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과부와 정치적 시민, 그리고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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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룻이 시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머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룻기」 3장 5절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장례식은,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더는 없을 거야”라고 했다.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영웅이었고, 죽음으로 사회적 통합을 가져올 마지막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제는 그 누구도 시민사회 전체의 애도의 대상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불과 3개월여 만에 우리는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사회적 애도의 의례를 치루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고가 전해지기 직전까지도 그의 존재는 한국 민주주의의 좌절과 수치스러움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내가 요청받은 원고의 주제는 ‘한국사회와 돈’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하여 참여정부 핵심층의 부패에 관한 검찰의 브리핑을 염두에 둔 기획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지난 주 토요일 아침, 마침 내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가 이사하게 되던 날,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뉴스를 들으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전임 대통령의 자살. 어느 일간지는 이것을 ‘시스템 살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자신 이외에 누구도 그의 목숨을 강제로 회수한 이는 없지만, ‘정치적 타살’이라고 할 만큼 마지막 숨구멍까지 압박하며 죄어오는 권력의 조임을 당해야 했다. 또한 일사불란한 명령 계통이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기득권 집단이 제각기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한 치의 가릴 것도 없이 발가벗겨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서거 후 그는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대통령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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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그림판 (2006.6.6)


한데 삶에서 죽음으로의 극적인 경계 이동만큼이나 수치스러움에서 자랑스러움으로의 생각의 이동은 너무나 극적이었다.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은 반전시켰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대적인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공중파 방송 3사가 장례식과 노제를 생중계하고,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다큐를 제작 방영했으며, 화장장에서 49제 때까지 유골을 안장하기로 한 사찰 장면까지 생중계되었다.

티비의 오락프로는 애도기간 동안 방영이 중지되었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초기 화면에 흑백 톤의 애도 디자인을 넣었다. 전국 수백 곳에 시민들에 의해 분향소가 가설되었으며, 무려 오백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참배를 했다. 대학교 강의실마다 선생들은 견해를 묻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고,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타살의 책임을 물어 현 대통령의 탄핵 서명이 인터넷 공간에서 전개되어 백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하여 어떤 이는 한국에도 자랑스러운 대통령이 생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국민의 다수가 그의 서거에 애통함을 표했고, 나 역시, 비록 몇 가지 주요 사안에 있어서 결코 동의할 수 없어 정치적으로 그의 반대자에 가까웠음에도, 애통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장 깊은 아픔을 겪고 있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권양숙 님[각주:1]일 것이다. 시신을 확인하면서 실신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장례식 때에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나타났다. 필경 그녀가 겪고 있는 자기 존재 파괴의 상태는 비교불가의 절대고통 바로 그것이었겠다.

정치적 타살을 체험한 다른 사례들에 관한 자료를 참조하면, 배우자를 잃은 아내들은 종종 상황에 부적절한 말을 내뱉는 언어 붕괴 현상을 겪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주던 기억의 교란을 일으키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타살자의 아내들은 그러한 자기 파괴적 비탄 상황에 지속적으로 놓일 수만은 없다. 그녀는 죽은/임당한 남편의 입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몸이 되어야 한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무너져버린 ‘사적인 아내’가 아닌, 그 불의한 죽음을 당한 남편을 대신해서 증언하는 ‘공적인 아내’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며,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 

죽은 자, 아니 죽임당한 자는 말하지 못한다. 그 시신의 고요함은 자기 증언의 부재를 의미한다. 바로 이 증언 부재의 침묵에 소리를 부여해주는 이가 바로 배우자 여성인 것이다. 그녀의 눈물, 그녀의 신음, 그녀의 비틀거림이 바로 그러한 증언의 형식이다. 하여 이러한 배우자 여성이 몸으로 하는 증언 행위, 그것은 죽임당한 자의 의례에서 핵심을 이룬다.[각주:2]

이렇게 배우자 여성은 비탄 상황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에서 증언자가 되어 죽은/임당한 남편의 소리를 대언하는 자로 역할 전이를 일으키게 된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는 사회적, 문화적 요청에 직면하게 된다. 곧 정치적 타살자의 아내들은 ‘과부’에서 ‘정치적 과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권양숙 님은 남편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한다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정치적 살해자와 장례를 공유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 컸던 탓이겠다. 그러나 곧 그녀는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녀의 ‘정치적 과부되기’가 국민장의 의전 형식에 의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전 형식의 핵심은 ‘영부인되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거한 이가 대통령임이 그녀를 통해 만천하에 대언되는 것이다.

