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기독교 윤리: 타자에서 타자들로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왜, 복수적 윤리인가?

복수적 윤리는 니체와 들뢰즈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의 특색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통합된 주체가 아니라 분열된 주체이고, 투명하지 않고 불투명하기에 흔들리면서 가는 주체이며,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복수적 주체이다.[각주:1]

들뢰즈와 가타리는 니체의 사상을 이어받아 소비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욕망의 복수성’[각주:2]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우리가 다루었던 헤겔-프로이트-라깡으로 이어졌던 욕망이론과 축을 달리한다. 주인과 노예의 상호인정투쟁에 바탕한 헤겔의 욕망이론[각주:3], 타자의 오이디푸스화를 말했던 프로이트[각주:4],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욕구간의 괴리로 인한 결핍이 욕망의 동인으로 등장하는 라깡[각주:5]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있어 욕망은 결핍에 대한 욕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에 반대한다. 욕망을 현실적 대상의 결여로 파악하는 기존의 욕망 이론 속에는 이미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전제가 깔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욕망이론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상실한 주체의 결핍된 무언가에 대한 수동적 반작용에 그칠 수 밖에 없다.

Gilles Deleuze (1925-1995)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에 반해 욕망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성하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흐름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그들이 찬양하는 욕망은 지난 세기 자본의 질주에 제동을 걸었던 이념과 계급의 장벽을 허무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제 오직 자본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고 자본의 질서만을 욕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만족을 모르는 자본의 욕망과 그것에 호명 당하는 인간의 운명! 이것이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처럼 욕망에 저당잡힌 암울한 시대를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왜 그 욕망에 주목하는 걸까?

자본에 의해 영토화된 세상이 창조적 에너지의 흐름인 욕망을 통해 탈영토화 될 수 있음을 믿기에 그렇다. 욕망은 격렬한 분열적 흐름(schiz flow)이고, 본질상 정착을 거부하는 유목적 흐름(nomadic flow)이며, 체제의 관습과 기표에 갇히지 않는 기계적 흐름이기에 이를 이용하면 기존의 질서를 와해시키는데 일조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인성의 역동적 관계로 파악할 때 끌어들이는 성적 충동의 에너지인 리비도 개념에 가깝다. 넘쳐흐르는 리비도의 에너지를 자본의 탈영토화를 위한 영역으로 유도함으로써 자본의 가치증식에 딴지를 걸고, 리비도의 에너지가 기존 체제를 전복시키는 정치적 실천으로 화할 수 있음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감지한 것이다.

본문에서 필자가 언급하고 있는 ‘복수적 윤리’는 이러한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이론에서 착안하였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인 분열, 흐름, 유목 등은 기본적으로 정주하지 않고 탈주하는 주체, 끊임없이 다성 다종의 타자들과 교신하고 접촉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복수적 관계, 복수적 윤리는 그런 주체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면대 면(面對面)’, 양자관계, 초월적 수직을 강조하는 레비나스 ‘타자의 윤리’를 횡적으로 확대시켜 ‘타자들의 윤리’라는 좀 더 폭이 넓고 개방되고 소통과 접속을 강조하는 윤리로 우리를 초대한다.[각주:6]


레비나스에 대한 도전

지난달 웹진에서 필자는 레비나스에 대한 유감을 다루는 단락에서 레비나스 사상 안에 깃들어 있는 주체와 타자간에 결성된 완고한 2항 관계와 급격한 초월성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자칫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의 경직성으로 변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물론, 그것은 전체주의를 야기시켰던 근대적 대칭성, 상호성, 동일성에 대한 레비나스의 의식적 거리두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지배할 수 없는 타자, 나와 똑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은 타자,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초월성)으로서의 타자를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지나친 ‘비대칭성’, ‘거리두기’, ‘낯설게 하기’가 오히려 윤리적 행위의 실천력을 후퇴시킬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자 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가 타자인 이유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기에 타자인 것이고, 레비나스에게 있어 내가 주체인 이유는 비록 지쳐 쓰러져갈지언정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타자에 대한 면대(面對)를 포기하지 않는 주체이기에 내가 주체일 수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윤리란 이렇듯 얼굴(주체)과 얼굴(타자)의 양자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조합되는, 나와 세상간의 복수적 관계, 복수적 윤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타자를 위한 존재’를 표방하는 본회퍼의 교회론은 복수적 관계,복수적 윤리를 지양하는 윤리형성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다양한 타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회는 그야말로 복수적 관계의 총체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는 복수적 관계의 실험 내지 모범이기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또 다른 요소라 할 수 있는 디다케는 수동적으로 교회내 봉사로 축소시킬 수 있겠지만, 그것이 대사회적 관계로 표출될때는 다원화된 사회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타자들의 입장과 처지를 섬기는 복수적 윤리의 형태로 전환되어야 한다.

