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지보수자의 편지_소설 <표백> 리뷰

 





(평범한 워킹맘, 페미니스트, 간간이 글쟁이로 변신)



1. 

    이 글을 쓰는 나는 시스템 유지보수 인원이다. 영어로 SM(System Maintenance) 인력이라고 한다. 돈이 오가는 인터넷 뱅킹, 수강 신청을 위해 접속하는 대학교 인트라넷, 혹은 자잘한 인터넷 쇼핑몰이나 소규모 출납 관리 시스템들에도 나와 같은 SM 인력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하다. 처리가 잘 안된다는 사용자의 단순 문의부터 시작해 시스템의 기능을 이러저러하게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기능 개선 의견 등을 접수하고, 때에 따라서는 변동된 세금 정책에 맞추어 시스템의 계산 로직을 변경한다.


    현실 세계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하면 시스템은 늘 그보다 두 발짝, 혹은 세 발짝 뒤에 있다. 이미 현실 세계에서 확정된 것들만 시스템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때로 기술이 현실을 리딩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필요성이나 상상력은 이미 사람들 대다수가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는 불편함 속에 이미 존재해왔다. 기획자는 그러한 불편함을 조금 더 날카롭게 캐치하는 사람이고, 나와 같은 시스템 유지보수 인력은 선두 그룹이 재빠르게 만들어 둔 시스템들이 이미 한참 전에 철이 지났음에도, 뒤처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땜빵하고 도색하는 역할을 한다.


    《표백》에서 자살 선언을 이끄는 세연이 본다면 기가 찰 노릇이다. 획기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아니고, 심지어 ‘그려진 밑그림에 따라 개선하는 일(77쪽)’도 아니며, 그저 이 구식 퇴물을 퇴물로 보이지 않도록 질질 끌고 가는 일이다. 시스템이 누렸던 가장 큰 영광은 다른 이들이 이미 맛 본 후라 단물이 쪽 빠져 버린 이 늙은 시스템을 하루하루 연명시키는 것이 나의 주된 노동인 것이다. 물론 세연이 바라보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도 그다지 어울리는 시스템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이루는 본연이라면 어떨까.


2. 

    장강명의 장편소설 《표백》은 이 시대 청년들의 좌절과 절망이 세상의 완벽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하는 한 청년, 세연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의 논리는 이렇다. 이 세계는 이미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어떤 노동도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1970년대 정서를 지배했던 새마을 운동과 같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노동도 아니고, 90년대 벤처붐 때와 같이 신기술을 주도하는 노동도 아니며 지금의 노동은 그저 있는 시스템을 ‘유지보수'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 시대의 개인들은 어떠한 이념이나 당위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생존만을 위해 노동한다. 여기에서 청년들의 삶은 아무리 노력해도 생존을 위한 삶 그 이상을 넘어갈 수 없고, 그조차도 선택된 소수에게만 가능하다.


    그리고 세연은 이 티 없이 완벽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싶다.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예수와 같은 선구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자살이다. 그것도 이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조건을 갖추어, 일반적 기준에 비추었을 때 자살할 이유가 하등 없는 상태에서 수행하는 자살이어야 한다. 그녀는 그녀와 그녀를 뒤따른 연쇄 자살이 완벽한 이 세계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해석 불가능의 영역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공이 예정된 청년들의 자살로 하여금 이 세계의 작동 원리로 포섭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살하기 위해 사회적 성공의 토대를 마련한다. 삼성전자 합격, 대학원 수석 졸업, CPA 합격 등이 그것이다. 아무리 봐도 자살할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자살을 ‘연출’하는 것이 세연과 세연 무리의 목적이다. 그리고 자살 직전 이 세상에 반대한다는 메세지를 남긴다. 그들은 이것을 ‘자살 선언'이라고 불렀다. 이 자살 선언은 완벽하게 새하얀 이 세계에 어떠한 색도 더하지 못하는 다른 청년들, 이른바 ‘표백 세대'를 대신해 세상에 핏빛 얼룩을 새겨낸다. 그리고 그 얼룩은 작중의 사회 구성원들 뿐 아니라 <표백>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까지 붉게 스며든다.


   이것은 상처다. 오래도록 아물지 않을 것만 같은 상처. 세연의 자살 선언은 살아남은 자에게도, 혹은 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자살을 선택한 이에게도 이 사회에서 패배했다는 수치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이들이 견디어 온 삶은 살아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구차해진다. 세연이 잡기에 빼곡히 적어 둔 논리의 망을 피해 ‘살아야 할 이유’[각주:1]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사람들의 잘못인가. 우리 사회는 누구에게도 살아야 할 이유를 주지 않았다. 숨이 붙어있기 바쁜 세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다시 되돌아 우리를 상처 입힌다.


   세연은 우리의 노동이 단지 세상을 유지보수할 뿐이며, 따라서 우리의 삶은 이 완벽한 세상의 부품 이상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제시하는 자살 선언에도 삶이 들어 설 자리는 없다. 이 자리를 대신 채운 건 그들의 죽음을 완벽하게 연출하기 위한 내러티브 뿐이다. 세연이 하고 싶었던 것, 가고 싶었던 곳을 포함한 그녀 본인의 열망들은 혹시라도 자신의 자살이 오독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가차없이 희생된다. 세연의 친구들 역시 그들에게 남은 생의 나머지 시간을 성공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소진한다.


