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

 

주님이 명령을 내립니다. 천사장이 그 명을 받들어 소리를 내지릅니다. 그러자 좌우의 나팔수들이 거대한 나팔을 힘껏 불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순식간에 세상을 가득 메웁니다. 그러자 죽은 이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이들도 하늘로 이끌려 올라갑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좌우로 길을 만듭니다. 주님이 그리로 오신 것입니다. 하여 그들은 거기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는 마지막 때의 부활이 이렇게 청각적이기도 하고 시각적이기도 한, 한 편의 판타지 영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묘사는 바울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바울스럽지 않은 바울의 묘사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시청각적 부활 판타지 속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의 제2의 도시가 된 데살로니가는 본래 마케도니아의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기원전 4세기, 세계의 대제국이 된 마케도니아의 무수한 폴리스들 간의 국제교역으로 이 도시는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합니다. 해서 이 도시에는 여러 인종이 만나고 다양한 물품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다양성의 도시가 됩니다. 다인종이 드나드는 도시에는 으레 그들의 신전들이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또 그이들의 종교적 결사체들도 세워졌지요. 그중에는 이스라엘인들의 회당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당들 가운데 어떤 곳은 더 유대적이었고 다른 어떤 곳은 더 사마리아적이었지요.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중반에는 로마에 병합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도시를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지정합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이 지역 대도시들 가운데 로마에 가장 충성스런 도시였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9절에 따르면 유대적 성향이 더 강했던 한 회당에서 바울이 활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바울은 시당국에 고소당하게 됩니다. 회당 당국은 시당국과 로마제국에 충성스러웠으며, 시당국은 로마에 적대적인 행동을 할 것으로 보이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기소하고자 하였습니다. 다행히 바울 일행은 도시를 빠져나와 피신했지만, 바울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당국에 의해 끌려가 고초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이 텍스트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동족에게서 고통을 받았다’는 표현(2,14)을 보면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도 이스라엘인임은 의심의 여지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집단은 이방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그들도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한데 ‘유대인들’은 그런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저들이 바울집단을 괴롭히고 당국에 고소한 이유였습니다.

바울과 그의 측근들은 발 빠르게 그 도시를 빠져나와 남쪽의 오래된 도시 아테네에 당도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동료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모진 당하였고 일부는 죽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그런 정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해서 다시 데살로니가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바울의 측근인 디모데가 그 도시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의 협박과 회유에 고통당하고 있던 예수파 공동체가 전향할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디모데로부터 들은 정보는 공동체는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마도 디모데로부터 공동체의 동요에 관해 전해 들었던 모양입니다. 죽은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산자들은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습니다. 하여 그이들은 그 참혹함 속에서 기도합니다. ‘도대체 다시 오신다던 주님은 언제 오시나요!’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했던 이유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죽은 자들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알 수 없다고. 사람들이 ‘평안과 안전’을 되뇔 바로 그때라고 말입니다.

이런 답변을 이야기하는 바울의 묘사는, 앞서 보았듯이,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청각적인 판타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묘사는 하나의 패러디라는 점입니다.

과거 기원전 2세기 중반, 카이사르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고 데살로니가를 이 지역의 수도로 삼은 이후 이곳은 이 지방에서 가장 열렬히 로마를 지지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여 로마 황제가 다시 돌아올 때를 열망하면서 판타지처럼 묘사된 대중설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주’(퀴리오스)가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복음’(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용어는 황제의 등극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이가 도시로 되돌아오는 것을 ‘파루시아’라고 불렀지요.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황제를 마중 나가 그이를 ‘영접’(아판테시스)합니다. 그때 나팔이 울려 퍼지고, 영접하는 도시 주민들은 길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황제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런 패러디를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이야기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도시들은 도시로 들어오는 가도에 길을 따라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황제에 의해, 황제의 이름으로 죽임당한 이들의 시신들도 널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 패러디는 하나의 음울한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황제에 의해 죽임당한 이들이 황제를 영접한다는...

