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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08 [신학정보: 바울신학가이드14] 지젝과 바울(I) (한수현)

[바울신학가이드14]



지젝과 바울(I)


- 사람들, 지젝에게 갈 길을 묻다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지난 웹진에서 무어를 통해 이야기했듯이 다시금 인문학에서 성서 읽기가 시작되고 있다. 성서가 이천년의 시간동안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보다 서구 기독교의 정치적 경제적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패도의 정치 폭력에 신음하던 자들의 텍스트 또한 성서였다. 미국 자동차 여행중에 머문 값싼 허름한 인터넷도 되지 않는 방에서 심심한 마음에 서랍장을 열었을때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 책이 성서이듯, 성서의 생명력만큼은 쉽게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생명력만으로 작금의 인문학의 성서읽기의 이유를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성서 읽기를 독려하는 진보지식인들은 여전한 기독교의 힘 때문이라도 진보적 성서 해석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 말도 옳은 말이지만 지금의 현상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왜 현대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이 성서와 기독교를 다시 말하는지는 그들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방식에서 이해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웹진에서 지적했듯이 과연 그러한 읽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대답해 보아야 한다.  

   이번 웹진에서는 기독교에 대해 흥미있는 이론을 전개하는 학자중에 가장 대중에게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의 기인, 슬로야보르 지젝(Slavoj Žižek)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저서인 [죽은 신을 위하여] (Puppet and the Dwarf)에 대해서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 것이고 여기에서는 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밝히지만 나는 철학을 전공한 학생도 아니고 지젝에 대해서는 과문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웹진의 내용이 지젝에 대한 처음과 끝이 아니다. 또한 여기에서 말해지는 라깡, 칸트, 헤겔, 알튀세르등의 인물들은 오직 지젝이 말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더욱이 그러한 지젝의 말을 필자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본 글은 지젝을 미국에서 스타로 발돋움하게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기본으로 다루고 있다. 다음 웹진에서 다룰 지젝의 기독교 담론을 이해할 만한 수준까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지젝이 유명해진 대표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고집하는 학자가 아니라 이전의 대가들의(칸트, 맑스, 헤겔, 라깡) 충실하고도 삐딱한(?) 해설자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시대에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이들을 현실의 담론 속에서 되살려서 다시금 재해석하고 그들의 논리를 이용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나 후기구조주의에 맞서는 기백은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그럼 이러한 감탄사의 이유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서론에서 밝히듯이,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가지이다. 첫째,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둘째, 라깡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을 새롭게 이해한다. 셋째, 앞의 두개의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정립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본다. (Zizek 2009, xxx)


1.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니다.


    후기구조주의의 특징을 간단하게 말하면, 리얼리티,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실재를 건져올리기 위해 언어를 이용하여 닻을 내리면 그 닻은 실재의 대상과 닿는 순간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이리 저리 잡히는 것은 계속되는 언어의 연쇄일뿐 실재는 그 안에 없다. 그러므로 진리란 없다. 모든 개념은 ‘차이와 반복’을 통해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니 반복한다고 언제나 같은 것이 생겨나지 않는다. 즉, 차이와 반복을 통해 계속 생성하는 운동을 지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로 규정된 세상이다. 구조주의가 실재하는 세계가 하나의 언어적 구조를 통하여 나타나 우리가 사는 사회를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봄으로써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물과 이별할 수 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비록 당신 앞에 사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과라는 언어로 규정된 먹어보면 어떤 감각으로 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은 것이 진정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식상한 비판이지만 지젝의 후기 구조주의와 데리다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지나치게 이론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것에 있다. 헤겔식으로 보면 후기구조주의의 코멘터리는 같은 이론적 토대에서 무한적인 반복의 해석을 제공할뿐,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지는 못한다. (ZizekSlavoj 2009, 174) 이에 대해 맑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후기 구조주의의 이러한 형식을 맑스주의적으로 풀어내어 후기-자본주의의 비평적 토대를 만들었는데,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한 해체주의적 독법자체가 후기-자본주의의 징후라고 비판한다. 지젝은 라깡은 후기구조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한다. 

    지젝은 이러한 후기구조주의의 이론을 ‘deadlock’(교착상태)라고 이름한다. (ZizekSlavoj 2009, 174) 지젝의 거의 대부분의 저작은 이 교착상태를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음 웹진에도 다루게 되겠지만 기독교에 대한 지적의 독법 또한 과연 기독교에 이 교착상태를 돌파할 어떤 것이 있느냐에 지젝은 관심한다.