몇 해전 시카고 대학에서 은퇴한 데이빗 트레이시도 레비나스와 같이 근대가 지녔던 전체성의 폭력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레비나스의 ‘면대 면(面對面) 윤리’와는 다른 처방을 내린다: “근대가 제공했던 거대담론의 폭력에 의해 무시당하고 소외되고 지배당했던 모든 사람들의 고난의 경험과 기억이, 은폐된 채로 자신을 드러내던 그 하나님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각주:7]고 말이다.

트레이시는 신이란 이해되거나 파악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레비나스에 공감하나, 고난받는 타자들의 집단적 경험, 기억, 그리고 집단적 연대를 강조함으로서 ‘면대 면’ 윤리가 지닌 무한소를 향한 수렴을 무한대를 향한 발산으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트레이시의 이러한 건의는 레비나스가 지녔던 완고하고 철저했던 윤리적 물음을 ‘산만하고 다양한 세계화된 세상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모습들로 나타나는가?’라는 복수적 윤리에 대한 기대로 우리를 인도한다.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



복수적 윤리에 대한 제안은 기술문명에 바탕한 새로운 미학적 패러다임을 언급했던 발터벤야민에 의해 이미 예견되었다. 발터 베냐민의 기념비적인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마치 현대의 첨단 테크놀로지에 바탕한 가상의 공간, 즉 인터넷 시대를 예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벤야민은 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현상에 대해 회의적이고 여전히 예술작품이 지닌 아우라에 집착했던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자들과는 달리, 기계적으로 재생산된 예술이 전통적 아우라의 개념을 파괴하여 새로운 미적 아우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보았고, 또한 진보적 이념과의 융합을 통해 사회변혁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예측하였다.

특별히 기술복제 시대 예술작품의 특징을 ‘free-floating contemplation’(탈향脫向, 산만함, 부유浮游함)[각주:8]이라고 지적한 그의 통찰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을 미리 보고 온 것처럼 정확히 그려냈다. 기본적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산만하여 인터넷에 떠있는 창을 따라 부유(浮游)하는 주체이고, 자본의 운영원리에 따라 모든 국경이 해체된 세상 속에서 유목하는 주체이다. 이제 우리의 의식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머무를 수도 없다. 첨단 IT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산만하게 떠돌아다니면서 수많은 타자들과 교신하는 주체이고, 세계화로 인해 파생된 자본의 흐름을 따라 국경을 넘어가고 넘어오는 수많은 타자들과 동시다발적으로 교제하고 연대해야 하는 주체이다.

복수적 윤리란 이렇듯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매체환경의 변화에 따른 현대인의 의식과 삶의 변화, 신자유주의체제 밑에서 집요하고 처절하게 파멸되어 가는 다양한 인간 실존에 주목하면서 그에 따르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구성방식에 주목하는 윤리의 새로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쓰는 기독교 윤리

지금까지 우리는 성의 차이, 세대 차이, 지역 차이, 계급 차이, 노선 차이 등 무수한 차이들이 자아내는 관계 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엮어져 왔다. 그러나 그 차이를 하나로 엮었던 방식은 이제 그 기능적인 면에 있어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새로운 얼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현대사회의 복수적이고 산만한 관계속에서 얽혀지는 새로운 통합방식, 즉 일사불란한 통제가 아니라 타자들이 지닌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새로운 통합방식을 추구해야 할 때이다. 이는 인간들은 상호간의 필요와 서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인격과 사회적 실존의 자리가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여성은 남성과 다르기 때문에 남성에 의해 지배되고 억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다름이 존재 이유인 바 여성과 남성 그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인간성이 어떻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고, 우리 주변에서 이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주 노동자, 다문화 가정, 노숙자들과 같이 나그네 된 사람들, 우리와 다른 신체 장애자들과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변방에서 우짖는 목소리로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전체성의 테두리에서 볼 때 동일성안으로 포섭되지 못하고 변두리에 머물렀던 타자들,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면 호모사케르(Homo Sacer)이다.[각주:9] 하지만,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기독교 윤리의 새로운 보편성 안에서 이와 같은 소수자들의 위치는 레비나스식의 ‘면대 면(面對面)의 관계’뿐 아니라, 다양한 횡적 연대와 접속을 통해 새롭게 획득되어져야 한다.