   그녀가 제시한 자살 선언자들의 죽음은 그녀가 닮고 싶어한 예수의 죽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는 그가 살아 온 삶의 연장선 상에서 그간 그가 지켜내 온 삶의 가치들을 고양시키는 마지막 정점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세연이 선택하는 죽음은 오히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가 자신의 시스템을 지켜내기 위해 인간들의 삶을 부품으로 격하시키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들은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가 제공하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인간의 무쓸모 등을 자살이라는 행위로 맞받아 쳤지만, 그 자살 안에도 결국 삶의 의미는 없었다. 세연과 그녀의 친구들 역시 그들의 삶을 자살 선언을 감행할 수 있는 조건 정도로만 축소시켰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오랫동안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던 세연의 안으로 괴물의 심연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각주:2]


   세연도 이를 알았을 것이다. 그녀의 삶이 온전히 자살 선언만을 위해 맞추어져 있고, 그러한 삶의 주인공은 세연 자신이라기보다 단지 영웅을 꿈꾸는 한 명의 청년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세계에 자신이라는 존재의 발자국을 찍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상처 입히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세연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 상처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윽고 자살 선언을 이행하는 날, 세연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3. 

   그러나 분명 이 세계에 절망만이 남겨진 건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시대를 유동하는 근대라고 정의했다. 세연이 묘사하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더 이상 변형 불가능한 고체에 가깝지만, 사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일렁이는 거대한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지구가 회전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이 세계의 일렁임도 결코 멈출 수 없다. 한 예로 얼마 전 한국 사회를 두려움에 몰아 넣었던 메르스 사태를 떠올려보자. 메르스 사태로 사람들은 그토록 거대했던 사회가, 꿈쩍도 하지 않을 것만 같던 세계가 경제활동의 둔화에 따라 서서히 중단되는 것을 목격하고 공포에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염병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던 사람들의 경제활동 감소는 은유로서가 아니라 하루 끼니가 달린 누군가의 생계였기 때문이다. 메르스 국면이 완화됨에 따라 경제활동도 도로 페이스를 회복했지만, 이는 현대 사회의 성격을 비약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즉 지금의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정체된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일렁이는 어떤 움직임이다. 만약 어느 순간 이 움직임이 중단된다면, 그건 그 자체로 이미 다른 세계를 뜻할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일렁이는 사회의 특징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세연이 ‘자살 선언'을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었던 명불허전 대기업인 삼성 그룹의 내일조차도 말이다. 성공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는 보상이지만 이조차 지속 가능하지는 않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실패가 될 수 있고, 오늘의 패배자가 내일의 승리자가 될 수도 있다. 명백한 성공이란 그 스스로도 흥행에서 참패한 자기계발서에 박제되어 있을 뿐이다. 오히려 확실한 건, 이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이 안에서 보장되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건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게도 동일하고, 노년에게나 청년에게도 똑같다. 성공의 가능성 뿐 아니라 윤리 규범이나 가치 또한 불확실하며, 지속적으로 변동된다. 


    따라서 이 세계는 지속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시적으로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어제와는 미묘하게 또 다른 시공간일 지 모른다. 어제까지 건실하던 회사가 오늘은 망해버렸고, 어제 범죄자로 취급되던 아이돌은 오늘 다시 명성을 회복했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는 이 거대 시스템은 그 자신조차 통제가 불가능한 하나의 흐름이다. 여기에 어제도 오늘도 존재하는 것은 이 시스템이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유지보수자들의 노동 뿐이다.


    따라서 이 세계를 시스템으로 환원시키자면 이 시스템의 본질 역시 전면에 있지 않고 그 후면에, 즉 어두컴컴한 전산실 속에 있다. 세연은 유지보수의 노동이 새로운 것의 설계나 건설과는 다른 것이라고 선을 긋지만, 사실상 이 노동은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근원적인 힘이자 언제든 이 세계를 중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결국 이 세계가 우리의 노동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이 세계의 끝도 노동으로써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4.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는 자의 변명일까. 나는 나의 노동이 그리 부끄럽지 않다. 내가 어떤 시스템을 유지보수하건, 유지보수자는 시스템의 황금기를 누릴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이미 이 시스템이 최초 도입되었을 때 받았을 영광과 찬란함은 다른 이의 것이고, 그 이후의 필요성을 위해 퇴물이 되기 시작한 시스템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시스템과 동고동락한다. 안쓰럽기도 하고, 증오스럽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자식 같기도 한 시스템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질질 끌고 나간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는 총체는 실상이 없는 추상과도 같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의 그림자에는 나와 같은 수많은 유지보수자들이,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두컴컴한 전산실에 숨어 있다. 결국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란 모두가 애증으로 다루고 있는 시스템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환상과도 같다.


    그것은 첨단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래의 기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맨손의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며 출시된 순간부터 노쇠되어 간다.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는 세계가 끊임없이 일렁이듯이, 시스템조차 변화되지 않고서는 제 자리를 유지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완성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스템은 완성된 즉시 미완성의 길로 들어선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자들의 시스템 유지보수 자체는 시스템에 이끌려가는 부품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을 앞서 이끌고 가는 노동이다.


    이것을 가능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 할 수 있다면 나는 현실에 존재할 세연들에게 감히 죽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의 시도가 헛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당신이라는 생명을 이 세계의 얼룩 정도로 꺼뜨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유지보수하는 일개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이 세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신과 같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실낱같은 가능성을 붙잡고 당신에게 사라지지 말라고 말을 건네고 싶다. 이 편지가 부디 닿기를 바란다.


ⓒ 웹진 <제3시대>

  1. <표백> 작중 화자인 적그리스도는 세연에게 반대해 ‘디스이스리즌닷컴'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하고자 마음 먹는다. 세연의 자살선언을 싣는 ‘와이두유리브닷컴'에 대항하고자 함이다. [본문으로]
  2.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 프리드리히 니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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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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