한데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묘사합니다. 음울함은 다시 축제장면으로 역전됩니다.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돌아올 때에 황제로 인해 죽임당한 이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신체훼손형벌로 처형된 이들의 몸이 회복되는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몸의 부활의 상상은 바로 이런 갈가리 찢긴 육체가 깨끗하게 회복된다는 바람과 맞물려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더 주지할 것이 있습니다. 그때, 그 재림의 때를 바울은 사람들이 ‘평안! 안전!’(에이레네 카이 아스팔레이아)이라고 되뇔 바로 그때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선전 구호였습니다. 이 말이 도시 곳곳을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평화를 선사하는 이, 안전을 주는 이로 갈망하게 됩니다. 이 구호와 함께 사람들은 제국의 질서 속에 확고히 포섭되게 되는 것입니다. 한데 바로 그런 ‘평안, 안전’의 구호가 울려 퍼지는 바로 그 순간, 주의 재림이 있습니다. 그때는 황제로 인해 처철하게 난도질당한 이들의 육체가 되살아나고, 그로 인해 갖은 핍박을 받고 있는 이들이 하늘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울은 바로 이 날을 이렇게 강변합니다. 그날, 황제에게 회유당하지 않고 견디는 이에게는 황제가 주는 안전, 평안과는 다른 안전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로마제국이 아닌 지구화된 자본의 제국이 세계의 평안과 안전을 준다는 메아리가 널리 울려 퍼지는 대도시 서울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읽고 있습니다. 서울은 지구적 자본의 한 복판인 뉴욕, 런던, 도쿄, 그리고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주변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그 대도시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지구적 제국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자본의 질서에 거스르는 이들이 무수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본의 추방령에 내몰려 스스로를 살해한 이, 몸이 불이 되어 잿더미가 된 이, 공장의 혹독한 질서 속에서 살해당한 이 등등. 그런 주검들이 도시 가도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고, 그 죽음을 기리며 메시아를 갈망하는 이들이 혹독한 자본의 질서 속에서 겨우겨우 숨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지구적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아니 그 신적 존재를 영접하기 위해 사람들의 안전과 평안을 희생시키며 제도를 바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에는 평안과 안전이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지구제국의 핵심 도시들보다도 더 열렬히 그 지본의 신봉자가 되고 그것을 신격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저주의 땅이 되었습니다. 해서 우리는 갈망합니다. 그 끝이 어디에 있나요?,라고.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는 바로 이런 우리에게 견딤의 지혜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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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법을 바라보는 데리다의 시선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지난 웹진46호에서 필자는 데리다의 ‘해체’에 대한 범박한 정리를 시도하였고, 이어서 데리다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진보. 보수 각 진영이 보이는 (데리다에 대한)입장의 차이와 의심의 근거를 잠시 설명한바 있다. 이번 웹진에서는 올해 미국 대선의 최대 이슈로 등장한 이민법에 대한 데리다의 입장을 따라가면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좀 더 친근하게 놀아보기로 하자.

 

