / 456쪽
▷ 판형 및 제본 : 신국판 / 무선제본
▷ 가격 : 16,000원
▷ 펴낸곳 : 도서출판 동연

             * 책 소개 보러가기

책 소개

세계적인 퀴어 신학자가 파헤친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

1990년대 초 퀴어신학은 미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등장하였고 테오도르 제닝스는 그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저술한 이 책은 퀴어신학에 관한 그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하나로, 동성애혐오적/이성애중심적 성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들에 수록된 예수 전승 속에서 예수를 동성애자로서 해석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동성애자였다

이 책은 요한복음에 중심을 두고 논의를 편다. 고대 사회의 동성애적 관습을 참조한다면 요한복음이 재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동성애적 행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퀴어신학의 관점에서 그 텍스트와 성서 안팎의 관련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예수가 사랑한 남자에 관한 텍스트들이 그렇다.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이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워 있던 장면을 검토하고, 예수 제자 집단 내에서 가진 그의 지위/역할/정체를 살피며, 예수 전승 내에서 그가 갖는 의미를 주목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신약성서 내/외부의 자료들을 해석에 동원하면 예수의 동성애적 행위가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분명 여러 예수 전승을 살펴볼 때 예수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가 “동성애자였다” “동성애자가 아니었다”라는 단순한 대답을 이 책에서는 기피한다. 이 책은 기존의 성서 해석 방식을 뒤집는 학문적 접근을 통해 우리 사고의 큰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 과정을 좇다 보면 “예수가 동성애자였다, 아니었다”는 물음은 자연스레 그 의문이 풀린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교회는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양성애자를 희생양 삼아 성(性)을 죄악시해왔다. 그것은 교회가 창안해낸 한 편의 신화다. 이 신화를 통해 교회는 가족의 다양한 가치들에 대해 질문할 여지를 차단해왔다. 다시 말해 게이, 레즈비언들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 취급을 받았고, 그들을 그들 자신의 성적 취향 그대로 가족의 일원으로 삼는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하여 괴로움 속에서 그들은 정체성에 혼동을 일으키며 급기야 자살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성서를 다시 읽고, 그 속에 새겨져 있는 교회의 성적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해석할 여지를 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동성애혐오의 또 다른 희생자는 성서 그 자체다. 교회는 오랫동안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자들의 완전한 성적 평등을 부인하기 위해 성서를 이용했다. 다시 말해 인류가 현재 일구어 온 보편타당한 상식의 진리 속에는 교회의 성서 오독과 악용이 덧칠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이 책은 그러한 잘못을 바로잡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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