기독교 윤리는 막힌 담을 허무는 기독교 신앙의 변혁적 원리와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교회라는 자기 동일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자기 동일적인 페쇄성에 안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가 그것을 보증한다(본회퍼). 그것은 모든 낯 설은 것 중의 가장 낯선 존재으로서의 하나님이 전적으로 타자였던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을 한 인간을 통해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리를 통해 고난 받는 사람들을 자신의 존재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타자성을 옹호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혹은 예루살렘이 혹은 율법과 도그마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할 뿐 아니라, 새롭게 획득되는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자리로 우리를 내몬다. 그 자리란 자본의 논리가 유일한 삶의 원리가 되어버려 모든 차이와 다름이 균질화된 세상이고, 그 곳은 또한 세계화된 사회속에서 온갖 이유로 차별과 배제와 폭력의 상황에 놓인 복수적 타자들이 떨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에서 기독교 윤리는 다시 쓰여진다.

ⓒ 웹진 <제3시대>


  1. 2010년 11월 웹진에 게재되었던 [자기의 윤리(I)-“주체여 안녕히”](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3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G, Deleuze. & F, Guattari,F.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Lane. (Minne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xx [본문으로]
  3. 2011년 2월 웹진에 게재되었던 [타자론(II)-은희경 ‘새의 선물’에 빚지다]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5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4. 2011년 3월 웹진에 게재되었던 [타자론(III)-욕망 혹은 그것의 좌절과 얽힌 욕구불만에 관한 에세이]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62)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5. 2011년 4월과 5월 웹진에 게재되었던 [타자론(IV)-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68)와 [한국땅에서 라깡적으로 윤리하기](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71)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6. 본서에서 필자는 ‘타자들의 윤리’와 ‘복수적 윤리’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아직 더 예리하게 가다듬어야할 부분이지만, 기본적으로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와는 다른, 좀 더 폭이 넓은 윤리적 개념을 부각시키 위해 ‘타자들의 윤리’를 썼고, ‘복수적 윤리’는 ‘타자들의 윤리’와 기본적으로는 같은 의미이지만 레비나스적 색깔을 탈색시킨 개념이라 보면 무난할 듯 싶다. 굳이 ‘복수적 윤리’를 쓰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타자들의 윤리’가 단순히 ‘타자의 윤리’에 글자 하나 더 붙인 개념이 아니라, 사상사의 지난했던 전개과정을 함축하고 있기에 그렇다. 본서에서는 그 과정을 들뢰즈, 본회퍼, 트레이시, 발터벤야민의 순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문으로]
  7. David Tracy, On Naming the Present: God, hermeneutics, and Church (New York: Orbis Books,1994), 37. [본문으로]
  8.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226. [본문으로]
  9. 호모사케르(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의 책 제목이다.(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Standford: Standford University Press, 1998). 직역하면 성스러운 者지만, 현실에서는 불결한자,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자이다. 체제가 체제밖으로 밀어낸 자들인 셈이다. 미국에서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호모사케르를 만날 수 있고, 외국인 유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필자 역시 호모사케르 같은 취급을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특별히 국경을 넘었다가 다시 미국으로 입국할 경우 (예를 들어, 한국 갔다 돌아올 때, 캐나다 쪽에 있는 나이애가라 폭로를 구경하고 미국으로 넘어올 때 등) 우리는 무슨 테러용의자 취급을 받으며 국경수비대들의 삼엄한 경계와 조사를 받는다. 미국의 지하경제(3D 업종)는 대부분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주로 멕시코에서 건너온)이 담당하는데, 이민국에서 불체자들의 수가 늘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불시 단속으로 들어가 이잡듯 불체자를 색출한다. 아마 그 과정에서 불상사가 발생해도 불체자라는 이유로 단순사고 처리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호모사케르는 너무나 다양하게 존재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가정, 탈북자, 노숙자, 동성애자, 좌파빨갱이 등으로 말이다. 우리 모두 잠재적 호모사케르인 셈이다. 그리고 그 범위와 속도는 신자유주의 팽창과 더불어 빠르고 넓게 번져나가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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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야 할 동성애 혐오증

 

 

이종원
(본 연구소 회원)



  동성애를 바라보는 눈

  “너 때문에 집안이 완전 개꼴이다. 더러운 자식!”