     Real, 가질 수 없는 너.

    지젝이 리얼이라고 말하는 것이 위에서 말한 실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데리다는 메타랭귀지라고 부른다. 후기구조주의와 데리다는 이 메타랭귀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라깡 또한 이 리얼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노래의 가사 처럼 ‘못 가지는 너’ 가 아니라 ‘가질 수 없는 너’이다. 즉, 가질 수는 없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은 꼭 남기는 것이다. 지젝은 데리다가 결국 ‘가질 수 없는 너’를 포기하기 위해 메타랭귀지를 포기하고, 그 결과로 모든 언어를 메타랭귀지로 만들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물질 뒤에 존재한 신은 인간으로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라고 말해버리면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이 신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범신론) 라깡은 이와 달리 ‘결핍’ 즉, 가질 수 없다라는 것을 그의 관점의 핵심으로 놓았다. (Zizek 2009, 176) 바로 내가 너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언어는 대상을 가리킨다. 소쉬르는 사인의 구조를 통하여 대상-언어의 관계에서 이른바 언어만 따로 떼어내어 사인(언어)=기표(signifier)+기의(signified)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즉, 언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 없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것과 목소리와 같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사인이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고 근대 언어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만약에 여기서 사인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세계를 언어의 세계, 또는 상징의 세계라고 한다면 문제는 이 언어들과 실재들을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 규정하고 대상과 언어의 관계를 해체시켰다. 지젝의 라깡은 이 언어의 세계, 상징의 세계에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잊는 거미줄과 같은 세계의 자리를 잡는 하나의 중요한 시그니파이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결핍이다. ‘가질 수 없는 너’의 결핍은 비록 가질 수는 없지만 ‘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굳게 서서 다른 거미줄들을 안정시킨다. 그것은 ‘결핍’이므로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Object a이다. 기의 (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이다. (Zizek 2009, 177)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와 같이 충만으로 가득차서 모든 세상의 운동의 원인이 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텅비어서 결핍된 아무런 의미가 그 안에 없는 어떤 기표이다. 이 기표가 표시하는 것은 실재 대상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는 결핍이다. 이 결핍이 가르쳐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없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없다’라는 것이 명확하게 존재하므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그저 없다는 후기구조주의의 언술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 된다. (Zizek 2009, 180) 즉, 라깡을 오해한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여기에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 기억해 놓아야 하는데, 바로 Kernel이란 단어이다. 이 단어의 정의는 ‘핵심’을 뜻한다. 지젝은 핵심이란 표현을 쓸때, kernel과 core를 쓰는데 커널이란 표현은 바로 결핍된 상태 자체가 핵심이 되는 것을 뜻한다. (Zizek 2009, 181) 이 표현은 다음에 기독교에 대해 ‘perverse core and subversive kernel’을 할때 다시 설명하겠다. 이 기의가 없는 기표인 ‘대상 A’(object a), ‘리얼’(실재), 또는 결핍된 기의(signified)가 없는 기표(signifier)와는 다른 ‘더 리얼’(the Real)이 있다.


     the Real, 바로 '너'


    바로 ‘너’이지만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 ‘더 리얼’이다. 원래 ‘더 리얼’은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것을 상징계 (Symbolic order: 인간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이해일 것이다.)로 가져오기 위해 상징화할때 그 충만함은 상징을 거치면서 결핍이 된다. ‘너를 가지기 위해 너라고 불러서 데리고 오는 순간 가질 수 없는 너가 된것이다.’ 이 결핍은 구멍으로 나타나있고 이 구멍을 중심으로 상징계는 구조화되어있다. (ZizekSlavoj 2009, 192) 여기서 잠깐, 지금까지의 내용이 정치사회적 관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해보자. 