프롤로그:  2012년 미국 대선의 관전포인트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올해 대선을 치룬다.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오바마와 공화당의 룸니의 대결로 좁혀진 미 대선은 몇 가지 측면에서 보수와 진보진영 사이의 첨예한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동성애, 이민법, 그리고 의료보험 논쟁이 그것이다. 우선 지난 5월 오바마가 동성애 결혼 지지선언을 미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하여 공화당에 먼저 싸움을 걸었다. 전통적으로 대선때마다 공화당은 낙태와 동성애 이슈를 물고 들어와 보수기독교세력의 표를 결집시키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의견을 피력하던 민주당 후보의 발목을 잡아왔었다. 특별히 2004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부시와 민주당의 케리가 맞붙었을 때,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명백한 사기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소위 ‘도덕적 승리(moral victory)’를 모토로 미국 기독교 우파의 결집을 이끌어내는데 공화당이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이란 물론 낙태금지와 동성애 반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다르다. 먼저 오바마가 공화당을 상대로 공격적으로 동성애 문제에 시비를 걸었다. ‘변화와 희망’으로 상징되었던 오바마의 개혁적 이미지를 다시 곧추세우고, 다소 느슨해져버린 진보진영 표심을 회복하려는 속셈이 깔려있다는 정치평론이 등장했고,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동성애 결혼을 찬성하는(47%) 비율이 반대하는(43%) 의견보다 높게 나타나 공화당을 경악시켰다. 앞으로 남은 대선 레이스에서 공화. 민주 양당에 동성애 이슈가 어떻게 작동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동성애 이슈 못지않게 이번 미국 대선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이민법에 대한 양당의 입장이다. 지난 2012년 6월 25일 미 연방대법원은 애리조나 이민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서 수시로 국경을 넘는 멕시코 불법이민자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애리조나 주정부는 지난 2010년 재정한 이민법에서 불법이민자들에 대한 반인권적 조항을 삽입하였고, 이에 대해 오바마 행정부는 애리조나 이민단속법이 연방정부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라는 제소를 대법원에 제출한바 있다. 대법원 판결은 애리조나 이민법 가운데 문제가 되었던 4개 조항 중 3개가 위헌이라고 밝혔다. 위헌으로 판결된 3개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 (1)이민자가 합법 체류신분 증명 서류를 소지하지 않을 경우 이를 범죄로 간주하는 것, (2)공공장소에서 불법체류자들의 구직행위를 불법화한 것, (3)추방 가능한 범죄가 의심되는 이민자를 경찰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한 것 등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교통법규 등 다른 위반으로 경찰의 검문을 받을 때 체류신분이 의심될 경우 합법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 제시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위헌 소지가 분명치 않다는 판결을 내려 많은 이민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실제로, 대법원 판결 직후 잰 브루어 애리조나 주지사는 “경찰 검문권 조항을 즉시 시행하도록 하겠다”고 밝혀 불법체류자 단속을 강하게 암시하였다. 애리조나 이민법 판결로부터 촉발된 이민법논의는 올 미국 대선을 좌우할 뜨거운 감자로 등장할 것이다. 

 

데리다의 유로 2012 관전기

 