  지난해 방영된 SBS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의 대사다. 조카 태섭의 동성애를 알게 된 삼촌은 태섭에게 막말을 퍼붓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이 대사는 한국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지금은 동성애를 다룬 주제가 공중파를 통해 방영되고 스크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각 또한 과거에 비해 많이 개방되었다. 21세기에 성적 다양성이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되며 유교 사상이 뿌리박혀있던 한국 사회에도 성적 다양성이라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교회문화는 아직도 동성애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혐오스럽고 그런 단어를 언급하는 자체까지도 경기를 일으키고, 수치심을 유발케 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병적이며 죄라고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 교회문화의 지배적 현실이다. 이러한 동성애적 혐오의 강한 보수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 배타성은 어느 종교보다도 강하다. 동성애 혐오를 넘어 그 자체에 강한 죄의식을 심어 우리를 동성애 혐오자로 만들고 있다. 이런 보수적 기독교를 향해 "예수가 게이였다?"라고 외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너무 뻔한 질문일 것이다. 어찌 감히 신성한 예수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신성모독이다. 경박하다, 불경하다, 마녀사냥 하듯 그 발언을 한 사람을 향해 이단 시비가 휘몰아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이 불경스런 질문을 던지는 책이 있다. 난 이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런 책을 기독교인이라면 필독서로 읽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보수 기독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방영될 때 시청거부운동 및 광고안내기 운동까지 펼쳤던 개신교 보수단체들로선 ‘펄쩍 뛸’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The Man Jesus Loved)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준 <예수가 사랑한 남자> 이 책은 미국에서는 2003년 출간된 책으로 올해 동연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는 테드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Jr) 교수. 시카고신학교 교수이자 퀴어 신학(Queer Theology·동성애 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한다.

  제닝스 교수는 이 책의 기획의 의도는 동성애혐오와 게이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성서 구절들을 우선 다루는 방어적 전략에서 벗어나서 성서에 대한 전통적인(오) 독해가 받을 만한 개연성보다 사실상의 ‘증거 우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즉 동성애적 욕망과 관계들을 감싸 안고 긍정하는 많은 증거에 대한 검토에 집중할 것이라는 의도를 밝히면서 복음서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전승들에 대한 탐구로,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의 논점들을 다루고 있다.

제1부 : 예수가 사랑한 남자

  ‘예수는 게이였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예수가 게이였다’는 것을 설득하지 않는다. 여섯 구절밖에 안 되는 동성애 혐오적 텍스트를 가지고 씨름하기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전반적인 예수 전승인 성서 속에서 동성애에 호의적으로 볼만한 풍부한 텍스트가 있다고 제시한다. 예로 요한복음서에서 '제자'는 예수의 무릎과 품에 기대어 있었고(요 13:23, 21:20), 십자가 증인 중 유일한 남자였으며, 죽기 전 자신의 생모 마리아와 가족으로 연결된(요 19:25~26) 내용의 해석을 기존의 주류 해석학이 애써 숨겨 왔던 혹은 외면해 왔던 ‘예수가 사랑한 남자’에 관한 서사로 해석적 개입을 시도한다.

  제닝스 교수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워 있던 일화를 중심으로 해서 신약성서 내·외적 자료들에 대한 자세한 검토결과 성서는 동성애 혐오적이 아닌 옹호적 서사임을 증명하고, 여기에 고대 사회의 동성애적 관습 등을 참조하여 연구하면 신약성서가 재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동성애자로서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한다.

제2부 : 예수 전승

  ‘백부장과 젊은 애인’ 일화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미 제국의 질서 안에 일부 편입되어 있었던 초대 교회가 동성애적 성향을 ‘위험한 기억’으로 간주하고 이를 예수 전승으로부터 삭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흔적들을 주목한다.

 “그는(백부장) 그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치유와 온전함을 원했고 갈망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욕망으로 그는 행동한다. 그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소년애에 대한 관념을 전적비난하며, 그가 경험하는 종류의 사랑에 대해 어떠한 이해도 동정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리로 나서 한 유대인 치유사를 찾고, 거절과 조롱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사랑하는 소년 애인을 위해 도움을 청한다.”(p.257)

  또한, 제9장의 당혹스러운 젠더에서 거세된 남자들에 대한 일화중 에티오피아인 환관의 경우 “그는 경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고 ···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읽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환관이 읽고 있던 이사야서는 특별히 신의 통치 안으로 환관(거세된자)을 포함한 바로 그 예언자의 책이다. 또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이야기”,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이던 발을 씻기시던 예수’의 이야기기는 전통적 젠더 역할의 전복을 권고하고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예수 전승에 대한 고찰로부터 젠더 역할들의 신성함이 예수 전승들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은폐하지 않고서는 동-성 간의 성애적 행위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주장될 수 없다고 제닝스 교수는 결론을 내린다.