「룻기」 3장 5절에서, 시어미인 나오미가 기획한 몰락한 가문의 회복을 위한 프로젝트에 며느리 룻은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죽은 남편의 침묵을 대언하는 씨족의 관습에 의거한 과부의 행동, 그것은 단적으로 정치적 과부되기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주체와 욕망을 지배적인 문화적 코드에 맞추고 그러한 의미망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정치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는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처럼 권양숙 님 역시 국민장을 수용함과 동시에 국민장의 의전 양식에 맞춘 영부인되기를, 일러준 대로 다 수행한 셈이 되는 것이다.

한편 시민 대다수도 이러한 의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국가의례로 진행된 장례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대대적인 시민의 참여를 동반한 것은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야말로 국민장이 된 것이다.

하여 시민도 국민장의 의전 양식에 걸맞는 ‘정치적 시민되기’에 참여하였다. 노제가 거행되던 시청 광장과 그 주변지역에 즐비하게 붙어 있는 현 정권에 대한 극단의 증오감을 담은 벽보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국가의례의 일부로 환치될 수 없는 담론의 주역들, 국민장의 시민되기에 동참한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일부인 그들은, 그날 밤 국민장의 시민되기에 동의한 이들답게 ‘얌전한 항의자’였다.

나는 여기서 혼란을 느낀다. 모 신문이 시스템 살해라고 규정했고, 많은 이들이 정부에 의한 타살로 해석하고 있음에도, 왜 그 많은 이들 가운데 다수는 국민장이라는 것에 대해 순순히 동의하고 있는 것일까, 왜 스스로 국민장에 걸맞는 정치적 시민되기를 순순히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전임 대통령의 서거이니 만큼 결과적으로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에 저항하는 격렬한 비판과 논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왜 그토록 ‘조용한 합의’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죽은 이의 침묵을 대언하는 일이 단순한 합의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들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있어 나를 당혹하게 했던 것은, 한 후배의 고백에서 비롯된다. 그는 얼마 전까지 한・미 FTA를 추진하던 참여정부를 격렬히 비판하던 지식인이었다. 근데 며칠 전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반대를 후회하면서 ‘대통령님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울먹였다. 나는 적지 않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이런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는다. 위에서 말한 그 ‘조용한 합의’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하나의 징후다. 국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될 법한 주장을 펴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는 듯이 국민장을 받아들이는 이율배반과 상응한다는 얘기다.

그에게 묻지는 않았지만, 필경 그는 한・미 FTA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참여정부의 한・미 FTA는 잘못 추진된 발전기획임이 여전히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전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자기 신념을 철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통령님을 지키기 위해서’다.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각을 철회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우리 정치사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실행력을 지니면서 통용되고 있다. 그것은 ‘가신’이라는 용어다. 하여 국민장에 즈음한 그의 ‘정치적 시민되기’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신적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본래의 생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그럼에도 그가 일시적으로나마 가신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 때문일 것이다. 압도적인 슬픔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을 감내하게 했을 것이다. 그 순간의 비통함 탓에 생각의 균형이 무너지고, 세상을 ‘노무현 대 반(反) 노무현’이라는 단순 이분도식으로 생각한 결과일 것이라는 얘기다.

한데 과연 그럴까? 다시 원상복귀되는 것일까? 그가 한・미 FTA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으로 다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 원상복귀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필경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가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적 죽음으로 인한 애도의 정치가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때, 애도의 행렬은 세상에 그 죽임당한 이의 목소리를 다시금 울려 퍼지게 한다. 애도하는 이는 그러한 소리의 중개자가 됨으로써 정치적 시민이 된다. 한데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애도의 정치는 종종 정치적 시민되기를 퇴행적으로 만들곤 한다는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광장에서 통합만을 부르짖는 자기 서사는 이러한 퇴행성의 단적인 사례다. 해서 진보적인 한 일간지 사설은 ‘한・미 FTA나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참여정부의 한계가 아니라 ‘국가의 한계’였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이 그를 무조건 지지하는 ‘가신되기’이며, 가신적 정체성으로 통합되지 않는 모든 비판적 논의를, ‘국가의 한계’와 정부의 한계를 혼돈한 비현실적 몽상가의 의견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애도의 방식에 좀처럼 공감할 수 없었고, 헌화하는 것을 주저해야 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시청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그 한 구석에 설치된 작은 분향소를 보았다. 거기에는 근래에 죽임당한 정치적 피살자들의 명단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죽었구나 하는 새삼스런 각성에 도달했다. 한 사람의 죽음에서 죽임당한 많은 이들을 기억해내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에 광장에서 목격한 가장 빛나는 애도를 나는 여기서 봤다. ⓒ 웹진 <제3시대>