데리다 본인은 부인할 수도 있겠으나, 현대철학의 흐름속에서 데리다는 시종일관 해체를 자기 사유의 주제로 삼았던 인물로 기록된다. 하지만, 데리다를 읽는 필자는 늘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가 뭐지?’를 놓고 계속 고민해왔다. 데리다의 저서들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뭔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데리다 특유의 사유와 레토릭을 경험하면서, 필자는 데리다의 해체는 해체의 대상, 그리고 해체 후에 도래할 또 다른 내용에 포커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가 취하는 태도와 방법이 오히려 해체를 이해하는 중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념에 대한 신뢰와 개념은 미끈하게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필자에게 데리다는 매혹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위험한 인물이다.  
이렇듯 데리다에 대한 동경과 좌절이 마치 미친x 널뛰듯 오락가락하던 내게 얼마 전 끝난 유로 2012에서 스페인 축구팀이 선보인 ‘제로톱’ 전술은 데리다의 해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통로가 될 법도 하다. 펠레나 마라도나, 호나우도가 차지했던 센터포드 자리를 텅 비게하는 스페인의 제로톱은 기존 축구 전술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낯선 사건이었다. 센터포드 자리는 비어있는 기표이고 그 자리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기존의4-3-3이니 4-4-2니 3-5-2니 하는 축구의 전술은 수비-허리-공격을 분할한 후 나름의 입장과 역할을 전제로 한 전술이었다. 사람들은1974년 독일 월드컵때부터 등장한 요한 크루이프로 상징되는 네델란드의 토털사커가 기존의 축구전술을 뒤엎는 세계 축구계의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는 엄격히 말해 공격과 수비수간의 간격을 30-40m 내외로 유지하는 현대 압박축구의 기원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공격수와 수비수간의 경계를 허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 유로 2012에서 선보인 스페인 축구는 <공격-허리-수비>라는 기존의 체제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백넘버 상으로 공격수와 수비수를 구별할 수 있겠으나 수비수도 기존의 수비수 개념이 아니다. 양쪽 윙은 끊임없이 오버래핑에 가담하고, 중앙수비수들은 세트플레이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거나 제공권 확보를 위해 센터포드 위치로 이동한다. 적절한 비유가 될런지는 모르겠으나 스페인 축구팀은 마치 영화 테미네이터 II에 나오는 은색 액체 괴물로봇 T-1000 같다. 그 놈은 팔이 녹아내리면 다시 합성이 될 때 팔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되기도 하고, 머리는 계속 머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녹았다가 다시 재생될 때 손이 되거나 배 부위가 되기도 한다. 정말 괴물이다. 스페인 축구가 그렇다. 역할해체, 영역해체를 통해 스페인 축구는 세계 축구계의 괴물로 진화하고 있다. 스페인 축구가 이런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패스에 있다. 다른 세계적 수준의 팀에 비해서도 스페인 축구팀의 패스회수가 3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기존의 시스템에 입각한 축구는 수비에서는 쓰리백, 포백, 공격에서는 원톱, 투톱, 허리에는 중원을 지휘하는 지단 같은 플레이 메이커 등 선수 개개인의 역할과 전술이 주어져 있었고 그것이 얼마만큼 유기적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미리 약속된 패턴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스페인은 다르다. 수없이 이어지는 패스와 그 패스를 통해 창출되는 순간적이고 무계획적이며 불특정한 공간에 불특정한 다수가 마치 벌집에 벌들이 드나들 듯 골대 주변에서 난장을 부리다 칼침을 놓는다.
지난 웹진(56호)에서 필자는 데리다의 사유의 궤적을 언급하면서 데리다 초기를 나타내는 키워드로 산종, 대체보충, 차이 등을 지목하였고, 후기 데리다는 유령, 정의, 법, 메시아성, 환대 등의 용어가 중심을 이룬다고 했었다. 이 모두가 ‘해체’라는 강력한 원톱을 중심으로 움직일만도 한데, 정작 데리다는 본인이 해체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조차 거북하게 생각했었다. 데리다는 ‘해체가 무엇이냐?’ 는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장의논리에 입각하여 ‘산종’을 이야기 할 때도 있었고, ‘유령’을 언급할 때도 있었다. ‘차이’를 강조했다고는 하나, 어느 날에는 느닷없이 ‘법과 정의’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해체’라는 말을 가급적 자제하며, 스페인 축구로 비유하자면 ‘제로톱’ 전술을 구사하면서, 데리다는 그 비어있는 해체의 중핵을 메우려하지 않았다. 스페인 축구팀이 굳이 센터포드를 두지 않고 제로톱 전술을 구사했던 것처럼 말이다.
해체의 철학자 데리다! 하지만, 해체는 제로톱이고 공갈이다. 그 공갈은 차이, 유령, 환대, 대체보충, 산종, 정의, 메시아성 등의 이름으로 옮겨다니면서 기존 지성계의 판을 어지럽힌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렸던 것은 무엇일까? 물론, 골을 넣는 것이겠지. 그 Goal은?

 

다시, 데리다를 생각하다.

 