제3부 :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나 자식,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그 누구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27)

  성서는 그 이름(예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라는 새로운 결혼 및 가족적 가치들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가족해체의 전복적 가르침은 동성애자들의 상호적 성애가 배제되지 아니하는 확대된 가족 공동체를 소개한다.

  사두개 인들의 질문, 즉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와 결혼관계 후 죽고 부활했을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여야 하냐는 질문에 예수는 결혼 및 가족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미래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를 폐지해 버린다.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녀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에 의해 소유권이 완전히 폐지된다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그들이 부활할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인간적인 제도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 한 사람에 의한 다른 한 사람의 지배 또는 소유가 폐지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신약성서에서 선교적인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교체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의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라”(새번역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선포하고 제자들을 만들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가족 제도에 대한 반대 그리고 이를 재생산하는 구조인 결혼에 대한 의혹은 동-성애적 관계들의 수용에 부합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급진적인 미래상을 증거하고 있다는 시각이 놀랍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의 특징이 되는 성애 혐오에 귀속될 수 없다고 제닝스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거듭나야 할 동성애적 시각

  역사적으로 성서는 노예제, 여성차별, 소수자에 대한 끝없는 학대를 정당화하고 지키는 근거로 성서를 인용해 왔다. 동성애 혐오를 지지하는 증거의 빈약함이 노예제 등 인종차별을 주장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훨씬 더 많지만, 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인종차별이 성서적이지 않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제닝스 교수가 동성애 혐오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인 교회의 입장이 성서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듯이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 전환자 등을 괴물로 만든 동성애 혐오증은 교회가 만든 신화일 뿐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자들의 평등을 부인하는 등 차별의 도구로 사용된 성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 주장으로 거듭난 것처럼, 동성애의 보편적 혐오적 시각에서 인종차별과 노예제의 철폐를 주장했던 운동이 동성애의 보편적 금지의 시각에서 눈을 돌려 성서 속의 진정한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끝임 없이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맹목적 신앙의 장애물을 재거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인습적으로 교회에서 순종하라는 지배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교회에서는 “믿음이란 그저 믿는 것일 뿐”이라는 너무 파렴치한 순종의 신앙을 강요해 왔다. 믿음의 증거로 자발적 맹목의 신앙에서 벋어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저 믿는 것이 아니라 왜? 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금지를 탈피하고 생각의 외연을 넗혀 나가면 보다 큰 믿음의 세계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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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13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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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로또

 

김난영
(한백교회 교인)



출산일이 다가오며 본격적으로 출산용품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아용품의 세계는 얼마나 깊고 넓던지요. 형편에 맞는 선에서 베스트 상품을 고르기란 그야말로 토나오는 검색질이 필수입니다. 이쯤되면 아기를 위한다고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상품 사느라 돈지랄하는게 유난이 아니라, 해외직구 싸이트까지 뒤적거리며 고품격최저가를 찾아 헤매는게 유난아닐까싶습니다.

알뜰히 준비한다고 주변 육아선배들에게 이것저것 물려받고 빌려쓰는 용품도 꽤 되지만, 한정된 재정 안에서 살림이 빠듯해지는건 어쩔수 없는 결과인지라, 신랑도 저도 새삼 가계지출에 대한 고민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고민 중에 연금복권 관련 기사를 보고는, 잠자리에 누워 복권에 당첨되면 그 큰 돈을 어디에 쓸까?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상상만해도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집니다. 현금다발을 들고, 백화점 매장을 돌며 우리 아가에게 최고로 안전하고, 최고로 좋은, 유기농, 저자극 상품들로 장바구니를 채웁니다. 얼마나 편할까요? 두둑한지갑만 있다면, 몇날며칠 클릭질을 하며 고민할 필요도 없이, 육아용품 쇼핑도 백화점 한바퀴로 끝낼 수 있습니다.