    혹자는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시대를 인류의 마지막 시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가 마지막 경제체제이고 자본에 여지없이 휘둘리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이상의 것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인 이유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자본이 만들어낸 가난과 불법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며, 정치 참여를 통한 변화는 그전 하나의 미봉책으로 인류의 생존의 기간을 좀 더 연장할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현실 경제학과 정치학과 냉험한 현실주의만이 대안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종교는 그저 엄난한 삶속에서 잠깐의 안식을 제공하는 안식처로서 오직 죽음 이후의 세계를 반복할 것이다. 자, 이제 소위 빅브라더 (세상을 지배하는 인물)은 우리 앞에 앉아서 비릿한 웃음과 함께 선택을 강요한다. 인간의 삶은 구조속에서 극히 제한된 선택만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것이 되었다.
    윗 단락의 말들은 원래는 20세기가 저물기전에 이미 인문학에서 말하여지던 것들이다. 불과 몇십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표현을 달라졌지만 이와 비슷한 말들을 흔히 접한다. 흙수저, 금수저, 열정페이, 유리천장, 정치의 몰락, 전지구적 자본주의속에 한치앞도 볼 수 없는 경제의 흐름등. 20세기말에 철학적 담론들은 이러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은 구조속에 갇혀진 존재다. 솔직히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그러했다. 근대이전에 인간은 계급이란 명확한 카테고리로 규정된 존재였다. 소작인 아버지밑에서 태어났다면 소작인일 뿐이다. 그 인생에 맞게 쓸데없는 생각없이 살아가면 된다. 근대가 되자 인간은 마치 자유와 인권을 얻은듯이 생각했다. 이에 칼 맑스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가 그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척한 것이고 실상은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고 민주주의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좋은 물건인양 보이게 했다. 산업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내적모순을 제 3세계로 이동시켰고 빈부의 격차는 국가와 국가간에 계층과 계층간에 만연한 현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물어야한다. 과연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가? 새로운 정치는 가능한가? 새로운 삶은 가능한가? 이 질문을 철학적으로 물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구조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것을 상상하고 꿈꾸고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지만 담론적으로도 그러하다. 인문학은 담론으로 말하는 것이니.
    ‘그렇다.’ 또는 ‘가능하다’라고 말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른바 후기구조주의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이론에 맞서야한다. 바로 이것을 감행한 사람이 지젝인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실체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즉,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다. 오로지 너라고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단어, 언어일 뿐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 이것을 상징계(Symbolic order)라고 이름하자. 그것에 반대되는 것, 우리가 언어의 힘을 빌지 않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의 세계는 상상계(imaginary order)라고 부르자. 원래 이러한 생각의 대표적 철학자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외우던 그 학자이다. 바꿔말하면 언어없는 생각은 맹목이고, 생각없는 언어는 공허하다..라고도 바꿀수 있다. 즉 칸트는 생각과 언어를 결합시킴으로써 기본적으로 사물 그 자체 thing in itself 를 우리의 앎의 차원에서 분리시켰다. 즉, 우리는 실재 세상과는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물의 세계를 그저 의미없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물의 세계는 단지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 현실이라고 바꾸어보면 그 현실은 노동자의 눈물이 서려있는 곳이며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삶의 가치들이 무가치해지는 상처입은 세계이다. 그렇다면 후기구조주의를 벗어나려는 지젝의 목적은 바로 어떻게 현실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 우리가 과연 현실을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자, 이제 지젝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불리우는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이 결핍이라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무엇을 생성해 내는가를 살펴보자.

2.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


그래프 I

     그래프 I 에 대하여
    지젝은 여기에 의미의 소급성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대문자 S에서 S’로 가는 것은 시그나파이어의 운동이다. 즉, 기표가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다. 운동의 시작에 표시된 삼각형(∆)은 이른바 신화적 욕구, 즉 원인을 물을 필요없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묻지말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주체(Subject)가 상징계를 만나 (즉, 기표의 운동을 만나) 자신의 이름을 얻고 다시 귀환하느냐이다. 상징계를 세모로부터 출발해 다시 돌아오면서 주체는 빗금친 $가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 운동은 과거로의 소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지금 상징계의 기표의 운동을 뚫고 들어가더라도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과거의 기표의 운동을 뚫고 나오면서이다. 즉, 현재의 주체는 과거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된다. 어떤 의식의 운동을 따라 기표의 세계에 도착했을때 만나게 되는 기표(signifier)에 의해 주체는 호명되어진다. (ZizekSlavoj 2009, 112) 예를 들어,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은 교회에 들어선 순간 신앙인이라는 또는 기독교라는 거대한 기표에 의해 이름 불러워진다. 그 이후의 그가 만나는 여러 기표들, 믿음, 소망, 사랑, 삶의 의미, 인간의 자유등은 이미 모두 스스로 결정되어있다. 마치 그는 자신이 스스로 그 의미들을 찾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위의 운동과 같이 과거에 의미 결정되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프로이드의 케이스들에 비교할 수도 있다.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때 갑자기 겁이나고 답답해지는 것은 그 장소에서 어렸을때 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장소의 의미는 자신이 깨닫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과거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프 II(Zizek Slavoj 2009, 114)