데리다가 시종일관 그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면서 집착했던 문제는 결국 ‘경계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경계의 문제’는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안과 밖의 문제, 즉 경계의 이편과 저편, 내부와 외부, 주체와 객체를 분할하여 이편과 내부와 주체에게 권리와 자격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종국에는 정치적/윤리적 문제로 귀착된다. 데리다는 이 경계의 조건들이 무슨 장엄하고 숭고한 원칙과 대의가 아니라, 실상은 임의적인 땜질과 봉합, 그 권위의 원천이 다분히 자의적이고 우연스러운, 그래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다. 그러니 제발, 앵글로 색슨이나 게르만이나 유대인이라고 목에 힘주지도 말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에 산다고 거드름 피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했던 미국 애리조나 이민법 문제로 돌아가 데리다식 국가관에 대해 생각해보자. 종교개혁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중세 봉건주의는 서서히 파국을 향해 치달았고, 새롭게 등장한 시민계급은 전시대의 강제와 규율이 아닌, 자신들의 이드와 이익을 존중하고 보장해줄 새로운 형태의 통치시스템을 요청하게 된다. 근대 국가 형성에 영향을 끼친 루소의 ‘사회계약설’에 의하면, 국가는 구성원 전체가 가진 공동의 힘으로 개인의 신체와 재산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고, 개인은 국가란 이름으로 결합되나, 국가의, 국가에 대한 결속과 연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관과는 비교가 안되는 느슨한 것이었다. 어쩌면 국가는 새롭게 분출되는 시민계급의 well-being(잘 먹고 살 사는 것)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을까? 시민계급에 의한 (중세 봉건시대와는 다른) 권력의 사회적 재전유, 그것이 바로 근대국가의 탄생이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내셔널리즘이라는 담론은 근대라는 시간과 공간, 즉 담론을 규정하는 새로운 프레임을 통해 그 권위가 확립되는 것이지, 국가 자체에 무엇인가 숭고하고 고유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단군의 자손, 아리안의 후예 등 온갖 종류의 국가담론과 민족신화는 안과 밖을 대조시켜 안에 있는 나의 특권과 권리를 정당화하려고 설정된 기획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외국인 이민을 반대하거나, 불법외국인 노동자를 색출하려는 국가의 논리는 숭고한 국가질서와 전통을 전제하지만, 기실 그것은 자기의 이익에 방해가 되거나 위협을 가하는 이물질에 대한 응징 내지 박멸 그 이상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데리다는 우리 삶 도처에 세워진 기존의 경계들에 질문을 던지고 되묻는 작업을 감행한다. 우리의 습관과 관행, 우리의 익숙함과 안온함을 위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모든 코드들, 경계지어진 것들의 기원을 집요하게 캐물으며 데리다는 기존의 경계, 코드, 규칙, 법들을 해체하면서 확장한다. 그것이 바로 데리다식 정치이고 윤리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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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인은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는가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얼마 전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으나, 제목이 무척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제목의 의미를 풀이해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낸다는 것이겠다. 이 질문을 살짝 바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던져보면 어떨까? 왜 기독교인들은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는가, 라고.

성폭력 혐의를 받고 삼일교회를 사직했던 전병욱 목사가 최근 홍대새교회를 개척했다. 사임한 지 17개월 만이다. 줄곧 목회만 해왔고 나름의 목회 ‘성공신화’를 갖고 있던 이였으니, 그가 목사로 교회에 복귀하는 것은 사실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전병욱 목사의 교회개척 소식이 아니라, 그 교회에 700여명의 신도가 모여들었으며, 새벽기도마다 200명가량의 청년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언론보도였다.