마침 친정 근처에 유명한 복권 판매처가 생각납니다. 이른바 '로또명당'이라 불리며, TV에도 몇번 나왔던 그 집 간판은 몇번째 1등 당첨이라는 현수막이 수시로 바뀌며 걸립니다. 언젠가 친정 다녀올 때 복권 한번 사보자 다짐을 하고 잠을 청합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일이 있어 친정을 간 김에 복권 생각이 나 버스정류장으로 나갔습니다. 이거 '내가 너무 요행을 바라는게 아닐까' 싶어 망설이던 중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배란주사를 맞아가며 임신을 간절히 준비하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너무 감사하게도 임신이 확인되었는데, 아기집의 위치도 불안하고 게다가 자궁경부에 혹도 발견되어 대학병원으로 옮겨야겠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친구의 말에..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좋은 의사선생님 정보와 안심하라는 말을 전하고 통화를 겨우 마쳤습니다.

로또명당으로 향하는 버스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순간 임신초기에 육아선배인 친구가 수시로 전화해 주변에 임신초 유산되는 경우가 많다며 조심에 조심을 당부하던 일과 심심치 않게 들리던 신랑 친구 부인들의 슬픈 유산 소식이 생각이 났습니다. 별생각없이 제 임신소식을 전하려고 연락한 친구에게 본인은 임신이 잘 안된다는 뜻밖의 이야기에 머쓱해져 전화를 끊고 미안한 맘이 들었던 일도 생각이 났습니다.

버스를 그냥 보냈습니다. 새삼 저희 부부가 계획하지 않은, 뜻밖의, 그리고 선물같은 임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기와 제 건강을 지켜주심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모르고,
일확천금의 요행만 바랐던 부끄러움에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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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삽니다


 

 문재승
(한백교회 교인)


"선배님, 이렇게 틀에 박혀 사는거 마음에 드세요?"

하루는 너무 답답해서, 나만 이러는 건가 싶어, 밥먹고 나오는 길에 친한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직장생활 적성에 맞는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먹고 살려니까 다 참으면서 다니는 거지" 방금전 점심으로 무얼 먹을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선배는 심드렁하게 대꾸합니다.

"부장님, 저는 낮에 커피숍에서 저렇게 죽치고 앉아서 무언가 몰두하는 사람들 보면 부러워요. 저렇게 살고 싶어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저는 급기야 부장님께 저의 권태를 고백합니다. 직장생활 20년의 부장님은 저를 흘끗 보며 피식 웃습니다. "재승씨, 저런 사람들 다 영업뛰는 거에요. 고객 만나는 일들이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일인지 재승씨는 잘 모르는구나"

평생을 직장을 다닌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어떻게 직장 안다니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엄마는 혀를 끌끌 찹니다. "너는 젊은 놈이 패기가 없냐. 왜 그 나이에 놀 생각만 해, 뭔가 이룰 생각은 안하고" 대한민국에서 조직을 통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는 모양입니다.

"나뇽, 어떻게 하면 재미나게 살 수 있을까? 우리 시골에서 살까? 땅콩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볼까?" "응 그래그래" 처음에는 땅콩집 지을 돈은 있냐고 묻는 아내였지만 매일 아침 와이셔츠 단추를 잠글 때면 나오는 남편의 넋두리에 아내는 이제 대답하기도 지치는 모양입니다.

"율아, 아빠랑 엄마랑 행복하게 살자. 우리 율이도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아빠도 꼭 그럴게" 차마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아들에게까지 묻지는 못하고 그저 다짐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니 아직 묻지 않은 분이 계시네요. 하나님,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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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 투표에 대하여

 

조병환
(본 연구소 회원)


대한민국이라는 한 배를 탄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서 같은 밥을 먹고 다함께 뛰놀고 장난치고 서로 보고 웃으면서 한 교실에서 같은 조건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만은 다같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같은 환경, 같은 조건에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이 공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바람직하고 꼭 그렇게 해야 될 일이기에 많은 학교에서 이미 무상급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학교가 다같이 이 제도를 실시하자는 것인데 한나라당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700억 원이 들어가는 무상급식제도는 나라를 망치는 포퓰리즘이라고 하면서, 나라를 살리는 애국적 결단이라며 서울 시민의 세금 180억 원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 주민투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통령 내외는 미리 부재자투표를 하고 해외출장을 떠났습니다. 나를 따라서 다같이 주민 투표에 참여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한나라당 안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잘못된 주민투표라고 비판하는데도, 잘못된 투표라도 야당의 힘에 밀려서는 안 되니 이겨야 한다고 사생결단으로 투표전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아마 오는 총선, 대선을 생각하고 지금부터 이기는 투표를 미리 해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주민투표는 이기거나 지거나 한나라당에 악재로 작용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상위 20%의 수입이 월 600만 원이라면, 하위 20%의 수입은 100만 원입니다. 6배 이상의 경제적 차이가 나서 현격한 빈부격차가 생겼습니다. 유무상 구분을 가르는 중간층의 불균형 때문에 시민의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다같이 내는 세금으로 다같이 같은 밥을 먹자는 것이 무상급식 아닙니까? 이미 내놓은 세금으로 밥을 먹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돈 내고 먹는 아이, 돈 안 내고 먹는 아이로 갈라놓고 뭘 어쩌자는 것입니까?
아이들은 모른다고요?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그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한 배를 탄 아이들을 편 가르기 해서 배 안에서 서로 반목하고 다투라는 것입니까? 밀려오는 갖가지 파도와 엄청난 위험에 같이 대처하고 헤쳐나가는 데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인데,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훈련을 학교에서 해야 합니다.