  1. 그녀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칭호는 물론 ‘영부인’이다. 하지만 그녀를 영부인으로 부르는 것은 그녀가 다양하게 주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단지 하나의 요소로만 환원시키는 것이기에 여기서는 중립적이고 모호한 함의를 지닌 ‘님’이라는 칭호로 부르겠다. [본문으로]
  2. 정치적 타살의 대상이 여성이고 그의 증언자가 남성 배우자 혹은 가족인 경우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 배우자/가족의 경우는 정치적 과부와는 다른 방식의 정치적 임무에 대한 요청에 직면한다. 그런데 여성보다 남성의 경우는 그 역할이 훨씬 미미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수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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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몸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고, 자기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은 행위였다.
―「열왕기하」 16장 3절

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왕자를 바치라고 명합니다. 신속하게 의식이 준비됩니다. 지체할 틈이 없습니다. 온 국토를 불구덩이로 만들며 사방에서 시시각각 조여 오는 적군을 몰아내려면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도성 남쪽의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에, 그 성소에 불이 지펴집니다.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제단 한복판에 사지가 묶인 채 거의 혼절해 있는 왕자는 몸둥아리를 향해 질주해오는 그 기름 불꽃의 열기에 비명을 지를 힘도 없습니다. 순식간에 몸에 불이 타오릅니다. 온몸에 발라진 기름을 게걸스럽게 핥아가던 불꽃은 곧 아이를, 그 열기와 고통에 꿈틀 거릴 틈도 주지 않은 채 휘감아버립니다.

기름 타는 연기와 살갗 타는 냄새가 잔인한 돌풍을 일으키며 제단 주위를 꽉 채운 군중의 숨결을 자극합니다. 군중은 사제의 푸른 도포자락이 휘날리며 격렬하게 허공을 가르는 춤사위를 봅니다. 아니 차라리 그건 칼날이 된 옷자락이었습니다. 비명인 듯 고함인 듯, 찢어질 것 같은 소리에 사제의 목청이 사정없이 갈라집니다. 아이의 불타는 몸, 그러나 신음으로조차 백성에게 드러내지 못한 고통을 사제의 갈라진 목청이 대신합니다.

아이를 휩싸버린 불의 열기처럼 군중의 가슴에 불이 타오릅니다. 고함을 지릅니다. 발을 구릅니다. 그리고 옷을 찢습니다. 아이의 죽음이 슬프고 분해서입니다. 잿더미가 된 강도와, 주검이 된 어린 자식들이 늙은 아비 어미들이, 저 주검들이 하소연으로 격정에 불타서입니다.

이제 왕이 앞으로 나옵니다. 눈물에 콧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울먹이며 소리칩니다. 적을 무찌르자고 말입니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리자고 말입니다. 신께서 아이의 주검을 아셨으니, 이 나라를 이 백성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아하스 왕이 아들을 번제물로 바쳤다는 오늘의 본문을 가상 이야기로 만들어 본 것입니다. 르신 왕의 다마스커스 제국이 시리아-팔레스티나의 패권국가로 부상한 때입니다. 강력한 경쟁국이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가 왕도, 페니키아의 두로 왕 히람도 르신에게 굴복하였습니다. 르신은 아시리아의 서진을 막을 계획으로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소국들에게 연합군을 만들라고 압박을 가합니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연합군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한데 남부 몇 나라들이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아하스의 유다 왕국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르신은 동맹을 맺은 모든 나라들에게 명합니다. 유다를, 마온 족속을, 여왕 삼시가 이끄는 아라비아를 인정사정 보지 말고 한껏 짓밟으라고 말입니다.

왕국의 거의 전역이 잿더미가 됩니다. 동쪽의 블레셋이, 서쪽의 모압과 암몬이 북쪽의 이스라엘이, 그리고 르신의 다마스커스 제국이 닥치는 대로 불지르고 살육하며 도성을 향해 공격해 들어옵니다.

피난민들이 줄을 잇습니다. 갑자기 늘어난 도성 안 백성들이 먹을 식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식량을 공출해올 시골도 이미 사라졌습니다.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괜히 화를 내고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이 빈번해집니다.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누군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궁중에서 쿠데타가 혹은 그러한 음모가 있었습니다. 아하스를 축출하고 ‘다브엘의 아들’이라는 이를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이사」 7,6~7). 다브엘의 아들이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두로 왕 히람의 선조인 ‘두바일’이 ‘다브엘’과 동일인이라고 합니다. 하여 ‘다브엘의 아들’이라는 이는 두로 국의 공주가 낳은 유다 왕의 아들이라는 얘깁니다. 아하스의 아들이거나 그의 부왕인 요담의 아들로, 두로 국의 공주가 낳은 이라는 얘기지요. 어쨌거나 아하스는 이 반역 사태를 진압했고, 더 이상 민심의 동요를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극약처방을 내놓았던 것 같습니다.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이지요.