피해자들의 신빙성 있는 진술이 다수 공개됐고, 언론을 통해 사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난 상황에서 전병욱 목사를 여전히 추종하는 현상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진실하게 사죄한 적이 없는데도, 그가 번듯하게 목회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전병욱 목사 사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목회자들의 부패・부도덕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다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적어도 더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목회자의 위험성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없지 않을 텐데도, 지탄을 받아 마땅한 많은 목회자들이 여전히 교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목회를 하고 있다. 부도덕한 목회자나 지도자가 자신의 신앙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자기 교회의 목회자, 자신이 속한 기독교 단체의 지도자는 그런 사람일 리 없다고 믿거나, 너무 쉽게 그를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전병욱 목사의 교회 개척 소식에 교계가 발칵 뒤집혀 있을 때, 한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에서는 종교 집단에서 벌어지는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사례를 두 주 연속 보도했다. 한 여성은 미대를 졸업하고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까지 했던 엘리트인데도 ‘선녀님’의 비상식적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폭력을 감내하거나 폭력의 가해자가 됐다. 이 피해자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도덕성에 문제가 있지 않았다. 또한 강압적 상황에 놓여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종교 지도자의 터무니없는 명령을 거역하기는커녕 그에게 한 올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 방송은 이러한 행동의 심리적 기반을 분석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기도 했는데, 이 실험의 모형이 된 것은 1963년 미국에서 스탠리 밀그램이라는 학자가 수행했던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이다. 밀그램은 실험의 진짜 목적을 숨기고 ‘기억과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전문직 남녀 중 실험 참여자를 모집했다. 실험 참여자는 창문 너머에 있는 학습자(연기자)가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볼트씩 전압을 올리며 전기충격을 가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참여자가 상당히 높은 전압에서야 충격을 가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예 최고 전압까지 올리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옆에 있는 과학자가 ‘치명적인 신경 손상은 없다, 실험을 계속하라’고 보증해주었기 때문이다. 권위자의 명령이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하는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감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높은 전기충격을 가한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여자들이 누르는 단추의 최고 전압은 450볼트였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전압이다. 실험이 끝나고 실험의 배경을 설명한 후 최고 전압의 단추를 누른 사람들에게 왜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는지 물었을 때, 사회복지사는 “이런 교육법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전기충격으로 학습능력이 향상되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간호원은 “평소 의사에게 처방이 맞는지 세 번씩 물어보기 때문에(의사가 괜찮다고 하면 자신은 거스를 수 없으니까)”, 수질검사관은 “난 내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했을 뿐(내게 책임은 없다)”이라고 답했다. 정리하면, 권위자의 명령이 자신의 윤리적 신념과 어긋나더라도 그 행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감면해주는 나름의 설명체계를 갖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는 ‘설명의 언어’가 권위자의 부당한 명령을 분석하고 고발하기보다는, 권위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아를 타인과 자기 자신의 윤리적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역할을 하기 쉬움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권위자의 존재감’이나 ‘죄책감을 덜어주는 설명체계’가 개인들이 비윤리적 결과를 초래하는 명령에 순응하게 만드는 강한 요인들이다. 그리고 이 두 요인의 부적절한 조합은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차원, 체제 차원의 ‘악’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한국교회가 당연시하는 ‘목회자의 권위’는 교회 밖에서는 ‘몰상식’인 것들이 교회 안에서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을 교인들이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한, ‘회개’를 개인의 고백적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신학은 어떠한 잘못도 하느님께 고하기만 하면 내가 피해를 준 타인과는 아무 관계없이 마술처럼 용서받게 된다고 믿게 만들고, 잘못된 교회 관행과 목회자의 부도덕함에 대해서도 눈감게 만들 수 있다. <밀양>에 나오는 살인범처럼, 전능한 하느님이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피해자(당사자)의 용서 없이도 자신은 죄 사함 받았다고 믿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보증해주는 교회의 ‘권위자’들이야말로 전병욱의 성폭력을 조장하고, 수많은 청년들이 그 사건에 대해 판단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만든 원인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권위자의 존재감’이나 ‘죄책감을 덜어주는 설명체계’만으로는 전병욱 목사 추종 현상이나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는 여러 사례들에서 발견되는 ‘신자들의 자발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마지못해 이들 목회자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이고 열광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고 신뢰한다. 애초에 자신들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기독교인들은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면서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죄책감을 경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이들 신자들의 자발성 안에는 일반적 상식에 따른 윤리적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겠다. 이런 자발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병욱 목사를 추종하며 교회에 몰려가는 청년들, 부도덕한 목회자를 지지하는 신자들은 밀그램의 실험에서처럼 도덕성이 의심받지 않는 강한 권위자를 갖고 있지는 않다. 밀그램의 실험 참가자들은 명령이 내려진 이후의 상황에서 윤리적 판단을 할 것인가(명령 거부), 아니면 윤리적 판단 자체를 중지할 것인가 선택해야 했다면, ‘부도덕한 목회자 추종’의 경우는 명령을 내리는 자의 권위 자체가 심하게 손상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병욱 목사나 부도덕한 목회자에게는 그들이 상실한 도덕적 권위를 충분히 보충해주고도 남는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마 그들 목회자들 중에는 상대를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언변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 조성 능력 등 소위 ‘카리스마’라고 불리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카리스마의 진정한 의미는 상대의 ‘설득됨’이 있을 때만 획득될 수 있다. 목회자들의 어떤 뛰어난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동의하고 감동 받는 신자들의 내면에 있는 그 ‘무엇’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 목회자와 신자들이 어떻게 상호 결속을 이루고 ‘외부’의 윤리적 개입을 거부하게 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열쇠일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아이디어로 ‘하나 됨’을 추구하는 교회 안의 인간관계를 떠올려볼 수 있다. 한국의 특수한 인간관계 이해를 기반으로 한국적 심리치료 방법을 고민한 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국인들이 관계 형성의 목표로 ‘심정이 통하는 관계’를 설정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이때 심정이 통하는 관계란 자신과 상대가 정서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 됨’의 느낌을 갖는 관계를 말한다. 즉, 상대와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관계를 ‘진짜 관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대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우리’ 관계를 재확인한다. 사실, 이 주장은 그다지 복잡한 주장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관계맺기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진짜 관계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관계가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이러한 관계맺기 방식은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촉매제로 작용해 매우 증폭된 형태로 나타난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쉽게 이야기하기 힘든 고민이나 상처도 교회 안에서는 그 대화 상대를 찾기 쉽다. 그리고 서로 기도제목을 공유하는 문화나 많은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통성으로 자신의 상처를 울부짖으며 고백하는 한국교회의 전통은, 개인에게 심정을 토로할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익명의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과 심정을 공유하는 ‘우리’ 관계라는 느낌이 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우리’라는 신앙적 관계가 ‘우리’의 윤리적 우위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라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되며, 이 관계에 위해를 줄 수 있는 목소리는 배제되기 쉽다. 그것이 아무리 옳은 소리여도 말이다. 때문에 ‘우리’에 대한 외부의 비판은 우리를 공격하는 목소리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러한 관계가 낳는 또 다른 심각한 부작용 중의 하나는 ‘우리’의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 안에 다양한 발언기회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누군가 다른 목소리를 낼 때 그가 더욱 힘내서 말할 수 있도록, 다른 구성원들의 목소리만큼 명확하게 들릴 수 있도록 그에게 물리적・심리적・제도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 ‘우리’는 결국 그 다른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혐의가 삼일교회에서 처음 불거졌을 때도 당회가 택했던 솜방망이 처벌은 전병욱 목사의 권위는 보전해줬을지 몰라도 피해자였던 공동체 구성원들의 울부짖음은 평가절하한 것이며, 결국 이들을 교회 안에서 침묵하는 익명으로만 남게 만든 것이다. 이는 하나가 된다는(또는 교회를 지킨다는) 미명 하에 공동체 안에 있는 타자 자체를 소멸시키고, 그래서 결국 타자와의 거리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 전형적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목회자의 권위, ‘회개’라는 신앙 양식, 그리고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문화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버려야 할 것은 없다. 다만 이 세 가지가 불의한 방식으로 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을 끊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의 불의한 결합이 결국 외부의 비판에 대해 귀를 열지 않는 폐쇄적 신앙을 만든 것이라는 혐의가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성서에서 보여준 한 사례야말로 다소 진부하지만 그래도 가장 근본적인 대안을 우리가 상상하게 만들어준다고 말하고 싶다.