무상급식 반대는 두 부류의 사람들한테 마침내 환영받지 못하고 실패할 것입니다. 서울 시장의 무상급식 반대는 시민을 향한 속임수입니다.
속임수는 얼마 안 가서 발각됩니다.
발각 뒤에는 성난 파도가 밀려올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가야 할 길은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에서 이기든지 지든지 무상급식으로 가야 합니다. 서민의 복지를 뭉개버리는 제도는 시민들의 가슴을 얻지 못합니다.
다가오는 총선,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할말이 무엇입니까?
할말을 남기려면, 할말을 제대로 하려면
상식이 지배하도록 과감히 몰상식을 몰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들은 지금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이 밥걱정 안 하고 공부할 수 있고, 병들면 치료 받고 조그마한 임대 아파트에서 살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에게 이런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 줄 수 있는 정치인을 선출해서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들어야 국제 무대에서 존경 받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만드는 기초작업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국민들이 걱정 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내가 이런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표를 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국민들은 한 표를 던지는 기본이 이런 나라를 만드는 데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정치인이라야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고, 남북관계도 호전시켜 통일에 기여하고 국방도 튼튼하게 해서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경제정책도 빚쟁이 나라가 되지 않고 경제가 바로 됩니다.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도록 해서 총화에 도움이 됩니다.
다 같이 먹을 수 있어서 나라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누구나 다 같이 공부할 수 있어서 너 죽고 나 살기 식 경쟁이 없어집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큰 도둑놈 되는 악순환을 차단시켜 봉사체제가 이룩됩니다. 본전 뽑는 교육장치는 큰 도둑놈을 만듭니다.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노동자가 저임금으로도 살 수 있어서 기업에 경쟁력이 생깁니다.
외국으로 싼 임금 찾아 돈 가지고 나가서 공장을 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네가 잘못되면 내가 세금 더 내는 제도여서 서로 잘 되기를 원하고 축복해 줍니다.
이런 정치인의 위상은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남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정치인이 바닥을 칠 때가 언제입니까?
1. 국민 세금 바로 쓰는 예산안이 아니어서 날치기 통과를 하는 데 동조하는 놈도 나쁘지만 주도한 놈은 사라져야 합니다.