    두번째 그래프는 좀 더 복잡한데, 지젝은 ‘소급의 효과’ (the effect of retrovers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먼저 빗금친 $가 원쪽으로 와서 운동을 시작한다. 첫번째 그래프에서 어떻게 주체가 되기위해 호명되고 상징계를 통과해 빗금친 $가 되는지를 말했지만, 사실 이미 주체는 빗금쳐저, 상징계에서 호명되어 있다. 일단 기표(Signifier)의 운동은 $를 두번 만나고 목소리 (Voice)가 된다. 여기서 목소리는 운동 이후에 남은 나머지를 뜻한다. 이 그래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타자 (O:the big Other)인데 처음에 예를 든 것이 기독교였으니 기독교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바로 상징의 코드(Symbolic code)를 대변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대타자, 기독교 사회에서는 기독교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모든 기표들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s(O)는 기표들이 대타자에 의해 결정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빗금친 $는 대타자를 뚫고 대타자에 의해 이미 결정된 기표를 뚫고 다시 귀환한다. 여기서 귀환한 주체는 대타자에 의해 동일시된 I(O)[ego-ideal:상징적 동일시]가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호명된 주체, 빗금쳐진 주체$는 대타자를 만나고 다시금 대타자에 의해 설정된 기표들을 만나 귀환하면서 대타자와 동일시(identify)된다. (Zizek 2009, 115) 즉, 대타자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데, 쉽게 설명하면 이제 주체는 자신이 바라는 어떤 것이 되지 않고 대타자가 바라는 어떤 것이 되고자 한다. (원래 주체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알 수도 없다. 주체 자체가 기표와 대타자의 만남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지면서 나는 어떤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 이때 주체는 마치 자신이 원해서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대타자(O)에 눈에 비친 자신을 상상하면서 대타자의 눈에 좋은 신앙인을 훌륭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라깡의 말인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들어맞으며, 이것이 바로 상징적 동일시(I-ideal)의 의미이다. (Zizek 2009, 117)

   중간 부분 왼쪽의 e란 상상적인 자아 ‘imaginary ego’이고 i(o)는 상상적 동일시를 뜻한다. (Zizek 2009, 119) 대타자를 통해 동일시[I(O)]하는 것과는 달리 상상적 동일시 (ideal-ego)는 타인의 무엇을 부러워 하여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빗금친 주체 $와 대타자(O)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상상적 동일시[i(o)], 또는 타인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 자아(e)를 형성할 수 있지만 주체는 끊임없이 대타자를 통해 상징계로 나아간다. 그것이 사회에서 ‘나’라는 주체로 살아갈 이름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프 III(Zizek Slavoj 2009, 124)
    ‘케보이’ (Che vuoi?)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그래프 III에 보이는데, 바로 “뭐라구요? 나에게 원하는것이 뭐라구요?”라고 해석할 수 있다. (Zizek 2009, 123) (이경재 2009) 그래프 II처럼 빗금쳐진 주체가 언제나 아무런 문제 없이 상징계에서 동일시되어, 즉 행복한 목사가 되어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언제나 상징계에서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어떤 잔여가 남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 잔여 없이 상징적 동일화의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나는 사회가 원하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고 그 때에 어떤 잔여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 남아있는 잔여가 주체에게 욕망(그래프에서 소문자 d)을 선사하고 주체는 대타자와의 만남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타자에게 끊임없이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여기서 욕망(d)는 라깡에 따르면 욕구(need)와 요구(demand)와 구별된다. 욕구란 생물학적 필요를 뜻하는 것으로 배고프면 먹어야 하는 욕구를 뜻한다. 요구란 그러한 욕구가 상징계를 통해 표현된 것이다. “먹을 것 좀 주세요.”라는 것은 바로 ‘배가 고프다’는욕구가 타인에게 전해지기 위해 요구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는데, 스파게티와 피클이 나왔다고 생각해보자. 주체는 순간적으로 묻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원한 것일까?’ 또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이 먹고싶어서 짜장면을 시키고 짜장면을 먹으려는 순간, 옆 테이블에 짬뽕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을 보았을때, ‘짬뽕을 먹을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나의 욕구가 요구로 바뀌었을때 주체의 요구는 언제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내가 먹고 싶은 말로 다 할수 없는 그 무엇을 완전히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최선을 다해 어떤 짬뽕이 먹고 싶다고 말하더라도 타인은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나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모르고, 비록 말로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잔여가 생긴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시켜먹고도 채우지 못한 그 잔여물이 바로 욕망(desire)이다. (이경재 2009, 206) 그러므로 여기에서 욕망(d)라는 것은 주체가 대타자(the big Other)가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알 수 없어서 남겨지는 잔여, “나한테 정말로 바라는게 뭐예요?”의 ‘케보이’로 남는 것이 욕망이며, 그 욕망의 곡선은 결국 세번째 그래프의 끝에서 ($<>o)에 멈추게 된다. 바로 빗금쳐진 주체와 대타자사이의 끝없는 질문이 계속되는 곳이다. “나한테 무엇을….” 지젝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유대교는 이처럼 끊임없이 주체가 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불안의 종교’라고 말한다. (ZizekSlavoj 2009, 128)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때, 정말 바치라는 이야기인가? 왜 나를 택했나? 왜 이스라엘을 선택했나?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자가 되었나? 끊임없는 질문이 연속되는 상태라는 불안이 계속된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면 그 답은 찾아질 수 없다. 그 대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환상(fantasy)이며 ($<>o)는 라캉의 환상공식이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이 마지막 완성된 욕망의 그래프이다.