갈라디아서 5:18에서 바울은 ‘육체의 기회로서의 자유’와 ‘사랑을 통해 서로에게 종이 됨’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진정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말하는 사랑은 막연히 모두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전반부에서 나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한 교회의 위기 상황에 대해 구체적 대안으로 제시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전반부에는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초래된 분열과 위기에 대해 전하고 있다.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갈라디아 교회를 압도하고 있을 때, 이들이 맞았던 위기는 단순히 신앙논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동질성의 회당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들, 유대적 정체성을 추종할 사회・경제적 자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밀어내는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때문에 바울이 ‘사랑하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이들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밀려나더라도 갈라디아 교회 자체는 남겠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곧 갈라디아 신앙 공동체가 ‘육체의 기회’를 따르지 않는 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통해 서로에게 종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때 ‘서로’에는 유대 전통을 따를 수 없는 타자가 포함된다. 이로써 공동체 안의 각 주체는 자신과 상대의 ‘거리’를, 주체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이때 거리는 각자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리가 아니라 서로가 섬기는 관계로 묶여있음을 의미하는 거리가 된다.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라는 바울의 권면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리를 삭제하지 않고도 공존하는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웹진 <제3시대>

* 이 글은 "왜 홍대새교회로 청년들이 몰리나?"라는 제목으로 <뉴스앤조이>에 실렸던 글의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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