2. 부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세금가지 감면해 주는 특혜정치는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무상 급식은 나라를 망친다고 말합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이런 정치인은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건설업자에게 주는 특혜는 분양 잘 될 때는 아무 말 없다가 미분양이 되면 별스런 방법으로 특혜를 주는 데 미분양은 시장 기능에 맡겨서 싸게 분양해야 이익 날 때도 있고, 손해 날 때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시장기능 아닙니까? 건설업자가 사돈이라도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4. ‘부익부 빈익빈’이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 정책입니다.
환율을 떠받쳐서 대기업은 돈 벌고 국민은 물가고에 시달립니다. 주식은 개미들에게 별 볼일 없고 대기업이나 부자가 돈 버는 것입니다. 배당금 1위가 홍OO 사장이고, 그래서 14명이 100억 원 이상의 주식 배당금을 받았습니다.
주식으로 돈 버는 사람은 대기업 사장이나 외국인들인 것 같습니다.
이 주식도 경마도박과 같이 가정 파탄이나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부채가 1,000조 원에 육박하자 이때부터 금리를 올립니다. 400조 원이 넘는 국가부채는 돈 벌어서 갚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출이 그렇게 잘 되고 경상수지가 계속 흑자인 가운데도 그렇게 빚이 늘어나는 걸 보면 앞으로도 빚을 줄 사람만 있으면 빚은 계속 늘어날 것 같습니다.
빚은 자기를 결박한 포승줄입니다.
국가부채는 결국 잘 나가는 공기업 팔아서 갚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국도 국채는 계속 더 뒤로 미루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도 빚을 져 놓은 정당이 상대 당을 향해 빚 문제를 거론합니다.
개인부채도 가진 것을 팔아야 갚을 수 있습니다.
팔 사람이 많아지면 부동산값이 떨어지는데, 집값이 많이 떨어지면 경제위기로 귀결되어 사람 살기가 아주 어려워집니다. 긴 고난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5. 거액의 은행대출은 권력자가 개입되어 있기 일쑤입니다. 그런 대출은 돈 받기 어려운 대출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구제금융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같이 짜고 해먹었다는 누명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돈을 지옥까지라도 쫓아가서 다 받아와야 합니다.
이런 재판은 판결이 너무 느려서 기다리기가 힘듭니다. 재건축도 기다리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4대강사업처럼 속전속결로 해치우면 속이 시원할 텐데!
재건축의 부정은 조합장의 비리가 문제입니다.
도정법을 무시하고 조합원과의 약속인 정관을 어기는 것은 물론, 관리처분계획을 덮어놓고 자기 편리할 대로 마음대로 조합 운영을 합니다.
개최해야 할 회의는 1년 이상 안 하고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 이사들과의 회의로 모든 것을 결의해서 합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3,000명이 넘는 조합원 총회는 100명도 안 되는 사람으로 돈 5만 원씩 주어서 서면결의로 끝냅니다.
이런 조합을 지도 감독할 시장은 조합장과 한패가 되어 문제점을 하소연할 기회조차 안 주고, 시장실을 지키고 앉아 조합원들이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습니다.
지도감독은 아예 없습니다. 손해 보는 사람은 조합원입니다!
큰돈 챙긴 놈은 누군지 모릅니다.

6. 세계 각국에서는 부자들이 세금 더 내겠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립니다. 부자들이 생각해봐도 세금 더 내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부자감세를 일관성 있게 추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상급식은 안된다고 하면서 부자 아이들에게 밥값을 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돈 안 내고 밥 먹는 가난한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 아닙니까.
부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큰돈인 세금은 감면해주고 쥐꼬리만 한 밥값은 내라는 것입니다.
부자들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까?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는 처사입니까?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몰상식이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복지에도 유상복지가 있습니까? 돈 낼 수 없는 사람에게 복지가 필요합니다.
무상복지가 나라 망친다면 복지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 아닙니까.
복지 없는 정부가 있다면 그 정부는 무엇을 하는 정부입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까지 부자가 떨어뜨린 부스러기로 연명해야 합니까.
그 부스러기 때문에 부자와 권력자의 말을 듣고 투표해서는 거지 신세를 못 면합니다.

국민소득 2만불 시대 국민답게 최소한 밥은 같이 먹고 공부는 국가책임으로 시키고 조그마한 임대주택에서 살면서 병나면 치료 받을 수 있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모든 국민이 힘써야 합니다.
투표의 기준이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슴속에 꼭 새겨 놓아야 합니다.
앞으로 총선이나 대선에서 이런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마련하는 좋은 정치인에게 여, 야를 가릴 것 없이 표를 던지는 것만이 국민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국민이 던지는 한 표는 부자나 어떤 정치인의 말을 듣고 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정치인을 자신이 선택해서 투표해야 합니다.
투표로 해결이 안 되면 부작용이 따르는 혁명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다음은 악순환입니다. 불행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다같이 행복한 나라 만드는 데 함께 해야 모든 국민이 행복합니다.
부자는 영원한 부자가 아니고 권력도 쉽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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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사회 속에서 신학의 변혁"

강연자_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필립 클레이튼 박사는 미국 클레아몬트 신학대학 교수로, 과학과 신학 철학적 신학,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세계적 석학으로 손꼽히고 있는 학자로, 리처드 도킨스 논쟁에서 그의 논적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신학은 어떻게 변혁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강연을 하고, 한국의 신학자들과 토론하는 모임을 갖고자 합니다.(강연과 토론 모두를 통역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일시_2011년 10월 10일(월요일) 오후 7:00~9:00
장소_안병무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과 2번 출구. 두 출구 사이 골목 50미터, 좌측 4층 건물의 1층)
문의_02-363-9190 / 010-4944-2019
참가비_3,000원

주최_우리신학연구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종교문화연구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후원_기독교사상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9월 월례포럼(제146차)은 이 강연으로 대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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