번제물은 대개 가축 가운데서 선별됩니다. 하지만 좀더 심각한 상황이 오면 인신제물이 쓰이기도 하는데, 주로 이방인, 노예, 천민의 자식 등이 제물로 선별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쿠데타 음모가 있었고,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왕을 향해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곧 왕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왕자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한 때는 바로 이런 시기였습니다.


희생제물은 그것을 바치는 이들 자신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말했듯이, 희생제물은 위기가 고조될수록 제의를 드리는 이들과 점점 근접한 존재로 선정됩니다. 그리고 가장 근접한 존재가 바로 자식, 특히 아들이었습니다. 곧 아들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이 의례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와 「예레미야서」 등에서 이 인신제사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효력이 있다는 대중의 믿음이 널리 퍼져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구절들이 전쟁와 같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위기시의 극약처방임을 시사합니다. 해서 나는 아하스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의례가 대중을 선동하는 강렬한 효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갈라진 국론은 통일되었고, 그 덕에 르신 동맹군의 침공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하스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 봉신국의 예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긴급한 구호의 신호를 타전했습니다. 3년을 끌던 전쟁(주전 734~732년)은, 아시리아가 다마스커스를 침공함으로써 끝났습니다. 다마스커스 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이스라엘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며 항복하고 맙니다.

결국 아하스의 두 가지 방책은 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인신제사로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고, 국제 외교전을 통해 침공했던 적성국을 완전히 혹은 더 회복할 수 없게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하스는 의도하지 않은 횡재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거의 전 영토가 황폐해지는 상황에서, 수많은 유민들이 남하하여 남왕국 유다로 몰려왔던 것입니다. 아주 빠른 기간 만에 흩어진 인구가 회복되었고, 아니 몇배가 늘었습니다.(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 때에 유다의 인구는 12만 명에 이르렇다고 합니다.) 폐허가 된 땅이 다시 경작되었고, 새로운 경지가 개간되었습니다. 하여 생산성이 높아졌고, 따라서 왕국의 부도 몇 배가 늘어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기 고고학적 발굴물을 보면 유다 왕국은 번영기에 접어든 것임이 분명합니다.

아하스는 아들을 제물 삼아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아들의 불타는 몸은 자기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으나, 사제의 대언을 통해 아하스의 고통을 발설했습니다. 즉 아들의 고통은 침묵으로 가려지고 아비의 고통으로 번안됨으로써, 아비인 아하스는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번영하게 하는 밑거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기원전 8세기의 한 후진국의 군주는 벌써 타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기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통치 기술을 활용했습니다. 그 이전이나 이후의 수많은 권력들도 이런 방식을 활용하곤 했습니다. 위기가 심할수록 더욱 큰 자극으로 고통을 양산하고 그 고통의 소리를 봉쇄하며 대신 자신의 소리를 더빙하는 방식 말입니다. 그것은 권력에게 성공을 선사하기도 했고, 실패로 귀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이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믿음을 대대로 간직해왔음이 분명합니다. 하여 그런 관행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용산의 ‘불붙은 몸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는 세입자의 육체를, 또 누구는 진압경찰의 육체를 화두 삼아 정쟁에 여념이 없습니다. 특히 현 정권은 세입자의 불붙은 몸을 혐오스런 것으로 해석하며 관련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시신을 느닷없이 부검한다고 훼손하기까지 합니다. 시신 훼손은 대표적인 모욕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경찰의 죽은 몸에 자기들의 소리를 더빙하여 커다란 확성기를 연결해 버렸습니다.

필경 현 정부는 지금의 위기를 대단히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재정권이나 할 만한 행태를 도처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특히 희생제물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오염된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인터넷 논객에서 학교 교사까지, 그리고 세입자들의 불타는 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연쇄살인범까지 말입니다. 세상의 분노를 투사시킬 존재를 만들어내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들의 목소리로 더빙해서 말입니다.

현재로선 이러한 계략은 성공을 거둘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든 않든, 불붙은 몸의 소리를 침묵에 빠뜨리고, 권력의 소리로 변조시키는 방식은 결코 야훼의 제사일 수 없음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훼께서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 죄’(「예레」 19,4~6)일 뿐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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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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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8 05:2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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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스의 "역겨운 행위" (자식 희생제물) 와 현 정부의 "얄팍한 계략"을 (용산 철거민의 희생) 비교한 좋은 글이네요. 아하스의 역사적 상황과 이명박 정부의 역사적 상황이 다르지만, 정권을 유지하는 방법은 유사한 것 같습니다. 아하스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한가지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는듯 합니다. 열왕기하 16장 7절을 보면, 아하스는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나는 왕의 종이며,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반 앗시리아 동맹의 (다마스크스과 북이스라엘) 위기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지금 이명박 정부가 반 미국 (북한) 위기에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비록 시대적 상황이 다르지만, 정치적 힘의 논리라는 맥락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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