    완성된 그래프(Zizek Slavoj 2009, 136)

    맨위 왼편의 S(O)에서 시작해보자. 처음에 리얼과 더 리얼에 대해 이야기한것을 상기하자. 더 리얼(the Real)은 절대 가질 수 없고 그것이 상징계로 들어오면 리얼(real)이 되는데 이 리얼은 충만함을 모두 잃어 버리고 결핍된 기표 (Signifier)로써 상징계를 지탱하는 누빔점(nodal point)가 된다고 하였다. 이 텅비어 있는 기표(Signifier)는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남근이며 아버지의 법이다. 상징계를 지탱하고 있는 아버지의 법은 금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언제나 충만하지 못한 결핍의 상태이므로 그 금지를 어기려는 의도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라깡은 향유(Jouissance)라고 부른다. 애초에 충만했던 더 리얼(the Real)이 리얼(real)이 되면서 그 충만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향유(쥬이상스)는 그 충만성을 찾는 인간의 또 따른 욕망 운동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비어있는 대상 a(object a)를 찾아 계속운동하여 다시금 $<>D에 다다른다. 여기서 D는 상징적 요구(Symbolic demand)를 말한다. (ZizekSlavoj 2009, 138) 주체에게 요구된 상징적 요구를 뚫고 주체의 욕망의 그래프에 귀속되지 않은채 거세된 결과를 낳는 향유의 운동은 주체에게 더 리얼(the Real)에 대해 끊임없이 속삭이고 상징계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주체에게 끊임없이 알려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판타지이다. 주체를 다시 불안하지만 텅비어있는 S(O)에 귀속시켜 주는 것이 바로 라깡의 판타지 공식인 $<>o이다. 바로 주체와 상상적 타자가 결합되는 곳이다. 바로 이 판타지가 대타자(O)의 결핍을 매워주고 리얼(real)의 결핍을 매워주고 향유에 의해 나타나는 충격을 감싸준다. 중요한 것은 이 판타지야 말로 이 그래프의 중심이며 불안한 주체를 안심시켜 다시금 상징계에 머물게하고 상징계의 기표 [s(O)] 에 안전하게 안착하게 한다. 바로 이 판타지적 효과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이론을 뽑아내는데 이는 다음 웹진에서 다룰것이다. 판타지에 대하여 지젝은 ‘불안의 종교’인 유대교에 반해,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바로 이 환상 효과를 사용하여 주체의 불안을 없애고 안정화 시켰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아버지 신의 사랑을 확증함으로써 주체의 불안을 사랑으로 채운다. 즉, 대타자가 자신을 내어줌으로 주체의 비어있는 불안과 욕망을 채워주는데 그 순간에 대타자의 빈 공간또한 이미 주체 안으로 들어왔기에 해결되는 것이다. (ZizekSlavoj 2009, 130) 이를 지젝은 정확하게 하나의 판타지라고 보았고 그 판타지가 작동함으로써 비어있는 대타자(O)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상 짧게 살펴본 지젝의 욕망의 도식을 필자는 ‘만능 도식’이라고 부르는데, 지젝의 저서에서 애매한 부분을 만날때는 이 도식을 상기하면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음 웹진에서는 이 도식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이해하고 어떻게 맑스와 헤겔을 통해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을 살펴보자.



<참고문헌> 

이경재. 욥과 케보이.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9. 

Zizek Slavoj.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New York : Verso,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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